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47화 (47/259)

16.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여긴다 (1)

의민당이 들고 일어난 지도 벌써 적잖이 시일이 흘러, 가을걷이가 목전에 다가왔다.

조읍포 건너가 한바탕 싸우고 돌아온 뒤 꺽정이는 쉴 틈이 없었다.

이윤경이 약조한 것은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이지, 아예 의민당 진압을 포기하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당장 절반 넘게 함락된 배천에서도, 벌써 벽란도와 그 건너편에서 쪽배를 새로 만드는가 하면 여기저기서 큼직한 배를 끌어오고 있다 하였다.

다음번에 조정이 토벌을 시도할 때, 저 배들이 강음이나 평산으로 건너오는 데 쓰일 것이 명백하였다.

애초에 그 자리에서 이윤경을 죽이지 못한 것도, 전생에 그 사람 쓸만함을 알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만에 하나 지금 이천 병력 중 사상자 많이 생기면 곤란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유식한 말로 자강불식(自强不息) 넉 자만이 힘쓸 바였다. 다음번에는 정말로 힘으로써 압도함으로써, 허튼소리 나오지 않게 해야 할 터.

재령과 봉산의 옛 농장에서 동원한 옛 노복들 중 이번에 싸움 겪은 이들은 고루 섞어 저의 동무들을 가르치게 하고, 개중 좀 솜씨 있다 싶은 이들은 흑의군으로 거두어들인 뒤 더욱 성심성의껏 – 즉 죽을 맛 나도록 – 조련케 하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난번 싸움 이래로 의민당 깃발 아래서 병장 들고자 모여드는 이가 적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모양새로 보아서는 의민당이 관군을 농락한 것이요, 실제로 그 군관 여럿을 죽이기도 하였으므로, 소문이 입에 입을 타고 퍼질 즈음에는 어느새 의민당의 대승으로 둔갑해 있었다.

그리하여 여기저기서 함께하겠다고 하는 이들이 늘었는데, 그렇다고 농사를 폐할 수는 없는 노릇. 대신 저들 마을 근처를 지키도록 하고 유사시에만 동원하기로 하였는데, 그 정도만 되어도 예성강 강가나 황주에서 봉산·서흥 넘어오는 길목 지키기는 족하였다.

그리하여 쓸 수 있는 병력이 꽤 늘었는데, 이 기세를 타고서 꺽정이는 눈엣가시였던 황해도의 남은 서쪽 절반을 평정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언제까지 나라에서 바치라 하면 고대로 바칠 심산이오? 작작 걷어가라고 이번에 제대로 혼쭐을 내주어야 관도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할 것이외다!”

“와아아! 임 당수! 임 당수!”

“의민당! 의민당!”

“자, 관아에서 일하던 향리들은 이쪽으로 모이시오!”

“혹시 이 고을에 이름난 선비가 계신다면 내게 알려주시오!”

그 ‘평정’이란 대개 이런 식이었다.

일천여 명 정도가 우르르 읍내로 몰려들어가면, 그 수령은 적대하는 시늉을 잠깐 하다가 도망치거나, 그것도 못하여 – 주로 챙겨갈 게 많은 이들이 그러했다 – 붙잡혀 꺽정이 앞에 꿇어 앉혀지곤 하였다.

그리고 그런 소란이 있으면 자연스레 사람들이 모여들기 마련. 그 자리에서 꺽정이가 의민당 봉기한 뜻이 무엇이며 함께하면 어떤 것이 좋을 터이다 말해주고, 그 다음은 이지함과 서림이 맡아서 정리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고을 하나에 하루이틀씩 하여, 안악·신천·문화가 연달아 떨어졌다.

“당수, 급보입니다! 은율현감이 풍천과 장연 군사를 대동하고 구월산 구아현(舊我峴) 고개를 지키고 있답니다!”

붙잡힌 현감은 대충 가두어놓고, 그 대신 문화현 동헌에 들어와 앉아있던 꺽정이에게, 최만복이가 달려와 알렸다.

“하, 잘 되었다.”

“소인네도 그리 생각하고 있었습죠. 흐흐. 한 번에 해치우는 것이 아무래도 편하지 않겠습니까요.”

경군과 한 번 칼 맞대보았다고 최만복이는 꽤 기고만장해져 있었다. 그러나 이곳 군현의 군정(軍政)이 얼마나 엉망일지 생각해보면, 나름 이유 있는 오만함이었다.

