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55화 (55/259)

18. 나라 훔치기 (3)

나라의 지존이 거하는 위엄 서린 경복궁 한 구석 마당에 한없이 경박한 아우성이 울리고 있었다.

“야, 이 멍청한 놈들아! 눈은 달아두고 어따 쓰느냐!”

“아이고, 당수님! 살려만 주십쇼!”

졸지에 금군 자리 꿰어찬 흑의군들이었는데, 한양 무뢰배 출신 몇몇을 제하면 모두 하나같이 무지렁이 촌놈들이라, 입궁 사나흘 만에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그 흑의군이 며칠 전 도성을 박살내다시피 했던 것을 보았으므로 처음에는 궁인들도, 내관들도 몸을 사렸는데, 그 무시무시한 임 당수가 의외로 사람이 멀쩡하여 그들이 성심성의껏 사정 고하면 귀를 기울여줌을 깨닫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궁궐이고 뭣이고 그냥 좋다며 날뛰던 흑의군들에게는 날벼락이 떨어지게 되었다.

“살려주고 말고 일단 네놈 하는 꼴 봐서 결정하마.

야, 아무리 나도 그렇고 너희도 그렇고, 궁녀들 위아래가 어떻게 되어먹었는지는 모른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네놈들 어머니뻘 되는 사람한테 술심부름 시켜먹는 법이 어디 있느냐? 엉? 내가 그렇게 굴렸는데 어떻게 아직도 사람이 덜 되었어?”

무릇 세상을 편하게 살아가려면, 무슨 일이든 처음이 되어서도, 꼴찌가 되어서도 안 되는 법. 불운하게도 지금 마당에서 구르고 있는 흑의군 셋은 그 처음을 끊게 되었다.

궁녀들이 무수리나 방자나인들 부려먹는 것을 보고서, 저들도 부려먹으면 되겠거려니 생각하고서 눈에 띄던 궁인에게 – 딴에는 정중하게 – 술 한 병 얻어먹고 싶은데 도와줄 수 있겠느냐 하였던 것이었다.

헌데 그 사람이 하필이면 연배 지극한 상궁이었다. 사람됨 소탈하여 종종 손수 주변 소제도 하고 잡일도 직접 맡곤 했는데, 그것이 흑의군 녀석들 눈에 띄었던 것이다. 잡일을 하니 당연히 무수리인지 무수니인지 되겠거려니 하고서 말을 붙였는데, 평소 수더분한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 한 번 노하면 거침이 없었다.

그리하여 박 상궁이 그 자리에서 엄중하게 꾸짖고는 곧장 임 당수를 찾아가니, 역시 대노한 임 당수는 그 세 놈을 직접 끌고 와서 박 상궁 앞에서 재차삼차 사과하게 하고는 그 정신머리 고쳐놓겠다며 이렇게 궁궐 한 구석에서 세 사람을 굴리고 있었다.

묵직한 쌀섬을 등짝에 짊어지라 한 뒤, 앉았다 일어났다를 필두로 온갖 고행을 시키는 임 당수였다.

“내려가. 올라와. 내려가. 올라와. 내려가. 올라와. 내려가. 어쭈? 느려?”

궁궐 안에서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주변 행랑 창문마다 슬쩍 열리고 구경하는 젊은 내관과 궁인들이 가득 찼다.

(궁인들 중 취향 독특한 이들은 궁궐 주변에서 도통 볼 수 없는 생김새의 임 당수에게 홀랑 넘어가, 고생하는 흑의군 대신 임 당수만 바라보고 있었다.)

“일어서. 저기 마당 반대쪽 찍고 와라. 열, 아홉, 여덟...”

궁인·내관들과 달리 조금 더 공공연히 구경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금군에 속한 장수와 군교들이었다. 광화문 앞에서 이준경이 약조한 바에 따라 금군 대부분은 경복궁 대신 창덕궁·창경궁 등에 가 있었으나, 흑의군이 궐내 지리에 무지한 고로 몇몇 금군은 남아 흑의군을 돕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기이한 구경거리라 여기고 찾아왔는데, 임 당수 말에 따라 쌀섬 짊어진 놈들이 계속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자 점점 표정이 진지해졌다.

