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51화 (51/259)

17. 도적의 싸움 (2)

오만 관군이 황해도 경내에 진입한 지 닷새째. 낮에는 관군이 산성을 함락시키겠다며 날뛰고, 밤에는 의민당과 황해도 백성들이 읍내의 관군 진영을 에워싸며 괴롭히는 것이 계속되었다.

기린역의 진복창과 재령의 남치근에게 이윤경이 급파한 전령은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결국 오백 병력을 따로 떼어 고개 중턱에 따로 진영을 차리게 한 뒤에야 한낮에 사람이 겨우 안심하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이윤경에게 전해진 소식은, 우습다면 우습고 안타깝다면 안타까웠다. 사방이 횃불로 둘러싸인 것을 보고 겁을 먹은 진복창과 남치근 모두 진영 밖으로 군사를 내지 않아, 오히려 평산의 이윤경 본영보다 인명의 손실이 적었던 것이다.

진복창이야 그렇다 쳐도 명색이 무신인 남치근까지 그리하면 어찌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저런 남치근이라도 그나마 지금 조선국의 무신들 중에서는 인재 축에 들었으니, 이윤경은 홀로 한탄할 뿐이었다.

“적당이 밤에만 우리를 에워싸고 소란을 일으키니, 이는 우리의 기력을 먼저 다하게 하려는 속셈일세. 경군 가운데 봉산과 그 일대에서 살던 자들이 있을 터이니, 그들을 모아 보내주게.

산성에서 은밀히 나올 수 있는 길목이나, 산성에 미처 들어가지 못한 이들이 숨어있는 골짜기가 산중에 있을 것이야. 그곳을 낮에 쳐야 의민당이 밤에 그리 난행을 못할 것일세.”

이윤경이 남치근에게 글을 보내 명을 내렸는데, 돌아오는 답이 황당하였다.

“소관이 도성에서 경군을 추릴 적에, 황해도에 가족이 있는 자들은 모두 도성에 남기고 왔습니다. 그들이 언제 역적의 편으로 돌아설지 알 수 없고, 이미 그들과 내통하여 군중의 간자(첩자) 노릇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므로 그리 판단하였습니다.”

간자 무서운 줄은 알고 싸움에 지리가 중함은 모르니, 참으로 답답한 일이었다.

다시금 재촉하여, 그러면 소싯적에 황해도에서 지낸 바 있는 군관이라도 모아서 다른 군영에 길잡이로 보내라 하였더니 그제야 수십을 추려내어 이곳저곳으로 보내었다.

허나 그들의 수효가 그리 많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해가 떠 있을 때 최대한 산길을 정탐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둘만 떼어서 보내었다가는 언제 변을 당할지 모르니 족히 수십씩은 모아서 보내야 했고, 또 그냥 군사만 모아서 보내면 의미가 없으므로 개중 군교(軍校, 하급 군관) 한둘씩은 딸려서 보내야 했다.

진복창이 이끌고 간 일만 중 삼천을 내어 그 일대를 수색케 하고, 김세한이 이끌고 온 강원도 군사들까지 데려와 산길을 살피게 하였는데, 그렇게 수십씩 흩어져 여기저기 살피다 보니 간혹 적의 조그만 무리와 마주칠 때도 있었다.

“하하, 도원수, 이렇게 군공(軍功)을 작게나마 세우니 그간 고생하였던 것이 조금은 씻겨 내려가는 듯하외다.”

저의 군공이 작음을 안다면, 이렇게 직접 찾아올 것까지도 없지 않았는가. 핏발 선 눈으로 퀭한 채 마음에도 없는 자랑 늘어놓는 진복창을 보며 이윤경은 짜증을 삼켰다. 아무래도 며칠간 잠을 제대로 못 자다 보니, 이윤경 역시 평정심이 조금씩 마모되어가고 있었다.

“도원수의 명에 따라 기린역에서 멸악산 들어가는 계곡 중 한 곳에서 이렇게 적 한 무리를 붙잡았소이다. 항거하다 잡혀 죽은 것이 열다섯이요, 그 자리에서 투항하여 붙잡힌 것이 서른하나이외다. 적정(賊情) 살피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겨 이처럼 압송하여 왔소. ”

군영 한복판에 끌려와 무릎 꿇고 있는 그 ‘투항한 적들’을 가리키며 진복창이 말했다.

“하여... 그... 이 사람 생각건대 선봉으로서의 공은 족히 세웠으니 이제 다른 소임을 청하여도 될 듯한데...”

드디어 본론이 나왔다. 끝내 한숨이 조금 새어 나오는 것을 참지 못했다.

