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54화 (54/259)

18. 나라 훔치기 (2)

병해가 봉은사로 파천할 것을 청하니, 어떻게든 임금을 저의 신변에 가까이 두고 있어야 이 싸움에서 마지막 승자로 우뚝 설 수 있음을 아는 윤원형은 곧장 반대하고 나섰다.

“봉은사라니, 아니 됩니다!”

“서원군 대감께서 걱정하시는 바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이에 소승의 주청(奏請)한 바에 이로운 점은 많고 해로운 점은 적음을 말씀 올리고자 하니 귀를 기울여 주시옵소서.

봉은사는 도성에 가까우면서도 강을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이는 사세를 면밀히 관찰하며 때에 맞추어 도성에 돌아오시거나, 아니면 더 남쪽으로 이어(移御)하실 수 있음을 뜻합니다. 이것이 첫째 이유입니다.”

어찌하여 병해가 도성의 선비들 사이에서도 평이 좋은가 능히 알 수 있는 담담하면서도 조리 있는 말투였다. 그러면서도 남이 듣기 싫은 대목은 은근히 피하고, 듣기 원하는 바만 면밀히 짚으니, 평시라면 윤원형조차 혀를 내두를 만한 감언이설의 재주였다.

“또한 이미 도성에서 북쪽인 황해도에는 오만 관군이 머물고 있습니다. 만에 하나 일이 그릇되어 반적들이 도성을 그대로 점거하게 된다면, 황해도 관군에게 명하여 북으로부터 도성으로 올라오게끔 하고, 삼남의 소요를 막기 위해 아직 그곳에 머물고 있는 군사를 근왕군으로 삼아 올려보내게끔 할 수 있습니다.

만일 한양의 북쪽으로 파천하시게 된다면, 한강을 다시 건너기가 자칫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둘째 이유입니다.

그리고 봉은사는 선왕의 능침사로서 이미 자전께서 널리 불사를 베풀어주시었고, 능침을 옮김으로써 재차삼차 무거은 은혜를 내려주셨습니다. 저희 중들은 석문(釋門)이 폐함을 면하는 길은 오직 하나, 종묘사직을 성심성의껏 지키고 보위하는 것임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성상과 자전께 저희들의 명운이 걸려 있으니, 성상과 자전께서 머리와 가슴이라면 저희는 사지와 같아 성은을 벗어나 살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이치가 명백할진대, 어찌 금상과 자전께 해가 되는 일을 하겠습니까? 이것이 셋째 이유입니다.”

“그 말이 참으로 옳소이다, 대사.”

대비가 먼저 선뜻 맞장구를 치니, ‘그렇습니까?’ 하는 눈치로 반신반의하던 임금도 결국 따르게 되었다.

서원군을 믿었다가 이 꼴이 났으니, 비록 온전히 서원군 한 사람의 잘못은 아니라 한들 그의 말을 함부로 계속 따를 수는 없다며 임금은 성단(聖斷)을 내린 것이다.

곧 보우가 이끄는 봉은사 중 스물 남짓, 그리고 병해가 이끄는 각미사 한량 십수 명이 호종(扈從)하는 가운데 한껏 불어난 임금 일행이 남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대로 사세에 힘없이 끌려갈 윤원형이 아니었다.

지아비의 마음 읽은 정난정이 갑자기 대열에서 뒤쳐졌다. 핑계로 내세우기로는 말이 말썽을 부린다 하였는데, 걱정하는 얼굴로 윤원형도 자연스레 호종 행렬에서 뒤로 잠시 빠졌다.

그러고서는 곧장 윤형민을 불러 목소리 낮추어 말했다.

“너와 문객들이 저 중과 한량들을 능히 제압할 수 있겠느냐?”

윤형민이 잠시 속으로 셈을 하더니 답했다.