‘금군 가운데 저만한 용력 지닌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일개 병졸이 저만하다면...’

한편 멀찍이 떨어진 자미당 집화루(紫薇堂 集華樓)에서 그것을 구경하는 대비는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느꼈다.

지난 사나흘 동안 임 당수는 병해가 약조한 대로 그와 금상을 해치지는 않았다. 물론 그들을 간혹 마주칠 때 불손한 말투로 일관하는 것은 똑같았으나, 그가 부연하기를 본디 저의 말투가 그러하다 하였다. 따지고 보면 그것이 임 당수가 환궁한 이후 금상과 대비에게 준 모욕의 전부였다.

“자, 여기 박 상궁이 다시 돌아왔다. 아까 네놈들이 죄송하다 주워섬길 때에는 진심이 아니 느껴졌다. 이제 네놈들이 조금 정신을 차린 듯하니 제대로 사과를 올려라.”

“죄송합니다!”

대체 임 당수는 어떤 자인가? 무엇을 꾀하고 있기에 이처럼 전무후무한 일을 벌였는가?

직접 묻기가 곤란하다면, 대신 그의 ‘사형’이라는 자에게 묻는 수밖에.

“이보시오. ‘대사’. 내 몇 가지 묻고자 이리 불렀소.”

“예, 무엇이든 하문하시옵소서. 다만 소승의 마음은 이전과 다름이 없으니, 언제든 편하게 하대하셔도 되옵나이다.”

너무나 태연하게 병해가 답했다. 며칠 전 임 당수가 홀로 달려와 피를 흩뿌린 다음에도, 저처럼 태연하게 편을 바꾸었던 병해였다. 대체 언제부터 이 일을 준비했다는 말인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새삼 밀려들어왔다.

그러나 대비 그 자신과 그의 아들 주상을 위하여 물어야 하는 것은 물어야 했다. 대비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주상의 신변조차 저들 의민당에게 넘어간 것과 다름없고, 바깥 세상을 뒤흔들 수 있는 지렛대였던 아우 윤원형은 곧 죄를 받아 목숨을 잃거나 잃은 것과 진배 없게 될 터.

그러므로 굴욕을 참고 분노를 억누르며 다시 물었다.

“며칠 전, 어전에서 그처럼 무엄한 일을 벌였을 때는 세부득이함을 알았기에 그대 말을 우선 믿고 따랐소. 허나 이제라도 다시금 묻고 답을 받아야 하겠소.

그대는, 또 임 당수는 무엇을 위하여 그러한... 일을 벌였소? 정녕 그때 말한 대로 종묘사직의 안위를 위함이오? 만일 그렇다면 대체 왜 그처럼 잔학무도한 방책을 택한 것이오?”

“생령을 해치는 것은 결코 저희가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오히려 생령을 구하고자 이러한 일을 일으킨 것입니다. 끝내 상서롭지 못한 병기에 의지하고 인명을 살상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어찌하여 저희가 그런 수를 쓰게 되었을지 생각해보셨습니까?

무언가 잘못되었다, 고쳐야 한다 말씀을 올리려 하면 역적으로 몰고 마치 버찌나 오디를 따는 것처럼 사람의 목숨을 거두던 것이 지난 수년간의 조선국 정사였습니다. 그것을 이끌던 것이 누구였습니까? 그리 이끌 수 있도록 도왔던 것은 누구였습니까?

이토록 계속 악업을 쌓아나갔다면, 앞날이 어찌 되었겠습니까? 저희는 앞으로 다시는 그러한 위태로움이 종실에도, 또 억만 창생에게도 미치지 않도록 나라를 바꾸어나갈 심산으로 이러한 일을 획책한 것입니다.”

