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잉걸불 되살리기 (3)
신해년(1551) 새해가 밝았다. 이 무렵을 전후하여 경사스러운 소식이 또한 궁궐 안으로부터 퍼져나갔는데, 바로 중궁전(中宮殿, 왕후)에 태기가 있다는 것이었다.
허나 정말로 경사 하나하나에 목마른 때라면 모를까, 지금은 도성이 워낙 시끄러웠으므로 그리 큰 반향은 없었다. 원자(元子)를 생산할지 그렇지 않을지도 확실치 않거니와, 그보다 훨씬 중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민주당에서 세운다는 잡학 학당이 소란의 근원이었다.
윤원형이 전국 각지에 차려둔 전답과 농장을 처분하여 학당 세우는 밑천으로 삼겠다 하는데, 여기에 끼게 된다면 명예도 명예지만 당장 거기서 떨어지는 이득이 적지 않을 것이 명백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이름 높은 임 당수와도 연줄 만들 기회이니, 작금 조선에 이만한 기화(奇貨)가 어디 있으랴.
하여, 처음에는 각 군현의 아전들이 서림에게 청하여 저들 집안에서 학당을 세우겠노라 나섰는데, 이윽고 다른 경쟁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나마 산학(算學)이나 의학, 율학(律學)처럼 개국 초까지는 십학(十學)이라 하여 ‘학(學)’ 자 붙여주었던 쪽은 사정이 덜 복잡하였다.
“산학을 논하는데 어찌 관아의 서리들이 나서겠습니까? 우리 집안이야말로 대대로 산원(算員)의 일을 맡아 왔으니, 무릇 가르치는 일도 우리가 도맡음이 옳습니다.”
“율학은 단지 국법에 이러이러한 조항 있노라 아는 것으로는 부족하니, 일전에 어떠한 판결이 내려진 바 있고 그 속사정 무엇인지 등등을 모두 알아야 합니다. 율관 집안에서 이것을 맡지 않는다면 누가 맡겠습니까?”
조선국에서 농사짓고 글 읽는 것 외 다른 업으로 먹고사는 사람이 가장 많은 곳이 이곳 도성이었다. 한편으로는 집안에 크나큰 이득이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임 당수와 서 별감에게 연줄 마련할 수 있다 하니, 지금까지 조용히 관아 한 구석에서 저들 일이나 하던 잡직(雜職) 사람들이 나서기 시작하였다.
물론 그 이면에는, 어디 시골 관아에서 올라온 향리들이 재주를 배워 그들과 그 자식들의 자리를 노릴까 걱정하는 마음도 있었다.
“좋소. 그대들 집안에서 사람 가르치는 데 정통한 이들을 천거하도록 하시오. 다만 만에 하나 지방 군현에서 상경하는 이들 중 그대들보다 뛰어난 자가 있다면 자리를 내놓아야 할 것이오.”
“고맙습니다, 당수!”
간혹 별 재주는 없으면서 재물로써 청탁하는 이들이 없지는 않았는데, 서림 아래에서 일하는 서리들은 황해도 한 도를 주물럭거렸던 적이 있거나 적어도 들어서 알곤 하였으므로 그만한 재물에는 쉬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 결과 민주당 학당에서 교수 취재하는 일이 조선국의 여느 관아에서 하는 행정보다 청렴하게 되었으니 우습고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한편, 상학(商學)과 같이 지금까지 그것을 학문이라 부를 생각조차 못하였던 일에 이르러서는, 난장판이라는 말이 오히려 점잖게 느껴질 정도였다.
“임 당수, 무릇 시전 상인들이야말로 나라의 상인들 중 으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육주비전(六注比廛, 육의전)에게 상학의 교수 자리가 돌아옴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어림없는 소리! 그저 도성 한복판에서 편한 장사만 하는 자들이 무슨 상인의 스승을 한다는 말이오?”
“무어라? 지금 말 다 했는가? 어디 잡다한 사상(私商) 나부랭이가...”
“하하, 내 개성에서 소문을 듣고 상경하였는데, 고만고만한 재주로 서로 겨루려는 모양새가 참으로 재미있소. 우리처럼 전조 고려 때부터 장사를 하여 가전(家傳)되는 장사의 비법이 있지 않고서야 어찌 장사를 안다 말하겠소?”
