15. 군주민수 (4)
중군(中軍) 진영 세워진 언덕 위에서, 이윤경은 횃불로 가득 메워진 조읍포와, 그 기이한 노랫말 가락 따라 노 저어 나아오는 조운선을 바라보았다.
삼남에 비하면 싣고 나르는 곡식이 훨씬 적기에, 북도의 조운선은 훨씬 작고 갸름하였다. 그러니 이렇게 큼직한 나룻배처럼 쓸 수도 있는 것일 터.
‘과연 범상한 도적은 아니렷다.’
곧 배가 이쪽 강안에 닿고, 미리 영 내려둔 대로 별군은 흩어져 달아나는 시늉을 하였다.
그리고 뱃전에서 사다리 내려오고, 저 의민당의 적도일 자들이 간혹 사다리 타고, 또 간혹 그대로 뛰어내려 강둑에 올랐다.
“별군은 강가에서 모두 물러났습니다, 토포사 영감.”
이정이 달려와 군례 올리고 고했다.
“알겠네. 저쪽의 수효는 얼마나 되던가? 여기서는 확실히 보이지 않네그려.”
“한 척에 족히 일백은 탈 수 있었을 듯합니다.”
경황이 없어 정확히 헤아릴 수는 없었다. 허나 아직도 저쪽 강 건너편에 횃불 그득하고 노랫소리 끊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저들의 수효가 적지 않음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열 척이니, 총 일천이 되겠군. 흠.”
곧 배에서 모두 내린 의민당 무리가 나름대로 정연한 대오를 갖추었다.
밤바람 타고 외치는 소리가 이윤경 곁까지 들려왔다.
“똑바로 서라!”
“방패! 방패!”
내리는 즉시 이쪽 진영을 향해 달려오리라 짐작했건만, 지금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니 오히려 방어를 굳히는 듯하였다.
하기야, 애초에 이윤경 생각대로 저들이 밤을 틈타 급습하려 했더라면, 저처럼 요란벅적하게 소란 피워가며 건너오지는 않았을 터.
“진법(陳法)은 우스우나, 기세가 만만치 않군그래.”
저들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이 새삼 아쉬워졌다.
그저 단순한 도적이라면 이렇게 정면으로 싸움을 걸어오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달려드는 백성의 무리라고 하기에는, 앞서 들려왔던 그 ‘군주민수(君舟民水)’의 섬뜩한 노래가 너무나 마음에 걸렸다.
배가 없어도 물은 물일 뿐이라니. 이윤경은 물론이요 그 어떤 선비도 품을 엄두조차 쉬이 못 낼 생각이었다. 차라리 무슨 요망한 도참(圖讖)의 설이라도 노랫말에 담았다면 모르겠으나, 그런 오해의 여지가 없을 만큼 명료한 노랫말이었다.
그들은 정말로 나라를 뒤엎고자 일어난 자들이었다. 임금을 바꾸고, 신하를 갈아엎는 것이 아니라, 정녕 나라를 뒤바꾸고자 하는, 어찌 보면 무섭고, 또 한편으로는 선비로서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 그런 자들. 나라가 열린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너무나 아쉬웠다.
“이럴 줄 알았다면 조금 더 늦게 물러나라 했을 걸 그랬군. 지금 얼추 보니, 저들은 군졸이 아니라 그저 농기구 들고 나온 백성들인 듯한데, 또 그런 것 치고는 기세도 그렇고, 나름대로 진영을 갖추려 한단 말이지.”
그사이 넘어온 이들은 자리 잡고서 또 저들끼리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엇, 토포사 영감, 보십시오! 배가!”
“허... 배수진(背水陣)인가...”
타고 온 무리 수백 – 어째 일천은 채 안 되는 듯하였다 – 을 모두 내려놓자마자 조운선은 뒤로 빠지기 시작했다.
무리 가운데서 당황하는 기색이 보일 법도 한데, 오히려 더욱 우렁차게 고래고래 소리치듯 노래를 부른다.
“이 나라 대조선국 누가 모여 만들었나?
열성조(列聖朝) 성덕인들 우리 없이 이뤘을까!”
