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50화 (50/259)

17. 도적의 싸움 (1)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일으킨 대병이다. 나라의 온 힘을 일으켜 만들어낸 오만 대군인 만큼, 이윤경은 지시를 내림에 있어 신중에 신중을 기하였다.

“뜻대로 된다면, 이번 사로병진의 계책으로 적세를 쉬이 제압할 수 있을 것이야.”

마침내 예성강을 건너, 우봉 맞은편 저탄(猪灘, 돼지여울)에 임시로 군영을 차린 이윤경이 아래의 군관을 모았다. 지도를 펼쳐두고 그들의 계획을 마지막으로 다시 정리하는 이윤경이었다.

“평안도에서 내려오는 북병은 동선관(洞仙關)을 넘어 봉산을 치고, 신계에서 넘어오는 강원도와 황해도 군사는 서흥을 치며, 우리는 여기서 곧장 북상하여 평산을 점령할 것이야.

그리고 바다를 건너 해주에 닿은 경군까지 때맞추어 재령을 수복하면, 의민당이 터전으로 삼는 네 군현이 모두 다시 우리에게 돌아오게 되네.”

그리 된다면, 의민당은 결국 일대의 산 중 한두 곳에서 겨우 버티며 기약 없이 항거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적의 거점이 드러나게 되면, 그때 군사를 한 곳에 모아 적을 일시에 섬멸하는 것일세.”

하삼도에서 일어난 난리 소식이 임거정 귀에도 들어가고 있음을 알게 된 뒤, 이윤경은 아랫사람 입단속에 각별히 주의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로병진이라는 말은 종종 들었어도 어디를 어떻게 칠 지를 정확히 아는 이는 드물었는데, 이렇게 이윤경이 전체 계책의 대강을 밝히니 군관들도 하나씩 고개를 끄덕였다.

“이처럼 한다면 분명 해가 바뀌기 전에 역당의 뿌리를 뽑을 수 있을 것입니다.”

“도원수 대감의 군략이 참으로 훌륭하니 물샐 틈이 없습니다!”

누군가는 아첨하고 – 부원수 진복창의 표정이 질투로 어두워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이윤경에게 아첨하고 있으니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었다 – 누군가는 진심으로 탄복하며 말했는데, 이윤경 본인이 찬물을 끼얹었다.

“허나 이대로 만사가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일세. 저들이 역심 드러낸 지 벌써 여러 달이 지났으니, 분명 방비한 바가 있을 것이야. 우리 군량이 부족한 것을 알고 있을 테니, 산세에 의지하여 우리에 맞서며 시일을 끌려 하겠지.”

그러면서 재차 신중 기할 것을 당부하는 이윤경이었다. 그러자 그보다 예닐곱 살은 손아래일 부원수 진복창이 곧장 딴지를 걸었다.

“도원수, 그렇다면 이렇게 느리게 나아갈 것이 아니라 곧장 빠른 군사를 모아 봉산을 바로 들이침이 상책일 것이외다. 저들이 아무리 곡식을 모은다 한들 모두 숨기지는 못하였을 터이니 반드시 군량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오.”

일이 성공하면 모든 공은 부원수 진복창에게 돌아갈 것이요, 실패하면 모든 과(過)가 도원수 이윤경에게 몰리게 될 터. 그러므로 가만 있어도 될 법한데, 오히려 이렇게 사사건건 발목을 잡고 있었다.

이윤경이 도원수직을 제수받으면서, 별로 세운 공도 없이 품계가 올랐다고 여겨 시기하는 것인가? 허나 이윤경은 해주 뒷골목에서 임거정과 이야기 나눈 일에 이미 마음의 절반을 쏟아붓고 있었으므로, 진복창이 무어라 하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군량이 아무리 부족하다 한들, 민가를 약탈하는 것은 최후의 수단으로 미루어야 하오.”

“허나 봉산·재령·서흥·평산 네 곳은 모두 도적의 굴혈이요, 그 땅에서 진작 빠져나오지 않은 자들은 모두 적당과 결탁한 무리이외다. 오히려 나라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서는 약간의 무(武)를 보임이 가당할 것이오.”

