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64화 (64/259)

21. 발 없는 천리마 (3)

기묘년에 화를 당한 명현들을 신원하는 일과 승과를 복원하는 일.

조선의 선비라면 마땅히 전자는 칭송하고 후자는 매도해야 할 텐데, 두 가지 일이 한 사람 입에서 나오고, 그 사람이 운영하는 공보라는 기이한 종잇조각을 통해 전국에 전해지니, 좋든 싫든 민주당 임 당수의 이름은 가장 궁벽한 산골의 서생들 사이에서도 회자될 수밖에 없었다.

“욕 먹을 짓만 하긴 싫고, 그렇다고 선비들만 좋아할 일은 하기 싫어서, 두 가지를 모두 꺼냈소. 어차피 나는 사람들 눈길만 끌면 그만이거든.”

봉은사에 찾아와서 당당하게, 승과 복원하는 일을 중추부에서 거론하였다고 밝히는 꺽정이 앞에서 보우는 한숨을 푹 쉴 수밖에 없었다.

“뒷수습할 사람은 어찌하란 말씀이시오이까...”

“중들도 과거 보게 해달라고 외치고 다녔던 건 임자 아니오? 목마른 사람한테 우물 파라고 곡괭이랑 삽까지 쥐어주었는데 원망을 한다니, 그렇게 심술 부리고 다니면 부처님께서 퍽 좋게 보시겠소.”

꺽정이 화법은 자신이 일 저질러놓고 뻔뻔하게 ‘그래서 네가 어쩔 테냐’ 들이대는 것이라, 아무리 학문 깊은 선비나 수양 깊은 고승이라도 대처하기가 마땅치 않았다.

“관세음보살...”

결국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마음의 평정을 되찾고자 애쓰는 보우였다.

“너무 어렵게만 생각하지 마시오. 비록 전국의 모든 선비들이 이 승과의 일을 들어 알게 되었다 하나, 임 당수가 기묘명현의 신원과 승과 시행을 엮었으므로 조정의 대신들은 함부로 반대하지 못할 것이오.”

더 이상 대비를 만나지는 못하지만, 이미 그 여인의 머릿속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훤히 꿰고 있던 병해가 옆에서 거들었다.

보우 역시 궁궐 돌아가는 사정은 얼추 알고 있는지라, 병해의 말이 옳음을 능히 알 수 있었다.

이미 적잖이 떨어진 종실의 위엄이다. 윤원형의 죽음으로 한 번 더 거기에 금이 갔는데, 이제 선대왕의 성덕(聖德)에 직접 맞닿는 기묘년의 일을 건드리게 되면 금 간 곳을 숫제 망치로 두드리는 격이 될 터.

외숙 윤원형을 잃은 주상의 주변에는 이제 대비전과 외척 심씨 집안만이 남았을 뿐이었는데, 특히 가뜩이나 궁지에 몰린 대비전은 자칫 무언가 일을 벌일 수도 있었다. 사화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조정 중신들로서는, 꺽정이의 우악스러운 제안을 께름칙하게 여기면서도 또 선뜻 거절할 수는 없는 셈이었다.

“허나 엄연히 선비라 자칭하는 이들로서, 불문(佛門)을 흥성케 할 사안에 스스로 찬동하는 형국을 만들 수는 없는 것이오.”

“하여 소승이 나서야 한다, 그런 말씀이시오? 하지만 어찌...?”

“이미 아시겠지만, 이 보잘것없는 중은 본디 근본이 없이 떠돌다가 우연히 산문(山門)에 들었을 뿐으로, 전국 명찰(名刹)에 연이 있는 그대에게는 비할 수 없소이다. 그러니 이 나라의 수많은 비구를 위하여 가장 앞에 나서는 것은 마땅히 그대가 되어야 하지 않겠소?”

“만약 선비들이 중놈과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없다고 무어라 떠든다면, 내 그 입을 틀어막든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 일시 앉은뱅이로 만들든 할 테니 걱정 마시오.”

더욱 걱정되게 만드는 말을 맞장구친답시고 덧붙이는 꺽정이었다.

허나 이미 보우는 이 말법 세상에서 어떻게든 불교를 일으켜보겠노라 작정하고서 산을 나온 몸. 그 서원(誓願)이 이루어지려는 지금, 후환이 꺼려진다 하여 물러날 수는 없었다.