꺽정이 앞에서까지 드잡이질하며 다투는데, 서림이라면 모를까 문외한 중의 문외한인 꺽정이 눈에는 다 거기서 거기였다.
그러나 이이와 이지함이 그 격물법 운운하던 가락은 기억하고 있었으므로, 서림과 잠시 머리 맞대고 고민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
“이보시오들.”
꺽정이가 말 한 마디 꺼내면 그간 악을 쓰며 저의 집안이 훌륭하다 자랑하던 이들은 곧장 조용해지곤 하였다.
“다들 저의 일신에 지닌 재간이 이렇고 집안에 내려오는 비법이 저렇고 하는데, 결국 견주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오.
어차피 한양에 지금 남는 것이 빈집이니, 그곳 하나를 사들여 그대들이 장사의 이론을 두고 논쟁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도록 하겠소.”
사실 조선국의 상인이라는 사람들 중 행실이 점잖은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으므로, 마음 같아서는 다들 주먹패를 끌어오든 하고 싶어하였다.
허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임 당수 앞에서 그런 행패를 부렸다가는 그 행패를 곱절로 되갚음당할 것이 명백하였던 고로 – 권신 윤원형도, 오만 관군도 날려버린 임 당수 아니던가 – 어쩔 수 없이 어색하게나마 장삿일의 논리를 말과 글로 엮고, 어설픈 논변으로 서로 견줄 뿐이었다.
“흠흠, 무릇 상(商)이라 함은 물산이 흔한 곳에서 값진 곳으로 옮김으로써 이문을 남기는 일이니, 이문을 늘리는 방법의 요체는 먼저 그 값이 어떻게 때와 군현에 따라 달라지는지를 면밀히 아는 것이 하나요, 남들보다 헐하게 사들이고 비싸게 파는 것이 둘째요,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길 때 드는 비용을 줄임이 셋째라 하겠소이다.”
“흥, 그것은 삼척동자에게 장사를 시켜도 쉽게 알 수 있는 바요. 이득을 남기는 이치는 무엇보다도 처음에 밑천을 크게 마련하는 데 달려 있으니, 쌀 일백 석을 사들일 때와 일천 석을 사들일 때의 값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오.”
꺽정이가 쓰던 말을 빌려와 당당하게 ‘사업당(事業堂)’이라고 당호까지 붙인 서림네 집 건너편에, ‘논상원(論商院)’이라고 이름 붙인 집 한 채를 더 마련하고 이렇게 말로 싸움을 붙이니, 고작 한 달 사이에 찾아오는 사람이 꽤 늘었다.
누가 장사치들 아니랄까봐, 어느새 논쟁하는 것을 듣는 데 자릿값까지 받아, 저들끼리 나누어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장사치들 머리 위에 서림이 있었으니, 그 자릿값 일부를 떼어서 받고, 더 나아가 반 년 동안 추산하여 가장 구경꾼 많이 끌어오는 상인을 상학 교수로 삼겠노라 공언까지 하였다.
그러니 개성 상인이든 시전 상인이든, 이미 판에 끼어들었으므로 그들 집안의 체통 지키기 위해서라도 눈물 삼키며 비법을 풀어야만 할 지경이었다.
그런 사정 들은 꺽정이는 역시 서림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마침 할 일도 없겠다, 말로만 들을 게 아니라 한 번 들어가서 구경이나 해볼 심산으로 논상원 앞에 갔더니, 의외로 줄이 길었다. 보통 그렇게 줄이 길면 새치기에 싸움박질에 온갖 다툼으로 시끌벅적하기 마련인데, 오히려 꽤 질서정연하였다.
의아하게 생각하던 꺽정이 눈에 익숙한 얼굴 여럿이 들어왔다.
“자자, 줄들 서시오!”
“포목! 들어갈 때 포목들 내고 가시오!”
얼추 보아도 한량 같은 이들이 육모방망이 들고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단속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한량들의 우두머리 되는 이들은 논상원 대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꺽정이와는 구면이었다.