“아무리 적도와 결탁하였다 하나 아국의 백성이오. 대병을 동원한 것만으로 이미 나라의 위엄은 드러났고, 또 자칫 반심(叛心)을 부추겼다가는 돌이킬 수 없게 될 수도 있소이다.”

“도원수, 오만 대군을 일으켰으니 있던 반심도 흩어져 사라질 수밖에 없소. 신중함도 물론 병가(兵家)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이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오.”

이윤경은 일일이 반박하는 대신 진복창에게 적당히 미끼를 던져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흠, 그 말에도 일리가 있구려. 무릇 병법은 완급(緩急)의 때를 가려야 하는 법. 우선 눈앞의 평산을 수복하는 것이 중하니, 부원수는 강을 넘어온 군사를 추슬러 즉시 평산 읍내를 치도록 하시오.”

공을 세우는 일이라 하니 진복창의 낯빛에 활기가 돌았다.

“그리 하겠소이다. 여기서 고작 삼십 리 길이니, 해가 떨어지기 전 점거할 수 있을 것이오.”

곧장 자신만만하게 진복창이 장막을 나서서는 여기저기 호령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야 조금 조용해졌구나 생각하며 이윤경은 남은 군관들에게 본래 하려던 말을 이어갔다.

“여기 있는 이들 대부분은 지난날 우봉에서 싸우면서 저들 의민당의 세력도 작지 않음을 알고 있으리라 믿네. 혹여 싸움이 길어지게 된다면, 결국 치중(輜重, 보급)만큼 중한 게 없게 될 터.”

그러면서 이윤경은 지도에 있는 강음 언저리를 짚었다.

“강음에서 시작하여 의민당이 점거한 군현을 공략하는 모든 우리 군사들에게 군량이 돌아갈 수 있게 하려면, 결국 주요한 길목을 점거하고 지키는 것이 중하네.

평산부가 평정되는 대로 지금 우리 중군에 속한 군사 중 정예한 이를 골라내어, 기린역(麒麟驛)으로 향할 것이야. 기린역과 서흥을 장악하면, 육로로 봉산과 재령 등지까지 모두 쉽게 군량을 옮길 수 있네.”

사로병진을 한다지만, 결국 하삼도와 경기 일원에서 그러모은 군량은 강음 조읍포로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예성강을 건널 때 따로 군사 오천을 떼어 강음을 점령하게 하였고, 비록 조읍포창의 세곡은 모두 사라졌으나 우봉 싸움에서 의민당이 썼던 조운선을 확보하는 데는 성공하였다.

그사이 이윤경이 확보한 다른 조운선도 열심히 강을 거슬러 올라와, 조읍포창에 군량을 내려놓고 있었다.

“저들은 지리에 밝고 또 본디 교활한 도적의 무리이므로, 어떤 기책(奇策)을 써도 이상하지 않네. 허나 그럴수록 우리는 병법의 정도(正道)를 지켜야 하네. 군세의 규모로 보아 우리가 명백히 위에 있으니, 오직 우직하게 지킬 것을 지키면 곧 이기는 것일세.”

이윤경 말대로 질 수 없는 싸움이었다. 다만 나라에서 크게 무리를 하여 끌어모은 대군이었으니, 자칫하면 이겨도 이기지 못한 것과 같이 될 수 있으니 이를 경계할 뿐.

이윤경의 차분한 설명을 들은 군관들 사이에 결연함이 감돌았다.

그렇게 담담하게 설명하는 이윤경 마음속에서, 대체 의민당의 노림수는 무엇인가 하는 끝없는 의심과 자문자답이 벌어지고 있음을 군관들은 알 수 없었다.

지키는 이 없이 텅 빈 의주대로 따라 관군의 전령이 바쁘게 오갔다. 그와 함께 낭보도 하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황주에서 출발한 북병은 동선관(洞仙關) 넘으면서 적습을 당했으나, 군관 몇몇이 죽고 다친 것을 제외하면 큰 손실 없이 봉산 읍내를 점거하였다.

