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나라 훔치기 (1)
꺽정이가 숭례문에 당도할 무렵에는 이미 도성 안쪽에 기별이 모두 전해졌는지, 문이 굳게 닫혀 있는 것이 보였다.
“이놈들! 썩 물러나지 못할까! 이곳이 어디라고 망동하느냐!”
문루 위에서 수문장일 누군가가 꾸짖는 소리가 들렸다.
“활을 쏴라!”
그러나 그 말 듣는 꺽정이는 성벽 아래가 아니라 이미 위에 올라와 있었다.
“도성 인심 야박하다지만, 손님 대접하는 법도가 이게 무어요?”
“그 무슨... 아니, 어떻게 여기에?”
예상했던 문루 아래쪽이 아니라, 바로 곁에서 낯선 목소리 들려오니, 지금껏 당당하던 수문장 목소리가 갑자기 당혹감과 두려움으로 확 기세 죽었다.
“알 것 없소.”
그리고 칼날 번뜩.
한 리쯤 서쪽, 올라오기 좋게 적당히 성벽 무너진 곳으로 달려가 이렇게 미리 올라온 꺽정이와 몇몇 흑의군 앞에, 숭례문 문루 위에 있던 몇 안 되는 관군은 금방 이승 하직하거나 도망하고야 말았다.
곧 숭례문 성문은 ‘예를 숭상한다’는 이름값을 못하고 일개 도적과 탈영한 수군 무리에게 열리고야 말았다.
우르르 밀려들어오는 의민당원들을 향해, 꺽정이가 외쳤다.
“잊지들 마라! 금일 우리가 가장 요긴하게 쓸 병장기는 환도도, 활도 아니요 우리 목청이다!”
“예, 당수님!”
어느새 변고 소식이 다른 쪽까지 닿았는지, 남은 세 성문 문루에서 급하게 댕댕 타종하는 소리가 멀찌감치 들려오고 있었다.
가장 먼저 달려온 것은 포도대장이 이끄는 순라군이었다.
“이놈들, 지엄한 도성에서 무슨 소란을 벌이려 하느냐! 당장 흩어지지 못할까! 그렇지 않으면... 엇?”
황해도 의민당이 이곳 한양에 나타날 리 없으므로, 그저 어리석은 백성들이 소란 일으킨 것 아니겠느냐 단정하고서 출동한 포도대장이 나름 위엄 갖추고서 호령하다가 절로 멈추었다.
흉흉한 기세. 그리고 일천에 달하는 수효. 우두머리인 듯한 자의 옷에 흥건히 묻은 혈흔. 그와 그를 따르는 순라군들 모두 얼어붙게 하기에 족하였다.
“오, 나리, 그 말 좋아보이는구려.”
“엇, 어어...?”
“뭣들 하느냐. 잘 모셔드려라. 저기 따라온 포도청 졸개들은 잘 흩어주고.”
기세 흉흉한 의민당이 단번에 ‘우왁!’ 소리 내며 달려드는 시늉을 하자, 고작 백여 명 남짓한 – 허나 이것도 좌포도청 한 곳의 포졸을 모두 모아 온 것과 다름없었다 – 포졸들은 모두 포도대장 달려오다가 그 자리에 멈추어 서고는 반대편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포도대장도 급히 말머리 돌리려 하였는데, 뭔가 해보기도 전에 날아든 돌멩이에 뒷통수 얻어맞고 곧장 낙마하였다.
“죽었네?”
“거 참 재수도 없는 사람이구만.”
하필 떨어질 때 목이 제대로 꺾여, 그 자리에서 절명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의민당의 도적과 탈영병들은 그런 것 신경 쓸 만큼 선량하지 못하였다.
말 한 필을 얻었음을 더 기쁘게 여기는 꺽정이도 마찬가지였다.
“저, 당수. 달아나는 놈을 그냥 내버려 두어도 되겠습니까?”
그 모양새 보며, 한양 무뢰배 출신으로 길잡이 맡고 있는 흑의군의 양벽이가 물었다.
“냅둬라. 저놈들이 달아나면서 우리네 소문을 퍼뜨리면 퍼뜨릴수록 이득이니.”
생각보다도 더 허술한 도성의 관군이었다.
