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57화 (57/259)

19. 백성의 주인 (2)

흑의군이 한양 입성한 후 도성 지리에 여러 변화가 생겼는데, 그 중 하나가 빈집이 마구 늘어난 일이었다.

윤원형 아래서 빈객으로 있다가 달아난 이들 – 또는 목이 달아난 이들 – 의 집이 텅 비고, 그와 더불어 제 발 저려 야반도주한 속내 구린 이들의 집 역시 공실이 되었다.

반면 관아들은 형조를 필두로 불벼락 맞은 곳이 적지 않았다. 도성에 빈집이 많으니, 그런 곳 몇몇을 사들여 차근차근 관아로 바꾸어나가면 될 일이건만, 사람 마음이 대개 그렇게 순하지 못하여 힘없는 다른 관아를 내쫓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려고들 하였다.

특히나 의금부는 지금은 거의 비어 있는 축성사(築城司, 비변사의 전신) 관청을 노리고 있었는데, 슬슬 수작을 부리려던 차 턱 막혀버리고야 말았다.

윤원형과 얽힌 모든 고관대작들이 그저 숨죽이고 사는 데 주력하게 되면서 사실상 나라의 재상이 되어버린 이준경이, 갑자기 지시를 내려 웬 통의부인지 의통부인지 하는 듣도 보도 못한 관청이 대신 축성사 자리를 차지하게 될 테니 다른 곳 알아보라 한 것이다.

“이는 이 사람과 의민당 임 당수 등이 합의한 바이니 재론(再論)치 않겠네. 그리 알게나.”

부글부글하던 의금부는 이준경이 말미에 덧붙인 저 말 한 줄로 인하여 곧장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이 통의부의 일은 나라의 중한 사안에 대해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이니, 지금 금부에서 행하는 추국과도 맞닿는 듯하네. 이미 사헌부에서 몇 명 관원이 나아가 있기는 하나, 의금부 역시 갈 곳 없는 관원들을 그리 보냄이 어떻겠는가?”

그렇게 의금부가 자리 찜해둘 요량으로 미리 청지기 등을 보내 슬쩍 가져다 둔 집기는 고대로 통의부 것이 되고, 귀중한 인력마저 빼앗기게 되었다.

꺽정이가 며칠 뒤 저의 재판 열릴 곳에 찾아온 것은 마침 그때였다.

“히야. 관청 퍽 좋소. 이만하면 재판도 받아볼 만하겠구려.”

꺽정이가 휘파람 휘익 불며 말했다.

대체 언놈이 저들 바쁘게 일하는데 휘파람이나 불고 있는가 째려보던 서리·녹사(錄事)들은 꺽정이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마치 아무것도 보지 못하였다는 듯 저들 일에 도로 열중하였다.

“나라에 처음 있는 일이다 보니, 아직 많이 어수선하다. 그나마 내가 이렇게 나와 있고, 또 두 분 선생과 내 제자가 많이 도와주니 기틀이 그럭저럭 잡히는 셈이지.”

미리 와서 일한지 한참이던 이지함이 – 번듯한 관직은커녕 아직 역적 신세를 제대로 벗지도 못한 몸이었건만 아무도 뭐라 하지 못하였다 – 꺽정이를 알아보고 다가와 말했다.

“어디 보자. 여기가 죄인, 아니지, 이제 뭐라 한다고 했지? 피론(被論, 피고) 서는 곳일 테고. 그 옆이 호관 자리겠구려? 건너편은 추관, 그리고 이쪽 정면에 늘어선 것이 위관(委官, 판사에 해당)들 자리.”

“네 말대로다.”

“그런데 추관이랑 호관 옆에 자리가 좀 휑한 듯하오?”

“이번 의송(義訟)에서야 추관 하나, 호관 하나, 그리고 피론 하나 이렇게 끝이지만, 당장 이어질 윤원형이의 의송만 하더라도 그렇게 간단치 않을 테니 말이다. 추·호 양쪽에서 내세울 사람만 여럿에, 또 증인으로 세울 사람들까지 허다할 것이다.”

몇 번 두리번대며 이것저것 묻던 꺽정이가, 엉뚱한 질문을 덧붙였다.

“헌데 구경꾼 자리는 없소? 원래 불구경이랑 싸움구경만큼이나 동헌 담장 너머로 송사 구경하는 게 재밌기 마련인데.”

