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잉걸불 되살리기 (1)
보름은 한참 지났건만, 겨울밤 하늘에 달이 유난히 밝아, 정난정은 뒤뜰로 나와 손을 호호 불면서 천지신명께 기원을 올리고 있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살아서 이 집을 빠져나가기를 바라기만 해도 과욕이라 할 터인데, 저와 지아비 구명(救命)은 물론이요 다시금 옛 영화 되찾기를 바라마지않는다 하늘 향해 빌고 있으니, 어지간히 영험한 천지간의 신령도 들어주기 곤란한 소원이었다.
때맞추어 검은 그림자 하나가 달빛을 가리더니, 정난정 옆에 턱 내려앉았다.
“어맛!”
헛소리 그만하라는 하늘의 경고는 아니요, 그냥 꺽정이었다.
“누군가 했더니 그때 보았던 정 부인이시구만. 임자 바깥사람 보러 왔으니 놀라지 마시오.”
그 서슬 퍼런 임 당수가, 그것도 칼까지 차고 오밤중에 나타났거늘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두려움에 잠시 입술 파르르 떨면서도 마침내 진정하고서 할 말을 꺼내었으니, 정난정도 어지간한 여인네는 아니었다.
“결국 우리 부부를 베러 온 것인가요?”
“뭐, 그럴 마음도 없지는 않소. 정 원한다면 언제든 그리 해 드리지.”
“대체 우리가 무엇을 했다고, 이렇게 악독하게 괴롭히는 건가요? 설마 정말로 천하를 올바르게 한다는 둥, 악독한 간신을 때려잡는다는 둥 하는 소리를 스스로 믿고 따르는 것은 아니겠지요?”
악에 받친 정난정이 그간 이곳에 갇혀 지내며 쌓인 분통을 터뜨리며 표독하게 물었다.
“이렇게 한다고 무슨 엄청난 명성이라도 얻을 수 있을 것 같나요? 백성들이 지금 임 당수에게 보내는 환호가 간다면 얼마나 오래 가겠어요?”
“명성이야 벌써 꽤 얻었고, 환호가 오래 안 간다면 계속해서 그렇게 환호받을 일을 만들면 그만이오. 임자네 부부는 도량이 좁아서 고작해야 가산 늘리고 사람 죽이는 일로 그쳤지만, 나는 그럴 생각 전혀 없거든.”
꺽정이가 비웃으며 대꾸하니, 바라보는 곳이 완전히 다름을 직감한 정난정도 결국 제대로 독기를 발하지도 못하고 부들대기만 할 뿐이었다.
“해서, 임자네 집 마지막 주춧돌 하나까지 빼돌려 내 발판으로 삼으려고 이리 찾아왔소. 그러니 허튼소리 그만하고 임자 바깥사람한테나 안내해 주시오.”
여전히 원망하는 눈길이 꺽정이에게 쏟아졌는데, 다른 사람이라면 따끔하다 하겠으나 꺽정이의 두터운 낯짝에는 별빛만도 못하였다.
정난정 따라 별채에 들었더니, 조그만 화로 하나에 의지하고서 앉아 있던 윤원형이 그를 맞이하였다. 초조한 기색 역력하여 방에 들 때부터 드러났다.
“그래, 부르셨다 들었소. 이래 찾아왔으니 하실 말씀 해 보시오.”
방에 들자마자 털썩 앉으면서 꺽정이가 말했다.
“이제 와서 뭐라 더 말할 게 있겠는가? 그저 목숨만 살려달라는 것이지.”
윤원형이 짐짓 태평한 시늉을 하며 말했다. 그러나 이미 마음이 평정을 잃었으므로, 미세하게 금이 간 얼굴 사이로 두려움과 불안이 묻어나왔다.
후환이 두려워서라도, 결국 이준경과 대신들조차 저를 죽이지 못하고 사실상 잠시 실각시키는 정도로 그치리라 자신하였던 윤원형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 임거정이 나타난 이후로는 그것이 완전히 뒤집혔다. 나라에서 죄를 받으라 하니 싫다면서 도성까지 불태운 임거정 앞에서 후환을 거론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지금도 그 공포가 선명히 윤원형의 뇌리에 새겨져 있었다.