그 무엄한 노랫말에, 이윤경 옆을 지키는 다른 무관들의 얼굴이 굳었다.
“허, 참으로 기이한 무리 아닌가.”
“저들이 이만큼 넘어왔는데 그 기세가 이와 같으니, 반드시 적괴가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당장 효시(嚆矢)를 쏘아 뒷산에 매복한 마병(馬兵)들을 끌어모으시지요! 비록 밤이 어두워 치사(馳射, 달리면서 쏨)는 불가하나, 빠르게 달려와 단번에 화살을 쏘면 저들 오합지졸은 반드시 부서질 것입니다.”
“저들은 그저 어리석은 농군들이니, 고성산에 있는 아군 삼천이 나설 것도 없이 지금 중군에 있는 군사만으로도 깨뜨릴 수 있습니다! 밤이 가기 전에 모두 물고기밥으로 만들어버리겠습니다. 당장 명을 내려주십시오!”
그러나 이윤경은 저들 ‘오합지졸’이 배수진을 치고 있다는 데 더욱 경탄할 뿐이었다. 당장 관군이 들이치면 빠져나갈 길이 없는데, 무엇을 믿고 저리 힘차게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말인가?
지방의 군정이 쇠잔해진 지 오래임을 아는 이윤경이다. 지금 조선국에서 아무리 군사를 모은다 한들, 나라를 위해 목숨 던지라 하면 열에 아홉은 나몰라라 도망칠 것임을 안다.
헌데 저들은 기껏해야 농민의 무리인데, 대체 임거정과 의민당이 그들에게 무엇을 주었고, 또 무엇을 말했기에 저처럼 죽음을 감수하고 나아왔다는 말인가?
“자네 말마따나 저들이 강변을 벗어나지 않으니, 마병으로 제압하려 한다면 오히려 큰 곤란함을 겪을 수도 있네. 그쪽에는 내 따로 명을 전할 것이니, 그대들은 우선 방심하지 말고 계속 지켜보고 있게나.
배 비장은 우선 중군에 딸린 경군 오백을 이끌고 저들을 상대하게. 단, 파진(破陣)할 각오로 달려들지는 말고, 옆에서 변죽을 울리며 붙잡아놓으면 이로 족할 것이야.”
“허나 아무리 도적의 무리라 하더라도 중군에 남은 병사가 오백뿐이라면 자칫 위태로운 지경에 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명을 내려, 고성산의 삼천 병력 중 일천을 중군으로 끌어올 것일세. 적이 무슨 계책을 꾸미고 있을지 알 수 없으니, 아직 이천은 남겨둠이 마땅할 것이야.”
“예, 영감.”
그러나 배 비장이 떠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윤경은 생각을 바꾸어야 했다.
“그래도 조금은 흔들릴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로군.”
배 비장의 오백 군세가 어찌 싸우고 있는지 확인하고 온 이정이 자신이 본 바를 고하니, 이윤경이 담담히 말했다.
고함 소리와 일렁이는 횃불에 묻혀 잘 보이지는 않지만, 의외로 의민당이 능숙하게 관군을 상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사용(副司勇)쯤 될 법한 군교 한둘이 기선을 잡겠다며 달려들었다가, 가래나 올가미 따위에 붙잡혀 안쪽으로 끌려들어가서는 살아 나오지 못했다.
꺽정이가 저들을 어찌 조련했는지 알지 못하는 이윤경으로서는, 참으로 경악스러운 전법이었다.
저리 싸운다면 분명 이길 수는 없다. 그저 앞으로 나오는 자 한둘만 붙잡아 죽이는 식으로는, 붙잡고 버틸 수는 있어도 결국 더 강한 힘으로 일시에 들이치면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지지도 않는다는 뜻이었다. 나라의 녹을 먹으면서 그에 맞는 값어치하는 이가 드문 작금의 조선군에서는, 저렇게 나름대로 재주 있는 자들만 골라내어 죽이면 나머지는 기가 죽어 아무 것도 못하는 것이다.
“적의 저항이 거센 듯합니다. 비록 진법은 어설프지만, 대신 능숙한 도적 하나가 농군 열을 이끄는 식이라...”