저 포도대장조차 의민당이 정말로 한양에 나타났는지, 아니면 그냥 난동 부리는 백성인지 잘 알지 못한 눈치였다. 지금 달아난 포졸들이 여기저기 알리게 되면 그제야 정신 차리고 움직이겠지만, 그렇다 한들 쭉정이만 남은 경군과 궁궐만 지키는 금군, 그리고 윤원형이가 부리는 시정잡배 수백 정도가 전부일 터.
허나 꺽정이 쪽도 사정이 그리 여유롭지만은 않았다. 금군이 아무리 그 이름만큼 정예하지 못하다 하더라도 어쨌든 조선국 기준으로는 정예한 이들이요, 그들이 궁궐에 의지하여 버틴다면 손에 든 병장기 외에 다른 무기는 없는 의민당으로서도 적잖은 피해를 감수해야 하리라.
그런 사정을 얼추 아는 양벽이므로 이렇게 꺽정이에게 물었던 것이었다.
“어차피 우리 일천 남짓한 무리로 도성을 장악할 수는 없다. 그러니 힘 닿는 데까지 난장판을 만들어서 아무도 도성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야지.”
그 무슨 말인가 아직 이해 못하는 눈치인 양벽을 위해 더 설명하는 대신, 꺽정이는 말 위에 올라타고서 의민당 패거리에게 지시를 내렸다.
“움직여라! 광통교로 향한다! 가는 길에 외치기로 한 것은 계속 외치면서 간다!”
도성에서도 보기 어려운 정예한 군세가 척척 보무 맞추어 대로를 행진하였다.
문루의 종은 급하게 타종을 몇 번씩이나 하고, 포졸들은 큰일이 났다며 혼비백산한 채 저자를 쏘다니고, 이어서 저런 무서운 무리가 대로에 나타나니, 무슨 변고인가 두렵고 또 궁금하였던 도성 백성들이 어느새 우르르 몰려나와 길가에서, 또 벽 너머로 고개 내밀며 의민당 행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그들이 목청껏 우렁차게 외치는 바를 듣고서, 모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역적 윤원형을 죽여라!”
“대역죄인 윤원형을 잡아라!”
하늘 나는 새도 떨어뜨릴 줄 알았던 서원군 대감 윤원형이 어느새 역적이 되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저들은 관군의 편인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역적의 가산은 모두 몰수하여야 한다! 다들 너희 입에 들어가야 할 것을 빼앗아 누린 것 아니더냐!”
무리의 우두머리인 듯한 거한이 길가의 백성들을 똑바로 바라보며 외쳤다.
“윤원형의 집을 털어라!”
“그 곳간을 부수어라!”
“빼앗아라! 그리하면 모두 너희 것이 된다!”
그 말에 모두의 눈이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지난날 군량을 마련한답시고 도성 안의 쌀을 모두 걷어가다시피 하였던 윤원형. 그러나 그 곡식 중 실제 얼마만큼이 군량미가 되었겠는가?
아니, 사실 그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은 굶주렸고, 그 굶주림 채워줄 수 있는 것이 바로 한양 곳곳에 있는 윤원형 집의 곳간에 그득 쌓여있다는 것만이 중하였다.
이제 윤원형이 역적이 되었다 하니, 저 거한과 그 패거리가 외치는 것처럼 그들이 몰려가 양껏 빼앗는다 한들 하등 문제될 바 없지 않겠는가?
“와아! 쳐라!”
“가자! 모조리 빼앗으러 가자!”
“근방 윤원형 집이 어디인지 내 알고 있소! 따라오시오들!”
멍하니 구경하던 이들이 광포한 군중으로 돌변하기까지는 한두 각이면 충분하였다.
그렇게 일천 명 의민당이 대로를 따라 보무당당히 걸어가는 곳마다, 조정에서 난민(亂民)이니 간민(姦民, 간사한 백성)이니 부를 만한 자들이 불어나고 또 불어났다.
그리고 그렇게 퍼져나간 불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 불길이 되어 도성 곳곳에 검은 연기를 피워올렸다.
의민당이 그나마 제대로 된 저항이라 할 만한 것을 만난 것은 광통교에 이를 즈음에서였다.
“당수님, 적입니다!”
“이놈들, 못 건넌다!”