하물며 전생에서 산적으로 잔뼈 굵은 사람이 이끄는 무리를 산속에서, 그것도 눈 감고도 훤히 보이는 구월산에서 대적한다는 우(愚)를 범했음에랴.

“어쨌든 세 고을 군사를 모았다면 족히 오백은 넘을 것이요, 어쩌면 일천을 넘길지도 모른다. 대비를 아니 할 수는 없지.”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우선 미리 흔들어놓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밤이랑 다른 발 빠른 놈들 데리고, 놈들 진 갖춘 곳에 가서 우리네 구호 외치게 하거라. 아, 놈들 사이에 어쩌면 함께 끌려나온 수군도 있을지 모르니, 의민당 따르면 수군도 그 역(役)을 풀어준다고 외치고.”

“예, 당수님.”

최만복은 고개 꾸벅하고 나가고, 얼추 바깥 정리를 마친 이지함과 서림이 들어왔다.

“얘기들 들으셨소? 은율현감이 구월산 고갯길 지키고 있다 하오. 내일모레 중으로 격파하고 그대로 은율로 넘어가면 될 듯하오.”

그런데 서림이가 엉뚱한 말을 덧붙였다.

“은율현감이라면 여기저기 패악질깨나 하고 다녀서 원성 자자한 자입니다. 저의 현 한 군데서만 사람 괴롭게 하는 걸 넘어서, 그 수령이 좀 모자란 이곳 문화현 같은 데까지 들어와 행패를 부렸다지요.

아마 여기서 초모한 백성들 중에도 은율현감 치러 간다고 하면 따를 자들이 적지 않을 듯한데, 이야기 퍼뜨려 사람 모음은 어떻겠습니까?”

꺽정이가 우봉에서 이윤경의 목을 거의 벨 뻔하고, 관군 오천을 농락하고서 멀쩡히 돌아온 이래 서림은 은근슬쩍 꺽정이 앞에서 공대를 하기 시작했다. 심복(心服)한 것도 있겠지만, 정말 이 임 처사가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도 있음을 향리의 본능으로 직감한 것도 있을 테다.

“아니, 가을걷이가 코앞인데, 사람이 그렇게 많이 모였소?”

이지함이 놀라 물었는데, 서림이가 저의 품에서 책 한 권을 꺼내보였다.

“오늘 하루만 해도 장정이 사백 넘게 이름을 적고 갔습니다. 물론 가을걷이 끝나고 모이기로 약조를 했지만, 말씀드린 것처럼 은율현감 때려잡으러 구월산까지만 다녀오는 정도라면 다들 쉬이 모일 것입니다.”

“허... 문화현이 그리 큰 현도 아닌데, 하루에 사백이라. 이리 많이 모일 줄은 몰랐소.”

“아무래도 우리가 새로 거둔 고을에서는 금년 세곡을 아예 걷지 않겠다 선포한 게 컸을 겝니다.”

“그 정도란 말이오?”

“한 해 거두어 겨우 한 해 먹고사는 게 요즘 백성들 살림살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한 해라도 세곡 아니 거둔다 하면, 그것이 매우 큽니다.”

황해도의 서쪽 고을들은 대체로 산과 산, 그리고 바다뿐이라 소출은 적고 민호도 드문데, 그렇다고 수취하는 바가 그만큼 적으냐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어찌 이 정도일 수 있는가. 서림이와 꺽정이야 관에 대해 큰 기대를 품지 않으므로 그러려니 하지만, 이지함으로서는 여전히 그것이 충격이었다.

“어디 보자. 그러면 은율과 신천까지 합치면 얼추 삼천은 늘어났겠군. 내일모레 싸움에는 문화 장정들만 더 데려가고, 은율·신천 두 고을 장정들은 우선 그대로 두도록 합시다.”

“모으는 길에 따로 조련은 아니 하시겠습니까?”

“어차피 한 번에 제대로 하는 것이 중하오. 농군들이야 지난번 우봉 싸움에서처럼 줄 서서 버티다가 명에 따라 물러나고 나아가는 것만 배우면 되니까. 백로(白露) 지나고 논밭 일이 조금 한산해질 때, 그때 다 모아서 한 번에 가르치겠소.”

지난번 싸움에서 밝혀진 것 중 하나는, 의외로 농기구 중에 병장기로 쓸만한 것이 꽤 있다는 사실이었다.

