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도적의 싸움 (3)
조선국에서 평범한 공사(公事) 처리하는 빠르기가 달팽이 기어가는 것보다 아주 약간 빠름을 감안하여, 이윤경은 우선 저의 도원수 직함으로 족히 통제가 가한 옹진 첨절제영에서 화포를 빼오기로 했다. 그 화약이 다할 즈음 조정에서 승낙이 (사후에) 떨어지면, 그때 교동에서 옮길 심산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 또한 신도(臣道)에 맞는 일은 아니었으나, 반란을 진압함이 훨씬 중하므로 만에 하나 어느 소인배가 가운데서 일을 막지 못하도록 해야만 했다. (예컨대 그런 소인배로는 윤 아무개, 서원군, 대비전 아우 되는 이 등이 있었다.)
그리하여 일부러 도성에 가는 군관은 배를 타고 한양까지 곧장 가는 대신 우봉에서 강을 건너 개성·장단·파주 등을 거치게 하고, 옹진에서 화포 끌어오는 일은 가장 급한 일로 삼아 재촉하기를 아끼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옹진에서 총통이 들어오고, 새로운 군략에 의거하여 관군 역시 속속들이 평산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의민당의 주력이 관군을 향해 과감한 공격을 감행하도록, 병력을 한 군데 모으고 성황산성 한 곳에 집중하여 공략하기 시작한 것이다.
성이 무너지기 전 어떻게든 수를 써야 한다는 조바심으로 인해 실기(失機)할 수밖에 없게끔 한다는 것이었는데, 장수산성 공략에서 별 재미를 못 보아 군공에 목말라 있던 남치근은 이를 크게 반겼다.
그리하여 각 읍내에는 삼천여 명 정도만 남기고, 나머지 4만을 모두 평산으로 모은 뒤 성황산성을 한 겹 에워싸고, 또 평산 주변의 굵직한 산과 그 기슭에 다시 사람의 줄을 만들었다. 철통같이 나아올 길을 지키니, 의민당 또한 멀리서 횃불과 꽹과리 소리로 사람을 괴롭게 할지언정 예전처럼 마음대로 날뛰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이윤경 본인은 대군을 직접 지휘하는 데는 자신보다 남치근이 나음을 알았기에, 그에게 산성 공략의 중임을 맡겼다.
그리하여 기세등등한 관군이 성황산성 성벽으로 다가가는데, 갑작스런 호령이 관군 귀청을 때렸다.
“야, 쏴라!”
그 말에 일제히 산성 안에서 활 쏠 수 있는 이들이 일어나 시위를 당기려던 차.
“응사!”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던 성벽 앞 수풀이 들썩이더니 그쪽에서 먼저 화살이 날아갔다. 서둘러 산성의 의민당도 뭔가 해보려 하였으나, 일반 백성들의 활솜씨라는 것이 지리하지 않기가 어려운바 곧 정예한 관군의 화살비에 침묵하게 되고야 말았다.
“그래,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다.”
그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던 남치근이 외쳤다.
“방포!”
“방포하랍신다!”
산성 안 촌놈들은 살아생전 듣지 못한 천지 뒤흔드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곧 챙겨온 총통에서 석환(石丸)이 날아가며 성곽을 깨부수었다.
“궁수들은 적당이 성벽 밖으로 머리를 못 들게 하라! 준비되는 대로 다시 방포!”
“다시 방포하랍신다!”
옹진 첨절제영에서 보관하던 총통과 화약이 모두 성의 없게 수장(收藏)된바, 명목상 화포는 많았으나 실제로 쓸 수 있는 것은 드물었다. 그런데 우연히도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수철연의환이 총통과 함께 따라와, 오늘 이렇게 공을 세우게 되었다.
“하하! 이것이 천운 따르는 것 아니면 무엇인가!”