“예, 대감. 한량들을 먼저 친다면, 중들은 병장기에 익숙치 않으니 곧 흩어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성상께서 지금 몹시 놀라시어 사리를 분별하는 데 어려움이 있으시다. 내 어떻게든 저 병해와 말을 섞어, 강을 건너기 전 실언하게 만들겠다. 내 그것을 짐짓 성토할 때 너는 무리를 이끌고 놈들을 쳐서 없애거라.”

“알겠습니다.”

끝내 일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모든 것은 대비와 임금의 잘못이었다. 윤원형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금상과 그 주변에서 저처럼 권력을 잘 휘두르는 이가 없거늘, 그저 믿고 맡기기만 하면 되는데 왜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말인가.

마음을 얼추 갈무리한 윤원형이 다시 대열 앞으로 나아가 병해에게 수작을 걸기 시작했다. 대비의 심기를 미리 거스르지 않으려 하다 보니, 어느새 말투는 하대에서 평대로 바뀌어 있었다.

“그대와 같은 고승이 나라를 위해 마음을 쓰니 참으로 다행이외다.”

“대감께서는 어찌 그리 과찬을 하십니까. 소승은 일개 천한 중으로 다만 약간의 재주를 얻어 과분한 총애를 받을 뿐입니다.”

“이처럼 전례 없는 변고가 터질 것을 어찌 알고, 그렇게 무리까지 거느리고 혜화문 앞에서 기다렸다는 말씀이시오이까.”

“선왕의 능침을 관리하기 위해 능묘를 돌보는 중들 중 눈 밝은 이가 있었습니다. 새벽에 기이한 배가 마포에 상륙하고 거기서 기세 흉흉한 무리가 튀어나오는 것을 보고, 혹여 성상과 자전께 변이 생기지는 않을까 두려워하며 이렇게 나왔습니다. 때마침 소승과 교유하던 유생과 한량의 무리들도 의로운 마음 품고 혜화문 쪽으로 향하고 있기에, 이들을 거두어 함께 왔습니다.

아무런 일이 없이 지나간다면 어리석은 중의 어리석은 짓이 되었겠으나, 결국 이리 성상을 돕게 되었으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리저리 잽싸게 빠져나가니, 윤원형도 생각보다 쉽지 않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냥 바로 윤형민에게 말하여 쳐죽여야 하는가 싶어, 뒤쪽으로 은밀한 눈빛을 보냈다.

은근슬쩍 한량들 뒤에 윤원형의 문객들이 붙었다. 그때였다.

“성상과 자전을 돕는다 함은, 그 두 분만 지킨다는 뜻이요 서원군 대감은 여기에 들지 않습니다. 또한 앞서 소승이 고하였던 세 가지 이유 중 둘은 시뻘건 거짓이요, 오직 마지막 하나만이 참이었습니다.”

갑자기 병해가 이상한 말을 꺼냈다.

윤원형이 듣기를 바랐던 말이건만, 막상 이렇게 바로 튀어나오니 잠시 말을 잊었다. 그리고 그 찰나의 머뭇거림이 참으로 큰 차이를 불러왔다.

“적이다!”

문객 하나가 저의 소임을 잊고 외쳤다.

그 말대로, 그들 눈앞에서 바람 일으키며 말 탄 이 하나가 달려오고 있었다. 수염 텁수룩한 거한이었다.

윤형민이 곧 그의 정체를 밝혔다.

“역적 임거정이다!”

그러나 돌아오는 말이 참으로 놀라웠다.

“역적 윤원형은 목을 내놓아라!”

“무, 무어라? 내가 역적이라니, 그 무슨 말인가?”

그 말을 듣자마자 봉은사 중들과 각미사 한량들도 돌변하였다.

“역적으로부터 성상과 자전을 지켜라!”

문객들의 칼질에 한량 둘이 순식간에 쓰러졌지만, 그뿐이었다. 그저 중놈이라 여기고 무시하던 봉은사 중들 두셋이 목봉을 휘두르니 문객 하나의 뒤통수가 깨지고, 다른 하나는 마치 단창 내밀듯 목봉 끄트머리로 문객의 말 모가지를 찌르니 놀란 말이 날뛰며 저의 주인을 낙마시켰다.

