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58화 (58/259)

19. 백성의 주인 (3)

그 민주당 때문에 시끌시끌하던 것이 미처 다 가라앉지도 않았을 무렵, 어느새 윤원형의 의송 시작되는 날이 다가왔다.

길가에서 돌이나 오물 날아올 것을 염려하여 윤원형은 새벽에 미리 호송되어 근처에 머물고 있었고, 이제 추관과 호관, 위관 등이 모두 들어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사형 이지함 덕에 추관으로 올라오게 된 꺽정이는 간만에 처사 차림을 하고서 장터에서 국밥 한 그릇 하고 통의부로 향했는데, 얼마 전 의민당 의송에 비해 훨씬 북적이는 모습에 놀랐다.

“오, 왔는가.”

이번에도 그대로 추관을 맡기는 하지만, 여러 추관 중 하나일 뿐인 조식이 반갑게 맞이하였다. 저쪽 위관들 자리에서는 이황이 서리들을 불러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꺽정이 뒤로도 슬쩍 들어와 저의 자리에 앉는 이가 간간이 이어지고, 붓과 종이 따위를 들고서 여기저기 왔다갔다하는 이들은 끊이지 않았다.

꺽정이가 자못 빈정대며 말했다.

“이야, 이래서 권세가 좋다는 것인가 보오. 의민당도 나름 한 위세 했는데, 그럼에도 의송은 꽤 간략하게 하지 않았소? 헌데 지금 여기 보시오. 사람 대접이 이리 달라서야 원.”

지난날 저의 의송 때는 추관 하나에 호관 하나. 그리고 피론 꺽정이 하나에 증인도 따로 없었다.

반면 이번에는 지난 의송때 위관으로 섰던 이준경이 친히 추관으로 참여하고, 위관으로는 홍섬(洪暹)·황헌(黃憲) 등, 꺽정이는 그런 사람 있는 줄도 몰랐지만 조정에서의 품계로는 이준경과 어깨 나란히 하고도 남는 이들이 들어왔다.

추관의 수만 해도 꺽정이 포함 일곱에, 아예 의송을 며칠에 나누어 할 심산이라고까지 하였으므로, 꺽정이가 빈정 상하여 은근슬쩍 비꼬는 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시세(時勢)가 이러하니 어쩌겠는가. 후대에 부끄러운 일이지만, 동고의 걱정에도 일리가 있으니 참을 뿐. 그래도 혹시 나중에 한 번 더 봉기할 것 같으면 그때는 이 사람한테도 알려주게.”

이 모양새를 썩 좋게 보지 않던, 그러나 꺽정이와는 달리 나름 이해는 하던 조식이 한탄하며 말했다.

“모주 자리는 아니 드릴 것이오.”

“하, 내 감투를 바랐다면 진작에 조정에 출사를 하지 않았겠는가.”

그사이 조언인지 훈계인지를 다 마치고 꺽정이 있는 곳으로 온 이황도 말을 붙였다.

“임 당수 그대가 윤원형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그 마음은 이 사람도 잘 아는 바요. 임 당수뿐 아니라 조선국 백성들 중 그렇지 않은 사람이 드물 터. 허나 바라건대 오늘만은 조금 참아주기를 바라오.”

윤원형과 허자가 위사공신 책록의 이야기까지 걸고 넘어지리라는 사실이 이준경 통하여 알려지자, 이황은 이번 의송에서 어떤 자리도 맡지 않기로 한 지 오래였다.

그의 스승 이언적이 3등이지만 엄연한 공신의 자리에 올라 있었기 때문에, 차마 가타부타 말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반대로, 내가 험하고 궂은 말 아니 하면 누가 하겠소? 그런 마음으로 동고 대감도 흔쾌히 나를 끼워주신 것으로 아는데.”

“그것은 그렇소만...”

“어차피 윤원형을 죽이지는 않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들었소. 내 시원하게 욕이나 퍼붓고 갈 심산인데, 판결을 어찌 내리든 거기에 딱히 불만을 품고 엉뚱한 짓은 하지 않을 테니 걱정 접어두시오.”

사실 마음 같아서야 이준경와 이황·조식을 비롯해 어지간한 선비들도 꺽정이와 한마음일 테다.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체통도 체통이지만, 한때의 과격한 마음으로 말미암아 후대의 화근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그 두려움이 컸다.