목숨이 위태롭지 않다고 가정하면, 무관으로서 이만한 전장이 없었다. 동고 대감의 동생이 도원수로, 서원군의 오른팔 양곡(洋谷, 진복창) 대감이 부원수로 있으니, 이 싸움에서 전공 세워 높으신 분 눈에 들지 않는다면 또 언제 이런 절호의 때가 오랴.
(물론 실제로 싸움터를 눈앞에 둘 때는 얘기가 달랐다.)
다만 옆에서 명목상 지휘를 하던 부원수 진복창은, 이미 한 번 성황산성을 치다가 실패한 고로 남치근이 저의 옆에서 눈치 없게 떠드는 것을 좋게 보지 않고 있었다. 허나 그것을 눈치채기에 남치근은 너무나 득의양양해 있었다.
화포 소리가 두어 차례 이어지니, 마침내 백성들이 어설프게 늘 하던 대로 보수해 왔던 성벽이 한계를 드러냈다.
“아이고! 아이고!”
“무너진다! 피해라!”
“전군 진격!”
남치근이 우렁차게 외치니, 역시 기세 오른 경군 정예들이 앞장서서 고성 지르며 뛰쳐나갔다.
그때였다.
“멈추시오!”
무너진 성벽 가운데서 백기 – 영 꼬질꼬질한 무명베이기는 했으나 어떻게 잘 보면 흰색으로 보이기는 했다 – 가 휘날렸다.
“우리는 투항하겠소! 산성 안의 의민당원만 잡아가고, 부디 안의 양민들은 놓아주시오!”
검붉게 물든 천을 머리에 감고 있는 사내가 남은 성벽 한 군데 위에 올라가 외쳤다. 사시나무 떨듯 손을 떠는 것이 성벽 아래에서도 보였으나, 목청만은 당당하였다.
“흥, 쏘아라!”
“기다리게!”
남치근이 명을 내리려던 차, 진복창이 이를 제지하였다.
“너희의 장수는 어디 있느냐?”
“내가 이곳 장수요! 의민당 흑의군 패두 최만복이라 하오! 성 안에 곡량이 있으니 모두 가져가고, 양민들의 목숨은 살려주시오!”
“네놈이 지금 부원수 대감을 희롱하느냐? 너희 장수는 어디 가고 너 같은 일개 상한(常漢, 상놈)이 나왔느냐!”
눈치 없게 남치근이 옆에서 끼어드니, 진복창이 차갑게 비웃었다.
“하, 이래서 어리석은 무부(武夫)와는 일을 더불어 논할 수 없다. 저 성 안의 군량을 확보하는 것이 더 큰 공임을 어찌 모르는가?”
남치근이 모든 공을 세우는 것을 원치 않던 진복창이 그 자리에서 그럴듯한 논리를 내어 남치근을 억눌렀다.
“여봐라! 본관이 바로 부원수니라. 성 안의 모든 백성을 거느리고 나오되, 너희 의민당은 따로 모여서 포승을 받을지어다! 지금 이 명을 받들지 않으면 성중의 그 어떤 생령도 남기지 않을 것이니 너는 그리 알거라!”
결국 백기는 그대로 성벽에서 내려오고, 주눅 든 백성들이 겁에 질린 채 우르르 나오기 시작했다.
성 안에 갇혀 관군을 상대하던 역도들이, 어지간한 관군 군졸보다 잘 먹어서 안색 좋음을 깨닫는다면 분명 감회가 적지 않을 것이련만, 진복창도, 남치근도 그만한 사람됨은 되지 못하였다.
그렇게 성황산성은 공성 열흘 만에 함락되었다.
“그대들이 공이 많았소. 처음부터 사로병진을 하기보다는 이렇게 한 곳에 집중하여 뚫었다면 소중한 인명과 군량을 아낄 수 있었을 터인데, 이 모두 본관의 부족함이외다.”
진복창과 남치근에게 치사하며 이윤경이 스스로 낮추어 말했다.
조정의 누가 저들 의민당이 이처럼 강성하리라, 조정의 정사에 대한 원망이 이토록 독했으리라 미리 알았겠는가. 그것을 살피지 못하여 이렇게 시일을 끌어야 했던 것을 안타깝게 여길 뿐.