결국 결연한 표정 지으며 보우가 말했다.

“좋소. 내 임 당수의 말을 따르도록 하겠소이다.”

“잘 생각하셨소. 그러면 한 사흘쯤 뒤에 찾아오시라 하면 되겠소?”

“찾아오신다니, 그 무슨 말씀이시오?”

“조정 중신들 말이오. 나라의 법에 중은 도성을 함부로 못 드나든다 하는데, 이런 공사(公事)에서 국법을 어길 수는 없지 않겠소? 그러니까 저쪽의 높으신 선비들이 중을 만나러 오셔야지.”

함부로 임꺽정의 말을 따르겠노라 동의하는 것이 얼마나 위태로운 일인지 새삼스레 깨닫게 되는 보우였다.

보우와 봉은사 승려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유생이 함부로 절에 들지 못하게 하는 금법 또한 있었기 때문에 봉은사에 이준경과 사림의 중신들이 찾아오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대신 가까운 양재역에서 만나기로 하였는데, 갑자기 조정의 중신들이 일군(一群)의 중과 함께 자신이 관할하는 역참에 찾아오는 일을 겪게 된 양재찰방만 불쌍하게 되었다.

그나마 눈치가 있는 봉은사 중들이 먼저 찾아와, 구실아치들과 함께 동헌 일대를 소제하였으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렇게 잔뜩 긴장한 채 이준경 이하 중신들을 맞이하였다. 겉으로 내세우기로는, 결코 중들을 국정에 관여케 하는 것이 아니요, 다만 몇 가지 의심되는 바를 묻기 위하여 마련한 자리였으므로, 그 누구도 관복을 입지 않고 평복한 채로 찾아왔다.

“소승에게 이러한 자리를 마련해주심에 한량없이 감사드릴 뿐입니다.”

“그대는 비록 중이라 하나, 소싯적부터 도를 깊게 닦아 정학(正學)에도 밝다 들었소. 양종을 복설하고 승과를 시행하는 일은 잘못하면 나라의 큰 폐단이 될 수 있으나, 올바르게 시행하면 오히려 구폐(舊弊)를 청산하는 방도가 될 수도 있으니, 그대는 이를 부디 잘 헤아리기 바라오.”

이준경이 점잖게 답사하였다.

이준경으로서는 옆에 앉아서 하늘의 구름 구경하고 있는 임 별장과 그의 당여(黨與) 병해 – 각미사 추앙하는 도성 유생들 사이에서 여전히 그 명성이 높았다 – 체통을 생각하여 마음에 없는 말을 예의상 꺼낸 것이었다.

그러나 선비, 그것도 조정의 중신 입에서 양종 복설이 나라에 도움 될 수도 있다는 언급이 나왔으므로, 보우는 물론이요 그를 따라와 밖을 지키고 있던 봉은사 중들 모두 울컥하였다.

보우가 당초 생각하였던 대로 대비전의 위엄에만 기대었더라면 어찌 이런 날이 올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런 감상은 우선 제쳐두고, 보우는 곧 저의 준비해온 바를 미리 그려온 그림까지 곁들여가며 열과 성을 다해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 하여, 새롭게 세우는 승과의 제도 아래에서 모든 승려는 선·교를 막론하고 학승(學僧)이 될 것입니다. 또한 불경뿐 아니라 정학의 경전 또한 시험하여, 과(科)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혹여 중놈이 방자한 잡설을 늘어놓는다고 호통이 돌아오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는데, 의외로 진지한 경청만이 돌아오니 보우의 목소리도 조금씩 당당해지게 되었다.

“... 이로써 도첩의 제도를 다시 둔다면, 능히 승도(僧徒)의 가운데에서 그저 피역(避役, 부역을 피함)을 위해 머리를 깎은 도적과 무뢰배를 솎아내어 환속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참된 승려를 가려낼 수 있게 된다면, 어찌 이들에게 이전과 같은 금법을 모두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승려도 나라의 한 백성이니, 아무리 속세의 연을 끊는다 한들 어찌 보국(報國)하는 의리마저 끊겠습니까. 다만 승려가 나라의 백성으로 그 역을 다한다면 마땅히 백성을 보호하는 도리 또한 지켜져야 할 것입니다.”