관군이라면 모를까, 의민당 패거리들은 농군들 사이에 군교(하급 장교) 격으로 섞인 흑의군들이 언제든 꺽정이에게 와서 건의할 수 있었으므로 그런 사실이 금방 알려지고 또 퍼졌다.

예컨대 도리깨가 갑사(甲士)들 때려잡는데 탁월하다는 것도 그렇게 알려지게 되었다.

싸움의 경험 부족하다는 것이야, 관군이든 이쪽이든 피차일반이요, 의기 드높기로는 원하는 것도, 또 패했을 때 잃을 것도 많은 의민당이 관군을 한참 앞선지 오래였다.

거기에 이제 정예함까지 조금 더해진다면, 기병이 부족하다는 것을 제하면 의민당의 농군들이 어지간한 관군만 못하지 않게 될 것이었다. 물론 이곳 황해도 안에서 싸울 때나 해당이 있는 얘기고, 작금 조선에서 관군보다 낫다는 것이 사실 그렇게까지 대단한 것도 아니기는 했다.

그렇게 서림이와 꺽정이가 구월산의 관군 치는 논의를 죽 주고받는데, 어째 앞서 문답 한 번 한 이후로 이지함은 조용하였다.

“... 하면 그렇게 준비토록 하겠습니다, 임 당수.”

“그리 하시오.”

서림이가 가볍게 고개 숙이고 동헌을 나선 뒤에도, 마루에 앉은 이지함은 가만히 하늘만 보고 있었다.

“사형?”

“어? 어. 꺽정아.”

“뭘 그리 깊게 생각하고 계시오?”

“아, 그것이... 계책이 하나 떠올라서 말이다. 너와 서 별감 말대로, 백성들이 고작 한 해 세곡 면해준다는 말에 의민당 따라 병장기 들겠노라 공언한다면, 그 반대도 성립하지 않겠느냐?”

“반대라 하면?”

“우리 대계 말이다. 올해가 가기 전에 결판을 내는 것. 그것을 위해서라면 저쪽도 나라의 모든 곡식을 끌어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의 대계가 노리는 다음 단계. 윤원형이 끌어모을 수 있는 모든 군세를 끌어모아 황해도에 밀어넣도록 만드는 것. 그것을 이지함이 거론하니, 꺽정이의 눈길도 사형에게 완전히 쏠렸다.

“그야 그러겠지.”

“헌데 그 곡식을 내어놓아야 하는 백성들 보기에는 어떻겠느냐?”

“괴롭겠지만, 별 수 있겠소? 나라의 위세가 워낙 무서우니 늘 그렇듯 고개 숙이고서 바치는 수밖에. 우리 의민당 같은 무리가 그쪽에 없는 것을 탓해야지, 뭐 어쩌겠소.”

“바로 그것이다. 우리 의민당이 이토록 선전하고 있음을 널리 알린다면, 백성들도 고분고분히 있지만은 않겠지. 그 말을 전국에 퍼뜨릴 방책이 있을 법도 한데...”

“오, 거 잘 되었구려. 얼른 마저 말해보시오.”

“내 듣기로, 지난번 우봉 싸움 이래로 우리 황 사저가 지은 노래가 강 건너편까지 퍼져나갔다더라. 그렇다면 우리네가 얼마나 잘 싸우고 있는지, 또 우리의 싸움이 어째서 정당한지, 그것까지 함께 퍼뜨린다면 반드시 효험이 있지 않겠느냐?”

물론 그리 된다면, 농군들이 겨우 흉년에 애써가며 거둔 곡식 빼앗기기를 거부하고 저들 나름대로 항거하려 한다면, 팔도의 남은 일곱 도에도 피가 흐르고야 말 것이다. 나라의 위엄은 크게 떨어질 것이요, 상하(上下)의 인화(人和)는 산산히 깨어지고야 말 터.

허나 이미 이지함은 의민당 봉기할 때 마음을 굳게 먹었으므로, 이런 계책을 내어놓으면서 여전히 가슴 한 편을 찔러오는 아픔을 힘껏 억눌렀다.

“이윤경 그 사람이 지난번 ‘화약’ 이후로 신계부터 멀리 수안(遂安)까지 군세 나누어 지키고 있소. 우리가 사람을 보내려 해도 금방 막히지 않겠소?”