“내일부로 다시 북상하여, 봉산에 머물고 있는 평안도 북병과 함께 정방산성을 칠 것이오.
정방산성을 지키는 봉산군수 이원수는 군재가 없는 인물로 고(故) 풍성부원군에게 청탁하여 군수 자리에 나아간 자라 들었소. 그러나 정방산성은 성황산성보다는 지세가 험준하고, 더구나 그저 도적 무리끼리 버티던 이곳 성황산성과는 달리 어쨌든 장수가 있는 셈이니, 오늘보다 싸움이 어려울 것이외다. 마땅히 대비하여야 할 것이오.”
“예, 대감!”
남치근이 이번에야말로 정말 공을 세우겠다는 열의에 불타 답했다. 적당의 수괴 임 모는 아니더라도, 이원수쯤 되면 그 아래에 백성인지 도적인지 분간 안 되는 자들 말고 진짜 역적들도 있을 것이요, 그런 자들이라면 붙잡아 죽임으로써 저의 공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었다.
“도원수 대감, 투항한 도적들은 어찌하실 생각이시오이까?”
“그들 중 장수 노릇하는 자가 있었다 들었소만.”
“그렇소. 스스로 밝히기를 의민당 패두라 하더이다.”
“아직 우리가 적당의 사정을 잘 모르는 것이 많소. 봉산에 가까워질수록 저들의 저항 또한 강력해질 것이니, 미리 탐문하여 그 허실을 살피고자 하오.”
이윤경이 그리 말하니, 상놈 하나 심문하는 것이 공이 될 리 없다 여기는 진복창과 남치근은 순순히 물러났다. 그들이 나서는 길에 언질 한 번 하니, 곧 최만복이가 포승줄에 묶인 채 이윤경 앞에 꿇어 앉혀졌다.
이름은 거창하나 결국 백성과 도적의 모임에 지나지 않던 이들이, 그럴듯한 장수 하나 없이 그저 그들끼리 뭉쳐서 관군에 열흘이나 항거한 것은 분명 대단한 일. 그러나 이윤경은 그것을 두고 찬탄할 계제가 아니었다.
“네가 늦게나마 귀정(歸正)하여 투항하였으니, 비록 죽음은 면치 못하겠으나 네가 청한 대로 너의 일가와 산성 가운데 양민들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다.”
“고맙소.”
나라의 대감이자 오만 관군의 주장(主將) 앞에서 나오는 언사가 자못 불손하였으나, 이윤경은 이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임거정 한 사람과 지금껏 이야기 나누어보았을 뿐, 나머지 반당(叛黨)이 무슨 심산으로 동참하고 있는지, 관에 항거하려는 마음이 얼마나 굳건한지는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네가 오만한 언색(言色)을 고치지 않으니 이로 말미암아 너의 가족에게 화가 미칠 수 있다. 그러나 네가 본관의 말에 순순히 답한다면 그 과오는 잊어주마.”
“싫소. 어차피 죽을 판인데, 내가 언제 어르신 같은 높은 분께 이리 평대해볼 수 있겠소?”
“너는 너의 일가를 지키기 위해 투항한 것 아니더냐?”
“어차피 그들의 생사여탈이 나리 손에 있거늘, 내가 무엇을 하든 무슨 상관이 있겠소. 우리 당은 나라 안의 귀천을 없애고 고고한 선비부터 천한 노비까지 모두 살기 좋은 세상 만들고자 일어났소.
내 본디 고갯길에서 굴러먹던 도적놈이었는데, 이처럼 큰일에 함께하게 되었으니 이 모두 당의 은덕이외다. 그러니 투항할지언정 내가 당을 버려 그 사정을 함부로 발설할 수는 없소. 이제 평대 다 해보았으니 얼른 죽이기나 하시오.”