아마 윤원형 아래서 더러운 일 하는 무리일 법한 자들이, 온갖 집기나 쌀섬 따위를 가져다가 광통교를 틀어막고서 버티고 있던 것이다.
“허, 진짜 관군도 아니요 그저 잡다한 패거리 주제에 이 몸을 막겠다고 나선 것이냐? 그 용기는 갸륵하나 어리석음은 안타깝구나!”
“시끄럽다! 당장 물러나지 못할까!”
“나는 성정이 꼬여서, 그런 말을 들으면 더욱 물러나기가 싫어지더라.”
그러면서 꺽정이는 멀쩡히 있는 말 위에서 내렸다.
“당수?”
“혹여나 이 말 다치면 나중에 곤란해질 수도 있어서 말이다.”
그 말과 함께, 꺽정이가 다리를 향해 질주하였다.
“어, 어?”
“당수님이 도술을 쓰신다!”
이곳 광통교는 한두 해 전 유명한 병해대사가 ‘도술’로 날아서 건넜던 곳인데, 그 사제인 꺽정이는 순전히 저의 다리 힘으로 뛰쳐나가 붕 날아올랐다.
그리하여 윤원형 아래 잡배들이 애써 막아둔 것 위로 껑충 뛰어올라 그것을 무용지물로 만들고는, 반대편에 착지하였다.
“먼저 죽고 싶은 놈부터 나와라.”
“이이... 에잇! 죽어라!”
“싫다.”
방금 전까지 당당하게 못 건넌다고 선포하였던 놈팽이의 목이 그대로 달아났다.
“와아아! 임 당수!”
“시끄럽다! 네놈들도 따라와라, 얼른!”
달려드는 자들 셋을 단칼에 베어내며 꺽정이가 말했다.
“아까는 자못 기세가 좋더니만, 그사이 다 죽었구나! 자, 목숨들 내놓아라!”
족히 삼사백은 넘을 법한 무리가 한 사람 앞에서 뒷걸음질쳤다.
“에잇, 쳐라! 저놈 하나만 잡으면 된다!”
차라리 이들이 제대로 된 경군이었다면, 활을 난사하여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한다던지,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서 대응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기강 해이한 경군보다도 한참 못한 이들에게 그만한 깜냥이 될 리 없었다.
꺽정이가 칼 한 자루로 달려드는 자들을 상대하는 동안, 속속 넘어온 흑의군이 옆에 합류하였다.
“당수, 돕겠습니다!”
“하하! 이놈들, 한양 뒷골목에서 나와 눈도 못 마주치던 놈들이 뒷배 생겼다고 허세깨나 부리는구나! 나 양벽이가 돌아왔다!”
훈련할 때는 꺽정이와 싸우고, 지난 몇 달은 관군과 싸웠던 흑의군이다. 시정잡배들이 오래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버텨라! 원군이 왔다!”
저쪽에도 그사이 원군이 당도하여, 거의 오백 가까이 수효가 불어났다.
허나 이제 와서 그런들 무엇하리오. 이미 그들의 보잘것없는 진영은 완전히 격파당했고, 패한 자들이 울고불고 하며 여기저기 골목으로 달아나고 있었는데.
결국 한 각쯤 더 꺽정이 발목 잡는 것에 불과하였다.
“크윽, 물러나라! 물러나서 서원군 대감 댁을 지킨다!”
그 말 나오기가 무섭게, 그나마 끝까지 남아 버티던 자들마저 흩어져 사라졌다. 백여 구쯤 되는 시체만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미처 명 끊어지지 않은 자들의 신음만 저자에 남았다.
“아니 쫓아도 되겠습니까?”
“아서라. 일일이 골목 따라다니며 놈들 잡으려 했다가 어느 세월에 도성을 함락시키겠느냐? 그리고 머리 굴리는 놈이 있다면 그런 골목 어딘가에서 매복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놀아나 줄 이유는 없지...
흠, 거 이상하군.”
꺽정이가 여기저기 시체들을 살피더니 저의 패거리에게 명을 내렸다.
“야, 쓰러진 놈들 가운데 아직 명줄 붙어있고 정신 멀쩡한 놈이 있는가 한 번씩 까뒤집어 보아라. 내 물을 게 있다.”
뉘 말이라고 아니 따르랴. 창대나 칼자루 등으로 쿡쿡 찌르면서 확인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몸에 얕게 칼 베인 흔적만 있고 그 외에는 멀쩡하던 놈 하나가 죽은 체 하고 있다가 붙잡혀 왔다.