그리고 그렇게 문객들이 주춤하는 사이, 머릿수 많은 것을 십분 이용하여, 중들과 한량들이 우르르 임금과 대비를 에워싸니, 어어 하는 동안 옥체가 병해의 손에 넘어가고야 말았다.

“이놈들! 하늘이 두렵지 않으냐!”

“그러는 서원군 그대는 하늘이 아니 두려워 그리 패악질을 했는가? 이것이 바로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한 길이로다!”

어느새 중들 여럿 뒤에 숨은 병해가 외쳤다.

그리고 그러기가 무섭게, 와장창 소리와 함께 문객 둘이 하늘에 떴다.

“하늘보다 일단 나를 두려워하는 게 나을 테다, 이놈들아.”

“이이...”

“쳐라! 놈을 붙잡아! 우리는 마저 뚫고 나간다. 주상을 모셔라!”

남은 문객 일곱 중 셋이 임거정을 힘 닿는 데까지 잡고 늘어지라는 지시 따라 죽으러 나서고, 윤형민이 이끄는 나머지는 주상을 다시 붙잡으려 나섰다.

아니, 나서야 했다.

“무엇하느냐! 형민아! 주상을 붙잡아라!”

“싫소.”

“무어라?”

“어차피 뚫지도 못하고, 저 임 당수에게 명줄만 끊어질 텐데, 나리 위하여 목숨 바친들 무슨 공효가 있겠소?”

“이놈이...!”

“기껏 붙잡은 것이 썩어도 단단히 썩은 동아줄이었으니, 이제라도 관두려 하오. 저기 저 임 당수 말이 맞았소. 남들에게 의지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올라갈 길을 찾았어야 했는데, 성도 없는 계집종의 자식 두리손이 하직 인사 올리오이다.”

그러면서 저 혼자 말머리 돌려 북쪽으로 사라졌다. 그의 등을 향해 우렁찬 조소가 날아왔다.

“하하, 저놈 잘 내빼는구나! 또 보자꾸나, 두리손아!”

그사이 꺽정이 발목 붙잡으려던 마지막 문객이 꺽정이가 비스듬하게 내리찍는 칼날에 맞아 저의 발목이 날아갔다. 그와 함께 말도 아랫배를 깊게 베여, 끝내 퍽 쓰러지고야 말았다.

“여봐라! 네놈들은 당장 무기 내려놓고 말에서 내려와라! 그렇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저렇게 줄행랑을 치든가.”

그러나 두리손과 달리 다른 문객들은 이판사판이라는 마음으로 달려들었다. 꺽정이 칼맛을 직접 겪어보고도 살아남은 사람이 몇 안 되기 때문에 생긴 인명의 손실이었다.

그렇게 또 한 차례 붉은 피가 땅을 적신 후.

“주상 되시오? 이 사람이 바로 임꺽정이외다. 찾아뵙느라 고생깨나 했소.”

지금까지 임금이 본 사람 중 가장 거칠고 흉흉하게 생긴 거한이 말에서 내려서는, 부복도 아니하고 – 시체와 유혈이 낭자하여 부복이 어렵기는 했다 – 그냥 허리만 꾸벅 굽히며 저런 말을 인사랍시고 올렸다.

그러니 임금은 기함하려 하는 것을 넘어 순간 비틀대고,

“주상!”

옆에 있던 대비가 겨우 붙잡아 낙마는 면하였다.

“너무 걱정은 마시오. 내 성정이 본디 뒤틀리고 거칠어서 말은 사납게 하지만, 주상을 해칠 생각은 전혀 없소. 내가 주상 해쳐야 할 만한 연유를 만들지 않는 한 내 말을 지킬 것이외다.”

그때 누군가 꺽정이 뒤통수를 한 대 빡 때렸다. 바로 병해였다.