“후... 좋소. 기린역에는 내 다른 장수를 보내리다. 기실 그보다 더 중한 임무가 있소.”

“아... 그, 그렇소이까?”

며칠 눈 못 붙인 사람답게 조금씩 버벅이며 진복창이 물었다.

“적당이 이처럼 시일을 끄는 전법을 쓰는 것은, 우리가 지쳐 쓰러지기를 노리는 것이오. 우리가 먼저 힘이 다하게 되면 결국 패할 수밖에 없소. 그러므로 군량을 지키고 무사히 옮기는 것이 그만큼 중한 것이외다.”

군량이라 하면 강음 조읍포에 있고, 조읍포라 하면 곧 후방이다.

“흠흠, 이 진 모 목숨을 걸고 맡은 바를 다하겠소이다.”

“그리해야 할 것이오. 그사이 우리가 적당이 웅거하고 있는 산성을 무너뜨린다면, 적들 역시 그곳에 곡량을 비축하고 있을 터이니 산속에서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오.”

사흘째 되는 날부터 이윤경은 전법을 바꾸어, 군사를 두 패로 나누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한 패는 낮에 산성을 공략하고, 한 패는 밤에 진영을 지키게 하였으니, 밤낮을 번갈아가며 쉴 수 있었다.

그만큼 단번에 산성을 파하기는 어려워졌으나, 적어도 병사들이 지쳐 나가떨어지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봉산 정방산성을 공략하고 있는 평안도 북병도, 재령 장수산성을 공략하는 남치근의 경군도 곧 이윤경의 명에 따라 이 제도를 따르게 되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조읍포의 조창을 잃는다면...”

진복창 앞에서 자제하던 것을 순간 잊고 이윤경이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진복창 또한 이미 주눅은 주눅대로 들고 지치기로는 이루 말할 수 없었기에, 크게 개의치 못하였다.

“명심하겠소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군량만은 지키겠소.”

“잊지 마시오. 적도 역시 저들의 노림수가 통하지 않게 되었음을 깨닫는다면, 결국 어떻게든 우리를 이겨내고자 강음을 치게 될 것이오. 이 한 번을 이겨내야만 우리에게 승산이 있소이다.

내 미리 준비하려는 바가 있으니, 강음에 당도하면 반드시 이에 따르도록 하시오.”

그렇게 신신당부하고서 진복창을 강음으로 보내고, 옆에서 떠드는 사람 없어졌음을 확인하고서 진복창이 붙잡아온 ‘적도’를 심문할 채비 갖추었다.

그리고 그들의 행색을 살피자마자 곧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아니, 너희는 어찌하여 저들과 함께하게 되었느냐?”

“살려주세요! 산속에 아들이 있어요!”

“살려만 주십시오, 나리!”

의민당이 황해도에서 나름 명성 있음은 알았지만, ‘황해도 한 도가 통채로 적당의 소굴이 되었다’ 같은 말은 그저 뻔한 수사라고만 생각했다.

허나 지금 이윤경 눈앞에 있는 것은 정말로 보통 백성. 그마저도 여인이 절반에 달했다.

“소인들은 그저, 당에서 횃불을 들고 밤에 산줄기 따라 오르내리면 된다 하여 따랐을 뿐입니다!”

“하늘에 맹세컨대 관군은 해친 적 없습니다!”

정말로 황해도 군민을 모두 동원했다는 말이던가. 거기에 여인들까지 끌어왔다면, 오만 관군의 네다섯 배는 되는 사람을 모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많은 것이 설명이 되었다. 산을 뒤엎을 기세였던 간밤의 횃불들.

아마도 그 대열 맨 앞에만 병장기 든 이들을 두어, 혹여 반격해오는 관군이 있으면 막아내도록 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너희의 우두머리는 누구냐? 너희 당수 말고, 누군가 가운데서 장수 노릇하는 이 있어 밤에 너희를 이끌어 산기슭까지 내려오게 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누구였느냐?”

“그것은 저희도 잘...”

“듣기로 의민당의 무슨 서원(書員)이라고만 했습니다.”

이미 지난 우봉 싸움에서, 저들 중 임거정을 따라 도적을 토벌했던 이들이 오장 또는 십장(伍長·什長. 분대장에 해당) 노릇을 하고 있으며, 어떤 조련을 받았는지는 몰라도 관군의 어지간한 갑사들보다 더 잘 무리를 이끄는 것을 본 바 있었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위에서 장수 노릇할 사람은 임거정 하나가 끝이었다.