어째 익숙한 말투. 어디서 들었는가 생각해보니 바로 우봉의 강변에서 임거정이 저를 상대할 때의 그 모습이 겹쳐 보였다.
“너희 당의 다른 자들도 다 너와 같은 생각이리라 보느냐?”
“내 보기는 그렇소. 진퉁 당원들은 모두 공으로 소일하던 놈팽이와 도적놈들, 한량과 무뢰배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관과 맞상대하기에 이르지 않았소?
꼭 당원이 아니라도, 일반 백성들 모두가 마찬가지일 것이오. 사세가 부득이하게 된다면 이렇게 투항을 하겠지만, 그렇게 되기 전까지 한 번 싸워보지도 않고 병장을 내려놓는 일은 없을 것이외다.”
그제야 이윤경은 깨달았다. 싸움에는 이겼을지언정 이 반란을 진압하는 데는 이미 실패하였다. 오만이 아니라 오십만 관군을 이끌고 온다 해도, 팔도 백성 마음으로 퍼져나간 저 오만불손한 생각을 주워 담을 수는 없을 것이다.
관이라 하면 고개 숙이고 묵묵히 따르던 백성은 사라질 것이요, 예의 그 무서운 ‘군주민수’ 노랫말처럼 나라의 정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곧장 들고 일어나는 것이 도리라 여기는 백성만 남을 터.
이윤경이 그 당돌한 답에 회한에 빠지려는 찰나.
“도원수 대감, 도원수 대감!”
군관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평산 일대 산을 지키는 군관들이 일제히 철군을 청해왔습니다!”
“그 무슨 말이더냐?”
군관은 발 동동 구르다가, 바깥을 보시라 청하였다. 그리고 이윤경은 고개를 들어 바깥을 에워싼 산을 보았다.
평산을 에워싼 산줄기 따라 사람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각 진영으로부터 이삼백보 떨어진 곳에 저렇게 적도가 무리지어 에워싸고 있는데, 수효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 합니다! 또한 그들이 외치고 때로 욕설 하기를, 성황산성 안에 있던 그들의 일가붙이들을 당장 방면하라 하니, 그 기세가 자못 흉험하다 합니다.”
이윤경이 관군을 모아 집중할 수 있다면, 의민당은 그보다 몇 곱절은 될 백성들을 한 군데 모을 수 있었다.
저 최만복과 같은 자들이 황해도 백성 열 중 하나가 채 안 된다 한들 관군과 수효 비등할 것이요, 절반이 그런 생각을 품는다면 관군으로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었다.
하물며 여러 군현의 백성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이렇게 나아옴에랴.
그래도 끝까지 나라의 위엄을 지켜야만 했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이윤경이 명했다.
“읍내 군영에 머무는 군사를 모두 내어 각 진영에 보강하게. 한 발짝도 물러나서는 아니 되네. 단 어떤 일이 있어도 먼저 저들을 쳐서도 아니 되네. 알겠는가?”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러고서 최만복인지 최복만인지 하는 적당 패두도 본래 갇혀 있던 곳으로 보내었다.
헌데 그러기가 무섭게 또 다른 군관이 뛰쳐 들어왔다.
“대감! 의민당 모주 이지함이라는 자가 백기를 들고 찾아왔습니다! 대감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무어라, 이지함?”
대역죄인 이지함의 이름이 나오니, 이윤경 또한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투항을 하러 온 것인가? 그렇다면 저렇게 세를 과시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직접 만나보는 수밖에.
“이곳으로 데려오도록 하게.”
대역죄인 이지함이라 하면 지난 수 년을 붙잡히지 않은 역적 중의 역적이다. 적어도 서원군 윤원형이 우기는 바에 따르면 그러하였다.
어쩔 수 없이 진복창은 다시 불러와 동석하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물렸다.
서른 남짓이나 되었을까, 말쑥한 인상의 이지함이 인사를 올렸다.
“소생 이 아무개가 이름 높으신 도원수 대감을 뵙습니다.”