“엥, 유 선달 아니오?”
“여기 이 사람도 있네, 임 당수.”
각미사 한량 출신 이정과 유극량이었다.
“아니, 이씨 어르신이야 그렇다 쳐도 유 선달은 이제 벼슬 받을 때 되지 않았소? 어디 군관으로 나가 있을 줄 알았는데.”
(‘아이고, ‘그렇다 쳐도’라니. 사람을 뭘로 보는 겐가.‘ 하며 옆에서 이정이 투덜대었다.)
“이미 사맹(司猛, 종8품) 벼슬까지 받았습니다. 원래라면 어디 북변에서 권관(權管, 종9품)쯤 하고 있어야 하는데, 임 당수 덕에 경군에 워낙 빈 자리가 많이 생겨서 말이지요.”
황해도 싸움으로 군관들이 적지 않게 상하고 죽기도 했지만, 그보다 쭉정이 군관들이 대거 들통나면서 자리가 갑자기 늘어난 것이 더 컸다.
“헌데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게요?”
“그야...”
유극량이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야 돈벌이 하려는 생각이지 뭐. 워낙 녹봉이 짜니까 어쩔 수 없지 않겠나? 여기 이 사람이 꽤 지극한 효자인데, 어머니 봉양하기 위해 어떻게든 치부할 방편을 터득하겠다고 여기 와서는, 이렇게 대문 지키고 있다가 안에서 강의 시작하면 들어가서 듣곤 한다네.”
이정이 대신 답변했다.
“그러면 이 형은?”
“나야 뭐, 부친께서 평시서 봉사(平市署 奉事)도 하셨으니 대대로 장사치들과 연이 있지 않은가? 농담이고, 소소한 용돈벌이 겸 선비들 놀리는 재미로 와 있다네.”
논상원 앞에 길게 늘어선 사람 대부분은 그저 신기한 구경거리라 여기고서 찾아온 이들로, 진지하게 장삿일을 저의 생업으로 삼아보고자 찾아오는 젊은이는 열에 하나쯤밖에 되지 않았다.
시일이 지나면 전자는 줄어들고 후자는 조금 늘어나겠지만,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러하였다.
“헌데 간혹, ‘어디 잡스러운 장사치들이 난언(亂言) 지껄이며 백성을 속이는가!’ 하면서 난동부리는 서생도 없지 않거든. 그럴 때 우리 각미사 사람들이 나서서 어리석음을 깨우쳐주고, 그 ‘잡스러운 장사치’들 뒤에 우리 임 당수 계심을 자상하게 알려주는 것일세.”
“늘 그렇지만 퍽 재밌게 사시오.”
“나야 뭐, 아들 녀석들 크는 것이나 보며 사는 한량 아닌가.”
그때 늘어선 줄 사이로 새치기하려는 사람 하나가 눈에 띄었다. 새치기를 한다면 무릇 당당하게, 마치 본디 저의 자리인 양 불쑥 들어가야 성공하기 마련인데, 어설프게 – 또는 점잖게 – 들어가도 되겠느냐며 말을 걸었다가 각미사 사람에게 걸린 것이다.
이제 보니 나이 지긋한 서생이었다.
“엥? 저분은...?”
“아는 사람이오?”
“숭덕재(이윤경) 어르신 아닌가? 잘 모르겠네. 혹여나 이 사람 알아보면 귀찮아질 수도 있으니 잠시 몸을 숨기겠네.”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지는 관군 종군 시절에 이윤경과 연이 있던 이정이, 슬쩍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꺽정이가 다가가니, 이윤경도 이쪽을 알아보았는지 영 낭패스러웠던 안색이 밝아졌다.
“아니, 임 당수 아닌가?”
“어르신은 또 무슨 일이시오?”
“그야 염탐하러 왔지. 자네들이 반상의 법도를 흐트러뜨리고 정학과 잡학을 뒤섞는다는 고변이 들려와서, 적정(敵情) 살피러 왔다네.”
“일전에 해주 뒷골목에서 뵈었을 때도 그렇지만, 참 담대하시오.”