“이리 되면 저들 기세만 올려주는 격일세. 병력을 물려야 하겠군.”
그때였다.
“영감! 조운선이 다시 옵니다!”
반대편 조읍포에 닿은 조운선이 다시 이쪽 강안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저쪽에도 일천이 실려 있다면, 관군 하나가 도적 넷을 상대해야 하는 것이다.
“당장 퇴군(退軍)을 명하게! 지금 바로!”
이정이 돌아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시 숨 헐떡이며 달려나갔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운선이 당도하니 다시 거기서 횃불과 농기구 든 무리가 우르르 내렸다.
“허어, 저게 끝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대체 임거정 그자는 무슨 작자이기에...”
그런데 갑자기 주변이 부산해지며, 여기저기 사람이 치달리는 것이 이윤경 눈에 들어왔다.
“그 창 거두어라! 우리도 관군이다!”
“활 내려! 같은 편이다!”
어설프게나마 ‘진문(陣門)’이라고 갖추어둔 곳 여기저기서 소란이 일었다.
아직 곁에 남아 있던 군관 하나를 시켜,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오라 하니 곧 호통과 함께 소란이 잠시 멎었다.
군관이 돌아올 때는 옆에 일행이 두엇 붙어 있었다.
“토포사 영감, 이들은 며칠 전 붙잡힌 경군이라 합니다. 개중 군관이라는 자가 하나 있어 데려왔습니다.”
공을 탐낸 군관 신희를 따라 섣불리 배천으로 쳐들어갔던 경군이 귀양치 싸움에서 패전할 때, 적잖은 경군이 붙잡혔다.
그러나 도적들은 그들을 따로 (과하게) 해치지 않고 그저 창고에 가두어두었다가, 오늘 밤 난데없이 끌어내 이곳으로 데려와 풀어주었다는 것이었다. 무기를 빼앗긴 것을 제하면 복장도 그대로요, 군졸들 중 여기저기 부르튼 자들이 있을지언정 대체로 멀쩡히 살아있는 듯하였으므로 그 말이 틀리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 자네는 무슨 벼슬을 하는 누구인가?”
이윤경이 함께 따라온, 붙잡혔다 풀려났다는 군관에게 물었다.
“이 사람은...”
그때, 이정이 멋모르고 걸어 올라왔다.
“토포사 영감! 오백 중 살아남은 자들을 추스려 철군하는 중입니다. 적도는 추격하지 않고 강안에 남아 있습니다.,, 엇?”
이윤경에게 선객 있음을 모르고서 보고하는 이정이었는데, 옆에 엉뚱한 사람 있음을 뒤늦게 깨닫고 고개 돌려 선객의 낯을 들여다보고는 곧장 굳었다.
“임 처사?”
“하, 여기서 다 만나네. 재수가 없으려니.”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배천에서 왔다는 군관의 모습이 사라지는 듯 하더니 옆의 다른 군관은 어깻죽지에서 피 흘리며 쓰러지고, 이정은 주먹에 제대로 얻어맞고는 땅에 쓰러졌다.
그리고 어느새 이윤경 옆에는 그 ‘군관’ 하나만 남았다.
“자네가 임거정이로군.”
“그렇소. 임자 목 따러 왔소이다.”
“하하, 그래. 그 정도 패기는 되어야 그런 무엄한 노래도 지어 부를 수 있겠지. 허나 여기서 본관의 목을 벤다 한들 자네가 무사히 돌아갈 수 있겠는가?”
여기서 목소리 키워 ‘게 누구 없느냐’ 라고 하면 피차간 좋을 일 없음을 아는 이윤경이었다. 허나 암만 그렇다 한들 저리도 태평하게 답을 하니, 과연 여간내기 담력은 아니었다.
“못 돌아갈 건 또 뭐요?”
“글쎄, 자네도 군세를 더 안쪽으로 들이밀지 않은 것을 보니 짐작한 모양인데, 저기 뒷산에 삼천 관군이 내 명을 기다리고 있지.”