“의민당 사람만 보낸다면 그럴지도 모르지. 허나 예로부터 관의 눈 닿는 곳 아래로 은밀히 다니면서 이익 취해 온 행상들이 있지 않으냐?”

“아!”

의민당 거병한 이후에도 여전히 봉산 장터에 행상 끊기지 않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이미 지난 삼 년 동안 평양에서 개성 오가는 이들은 봉산을 지나는 것이 완전히 굳어져 버렸다.

의민당이 점거한 곳 피해서 수안 쪽 산길로 빙 돌아가는 경로가 있기는 하였으나, 의민당이 크게 일어나면서 밀려난 산적들, 그리고 심산유곡의 터줏대감 산군(山君, 범)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러니 이문 남기기로 치면 여전히 봉산을 경유하는 쪽이 훨씬 남는 장사였다.

옛날처럼 대놓고 강음이나 우봉에서 강을 건널 수는 없었으나, 마침 가을이라 강물이 조금 줄어 신계 쪽으로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족히 걸어서 건널 만한 여울이 많이 있었다.

이윤경이 이를 알았더라면 어떻게 단속이라도 해보려 했겠지만, 그 아래에 있는 것은 일대 지리에 밝지 못한 경군이요, 다니는 것은 바로 그 지리에 해박한 상인들이므로 잡으려 작정한들 잡을 수 없을 것이었다.

“서 별감을 시켜, 지금껏 봉산 드나들던 상인들 중 의민당에게 동조하는 이들을 모아, 재화 적당히 들려주고는 여기저기 우리네 소식을 퍼뜨려달라 하면 족할 것이다. 여차하면 개중 의협심 있는 이들 가운데에 의민당 사람을 끼워넣을 수도 있고.”

“그러면 당장 서둘러야 하겠구려. 행상들이 팔도 도는 시일 생각하면, 가을걷이 끝날 때까지는 의민당 이야기가 각지에 퍼져야 할 테니.

삼남에 다 퍼지기는 어렵겠지만, 한 기호(畿湖)까지만 전해져도 쏠쏠하게 재미를 볼 듯하오.”

그렇게 지금 조선국 조정에서 역적이라 일컫는 두 사람 머릿속에서 참으로 흉참한 계책이 나와 곧 행해지니,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기저기 의민당 소식이 전해지게 되었다.

황해도 한 도가 통째로 들고 일어나, 이딴 식으로 할 것이라면 조정에 세곡 아니 바치고 우리끼리 살겠다 했다더라.

그들을 이끄는 것이 바로 의민당인데, 그저 백성들 수천이 모였을 뿐이건만 오천 관군이 속수무책으로 밀려나 지금은 꿈쩍도 못한다더라.

우봉 사는 사람들이 이미 사방팔방으로 그 흥겨운 노래와 함께 전하고 있던 사정이, 어느새 뼈대까지 갖추어 전국 군현에 전해지기 시작했다.

토포사 이윤경이 치계하기를, 우봉에서 강을 건너온 적을 맞이하여 일전 벌인 결과, 이쪽에서는 군관 수십이 상하였으나 결국 적도를 쫓아내었다 하였다.

공훈을 억지로 덧붙이지 않고 담담하게 관군이 일시 불리하였음을 인정하였고, 또 더불어 아뢰기를, 의민당의 세력이 이미 적(賊)보다는 적(敵)에 가깝다 하였다.

또한 이윤경 자신이 임거정과 만나 이야기 나누었음도 직고하였는데 – 군관 몇 명만 데리고 언덕에서 싸움의 형세 살피다가 곤란한 지경 처했다는 부끄러운 사실은 슬쩍 뺐다 – 거기에 적힌 임거정의 오만한 말이 조정을 뒤흔들었다.

“오천으로는 어림도 없으니, 오만 명은 이끌고 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더욱 논란이 된 것은, 이윤경이 덧붙인 제안이었다.

“... 신이 살피건대, 저 의민당은 비록 그 기세가 사납고 또 그 무엄함이 지극하기는 하나, 나라의 다스림이 올바르게 갖추어진다면 반드시 수그러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저들은 참람되이 지존(至尊)을 거론하지 않고, 다만 조정의 방책이 그릇됨만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 말이 한없이 거칠고 광패(狂傲)하나, 신이 그 임거정의 사람됨을 헤아린바 이는 그가 학문이 없고 어리석은 일개 필부이기 때문이며, 그 역심(逆心)은 깊지 않습니다.