옆에서 진복창이 헛기침을 하였는데, 이지함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작금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내 곰살맞게 손님이나 후학 대하듯 대하지 못함을 양해해주게나. 자네는 엄연히 적당에 몸 담았고, 나라의 죄를 받은 지도 오래 되었네. 어찌하여 이곳에 찾아왔는가?”
“그야 투항의 일을 논하기 위함입니다.”
“하하, 투항이라! 잘 찾아왔군그래.”
옆에서 진복창이 삐죽 끼어들었으나 역시 이지함은 무시로 일관하였다. 저쪽이야 붉으락푸르락하든 말든 알 바 아니라는 듯, 이지함이 말을 이었다.
“본디 이렇게 찾아오는 것은 소생의 뜻이 아니었으나, 금일 관군이 성황산성을 파하고 적잖은 인명이 상하였다 들어 결국 마음을 정하게 되었습니다.
황해도는 전국 팔도 중 그나마 근래의 재변에서 무사한 곳이며, 그 백성 하나하나가 나라의 바탕입니다. 또한 오만 관군을 끌어모을 때 이 나라의 간성(干城) 되는 정예한 군병을 내었으니, 이들 하나하나가 상하면 이 역시 나라의 크나큰 손실입니다.”
“하! 이런 무도한 자가 있나! 저들 무리가 많다 하나 한낱 도리깨 따위를 든 농군과 아낙이 태반이요, 나머지 의민당도 그저 도적과 무뢰배에 불과하거늘, 관군보다 수효가 조금 많다 하여 그처럼 무엄한 말을 하는가!”
저를 번번히 없는 사람 대접하는 이지함에게 분노한 진복창이 조소하며 말했다. 이윤경이 조금은 진중한 말투로 거들었다.
“투항을 논하기 위해 찾아왔으면서, 어찌하여 저렇게 그대 당원과 황해도 백성으로 산을 빼곡히 덮었다는 말인가? 이미 의민당은 역적으로 그 죄상이 드러났고, 이렇게 한 도를 빼앗아 조정에 항거한 것 역시 유례없는 일.
즉시 모든 병장기를 내려놓고 산에서 내려와도 겨우 선처를 조정에 청할 수 있을 터인데, 이렇게 관군을 겁박하는 형세를 취하니, 이는 사리에 맞지 않네.”
그러자 이지함이 당돌하게 대꾸했다.
“아, 소생이 말의 뜻을 분명히 밝히지 못하여 두 분 대감께 오해를 샀습니다. 관군이 저희에게 투항하는 일을 논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무어라?”
“도원수 대감,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당장 이자를 붙잡아 도성으로 압송하시지요! 아니, 역적이니만큼 당장 참하여 진문에 효수하여도 될 것입니다!”
“오만 관군은 즉시 흩어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특히 경군은 지금 바로 귀경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여봐라, 밖에 누구 없느냐? 당장...”
“부원수! 조용히 하시오!”
끝내 이윤경이 잠시 평정심을 잃고 목소리를 높였다. 마음 같아서는 머리통을 한 대 쥐어박고 싶다는, 다소 선비답지 못한 생각까지 잠시 품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아, 아직 도성의 소식을 못 들으셨나 봅니다. 소생은 도원수께서 철군하기 전 마지막으로 후방의 안위를 도모하고자 전군을 동원하여 성황산성을 깨뜨리신 줄 알고 이렇게 나아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소생이야말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지함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난날 기린역과 강음 조읍포에서 관군이 크게 패한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때 조읍포에서 배를 훔쳐 달아난 관군은 모두 추포하셨는지요?”
“흥, 그것을 우리가 어찌하여 알려주어야 하는가?”
이번에는 진복창이 그나마 맞는 말을 했다. 그러나 이지함은 뻔히 예상했다는 듯 가볍게 받았다.