늘 그렇듯 청산유수로 말이 뿜어져 나온다.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 그러나 실제로는 불과 두세 해 전 일이었던 – 병해와의 첫 만남에서도, 병해는 이와 같은 말투로 재이론의 헛됨을 말하고, 대비가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있는 방책을 고하였다. 대체 그의 진심은 무엇인가.

“때로는 가득 채우는 것보다 텅 비우는 것이 더욱 쓰임이 많고, 마구 쟁여놓는 것보다 조용히 내려놓는 것이 더욱 안전한 법입니다. 저희 당이 장차 국제(國制)를 바꾸어나간다면, 이는 종사의 앞날에도 결코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의 당은 결국 황해도 한 도의 백성들이 뭉쳐 만든 것 아니오? 그러한 일은 무릇 뛰어난 선비와 명석한 대신들이 모여 수십 년을 고민하여야 비로소 가할 터인데, 지금 말하는 바가 어찌 이루어질 수 있겠소?”

“이르신 바가 참으로 옳습니다. 다만 저희 당이 꾀하는 바를 여러 대신과 선비들에게 알린다면, 함께 이루고자 하는 이들이 곧 구름과 같이 몰려들 것으로 압니다.”

병해가 씩 웃으며 말했고, 대비는 병해가 끝내 허세로 일관한다 여기어 더 깊게 묻지 않았다.

그러나 병해의 말은 허세가 아니었고, 이로 인하여 꺽정이는 밖에 나다닐 때마다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난생 처음 궁궐이라는 곳에 들어가, 휘황찬란한 전각 마루에 드러누워 낮잠 자고, 온갖 진미를 대접받는 것 – 처음에는 수랏상인 줄 알고 놀랐는데, 나중에야 그것이 숙직하는 금군 장수들에게 주는 식사임을 알았다 – 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나라 하나를 훔치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어서, 계속 자질구레하게 신경 쓸 일이 이어지는데, 그런 일 처리하고자 궁궐 밖을 나서면 이렇게 사람들이 달라붙는 것이었다.

“와아! 임 당수! 임 당수!”

“임 당수! 오늘 소생들이 자리를 마련했는데, 당수께서 찾아와 주신다면 어찌 일생의 광영이 아니겠습니까?”

이르기를, 천하의 완악한 간신 윤원형이 하루아침에 몰락하여 이제 대죄(待罪)하게 되었으니, 성현의 도리를 배우는 자로서 어찌 이를 경축하지 않겠느냐 하였다. 꺽정이가 비록 배움은 짧아도, 그의 스승으로부터 배운 성현의 도리에는 저런 말이 없던 듯하였다.

하물며 당장 급히 가야 할 곳이 있는 지금은 어떻겠는가.

“흠흠, 보아하니 성균관 원생들인 듯한데, 이 사람은 학문이 짧아 여러분과 더불어 이야기를 할 재간이 되지 않소.”

“허어, 겸허하시기까지! 허나 당수께서 비록 거친 옷을 입고 마치 산속의 야인과 같은 행색을 하고 계신다 한들 비범함이 어찌 사라지겠습니까? 듣기로 당수께서는 저 이름 높으신 화담 선생의 제자라 들었는데...”

“무어라?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소?”

꺽정이가 거칠게 물으니 그 말을 꺼낸 유생이 절로 기가 죽어 한 발 물러났다. 그러나 주변에서 곧장 그를 쿡쿡 찌르며 ‘네가 꺼낸 말 네가 확실히 답을 받아라’ 하니, 결국 눈 질끈 감고 답하고야 말았다.

“그... 역적 누명을 쓰신 수산(水山, 이지함의 호) 선생과 함께하고 계신다 들었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동문이 아니신가 하여...”

소가 뒷걸음질치다 쥐 잡은 격으로, 허점 많은 논리의 귀결이 어째 진실에 닿았다. 유생들 생각에 임 당수는 결코 학문이 짧은 사람일 수 없었는데, 마침 이지함이 임 당수와 함께 그 무리를 이끌고 있었다 하였고, 이지함의 스승 화담 선생은 각양각색 제자 두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들 딴에는 궁금함 반 아첨 반으로 던져본 말이 이렇게 들어맞게 되었다. 놀란 꺽정이는 잠시 말을 잃었는데, 이를 부정으로 받아들였는지 다른 유생 하나가 급히 뒷수습에 나섰다.