신계에서 서쪽으로 진격한 강원도와 황해도 군사는 갈현(葛峴) 고개에서 목책으로 길을 막고 버티는 적당으로 인해 꽤 애를 먹었으나, 반나절 싸움 끝에 마침내 물리치고 서흥 코앞에 닿았다.

해주에서 북상하는 경군 정예는 산길을 그대로 돌파하여, 재령 읍내로부터 삼십여 리 떨어진 태자원(太慈院)에 닿았다. 산길 풀숲 사이에서 종종 복병이 나타나기는 하였으나, 활솜씨는 어설프고 병장기는 조악한바 큰 피해를 입지 않고 격퇴하였다.

유일하게 낭보를 전하지 못한 것은 바로 자신만만하게 선봉을 자임하여 평산으로 진격한 진복창이었다.

“도원수, 저곳 성황산성이 놈들의 본진임이 틀림없소이다.”

백성들에게 폐를 끼쳐서는 아니 된다며, 멀쩡한 읍내 바로 바깥에 새로 군영을 차린 이윤경에게 진복창이 돌아와 말했다.

“어찌 그렇소?”

“이 사람이 도원수의 명을 받들어 산성을 공략하려 하였는데, 그 성곽은 견고하고 지키는 적은 많았소. 그들이 시석(矢石, 화살과 돌)으로써 격렬히 저항하니 싸움의 유리함을 얻지 못하여 일시 물러났소이다.

저 산성이 역적의 본진이니 강고하게 버티는 것 아니겠소?”

그러니까 결국 자신이 이기지 못한 것은 적이 너무 강하였기 때문이라며 남 탓을 하는 것이었다.

“적의 기세가 강포함을 깨닫고 곧장 군을 물렸으므로 인명은 크게 상하지 않았고, 군의 사기도 아직 높소. 만반의 준비를 갖춘다면 반드시 깨뜨릴 수 있을 것이외다.”

즉 별 생각 없이 산성을 치려 했다가, 저항이 있으니 놀라서 곧장 군사를 물렸다는 뜻이었다. 애써 그것을 감추려는 것이 한심하기는 하였으나,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억지로 병사들을 성곽 앞으로 내모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분명 다른 군에도 저처럼 적당이 웅거하고 있는 산성이 있을 것이오. 서쪽의 멸악산도, 북쪽의 자비령도 모두 그 산세가 험하며, 더 서쪽으로는 구월산도 있소. 그런 거점으로 적도를 몰아넣어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에워싸는 것이 우선이외다.”

‘몰아넣는다’ 하는 말에, 잠시 기세 죽었던 진복창의 몸에 생기가 돌아오는 듯했다.

격멸하거나 토벌하는 것도 아니요, 그저 몰아넣는 것이라 하였다. 싸우지 않고서도 쉽게 공을 세울 수 있는 일이었다.

“흠흠. 비록 이 사람의 잘못은 아니라 하나, 어쨌든 금일 산성을 바로 취하지 못하였으니 아쉬움이 남기는 하오. 도원수께서 다시금 선봉을 맡겨주신다면 이번에는 꼭 공을 세우겠소이다.”

진복창의 사람됨은 이미 아우로부터 전해 들었는데, 실제로 겪어보니 과연 영락없는 소인이었다. 어차피 자신이 아무리 잘 대해주어도 원한을 품을 것이라면, 억울하지라도 않은 쪽이 낫지 않겠는가.

그리 마음을 먹은 이윤경은 곧 계획을 일부 수정하였다.

“이미 저들이 저 산성에 들어갔으니 산 아래를 지키며 끝내 함락시키는 일을 누군가 맡아야 하오. 더구나 강음현의 조창과 그곳에 있는 배들을 지키는 것도 여간 중임(重任)이 아니외다.”