저들을 이끌던 것도 그저 의민당에 가담한 어느 향리라 하니, 결국 때맞추어 산속에서 아래로 내려왔다 올라가는 것이나 산성에서 버티는 것이 전부일 뿐, 야습과 같이 진퇴(進退)의 때를 절묘하게 살펴야 하는 전법은 펼칠 수 없을 것이다.

“잘 알겠다. 우리 관군은 역적을 토평(討平)하기 위해 왔으니, 너희 백성에게 죄가 있다 한들 얼마나 있겠느냐. 우선 싸움이 끝날 때까지 너희를 붙잡아둘 것이로되, 끝나면 방면하여 다시금 생업에 힘쓰게 할 것이다. 너희는 그리 알거라.”

“아이고, 감사합니다, 나리!”

차마 저들을 죽이고 싶어도 죽일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선비의 품성 때문이기도 했으나, 저들이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버틴다 하면 관군 또한 별 수가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만일 의민당에게 시일이 더 주어져, 저들 백성까지 모두 군사로 조련할 수 있었다면 그때는 정말 큰일이 날 뻔하였다!’

그런 단상을 뒤로하고, 이윤경은 봉산과 서흥, 재령에 서둘러 군령을 전해, 산성에 미처 들어가지 못하고 골짜기에 숨은 자들을 붙잡아 적장이 누군지 밝혀내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으라 하였다.

‘임거정 한 사람만 잡으면 이 싸움을 일찍 끝낼 수 있다.’

곧 밝혀진바, 평산 코앞 성황산성은 그저 일개 도적 출신인 최만복이라는 자가 지키고 있었고, 재령 장수산성은 강포한 도적으로 알려진 임거정의 부하 서림이 지키고 있으며, 봉산 정방산성은 역도의 편에 선 봉산군수 이원수가 직접 지키고 있다 하였다.

(또한 고하기를, 이원수가 지키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부인 신씨가 주장(主將)이라 하였는데, 터무니없는 말이라 무시하였다.)

그리고 밤마다 관군을 괴롭게 하는 무리는 멸악산에 웅거하고 있는 대역죄인 이지함이 이끌고 있다 하였다.

‘그렇다면 임거정이 직접 유군(遊軍, 유격대)을 이끄는 것이렷다!’

그러면 어느 한 곳 산성이 무너지려 한다면 결국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윤경은 마침내 승리의 길을 깨달은 듯하여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이원수가 지키는 정방산성이나 서림이 지키는 장수산성과 달리, 그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일개 도적이 버티고 있는 눈앞의 성황산성이 가장 약할 터.

그날 밤, 어차피 잠도 제대로 못 잘 것 아침에 논의할 바를 미리 이야기 나눈다는 생각으로 이윤경은 막하의 군관을 모두 불러모았다. 오늘 밤도 바깥은 요란하였다.

“저들 또한 횃불이 무한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아녀자까지 동원하여 횃불을 들게 하니 곧 관솔이 동날 것이요, 또 내일모레 보름이 지나면 달빛도 점차 어두워지므로 밤에 산길을 오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어찌 그것만 기다리겠는가? 본관이 생각건대 저 성황산성을 공략한다면 임거정이 일전에 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니, 비로소 우리 군과 일대 백성의 수고를 덜 수 있을 것이다.”

“도원수의 혜안이 참으로 훌륭합니다.”

“내 출정하기 전 전적(典籍)을 살피고 또 황해도에서 수신(守臣) 지낸 이들에게 탐문한 바, 성황산성은 퇴락하여 이곳저곳이 무너졌다 들었다. 지금처럼 병력 절반을 동원해 들이친다면 성벽을 넘는 데 얼마가 걸리겠는가?”

산성을 우습게 여긴 진복창이 첫날 섣불리 성황산성을 공략했다가 실패하였음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진복창이 용렬하고, 또 그가 거느린 군졸이 아직 싸움에 익지 않은 무리였던 것이 원인이었다 여기는 이윤경이었다.

헌데 앞서 이윤경의 혜안 운운하며 아첨하던 자들이 이번 물음에는 다들 벙어리가 되었다.

그때 말석에 앉아 있던 군관 하나가 발언을 청하였다.

“소관은 도성에 있을 때 파진군(破陣軍)과 친하여 화포의 일을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도성에서 화포를 끌어옴은 어떨지요?”

“그 무슨 말인가?”

“우리가 전력으로 들이친다 해도, 저들이 성 안에 쌓아둔 돌 따위를 모두 소진하기 전까지는 성벽을 넘을 방도가 없습니다.

산성이 퇴락하였다는 것은 어디서 나온 말인지 알 수 없으나, 저희가 살피니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근래에 꾸준히 보수한 것이 명백하였습니다.”