“흠흠! 꼭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 누가 당수님의 학문을 두고 무어라 하겠습니까? 자하(子夏, 공자의 제자)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배우지 않았다 하더라도 반드시 배웠다 이르겠노라’ 하셨는데, 누구보다 먼저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조정의 그 어떤 중신도 이루지 못한 의로운 일을 해내셨으니 이것이 바로 충(忠)이요 현량한 이를 귀하게 여기는 어진 마음 아니겠습니까?”

꺽정이 저더러 충성스럽다는 말을 하다니, 순간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그 자리에서 이준경과 영영 척질 각오 하고서 임금과 윤원형을 함께 조리돌림 하는 쪽이 낫지 않았을까 고민하던 차, 홀연히 꺽정이를 도우러 나타나는 이 있었다.

“아, 임 당수! 여기 계셨구려. 하하, 학생 여러분들에게는 미안하게 되었으나, 안타깝게도 우리 각미사에 선약이 있으시다오.”

사람 좋게 나서서 자연스레 꺽정이 어깨에 손 올려놓는 사람 있었으니, 어째 지난번에 보았을 때에 비해 묘하게 광대뼈가 뒤틀려 있는 이정이었다.

“앗, 각미사의 호걸 분이셨습니까!”

“그렇다면 마땅히 저희가 양보하여야지요.”

“즐거운 저녁 되십시오!”

그렇게 꺽정이 귀찮게 하던 무리들은 우르르 사라지고, 본래 가려던 길을 마저 갈 수 있게 되었다.

“아니, 언제 돌아오셨소?”

“임 당수 이 사람. 먼저 내 광대뼈 보고서 미안하다는 말부터 해야 하지 않겠나?”

“아.”

지난날 우봉 싸움에서 나름 정에 이끌려 다른 군관은 베었지만 이정 한 사람은 주먹으로 혼절만 시켰는데, 꺽정이 힘이 힘이다보니 아예 뼈가 주저앉은 모양이었다.

“되었네. 어쨌든 싸움은 끝났고, 자네가 이겼지 않았나. 나도 본디 내 집안에 화 닥칠까 두려워 그때 참전한 것이었는데, 이제 보니 아예 그럴 일이 없어질 듯하더군. 자네들이 이겼으니, 각미사도 승승장구하지 않겠나?”

“그런데 저기 평산이나 강음쯤에 계시지 않았소? 대체 어떻게 벌써 한양에...?”

끝내 미안하다고는 안 하는 꺽정이었다. 꺽정이 딴에는 그 상황에서 목숨 살려준 것으로도 충분하였던 것이다.

“도원수, 아니, 전 도원수 대감 모시고 먼저 한양에 돌아왔네. 그분께서는 어디 가실 곳 있으시다 하여 성안으로 들자마자 어디론가 급히 가시고, 수행하여 함께 온 우리는 그냥 뿔뿔이 흩어져서 집으로 가던 길일세.”

“가실 곳이라?”

꺽정이 머릿속에 얼추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그... 내 삯은 섭섭지 않게 쳐 드릴 텐데, 혹시 이따 저녁에 길잡이 노릇 한 번 해주실 수 있으시겠소?”

흑의군이 금군 대신 궁궐을 지킨다는 것은 황해도에 있는 오만 관군이 완전히 해산될 때까지로 정해져 있었다. 저 시커먼 도적들이 – 정말로 옷도, 생김새도 거무튀튀하였으니 명실상부한 모양새였다 – 아무리 여느 도적처럼 음흉하거나 간악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어쨌든 주상의 곁에 그들이 있음을 오래 방치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서둘러 철군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도원수 이윤경이 저 홀로 급히 도성에 돌아온 것은 조금 이상한 면이 있었다.

“... 그러니 내게 설명을 조금 해주기를 바라네, 아우님.”