“허나... 물론 후방을 지키는 것도 매우 중한 소임이겠지만, 우리가 이렇게 오만 대군을 이끌고 해서(海西, 황해도) 땅을 밟은 것은, 어디까지나 역적을 토벌하는 데 그 본의가 있지 않겠소이까.”

“흠, 부원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사실 이곳 평산과 강음을 지키는 것 외에도 병력 일만 정도를 분군(分軍)하여 따로 진격시킬 일이 있소이다.”

“오, 그것이 무엇이오이까?”

“여기서 서쪽으로 칠십여 리를 가면 바로 기린역이오. 멸악산 서남쪽의 요지(要地)로, 우리가 황해도를 토평하려면 반드시 점거하여 지켜야 하는 곳이오. 더구나 적의 본거지인 청석동(청석골)에서 가깝기도 하오.”

“오...”

“그곳을 지키며, 마치 산과 같이 망동하지 않으며 그곳을 지키고만 있어도 적도는 감히 멸악산에 들어가려 하지 못할 것이며, 청석동이나 재령의 적당이 봉산을 우회하여 서흥·평산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외다.”

“흠흠, 도원수께서 그리 말씀하심은, 역시 이 사람에게 소임을 맡기시려는 뜻이리라 믿소이다.”

“과연 그렇소. 앞서 거론한 것처럼, 일만 병력을 추려서 맡길 터이니, 부원수께서 데려오신 군사 중 약병(弱兵)은 이쪽에 남기고, 강병만 데리고 가도록 하시오. 그리고 다시 한 번 당부컨대, 기린역을 우직하게 지키기만 하더라도 그 공이 매우 클 것이오.”

“알겠소이다. 이 진 모, 도원수의 기대하심에 반드시 부응토록 하겠소.”

이윤경은 진복창에 대해 나름의 기대를 가지고 있기는 했다. 그는 진복창이 기린역에 들어서는 순간 청석골을 치러 가겠노라 난리를 칠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 아래에 강병을 붙이면서 덩달아 자신이 눈여겨본 군관 여럿을 배속시켜, 진복창이 허튼짓 못하도록 견제할 생각이었다.

물론 정말 허튼짓을 하고야 만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았다. 의민당의 노림수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청석골 앞까지 진격한다면 진복창의 눈앞에서 그것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왕 노림수에 당할 수밖에 없다면, 이윤경 자신이 원하는 때, 그리고 이왕이면 적당히 버려도 될 만한 사람 상대로 터져나오는 쪽이 나았다.

그렇게 수많은 군사가 밀물처럼 들어왔다 썰물처럼 빠지고, 이제 평산 읍내 옆 군영에는 이윤경 본인이 이끄는 일만여 명만 남았다.

군량이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아직 싸움이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굳이 곡량을 아껴 사기를 떨어뜨릴 이유는 없었다.

여기저기서 밥 짓는 연기가 올라갔다.

일전에 혈혈단신으로 해주에 들어갔을 때, 해주 주민 십중팔구가 피난을 가 있어 해주 고을 전체가 텅 빈 듯하였던 것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곳 평산은 텅 빈 듯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텅 비었다. 서쪽 하늘에 개밥바라기(금성)는 뜨는데, 정작 밥 지을 때 저도 잊지 말라며 개가 우짖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개 한 마리 버리고 가지 않을 만큼 치밀하게 준비하였다는 뜻이요, 또 그들이 피신하였을 산성이나 다른 산속 심산유곡에 그런 개들 먹일 만큼의 식량까지 비축되어 있다는 뜻일 테다.

다른 일곱 도에 닥친 기근과 역병을 황해도 한 도만 피해갔을 리 없고, 도적과 무뢰배들이 백주에 돌아다닐 만큼 피폐해진 인심이 이곳 황해도 한 도에서만 순량(順良)하게 지켜지고 있을 리도 없었다.

끽해야 향리와 백성 몇몇이 모여 꾸렸을 의민당이다. 그들이 정녕 역적은 아니라 하더라도, 실체를 파고들면 여느 도적에 비해 딱히 더 낫지는 않으리라, 한때 그렇게 여겼던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런 의민당보다도 못한 각지 군현의 수령들, 그리고 그 수령들을 발탁하고 포폄하는 조정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이제는 때늦은 고민이다. 나중에 더 숙고하고 자성(自省)하여 아우에게 알려주어도 늦지 않으리라.’