“하! 삼천 관군이라. 임자 성정에 지금쯤이면 개중 한 천이나 천오백은 중군으로 불러왔어야 하겠지. 사태가 뜻대로 되지 않으니 모든 경우에 대비한답시고 말이오. 헌데 궁금하지 않소? 왜 그 원군이 오지 않고 있는가?”
뜻밖의 비웃음에 이윤경의 침착한 얼굴이 마침내 깨졌다.
“무어라?”
“우리 의민당 졸개들이 경군에 비길 바는 못 된다 하더라도, 적어도 이 일대 지리는 눈 감고도 알고 있소. 나리가 진 친 이 언덕에서 고성산으로 가는 길목이 어디어디인지, 그리고 사람이 숨을 만한 갈대밭은 그 길목의 어디쯤에 있는지, 다 알고 있지.”
꺽정이는 자신이 전생의 을묘년 왜변 때 알았던 이윤경이라면, 반드시 비범한 계책을 내려 할 것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조선국 군관들 중 그런 비범한 계책을 스스로 알아채고 수행할 만한 이가 얼마 되지 않으므로, 결국 일일이 사람을 보내어 구구절절한 말로써 설명할 수밖에 없을 터.
“처음 배 댈 때 그렇게 소란을 떨었던 까닭이 무엇이었겠소? 검은 옷 입은 우리 당원들이 그런 길목에 숨어들 수 있도록 눈길을 끈 것이지.
영감이 얼마나 명을 잘 내렸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명 받들어 달려가던 사람과 말 모두 지금은 고혼 된 지 오래일 테요.”
그 말 듣고 이윤경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 겉으로 말은 못하여도, 지략이라면 결코 부족하지 않다 여긴 자신이 어쩌다 이렇게 당하게 되었는가?
그러나 그리 오래 끌 수는 없었다. 아무리 이윤경 그라 한들 목에 겨누어진 칼날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으므로.
“그래, 잘 했네. 보기 좋게 당했군그래. 허나 자네가 아직껏 내 목을 치지 않은 까닭은 따로 있겠지?”
“뭐, 이미 독 안에 든 쥐 꼴인데, 내 마음대로 하는 것 아니겠소?”
“허나 만사가 자네 뜻대로만 되리라고 착각하면 아니 되네. 애초에 이 군중에서 자네들의 급습을 당해줄 요량으로 계책을 마련하였으니. 이렇게 영이 전해지지 않을 때에 대비한 바도 없지 않지. 당장 효시 한 발이면 삼천 군세가 자네들을 덮칠 것이야.”
“그건 나리께서 살아서 효시를 쏘라고 외칠 수 있을 때에나 가한 일 아니겠소?”
“내 죽기 전에 그 한 마디는 못하겠는가?”
“뭐, 그러면 해 보시오. 삼천이고 얼마고, 우리 쪽 병력이 더 많으면 족히 이길 수 있는 법.”
그 말 마치기 무섭게, 어느새 반대편 조읍포로 가 있던 조운선이 다시 이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
“강 건너편에는 아직 우리 무리가 수천은 더 있소.”
“그러면 더욱 내가 죽음을 감수하고 지금이라도 병력을 움직여야 하겠군그래.”
“지금 넘어온 우리 이천 병력도 ‘병력’이라 말하기엔 부족함이 없지 않으나, 저렇게 배수진 치고 있으면 그리 호락호락하게 당하지는 않을 거요. 당장 지금 들이쳐도 그리할진대, 이렇게 계속 넘어온다면 어찌 되겠소?
더구나 내가 한신에 비할 만한 정도는 되지 않아도, 용력 하나는 항우 뺨친다 자부하거든. 서초패왕은 삼만으로 오십만을 죽여 수수(睢水) 강물도 막았다는데, 이천으로 삼천은 어찌 못 잡아 죽일까?”
무식한 도적인 줄 알았건만 뜻밖의 고사를 오기 넘치게 읊으니, 이윤경이 저도 모르는 사이 미소를 지었다. 고사를 논하기 좋아하는 선비라면 어쩔 수 없이 가지는 병폐였다.