이윤경이 저의 아우 이준경에게 물었다.

“사안이 실로 중대하여, 형님을 비롯하여 여러 현량한 분들의 중지(衆智)를 모으고자 하였습니다. 더구나 저 의민당에 대하여 가장 자세히 아시는 분이 형님 아니시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이준경의 집 대청마루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면면을 휘 살피는 이윤경이었다.

“현량한 이들이라... 과연.”

아우가 큰 뜻을 품고 있음은 알고 있었다. 은인자중하며 기다리다가, 때가 되면 한껏 뒤틀린 채 무너져가는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야 말겠다는 마음.

한때 금상이 친정을 선포하면서 크게 흔들렸던 그 마음은, 끝내 불씨를 잃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의 면면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국사를 논한다 하였건만, 허자·상진과 같이 윤원형 일파와 교유 있던 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또한 지금 조정에 적잖이 출사한 청송 심문 사람들, 즉 장차 새로운 척신(戚臣) 될 수 있는 이들도 자리에 없었다.

대신 보이는 것은 눈빛 형형한 선비들.

곧이어 아우가 그 선비들의 면면을 하나씩 소개하니, 이준경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쉬이 알 수 있었다.

불같은 성품이 확연히 드러나는 삼가현 서생 조식.

온화한 가운데 강직함이 숨어 있는 전 풍기군수 이황.

시일에 여유가 있었더라면, 아직 해배되지 않아 영월에 머물고 있는 회재선생 이언적까지 모셔왔을 테다.

곧이어 이준경이 모인 사람들 앞에서 말을 꺼내었다.

“지금 우리는 전례없이 비상한 시국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큰불이 일어나 숲이 사라지면 그 자리에 능히 새로운 전지(田地)를 일굴 수 있듯, 금번의 변고가 중흥(中興)의 기반이 되지 못하리라는 이치도 없습니다. 금상의 치세가 후대에 성세(盛世)로 알려지도록, 그리하여 지난 수 년의 어려움이 자연스레 잊혀 사라지도록 만드는 것이 신자(臣子)된 도리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고개 끄덕이는 자도, 반대로 영 시큰둥한 기색 감추지 않는 자도 있었다.

“의민당이 비록 거칠고 강포하다 하나, 나라의 기틀을 경장(更張)하여 쌓인 폐단은 없애고 새로운 인정(仁政)의 제도를 갖추어야 한다는 데 있어서는 분명 우리와 뜻을 같이하리라 봅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마음을 하나로 모아, 사림이 장차 나라의 동량이 될 수 있도록 나아가야 한다 하겠습니다.

의민당 임 당수가 말하기를, 장차 국정을 논의할 자리를 궁 바깥에 마련하자 하였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모여 뜻을 함께하게 된다면, 능히 임 당수로 하여금 올바른 길을 깨닫게 하여 비로소 사서에도 아름다운 이름을 남길 수 있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컨대 임거정이 나타나 윤원형을 해치웠으니, 이 기회를 틈타 지금껏 사림이 꿈꿔왔던, 그러나 한 번도 제대로 이루어보지는 못했던 도학(道學)의 정치를 이루어보자 하는 뜻이었다. 이준경이 지금껏 품어왔다가 매번 좌절해야만 했던 꿈. 그 집념이 좌중 모든 이들에게 전해졌다.

“하면 이 자리에 어찌하여 임 당수는 없는 것이오이까? 임가 그이로 하여금 깨달을 수 있게 하시려면, 지금 여기에 부르시어 하루라도 일찍 배우고 깨닫도록 만들어야 할 것인데?”

끝내 그새를 못 참고 조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느새 방울까지 새로 구해와 딸랑거리는 소리가 진중한 자리에 울렸다. 함께 의금부에 갇혀 있으면서 그 성미를 과히 겪은 바 있던 이황은 절로 고개를 저었다.

“가령 여기 두 사람이 있다 합시다. 한 사람은 늘 인의를 말하고만 다니고, 다른 한 사람은 조용히 산속에 있다 하루아침에 실제로 인의를 행했소. 어떤 사람에게 인의를 배움이 마땅하겠소?”