지금 그는 관군의 장수로서, 도원수라는 직함을 달고 와 있었다. 의민당의 다스림에 대해 고민할 겨를은 없었다.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고, 여느 군관과 같은 식사 – 그러니까, 반찬은 간소하지만 적어도 밥에 모래와 자갈은 안 섞인 식사 – 를 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

그렇게 눈 붙인 지 한 시진쯤이나 지났을까.

휠릴리 하는 기묘한 소리가 장막을 뚫고 들려왔다. 누가 풀피리라도 만들어 부는가, 다음날 색출하여 군령으로 다스려야겠구나 생각하며 이윤경이 다시 잠을 청하던 차.

이번에는 요란한 꽹과리 소리와 함께, 함성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적이다!”

“야습! 야습이다!”

성급히 의관 갖추던 차. 군관 하나가 실례한다 말씀 올리고서 뛰쳐들어왔다.

“도원수 영감! 적습입니다!”

“산성의 적이 출성(出城)한 것인가?”

“그... 그것은 아닙니다! 어, 그러니까, 아닌 듯합니다!”

군관조차 당황한 기색 역력하여 제대로 설명을 못 하기에, 얼른 의관을 마저 갖추고서 직접 장막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한 발짝 나서자마자 이윤경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야 말았다.

황해도 일대의 지도는 외우다시피 하였으므로, 지명은 모두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북쪽의 감악산(紺岳山) 서북쪽의 왕계산(王溪山), 서남쪽 철봉산(鐵峰山), 등 뒤편의 남산, 그리고 성황산성 있는 동쪽까지, 평산 주변의 이름 있는 모든 산의 등성이 따라 횃불이 잔뜩 켜져 있었다.

그 횃불 따라 함성도 메아리쳤다.

“저것은 의병(疑兵, 가짜 군사)이다! 망령되이 움직이지 말라!”

“예, 대감!”

그러나 이윤경이 그 말 마치기를 기다렸다는 듯, 횃불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어떤 병서에도, 허수아비와 깃발 세워 의병을 만든다는 이야기는 있을지언정 살아 움직이는 횃불로써 가짜 병사를 삼는다는 말은 없었다.

‘내 오만은 데려와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소?’

저를 비웃던 임거정의 말이 갑작스레 귓가를 맴돌다 사라진다.

산줄기 따라 수없는 불빛이 그들 향해 연달아 내려오니, 산마루에서 기슭으로 횃불의 파도가 내려치는 듯하였다.

노도 앞에서는 바위도 깎이거늘, 관군이라 하여도 사람의 무리인 그들이 얼마나 버틸쏘냐.

고개를 휘휘 저어 헛된 걱정과 두려움을 애써 쫓아내었다.

“본관이 단언컨대 저것은 의병이다! 겁먹을 것도, 동요할 것도 없다! 군관들은 무엇하는가! 속히 이를 알려라!”

횃불의 물결이 어느새 군영의 지척에 닿았다. 아니, 아직 몇 리는 남았다. 그저 그의 놀란 마음이 눈을 속이는 것일 터.

어느새 노랫소리까지 들려오기 시작했다.

“높으신 분 말씀 따라 싸움터에 왔건만은,

영락없는 죽을 자리. 이 서러움 어찌할까?

산속에서 스러지면 그대 백골 뉘 찾을까?

들판에서 죽어가면 누가 그대 기억할까?

투항하라, 투항하라! 꼭 살아서 돌아가라!”

북소리와 꽹과리 소리 이어지고,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그 소리 사이로 요망한 태평소 선율이 내달리며 이미 흔들린 마음을 파고들었다.

“귀를 막아라! 귀를 막아!”

“듣지 마라! 놈들의 술수다! 듣지 마라!”