의민당이 부역(賦役)의 일까지 전횡하게 된 이래, 부역을 명목으로 꾸준히 산성을 보수해왔음을 조정에서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윤경은 서책과 현실 사이에 차이가 있을 때 현실이 옳다고 인정할 수 있을 만큼 깨인 – 안타깝게도 조정에 몇 안 되는 – 사람이었으므로, 금방 군관의 말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다만 성벽을 보수한 것을 살피니 그 제도가 정밀하지 못하였습니다. 총통으로 때린다면 능히 깨뜨릴 수 있을 것이요, 또한 저들이 모두 도적과 백성의 무리이니 그 소리에 놀라 비로소 위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화포라 하면 화약이 귀하고 또 화포 자체도 흔한 물건이 아니기는 하지만 조선국 군관 치고 좋아하지 않는 자가 드물었다. 그러므로 다들 그 말 옳다고 찬동하며, 은근히 왜 자신이 저 말을 먼저 못 꺼냈는가 질투하는데, 이윤경이 찬물을 끼얹었다.

“도성에서 화포를 낼 수는 없네. 가뜩이나 나라의 위엄이 상했으니, 우리가 지금 화포를 청한다면 도성의 민심이 더욱 놀랄 것이야. 오죽 싸움이 유리하지 못하면 화포까지 끌어가겠는가, 그리 생각하겠지.”

“허나 도적과 백성 무리는 총통의 우렁찬 소리로 능히 제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마저 들어보게나. 대신 교동과 옹진의 전선에 쓰는 화포를 옮겨올 수는 있겠지. 내 즉시 조정에 화포를 청하는 글을 올릴 것이요, 그와 동시에 교동과 옹진에도 글을 보내겠네. 허나 화포가 오기 전까지 아무것도 아니하고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총통으로 성벽을 무너뜨리는 것은 좋지만, 그리한다면 정작 임거정이 나타나지 않을 공산이 컸다.

“우선 성황산성을 전력으로 들이치는 시늉만 하고, 임거정이 나타나면 격파하는 것을 중하게 두어야 하네. 이것이 가하겠는가?”

“적당이 산세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기기 어려운 것이지, 낮에 정정당당하게 상대하게 되면 결코 밀리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날 우봉에서 제대로 본때를 보여주지 못했으니, 이제라도 설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군관들이 하나같이 ‘해볼 만하다’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날 밤 논의한 대로 화포를 청하는 글은 이곳저곳으로 향해 나아가고, 혹여 임거정 놓칠 때에 대비하여 재령의 경군까지 이천여 가량 더 끌어왔건만, 성황산성을 치는 시늉을 하여 임거정 잡는다는 계책은 끝내 실행되지 못하였다.

이들이 모여서 계책을 세우는 동안 임거정은 이미 기린역의 관군 진영을 급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야, 이놈들아. 잘들 쉬었느냐? 못 본 사이에 얼굴이 꽤나 탱글탱글해졌구나.”

“당수님만 하겠습니까. 못 본 새 신수 훤해지셨습니다.”

무리 가운데서 누구 한 놈이 삐죽 놀리니, 꺽정이가 씩 웃으며 말했다.

“거기 너, 오늘내일 사이 꼭 죽지 말고 살아 있거라. 끝난 다음에 한 번 보자꾸나.”

“아이고, 그냥 죽게 냅둬야 하겠네!”

“우리 영손이 어쩌누, 좋은 세상 못 보고 가겠구만, 껄껄!”

꺽정이 놀린 간 부은 놈 주변의 사람들부터 시작해 모두가 억지로 농담을 던지니, 묵직한 긴장 감돌던 것이 조금은 풀렸다.

평산에서 배천·연안 가는 길목에 있는 이곳 자모산성(慈母山城)은 싸움터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었으므로 관군도 발걸음하지 않고 있었다.

그 두리손 놈 때문에 청석골 위치가 드러난 뒤로, 대충 사람 살 만하게만 보수해둔 이곳 자모산성에서 흑의군 대부분은 푹 쉬고 있었다. 그사이 꺽정이가 의민당이 거두어들인 수군 중 쓸만한 자들 추려내어 이곳으로 보내니, 어느새 머릿수가 일천에 달하게 되었다.

“우리는 시커먼 도적놈들이다. 그렇지 않으냐?”

꺽정이가 난데없이 말했다. 그러나 정말로 흑의군 태반은 본디 도적놈이요. 그 옷은 시커멓기는 했으므로, 그저 따라서 껄껄대며 대꾸했다. 땟국물이 아직 줄줄 흐르고 또 바닷바람과 햇볕에 살갗 검게들 탄 수군들 역시 멋모르고 따라 웃었다.