꺽정이는 티끌만큼도 공유하지 않는 그런 두려움이었다.

때마침 호관 허자 등과 함께 피론 윤원형이 나타났다. 기고만장한 모습은 사라졌으나, 여전히 그 기세가 당당하였다. 저만의 세상은 끝났을지언정, 아직 저를 떼놓고 생각할 수 있는 세상은 아니라는 듯한 그 자신이 겉으로도 드러났다.

저자에서 저런 표정을 지었더라면 하다못해 돌이라도 날아왔으련만, 금상의 외숙부이자 대비전의 아우를 함부로 해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선비들은 그저 부들대며 참을 뿐.

허나 꺽정이는 선비가 아니었다.

“신수 참 훤하시오? 아무래도 지난날 이 사람이 너무 잘 모셨던 듯하구려.”

어느새 마당 건너편으로 슬쩍 다가가서는 윤원형에게 말을 붙였다.

“흠흠, 임 당수, 그... 의송에 관련되지 않은 사람은 물러나는 것이 마땅할 터인데...”

당황한 허자가 성급히 말을 끊었다.

“아니, 그 무슨 말씀이시오? 나도 추관이외다.”

“뭐, 뭐라?”

윤원형이 누가 말리기도 전 당황하여 먼저 물었다.

“그 말이 옳소. 민주당 당수 임거정 또한 금번 의송에 추관으로 참여케 되었소이다.”

건너편에서 조식이 씩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언제 정해진 일이오이까?”

“이 사람은 잘 모르지만, 아마 열심히 알아보지 않은 호관의 부족함 아니겠소이까?”

대의를 위해 참고 또 참던 이준경의 소소한 복수였다. 이준경과 미리 말을 맞추어 윤원형의 형을 얼추 미리 정해두려던 허자로서는 약하게나마 뒤통수를 맞은 셈이었다.

“뭐, 좌우지간 금일 하고픈 말씀은 실컷 하시오. 나는 누구와는 달리 나오는 말을 함부로 틀어막을 생각은 없소이다.”

꺽정이가 웃으면서 저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돌아가기 전, 슬쩍 말 한 마디를 조용히 흘리고 갔다.

“뭣하러 말을 틀어막겠소? 그냥 모가지를 비틀어버리면 되는 것을.”

“저... 저자가!”

그러나 그사이 이준경을 비롯하여 나머지 추관과 호관, 그리고 조정 중신들로 이루어진 위관들까지 우르르 들어오기 시작한 고로 무어라 더 항변할 기회가 없었다.

꺽정이가 피론으로 들어왔던 첫 번째 의송은, 솔직히 말해 결론이 얼추 정해져 있었다. 의민당이 한양을 장악한 판국에, 그 의민당을 역적으로 몰아세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게다가 호관과 추관도 그 인선(人選)이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었으니, 하필 ‘의권’이라는 뜨끈뜨끈하고 선비로서 가만 내버려둘 수 없는 논변이 나와버리는 바람에 조식과 이황 안의 학구지열이 먼저 끓어오르기도 하였다.

허나 이번 두 번째 의송은, 얼추 이렇게 진행하면 된다는 경험이 조금은 쌓였을 뿐 아니라 조정의 중신들이 거의 다 관여하였기 때문에 훨씬 원활하면서도 진중하게 진행되었다.

먼저 추관과 호관의 대표들이 각각 저들 측의 논의를 정리하여 내세웠다. 추관들 사이에서 이준경이 일어나 서두를 떼었다.

“추관 이준경이 피론 윤원형의 죄상으로 거론되는 바를 먼저 나열토록 하겠습니다.

서원군 윤원형은 왕실과는 골육지친의 사이로, 보위(寶位)를 농락하고 총애를 저버린바 궁금(宮禁, 궁궐)의 위엄을 크게 어지럽히고 신도(臣道)를 무너뜨렸습니다. 고 풍성부원군 이기 등을 내세워 반대하는 모든 이들을 억누르고 잡아 죽였으며, 억지로 역모 고변을 꾸며 사민(士民)을 공히 해쳤습니다.

또한 그러면서 관직을 널리 사고팔며 백성의 전지(田地)를 강탈하였고, 나아가 전국 각지의 해택(海澤)·산천을 저의 것으로 삼아 서민들의 삶이 더없이 황폐해지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처첩(妻妾, 처와 첩)의 구분이 무너지는 것은 예로부터 크게 경계한 일인데, 윤원형은 임금의 총명을 속여 첩으로써 부인을 삼고야 말았습니다.