“어디 큰일 날 소리를 하느냐. 물론 한둘쯤 참관을 할 수는 있겠지만, 구경꾼이라니?”

“아니, 사람 심성에 원래 욕심이 있다고 꼬마 도령도 말하지 않았소? 원래 사람 욕심이, 구경거리 있으면 어떻게든 구경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오. 하물며 이 몸, 그리고 저 윤원형이, 이렇게 연달아 재판을 받는데, 사형이 도성 사는 어지간한 백성이라면 궁금해서 밤에 잠이나 자겠소?”

듣고 보니 그럴듯하기는 하나, 대저 꺽정이가 갑자기 이렇게 그럴듯한 말로 설득할 때면 다른 머리아픈 일이 함께 생기기 마련임을 잘 아는 이지함이라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결국 장고 끝에 답했다.

“네 말도 일리가 있다. 허나 보다시피 이곳 마당이 그리 넓지도 않거니와, 한 번 구경을 허하면 바깥에도 사람들이 가득 찰 텐데 얼마나 소란스럽겠느냐?”

“에이, 그러면 글로 써서 알리면 되는 것이지. 뭐 적당히 어려운 것 추려내고 알맹이만 간추려서 알리면 되지 않겠소?”

앞서 나온 제안이 워낙 우악스럽다 보니, 이 두 번째 제안은 마치 꽤 합당한 것처럼 들렸다.

“흠... 그것까지는 가할지도 모르겠다. 내 동고 대감께 상의드릴 일 있으면 함께 말씀드리도록 하마.”

“난 그러면 서림이한테 기별 보내서, 종이나 미리 실컷 쟁여두라 하겠소. 의민당이야 어찌 될지 몰라도 장사는 계속 해야지.”

툭 던진 의민당 이야기에, 이지함 얼굴이 갑자기 심각해졌다.

“의민당이라...”

“무슨 일이 있소?”

“꺽정아, 만약 이번... 의송에서 정말 의민당에게 죄 준다는 결론이 나온다면 너는 당을 버릴 수 있겠느냐? ”

이지함이 그 며칠 사이 한양 저자를 떠도는 이야기를 갈무리해 전해주며 운을 떼었다.

윤원형의 집. 이제 딱 한 채만 남은 그의 집이요, 그나마 옛 성세는 온데간데없건만, 그곳에 갇힌 부부는 서로 의지하며 화기애애하게 웃고 있었다.

그 화기가 남이 보기에는 독기(毒氣)에 가깝기는 하겠지만.

“하하, 어찌 우리 홀로 죽으란 법이 있겠소. 그렇지 않소, 부인?”

“실로 그렇고 말고요. 우리와 함께 광영 누린 이들이 저들끼리만 청백리니 명관(名官)이니 칭송받으려 한다면 그야말로 도둑의 심보겠지요.”

집 깊숙한 곳에 숨겨두어, 끝내 폭도들도 훔쳐가지 못한 패물 몇 점을 정난정이 꺼내어 팔았기에, 두 사람이 기거하는 별채 두 칸은 그래도 그럭저럭 살만한 정도까지는 되어 있었다.

마치 아직 멀쩡히 살아 있는 자신들을 보여주는 듯하여, 두 남녀는 또 히히덕대며 웃었다.

물론 그들은 많은 것을 잃었다. 연기로 화하거나 천한 것들에게 빼앗긴 그 엄청난 재산을 생각하면 속이 쓰리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이 풍파만 견뎌내면, 언제든 다시 얻어낼 수 있는 것.

그 임거정 놈이 소위 흑의군을 이끌고 금군 대신 궁을 일 년간 지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윤원형과 정난정은 살아날 길이 생겼음을 직감하였다.

천하고 강포한 도적이 임금을 곁에 두고, 마치 인질로 삼듯 한다. 도도하고 깨끗한 시늉 하던 선비들은 윤원형을 내칠 때가 지금이라 여기면서, 그 도적들의 손을 잡고 저들의 편으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윤원형은 주상의 성품을 알았다. 총명함으로도, 사람 보는 눈으로도 선대에 한참 못 미치시나, 응당 자신의 것이어야 할 권병(權柄)을 남이 휘두르는 것을 좌시할 분은 아니시었다. 그저 대비전의 권세에 취해 있었더라면 알지 못하였을 금상의 속마음이었다.