“허나 항우의 삼만은 제나라를 쳐 없앤 강병이었고, 지금 자네의 이천은 그보다는 한참 못하지. 설령 자네 거느린 무리가 모두 건너온다 한들, 우리 삼사천을 모두 패퇴시키려면, 자네 쪽도 족히 오백에서 천은 죽어야 할 것이야.
그것이 두려워서 이렇게 나를 살려두고 있는 것 아닌가?”
“하, 젠장할.”
말을 나누면 나눌수록 이윤경에게 놀아나는 듯하여 꺽정이가 끝내 욕지거리를 입에 담았다.
반면 이윤경은 정말로 아군이 죽어나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듯한 꺽정이 반응을 보고, 범상한 도적이 아님을 확신하게 되었다.
“자, 그러니 얼른 자네 뜻을 밝히게나. 아직까지 이 사람 명줄을 거두지 않고 있는 연유가 무엇인가. 혹 청하려는 바가 있다면, 내 나라에 죄 아니 되는 한에서 들어줌세.”
“아니, 나라의 명 받들어 오신 토포사 나리께서 도적의 청을 들어주신다니, 이 무슨 일이오?”
꺽정이가 비꼬았다.
“진지하게 하는 말일세.
만일 그대가 정녕 더러운 도적이었다면, 좀도둑의 무리거나, 천박한 역신(逆臣)에 빌붙는 자였다면, 내 차라리 죽음을 구할지언정 이렇게 자네와 담화 나누고 있지는 않을 것이야.”
“허, 내가 도적 아니면 무어란 말이오? 나리 눈이 썩 좋지는 않은 듯한데.”
“그 노래. 자네가 지은 것인가?”
“노래? 아, 주수가(舟水歌) 말씀이시구려. 뭐, 내가 지은 건 아니지만, 우리 당 사람들끼리 모여서 지은 건 맞소.”
“사소한 도적은 지어서 부를 수 없는 노래일세. 어쩌면 천하를 크게 어지럽힐 노래일 수도 있고, 어쩌면 반대로 천하로 하여금 크게 다스려지게 할 방도가 될 노래일 수도 있지. 나는 그대들 당이 어디까지 가는지 보고 싶네.”
“그리고 이왕이면 가는 길에 윤원형이 뒷통수도 제대로 갈겨주기를 바랄 테고.”
“하, 역시 사람 허를 찌르는 면이 있군그래.
내 나라에서 받은 명은, 그대들 의민당이 더 뻗어나가지 못하도록 요해를 점거하고 지키는 것이야. 금일 자네들 군세를 보니, 관군 오천으로도 여전히 부족함을 알게 되었네. 내 자네 바람대로, 자네들을 그대로 돌려보내고, 병력도 조금 물려서 우봉과 신계, 배천만 지키고 있겠네.
대신 자네도 다시 깊게 생각해보게. 자네들이 바라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아직 다 알지 못하나, 이렇게 피를 흘려야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테야. 자네들이 비루한 도적이나 역적의 무리가 아니라면, 굳이 지금 이런 외도(外道) 택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내 시일을 줄 터이니, 부디 그동안 재차 숙고하여 투항하도록 하게나.”
“군사를 움직이지 않겠다 하는 것은 내 잘 받겠소.”
꺽정이가 마침내 칼을 거두었다.
“허나 투항은 없소. 투항은 그대들이 우리에게 해야지.
대신 내 다른 청을 덧붙이겠소. 조정에 글을 올리시오. 오천으로는 택도 없으니, 오만을 보내야 할 것이라고.”
“패기가 과하면 이를 교만이라 부른다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하다가 배신당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부르지.
우리가 무엇을 원하든, 지금의 조정은 들어주지 않을 것이오. 나리도 아시지 않소? 그러니 잔말 말고 병력 더 보내라 글을 전하시오. 오늘은 우리도 계책에 부족함이 있어 모두 죽이지 못하고 가지만, 다음번에 올 때는 제대로 맞이해드릴 테니.”
얻어맞고 쓰러진 이정이 ‘으으’ 신음을 내며 슬슬 일어나려 하였다.
“알겠네. 그러면 이만 물러가보도록 하지.”
“그리하시오.”