“하, 지난번 의송 때 밑천이 다 드러나더니 이제 솔직해지시는구려.
헌데 그것 아시오? 나리가 날더러 온갖 욕은 다 하던 시절에 딱 하나 맞춘 게 있었는데, 그건 바로 이 임꺽정이가 도적놈이라는 것이오. 도적한테 맨입으로 목숨 살려달라 하는 것만 한 바보짓이 어디 있소?”
“후, 좋네. 비록 이곳 한양의 모든 재산은 송두리째 사라졌지만, 어차피 참된 재보는 토지 아닌가. 아직 전국에, 아니, 황해도 뺀 전국에 이 사람이 가진 농장이 적지 않네. 그것을 넘겨주도록 하지.”
“아니, 한양의 집이 모두 불탄 판국에, 전지가 있다 한들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문권이 남아있을 리 없지 않소?”
“자네가... 흠흠, 지난번 성명방 저택을 불태운 이후로, 아예 사본을 여럿 만들어 교하의 본가를 비롯해 몇 곳에 나누어 두었네. 이 사람의 말 한 마디면 족히 거두어들일 수 있네.”
그 성명방에서의 (과하게) 따뜻했던 추억을 돌이켜보면, 별채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 윤원형이 전국에 지닌 토지는 굉장하였다. 윤원형이 어떻게든 꼼수로 전부를 바친다 말만 하고 절반쯤 빼돌린다 하더라도, 꺽정이 손에 들어오는 양은 엄청날 것이다.
서림이에게 정리하라 던져주면 그 규모에 한 번 눈이 돌아가고, 그것을 자신이 정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 한 번 더 눈이 돌아가리라.
“좋소. 허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오.”
“무어라? 내게서 더 얻어낼 것이 무엇이 있다고 그리 말하는가?”
“어디 보자... 우선 계책부터 좀 내놓아 보시오. 나름 일세를 풍미한 권신 아니었소? 나도 그 권신 노릇 참 좋아 보여 따라 하려는데, 예나 지금이나 뭔가 일을 벌일 때는 스승을 잘 구해야 한단 말이오.
이번 재판 때도, 솔직히 말해 나처럼 후환 별로 걱정 안 하는 사람만 있었더라면 나리는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게요. 그런데 이번에 보니 어쨌든 나는 엄연히 굴러온 돌이었고, 박힌 돌 한둘쯤 빠졌다 한들 여전히 그 옆에 박혀 있는 돌들이 많더라 이 말이지.
해서, 이번에 내가 새로 당을 잘 키워 장차 조선국 국정을 좌지우지하게끔 만들고 싶소. 어찌하면 되겠소?”
너무나 당당한 물음. 이 배움에 대한 뜻밖의 열정에 윤원형조차 일순 당황하였다.
지금까지 권세를 탐하여 수없이 많은 사람을 속이고 해치면서 걸어온 길. 그것의 비법을 묻는 사람이 있을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내가 자네에게 제대로 가르침을 준다는 보장도 없는데, 흉금을 너무 터놓는 것 아닌가?”
“에이, 상황이 상황인데 설마 건성으로 가르침을 주실까. 가르침이 마음에 안 들 때에 대비하여 내 회초리도 들고 왔소.”
꺽정이가 칼자루 들어보이며 말했다.
청하는 가르침의 내용도, 가르침 청하는 예절도 조선국 열린 이래 유례가 없는데, 결국 아쉬운 것은 윤원형이었다.
윤원형은 지금까지 저의 삶을 부끄럽게 여기지는 않았으므로, 주저하던 끝에 결국 저 황당한 청을 들어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잠시 곰곰이 생각한 뒤에 윤원형은 ‘가르침’을 내리기 시작하였다.
“가장 중한 것은, 자네가 원하는 바를 남이 나서서 외치도록 하는 데 있네.”