“부족한 내가 이미 나라의 성덕에 누를 미쳤는데, 이렇게라도 도움이 되어보아야 하지 않겠나.”
이윤경이 능청스레 웃으며 말했다.
“뭐, 마침 잘 되었소. 우리네 학당 세우는 일로 요새 영 시끄러운 모양인데, 구경이나 제대로 시켜드리리다.”
“이건 군자가 힘쓸 바가 아니야.”
이지함과는 동문으로, 집이 어디 시골도 아니요 코앞인 건천동이라 이지함 부름에 바로 끌려온 허엽이 연신 궁시렁대었다.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부친의 시묘살이 마친 뒤에도 계속 고향 공주에 남아 학업에 힘쓰던 중 사형 이지함의 부름을 받고 올라온 박순이 되물었다.
“농서(農書)를 널리 살피고 그중 오늘날 취할 만한 것을 선별하라는 뜻은 참 좋은데, 그것을 어찌하여 우리가 해야 하는가, 이 말일세.”
투덜대면서도 저의 할 일은 꼬박꼬박 하는 허엽이었다.
이지함이 그간 청석골에 머물면서 모은 농서에, 이곳 한양에 올라와 수소문하여 구한 – 대개는 어디 관청 한구석에서 먼지만 쌓여가고 있는 책들이었다 – 서책까지, 두 사람 앞의 서안은 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형께서는 억울한 모함을 당하여 벼슬을 잃으셨을 뿐이니, 이제 곧 서용(敍用)되기만 기다리고 계시지 않습니까? 남는 시일을 이렇게 쓰는 것이 어찌 쓸모 없다 하겠습니까.”
“쓸모 없다는 게 아닐세. 자네... 에휴, 되었다, 되었어. 자네도 며칠만 더 지내보면 알게 될 것이야.”
화담 선생 문하의 여러 제자들이 그간 알게 모르게 고초를 겪게 된 원인이 바로 이지함이었지만, 그럼에도 그의 말에 모두가 따를 수밖에 없었으니, 『화담자의』라는 스승 말년의 걸출한 기서(奇書)를 받아내어 널리 퍼뜨린 공이 바로 이지함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윤원형을 무찌르고 조정을 바르게 되돌리는 공까지 세웠으니, 화담 선생 제자들 가운데 으뜸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물론 그 논리로 따지면 그 임거정의 공이 더 크겠지만, 선비로서 이를 인정하기는 어째 마음이 불편하였다.)
그리하여 이지함의 부름을 받고 이렇게 모여서는, 온갖 농서를 모아 쓸 만한 내용을 선별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조선국 백성들이 가장 혹할 만한 삶의 술기(術技)라면 역시 소출을 늘리는 농법이었다. 그러나 저의 집안 이름을 건 학당을 세우고자 눈이 뒤집힌 아전들이 농법을 잘 알 리 없었다.
이지함이 이를 노리고서 제안하기를, 아전들로 하여금 제법 농삿일 잔뼈 굵으면서도 능히 남을 가르칠 만큼 총명한 동네 농군들을 뽑아 데려오라 하였다. 한편으로는 그들을 가르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농서의 내용을 보완할 생각이었다.
여러 해 전 청석골에서 무식쟁이 흑의군들에게 문자와 군략의 대강을 가르쳤던 그 가락이 있었기에 그런 계획을 세울 수 있었는데, 속사정 모르는 허엽이 보기에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될 법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그의 입에서는 도와주겠노라 승낙하는 뜻이 나온 지 오래였다. 그러니 궁시렁대며 후회할 뿐.
“수산 그 사람이 벗으로는 참 좋은데, 함께 일하기에는 참 어렵단 말이지. 원래는 아니 그랬던 듯한데...”
경학의 이치를 섬세하게 따지는 데 있어서는 이지함보다 뛰어난 선비가 여럿 있겠지만, 온갖 잡학에 밝은 사람으로는 그만한 이가 드물 것이다.
더구나 지난 여러 해 동안 이이 한 사람을 대하며 살아왔던지라, 이지함은 사람의 재주에 대해 눈이 잔뜩 높아져 있었다.