도첩을 받은 승려는 도성에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게끔 해 달라. 지방 군현의 관아에 특산물을 납부할 터이니 대신 관이나 사족들이 마음대로 침탈하고 행패를 부리는 폐단을 국법으로써 엄금해 달라.

당당해지는 목소리와 더불어 보우는 하나씩 요구하는 바를 꺼내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보우가 두어 각 동안 열변을 토한 뒤, 모임을 잠시 쉬게 되었다.

이준경은 다른 중신들을 데리고 그들끼리 세세한 절목을 두고 이것저것 논의하고 있었는데, 그저 어느 한쪽이 행패 못 부리도록 할 생각으로 따라온 꺽정이에게는 별 재미가 없는 일이었다.

병해 역시 보우와 무언가 깊게 이야기 나누고 있어, 꺽정이 홀로 붕 뜨게 되었는데, 그때 귀에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선비님네들께서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계시오?”

지난번 의송 이후로 단짝처럼 붙어다니게 된 조식과 이황이었다.

“아, 임 당수 아니시오?”

“거 우리 사이에 뭐 공대까지 하고 그러시오? 그냥 옛날처럼 편하게 대하시지.”

이황이 저보다 한참 품계 높아진 꺽정이에게 공대하니, 갑자기 불편해진 꺽정이가 머리 긁적였다.

“자네가 원한다면야.”

“어찌 그리하겠소?”

이황과 조식이 동시에 반대되는 대꾸를 하였다. 그 모양새가 퍽 우스웠다.

“서로 마음 안 맞는 것은 여전들 하시구려. 어째 두 분이 아직도 같이 붙어 다니시는지 모르겠소.”

“그야, 나라도 이렇게 옆을 지키면서 단속하여야 이 사람이 공허한 천리(天理)의 담론으로 허명(虛名) 얻는 것을 막지 않겠는가? 하하.”

“천 리를 두고 떨어져 서한으로만 교유하여도 서로 배우고 깨우치는 바가 많을 터인데 이처럼 가까이 있으니 식견이 절로 넓어지는 듯하여 함께할 따름이지요. 더불어 학문을 논하니, 병통을 서로 고칠 수 있지 않습니까.”

그사이에 조식은 이황의 흉을 보고, 이황은 그런 병통이 조식에게도 있다며 비꼬았다.

“그보다 내가 물었던 것이나 답들 하시오. 여긴 무슨 일로 오셨소?”

의민당 의송 이후로 조식은 하는 일 없이 이원수네 집에 머물고 있었고 – 워낙 그를 만나보려는 서생들이 많아 실제로는 꽤 바쁘게 살고 있었다 – 이황은 복직한 스승 이언적의 추천으로 경직(京職)을 받을 공산이 컸기에 그것을 기다리며 한양에 머물고 있었다.

“중과 선비가 만나서 불교를 어떻게 규제할지 그 제도를 논의하니, 참으로 근래 드문 기사(奇事) 아닌가? 구경하러 올 수도 있는 것이지.”

“실은 이 사람의 스승 되시는 회재 선생께서 청하시어 이리 찾아왔소. 나라 안의 사기(士氣)가 이미 크게 놀라 들떴으므로, 만에 하나 잘못된 소문이 퍼지는 일이 없도록 대비할 따름이외다.”

팔도에 이들 두 사람과 서한 주고받는 선비가 적지 않고, 그들과 서한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기를 바라마지않는 서생은 그보다도 훨씬 많았다.

그 공보라는 해괴한 종잇조각이 나라의 여론을 뒤흔드는 것을 경계한 이언적과 이준경은, 그러므로 이들 두 사람에게 청하여 양종의 복설과 승과 설치에 대한 여론이 자칫 엉뚱한 곳으로 튀지 않도록 잘 얘기해달라 한 것이다.

“잘못된 소문이라면, 저런 것 말씀하시는 게요?”

꺽정이가 마당 한구석에 앉아있는 서리 두엇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나는 혹여 주변에 재미있는 일 없나 연신 두리번거리고 있고, 다른 하나는 잠시 모임 쉬는 사이를 틈타 열심히 벼루에 먹을 갈고 있었다.

“아니, 웬 잡인이 이런 곳에? 역졸은 아닌 듯한데.”

“잡인이라니, 듣는 잡인 기분 나쁘겠소. 우리 공보에 글 싣는 서리들이오.”

서림에게 미리 말해, 이쪽으로 사람 두엇 보내라 해둔 꺽정이었다.