“아마 다 추포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사람은 거의 모았을지언정, 조읍포에서 달아난 배, 특히 일전에 의민당이 긴요하게 쓴 바 있던 조운선 열 척은 끝내 찾지 못하였겠지요. 관군이 아니라 우리 의민당 임 당수가 몰고 갔으니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이윤경은 일시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의민당이 예성강에서 배를 타고 내려가 노릴 곳이라면, 단 한 곳.
조선의 모든 것이 있는 그곳, 한양.
“조운선 열 척이라면 격군(노잡이)까지 합한들 고작 천에서 천오백이 전부일 터. 그것으로 도성을 노린다는 말인가?”
“도원수 대감, 그 말씀은 잘못되었습니다. 도성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한참 전부터 노리고 있었지요. 길게는 삼 년을 준비한 일이니, 며칠 전 도성은 함락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감히 주상의 옥체에 불궤(不軌)를 노리지는 않으므로 상께서는 큰 변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글쎄, 서원군께서는 어찌 되셨을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말인지 통 갈피를 못 잡고 있던 진복창이, 서원군 석 자가 나오자 비로소 알아듣고서 사색이 되었다.
“이보게, 내 임거정 그이의 일신 무재가 뛰어남은 알고 있네. 허나 도성은 엄연히 금군(禁軍)과 경군이 지키고 있고...”
“경군조차 군기가 문란하기 이를 데 없는데 금군이라고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우리 당은 일찍이 이를 알고 맞추어 대비하였습니다.”
이것이 그 옛날, 꺽정이가 십수년 앞날 보고 왔다고 고백하였을 때부터 두 사람이 짰던 대계였다.
조선의 관군은 형편없으나, 적어도 억지로 수천에서 수만을 짜낼 힘은 남아 있다.
그렇다면 조정이 온 힘을 다하여 황해도에 밀어넣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단번에 도성을 취하면 된다.
꺽정이 전생에는, 도성 한복판에서 그의 패거리가 포도관을 활로 쏘아 죽여도 끝내 잡지 못할 정도라 하였다. 금군이라고 딱히 더 대단할 것은 없었다. 하물며 이미 그들이 도성 취할 계책을 면밀하게 마련해두었으니, 아무리 병가(兵家)의 일에 백이면 백 확실한 일이 없다지만 적어도 일이 쉬이 실패하리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헛소리! 설령 네놈의 무리가 일시 도성을 범한다 한들, 즉시 일대의 경군이 모여들어 어육(魚肉)을 만들... 터... 어억!”
진복창이 뭐라 한 마디 하려다가, 무언가를 깨닫고 괴성과 함께 뒤통수를 부여잡았다.
그 경군은 도성이 아니라 이곳 평산에 모두 모여 있었던 것이다.
일대의 군량을 모두 평산과 그 주변, 예성강 건너편에 나누어 쌓아두었으니, 다시 도성으로 상경하려 한다면 이를 고스란히 모아서 가져가야 한다.
또한 사로병진을 할 수 있던 이전과는 달리, 평산 한 곳에 모여 있으니 그리 넓지 않은 한 줄기 길을 따라, 그것도 예성강과 임진강을 지나 넘어가야 한다.
이윤경이 혼신을 다하여 대책을 고심하는 사이, 겨우 정신 붙잡은 진복창이 외쳤다.
“이.... 이 도적놈의 자식, 난신적자(亂臣賊子)가, 감히 조정의 위엄을 농락하느냐!”
“하하, 도적이라, 말씀 잘 하셨습니다. 의민당은 결국 도적의 무리지요. 그러니 도적의 무리가 도적처럼 싸운들 무슨 부끄러움이 있겠습니까? 도적의 싸움이란, 승리마저 훔쳐내는 것입니다.
아, 그리고 평산 당도하신 첫날 밤 이곳 군영에 군졸로 위장하여 잠입한 이들이 있었는데, 그들도 지금 데려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붙잡으신 우리 당 사람들과 함께요.”
“뭣? 저놈 잡아라! 당장 잡아!”
진복창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허나 사람을 어찌 이리 오라가라 하는가 불평 꾹 참고 달려온 군관들은 곧장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었다.