그러나 그런 호령을 듣고 따르려면 먼저 귓구멍을 열고 있어야 할 터. 한참 늦은 지시가 군영 곳곳에서 나왔다.

“도원수 대감! 군문을 나서서 추격해야 합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갑옷을 다 입고 달려온 비장 하나가 급히 건의하였다.

“아니 된다! 저들 모두 의병이니, 실제 병력은 한 줌도 되지 않을 것이야!”

“적어도 성황산성 쪽은 의병이 아니라 진짜 적당일 것입니다! 지금 나서서 치지 않는다면 때를 놓칩니다!”

“쫓아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유인에 걸리는 것일세!”

“어차피 진짜 군졸은 우리가 더 많을 것입니다! 정 그렇다면 저들도 대응을 못 하도록 사방으로 동시에 출진하여 치시지요! 이미 군심(軍心)이 흔들렸으니 어떻게든 수습해야 합니다!”

어지러운 가운데 억지로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서 이윤경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군관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복병이 의심된다 한들 저들도 모든 곳에 병력을 배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임거정의 말은 분명 허세였을 터.

그리고 복병을 숨긴다면, 군관이 처음 건의한 대로 성황산성 쪽에 매복하고 있을 공산이 컸다.

어떻게든 기세를 올려야 한다. 저들이 그저 야음을 틈타 사람 놀라게 하는 얄팍한 술수를 부렸을 뿐임을 보여야 한다.

“좋네! 지금 군사를 내게. 단, 저들을 쫓아내기만 하고, 저들이 깃발이나 횃불 따위로 사람을 속이는 재간을 부렸음을 보일 수 있는 증좌가 있다면 남김없이 주워오게!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동쪽으로 가서는 아니 되네!”

“예, 도원수! 명 받들겠습니다!”

군영의 모두가 난데없는 소란에 깨어났으므로, 병력을 준비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곧 갑사 수십이 이끄는 군사들이 삼면으로 뛰쳐나갔다.

올 것 같지 않던 아침이 돌아왔다.

출진한 병사들도 그대로 돌아왔다. 정확히는, 병사들만 돌아왔다.

“아니, 정녕 이것이 가한 일인가?”

이윤경의 탄식을 책망으로 들었는지, 살아 돌아온 자들 중 그나마 고참으로 보이는 이가 나아와 말했다.

“소인네가 감히 말씀 올리겠습니다요... 삼면에 모두 복병이 있었다 합니다. 밤중이어서 잘은 못 보았지만, 갑자기 풀숲에서 창대나 도리깨 따위가 튀어나와 앞장서던 비장 나리나 갑사 분들을 해치고, 그분들이 낙마하거나 쓰러지면 곧장 풀숲으로 끌고 들어가곤 했습니다...

소인들은 그저 군졸일 뿐이라, 우선 돌아가서 새로 명을 받자며 이렇게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결코 도망치거나 한 것은 아닙니다요!”

잘 나가다 결국 변명으로 끝나니, 잔뜩 주눅든 군사들이 따라서 울먹이며 저들 억울하다 말했다.

“후... 알겠네. 다들 돌아가서 오늘은 쉬게.”

“가, 감사합니다, 나리!”

군졸들이 나간 뒤 비장들과 다른 군관들을 모두 모아 다시금 당부하였다.

“병사들이 크게 놀라고 지쳤을 것이야. 오늘은 군량을 조금 더 풀고, 산성 주변의 경계만 꼼꼼하게 하도록 하게. 어제 밤에 출진한 자들은 푹 쉴 수 있도록 읍내의 빈집을 소제하여 그들이 쉼터로 쓰도록 하고.

그리고 저들이 산성 바깥으로 어떻게 나왔는지 사람을 풀어 살피도록 하게. 그 길목을 알면 우리가 이용할 수도 있을 터.”

“예, 대감.”

그제야 무언가가 이윤경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저들이 과연 평산 한 곳에서만 이런 수를 부렸을 것인가?