“히익! 살려주십쇼!”
“뭐, 네놈 하는 것 봐서. 내 하나 물을 것이 있다.”
“뭐든 말씀만 하십쇼!”
“네놈들 이끄는 것은 윤두리손, 아니, 요새는 윤형민이라 자칭한다던가. 좌우지간 그놈 아니었느냐? 그놈은 어디 가고 너희 시답잖은 것들만 남아서 버티고 있었던 것이냐?”
“그, 그것이... 남대문 쪽에서 서원군 대감을 어떻게 한다는 소리가 나돌자마자 곧장 대감을 모시고 입궐하였습니다.”
그냥 사라졌다고만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묵직한 적정(敵情)을 털어놓는 잡배 놈이었다. 물론 꺽정이가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었다.
지난날 황해도 너머로 의민당 소식을 행상 통해 퍼뜨린 바 있는 의민당이다. 그 행상들이 한양을 못 오갈 이유는 없었으니, 이제 그의 사형 병해와 각미사 사람들, 그리고 그 보우라는 중놈이 잘 해주기를 바라야 할 터.
“하, 역시 그랬는가. 알았다. 내 너를 살려서 보내주마.”
“하면 저는 이제 어떻게...?”
장난기 동한 꺽정이가 짖궂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죽을 것이다.”
“예?”
“어차피 윤원형이 따르던 놈들은 며칠 사이에 목숨 끊어질 공산이 크다. 평소 원한 많이 쌓고 다녔다면 지금이라도 도성 떠나야 한두 달이라도 알량한 목숨을 연명할 수 있을 터. 자, 그러니 얼른 꺼져라!”
“예, 예!”
한때 시체 시늉을 했던 사람치고 퍽 날렵하게 골목으로 사라지는 잡배 놈의 등짝을 보며, 꺽정이가 옆의 양벽을 불렀다.
“양벽이.”
“예, 당수님!”
“윤원형 집이 아무리 한두 채 아니라지만, 그래도 도성에 불사를 곳이 얼마나 많은데 윤원형이네만 골라서 치면 좀 재미가 적지 않겠느냐?
무리를 절반으로 나눌 테니, 너는 오백을 거느리고 가서 장예원(掌隸院)을 불태워라. 지금까지 우리가 했던 것처럼, 당당하게 장예원 불태우러 간다고 떠들고 다니는 것 잊지 말고.”
장예원이라 하면 육조거리의 형조 있는 쪽 뒷골목에 있었다. 온갖 관아가 복잡하게 얽힌 골목이라, 본디 한양 사람인 양벽이 아니라면 찾는 데 어려움이 없지 않을 터.
“그리고 오막손이.”
“예!”
“너는 나머지 절반을 이끌고 여기서 동대문 쪽으로 빠져라. 그쪽에 창선방이라는 동네가 있는데, 윤원형이 재물 모아놓는 곳 중 하나라서 아마 백성들만으로는 뚫기 어려울 테다.
그곳에 있는 문객 하나쯤 족치면 다른 윤원형이 저택 길잡이로 부릴 수 있을 테니, 부터 쭉 윤원형이 저택을 돌면서 아직 무너지지 않은 곳은 모조리 부수고 노략질을 해라.”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 저희도 좀 챙겨도 될지...?”
“하하하! 이놈! 우리는 나라를 훔치러 왔다. 그깟 재물쯤이야 무엇이 중하겠느냐? 정 챙기고 싶으면 내 나중에 내탕(內帑) 열어서 너희에게 나누어 주마.”
나머지 무리 가운데서 곧장 문답이 오갔다. ‘내탕이 뭣이오?’하는 질문에 ‘임금의 가산이오.’하는 답이 나왔다. 윤원형이가 암만 치부하였다지만 임금만 하겠는가? 모두의 입가에 함박웃음이 피어올랐다.
내탕을 사사로이 나누어준다는 것의 의미를 아는 지가 이 가운데 있었더라면 그 자리에서 기함하였을 테지만, 그런 자가 없는 것을 보니 의민당 가운데에 적의 세작이 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하면 당수께서는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천여 명을 오백씩 둘로 나누어 맡긴다 하면 꺽정이는 홀로 어딘가 간다는 뜻이다. 셈을 마친 오막손이가 다시 물었다.