윤원형이 그 옛날, 대적(大敵) 김안로와 사투를 벌이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지켜 왔던, 그러나 마지막에는 끝내 어기고야 말았던 철칙이었다.
“내 이번 난리에서는 그것을 하지 못하였지. 앞장서서 자네를 역적으로 몰고 주상께 주청하여 오만 관군을 모았으니, 그 소임도 이 한 사람에게 그대로 돌아올 수밖에.”
“소임이 어쩌고 하는 데는 관심 없소. 남들이 어떻게 내 원하는 바를 따르도록 만드는가, 그것만 말해보시오.”
“첫째로 내세우는 바가 있어야 하고, 둘째로 그 내세우는 바에 남들이 따를 만한 이유를 만들어주어야 하네.
이 사람이 때로는 저들 사림을 이용하고, 또 때로는 소위 ‘소윤’이라 묶이던 내 당여들을 내세우고 한 것은 모두 이 두 가지를 통해서였네. 사림은 그렇지 않은 척 온갖 가식은 다 부려도 항상 벼슬에 나아와 영달하는 데 목이 말라 있었고, 내 당여들은 언제 윤임과 그 무리가 칼을 뽑아들까 그것을 두려워하였지.
그러므로 그들 딴에는 스스로 생각하여 움직인다 말했지만, 실제로는 내 뜻에 따라 움직일 뿐이었네. 그리하여 이 사람의 계책에 엮이고야 말았으니, 일이 벌어진 뒤에는 물릴 수도 없게 되었지. 그나마 저 동고와 같은 사람은 내 손에 놀아나는 것을 알았지만, 알기만 할 뿐 딱히 다른 수를 쓰지 못하였고.
당장 지난날 부민고소의 금법을 폐하라며 자네가 생떼 부리던 시절에도, 그리하여 동고가 자네 편을 드는 대신 이 사람 아래에 숙이고 들어온 것 아니겠는가?”
말하다 보니 과거의 영광과 즐거움이 떠올라 조금은 목소리가 들떴다.
“그러니 우선 남들 욕심을 살살 긁어주고, 그것을 하나로 엮어 내가 원하는 쪽에 풀게끔 만들어야 한다, 그것 아니오?”
“그렇다네.”
“권신 노릇도 그리 어려운 것만은 아니구려. 실패하면 목이 날아가기 십상이니 그것이 문제일 뿐이지.”
정말 별 일 아닌 것처럼 말하는 꺽정이 때문에, 끝내 윤원형도 웃고야 말았다. 허나 그 웃음 뒤에는 지금껏 경험치 못한 씁쓸함이 따라왔다.
“하하! 그렇지. 어디 한 번 잘 해보게나.”
“뭐, 잘 해보겠소. 나리 말대로라면, 그렇게 남들을 많이 끌어와 내 대신 앞에 내세우면 내세울수록 위세가 더 커지는 것 아니오?
그렇다면 온 백성을 앞으로 끌고 나와 한목소리로 외치게 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겠지. 흐, 백성의 욕심이라. 이제 얼추 감이 잡혔소.”
“그래... 잘 되었네. 이 정도로 족하겠는가?”
윤원형이 꺽정이 눈치를 슬쩍 보며 말했다. 한때의 윤원형이 이제 남의 눈치를 보는 신세가 되었다는 굴욕감보다는, 마침내 활로를 찾았을 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먼저 고개를 내밀었다.
“물론이오. 소중한 재산을 내놓기로 했을 뿐 아니라, 이렇게 어디 가서 쉬이 못 들을 교훈까지 들려주니 당연히 족하다 해야 하지 않겠소?”
꺽정이가 씩 웃으며, 윤원형 앞으로 불쑥 다가갔다.
그리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욕심이 많소. 그러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퇴짜를 놓아 드리리다.”
“아니, 그런 게 어디 있는가? 그러면 대체... 무엇을 더 주어야?”
“그대 목숨.”
갑자기 꺽정이의 말투가 흉흉해지니, 윤원형 등골에 식은땀이 절로 났다.