“맞습니다!”

“우리 산중군자(山中君子)들이 어찌 저 관군 잡배들과 함께 노닐겠느냐? 도적이라면 도적답게 싸워야지. 그리고 오늘 우리는 그것을 저들에게 가르쳐줄 것이다. 회초리는 충분히들 챙겨놓았겠지?”

날카롭거나 묵직한 쇠로 된 ‘회초리’, 아니면 활이나 창, 도리깨 따위를 들어보이며 모두가 호응하였다.

“미리 네놈들에게 알려준 대로, 나는 옛 노복들과 함께 기린역 관군을 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패주할 때부터 너희가 움직이는 것이다. 나는 중간에 따라붙을 테니, 내 험담을 하려면 때를 잘 맞추어 하거라. 눈치없이 떠들다가 저기 저 영손이 놈처럼 되지 말고.”

이미 저를 죽은 사람 대접하는 데 짐짓 흑의군 김영손이가 억울한 소리 하였으나 꺽정이는 들은 체 하지 않았다.

“자, 그러면 우리 모두 이 나라를 훔쳐보자꾸나!”

“와아아!”

밤중에는 적당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진영 문을 나서지 말라는 이윤경의 엄명이 내려진 이래 관군은 밤마다 경계만 삼엄히 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하루이틀이지, 본디 조선군 군기라는 것이 그리 대단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이윤경처럼 재간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병력을 두 패로 나누어 차례로 쉬게 하는 것도 어려웠으므로 그 법도가 잘 지켜지지 않았다.

하물며 오늘 부원수 진복창이 사라져 한껏 긴장 풀린 이곳 기린역 관군들은 어떻겠는가.

“도원수 대감께서 이르시기를, 지금 저기 횃불 일렁이는 것이나 함성 지르는 것 모두 가짜 군세라 하였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눈을 붙이겠느냐?”

진복창 대신 임시로 지휘를 맡은 군관 하나가 그리 말하니, 모두가 그럴듯하게 여겼다.

“저들은 결국 도적과 어리석은 백성 무리라, 우리를 에워싸고 겁박은 할 수 있어도 우리 일만 관군을 적대할 수는 없다. 솜이라도 귓구멍에 박아두고 잠이나 자라.”

다른 곳처럼 읍내에서 쉬는 것도 아니요, 잘 쓰이지 않는 역참 하나와 그 주변 조그만 마을이 인근 민가의 전부였다.

또 동서남북 에워싼 산중 어딘가에 의민당 산채가 있다고도 하였으므로, 처음에는 모두 두렵게 여겼다.

솔직히 지금도 두려운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지난 며칠간 적습이 있을 듯하면서도 없었고, 오늘이 지나면 언제 진복창이나 다른 높으신 분이 돌아와 그들을 괴롭힐지 알 수 없었으므로, 지금 눈 아니 붙이면 때가 없다는 말에 모두가 동감하였다.

천하장사도 저의 천근만근 눈꺼풀은 못 든다는데 천하는커녕 동네에서도 장사라 부르지 못할 일반 군졸들은 오죽하겠는가.

그리하여 모두가 애써 잠을 청하고, 한 수백 정도만 여기저기 군영 바깥에서 경계를 서는데, 어째 오늘은 횃불의 모양이 이상하였다.

“어제보다 더 가깝게 오는 것 같지 않습니까요?”

“냅둬라, 이놈아. 뭐 더 떠들 말이라도 있나 보지.”

그렇게 여기저기서 경계 서는 자들 중 하나가 저의 손윗사람 되는 옆의 군졸에게 물었는데, 퉁명스런 대꾸만 돌아왔다.

“엊그제였으면 지금쯤 노래를 부르든 고함을 지르든 했을 텐데... 어? 계속 옵니다.”

“아니, 거참. 아까 군관님들 말씀하시는 것 못 들었냐? 괜찮을 거라고.... 어, 어?”

횃불 무리가 거침없이 나아왔다. 한두 리쯤 거리를 유지하던 횃불이었는데, 어느새 삼백 보, 이백 보, 일백 보...

그리고 마침내 횃불뿐 아니라 그것을 든 검은 인영들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 일성호령이 잠든 군영을 뒤흔들었다.

“하하하! 이놈들, 내가 바로 임꺽정이다! 자, 얘들아, 죽여라!”

“죽여라!”

순식간에 누구는 몸과 머리가 떨어지고, 또 누구는 발차기에 복장이 그대로 부서져 피 토하며 쓰러졌다.

흐려지는 눈으로, 무관의 철릭 차려입은 누군가가 저는 임꺽정이라며 외치는 것을 본 이들도 있었으나, 곧 목숨이 끊어졌으므로 다른 이에게 이를 전하지 못하였다.