“윤원형이 입궐했다 하니 곧 임금을 모시고 어딘가로 내빼려 할 터. 지금 우리 중 말 탄 이가 나밖에 없지 않으냐? 물론 거기에도 대비가 되어 있지만, 윤두리손 그놈의 싸움박질 재간이 여간내기는 아니니 내가 직접 가는 것이 맞다.”
“헌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우리가 천 명 가깝다 하지만 실제 싸움박질의 절반은 당수께서 놈들 기세를 꺾어놓는 것이 차지하지 않습니까? 가던 중 관군이라도 만나면 어찌할지...”
오막손이가 조심스레 물으니 양벽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꺽정이는 쾌활하게 답하였다.
“지금 조정에 생각 있는 자가 있다면, 궁궐로 모든 군사를 모으고 있을 것이다.
허나 우리가 궁궐로 가지 않으면 그만 아니겠느냐? 흐흐... 장예원에 불 지른 것이 만약 육조 관아까지 번진다면, 그때는 더 나서지 말고 그냥 뒤로 빠져라. 혹여 궁궐의 금군이나 경군이 불 끄러 나오면 따로 막지는 말고, 오히려 놀리면서 부추겨주어라.”
그 쾌활함이 남들 보기에는 흉흉하고 또 음험하였다. 꺽정이가 웃으니, 그 옛날 청석골에서 임 당수가 직접 흑의군 조련할 때의 기억이 생생하였던 이들 모두 절로 오금이 저려옴을 느꼈다.
그러므로 자연스레 더 질문하는 이는 없고, 그대로 행해지게 되었다.
도성 이곳저곳을 불길이 덮치는데, 환호하는 이들만 있고 불 끄려는 자는 드물었다.
기침(起寢)한 임금이 아침 문안을 드리러 모후(母后) 찾아뵈러 가던 차. 변고의 소식이 들려왔다.
“전하, 참으로 망극한 일이옵나이다! 역적 의민당을 자처하는 일단(一團)의 난민(亂民)이 마포에 나타나, 숭례문으로 향하고 있다 합니다!”
“역적의 방자함이 실로 하늘에 닿는구나! 당장 성문을 걸어잠그고, 일직(日直, 당직)하는 자들에게 알려 대신들이 대책을 마련하게 하라.”
그러나 한 식경도 채 지나지 않아 더욱 흉한 소식이 들려왔다.
“난민의 무리가 아니라, 실제로 의민당 무리라 합니다! 그 우두머리 임거정이 이끌고 있고, 이미 숭례문 수문장으로 있던 호군 박 모는 흉적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합니다. 또한 좌포도대장 장언량(張彦良)이 순라군을 모아 막으려 하였으나 역시 패하고 장언량은 살해당하였으며 말까지 빼앗겼다 합니다!”
“허어... 이 어찌해야...? 서원군, 서원군을 입궐케 하라!”
그런데 서원군 윤원형보다 먼저 대비가 임금을 찾아와 다급하게 말했다.
“주상! 당장 궐을 떠나야 합니다!”
“허나 아직 금군이 있는데 어찌 도적이 범궐을 하겠습니까? 소자가 서원군과 함께 대책을 마련하여 막도록 하겠습니다.”
“주상! 바깥을 보십시오! 바깥을! 온 도성이 불길에 휩싸이고 있단 말입니다!”
그 말 따라 바깥에 나와, 담장 너머를 보았다. 궐 밖의 풍경이 보이지 않는 구중궁궐이었으나,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는 검은 연기는 임금에게도 족히 보였다. 그리고 다가오는 싸움 소리. 사람과 쇠붙이의 비명이 하나되어 임금의 여린 귀에 파고든다.
서책 속에서나 보았던 전란이 어느새 임금의 이목을 향해 날아 들어왔다.
“주상! 이 어미의 말을 들으세요! 주상의 옥체에 해가 닿을지 모르니, 지금은 파천(播遷, 임금이 피란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대비가 체통을 잊고 주상의 두 어깨를 붙잡고 간곡히 말하니 임금의 유약한 마음도 끝내 흔들렸다.
“허나 서원군이...”