“허나 저들은...”

“들어보지도 않고 저들이 어떠한지는 알 수 없는 법이외다. 정녕 저들이 천박한 도적의 무리로 그저 때를 잘 타고 나타나 천하에 도움 되는 일을 한 것인지, 아니면 진실로 깊은 뜻을 품어 나름대로 국운을 새롭게 할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인지.

이 사람도 그때 임거정 그이가 동고 대감 앞에서 약조하라 한 말을 들었소이다. 언사가 거칠고 학식이 깊지 못하다 하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하나하나가 새로워 낡은 책과 비루한 서생의 그것에 감히 비할 바가 아니었소.

우선 데려와 그의 뜻을 들어볼 생각을 해야지, 먼저 이렇게 제쳐두고 우리끼리 작당하고 있다면 뭐가 되기는 하겠소이까?”

조식이 그 성정대로 말을 내지르니, 좌중의 기세가 훨씬 엄중해졌다. 도성에 머물면서도 높은 자리에는 나아가지 않던 사림의 사람들은 은연중 조식의 말이 맞다고 여기고 – 물론 의민당의 생각을 알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저 윤원형을 해치운데 대한 호감의 산물이었다 – 그 외 대부분은 그 과격함에 놀라던 차, 이윤경이 발언을 청했다.

“이르신 바에 일리가 있으나, 이 사람이 의민당과 창칼 맞대보며 느낀바, 그들의 뜻은 결코 정학(正學)과 맞지 않소이다. 오히려 군신(君臣)의 도리를 어지럽게 하고, 자칫 나라의 기틀까지 위태롭게 할 수 있는 것이 의민당의 속뜻이오.

임 당수가 무슨 마음으로 그러한 약조를 강요하였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분명한 것은 사사롭게는 이 사람의 아우 되는 동고 대감이 이른 것처럼 사림이 하나로 뭉쳐 바른 뜻을 천지간에 드러내야만 어지러움을 미리 제압하고 지금껏 이루어진 바 없는 올바른 정사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이외다.”

이어서 이황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생 또한 그 말씀의 대강은 옳다 여깁니다. 소생의 스승 되시는 회재 선생께서 일찍이 저 의민당을 경계하라 말씀하시었음은, 그 소식을 전해들으신 이 자리의 다른 선생들께서도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 ‘다른 선생’에 포함되지 않았던 – 그야 그 홀로 한양 대신 멀리 삼가에 있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조식이 ‘흥’ 콧소리를 내었다.

“이미 지방 군현의 민심은 크게 흔들렸고, 팔도의 어디든 의민당이 한 번 일으킨 큰 의심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러니 소생은, 사림이 뜻을 하나로 하여 임 당수를 계도하는 것만으로는 족하지 못하리라 여깁니다. 정학에 따라 나라를 다스린다는 그 큰 뜻이, 정암 선생(조광조)의 대에 한 번 무너진 이래로 끝내 세상에 드러나지 못하였고, 그 정암 선생 역시 계책에 치밀하지 못한 바가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정학의 도는 고원(高遠)하고 아득하다 여기고, 우리가 정학을 바탕으로 나라를 고치겠다 한들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의민당과 힘을 합치면서도 대항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황이 막 본론을 꺼내려던 차, 청지기가 급히 달려와 고했다.

“대감, 문 밖에 대감을 급히 찾는 이들이 있습니다.”

“누구라 하더냐?”

청지기가 답하려던 차, 담장 너머로 불쑥 두 사람이 나타나니 좌중 모든 사람이 대경(大驚)하였다. (특히나 저 놀라운 재주를 이미 평산 관아에서 한 번 본 적 있던 이윤경은 더욱 그러하였다.)

“의민당 당수 임꺽정이와 그 모주 이지함이라 하오이다.”