이처럼 나라의 안팎에서, 또 높고 낮은 곳을 모두 아우르며 기강을 무너뜨리고 만세토록 부끄러운 일만을 남겼으니, 마땅히 국법으로서 벌하여야 할 것입니다.”

눈빛은 이글거렸으나 말투는 끝내 차분하게 유지하며, 이준경이 모두(冒頭)의 발언을 마쳤다.

이어서 허자가 호관들을 대표하여 일어나 저들의 입장을 밝혔다.

“호관 허자가 피론 및 다른 호관들을 대표하여, 앞서 추관이 제기한 죄목에 대하여 소명토록 하겠습니다.

먼저 역모 고변은, 본디 그 증좌가 있었고 시국이 불안하였기 때문에 조처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그것이 정도를 한참 벗어났고, 이지함과 같이 그 죄를 잘못 받은 자가 있기는 하였으나, 크게 보면 어쩔 수 없는 면이 있었습니다.

정미년 유신현의 옥사는 이미 그때 고변이 들어온 바 있었고, 이약빙은 엄연히 죄인 윤임의 인척으로 의심될 만한 바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것은 분명 잘못이나, 어찌 이를 ‘억지 역모’라 하겠습니까? 위사공신의 한 사람으로서, 피론 윤원형은 저의 해야 할 일을 했던 것이라 하겠습니다.

금년의 의민당 역모 고변은...”

허자의 말이 거기서 갑자기 확 끊겼다. 그 대목에서 꺽정이와 시선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위관과 호관, 추관들이 모두 꺽정이 한 사람을 바라보았는데, 꺽정이는 피식 웃으며 괜찮다 하였다.

“하하, 괜찮소이다. 다 지나간 일 아니겠소이까? 그러니 이 사람도 지금 이렇게 도성 한복판에 와서 앉아 있는 것이고.”

‘이제 와서 네가 뭐라 떠든들 무슨 상관이냐’ 하는 뜻으로도, ‘너도 도성에 살고 있고 나도 도성에 있으니, 나중에 끝나고 한 번 보자꾸나’ 하는 뜻으로도 읽힐 수 있는 모호한 말이었다.

땀 한 방울 흘린 뒤 허자가 마저 말을 이었다.

“... 역시 크나큰 과오였으나, 처음 그 증좌를 얻었을 때는 의심될 만한 바가 없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지난 의송에서 의민당의 죄상을 말하면서도 위관들이 이를 취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의민당이 그 ‘의권’에 따라 봉기하기 전 조정에 저들의 뜻을 힘닿는 데까지 소명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는, 지난번 의송의 판결을 인용한 것이었다.

험난한 대목이 끝나자 허자의 말이 다시 빨라졌다.

“또한 처첩의 분간은, 그 첩이 이미 천인(賤人)이 아니게 되었고, 적실(嫡室)의 자리가 비어 있었으므로 대신 가모(家母)로 삼았을 뿐입니다. 비록 근래 드문 일이라고는 하지만, 그 자체로 어찌 죄가 된다 하겠습니까?

다만 벼슬을 사고팔고 백성에게 탐학하였다는 것은 부풀려진 바가 있으나 완전한 거짓 또한 아닙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마땅히 죄를 받아야 한다고 하겠습니다.

호관들은 그러므로, 위와 같은 과실이 명명백백하나 나라의 법은 공과(功過)를 공히 따져야 한다고 말하고자 합니다. 원훈대신(元勳大臣)을 경솔하게 진퇴(進退)시킨다면 이 또한 이치에 맞지 않을 것이니, 위관들께서도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기나긴 변명 중 마지막 한 줄이 핵심이라 할 만하였다.

위관과 추관들 모두 – 꺽정이 빼고 – 예상하였던 말.

“추관 조식이 호관 측에 반론코자 합니다.”

이윽고 조식이 일어나 발언을 청하였다.

“원훈대신을 진퇴시킴이 어찌 이치에 아니 맞다 하겠습니까? 공이 있으면 높이 세우고, 과가 있으면 죄를 물을 뿐입니다.