바깥에서 귀를 대고 듣고 있었는지, 정난정의 숨죽인 비명소리도 창호지를 뚫고 들려왔다.
“아니, 그럼 이 정도까지 속사정 탁 터놓고 이야기 주고받았는데, 입막음을 아니 할 줄 아셨소? 많이 해보셨을 분께서 왜 이러시나.”
꺽정이가 벌떡 일어나, 문을 확 열었다. ‘에그머니나’ 소리와 함께 문틀에 얻어맞고 자빠진 정난정이 겨우 일어났다.
“들어오시오. 날도 추운데 뭔 내외를 다 하고 있어.”
정난정이 순순히 따라 들어와 앉았다.
부부 간에 오가는 불안한 눈빛.
“둘이 죽고 못 사는 사이라고 세간에서 많이 떠들던데, 참으로 금슬이 좋구려.”
비꼬는 기색이 역력하여, 윤원형도, 정난정도 대꾸하지 못하였다.
“앞서 의송에서 말했던 것과는 달리, 나는 그대들이 백성들 사이에서 몰매맞아 죽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소.”
“...”
“왜냐하면, 그 전에 내가 먼저 도륙을 내고 싶거든.
그러니 결정하시오. 여기서 목숨은 끊어 그대가 퍽 아끼는 이 사람의 목숨을 살리고, ‘그래도 마지막에는 부끄러움을 알았다’ 소리라도 듣고 갈 테요?
아니면 끝까지 구차하게 살아보려 발버둥치다가 결국 유배지 산골에서 호환을 당할 것이오? 아마 그 호랑이는 두 발로 걷고 성은 임가일 텐데, 나는 모르는 일이오.”
“이보게, 이럴 수는 없네!”
“이럴 수가 없기는 무슨. 당장 지금 그대 눈앞에서 이렇게 겁박하고 있는데.
의송이 구색을 갖추기 위해서라도 아직 몇 번은 더 이어질 것으로 알고 있소. 판결까지 완전히 나려면 족히 한 달은 더 걸릴 지도 모르지. 어디 그동안 심사숙고해 보시오. 도성을 떠나기 전까지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면, 그때는 내가 대신 결정을 내려주겠소.”
그 말을 끝으로 꺽정이는 훌쩍 일어나서는 사라졌다.
나는 새조차 떨어뜨릴 수 있을 것만 같던 한때의 권세도, 아직까지 윤원형 그의 핏줄 속에 흐르는, 누이 대비와 조카 임금과의 연줄도, 저 날것 그대로의 위협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꺽정이가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민주당을 열 무렵, 이지함 또한 뜻을 같이할 선비 모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조카 이산해의 스승이기도 한 조식은 아무리 꺽정이의 성정을 마음에 들어 한다지만 이미 일문(一門)을 이룬 사람이고, 설득은 할 수 있을지언정 완전히 행보를 함께 할 수는 없었다.
대신 이지함이 떠올린 것은 그의 동문들이었다.
그동안에야, 그놈의 역적 누명 때문에 연락 한 번 제대로 주고받지 못하고 끽해야 보령의 형 이지번을 통해 겨우 소식이나 주고받는 정도였지만, 이제는 거리낄 것이 없던 것이다.
하여 부친의 삼년상 마치고 대과 준비를 하던 사제 박순(朴淳)에게도 연통을 넣고, 벼슬을 잃고서 낙향해 있던 허엽(許曄)에게도 역시 연락을 취하였다.
그러고서는 서림이에게 쌀을 좀 빌려 명례방(明禮坊, 現 명동 일대)에 그럴듯한 집도 한 채 마련하고, 좌우지간 바쁘게 살고 있었다.
“이번 윤원형 의송에서는 빠지게 되어 마냥 낙담하고만 계실 줄 알았는데, 이리 부지런히 지내고 계셨구려.”
꺽정이가 사형의 새집 구경을 하며 말했다.