꺽정이가 말했다. 지난날 의민당이 한양 저자에서 활개칠 때, 가는 곳마다 피와 불길 휘뿌리던 그 모습을 집에 숨어 살피던 선비들은 저도 모르게 위축되는 것을 느꼈다.

“하하, 너무 걱정들은 마시오. 이 사람이 윤원형이도 아니고, 선비들께서 모여 좋은 말씀 나누시는 데 어디 무어라 관여를 하겠소이까. 다만 근래 워낙 일이 많았고, 또 사세의 흐름은 복잡한데 우리 의민당에 대해 아시는 바는 적으니, 그 오해를 풀어야 할 수도 있겠다 싶어 이리 불청객으로서 찾아오게 되었소이다.

그 오해 풀 방책이 무엇인가? 그것은 여기 계신 내 사형께서 잘 말씀해주실 것이오.”

하며 옆의 이지함 어깨를 슬쩍 밀었다.

명성 자자한 거유(巨儒)와 대신들 앞에서 살짝 떨 법도 했지만, 이미 오만 관군을 농락한 적이 있어서인가 의외로 그리 두렵지는 않았다. 힘껏 당당한 목소리 펼치며 이지함이 말했다.

“조정 바깥에, 조정과 그 권세가 동등한 새로운 관서를 만들어 윤원형의 죄를 다룰 것이라는 말은 좌중 여러분께서도 모두 들으셨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건대, 그처럼 한다면 자칫 세간에서는 의민당이 그저 윤원형을 벌주고자 그러한 마당을 꾸려 독단한다 말할까 의심됩니다. 그리하여 이 자리에서 제안코자 합니다.

옳고 그름을 가릴 그 새로운 관청이 만들어지면, 윤원형의 죄상을 다루기에 앞서 우리 의민당의 거병에 대해 먼저 잘잘못을 가리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우리 의민당의 사람들 중 그 누구도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여기 있는 제가 대역죄인으로 나라의 벌을 받은 것이 의민당의 시작이니, 저도차도 여기에 관여할 수 없겠지요.”

그 ‘의민당 사람’ 중 송사에 관여할 만큼 문리가 트이고 학문 깊은 사람은 끽해야 이지함 한 사람이었다. 적어도 바깥에서 보기에는 그러하였다. 물론 그렇게 말은 해놓고 실제로는 이이를 데려올 생각이었는데, 의외의 반응이 나왔다.

“하하! 역시 의민당이야! 내 무어라 하였소이까! 저들이 나름의 의(義)를 안다 하지 않았소? 여러분께서는 어찌 생각하실지 모르나, 만일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이 사람은 기꺼이 의민당의 편에 서서 그들 대신 옹호하는 논변을 펼치도록 하겠소. 나라에 다시 없을 기회인데, 윤원형과 의민당이 같은 죄를 받게 되면 이 또한 길이 남을 잘못 아니겠소이까?

아, 그리고 여기 계신 퇴계 선생도 의민당과 대립하면서도 또 힘을 합치겠다 하셨으니, 아마 따라와 주시리라 믿소.”

가만 듣고 있다가 또 끌려들어가게 된 이황은 조용히 고개 젓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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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함의 호로 가장 잘 알려진 토정(土亭)은 그가 만년에 마포에 흙으로 된 집을 짓고 살았을 때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수산 역시 그 뜻으로 미루어보아 정미사화 이후 보령 바닷가에 은거할 때 지은 것 아닐까 의심스럽지만, 그 이전에 이지함이 어떤 호를 썼는지 알려지지 않은 관계로 작중에서는 ‘수산’을 택했습니다.

성균관 유생이 언급하는 ‘배우지 않았더라도 나는 반드시 배웠다 이르겠노라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라는 말은 『논어』 <학이>편이 출전입니다. 어진 이를 어질게 여기고 부모에게 효를 다하며, 임금에게 충성을 바치고 벗에게는 신의를 지킨다면 족히 배웠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인데, 주희를 비롯해 수많은 후대의 유학자들은 이 말이 자칫 학문이 불필요하다는 뜻이 될 수 있다고 하여 주해를 통해 비판을 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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