실성한 듯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이윤경, 그리고 홀로 노발대발하는 진복창 외에 아무도 없던 것이다.
“대감, 누굴 잡으란 말씀이십니까?”
“방금 전, 저쪽 담장을 훌쩍 뛰어넘어 달아났다! 당장 붙잡아라! 나라를 농락한 역적의 모주다!”
“아니, 저 담장을 말입니까?”
“그래! 당장 움직여라! 움직여!”
그러나 뭔가 해보기도 전. 또 다른 군관이 숨 가쁜 채 달려들어왔다. 참으로 금번 싸움에서 이처럼 소식 전하는 군관들의 노고가 크고도 컸다.
“큰일입니다! 우리 군졸로 위장한 적당이 의민당원 가둔 곳을 부수고 포로를 빼내고 있습니다!”
“군사는 두어 무엇을 하느냐? 붙잡으란 말이다!”
“부원수 대감, 허나 그 군사가 모두 주변 산속의 군영을 보강하러 가 있사온데...”
마침내 분을 못 이긴 진복창은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마치 남의 일인 양 지켜보던 이윤경이 입을 열었다.
“보내주게.”
“도원수 대감?”
“이미 우리 손을 벗어났네. 양민 하나라도 덜 죽이고, 원한 한 점이나마 덜 쌓는 쪽이 나을 터.”
“... 알겠습니다. 그리 조처하겠습니다.”
“그리고 여기 부원수도 좀 데리고 나가게. 금일 노고가 참 많았던 듯하네.”
그렇게 진복창도, 다른 군관들도 모두 나간 뒤, 한참 멀리 산을 따라 빙 둘러 있는 하얀 인파를 보던 이윤경이 마침내 홀로 말했다.
“도적의 싸움이라. 그렇지... 이것 참, 멋지게 당하였어! 하하하!”
언제부터 이 의민당 손에 놀아나고 있었단 말인가? 이제 이윤경 입 밖으로 나올 것은 웃음 뿐이었다.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동남쪽 도성을 향해 절을 올렸다.
“전하! 신 윤경이 부족하여 성덕(聖德)에 참으로 큰 누를 끼쳤습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개국 이래 도성 일대에서 칼부림은 났을지언정 지방 군현의 반적이 상경하여 끝내 도성을 범한 일은 지금껏 없었다. 설령 임거정이 도성을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한들, 이윤경 그의 실책은 사서에 길게 남고야 말리라.
이지함이 이윤경과 진복창을 실컷 농락하던 것으로부터 며칠 전.
노인 하나가 도성 강대(現 마포·용산 일대)의 둔치에 서서 하구를 망연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 노인은 바로 강대에서 유명한 미치광이 점쟁이였다.
그가 강대에 나타난 것은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강대 사람들은 다들 그가 얼추 지난 을사년(1546) 옥사 이후에 보이기 시작했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타난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죄 받아 죽은 윤임이나 그 일파의 사람이라는 둥, 저는 우연히 화를 피했는데 나머지 가솔은 죄다 관노비 박힌 것을 알고서 미쳤다는 둥 이런저런 설이 나왔는데, 노인은 스스로 무엇이 맞다 밝히지 않았으므로 누구도 답은 알지 못했다.
그는 평소에는 강대 저자에서 점을 보다가도, 서쪽 두모포(豆毛浦)께에서 어부들이 고기를 잡아 돌아올 때면 산통이고 복채고 내던지고 달려가 구경을 하곤 했다.
그러다가 건져올린 물고기 중 간혹 월척이 눈에 띄면 큰소리로 떠들곤 하였다.
“어, 거 물고기 크다! 이제 드디어 윤원형이가 죽으려나 보다!”
추레한 노인이 물고기만 보면 실성하여 저리 고래고래 외치므로, 사람들은 안타깝게 여기고 걱정할지언정 그를 붙잡거나 하지 못하였다.