“적습이다!”

“적습이다! 이놈들아! 일어나라! 적습이다!”

지금까지 살아서 돌아가라는둥, 투항하라는둥 노랫소리만 듣던 이들에게, 대신 거친 함성과 쇠붙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늦게야 저의 오류를 깨달은 군관들이 여기저기 헐레벌떡 뛰어다녔으나,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 거리낌 없이 저의 실수를 고침)라는 공자님 가르침을 실행하기도 전 이승을 떠나고야 말았다.

“우리는 일만 대군이요, 적은 한줌이다! 얼른 정신 차리고 진형을 짜라! 놈들을 에워싸란 말이다!”

대장격 되는 듯한 군관 하나가, 기린역 역사(驛舍) 앞에 훤하게 화톳불 밝혀두고서 여기저기 손짓발짓을 하고 있었다.

꺽정이가 바람같이 몸을 날려, 화톳불을 뻥 걷어차니, 겨우 군관 주변에 모여들었던 군사들이 다시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놈! 일만 대군이 무섭지 않으냐?”

“그런 너는 내가 무섭지 않으냐?”

튀어나간 불씨는 곧장 옆의 장작으로, 또 인근 초가집의 바짝 마른 지붕으로 향해, 곧 훨훨 타오르기 시작했다.

군관이 곧장 첫 합을 내지르자, 꺽정이가 여유롭게 받아쳤다.

“크윽, 이놈!”

그리고 꺽정이가 두려워하는 와중에도 구경하기를 잊지 않는 관군들을 향해 외쳤다.

“들어라! 이미 우리 군영은 무너졌으니, 지킬 수 없다! 그러나 살길은 있다!”

그사이 또 한 합이 들어오는데, 이번에는 꺽정이가 여유롭게 흘리면서 군관의 허벅지를 살짝 스치고는, 왼쪽 어깨로 군관을 들이받았다.

“강음, 강음 쪽에는 적이 없다! 그쪽으로 빠져서 다시 진형을 이룬다! 알겠느냐!”

“으아아아!”

악에 받쳐 달려드는 군관을 꺽정이가 단칼에 베어넘겼다.

“나는 너희를 살리기 위해 이렇게 군법을 어겼다. 나는 죽어도 너희는 살아야 한다. 알겠느냐?”

“예!”

“가라, 강음 쪽으로! 뒤는 나와 군관들이 지키겠다!”

조금 생각하면, 그들을 수습해야 할 군관들이 후위를 지킨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피곤한 며칠을 보내고 겨우 눈 붙이려다 뛰쳐나온 이들이 얼마나 사리 분별을 잘 하겠는가.

결국 혼란에 빠진 군영에서 스스로 발(發)하고 또 전해지는 군령은 하나만 남았다.

“후퇴하라! 동남쪽, 강음으로 간다!”

“강음으로 빠진다!”

그냥 도망치라면 모를까, 엄연히 군령에 따라 잠시 물러날 뿐이라 하니, 마음 속 남아있던 일말의 주저까지 사라지고 모두가 그 명에 따라 우르르 빠지기 시작했다.

강음 쪽이 어디인가, 여기저기 군세 흩어지는 마당에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다행히 몇몇 사람들이 길을 알았다. 필시 산속 수색한다며 도원수가 끌어와 여기저기 배치한 황해도 살던 군관들일 테다.

“강음은 이쪽이다! 길이 있으니 잘 따라와라!”

“이쪽이다!”

군사들도 그들 따라 허우적허우적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강음까지 팔십 리 길인데, 구비구비 가는 길마다 그놈의 횃불이 일렁이고 있고, 그럴 때마다 수풀 가운데 여기저기서 고함치며 뛰쳐나오는 자들이 있었으므로 그 두려움이 도망하는 발걸음을 잽싸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땅거미 다 지고 어두워진 초경(初更)에 도망치기 시작한 이들이, 오경(五更) 동틀 무렵이 되기 직전에 완전히 녹초가 된 채로 강음에 당도하였다.

“아이고, 살았다, 살았어!”

“와아아! 조읍포다!”

아직 동 트려면 한두 각은 족히 남았기에 천지간이 모두 어두웠으나, 흐르는 강물에 어슴프레 달빛 비추어 조읍포가 눈앞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때였다.

“죽여라! 쳐라!”

“관군을 모두 죽여라!”

그들 등 뒤, 구봉산에서 횃불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앞으로! 조읍포에 관군이 있다! 그곳에서 함께 막는다!”

“가자! 조금만 더 가면 된다!”