바라옵건대 저들을 징치하기보다는 효유(曉諭)하여 스스로 병장을 내려놓게 하시옵소서. 임거정이 비록 흉포하나 그의 무리만은 지극히 아끼니, 나라 전체를 홀로 대적할 수 없음을 깨닫고 또 비로소 나라의 정사가 올바르게 될 것임을 살펴 알게 된다면 반드시 투항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사림에 속하는 삼사의 언관들은 곧장 그 말이 옳다고 찬동하고 나섰다. 의민당을 옹호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이 기회를 틈타 윤원형을 적대하기 위함이었다.

이윽고 황해도의 남은 서쪽 고을들이 연달아 적당의 손에 떨어지매, 은율현감은 군세 모아 대적하다 유시(流矢)에 맞아 절명하고, 기세 꺾인 다른 수령들은 도망치기에 급급하였다.

그리하여 내륙의 고을은 물론이고 풍천·장연까지 함락당하니, 황해도 한 도에 남은 곳이라곤 황주와 해주 두 곳, 그리고 예성강 서쪽의 몇 안 되는 군현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정의 여론은 여전히 의민당에게 초항(招降, 항복할 것을 권함)하자는 쪽에 가까웠다. 죽은 은율현감도 사실 죽은 권신 정언각(鄭彦慤)의 연줄을 타서 부임한 인물이라, 딱히 안타깝게 여기는 이도 없었다.

무엇보다 앞장서서 이윤경을 탄핵해야 할 윤원형과 그의 무리가 오히려 침묵을 지켰으므로, 사림의 기세는 한층 더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준경 또한 조심스레 그 형의 글을 끌어와 임거정을 조정에서 등용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형 이윤경의 안목을 믿기 때문이었다.

“신이 일찍이 임거정의 사람됨을 직접 살핀 바 있는데, 비록 어리석고 흉포하나 한 무리를 이끄는 기국(器局)만은 빼어났습니다. 그 무엄함은 마땅히 단죄하여야 하나, 어리석은 백성을 가르치지도 않고 벌함은 곧 버리는 것과 다름없다 하였습니다.

그 죄 주는 것을 유예하고, 관직을 제수하여 보국(報國)토록 하되 혹여 과실이 있다면 이전의 죄까지 함께 묻도록 하는 것이 상책이라 하겠습니다. 조송(趙宋, 송나라) 대에 방랍(方臘)이 난을 일으키자, 도적의 무리를 이끄는 송강(宋江)을 효유하여 그로 하여금 방랍을 무찌르게 하자는 헌책(獻策)이 있었으나 조정이 이를 무시하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송강과 방랍을 함께 벌하였으니, 그 소모된 민력(民力)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아조의 선대(先代, 중종을 말함)에도 도적 미륵(彌勒)·향산(香山)을 거두어 도적을 잡게 하였는데, 이들은 시세(時勢)의 유리함을 얻어 원종(原從, 원종공신)의 반열에 들었을 뿐이었습니다.

반면 임거정은 의민당을 이끌며 황해 한 도의 도적을 쓸어 없앤 공이 있고, 이로 말미암아 일찍이 조정에서 포장한 바도 있습니다. 지금 전국에 도적이 들끓는데, 임거정을 거두어 그로 하여금 포도(捕盜, 도적을 잡음)의 직임을 맡긴다면 어찌 공효가 없겠습니까?”

그러고도 윤원형은 조용하였다.

윤원형의 으뜸가는 사냥개로 올라선 진복창이 곧장 이준경을 헐뜯으려 하였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힐난을 멈추고 입을 닫았다.

윤원형 또한 그저 궁궐을 열심히 들락날락할 뿐, 임거정을 토벌하여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거나 임거정을 투항케 하자고 발의한 이윤경·이준경 형제를 탄핵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사림의 언관은 물론이요, 이준경도, 또 이준경과 어울리다 보니 어느새 윤원형보다는 이준경의 편에 살짝 가까워지고 있던 허자도 막연한 기대를 품기 시작했다.

윤원형이 궁궐을 드나든다면 이는 반드시 대비와 상의하기 위함일 것이다. 몇 해 전 의민당이 도적을 잡았다며 포상하자는 논의를 꺼낸 것도 윤원형이요, 같은 의민당이 풍성부원군 이기를 해치고 저의 집을 불태웠다고 고변한 것도 윤원형, 의민당이 역모 꾸몄다고 ‘밝힌’ 것도 윤원형이었다.