이대로 몇 년 지나면 의민당 도적들은 저들 마음대로 날뛰고, 사림은 마치 다시는 기묘년(기묘사화)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양 거침없이 횡행할 터.

그리고 그들을 능히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바로 자신 하나뿐이었다.

“바깥에 인기척이 나는 것 같아요.”

정난정의 말에 깊은 생각에서 빠져나오는 윤원형이었다.

“그 호관이라는 어설픈 제도를 둔다는 얘기 들었을 때부터, 누군가 찾아오리라 짐작은 하였지. 누구이리라 보오?”

“글쎄요, 아마 동애(東崖, 허자) 대감 아니실까요?”

“동애라. 그래, 그 또한 가하겠구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난정이 옳았음을 알게 되었다.

윤원형 그보다 예닐곱 살 손위에, 지난 며칠간 윤원형 저보다 마음고생 심했던 것 같은 기색의 허자가 평복을 하고서 문앞에 나타났다.

안에 윤원형과 정난정이 함께 있음을 깨닫고 얼굴 붉히던 허자는, 정난정이 건넌방으로 옮긴 뒤에야 방으로 들어왔다.

“그간 무양하셨는가 묻지는 못하겠소.”

대뜸 허자가 말을 붙였다.

“허허, 매정하시구려. 염량세태(炎涼世態) 무상함이 어제오늘 일 아니라지만, 동애 그대까지 그리하시다니.”

“국법을 어기고 밤에 몰래 찾아온 것만으로도 성의가 넘친다 해야 하지 않겠소이까.”

“흐흐, 성의는 지금 서로 보이고 있지 않소이까? 지금쯤이면 동고(이준경)가 뜻 맞는 사림의 여러 사람들을 모아, 저들끼리 어찌하면 국정을 이끌어나갈까 논의한 지도 꽤 되었을 테요. 그리고 동애 그대는 거기에 들지 못하였을 테고.

어디 그뿐이겠소? 내 장담컨대 송현(松峴, 상진), 보암(保庵, 심연원) 등도 들지 못했을 게요. 같은 사류(士類)라 대접하던 자들 중에서도 평소 그 교유가 넓던 신재(愼齋, 주세붕) 같은 이도 마찬가지일 터.

그러니 이제 인정함이 마땅하지 않겠소? 이 사람에게 그대들이 필요한 만큼이나 그대들 또한 이 사람이 필요하외다.”

윤원형이 씩 웃으며 말했다. 말이 이어질수록 간교한 말투와 더불어 그 기운이 강성해져, 불과 몇 달 전까지 도성을 손 안에 넣고 움직였던 그 사람이 어디 가지 않았음을 절로 보여주었다.

“후우... 곧 주상께 글을 올려, 그대의 죄를 논하는 자리에 호관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청할 생각이외다.”

“하여, 그 자리에서 어떤 논변을 펼칠지, 미리 상의하고자 이리 찾아온 것이겠구려.”

“그렇소.”

소윤의 사람들 – 이제 윤원형과 허자 외에는 거의 남지 않았다 - 중에서도 가장 사림과 사이가 가까운 허자다.

이렇게 당당히 국법을 어기고 찾아왔다는 얘기는, 필시 그 호관 일을 두고 이준경에게도 승낙을 받았음을 뜻하리라. 거기에 생각이 닿으니, 윤원형의 눈빛이 일순 번뜩였다.

“동애 그대와 이 사람은, 함께 살고 또 함께 죽는 사이, 같은 당여(黨與) 아니오? 그러니 참으로 잘 찾아오셨다 하겠소이다.”

“서원군 대감. 이 사람은 그대를 지키기 위해 호관으로 나서는 것이 아니오. 우리도 한때 나름의 공을 세웠음을, 비록 지난 몇 년은 잘못하였을지언정 이제라도 반성하고 새롭게 왕업을 보필할 수 있음을 보이는 데 뜻이 있소.”

그리하여 이준경이 이끌 새 조정에서 어떻게든 저의 자리를 얻어보려 하는 것일 테다. 윤원형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리고 어떻게든 자신이 그런 욕망에 사로잡혀 발버둥치고 있음을 외면하려는 허자의 속마음도.

“결국 그것이 이 사람을 지키고, 또 동애 그대를 구하는 길이오. 내 앞서 말하지 않았소?