물론 그 공보가 요새 얼마나 팔리는지를 생각해보면, 서림이 성정에 설령 꺽정이가 미리 지시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저의 장삿속 차리기 위해 어떻게든 사람 보내었을 테다.

“양재찰방은 무얼 하고 있나 모르겠군. 역졸은 두어서 어디 쓰나?”

“저쪽은 우림위 별장 이름을 대고서 들어오는데, 찰방 하나가 어떻게 함부로 막겠소.”

마치 그 별장이 자신이 아닌 것처럼 태연하게 말하는 꺽정이었다.

조식과 이황은 그저 탄식할 뿐.

“저들도 분명 본업이 따로 있지 않겠는가? 그것은 제쳐두고 이러한 일에 매달린다니, 참으로 나라의 기강이 어지럽게 되었네.”

“글쎄, 저 서리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을 것이오. 정 억울하다면 우리네 사업에 함께할 마음이 안 나도록 늠료(廩料, 봉급)를 후하게 주었어야지.”

“아무리 그래도, 나라의 은혜로 부족하지 않게 살고 있을 터인데...”

“공보 쪽 벌이가 더 좋으니 어쩔 수 있겠소?”

“그것이 그렇게 이득이 많이 나는가?”

“어휴, 말도 마시오. 한양 안의 종이가 동이 날 지경이라 하오. 얼마 전에 송도 상인들이 평강 고을의 설화지(雪花紙)를 모두 털어서 납품한 덕에 겨우 소모되는 바를 충당하고 있다오. 아마 이번에 내는 공보에서 오늘 중과 선비가 회동한 소식을 싣게 되면 더욱 종이 소모가 늘어나겠지.”

꺽정이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조식에게 대뜸 물었다.

“그러고 보니, 어르신. 어르신 댁이 저기 남쪽 삼가 고을 아니오? 혹시 그쪽에 지장(紙匠) 많이 있으면 고향에 연통 넣어서 몇 명 소개해 주시오. 심심하지 않게 값을 쳐드리겠소.”

“이 사람아. 나는 그런 일에 관심 없네. 내가 부귀를 노렸더라면 이렇게 살아왔겠는가?”

그런데 그때, 가만 듣고 있던 이황이 끼어들었다.

“흠... 임 당수. 만약 이 사람이 재물을 모아서, 그대의 공보와 같지만 조금 다른 글을 찍어내 판다면 어떻게 되겠소?”

“나야 별 상관 없지. 허나 서 별감은 싫어라 할 것이오.”

“이보게, 퇴계.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이황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조식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보통 엉뚱한 말을 먼저 꺼내는 쪽은 조식이었는데 그것이 뒤바뀐 셈이었다.

“이 사람의 스승 되시는 회재 선생께서는 임 당수와 민주당이 자칫 나라의 여론을 호도할까 걱정하고 계시오. 그러나 지금 임 당수가 말한 것처럼, 저 공보를 국법으로 막을 수도, 또 관의 권세로 억누를 수도 없게 되었지 않소.

그렇다면 차라리 우리 선비들이 나서서, 올바른 글과 참된 소식을 널리 펴내어 알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소이까.”

이황이 담담하게 대꾸하니, 꺽정이가 피식 웃으며 놀렸다.

“솔직히 말씀하시오. 이득이 많이 남는다고 하니까 회가 동하신 것 아니오?”

“그 또한 그렇소.”

그러나 이황은 담백하게 수긍하며 빙그레 웃을 뿐. 아무리 꺽정이 성질머리가 우악스럽다지만 어찌 웃는 낯에 침을 뱉을까.

“올바른 일로써 부(富)를 얻으니 부동심(不動心)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도를 밝게 하고 덕을 바로 서게 하는 일로 빈천함을 물리치니, 하등 부끄러울 바가 없을 터.”

“흥, 그래보아야 임 당수 말한 대로 이재(理財) 탐하는 것 아닌가? 퇴계 이 사람, 이럴 줄은 내 몰랐네.”

“왜 그러시오? 정 어르신의 벗 하는 일이 맘에 안 든다면, 어르신도 공보 같은 것 하나 차리시면 되지, 까짓거.”

서림이 듣는다면, 경쟁하는 상대를 하나도 아니요 둘이나 늘릴 셈이냐며 펄쩍펄쩍 뛸 말이었다.