“이놈, 무엄하다! 너는 저기 서원군 대감 말동무나 해 드리거라.”

“제기, 도성까지 함락시킨 장군감이면 뭐하나. 어디 가서 뒤통수나 얻어맞고 돌아다니는데.”

그때, 멀리 혜화문 쪽에서 흙먼지 이는 것이 보였다.

“전하! 전하!”

이준경이 주상의 신변이 걱정되어 보낸 겸사복 마병들이었다.

그들 눈에 주인 잃고 멀뚱멀뚱 서 있는 말들, 그리고 그 아래 나자빠진 시체가 띄자, 말발굽 소리가 더욱 가파르게 빨라졌다.

“이보시오. 병해 스님. 앞서 내 언뜻 듣기로, 그대들이 이런 술수를 꾸민 이유 중 하나가 종묘사직의 안위를 도모하기 위함이라 하였소. 이 맞는 말이오?”

대비가 병해를 부르는 말이 ‘대사’에서 ‘스님’으로 떨어졌다.

“예, 실로 그러합니다.”

“내 그대를 마지막으로 믿어보겠소. 어차피 다른 수도 없으니.

주상, 저들 겸사복에게 하명하시지요.”

“무... 무어라 하면 되, 되겠습니까?”

“호종 행렬을 습격한 역적의 무리는 모두 죽거나 달아났으며, 곧 환궁하여 난을 다스릴 것이 그리 알라 하시지요.”

가뜩 주눅 든 임금은 헛기침 두세 번 하더니 더듬더듬 그 말을 그대로 옮겼다.

“자, 이제 난을 다스리시오. 어명이 내려졌으니, 종묘사직 보위한다는 그대들이 따르지 않는다면 이 또한 아니 될 일이겠지.”

대비가 병해를 보며 말했다. 병해 앞에서 당당한 척을 한다고 나름 성의껏 허세를 부렸으나, 대비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 속내 훤히 들여다본 병해 앞에서는 무리였다.

“명을 받들겠나이다.”

“하면 동대문으로 모시겠소. 그쪽으로 해서 육조거리로 향해, 광화문으로 들어가시면 되겠구려.”

꺽정이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끼어들었다. 윤원형에게 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남편과 아내 두 사람이 모두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자, 움직입시다들! 도성이 저리 불타는데 가만히 있어서야 되겠소! 갑시다!”

죽고 다친 이들은 봉은사 중들로 하여금 돌보게 하고, 병해와 보우 두 사람, 그리고 각미사 사람들까지만 대동하여 동대문으로 향했다. 윤원형 부처와 죽은 문객들의 말은 모두 빼앗아 봉은사에 시주하였고 – 결코 처리가 귀찮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 윤원형과 정난정은 그 자리에서 대충 새끼줄로 묶었다.

그리하여 본디 봉은사로 향하려던 행렬은 그 길의 삼분의 일도 채 가지 못한채 다시 도성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마침내 대부분 사람들에게 익숙하지만 정작 임금 한 사람에게는 생경한 대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문이 열려 있구나.”

임금이 별 생각 없이 말했다.

“하하, 내 어찌 저쪽으로 나왔겠소? 당연히 뚫고 나왔지. 수문장과 그 아래 군졸들로 말하자면 이 사람 나타나자마자 꽁무니를 빼고 달아났으므로 딱히 인명은 아니 상했소.”

자연스럽게 저 무서운 임 아무개와 멀쩡한 대화를 나눈 꼴이 되었다. 임금은 끝내 눈 질끈 감고 아까부터 머릿속에 품고 있던 물음을 던졌다.

“그... 그대는 어찌하여 서원군을 역적이라 칭하였는가? 그가 대관절 무슨 죄를 지었는지 나는 알지 못하거니와, 조정에서 그를 탄핵하는 말이 나올 때도 그런 흉참한 혐의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노라.”