그리하여 박순과 허엽이 농서를 어떻게 정리해서 이지함에게 보일 때면,
‘그 시비법에 대한 대목은 요즘 농군들이 이미 하고 있는 것이라, 큰 도움이 아니 될 것일세.’
‘수차(水車)가 물론 좋기는 하지만, 대국과 아국은 기후가 달라서 수리(水利)를 취하는 법도도 다를 수밖에 없네.’
등등, 온갖 트집을 다 잡아서 돌려보내곤 하였다.
“그나마 우리는 전해 내려오는 농서가 여럿 있어 일을 하는 기틀로 삼을 수 있지 않습니까. 지금 수산 사형께서 하시는 일은... 그야말로 전례가 없는 것인데, 참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허엽의 투덜대는 말을 엉뚱한 이지함 칭찬으로 받는 박순이었다.
허엽과 박순 두 사람에게는 농서의 일을 맡겨두고, 이지함 본인은 경강(京江) 뱃사람들을 불러다 이른바 ‘주즙지학(舟楫之學, 배와 항해의 학문)’의 기틀을 마련하고 있었다.
땀과 소금 냄새 찌든 꾀죄죄한 자들이, 그들이 겪은 강과 바다의 이야기를 풀어내면 쌀과 베를 준다는 말을 듣고 찾아와 번듯한 대갓집을 들락거리니, 스승 서경덕으로부터 사람의 귀천을 가리지 말라는 가르침을 일찍이 받지 않았더라면 박순과 허엽 모두 진작에 진절머리를 내고도 남았을 것이었다.
“그래, 대단하기는 대단하지. 허나 누가 알아주기는 하겠는가? 수산의 재주가 아까워서 하는 이야기야. 화숙(和叔, 박순의 字) 자네도 곧 알게 되겠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사풍(士風)이 쇠잔하여 우리 스승님처럼 스스로 학문 이루신 분은 높게 보지 않고, 오로지 남의 학문을 배워 그대로 따르는 것만을 숭상한다 이 말일세.
우리가 이렇게 민생에 도움 되는 학문을 정비하는 것도 물론 좋기는 하지만, 오히려 소위 사류(士類)의 사람들은 우리가 잡학이나 붙잡고 있는다고 흉이라도 보면 다행이요, 아예 우리가 무얼 하든 관심을 끊을 공산이 크네.
예컨대 저 동고 대감이나 그 가형 되는 숭덕재 같은 분이 이러한 농서나 뱃사람들 일에 마음을 쏟을 리 있겠는가?”
그 말을 하기 무섭게 바깥에서 헛기침 소리가 흠흠 나기에, 박순이 문을 열어보니 숭덕재 본인이 찾아와 있었다.
“어이쿠, 우리 사형분들, 고생이 많소이다. 여기 이분께서 사형들 하시는 일이 궁금하다 하시어 찾아왔소.”
함께 고개 불쑥 들이미는 것은, 아마도 스승 서경덕의 각양각색 제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튀는 사람일 임거정이었다.
“자, 마음껏 물어보시오. 우리가 이 일을 한두번 하고 끝낼 것도 아니요, 한두 달 이어가다가 없던 일로 돌릴 것도 아니니, 지금 미리 우리네 꾀하는 바의 대강을 알아두어야 나중에 대책이라도 마련할 것 아니오?”
임거정이 아마 이윤경일 초로의 선비를 향하여 말했다.
지금껏 박순 앞에서 열심히 불평 늘어놓은 것이 무색하게, 허엽은 저들이 지금껏 해온 일을 자랑스레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내 가서 살펴보니, 임 당수는 학당을 짓겠다는 뜻을 물리기는커녕 전례없이 성대하게 벌일 마음인 듯하였네.”
그날 저녁, 아우 이준경의 집으로 돌아온 이윤경이 말했다.
이준경의 서안 위에는, 각지 군현의 사족들이 보내온 서간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형님께 당당히 드러내었으니, 이 또한 뜻하는 바가 있어서겠지요.”
“이처럼 짜임새 있게, 또 여러 갈래로 나누어 동시에 일을 벌이고 있으니, 섣불리 막으려 하지 말라. 막으려 한들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호언(豪言)하려는 뜻 아니겠는가, 아우님.”