“되었네. 내 성정에 어디 그 서 별감이 할 만한 짓을 하겠는가. 차라리 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뜯어먹고 말지.”

“에이, 그러는 어르신도 삼가 고을 내려가면 농장에 노비 수십 구씩 부리면서 먹고 살고 있을 것 아니오? 혼자 고고한 척할 것까지 있겠소?”

“허... 그것은...”

지금껏 조식이 생각해보지 못한 해괴한 논리라, 조식의 입을 틀어막는 데는 효험이 있었다.

조식의 편을 들어 이황을 어떻게든 막아야 할 판에, 오히려 이황의 편을 들어 조식의 흉을 보는 꺽정이었다. 서림이 팔자가 대개 이렇게 박복하였다.

“숙헌이 스승을 잃게 되었구나.”

파주에서 돌아온 이지함이 그간 도성에서 벌어진 일을 듣자마자 내린 단평이었다.

“숙헌은 누구고 그 스승은 또 누구요?”

“제가 숙헌입니다.”

이지함 옆에서 제법 그럴듯하게 의관 갖춘 채 고개 쑥 내민 이이가 꺽정이에게 대꾸하였다.

“이야, 밤골 꼬마 도령이 이제 그럴듯하게 되었구나.”

한때의 맹랑한 꼬맹이가 이렇게 헛상투까지 틀고 어른 시늉하는 것이 신기하였다.

굳이 몸뚱아리의 연배로 따진다면야 둘 사이에 사실 그리 큰 차이도 없겠지만.

“헌데 스승을 잃는다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시오?”

“실은 퇴계 선생께 숙헌을 제자로 들여달라 청하려 하였다. 물론 그분께서 숙헌을 문하로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나라와 백성 사이의 의리를 논하는 자리에서 제자 이이가 조식·이황 두 사람과 이야기 나누는 것을 들으면서 이지함은 결심을 내렸다.

이이의 재주는 이지함 홀로 품기에는 너무나 원대하였고, 또 스승 없이 홀로 두기에는 아직 깎여야 할 모서리가 너무나 매서웠다.

그리고 이황이라면 이이의 모난 성정을 감당할 만큼 온화하면서도, 하늘을 보면 성리의 논변을 내놓고 땅을 보면 치국의 도리를 말할 수 있는 스승이 될 법하다 여겼다.

“허나 제게 스승은 한 분으로 족합니다. 다른 스승을 구하여 굳이 나아가 배우는 것보다, 이렇게 기탄없이 재미있는 이야기 나누면서 함께 고민하여 학설로 가다듬는 것이 훨씬 재미있고 또 유익한 걸요.”

“고맙구나.”

어차피 스승을 두어도 딱히 배울 바는 없으므로, 저와 온갖 세상 일에 대해 폭넓게 논의하고 궁리할 수 있는 사람이면 족하다는 말이었는데, 이미 제자의 괴팍한 성정을 잘 아는 이지함 – 대체 어디서부터 꼬였는지는 몰라도 어째 그의 주변에는 이런 사람들 뿐이었다 – 은 그 말의 뒤에 있는 칭찬의 뜻을 용케 알아들었다.

“어쨌든, 이미 끝난 일이다. 듣기로 벌써 퇴계 선생께서는 스스로 내려는 글의 제목까지 미리 정해두었다 하더라.”

이름하여 『정론보(正論報)』. 이름 높은 퇴계가 벼슬을 마다하고 오직 이것을 업으로 삼겠노라 공언하였다는 소식이 도성은 물론이요 경기 일원에 벌써 파다하였다.

이언적은 이를 안타깝게 여기면서도, 민주당이 나라의 여론을 쥐락펴락하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는 시세의 어쩔 수 없는 흐름을 알았기에 제자 이황의 뜻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상스러운 무리가 『공보』 운운하면서, 조보(朝報)의 내용을 뒤틀어 장사에 쓰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던 사족들에게는 쌍수 들어 환영할 일이었다.

『공보』의 문전달(門前達, 배달) 값을 이미 낸 이들 중에서도, 체통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론보』 값까지 새로 낼 선비들이 적지 않을 터.

“그러니 적어도 앞으로 수년은 이 일로 바빠 제자를 들일 여유도 없을 것이다. 내 안부 여쭙고자 찾아가 뵈었더니, 벌써 온갖 이재(理財)의 계책을 세우고 계시더라.”