그러므로 이 사태에 대응하여 어떻게든 빠져나갈 방편 찾고자 대비와 한창 의논하는 것이리라.

비록 무엄한 것은 맞지만, 천하의 윤원형이 저리 벌벌 떨면서 궁궐만 하염없이 드나들도록 만들었으니 임거정이 과연 의적(義賊) 아니겠느냐 하는 어리석은 농담마저도 언관들 사이에 돌 무렵.

대비가 늘 그렇듯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발(簾)을 치고는 대신들을 인견(引見)할 때의 일이었다.

필시 임거정의 일을 두고 무언가 중차대한 결정이 있으리라 짐작한바 삼정승을 위시하여 모든 중신들이 입시(入侍)하였다.

대비가 굵직한 이들 모두 들어온 것을 살피고는, 판서들 사이에서 공손한 시늉하며 서 있는 동생 윤원형과 눈을 마주쳤다.

대비는 얼마 전 궁궐에서 만났을 때 윤원형이 말했던 것을 상기하였다. 오랜만에 찾아와 잠깐 얼굴만 비춘 정도였으나, 오고가는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였다.

‘근래 소위 의민당이 황해도에서 준동하고 있으니, 민심이 크게 놀랐습니다. 자칫 이를 빌미삼아 자전(慈殿)을 의심하는 여론이 일어날 수 있으니, 한 번쯤 철렴(撤簾)을 거론하시어 역으로 위엄을 보이심은 어떠할지요.’

간만에 찾아온 동생이 한다는 말이 저러하니 섭섭하게 여길 만도 하였으나, 틀린 말도 아니었다. 더구나 다른 곳도 아니고 내수사를 건드린 자들이 날뛰는데 진압은 못할망정 일리가 있다느니, 투항하여 나라에 도움 되도록 부리자느니 하는 말 나오는데 은근한 불만을 품고 있던 차.

그리하여 대비가 말을 꺼냈다.

“나는 본디 불민(不敏)한 사람이다. 불행히 두 대왕께서 연이어 승하하시어 부인의 몸으로 국정에 관여하게 되었으나, 어찌 이것을 아름답다 일컫겠는가? 그리하여 부득불 섭정을 하면서도 미안하고 안타깝게 여기기를 한숨도 그치지 아니하였다.

그로부터 오늘까지 재변이 이어지고, 마침내 근래에 없던 적변(賊變)까지 일어났으니, 이 어찌 나의 부덕에서 말미암은 것이 아니겠는가? 이에 내 성상께 귀정(歸政)하려는 마음을 품었으니, 대신들에게 이러한 뜻을 전하고자 금일의 인견(引見)을 있게 한 것이로다.”

말을 마치니 마침내 주상이 탑(榻, 걸상)에서 내려와 발 뒤에 있는 대비를 향해 말했다.

“소자는 본디 수양이 부족하고 학식은 없으니, 어찌 하루라도 더 자전의 보익(輔翼)을 청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갑작스럽게 이토록 귀정의 뜻을 밝히시니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국난을 당하여 이와 같이 크나큰 결단을 내리셨으니, 어찌 사양하는 것만을 아름답다 하겠습니까. 이에 그 간절한 마음을 헤아리고 종묘 사직의 대계를 위하여, 부끄럽고 어렵게 여기는 마음을 삼키고 자전의 뜻을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본디 이쯤에서 ‘명을 거두어주십시오.’ 하는 말로 끝나고, 대신들도 ‘거두어주소서!’ 복창해야 할 터인데, 그와는 반대되는 말이 나와버리니 한없이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사이 주상은 탑 위에 다시 올라앉고서는 말을 이었다.

“제신(諸臣)은 들으시오. 자전께서 전교하신 것과 같이, 지금의 적변은 그 흉참함이 전례가 없는 것이오.”

발 뒤의 대비가 체통을 잠시 잃고, 여기저기 대신들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대비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였다. 심지어 대비에게 철렴의 말을 꺼낼 것을 권하였던 윤원형마저도.

“본디 정희왕후(貞熹王后, 세조의 정비)께서도 두 선왕의 대에 걸쳐 일곱 해 동안 섭정을 하셨는데, 자전께서는 여섯 해를 채 채우지도 아니하시고 이처럼 큰 뜻을 보이셨소. 이를 받드는 것이 내게는 효(孝)요, 그대들에게는 충(忠)이니, 어찌 받들지 않을 수 있겠소?