“서원군이 경군을 모두 모아 황해도로 보내지 않았더라면 주상께서 이르신 대로 궐을 지키며 적도를 진압하는 것 역시 가하였을 테지만, 지금은 겨우 궐 한 곳을 지키는 것도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일이 이리 되었는데도 서원군의 말만 따를 것입니까? 어미의 아우와 어미 중 누가 더 가까운 사이입니까?”
아들에 대한 걱정, 권력에 대한 욕심, 아무리 윤원형이 애를 써도 끝내 사라지지 않은 앙금이 모두 섞여, 진심으로 튀어나왔다.
임금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중,
“전하! 신 서원군 입시이옵나이다!”
윤원형이 나타났다.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는 것이 대비의 눈에는 띄었으나, 임금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삼가 아뢰옵건대 파천이 마땅하다 하겠습니다,”
“그, 역시 그렇구려. 알겠소. 허나 내 임금이거늘, 궐을 먼저 벗어난다면 어찌 되겠소이까?”
“이 나라 사직은 주상 한 사람께 오롯이 달렸습니다! 적도가 일천에 불과하다 하니 결코 도성 안에서 오래 날뛰지 못할 것입니다. 잠시 은밀히 몸을 피하여 도성을 벗어났다가 때맞추어 돌아온다면,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요, 만에 하나 있을 위태로움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위태로움을 피한다’란 임금보다는 윤원형 한 사람을 위한 말이었다.
“지금 지중추부사로 있는 이준경은 무재(武才)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밀지를 내리시어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으시되 이를 바깥에 알리지 못하게 하시고, 성상께서는 옥체 보중할 계책으로서 잠시 도성 벗어날 채비를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갑작스러운 밀지 받들어 입궐한 이준경은 졸지에 윤원형 대신 화살받이 될 자리에 앉혀지게 되고, 임금과 대비, 윤원형의 아내 정난정, 그리고 윤원형이 사사롭게 부리는 문객들 중 무예에 능한 자들 열댓, 임금과 대비를 모실 내관 몇몇만 대동한 채 도성을 벗어나기로 했다.
임금은 평범한 도령의 행색으로 변복하고, 다른 이들도 각각 반가의 범상한 남녀로 변장하였다.
“어느 쪽으로 움직임이 마땅하오리까?”
윤원형은 저의 세력 있는 교하(交河)로 향할 심산이었기에 도성 서북쪽 창의문(彰義門)을 말하려 했는데, 대비가 조금 더 빨랐다.
“아, 과연 병해대사는 기재(奇才)로구나! 주상, 우리는 혜화문(惠化門, 동소문)으로 향하면 될 것입니다.”
“아니, 그것이 병해와 무슨...?”
당황한 윤원형이 물으니, 마침내 주상 앞에서 다시 저의 현숙함 보인다 생각한 대비가 그 와중에도 짐짓 자랑스럽게 말했다.
“내 종종 선왕의 명복을 빌고자 봉은사에서 불사 치름은 알고 있으리라 믿소. 헌데 병해대사가 내게 충언하기를, 그리하면 움직일 때마다 저자의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또 세간의 어리석은 자들이 헐뜯는 구실로 삼을 수 있으니 궐에서 혜화문 쪽으로 나가는 길을 미리 수축하여 민가가 많은 곳을 피하라 하였소이다.
또한 그리 대비한다면 나중에 만에 하나 위태로운 일이 있을 때 피하는 길로도 삼을 수 있으리라 하였으니, 이것이 선견지명 아니겠소?”
자못 당당한 말투에 이미 흔들린 임금의 어심(御心)이 기울기 시작하였다.
“아, 참으로 잘 되었습니다.”
“허나 궁에서 더 가까운 쪽은 창의문이 아닙니까? 신속하게 도성에서 벗어남이 상책이라면, 마땅히 그쪽으로 향해야...”
“내 궁인을 몰래 내보내 살폈는데, 창의문 쪽 인달방에서는 이미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들었소. 거기에 자칫 휘말린다면 어찌할 테요?”
그 말대로, 인달방에 있는 윤원형 저택에서는 한창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광통교에서 패한 뒤 그쪽으로 물러난 윤원형의 잡배들과, 빼앗긴 집안의 가보를 되찾고자 나선 몰락한 집안의 한량들이 부딪히고, 기세 오른 백성들이 여기에 동참하여 한바탕 공성전이 벌어지고 잇던 것이다.