우리는 모두 위사공신(衛社功臣)으로 책록되지 않았소? 윤임과 유관(柳灌)의 무리를 쳐내고, 금상을 보위에 모신 것은 오직 사직을 지키기 위함 아니었소? 그런데 위사공신이 어디 우리 한둘뿐이오?”

그 말을 들은 허자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서원군 대감, 그 말씀은...?”

“들은 대로요. 지난 오년의 정사에 있어, 어찌 이 한 사람만을 바라보겠소?”

근래 두어 해를 제하면, 손수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항상 뒤에서 일을 조종하고 이익만을 취해왔던 윤원형이다.

오만 관군을 일으켜 군량과 인명의 손실을 초래한 것은 굳이 따진다면 금상의 잘못이요,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신료 전원의 잘못이다.

그의 형 윤원로를 죽인 것은 사림 언관들이지, 윤원형 저는 겉으로 어떤 수도 쓰지 않았다.

충주를 유신현으로 깎아내린 것이나 윤임에게 얽힌 사람이라면 누구든 찾아내 잡아 죽인 것. 이것은 되짚어 올라가면 결국 을사년 옥사와 맞닿고, 을사년 옥사로 종실을 바로세웠다 하여 공신에 책록된 이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은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었다.

공신 3등에 책록된 이언적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러니 금상 즉위에 그들이 세운 공을 거론한다면, 섣불리 공신을 건드렸다가 기묘년의 아픈 일을 다시 당할 것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이준경과 다른 사림들이 어찌 함부로 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나마 윤원형 한 사람에게 물을 수 있는 잘못이라면 축재(蓄財)를 조금 하고 말직 몇 자리를 팔아넘긴 정도. 그러나 공신위와 함께 생각했을 때는 삭탈관직 정도로 처벌이 가한 수준이다.

그 심계를 뒤늦게 따라온 허자가 물었다. 어느새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 그러한 논변이 정녕 가하겠소이까?”

“저들이 변론의 기회를 주지 않고, 그저 처음 저 도적들이 도성을 범하였을 때처럼 막무가내로 이 사람을 참하려 하였다면 손쓸 수가 없었을 것이외다.

허나 그놈들은 시일을 너무 오래 끌었지. 그리하여 동고와 같은 이들이 가만 앉아 후환을 걱정할 겨를을 주고야 말았소. 이 호관이라는 좋은 제도는 말할 것도 없고.

이대로 나서면 되오. 저쪽에서 누가 우리를 논박하려 하든, 동고 본인, 아니면 회재(이언적)의 제자라는 퇴계가 나서서 막을 테니.”

결국 허자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심란한 마음을 애써 갈무리하며 이준경에게 향하여 방금 들은 말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귀에까지 들려온 그러한 사정을 얼추 갈무리하여 털어놓으니, 마무리가 자연스레 한숨으로 끝났다.

“... 하여 자칫 이 통의부가 시작하자마자 의(義)라는 이름 무색하게 될 곤경에 처하였다.”

이지함 말을 가만 듣던 꺽정이가 곧장 대꾸했다.

“뭐, 나는 전에 말씀드렸듯 윤원형이가 유배만 당하여도 족하오. 헌데 그것과 우리 의민당이 무슨 상관이오?”

“사림의 여러 선비들이 의민당을 좋지 않게 보는 것은 너도 알지 않느냐. 그들 앞에서 한 수 물러나는 모양을 취하면, 대신 어떻게든 윤원형에게 조금 더 강한 벌을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뜩이나 제자 녀석이 아직 이 나라 선비들 앞에서 하기에는 이른 논의를 가감없이 털어놓아 부담이 되던 판인데, 의민당을 위한 논변의 강약을 조금 조절한다면 제자 녀석에게도 도움이 될 테고.”

“하, 이것 참. 그렇게나 어질고 의로움을 좋아하시는 선비님네들 속셈이 장사치와 같아서야 되겠소?”

“내가 할 말이 없구나.”

물론 꺽정이 앞에서 변명을 한다면 할 수 있었다.

아무리 흑의군이 도성을 장악함으로써 그 무위(武威)를 보이고 지금은 숫제 궁궐까지 차지하고 앉아 있다지만, 결국 일 년 기한이 지나면 물러갈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므로 천재일우로 찾아온 기회를 틈타 어떻게든 나라를 회생시켜보려는 이들로서는, 정국을 안정시키는 일이 가장 중하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주상의 얼마 남지 않은 일가붙이를, 주상의 뜻을 묻지 않고 신하들끼리 죽이는 일은 너무나 무겁고 또 무섭다는 것.