바라건대 그대들은 마땅히 난적(亂賊)을 바로잡을 방도를 마련하여, 조속히 진압하여 조종의 평안을 이루어야 할 것이오.”

고개를 들지 않으면서도 주변을 살피는 것은, 처음 조정에서 사화가 시작된 이래 모든 중신들이 갖추어야 할 소양이었다.

명랑하게, 마치 누군가 미리 일러준 말을 읊는 듯한 말투로 임금이 의민당의 토벌을 재차 명하는 동안, 대전 안에 있는 이들은 임금 한 사람을 제하고 모두가 그런 숨막히는 탐색을 행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많이 식은땀 흘리는 사람은 바로 이준경이었다.

‘글렀구나!’

금상의 외척이라 할 수 있는 청송 심문은, 그 집안을 이끄는 이가 권세에 큰 욕심 없는 심연원인 고로 이러한 수를 부릴 리 없었다.

그렇다면 반드시, 저 윤원형의 수작일 테다. 그간 궁궐을 드나든 것은 대비를 보기 위함이 아니요, 자신이 재물로 포섭한 궁인들을 이용하여 금상을 뵙기 위함일 테다.

설령 대비의 귀에 그 사실이 알려졌을지라도, 아마 대비는 윤원형이 금번 철렴의 논의에 앞서 금상을 달래고자 찾아갔으리라 오해하였을 것이다.

그러고서는, 윤원형 그의 언변과 사람 홀리는 재주로서 어수룩한 금상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아아, 종묘 사직이 앞으로 어찌 되려 하는가!’

금상의 사람됨이 선대왕과 같았더라면, 아직 장성하지 못하였을지언정 그 안목이 올바르기만 했다면, 윤원형을 내치고 무언가 다른 수를 부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준경과 다른 사림이 고대하던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오늘 금상을 보니, 그 기대는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절망을 앞당겨 미리 선사하였으니, 어쩌면 윤원형에게 감사하여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일이 이리 되었으니, 이제 물릴 수 없게 되었다. 의민당이 무너지거나, 아니면 금상의 위엄이 상하거나.’

본디 철렴을 할 때 사양하는 것이 말없이 지켜지는 법도이나, 이를 무시하고 당당하게 친정을 선포한 금상이다.

그리고 그리 친정하겠노라 밝히면서 내세운 것이 바로 의민당의 토벌. 이리 되었으니 만일 토벌이 실패한다면 금상의 위세는 그만큼 깎이고, 자연스럽게 윤원형과 그의 무리에게 힘이 쏠릴 것이다. 대비도 그리 된다면 저의 노여움을 거두고 다시금 윤원형과 불편하게나마 힘을 합치게 되리라.

반면 토벌이 성공한다면, 윤원형은 대비를 제치고 금상의 외숙으로서 그 권세를 일신하게 될 터. 어찌 되었든 윤원형에게는 손해가 나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권력을 탐하여 금상의 품성을 두고 위태로운 노름판에 뛰어들었고, 그 노름은 성공하였다. 그리고 윤원형이 이기는 만큼, 이 나라는 졌다.

‘설마 내 가형(家兄)이 의민당을 바로 토벌하는 대신 투항 권할 것을 주장하리라 짐작하고 토포사에 천거하였던 것인가?’

아마 거기까지 헤아리지는 못했더라도, 이윤경의 성정을 감안했을 때 무언가 유화책을 내세우리라는 것까지는 예상했을 테다.

그리고 이렇게 된 이상, 이준경은 금상의 뜻을 거스른다는 부담을 안지 않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토벌에 협력해야만 했다.

“상께서 친정하심은 참으로 나라의 큰 행사이온데, 이러한 일을 맞이하여 벌써 군국(軍國)의 기무(機務)를 논하시니 신 등은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하유하신 적변을 징토하는 일은, 비록 이 자리에서 세세한 절목을 모두 논할 수는 없으나 성상께서 전교하신 바가 참으로 지당하다 하겠습니다.”

“무릇 군사를 움직이는 것은 겨울이 바른 때라 하였습니다. 비록 지금은 나라 안에 곡식이 부족하다 하나, 이미 절기가 백로를 지나고 있으니 곧 곡식은 영글고 곳간은 차게 될 것입니다. 이때를 맞이하여 황해도의 적당을 쓸어 없앰이 가당할 것입니다.”