아무리 윤원형이 지록위마의 권세를 지녔다지만, 당장 벌어지고 있는 싸움을 감추는 것은 그 지록위마의 고사 남긴 환관 조고(趙高)조차 하지 못한 일.
결국 대비의 말에 따라 임금의 행차는 혜화문 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화란은 윤원형의 저택 있는 곳부터 퍼지고 있었으므로, 성벽 가장자리를 따라 움직이는 이 신작로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장예원이 불탔다!”
“이제 한양에는 관노도, 관비도 없다!”
“천세! 천세!”
간혹 이렇게 길 막고 환호하는 추레한 무리가 있기는 하였으나, 윤형민이 나서서 칼 몇 번 휘두르면 핏자국만 남기고 사라졌다.
그들이 환호할 때 할 말이 없어 임금의 천수를 기원하고 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지금까지 임금과 그 외척들이 무엇을 저버려왔는지를 깨닫기에는 모두가 경황이 없었다.
마침내 이론상 조선국에서 가장 위세 높은 사람들의 행차가 혜화문에 이르렀다. 수문장은 일찌감치 도망쳤기에, 윤형민이 직접 아랫사람들 이끌고 문을 열어야 했다.
그리고 그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대비에게 익숙한 얼굴이었다.
“천한 중이 감히 지존을 뵙나이다. 소승은 법명을 병해라 하나이다.”
그 말과 함께, 병해의 뒤로 죽 늘어선 보우와 봉은사 중들, 그리고 각미사 한량들이 일제히 부복하며 절을 올렸다.
“얼른 평신(平身)하거라! 세간의 이목에 드러나면 좋지 않다!”
윤원형이 다급하게 말했다. 몰래 빠져나갔다가 슬그머니 돌아온다는 계책이 벌써 어그러진다면 곤란했다.
그 말을 따라 모두가 곧장 몸을 일으키고, 이윽고 병해가 아뢰었다.
“바라옵건대 성상께옵서는 봉은사로 파천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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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시점에서 한양 방위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의 정식 편제 – 윤원형이 끌어모은 사실상의 사병들을 제외한 – 는 크게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도성 외곽 및 주요 궁궐의 대문을 지키는 수문장과 휘하 군사들이 있는데, 이들은 조선 중기까지는 오위에서 차출된 병력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좌·우 포도청과 형조·의금부의 나졸들이 있는데, 이들은 그 수효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일례로 중종대 설치된 포도청의 공식 편제에 따르면 장교는 26명, 그 아래 배속된 군사는 50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는 각 군사들 아래에 다시 업무를 보조하는 천민들이 있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으나, 그렇다 해도 작중 의민당에 비하면 양과 질이 모두 부족하지요. 마지막으로 작중 시점의 금군은 내금위(內禁衛)·겸사복(兼司僕)·우림위(羽林衛) 등 3개 부대로 편성되어 있었으며 총원은 중종 중기 기준 6백여 명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조선 전역에 만연한 기강의 문란은 이들에게도 여러모로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일례로 1550년 숭례문을 지키던 수문장과 군사들이 문을 버려두고 저들끼리 밥을 먹으러 갔다가, 그사이 홀로 문루를 지키던 병사가 도적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진 바 있지요. 금군 역시 비대해진 조직에 비해 그 질은 크게 떨어져 있었는데, 1549년 이기가 올린 상소에 따르면 전원 기병 편제인 겸사복조차 실제로는 짐말조차 가지지 못한 실정이고, 강궁을 당길 수 있는 사람도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작중에 언급된 장예원은 노비 관련 소송과 공노비 장부의 작성·유지를 담당하던 관서입니다. 세조 연간에 설치되었으나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성종 연간에 벌써 소위 갑질 문제와 직무태만이 누차 지적될 만큼 여러모로 문제가 많았지요.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도성을 버리고 몽진하자, 도성 인근의 공노비들이 들고 일어나 장예원을 불태웠고, 덩달아 그 근방에 있던 형조까지 불탔다고 전합니다. 이는 『선조실록』에는 전하지 않고 『선조수정실록』에만 기록된 내용으로 신빙성이 그리 높지는 않으나, 적어도 당대 장예원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는 이를 근거로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