“뭐, 별 뜻은 없소. 역적이란 무엇이오? 내 마음에 거슬리는(逆) 도적놈(賊)이면 그게 바로 역적이오. 주상 외삼촌 되는 이가 나를 저의 마음대로 역적으로 만들었으니, 내가 그것을 그대로 돌려준다 한들 무슨 흉이 되겠소이까?”

뒤에서 윤원형이 부들부들대는 것이 마치 귀에 선하게 들리는 듯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임거정 심기 거슬렀다가는 더 흉한 꼴, 예컨대 성문 들자마자 맨앞에 그와 아내를 세워두고 조리돌림하는 수도 있었으므로, 간신히 무어라 항변하는 것을 참았다.

아직은 떄가 아니었다.

한편 그 무렵, 육조거리 앞은 지극히 어지러운 모습으로 화해 있었다.

“형조도 불태워라! 윤원형 말에 따라 수없는 선비와 백성들에게 누명을 씌우던 곳이다!”

“전옥서도 부수어라! 억울하게 붙잡힌 이들을 풀어주자!”

“의금부! 윤원형의 억지 역모로 끌려들어온 선비들을 구해주자!”

의민당이 외치는 말이 아니라, 모여든 군중이 광소(狂笑) 섞어 떠들어대는 말이었다. 근처에 윤원형의 집 없는 이들, 아니면 재물보다는 원한 푸는 데 더 눈이 뒤집힌 이들이 모여들어, 양벽과 의민당이 장예원 불태우는 동안 장마철 강물처럼 한껏 불어났다.

그들이 물결처럼 들이닥쳐, 횃불로써 그들의 그간 쌓인 울분을 푸니, 검은 연기가 올라갈 때마다 환호하며 즐거워하는 이들이 나왔다.

아직도 광화문은 열리지 않고 있었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더욱 기세가 올라, 마음대로 난동 부리면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간의 굶주림, 힘 없으니 참는 수밖에 없다 여기며 그저 버텨온 원통함. 그것이 모두 터져나오고 있었다.

“관솔이오! 포도청 창고를 부수고 관솔을 구해왔소! 하나씩 받아가시오들!”

“도끼, 도끼 받으시오! 아까 나자빠져 죽은 윤가놈 졸개 몸 뒤져 구해왔소!”

그 광기 가운데서도 묘한 질서가 스스로 일어나니, 혼란 가운데서도 서로 돕고 보살폈다. 그들이 뭉쳐서 행하는 바는 오직 하나.

“조정의 잘못을 우리가 바로잡는다! 모두 불태워라!”

궐문은 끝내 열리지 않고, 그러니 목청 큰 자들끼리 점차 과격한 말을 내뱉기 시작한바 여기에 이르게 되었다.

“패두님, 이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조금 과하게 흘러가고 있다 여긴 흑의군 졸개 하나가 양벽에게 물었다.

“뭘 어떻게 하느냐. 이게 다 당수님 노리신 바 아니겠느냐?”

“그렇습니까?”

“그냥 그렇다고 해두자 이 말이다, 이놈아. 꼬치꼬치 캐묻기는.”

“어째 당수님 옆을 자주 지키시더니 당수님 닮아가시는 모양입니다.”

“오냐, 그러면 내 당수님이 우리 쥐 잡듯 했던 것처럼 네놈도 잡아 족쳐주마.”

그렇게 오백 명 의민당은 육조거리 한복판을 지키고만 있고, 지금껏 없던 든든한 뒷배가 생긴 백성들은 더욱 날뛰었으며, 광화문 문루 위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는 이준경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멍하게 서서 불구경을 하고 있었을까.

태울 곳은 이미 다 불을 놓았는지, 한층 더 과감해진 백성 몇몇은 의민당 진영을 뚫고 광화문 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어느 틈에 술까지 들이켰는지, 탁주 냄새가 매캐한 연기를 뚫고 당원들 코에 닿을 정도였다.