그들 이끌고 이 팔십리 산길 이끌던 군관이 앞장서서 외치고, 모두가 마지막 힘까지 끌어내어 달려갔다.

“적이다! 쳐라!”

“막아야 한다!”

그러나 조읍포에 당도하자마자 그들을 맞이하는 것은 창칼이었다.

“이게... 대체?”

“아아... 앞뒤가 모두...”

기껏 활로 찾아 달려왔더니, 양쪽에서 모두 저들 죽이려 하니 다들 대항하기를 포기하였다. 누군가는 투항하고, 누군가는 그저 지쳐 땅에 주저앉는 중, 끝까지 관두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이놈들, 저기 보아라! 강음은 떨어졌지만, 아직 부두에 배가 남아있다! 살길이 있단 말이다!”

“살길이다!”

“강가, 강가로 가자!”

군관의 말을 철통같이 따르는 군졸들이 앞장서고, 끝내 삶을 포기하지 않은 이들이 뒤따랐다.

“도적들은 군량을 노리고 온 게 틀림없다! 우리가 배를 향해 가면 쫓아오지 않을 것이다!”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이미 사리가 어두워진 지 오래인 군졸들이 이를 악물고 따랐다.

“이런 벼... 어리석은 짓이 있나!”

늙어서 잠귀가 한창 밝아진 탓에, 잠을 거의 이루지 못하던 이윤경은 끝내 간밤의 소식을 듣고 욕지거리가 튀어나오는 것을 완전히 막지 못했다.

“그래서, 얼마나 죽었는가?”

“간밤에 상한 이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기린역에 끝까지 남은 이들이 삼천이요, 아군이 이미 지키고 있던 성불산 고개 쪽으로 달려와 수습된 이들이 이천 가량 됩니다. 시신을 수습해보니 밤사이 일백도 채 죽지 않았다 합니다.”

“기린역 쪽을 물은 게 아니지 않은가? 강음, 강음 쪽이 어찌 되었느냐 이 말일세!”

이윤경의 분노를 그대로 뒤집어쓰게 된 불우한 군관이 조심스레 말했다.

“동이 튼 뒤에야 비로소 관군이 관군과 싸우고 있음을 깨닫고 이를 멈추었으나... 죽은 자가 양쪽에서 사백을 넘는다 합니다.”

“군량은?”

“다행히 부원수가 군량을 지키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아, 간밤의 혼란 가운데서도 조읍포의 조창에는 전혀 해가 닿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로고.”

“그러나 조읍포를 지키는 관군이 적당이라고 여긴 기린역 군졸들이, 두려움에 눈이 멀어 군량을 나르는 배를 빼앗아 달아나 버렸습니다.”

“무어라?”

“본디 있던 배 중 열에 셋 정도만 남았고, 특히 큰 배들은 모조리 사라졌습니다.”

“당장 부원수로 하여금 내가 딸려준 날랜 군사를 모조리 내어 그들을 추포해오도록 하게. 족히 삼사천은 될 터인데, 그들이 모두 흩어져 우리가 패전하였다고 유언(流言)이라도 퍼트리면 아니 되네.”

“예, 도원수.”

겨우 살아났다 여기며 군관은 밖으로 나가고, 아무도 없음을 깨닫자 이윤경은 참았던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뒤로 쓰러졌다. 단단한 마루바닥이 – 결국 이윤경도 평산 읍내의 집을 징발하여 저의 막사로 쓰게 되었다 – 퍽 편안했다.

“그래도 하늘의 보우하심이 남아 있구나! 내 소소한 꾀라도 쓰지 않았더라면 어찌 될 뻔하였는가.”

이윤경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저들이 조읍포를 급습하여 군량을 모조리 불태웠다면 어찌 되었겠는가?

사로병진이고 무엇이고 즉시 철군해야 했을 터.

‘임거정, 자네 계책이 이번에는 족히 치밀하지 못하였네.’

대군을 상대할 때 그 치중(輜重, 군수품)을 노리는 것은, 그 옛날 조조가 원소의 대군을 상대할 때에도 쓰였던 유구한 병법.

그러므로 임거정의 의도는 이윤경이 보기에 뻔하였다. 군량이 없으면 관군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을 믿고, 강음 주변의 산을 타고 급습한다는 것.

이윤경 자신이 이를 알고 병력을 내어 강음을 지키니, 기린역을 급습하고 달아나는 관군을 이용해 자중지란 벌이는 계책을 낸 것이리라.

허나 진복창이 저의 소임을 다하여, 아군을 죽이는 실수를 범하면서도 끝내 군량만은 지켰다.