전라도 장성에 낙향해 있는 김인후에게 글을 보내, 종이 만드는 장인들을 모아 저의 『정론보』에 쓰일 종이를 납품받을 궁리를 하고, 또 아내를 통해 얻게 된 영천·의령 등지의 토지를 닥나무 밭과 바꿀 계획도 하고 있었다.

‘무슨 누추함이 있겠느냐 (何陋之有)’는 듯, 그것을 소탈하게 말하면서 박식한 이지함의 생각을 묻던 이황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였다.

“그 점잖은 샌님께서 재물 욕심 있는 줄은 알았지만, 그렇게 장삿속 밝을 줄은 몰랐소.”

“어차피 우리네 생각대로 나라 안에 양천의 구분을 없애려 한다면, 장차 가산을 늘리려는 선비들 역시 다른 길을 구하여야 할 것이다.

어쩌면 퇴계 선생은 그것을 차마 밖으로 말하지 못할 뿐, 조용히 알아차리고서 먼저 움직여 길을 내려 하시는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내가 보기에는 그냥 우리네 돈벌이가 부러워서 따라온 것 같은데. 뭐, 선비 마음속은 같은 선비가 더 잘 알지 않겠소.”

“그리고 퇴계 선생이 이렇게 나서셨으니, 우리네 『공보』에도 이롭게 되었다.”

“그렇소? 서림이는 소식 듣고서 숫제 누구 한 대 때릴 기세를 취하던데.”

아마 그 불운한 소식을 전한 사람이 꺽정이 본인이 아니었더라면 정말로 한 대 때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허나 민주당 안에서 일신의 무력으로 따지면 이원수는 물론이요 어쩌면 사임당 신씨보다도 아래일지도 모르는 – 황진이의 잘못이 컸다 – 서림이었으므로, 그저 속으로 분함을 삼킬 뿐.

“생각해 보아라. 결국 조보에 실려야 할 것을 끌어와, 거기에 사설 붙인 다음 간행하여 파는 장사 아니더냐? 꺽정이 네가 별장 벼슬 내려놓고 흑의군도 궁 밖으로 쫓겨나게 된다 한들, 어찌 저 『정론보』는 내버려두고 우리 『공보』만 금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 국법으로 갑자기 우리 장사를 접게 할 수는 없게 된 셈이지.”

“서림이 만나면 꼭 그 말씀 해주시오.”

“아, 그리고 문안 가던 길에 그 댁에서 남명 선생도 만났다. 꺽정이 너를 보면 꼭,

‘이게 다 너 때문이다.’

라고 전하라 말씀하시더라.”

“그건 또 무슨 소리요?”

“나도 모른다.”

조식이 꺽정이의 그 말을 듣고서 한참 번민하던 끝에, 결국 한양에 남아 이황의 그 잡스러운 장삿일에 함께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정론보』 일로 자신과 집안 사람들의 입에 풀칠을 할 수 있음이 입증된다면,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전답과 거기에 딸린 노비들까지 청산할 각오를 품고 있었는데, 꺽정이와 이지함 모두 아직은 모르는 사정이었다.

하필 이황과 조식 두 사람이 글을 쓰고, 거기에 종이 대는 일로 관여하게 된 김인후까지 종종 글을 보내오게 되면서, 결국 『정론보』는 시사보다는 성리학의 깊은 이치와 논변을 더 자주 다루게 되어 『공보』와 그 내용이 겹치는 일이 드물게 되었는데, 이 또한 몇 년이 더 지난 뒤에야 드러난 흐름이었다.

“그보다 그간 내가 벌인 일에 대해 총평이나 해주시오. 파주 내려가기 전에 병해 사형까지 데려다 놓고 함께 머리 맞대었지 않소? 우리가 그때 꾀하였던 대로 모두 이루어진 것 같소?”

“적어도 도성이나 경기 일원의 여론을 살폈을 때는 그런 것 같더라. 식자 자처하는 이들이 너를 욕하기도 하고 또 찬탄하기도 하는데, 대개는 둘 다였다.”

“잘 되었구려.”

정암(靜庵, 조광조)의 이름을 깨끗하게 하는 것과 중들이 다시 도첩을 받고 떳떳하게 횡행할 수 있게 하는 것.