“이보시오! 금군 나리님들! 도성이 이리 불타는데 뭣들 하고 계시오?”

“평소에는 그리도 거들먹거리면서, 지금은 무엇들 하고 있소?”

“우리네 바치는 조세로 녹봉 받고 또 우리가 내는 목화로 솜옷 지어 입는 분들께서, 지금은 왜 가만히 궁궐 안에 틀어박혀 계시오? 이럴 때 백성들 앞에서 솜씨 보여주셔야지!”

“와하하! 옳다! 그 말 옳다!”

“와아아!”

그렇게 다들 희롱하며 비웃는데, 갑자기 진지하게 외치는 한 줄기 목소리가 있었다.

“그 말이 옳다! 동고 대감! 문을 열고 나오시오! 아무리 어명이라지만, 이렇게 도성이 불바다가 되어가는데 금군이 궐만을 지키고 있다니 이 가한 일이오?”

앞서는 보이지 않던 추레한 선비 둘이 서 있는데, 행색을 보아하니 이제 막 전옥서에서 풀려난 듯하였다.

그렇게 한 사람은 쩌렁쩌렁 외치고 다른 하나는 이 일에 엮이는 것이 영 꺼려지는 양 자꾸 주변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목청 큰 선비가 성큼성큼 걸어와 양벽에게 말을 걸었다.

“이보게. 보아하니 그대도 그 의민당 무리인 듯한데, 혹시 차고 있는 환도 내게 팔 생각이 있는가?”

“예?”

“무릇 제대로 된 선비라면 항상 칼을 차고 다님으로써 의(義)를 보여야 하는 법. 내 본디 패용하던 검은 경상감영에 빼앗긴 고로 잠시 그대에게 빌릴 수도 없고, 그래서 아예 사려는 것일세. 값는 내 조만간 병통해서 주도록 하지.”

너무나 당당한, 요구인지 제안인지 애매한 말에 양벽은 그 자리에서 띠돈 풀고 검을 넘겨주고야 말았다.

“고마우이.”

그렇게 넘겨받고서는, 다시 성큼성큼 광화문 앞으로 나아갔다.

“전하! 지금 전하의 백성이 들고 일어나 관아를 불태우고 중신의 집을 약탈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종사가 위태로운 것은 지난 수십년을 돌이켜 본들 전례가 없습니다!

지난날 반정과 정난 중 이렇게 나라를 능멸하는 것을 본의로 삼은 일이 있었습니까? 어찌하여 순량한 백성들이 나라를 업신여기고 욕하려는 뜻을 품게 되었을까, 스스로 고민하고 생각해보신 적은 있으십니까?

전하! 백성이 돌아선 나라는 나라가 아닙니다. 정녕 망국을 이번 대에 겪고자 하십니까? 당장 문을 열고 나오십시오! 문을 열고 나와 백성을 위무하시고, 뉘우치는 뜻을 밝히십시오!”

어떻게 사람이 부복하고서도 저처럼 우렁찬 목청을 낼 수 있단 말인가. 누군지는 몰라도 과연 비범한 선비임이 틀림없다고 의민당 당원들은 수군거리고 있었다.

“동고 대감! 바라건대 이 말을 꼭 궐 안에 계신 성상께 전해주시오! 내 상소를 올려 주상께 경계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려 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움직임이 굼떠 이를 이루지 못하였소! 허나 그 상소의 대강(大綱)은 지금 얼추 밝혔으니, 부디 전해주시오! 사직의 앞날이 여기에 달렸소!”

그 말이 끝나자 잠시 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서 빗장 열리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려왔다.

“문이 열린다!”

마침내 한쪽 협문(夾門)이 조심스레 열리고, 금군 몇몇을 거느린 이준경이 앞으로 나왔다. 그것을 본 다른 추레한 선비 하나도 앞으로 걸어나와, 광화문과 육조거리 맞닿는 자리에 세 사람이 서서 서로 맞이하게 되었다.