이미 삼사의 언관들은 날마다 윤원형의 죄상을 폭로하며 벌줄 것을 아뢰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신들이 선뜻 나서지 못함은 이 때문이라는 것.

“좋소! 까짓것, 내 한 발 양보하지. 어차피 이곳 한양을 뒤엎었으니 의민당도 본디 뜻한 바는 다 이룬 셈 아니오? 황해도에 뿌리 내린 당원들은 슬슬 풀어줄 때도 되었지. 그때 수결했던 나나 사형, 서림이나 신씨 부인 등이야 계속 함께 가야겠지만.”

“고맙구나.”

“죄를 씌우고 싶으시면 잔뜩 씌워보시오. 의민당 파하고 새로 하나 꾸리면 그만이오.”

“그래... 잠깐, 새로 꾸린다고?”

다시금 고맙다 말하려던 차, 방금 꺽정이가 말한 것이 그제야 떠오른 이지함이 반문하였다.

(이때 조금 더 캐물었어야 했다는 후회는 뒤늦게야 찾아왔다.)

“그렇소. 이왕 이리 된 것, 이번에는 높으신 분께 승낙까지 받아서 근사하게 하나 만들어야지.

그보다 사형, 계속 들어보시오. 대신 나도 조건 하나를 걸어야겠소.”

“무엇이냐?”

“추관 자리를 여럿이 나누어 맡을 수도 있다고 하지 않으셨소? 그리고 엄연히 벼슬 안하던 처사인 저 남명이라는 분도 호관이 되었고.

그러니 나도 윤원형이 의송 할 때 추관으로 들어가고 싶소. 선비님네들이 후환 두려워 윤원형이를 마음대로 욕하지 못한다면, 후환 아니 두려운 나라도 가서 시원하게 욕 한 바가지 퍼부어주어야 하지 않겠소?”

몇 년을 곁에서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그러나 통쾌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일 꺽정이의 도적놈다운 해결책.

곰곰이 생각하다 끝내 웃음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하하! 그래. 그 말도 맞다.”

앞날을 생각하면 그 후환이 없지 않을 것이련만, 그럼에도 지금 꺽정이가 하는 제안을 반대하고픈 마음은 도저히 들지 않았다.

의민당 의송은 조선국 개국 이래 처음 있는 행사라, 도성 사람은 물론이요 인근 수많은 식자와 백성들의 관심을 한데 받았다.

지금껏 여러 차례 천거를 받았으나 모두 사양하고 지방의 한직만 전전하던 이황, 그리고 한 번도 조정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던 조식 두 사람이 마주앉아 의민당의 일을 논한다는 데 도성의 유생들은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진 논변을 정리하여 곧 조보(朝報)처럼 글로도 알릴 것이라 하니, 그것을 필사할 생각에 다들 종이를 사 모으기 시작한바 지가(紙價)는 오르고 불과 며칠 앞서 종이를 선점한 서림은 쏠쏠한 이문을 챙겼다.

하지만 꺽정이와 이지함에게 직접 그 안에서 오간 이야기를 들을 수 있던 이이는 입이 댓 발쯤 나왔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임 당수.”

“임 당수가 아니라 임꺽정이다. 한동안은.”

의송 끝나고 다시 입궐하기 전, 이이를 바래다주던 꺽정이가 대꾸했다.

“아니, 그것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아니, 뭐, 의민당 해산된 것도 아쉽긴 합니다만... 그보다 논변의 내막이 이게 다라니요.

분명 그때 아버지 댁에서 서로 이야기 나눌 때만 해도, 의권의 논설을 겉핥기로나마 꺼냈는데...”

“난 잘 모르겠다. 의권 얘기는 실제로 남명이라는 분께서 다 하시지 않으셨니?”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나라가 백성의 주인이 아니라,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것은 밝혀주셨어야...”

물론 ‘의권’이라는 생소한 말에 놀란 도성과 그 일대의 서생들은, 즉시 저들이 구한 필사본을 두 번 세 번 고쳐보며 마음 속에 새기고 있을 터였다. 허나 이이는 여전히 불만이 많은 모양새였다.