“선비가 되어 하루라도 게으르게 있을 수는 없는 법이지. 그때 우리가 약조한 대로 뭔가 나라를 바꾸어보려면, 나 한 사람은 출사를 해야 할 것 아니냐. 너나 서 별감더러 과거를 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아니, 일전에는 그냥 자염 굽고 배나 만든다고 하시지 않았소?”
“자염 굽고 배 만드는 벼슬아치가 되면 되지. 도적놈이 나라도 뒤엎는데 벼슬아치가 그런 일 못할 건 무에 있느냐.”
농담으로 받는 이지함이었다.
그때, 휘 둘러보던 꺽정이 눈에 어째 익숙한 면면이 들어왔다.
“저놈들 저거, 아랫말에서 일하던 의민당 졸개들 아니오?”
“엇, 임 당수 오셨습니까요? 헤헤.”
그냥 머슴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이지함이 옆에서 부연하였다.
“우리가 장차 양천을 없애려 하는데, 나부터 집에 노비를 쓸 수는 없는 노릇이지. 청석골 아랫말 살던 이들에게 미리 기별을 보내어, 삯은 넉넉하게 쳐 줄 테니 와서 품 팔라 하였다. 자원하는 이들이 적지 않더구나.”
“허, 역시 사형이시오.”
꺽정이 저는 전혀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하기야, 전생에서든 이번 생에서든 집에 노복 부릴 일은 없었으니 어쩔 수 없었지만.
“신씨 부인으로부터 전해듣기로는 봉산 일대의 유생들도 요새는 가풍(家風)이 이렇게 바뀌고 있다고 하더라.”
고작 한 해도 안 되어 끝난 의민당 봉기였지만, 거기에 관여한 황해도의 모든 사람들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일일 것이다.
그때 동고동락했던 기억 때문인지, 아니면 저들이 부리던 노비들이 병장기 들고서 기세등등하게 관군에 맞서던 것을 보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집에서 부리는 노비를 면천해 주고 새경살이를 시키거나 하는 풍조가 벌써 여기저기 퍼지고 있다 하였다.
“세상 법도 바꾸기 퍽 쉽소. 고작 그거 했다고 노비들이 없어진다니.”
“조석간에 사라지기는 어려울 테다. 멀쩡히 있는 노비를 갑자기 양민으로 만든다고 해서 그들이 먹고살 길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더냐. 오히려 잘못하면 양인으로서 온갖 부역과 조세 짊어져야 하니 노비일 때보다도 더 힘겨울 수 있지.”
신씨 본인도 조만간 강릉 본가에 딸린 노비들을 그렇게 바꾸어볼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봉산과는 상황이 달랐으므로 하루아침에 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다.
“그나저나 사랑채 눈앞에 두고 섬돌 위에서 이 뭐 하는 짓이냐. 얼른 안으로 들자꾸나.”
“다 사형이 말이 많아서 이리 된 거잖소.”
“그래, 그래. 그렇다 치자꾸나.”
이지함이 씩 웃으며 사랑채 마루에 올라 방문을 열었다. 구들장이 깔려 있는지, 은은한 훈기가 꺽정이에게까지 닿았다.
“네가 이 집 사랑방에서 맞이하는 첫 손님이다.”
“광영으로 알겠소.”
과연 어젯밤에 찾아갔던 윤원형네와는 달리 곧장 몸을 타고 올라오는 열기를 즐기며 꺽정이가 말했다.
“윤원형이 소식은 들으셨소?”
그 이름이 나오자 이지함 얼굴이 도로 심각해졌다.
“그래, 듣기는 들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온 도성이 갑자기 그 윤원형이 마음을 바꾸었다며 시끄럽던데.”
그간 허자를 내세워, 저의 잘못은 축재를 조금 하고 나라의 대사를 처리하는 데 일부 과오가 있었던 것이라며 우기던 윤원형이, 하룻밤 사이 자신의 잘못이 크다며 추관들이 제기한 죄를 모두 인정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죄를 어떻게든 갚겠다며, 자신이 그간 외척이자 권신으로서 권세를 부려 얻어낸 전국의 농장을 임 당수의 민주당에 바치겠노라 공언하였다.