대신이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그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이 또한 잘못입니다. 대역죄는 강상(綱常)의 죄 중에서도 가장 무겁고 또 만백성에게 파란이 미치는 죄입니다. 그런데 그것조차 제대로 처결하지 못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용렬한 사람이 나라의 원훈으로 대우받으며 복록을 누린다면, 이것은 그 사람을 공신으로 삼은 사람의 잘못이 됩니다. 나라의 신하를 자처하면서 어찌 이를 방관하겠습니까?”

지난날 충주 옥사를 비롯하여 온갖 역모 고변은, 윤원형 본인이 처음부터 꾸민 것이 아니라 마땅히 처리해야 하는데 잘못 처리한 것일 뿐이라는 논변에 대하여 조식이 정면으로 찌르고 들어갔다.

그런데 반응이 너무나 시시하여, 조식은 금방 맥이 빠지고야 말았다.

“추관께서 이르신 말에 호관 역시 동의합니다.”

그러니 그러한 죄상에 맞추어 벌을 내려, 잠시 삭탈관직하고 멀리 유배나 보내자는 것. 그것만 해도 사실 실각에 가까운 일이었으나 어쨌든 허자와 윤원형 등이 노리는 결론이기도 했다.

저렇게 순순히 죄를 인정하면서, ‘그래서 공신의 목을 칠 것이냐’ 하니, 그 조식조차 잠시 기가 막혀 가만히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굴러가는 모양새를 보며, 윤원형 역시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어이쿠, 그러면 내 차례인가.”

아무도 그의 차례라 생각하지 않았건만 – 어지간하면 그의 차례가 아예 오지 않기를 바랐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일 테다 – 꺽정이가 홀로 일어나 물었다.

“추관 임꺽정이가 묻겠소이다. 윤원형이 어째서 공신이오?”

“...”

잠시 침묵이 내리고, 윤원형의 단단한 얼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대단한 공을 세워서 공신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 공 두 번 세웠다가는 나라 망하게 생겼소이다. 그러니 한 번 말씀이나 해 보시오, 윤원형 대감. 대체 임자가 세운 공이 뭐요?”

꺽정이가 빈정대다가 갑자기 화살촉을 윤원형 본인에게 돌리니, 그제야 조금 정신 차린 다른 사람들이 만류하기 시작했다.

“임 당수! 무례하외다!”

“흠흠, 임 당수.”

“뭐, 내가 좀 무례하긴 하오. 헌데 그래서 다들 어쩔 테요?”

지금까지 다른 중신과 선비들의 말에 순순히 따랐기 때문에 잠시 잊었을 뿐,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들이 임거정을 어찌할 방편은 없었다.

오만 대군으로도 막지 못한 그를 서생들 수십이 모인들 어찌 막겠는가.

“흠흠, 그래도 내 약조하겠소이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이러는 것이 통의부 법도에는 아니 맞을 테니, 이번 한 번 문답으로 금번 의송에서 본인의 발언은 마치고 그 이후로는 입을 싹 닫도록 하겠소.”

결국 위관들도 한숨 내쉬며, ‘그리 하시오’하며 허용해줄 수밖에 없었다.

이준경과 조식 등, 은근히 기대하며 바라보는 이들도 많았는데, 조식은 난데없이 주전부리 생각이 나기도 했다.

“뭐, 서원군 대감의 공덕이 얼마나 크신지, 내 앞서 보니 도성의 뭇 백성들이 하나같이 서원군께서 얼른 저승에 가셔서 명부(冥府)에도 덕을 베풀어주시기를 바라고 있기는 하더이다.

그러니 호관 나리들이든 윤원형 대감이든, 한 번 이 어리석은 범부에게 가르쳐 주시오. 무슨 공을 그리 잘 세우셔서, 그렇게나 죄를 많이 지어놓고 이번에 빠져나가시려는 것이오?”

끝내 참지 못한 윤원형이 직접 일어났다.

“무슨 공을 세웠느냐 물었는가? 위사공신으로서 사직을 보필하여 금상께서 조종의 기업을 이어 지켜나가실 수 있도록 한 것이 공이다.”

“그게 어째서 공이요? 신하라면 당연히 임금을 보필하여 잘 지내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이지. 그게 공이라면 사람이 세끼 밥 먹으면서 명줄만 이어가도 다들 효자 효녀가 되겠구려.”

조정 선비들은 생각만 하고 차마 말은 못할 날선 비꼼이 그대로 윤원형을 향해 쏟아졌다.