말로만 들으면, 역적 토벌하러 온 토포사와 그 역적 수괴의 대화라 아무도 짐작하지 못할 말투였다. 그 아우에 그 형이라 생각하며, 꺽정이는 몸을 날렸다.
“중군은 들어라! 우봉 읍내로 철군한다!”
오늘 저들의 일을 잘 해준 흑의군 부하들을 수습하러, 고성산 가는 갈대밭 쪽으로 달려가는 꺽정이 귀에, 군령 소리가 들려왔다.
“철군한다!”
“철군!”
이리하여 우봉과 강음 사이에서 강을 사이에 두고 한판 붙은 싸움은 끝났다. 그 난리를 친 것에 비하면, 결국 강 건너와 콧잔등 한 대 후려갈기고 돌아간 것과 진배없었다.
결국 실제로 맞붙은 것은 강가에서 교전한 경군 오백과 의민당 이천이 전부였는데, 그 오백 중 서른이 죽었고, 그 서른 중 열여섯이 군관이었다. 그러니 굳이 따진다면 패한 싸움이 맞았다.
그러나 이윤경은 설욕하겠다며 날뛰는 대신, 곧이곧대로 약속을 지켰다. 굳이 꺽정이와 약조한 것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날 밤 수차례나 오가던 조운선의 행렬을 돌이켜보면 의민당 세력이 오천으로 진압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님은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러므로 조정에 더 많은 병력을 청하고서 지금 장악할 수 있는 군현만 철저히 지킨다는 방침을 세웠는데, 관군의 그 누구도 이윤경이 군사 물린 것을 두고 비난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한 발 떨어져 싸움을 조망하던 고성산의 군관들이야말로, 조읍포가 가득 횃불로 메워지고 조운선이 계속 오가는 것을 보면서 하얗게 질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윤경이 약조한 대로 더 진군하지 않고, 예성강 따라 주요한 거점만 지킨다 하였을 때 안도의 한숨 내쉬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싸움이 끝난 뒤에 의민당 쪽으로 간자(間者) 들여보낸 이윤경은 뒤늦게야 조운선의 절반은 비어 있었고, 세 번째 오갈 때부터는 완전히 비어 있었음을 깨닫고 혀를 찼지만, 돌이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꺽정이도, 이윤경도 예측 못하였던 것이 있었으니, 바로 그날 밤 싸움을 구경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갑자기 오밤중에 천지 요동치듯 시끄러운 노랫소리와 고함소리,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울리니, 놀란 우봉 사람들은 집 밖으로 나와, 가깝게는 말여울쪽 둔덕까지 올라와 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귀에도 노랫말이 들어와 박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엄한 노래는 그 노래 지은 예인(藝人)의 본고장 개성에 닿고, 거기서 다시 임진강을 건너 퍼지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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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선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중형 함선으로, 조선 초기 맹선(猛船)이라는 군함으로 전용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지역별로 다양한 형태의 조운선이 운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대표적으로 함경도 일대의 해안을 다니며 함흥으로 세곡을 모으는 기능을 수행한 북조선(北漕船)이 있지요. 우리에게 익숙한 조운선은 삼남 일대의 세곡을 거두어 한양으로 올리는 데 쓰였기에 그 크기가 작지 않았는데, 작중에 등장한 예성강에서 운용하는 조운선은 그보다는 훨씬 작았을 것입니다. 이전에 서술한 것처럼, 예성강 수계에서 나오는 세곡의 양은 그리 많지 않았고, 재령평야가 개간되면서 황해도 미곡생산의 중심도 자연스럽게 재령강-대동강 수계로 옮겨졌기 때문이지요.
이윤경은 을묘왜변에서 여러모로 훌륭한 활약을 보였는데, 기록에 남은 바를 보면 대체로 기강을 바르게 하고 사기를 북돋는 등, 정석에 가까운 지휘를 펼쳤습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간혹 공성계를 쓰고, 또 특공대를 편성해 야습을 가하는 등, 단순한 문관이라고 보기에는 나름대로 무재가 있는 모습을 보였지요. 작중에 언급된 이윤경의 지휘 스타일은 이를 반영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