“뭐, 별 일은 없었소. 어젯밤에 내가 윤원형이네에 찾아갔다 왔는데, 그때 큰 감흥을 받은 모양이오.”
“허나 다른 것도 아니고, 윤원형이 팔도 군현을 짜내다시피 하여 마련하던 농장이다. 그것을 나라의 것으로 환수한다 해도 뒷말이 나올 터인데, 당에 넘긴다 하니 군말 나올까 걱정이 되는구나.”
그러나 이미 어젯밤 바로 그 윤원형에게 권신 노릇의 비법을 알차게 배운 꺽정이는 그저 비웃을 뿐이었다.
“윤원형이 딴에는 머리를 굴린 것 아니겠소? 바로 우리 당이 그 구설수 휘말리게 하려는 심산으로 던진 수겠지.
실은 어젯밤에 내 윤원형이의 청을 받아 한 번 만나보러 갔었다오...”
하고서, 간밤에 오갔던 윤원형과의 대담에 대해 죽 늘어놓는 꺽정이었다. 물론 말미에 윤원형 겁박한 부분은 쏙 뺐다.
“허... 과연 일세의 간신이로구나.”
한 사람의 선비로서 아니 내뱉을 수 없는 탄식을 이지함이 내놓았다. 나름대로 배움이 깊다 여기는 이지함이었지만, 저토록 간결하게 나라에 해악이 될 만한 권신의 처세를 요약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뭐, 간신이든 아니든, 그 조언한 바 자체는 나름 취할 만하다 생각하오. 우리가 이름만 그럴듯하고 가끔 목소리나 내는 곁가지 신세로 끝나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세를 불려야지.”
“물론 나도 내 사제들을 한데 모아서 차근차근 함께할 사람들을 만들어나갈 심산이기는 하다. 하지만 너는 여기서 어떻게 더 세를 불릴 생각이냐?”
“윤원형이가 좋은 데 써 달라며 저의 막대한 농장을 바친다지 않소? 그것을 흩뿌려서 기반을 만들면 되겠지. 어차피 가지고 있어본들, 사형 말씀하신 것처럼 괜히 군말밖에 더 나오겠소?”
“내가 이쯤에서, ‘그것을 어찌할 것이냐’ 더 물어보면 너는 ‘사형이 고민해야 하지 않겠소?’ 하겠지.”
“잘 알고 계시는구려.”
“그러나 이번에는 그것도 그리 쉽지는 않을 테다. 의민당 만들었을 때야, 워낙 백성들이 살기 어렵고 또 전국 각지에 유랑하는 이들이 넘쳤으니 조그만 재물로도 금방 사람을 끌어모을 수 있었지.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런 백성들 몇 명 모아서 뭔가 해볼 때를 한참 지나지 않았느냐? 더구나 이미 윤원형의 권세는 영락하였고, 팔도 군현의 백성들도, 사족들도 딱히 우리를 따를 이유가 없는 판국이다. 단순히 재물을 흩뿌리는 것만으로는 효험이 없을 터.”
이지함의 날카로운 지적에, 꺽정이 또한 미간에 내 천(川)자를 새기며 고심에 빠졌다.
허나 이 고민의 원인을 제공한 자가 이미 답을 주었으니, 어찌 따르지 않으랴.
“윤원형이 조언을 따르면 어떻겠소?”
“무슨 조언?”
“그치가 말하기를, 남들 욕심을 슬슬 긁어주면서 내 편으로 묶으면 된다고 하였는데, 윤원형이 이번에 바친다는 재산을 그런 데 쓸 수도 있지 않겠소?”
“허나 내 앞서 말하지 않았더냐. 어지간한 백성들은 이미 조정의 탐관오리가 없어졌으니 만사형통이라 여기고 만족하고 있을 터인데, 무슨 욕심을 더 끌어모을 수 있겠느냐?”