“그 무슨... 네가 정녕 조정을 능멸하느냐? 지난날 선대왕께서 훙(薨)하시고 나라가 어지러울 때, 그때 우리가 대비전을 도와 나라의 가운데를 지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되었겠는가?”

그 말을 들은 이준경 이하 사림의 표정이 묘해졌다.

차마 말은 못하지만, 금상께서 만일 그때 즉위하실 일이 없었더라면, 인종대왕께서 그 자리를 계속 지키셨더라면...?

가장 은밀한 곳에 숨겨두었던 생각이, 그런 것 따위 신경쓰지 않고 떠오르는 말을 마구 던지는 임 당수 한 사람 때문에 겉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백성들의 주인되실 분을 그렇게 보필하여 마침내 올바른 자리를 지켜내시게 만들었다. 헌데 너희 백성은 이것을 잊고, 마침내 난을 일으켜 오늘과 같이 상하를 크게 어지럽혔으니 부끄럽지 않으냐?”

“백성의 주인이 따로 있기는 하오? 그것은 정해진 자리가 아니오이다. 백성의 주인은 그냥 백성 자신이고, 때에 따라 잠시 다른 사람에게 맡길 뿐이지.”

종종 밤골 꼬마 도령이 떠들던 말을 제멋대로 풀이하는 꺽정이였다. 윤원형의 얼굴빛이 더욱 붉어지는 것을 보니 과연 효험이 있었다.

“그런데 가끔 그걸 잊고서 처음부터 저들이 주인이었던 것처럼 날뛰는 댁 같은 자들이 있으니까, 종종 우리 같은 사람들이 나타나서 ‘그것은 아니올시다’ 가르쳐주기도 하는 것 아니겠소?”

“임 당수. 언사가 과하오.”

옆에서 누가 옷깃 잡기에 보니, 다른 사람도 아니요 조식이었다.

조식은 지난 며칠 간의 일로 말미암아, 고향 삼가에 돌아가면 지금까지 저의 언행을 크게 반성하고 수양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허나 그와는 별개로 임 당수인지 임꺽정인지 아리송한 이 사람에게 그럭저럭 호감이 생긴 것도 사실.

윤원형이 생각도 못한 논변 앞에서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붉으락푸르락하는 것을 보는 것도 재밌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임 당수가 벌써부터 과격한 말로 인해 후에 책 잡힐 건을 만드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 뜻이 얼추 통하여, 꺽정이도 윤원형 놀리기를 여기서 잠시 접어두기로 마음을 먹었다.

“정말로 윤원형 그대가 사직에 큰 공을 세웠더라면, 이는 백성들에게도 큰 공을 세웠다는 뜻일 게요. 그러니 백성들 사이로 돌아간들 무슨 두려움이 있겠소?

본 추관은 그러므로 위관들과 다른 추관들에게 제안하외다. 저쪽에서 청하는 것처럼 공신 자리를 생각하여 유배로 끝냅시다. 그것도 어디 삼수갑산 같은 곳 말고, 적당히 가깝고 살기도 편한 그런 곳에, 산속도 말고 읍내 한가운데에 정배함이 좋을 듯하오.

조선국에 그런 곳 많지 않소이까? 예컨대 유신현이라던가.”

꺽정이가 자리에 앉으며 발언을 마쳤다.

그러나 말미에 툭 던진 제안은 이미 동석한 모두의 머릿속에 깊게 파고들어가고 있었다.

소윤 일파가 꾸민 역모 고변으로 가장 해를 크게 입은 옛 충주 유신현.

그곳 저자 한가운데에 윤원형을 유배 보낸다 하니, 윤원형이 정말로 괴롭게 저의 죗값 치르기를 원하는 이들 듣기에도 꽤 그럴듯하였다.

“아, 유신현이 어렵다면 황해도에도 좋은 곳 많이 있으니 참고들 하시면 좋을 듯하오.”

앞서는 한없이 붉던 윤원형 낯빛이, 이제는 더없이 창백해졌다.

민주당이라는 그 이름을 듣고서 이 무슨 해괴한 말장난이냐 한탄하는 식자들도 있었지만, 반대로 그 뜻만 알음알음 전해 듣고 참 취지가 옳다고 외치는 무식한 백성은 훨씬 많았다.

“나랏님을 제대로 보필하여 우리네 백성을 올바르게 다스릴 수 있게끔 하자. 이 얼마나 좋은 말인가?”