“또한 황해도의 적당을 쓸어 없애지 않다가, 급히 천사(天使, 명나라의 사신)를 맞이할 일이 생긴다면 이는 크나큰 우환이 될 것입니다. 신료들이 미욱하여 이미 성려(聖慮)에 누를 미쳤는데, 어찌 우려할 바를 조속히 뽑아 없애지 않겠습니까?”

윤원형을 따르는 무리들이 하나씩 나아와 금상의 말에 찬동하였고, 어어 하는 사이에 어느새 여론은 정해지고야 말았다.

끝내 윤원형은 앞장서지 않았다. 모임을 파하고 대전에서 우르르 몰려나올 때, 이준경과 우연히 눈이 마주치자 씩 웃기만 하였을 뿐이었다.

무심한 하늘은 가을 절기에 맞추어 푸르르니 드높기만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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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에서 문정왕후는 1553년 수렴청정을 마쳤고, 당시의 관례대로 명종은 누차 이를 사양한 뒤 어쩔 수 없이 받드는 형태로 친정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한동안 문정왕후의 영향력은 유지되었지요. 하지만 이미 불교를 옹호하고 승과를 부활시키면서 상당한 정치적 부담을 떠안았기 때문인지, 그 이후로 직접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후 명종은 윤원형의 존재에 대해서도 불만을 품고, 그에 대항할 친위세력을 육성하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뻔히 존재하는 사림 세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신 왕비인 인순왕후의 외숙부 이량을 중용하였다는 점이었지요. 이량은 윤원형보다도 훨씬 정치적으로 부족한 인물이었고, 짧은 전성기 동안 사림은 물론이요 같은 외척인 심씨 집안 내에서도 숱한 갈등에 휘말린 끝에 명종 본인의 손에 ‘손절’ 당하게 됩니다. 결국 명종이 윤원형을 내칠 수 있었던 것은 문정왕후 사후, 그것도 이준경이 사림의 역량을 총결집한 뒤에서야 겨우 가능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의 무능에도 불구하고 선조가 당대의 사림들 사이에서는 매우 우호적으로 인식되었던 것은, 선조 본인의 행정가로서의 능력 덕분이기도 하지만 전임자가 훨씬 못났기 때문인 면도 있었습니다.

종종 언급되는 갑사(甲士)는 조선 초기에 존재했던 직업군인의 계급으로, 조선 초기 군사력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 중기로 향하면서 군정의 문란과 중앙군 제도 자체의 문제로 인하여 갑사의 기능은 유명무실해졌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사라는 표현 자체는 살아남아, 비록 수는 적고 내실은 없지만 어쨌든 존재했던 직업군인들의 총칭으로 쓰였습니다.

작중에 언급되는 도리깨는 본디 한반도와 중국, 그리고 다른 세계 곳곳에서 널리 사용되었던 형태의 무기입니다. 그러나 군사전통이 많이 끊겼던 조선에서는 도리깨 형태의 무기의 맥이 끊겼다가, 임진왜란을 거치며 재발견되었고, 중국에서 편곤 사용법을 다시 들여와 조선 후기의 병장기로 널리 쓰이게 됩니다.

조선의 수군은 본디 양인들로 충원되었으나, 그 직이 고되어 양민들 사이에서 기피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미 조선 초기부터 죄인들을 수군으로 충군(充軍)하곤 했고, 조선 후기에는 칠반천역 중 하나가 되고야 말았습니다. 작중의 꺽정이가 수군의 역을 풀어준다는 ‘당근’을 내밀었던 것은 이 때문입니다.

『수호지』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송강은 실존하였던 도적으로, 북송 말기 양산박에서 활동하며 대규모 세력을 이끌었습니다. 당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던 상황이었고, 북쪽의 금나라의 위협도 거세지고 있었기에, 송강의 세력을 끌어들여 다른 반란세력인 방랍을 제압하자는 건의가 북송 조정에서 나온 바 있었습니다. 100회본과 120회본 『수호지』에서는 이를 택하여, 송강이 결국 조정에 귀의하고 양산박 호걸들도 반란군과 금나라 정벌에 동원되는 – 그리고 그 결과 하나씩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되는 – 것을 그리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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