“아니, 사형. 우리는 원래 도적들 아니오? 도적이 그렇게 정정당당하게만 생각하니까 답이 안 나오는 것이오. 백성들이 욕심을 아니 부려서 문제라면, 잘 꼬드겨서 그런 욕심을 내도록 만들어야지.”
“욕심이라... 아, 그렇지!”
사람의 욕심 흥성케 하는 일을 두고 일전에 벌였던 논쟁을 떠올린 이지함이 잠깐의 고민 끝에 탄성을 질렀다.
“무엇이오?”
“학당! 윤원형이 내놓은 농장을 모조리 처분하여 전국에 학당을 세우는 것이다! 물론 운영의 비용을 감당하기에는 턱도 없겠지만, 우리가 이전에 해주 고을에서 했던 것처럼 처음에만 우리 당에서 내놓고 그 다음부터는 공량(수업료)으로 충당하면 족할 터.”
그러나 여전히 꺽정이는 아리송하였다.
“아니, 학당을 세우는 것이 어떻게 우리 당세로 이어진다는 말이오?”
“다 그곳에서 무엇을 가르치냐에 달린 것 아니겠느냐.”
이지함이 한양 올라온 이후 쓸 일 없어 묵혀두었던 예의 음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이보게, 수산(이지함) 있는가! 내 꼭 임 당수를 만나보고 싶으이! 자리를 좀 마련해주게나! 수산, 수산!”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이 나타나 이지함네 새집 대문의 문간을 닳게 하고 있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학문을 널리 가르치는 일 하나에는 정말로 진심인 중년 선비, 주세붕이 소식을 듣자마자 나타난 것이다.
“이야, 이렇게 호응하는 목소리가 클 줄은 몰랐소.”
“목소리가 여간 큰 게 아니니 문제지.”
이지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한 번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한데.”
“이미 내가 엊그제 만나보았다. 간만에 귀가 아프더구나. 관찰사로 뵈었을 때는 저 정도는 아니었던 듯한데.”
따지고 보면 주세붕의 그 열정을 자극한 것이 꺽정이와 이지함, 그리고 의민당이었으니 자업자득인 셈이었다.
황해도 관찰사 직에서 빠르게 그 몸을 빼내어 난리에 휘말리지는 않았으나, 그 이후로 윤원형 일파와 교류한 것이 문제되어 이준경이 새로 꾸리고 있는 조정에는 들지 못할 것이 명백해지고 있던 주세붕이었다.
그러나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이 기회에 지난날 어린 이이와 논쟁하면서 깨우친 바를 이루어내고야 말겠노라 작정하고 이렇게 찾아오고 있었다.
“무슨 얘기를 꺼냈소?”
“그, 지난날 대녕학당과 수양서원 사이에서 겨루던 것 있지 않으냐? 그 이후로도 신재 선생은 계속 학당을 진흥케 할 방편을 고심하고 고심하였던 모양이다. 윤원형의 재산 정도라면 전국의 서당을 크게 일으키고, 배움 구하는 백성이 모두 그 뜻 이룰 수 있게 할 수 있다고 공언을 하던데...”
“못할 것도 없지 않겠소? 이왕 이리 된 것, 저 서림이랑 밤골 도령까지 불러와서 아예 제대로 판을 깔아 보십시다.”
오늘은 간만에 대과 준비를 위해 경서를 정독할 생각을 하고 있던 이지함은 곧 그 마음을 접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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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 화 전부터 등장하고 있는 임꺽정의 민주당은, 이름이 유사한 현실의 어떤 정당과도 관련이 없으며, 작가의 정치적 성향과도 무관함을 공지드립니다.
흔히 서경덕의 제자로는 이지함과 황진이 정도를 많이 생각하곤 하지만, 실제로는 허엽, 박순 등 선조 시기 정국을 이끌었던 인물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특히 허엽과 박순 두 사람은 동서분당 당시 같은 스승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허엽은 동인, 박순은 서인의 중진이 각각 되면서 갈라지게 되었지요. 여담으로, 허엽은 유명한 허균과 허난설헌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두 사람에 대해서는 이들이 실제로 등장한 뒤에 더 다루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