“암, 우리가 정신 똑바로 차려야 윤원형이 같은 놈이 다시는 안 나오는 것 아니겠는가?”

이렇게 마치 저들이 국정의 심오한 이치를 아는 것처럼 삼삼오오 모여 떠드는데, 선비들이 들었다면 혀를 차고도 남을 만한 일이었다.

일개 백성이 정신을 똑바로 차린들 조정의 중신을 어찌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니, 없어야 했다.

허나 지난날 의민당과 함께 도성을 뒤엎고 마침내 윤원형을 끌어내렸다 자부하는 도성 백성들은 저들도 이제 족히 정사를 논하겠노라 은근슬쩍 나서고 있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짧게는 지난 한 달, 길게는 지난 몇 년 동안 임 당수가 조정을 상대로 당당히 고개 들고 다니는데 그 본인은 물론이요 주변의 그 누구도 화를 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의 삶에서 지금껏 답답하고 한스러운 일이 어디 한둘이었던가. 어디 성군이나 명재상이 나타나서 좋은 세상 만들어주기를 기다렸다가는 진작에 늙어 죽든 굶어 죽든 할 판. 그러니 이렇게 판 깔릴 때 함께 가는 것이야말로 백성들 딴에는 옳은 길이었다.

“당장 얼마 전 윤원형이 재판할 때도 임 당수께서 그리 말씀하셨다지 않는가? 임금님께서 제대로 백성의 주인 되실 수 있도록 보필해야지, 아니면 공신이고 뭐고 없다고.”

“암, 암. 참으로 맞는 말일세.”

혼신의 글재주를 다하여 순화한 꺽정이의 발언을, 그것도 다시 글 아는 사람의 이웃의 친구쯤 되는 이들에게 곁가지로 건너 들은 이들이 역시 저들 좋을 대로 해석하며 떠들었다.

“,,, 도성 민심이 이러하니, 이곳에서 새로 그 당의 당원들 모으기는 어려움이 없겠더이다. 솔직히 봉산 사람들은 많이들 섭섭하다 하겠지만요.”

아랫말에서 벌이던 사업을 여기저기 적임자에게 인계한 뒤 뒤늦게 한양으로 올라온 서림이, 그간 저의 귀에까지 들려온 한양 민심 이야기를 꺽정이에게 전해주었다.

당장 멀리 갈 것도 없이, 그들이 앉아 있는 이곳 주막만 하더라도 사내들 모여 하는 이야기라면 온통 임 당수와 민주당 이야기였다.

“참나, 봉산 사람들도 너무하는군. 잘 먹고살게 해주고 또 한바탕 신나게 날뛰게 해주었으면 그만이지, 도적떼가 많이 있으면 무에 좋다고 볼멘소리나 한다나.”

궁시렁대는 꺽정이었지만, 그 역시 황해도에 미련이 안 남는다면 거짓말일 테다.

의민당이 해산되고 민주당이 결성된 것은 말장난만은 아니었다. 새 당명이 워낙 논쟁을 불러일으켜서 그렇지, 어쨌든 당세(黨勢)에서 꽤 손해를 보게 된 것은 사실이었다.

의민당이 그간 황해도에 잘 쌓아둔 기반을 계속 가져갈 명분이 없으므로 – 물론 서림이 깔아둔 길을 통해 계속 재물이 들어오기는 할 테다 – 모두 떨쳐내게 되었으며, 황해도 양민들 역시 저들 동네라면 모를까 한양에서 벌어지는 일까지 함께하러 올라오기는 어려울 테다.

“황해도에 나름 정이 아니 들었다면 거짓이겠지. 허나 우리가 어디 한 도에서 근근이 먹고살려고 이 짓 하게 된 건 아니잖소? 이제 도성까지 낼름 먹었으니, 새로 시작할 때도 되었지.”

두 번의 생을 살면서 그의 터전이 되어주었던 황해도는 이제 당분간 뒤로 하고, 새로운 길로 나아갈 때가 되었다.

“어딜 가든 임 당수 존함만 내걸면 우르르 몰려나올 테니. 말씀드린 것처럼 당원 모으기는 쉽겠지요. 헌데 그것으로 무얼 하실 생각이십니까?”

“내 이번 일로 깊게 깨달은 것이 있소.”

“이번 일이라 하심은...”