형으로부터 그날 임거정이 이윤경 대동하고서 그 논상원은 물론이요 이지함의 집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학문의 풍경까지 구경시켜주었다는 이야기를 모두 들은 이준경은, 이윤경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하하. 쉽지 않습니다. 쉽지 않아요.”
이준경이 고소(苦笑)를 흘렸다.
분명 임거정에게 경고할 때만 하더라도 견고하게 느껴졌던 조선국의 기틀이, 사실 의외로 빈틈이 많고 허술하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이미 의민당을 해산하여 황해도 한 도에 직접 명을 내릴 수도 없게 되었으니, 군현에 잡학을 가르치는 학당을 아무리 만들려 한들 그 한계가 명백하리라 생각하였다.
“따지고 보면 임 당수 그자에게 당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이 아우가 마음을 단단히 하지 못하였습니다.”
불과 한 달 사이에, 벌써 기호 일대의 고을이 들썩이고 있었다.
향리들은 저들 이름 내세워 학당을 세우겠다며 날뛰고 있었고, 그곳에서 삶에 이득 되는 바를 가르친다는 말이 나돌면서 여항(閭巷)의 민심 또한 크게 놀라고 있었다.
이에 놀란 유생들은, 벌써부터 무언가 조처하는 바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이준경 그에게 글을 보내오고 있었다.
물정 모르는 누군가는 저 해주 고을에 서원 생긴 것처럼 사족들끼리 뭉쳐 배우고 가르치는 곳을 만들면 그로부터 풍교(風敎)가 새로워질 것이라고도 하였다.
또 더 물정 어두운 누군가는 당장 조정에서 나서서 이를 막아야 한다고 하였다. (정작 그러면서 손수 장정들을 데리고 향리를 구타하거나 하였다는 말이 없는 것을 보면, 임 당수 무서움은 향촌의 사족들조차 아는 모양이었다.)
만약 그들이 지금 임거정과 그의 무리가 노리는 바의 전모를 듣게 된다면, 이준경 앞으로 날아오는 서안은 지금보다 몇 곱절은 많게 되리라.
“저들 민주당이 바라는 대로 학당의 제도가 완비된다면, 이 나라는 크게 달라지겠지요.”
“아마 세간의 많은 선비들은 그것을 ‘어지러워진다’라 일컫겠지.”
농군의 자식들은 그들끼리 모여, 아침에는 『소학』을 배우고 낮에는 농경의 법도를 배운다.
바닷가 고을에서는 뱃사람들이 학당에서 경전을 배우고, 이어서 배를 몰고 먼 바다로 나가는 법을 배운다.
아비의 업을 물려받기를 원하지 않는 젊은이들은 읍내로 나가, 상인이 되는 법을 배우고 장인이 되는 법을 배운다.
선비는 그저, 조금 더 글을 배운 자, 마치 농사와 뱃일, 장삿일과 공장(工匠)의 일처럼 치인(治人)과 예악을 재주로 지닌 자가 될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러한 세상이 과연 올 수 있을까, 그런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였다. 배움을 좋아하는 이라면 누군들 그러지 않겠는가.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세상이 되려다 끝내 스스로 빚어낸 혼란 속에서 주저앉고 말았을 때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선비란, 세상을 누구보다 먼저 걱정하는 사람이므로.
백성들이 농사일이 고되다 하여 모두가 상인이나 장인이 되려 한다면, 그때는 어찌할 것인가?
본업(本業, 농업)에 힘쓰는 이는 드문데 기근과 재변이 닥치어 곳간이 비어버린다면, 누가 가운데에 서서 능히 구휼할 수 있을 것인가?
사람 하나하나의 욕심에 불이 붙어, 모두가 그들의 자리를 벗어나 위로 올라가려 다투게 된다면, 어디에서 예(禮)를 구하여 이를 다스릴 수 있을 것인가?
적어도, 올바른 학문, 성현의 도는 여기에 대해 하나의 답을 제시해주고 있었다.
“그래서, 어찌할 심산인가, 아우님?”
“퇴계 그이가 학당의 일에 대해 듣고 걱정하면서, 우리가 이를 막으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방안으로써 다스려야 한다 고언(苦言)하더군요.”