양벽은 곧 귀 밝은 의민당 당원 몇몇을 보내어 골목 쪽에서 엿듣게 하였다.

“이름 높으신 남명 선생을 뵙소이다. 참으로 오랜만이오.”

“동고 대감 역시 이 어지러운 조정에서 고역이 참 많으시소. 그 옛날 이곳 한양에서 함께 노닐 때는 이리 만날 줄 알았겠소이까.”

이어서 이황이 자신을 소개하였다.

“부족한 학문으로 과한 명성을 얻은 전 풍기군수 퇴계입니다.”

“퇴계 선생의 학문이 부족하다 하면 누가 감히 배웠노라 자칭하겠소.”

곧장 조식이 무언가 말하려 입을 여니, 이준경이 먼저 그의 말을 앞질렀다.

“... 지금 선생께서 성상을 향하여 상언한 바는 옮겨드릴 수 없소. 의금부에 갇히신 지도 적지 않은 날이 흘렀다 들었소이다. 아직 운종가 근처에는 소란에 휩쓸리지 않은 곳이 많이 남아있고, 성균관 유생이나 삼사의 언관들도 선생을 기꺼이 그들 집에 모시고자 나설 것이오.

퇴계 선생도 숭앙하는 서생들이 한양에 수없이 많소이다. 이만 물러나고 보양에 힘쓰심이 어떻겠소이까? ”

비록 멀리서 전해오는 말을 귀동냥하는 것이었기에 정확한 정황은 모두 파악할 수 없었으나, 이준경이 그리 답하는 순간 냉기가 슥 주변에 퍼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였다.

“크하하! 그렇구려. 대감께서 언로 틀어막는 데 반발하는 이유는 딱히 없으니, 이 누추한 서생의 상언을 전할 수 없다 하는 소이(所以)는 단 하나 아니겠소?

이 나라 억조창생의 아버지 되시는 인군(人君), 성상께서 일천 도적들이 도성에 들어오자 누구보다 빨리 도성을 버리고 파천하시었다. 이 뜻이겠지.

이보시오, 동고 대감. 지금 즉시 금군의 정예한 마병을 추려서 성상께서 파천하신 쪽으로 보내시오. 멀리 삼가현까지 손을 뻗치는 의민당이, 윤원형이나 자전께서 성상께 말씀 올려 곧장 파천하기로 할 것임을 미리 알지 못했겠소?”

가만 듣던 이황이 한 마디 거들었다.

“또 만약 천우신조 있어 아직 그런 재변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즉시 환궁하시라 청해야 할 것이오. 지금 이 난리는 성상 한 분이 계시면 아직 수습할 수 있소이다. 윤원형을 죄주고 나라를 고치는 것은 그 다음이오.”

“후... 본관도 그것을 우려하여 겸사복들을 딸려 보냈소이다. 환궁 청하는 글을 다시 올리도록 하겠소.”

그때, 안국방(安國坊) 언덕 쪽에서 함성이 울려퍼졌다.

“조선국 천세! 천세!”

“역적이 붙잡혔다!”

무언가 요행이 있었기를 바라며 동쪽 언덕길로 고개 돌린 이준경은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대열 가장 앞에서 마치 자신이 개선한 장군인 것처럼 손 흔들고 있는 사람은 바로 임거정이었기 떄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르는 것은, 포승에 동동 묶인 윤원형과 정난정 – 끝내 그를 알아본 자가 여럿 있어 돌을 던졌기에 피가 관자놀이에서 철철 흐르고 있었다 - , 자전, 그리고...

이 나라의 지존이시었다.

일행이 안국방 언덕 위에서 내려와 광화문 앞으로 다가오니, 정신없이 두리번거리는 소년의 얼굴이 조금씩 선명히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루 위에서는 절로 ‘아이고, 아이고!’ 곡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두 분 선생, 반드시 허리를 빳빳하게 펴고 계셔야 하오!”