설령 진복창이 실패했다 한들, 이미 조정을 강하게 채근하여 모아둔 군량을 모두 예성강 따라 올리고, 조읍포 한 곳에만 모아두었던 군량을 의민당이 텅텅 비워둔 금암역(金巖驛)과 평산 관아의 창고에 나누어 쌓아두었으므로 그 타격이 크지 않았을 터.

‘물론 그 자리에서 임시변통으로 우리의 주즙(舟楫, 배)을 노린 것은 훌륭하나, 그 역시 궁여지책에 지나지 않는다네.’

아무리 군량이 넉넉하지 못하다지만, 그렇게 끌어올린 곡식이 그리 적지 않아 족히 한달 보름은 버틸 만하였다.

어차피 도성에 남아있다 한들 윤원형과 그 무리가 빼돌리기만 했을 군량. 이렇게 미리 올려 화근을 없앴으니 어찌 다행이 아니겠는가.

“여보게, 게 누구 있는가? 군관들을 다시 모아야 하겠네.”

“예, 도원수 대감.”

벌떡 몸을 일으키며 이윤경이 말했다.

이번 싸움으로 비록 적잖은 군사를 잃기는 했으나, 아예 죽은 것도, 완전히 전의 잃고 탈영한 것도 아니니, 벽란도 정도 하구에서 수습하면 족히 되돌릴 수 있을 것이다.

그보다 중한 것은, 이윤경 자신이 미리 곡식 옮겨둔 것을 저들이 알지 못하고 곧 관군의 군량 떨어지리라 착각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어찌하면 이것으로 그럴듯한 술수를 꾸밀 수 있을까. 그것을 고민하는 이윤경이었다.

이어지는 회의에서도, 이윤경은 물론이요 군관 모두가 이번 싸움으로 얻어낸 엄청난 이점에만 신경을 쓸 뿐이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뼈아프게 다가올, 그러나 이미 그 시점에서 손을 쓸 수 없게 된 실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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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문종 시기에 빠르게 발전한 조선의 화약무기는 이후 세조대 총통위 해체를 기점으로 쇠퇴·정체하게 되었다는 것이 통념입니다. 실제로 변란이 사라지면서 화약의 수요가 일부 줄고, 조선 초기에 육성된 화약장들이 일거리를 잃으면서 성종 연간에 이들을 파진군(破陣軍)이라는 일종의 특수부대로 편성하여 겨우 명맥을 잇게 한 일도 있었지요.

물론 실제로는 물밑에서 나름대로 화약 제법과 관련한 발전이 이루어지고 천자총통으로 시작하는 화포 체계의 정비가 이루어지는 등 꾸준히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 특히 을묘왜변 이후 - 화포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도 없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조선 전체적인 국방 시스템의 문란이 화포와 화약의 생산에도 악영향을 준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원 역사의 16세기 조선은 임진왜란 이전까지 화포로 공성전을 벌일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화포를 공성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데 대한 인식이 얼마나 있었는지, 관련된 군사교리는 어떠했는지 등은 상세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원 역사의 이홍남 역모 고변 당시 꾸며진 소장에서, 이홍윤 등이 화포를 탈취하여 한양을 공격하려 했다는 말이 포함된 것, 그리고 한참 뒤인 임진왜란 당시 명군이 화포를 사용해 공성전을 벌이는 것을 두고 ‘새로운 제도’ 운운하는 일이 없었던 것 등을 고려하면, 성황산성을 화포로 공격한다는 발상 자체는 당대에도 충분히 가능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작중에 등장한 자모산성은 벽초의 『임꺽정』에도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자모산성은 여몽전쟁 당시 치열한 싸움이 벌어진 것으로 유명한 평안도 순천의 자모산성과는 다른 성으로 – 종종 둘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 작중 서술된 것처럼 평산에서 연안·배천으로 가는 길목에 있습니다.

작중 진복창이 벌인 아군 간의 교전은, 비슷한 시기의 유례(類例)를 감안하면 그 자체로는 죄가 되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징비록』에 기록된 이야기로, 임진왜란 초기 용궁현감 우복룡이 군사를 이끌고 가던 중, 제승방략에 의거하여 집결하러 가는 중이던 하안 군사 수백 명을 만났는데, 이들이 무례하다 하여 그 자리에서 쳐서 죽이고는 왜적을 무찔렀다고 거짓 보고를 한 예가 있었습니다. 결국 우복룡은 그 ‘공’으로 영달하게 되었고, 죽은 병사들의 유족이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나 끝내 그들의 호소가 통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작중의 진복창은 이보다 훨씬 정당한 사유로 아군을 살해하였으므로 적어도 이 일로는 따로 죄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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