이윤경 그가 아니라 다른 장수, 예컨대 저 진복창 같은 이가 지휘를 하고 있었더라면 어젯밤에 어떻게 대처했을 것인가?

“이보게! 다시 들어와보게!”

“예, 대감!”

“당장 빠른 말을 골라, 기린역과 서흥, 봉산, 재령, 강음까지 골고루 기별을 보내게! 어젯밤 있었던 적습을 고하고, 혹 그쪽에도 같은 일이 있었는가 확인토록 하게.”

얼마 지나지 않아 강음과 서흥에서는 기별이 돌아왔다. 두 곳 모두 비슷한 일을 겪었으나, 강음은 이윤경 본인이 꼭 지키기만 하고 그 외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 특명을 내렸기에 조용히 지키고만 있었다 했다.

또한 서흥으로 나아가던 강원도 순경사 김세한의 경우, 갈현 싸움에서 이미 죽고 다친 자가 많아 두려워하며 그저 진영을 지키고만 있었는데, 의병의 술수를 간파하지 못한 것은 아쉬웠으나 섣불리 나서서 매복에 걸리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래, 이것이 노림수였군. 오히려 빠르게 알게 되었으니 다행일세.”

다시 군관들을 불러 모은 이윤경이 말했다.

“그대들 모두 놀란 군중(軍中)의 마음을 다스리느라 참으로 고생이 많았네.”

“감사합니다, 도원수!”

“만일 우리가 처음 우봉에 왔을 때처럼 오천 정도였다면 저 술수에 당하여 그대로 무너졌을 수도 있을 것일세. 허나 우리 군세는 오만에 달하고, 저들이 비록 수가 많다 한들 우리를 압도할 만큼은 되지 않네.

병법에도 이르기를, 에워싸는 것은 열 배일 때, 그대로 공격하는 것은 다섯 배일 때 (十則圍之,五則攻之)라 하였으니, 저들이 설령 황해도 군민을 모두 하나로 끌어모았다 한들 여기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야. 그러니 그저 시일을 끌며 우리의 발목을 잡을 뿐일세.

저들이 우리를 흔들려 할 때 흔들리지 않고, 집요하게 저들이 근거지로 쓰고 있는 산성을 공략한다면 우리가 이길 수밖에 없네. 이를 잘 알려 군졸들이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않도록 하게나.”

군관들의 얼굴에도 다시금 자신과 희망이 돌아오는 듯하였다.

그러나 이윤경이 그리 당부한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날 밤에도 파도처럼 일렁이는 횃불 아래서 울리는 꽹과리와 태평소 소리가 온 군영을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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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보다 훨씬 매콤하게 정치적 후견인 이기의 뒤통수를 때렸던 진복창이 다시금 전면에 나타났습니다. 작중에 나온 그의 인성은 원 역사에서도 악명이 높았는데, 『실록』에 전하는 한 일화로 자세한 서술을 갈음합니다. 어느 날 진복창이 거나하게 술이 취한 채 한참 손윗사람인 상진의 집에 나타나서는, ‘상씨 어르신(尙爺), 노래나 해 보시오!’라고 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태생적 음치였던 – 이것도 실록에 적힌 디테일입니다 – 상진은 결국 그 자리에서 짐짓 기쁜 체 하며 노래를 불렀고, 만족한 진복창이 물러간 뒤에야 상진 홀로 분통을 터뜨렸다는 것이지요.

작중에서 의민당이 의지하고 있는 황해도 중부의 산지는, 해발고도는 그리 높지 않으나 지세가 복잡하여 방어에 좋은 지형이었다고 합니다. 일례로 봉산 바로 북쪽에 있는 동선관은 고려가 몽골을 상대로 거둔 첫 승리인 동선역 전투의 주 무대가 되기도 했는데, 당시 기습당해 패색이 짙던 고려군은 산세에 의지하여 결국 몽골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작중 시점에서 한참 뒤인 병자호란 당시에도 동선관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졸장으로 악명 높은 김자점이 지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청군을 격퇴하였다는 것을 보면 지리의 유리함을 얼추 짐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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