좀처럼 의(義) 아닌 것을 위하여 뜻을 굽히지 않는 조식이라지만, 그때 들었던 이이의 논변은 충분히 뜻을 굽힐 만큼 과격하였다.

그리하여 조식과 이황 사이에 오간 논지는 대략 이러하였다.

조식은 백성이 응당 누리는 의권에 대해 말하면서, 나라와 백성 사이의 예의가 완전히 무너져 어찌할 수 없는 지경까지 온다면 저의 마땅한 권세, 사람답게 먹고살며 저의 뜻을 펼칠 그 의권을 위하여 병장기를 들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것까지 부정한다면, 군량과 병정을 내지 않겠다며 한때 삼남을 뒤덮었던 소요까지 모두 죄가 있다고 몰리기 때문에, 이황 또한 여기에 대해서는 크게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반론하기를, 비록 의민당의 봉기에 참작할 만한 정상이 있기는 하였으나, 그럼에도 예성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할 때처럼 충분히 조정에 그들의 뜻을 밝히고 더 싸우지 않고 화평을 되찾을 길이 없지 않았다고 하였다.

또한 안타깝게도 아직 교화에 미진함이 있어, 군현의 백성들이 옳고 그름을 다 알지 못하는데, 자칫 의민당의 행사가 모두 옳다고 한다면 백성을 현혹하는 무리들이 기승을 부릴 수밖에 없다고도 하였다.

즉 나라와 백성 사이의 예의를 지키지 못한 것은 의민당도 일부 잘못이 있다는 말이었는데, 조식이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기보다는 그 나라와 백성 사이 예의가 무엇인지를 두고 이황과 더 깊은 토론을 시작하는 바람에 의민당 죄상 밝히는 일은 여기서 끝나고야 말았다.

물론 이것만 해도, 조정과 나라를 말하면서 군주는 거의 거론하지 않았으므로 그 ‘의권’이라는 말과 더불어 크나큰 풍파를 도성 곳곳에 일으키고 있었다.

“뭐, 나는 거기까진 모르겠다. 어쨌든 의민당은 해산이 되었고, 각각의 사람들에게는 죄를 불문(不問). 그러나 이 일로 어떠한 포장(褒獎)은 없을 것임. 이렇게 내려진 판결을 이제 와서 뒤집기야 하겠느냐?”

“하지만...”

“첫 술에 배 부를 수는 없는 법이다, 욘석아. 자, 들어가 보아라.”

어느새 이원수의 집 앞까지 당도하였기에, 이이 등짝을 밀어내고 – 이제 난리도 끝났으니 곧 관례를 치를 터인데, 아직껏 등짝이 왜소하였다 – 저의 갈 길 가는 꺽정이었다.

그리고 그 ‘갈 길’을 퍽 열심히 걸은 결과, 궁궐 안의 수많은 궁녀와 내시들이 놀라고 종국에는 임금도 퍼뜩 놀라고야 말았다.

이제는 의민당 흑의군 대신 그냥 흑의군이 궁궐을 지키게 되면서, 임금이 정사를 돌보는 일은 얼추 이전처럼 진행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조회(朝會)는 흑의군이 도저히 금군을 대신하여 행사를 진행할 수 없었으므로 임금과 중신들의 논의 끝에 당분간 생략하기로 하였고 – 많은 대신들이 속으로 좋아하였다 – 임금의 경연 역시 최근의 정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는 관계로 서로 불편함을 피하기 위해 역시 당분간 생략 – 임금이 속으로 매우 좋아하였다 - 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유로 임금은 마음은 몰라도 몸은 꽤 편하였는데, 그렇게 편전에서 허송세월하고 있던 차 밖에서 우당탕 소리가 났다.

“흠흠, 임금님 계시오?”

“당수, 그... 여기선 ‘주상 전하’라고들 부르던데...”

“되었다, 이놈아. 같은 무식쟁이 주제에 뭔 예법을 가르치려 들고 있느냐.”

얼추 들어도 임거정과 그를 따르는 흑의군 녀석 하나다.

(워낙 흑의군 하나하나가 말이 많다 보니, ‘녀석’과 같은 상스러운 말이 어느새 임금의 머릿속에도 들어오고야 말았다.)

“누구인가?”

“임 당수 입시이옵나이다.”