“아니, 동고 대감, 저분께서는,,,!”

“저기 구경하는 백성들은 그것을 모르오! 우리가 부복하는 것을 모두가 보게 된다면, 지금 전하께서 평복하고 계신 것은 아무 소용이 없게 되오!”

그사이 임거정은 먼저 달려와 세 사람 앞에 섰다.

“호, 이 대감, 오랜만이오. 가형 분께서는 황해도에서 잘 지내시더이다. 나머지 두 분은 뉘시오?”

“퇴계라 부르게.”

“남명일세.”

예의를 모르는 묵직한 말에 두 선비가 대꾸하는 바도 짧아졌다.

“날은 짧고 불은 꺼야 하니, 내 이리 먼저 달려왔소. 지금 이씨 나리께서 내 말을 받아들이시면, 저기 계시는 임금께서는 조용히 궁궐 안으로 돌아가실 수 있으실 것이오. 그들을 수행하던 이들은 태반이 죽거나 잡혔고, 남은 자들도 조정의 녹봉 받는 겸사복이거나 떳떳하지 못한 윤원형 아래의 잡배이므로 후환은 없겠지.

혹여 알아본 사람이 있다면, 내 적당히 말을 꾸며 퍼뜨리겠소. 역신 윤원형이 도성이 소란한 틈을 타고 주상을 납치하여 달아났고, 이를 알고서 대비하고 있던 의민당은 역도의 거사 당일 한양에 당도하여 임금을 구하였노라. 이만하면 일반 백성들이 믿지 않고 배기겠소?”

어느 쪽이든 임거정에게 유리한 길뿐이었다. 애써 한탄 억누르며 이준경이 되물었다.

“그렇다면 자네가 내세우고자 하는 조건은 무엇인가?”

“별 것 없소. 나는 이번 일로 새로운 권신이 된다던가 할 생각은 전혀 없소. 뭔 공신 작위도 필요 없고, 금은보화는 내려주시면 고맙게 받겠소이다. 대신 내가 바라는 것은, 이때를 만나 이 나라를 완전히 뒤바꾸는 것이오. 내 요구하려는 바는 우리 당의 총명한 이들이 내 대신 머리 맞대고 근 삼 년을 고민하여 내놓은 것이니, 못 배운 도적의 말이라 무시하지 말고 경청해 주시오.

첫째, 황해도에 있는 관군과 거기 모인 군량을 모두 흩어 본래 있어야 할 군현과 창고로 돌려보내시오. 다만 그 뒤 누군가 다시 반심을 품을지 모르니, 앞으로 일 년은 우리 의민당이 금군 대신 궁궐의 경비를 맡겠소.”

“무어라? 이보게, 이보게!”

“아직 말 다 안 했소. 임금이 저 백성들 앞에서 가장 먼저 도망치다가 붙잡혀 이 꼬라지 되었노라 내가 외치는 것을 정녕 보고 싶으시오?”

그 막말에, 나름 자신이 올리려던 상소에 험하고 강직한 말 들어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조식은 속으로 은근히 저보다 한 수 위인 사람 있음을 알고 안타깝게 여겼다.

“둘째, 황해도 오만 관군이 해산되면, 조정의 중신들을 모아 앞으로의 국정을 논하는 자리를 하나 마련해 주시오. 단 궁궐 밖에서 모여야 하고, 궁 안의 사람은 한 사람이라도 나와서는 안 되오.

셋째, 윤원형의 처벌은, 삼사 언관이니 의금부니 하는 나라의 관서에서 처결하지 말고, 새로운 관청, 그 위세로 따지면 조정 자체와도 같은 관청을 세워 그 죄목을 논해야 할 것이오.

이 세 가지가 요구요. 어찌하시겠소?”

“받아들이겠네.”

너무나 어려운 답이, 너무나 막막한 상황으로 인해 너무나 빨리 튀어나온다. 이준경의 주름진 얼굴을 따라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제 조선은 옛날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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