“사람들, 내 말 들어보오! 큰 물고기(大+魚)가 땅에 올라오니(行) 합하면 형(衡) 자요! 물고기는 땅에 올라오면 죽으니, 이것이 바로 징조요! 징조!”
그러나 올해 들어 도성 민심이 흉흉해지면서 그것도 조금 달라졌다. 결국 악명 높은 윤두리손이, 그러니까 윤형민이 아래서 일 보는 주먹패들의 귀에까지 그 실성한 노인네 소리가 들려왔고, 노인이고 뭣이고 공경 없는 무리들이 나타나 결국 그 늙은이에게 몰매를 놓고야 말았다.
허나 그것으로 그칠 노인이 아니었다. 부러진 뼈가 붙지 않았음에도 노인은 여전히 강가에 나가 고기 구경을 하며 고래고래 외치기를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그를 걱정하던 주변 사람들조차, 저를 먼저 걱정하여 노인이 나타나면 피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오만 관군이 황해도로 떠나고, 도성 안에는 곡식도, 군사도 거의 사라졌을 무렵. 다리 절룩이며 강가로 향한 노인은 무언가를 보았다.
새벽 해를 마주하며, 하구에서 큰 배 열 척이 올라오고 있었다. 이곳 경강(京江)이나 그 일대에서 쓰는 조운선쯤이나 되는 듯하였다.
힘깨나 쓰는 격군들이 탔는지, 꽤 빠르게 강을 거슬러 올라오던 배들은 양화진을 한참 지나 마포 근처에 닿자 갑자기 왼쪽으로 틀어 나루를 향했다.
“이대로 밀어라!”
“영차, 영차!”
격군들 외치는 소리가 실성한 노인의 어두운 귀에까지 닿았다.
새벽부터 나와서 하루 일을 준비하던 이들이, 그제야 배를 보고 놀라서 떠들어대었다.
“어어, 부딪힌다!”
“피해라!”
곧이어 와장창 소리와 함께, 열 척 배가 모두 모래톱과 둔치 위에 올라왔다. 처박힌 모양새로 보건대 다시는 쓰지 못할 듯하였다.
그리고 곧장 그 배에서 사람들이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아, 하하! 그랬군! 그랬어!”
실성한 노인이 홀로 떠들었다.
“큰 물고기가 정말로 땅 위에 올랐구나! 정말 큰 물고기야! 이보게들, 이보게들! 윤원형이를 꼭 죽여주게!”
그러자 배에서 내린 거한 하나가 노인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려고 왔소이다.”
어느새 거한 뒤에 수많은 장정들이 모여들었다.
흑의군이 앞장서고, 노 내려놓고 각자 병장기 챙긴 황해도 수군 출신 의민당원들이 곧 뒤따랐다.
“자, 가자! 오늘 우리는 나라를 뒤엎는다!”
이제 막 눈 뜨기 시작한 도성을 난데없는 흉흉한 함성이 뒤덮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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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에 몇 번 등장한 옹진 첨절제영(첨절제사 관할)은 이 시기 황해도 수군의 최선임 부대였습니다. 도 전체의 수군을 통합하여 운용하는 황해수영은 황당선과 해상 밀무역 단속의 필요성이 대두된 숙종대에 이르러서야 설치되었지요. 당시 황해도 수군들의 해이한 기강은, 바로 그 남치근조차 혀를 내두를 만큼 심각하였습니다. 1559년 주사대장(舟師大將)을 맡아 수군 관련 업무를 담당하던 남치근이 황해도 일대 수군의 근무 상태를 검열한 일이 있었는데, 벽란도 주둔 수군을 관할하는 개성도사 권이평은 배를 타기 싫다며 소집에 응하지 않았고, 월곶 첨사 고겸은 화포 실사격을 하라는 지시가 두 번이나 내려왔는데 – 심지어 한 번은 남치근이 직접 주관하고 있었습니다 – 두 번 모두 제멋대로 회피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쓸만한 화포가 있는 것이 오히려 더 놀라울 지경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