뻔히 알면서도 서로 모르는 체하며, 내관을 보내어 묻고 답한 뒤 들라 하였다.

쿵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마루의 나무가 비명을 질렀다.

헌데 임거정이 뭔가 청할 게 있는 것처럼, 우물쭈물하는 것 아닌가.

“그... 이번에 새로 관청을 두어 사안 복잡다단한 건의 이모저모를 다루도록 한 것은 아시리라 믿소이다. 금일 거기서 어떤 판결이 나왔는지도.”

“그러하다.”

저놈의 말투는 도저히 공손해지지 않았다. 임거정 본인이 장담하기를 저는 저의 아비나 스승께도 저런 말투로 대하였다 하였으니, 임금과 듣는 주변 사람들만 한탄할 뿐. 그래도 눈치는 있는지 어지간하면 이렇게 직접 찾아와 말을 거는 일은 없었다.

(보통 궁궐을 장악한 권신이라면, 차라리 저의 말투를 고치고 대신 임금 옆에 착 달라붙어 있을 터인데, 과연 이상한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었다.)

“임금께서도 들으셨겠지만, 우리 의민당이 잘못한 것이 없지 않아, 장차 비슷한 무리가 대놓고 난을 획책하지 못하도록 경고하는 뜻에서 이번에 해산하게 되었소.

하여, 대신 새로운 당을 하나 만들려고 하는데, 아무래도 없어지자마자 새로 만들기가 조금 눈치는 보여서 말이오.”

“하하...”

어이가 없어 임금이 웃으니, 임거정도 머쓱하여 고개를 긁적였다.

“그, 뭣이냐. 음... 하여,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그래도 마침내 하소서체가 한 번은 나왔으니 만족해야 하리라. 그리 생각하며 임금은 일단 윤허를 해 주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크게 후회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 당명이 심히 괴악하였던 것이다.

바깥의 여론도, 당을 해산하라는 판결이 떨어지자마자 새로 만들어버리니, 눈 가리고 아웅이라는 둥, 국법의 지엄함을 우습게 안다는 둥 비판하는 소리가 나올 법도 했는데, 며칠이 지나도록 그런 말은 일언반구도 나돌지 않았다.

의민당을 해체하고 흑의군과 여타 굵직한 이들만 모아서 새로 꾸린다는 그 당의 이름이 사람들의 온 이목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새 당의 이름은 바로 민주당(民主黨).

뻔뻔하게 내세우기로는, 지엄하신 주상 전하께옵서 조선국 만백성의 참된 주인 되실 수 있으시도록 성심성의껏 보필하자는 것이 그 뜻이라 하였다. 바로 그 지엄하신 주상 전하 계신 한양에 쳐들어가 금군 자리를 대신하게 된 옛 의민당이 내세우기에는 퍽 어울리지 않는 이름.

허나 꺽정이 주변의 선비들이 과연 그게 당명의 본래 뜻이 맞느냐 물으면, ‘그럼 다른 뜻이 무엇이 있겠소?’ 하는 답변이 돌아오곤 했다.

그리 되면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임금이 백성의 주인 될 수 있도록 보필한다는 것은 선비 중 그 누구도 비판할 수 없었고, 민주 두 글자에 설마 다른 뜻, 예컨대 군주 대신 백성을 주인으로 세우겠다는 뜻이 들어있으리라는 생각은 꿈조차 꿀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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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송’이라는 말은 당연히 작중의 창작입니다. 조선시대의 각종 법적 논쟁을 일반적으로 ‘X송’으로 통칭하였던 것을 감안하여 창작한 용어입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예송禮訟, 산송山訟, 詞訟 등등이 있습니다.)

이전에도 종종 등장한 허자는 소윤의 핵심 인물이었지만, 을사사화에 휘말려 희생당한 사림에 대해 여러모로 동정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전에 언급된 것처럼 원 역사에서는 이로 인해 소윤 내에서 탄핵당해 결국 1551년 사망하게 되지만, 작중에서는 허자 대신 이기가 윤원형에게 먼저 팽을 당하여 아직까지 살아 있습니다. 이러한 면모 때문에 원 역사에서도 사림의 동정을 적잖이 받았고, 윤원형이 몰락하자마자 신원되어 영의정에 추증됩니다. 그의 증손자가 바로 조선 후기의 유명한 거물 정치인이자 학자인 허목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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