“분명 도성까지 한바탕 뒤엎고 금군의 자리까지 꿰어찼는데도, 정작 나랏일 맡을 선비들이 우리 당에 없으니 실제로 정사 행하는 것은 계속 남들 원하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단 말이지.”

물론 이준경 정도만 되어도 윤원형보다야 훨씬 나았지만, 남의 말 듣고 순순히 따를 만큼 꺽정이 성질이 온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저 이준경처럼, 조정의 중신들까지 말 한마디로 움직이고 저의 뜻을 곧장 그들의 뜻으로 만들 수 있을까, 그것을 부러워하며 궁리하게 되는 것이었다.

“물론 지금도 여기저기 끼어들어 훼방은 놓을 수 있겠지만, 정말 우리 마음대로 국정을 이끌고, 그때 우리가 약조한 것을 이루고자 한다면 조금은 다른 것이 필요할 게요.”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낸들 알겠소? 사형이랑 다른 사람들 모아다가 다시 더 깊게 고민해봐야지.

허나 분명한 것은 하나요. 우리는 더 높은 곳을 노릴 것이외다. 서림이 그대도 벼슬 하나쯤은 해야 하지 않겠소? 나야 그런 데는 별 관심 없지만.”

‘벼슬’ 두 글자에 서림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그것이 퍽 재미있다 여기며 꺽정이는 술상을 내오라 청하였다.

엉뚱한 불청객이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흠흠, 임 당수 되시오? 그... 옷차림이 달라져서.”

다 떨어진 도포자락이 두드러지는 중년 선비 하나가 슥 나타나 말을 걸어왔다.

“그렇소만. 임자는 뉘시오?”

“이 사람도 옷차림이 달려져서 그런가, 못 알아보시는구려. 내 앞서 보았던 허자요.”

“아, 호관 나리시구만. 여긴 그런데 무슨 일이시오?”

“후... 오늘 있던 일에 관하여, 긴히 말씀 나누고자 하는 사람이 있어 이 사람이 가운데서 번거롭게나마 심부름을 하게 되었소이다.”

“길게 아니 말씀하셔도 되오. 윤원형이가 불렀다, 그 말이겠지. 오늘밤에 찾아가면 되겠소?”

갑자기 허자니 윤원형이니 하는 이름이 나오니, 그 스스로 나름 거물이 되었다 여기는 서림이지만 딸꾹질 나오는 것을 금하지 못하였다.

“그렇소이다. 주변에 지키는 이들이 있으니...”

“하하하! 지키는 이들 훨씬 많을 때도 내 집처럼 드나들었는데, 그 정도야 뭐. 다만 돌아가서 윤원형이에게 말투나 좀 제대로 해두라 전해주시오. 혹여나 밤길이 어떨지 모르니까, 환도 차고 갈 생각이거든.”

서림이 놀라건 말건, 꺽정이는 태연자약하게 대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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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에서 언급된 윤원형의 죄상은, 원 역사에서 윤원형이 몰락할 때 당한 탄핵 상소들의 내용을 일부 참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작중 윤원형은 원 역사보다 15년이나 먼저 몰락하였기에 훨씬 그 내용이 소략하고, 무엇보다 아직 을사사화의 영향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요.

원 역사에서 문정왕후가 사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원형 탄핵이 벌어졌을 때에도, 윤원형이 지닌 공신 작위는 명종이 그의 처벌을 회피하는 강력한 명분이 되었습니다. 언관들을 시작으로 점차 고위 관료들까지 윤원형을 벌할 것을 청하고, 윤원형 대신 영의정에 오른 이준경도 취임과 동시에 윤원형의 귀양을 청하는 상황에서, 명종은 계속 공신을 대우한다는둥, 재상을 함부로 파직시킬 수 없다는 둥 변명을 내놓았습니다.

결국 이준경이 조정의 관료들을 모두 거느리고 두 번이나 아뢴 뒤에야 삭탈관직 후 귀양보다 약한 방귀전리(放歸田里,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함)를 명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 있어서 후대의 사림들 사이에서도 다소간 논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윤원형의 공식적인 죄목 중 을사사화는 포함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물론 인종에 대한 사림의 기대와는 별도로, 당장 다시 사화를 겪지 않고 정국을 운영하고자 하는 이준경 입장에서 왕의 정통성에 관한 문제는 피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이준경은 선조 즉위 직후 을사사화로 책록된 위사공신의 위훈삭제에 반대하다가 막 출사한 이이와 크게 대립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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