“새로운 방안이라...”
“향약(鄕約)으로써 기강을 바로잡고 인심을 맑게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지 사족 몇몇이 이를 듣고 따르게끔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우리 또한 촌리(村里)마다 학당을 열고 그 가산을 모아, 가르치고 서로 돕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백성이 스스로 바른 풍속으로 돌아오고, 비로소 인기(人紀, 사람 사이의 기율)가 올바르게 되면, 그때는 지금 임 당수가 세우려 하는 학당도 오히려 교화에 이롭게 될 것입니다.
적어도, 퇴계가 이른 바는 그러하였는데, 이 아우 또한 그 말을 옳게 여깁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향약이 아무리 훌륭하다 하나, 고작 하나의 제도일 뿐이니,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일일신 우일신(日日新又日新)을 마음에 새기면서 앞으로 나아가야겠지요.”
아직 그들이 배우고 익혔던 선비의 도리, 올바른 학문은 이 나라에 제대로 펼쳐지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임 당수와 그의 무도한 무리가 나라를 뒤흔드는 것을 가만 바라볼 수는 없고, 이번에 명백히 드러난 것처럼 그저 막기만 할 수도 없었다.
한 발 앞서나가며 그들이 백성의 마음을 더 뒤흔들지 못하도록 먼저 그 마음을 얻고, 허술한 제도의 빈틈을 노리지 못하도록 먼저 경장(更張)의 기치를 내걸어야 한다.
깊은 고심 속으로 빠져드는 아우에게, 이윤경이 한 마디 덧붙였다.
“아, 임 당수가 이르기를, 그래도 이와 같이 도성이 시끄럽게 되어 우리 양측에 모두 좋은 점이 하나 있다 하였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서원군, 윤원형. 그자의 마지막이 참으로 비참하게 되지 않았느냐, 그리 말하더군.”
“하하, 그것은 맞는 말입니다.”
학당을 널리 세우는 이야기로 전국이 시끄러워지면서, 그 누구도 한때 조선을 쥐락펴락했던 그 윤원형이 어찌 될지를 말하지 않고 있었다.
도성 한가운데, 한때 휘황찬란하였던 집에 갇혀 잊혀가는 것. 세상 사람들로부터 수없이 손가락질당하는 것보다 어쩌면 더욱 무섭고 치욕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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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서두에 언급되는 십학이란, 조선 초기에 존재하였던 일종의 관리교육 체제입니다. 즉 성균관에서 교육하는 유학(儒學) 외에도 무학, 이학(吏學, 중국과의 외교 실무에 대한 학문), 역학(譯學, 외국어 어학) 등 여러 전문적인 분야를 나누어, 각 영역의 업무를 담당하는 관료들이 지속적으로 학습하도록 만들어진 제도입니다.
그러나 유학이 다른 잡학들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는 것에 대해 지속적으로 불만이 제기되었고, 결국 세종 연간을 거치면서 십학 체제는 간략화되고 대부분의 잡학은 중인 계층이 지속적으로 전담하는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가 굳어지게 됩니다.
이전 화에서 몇 번 언급되었던 허엽과 박순은 서경덕의 제자들 중 실제로 중앙정계에서 활동한 이들로, 비록 허엽이 동인, 박순이 서인으로 당색을 달리하면서 그 학통이 이어지지는 못하였으나 선조 연간 정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특히 박순은 이준경 사후 선조 연간 초 정승 자리를 역임하면서, 이이와 함께 각종 개혁책을 추진한 바 있습니다.
다만 두 사람은 모두 그 학통으로 인하여 발목을 잡힌 면도 있었습니다. 박순의 경우 각종 개혁책을 지속적으로 주장하였으나 실제로 이루어진 것이 적어, ‘14년 동안 정승으로 있으면서 이룬 일이 없다’라는 당대의 혹평을 받기도 했으며, 허엽은 이이가 서경덕의 학문에 도가적 요소가 있다고 비판한 일을 두고 격렬하게 반대하여 끝내 동인 중에서도 강경한 입장을 견지하며 많은 적을 만들게 되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