둘 중 어느 하나를 버릴 수 없다면, 보다 큰 올바름을 위하여 후자에 대해 잠시 눈을 감아도 되는가? 아니면 어떻게든 전자만을 남기도록 온 힘을 다 기울여야 하는가?

나라의 정사를 두고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가지고 족히 몇날며칠 동안 논쟁 벌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간혹, 자신이 저 민주당에 합세하여 당론(黨論)을 올바르게 끌어가는데 한몫 거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욕심을 내는 자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몇몇 사람들에게는 기묘명현의 신원이 승과 ‘따위’에 비할 바 못 될 정도로 중한 일이더라.”

이지함이 자못 우물쭈물하며 말을 덧붙였다.

꺽정이가 의아하여 사형의 안색을 살피니, 어째 그 옆의 밤골 도령도 비슷하게 난처한 기색 가득하였다.

“그 무슨 말씀이시오?”

이지함 대신 이이가 답했다.

“제 외조부 되시는 신 공(신명화申命和)께서는, 기묘년에 정암 선생을 비롯하여 선비들이 수없이 화를 당하자 과거를 포기하시고 낙향하셨습니다.

강릉에 머무시면서 학문에 힘쓰시고, 어머니께도 많은 가르침을 주셨는데, 그래서 어머니께서 규중(閨中)의 몸으로 그토록 학문과 서화에 밝게 되신 것이지요.”

“그래서?”

“그랬는데, 임 당수께서 기묘명현 신원을 발의하셨노라, 그렇게 떡하니 『공보』를 통해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습니까.”

“신씨 부인께서 한 번 마음을 정하면 어떻게 되는지 꺽정이 너도 잘 알지 않느냐? 어떻게든 너를 사위로 들이실 작정을 단단히 하셨더라.”

“엑.”

천하에 무서울 것 없을 줄 알았던 꺽정이의 눈앞이 조금은 깜깜해졌다.

“그... 원래 양반들은 혼례 치를 때 이것저것 가려서 하지 않더냐? 뭐 사주단자고 뭣이고 주고받고...”

“그렇기는 한데, 누이동생도 임 당수에 대해 마음이 있던 모양입니다. 임 당수가 봉산에 머물 때부터 종종 글을 보내서 어떤 분이냐고 묻곤 했는데요... 돌이켜 보면 그때 짐작했어야 했을지도요.”

눈앞이 더 깜깜해졌는데, 눈치가 원래 어두운 이이는 꺽정이가 진땀 흘리든 말든 한 번 떠벌대기 시작한 저의 입을 멈추지 않았다.

“어쨌든 그래서, 조만간 어머니와 함께 상경할 것이라 합니다.

제 누이동생이지만 자색(姿色)이 참으로 빼어나고 재주가 많지요. 솔직히 누이가 조금 아깝습니다.”

이이에게는 다행히도, 꺽정이 머릿속은 이미 뒤죽박죽이 되어 이이가 붙이는 사족을 머릿속에 담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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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의 기묘명현 신원은, 사림의 숙원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중종 본인이 기묘사화를 주도하였다는 사실이 뻔히 기억에 남아 있던 상황에서 함부로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일이기도 했지요. 선조 연간 이후에 갑자기 나타나 야사로 널리 퍼지게 된 ‘주초위왕’ 설화는 이러한 상황에서 기묘명현 신원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의심됩니다. 즉 중종이 아니라 중종을 둘러싸고 있던 ‘훈구파 간신배’들이 조광조를 모함했다는 것이지요.

이준경이 사림이 정국의 주도권을 쥐게 된 명종 말년까지도 참고 있다가, 자신이 선조를 사실상 왕으로 만들다시피 한 직후 – 이 과정에 대해서는 나중에 하성군이 등장하게 되면 부연토록 하겠습니다 – 기묘명현 신원에 나섰다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합니다. 결국 선조 1년 (1568) 조광조가 신원되고 영의정 직책을 추증받는 것을 시작으로 기묘명현들의 사면과 복권이 이루어지게 되지요.

물론 작중에서는 이준경 대신 후환 따위 걱정하지 않는 꺽정이가 이슈를 선점하였고, 승과 설치와 양종 복설이라는 그럴듯한 미끼를 왕실에 던졌기 때문에, 그러한 드라마틱한 일 없이 신원이 추진되게 되었습니다.

승과의 설치는 불교 승려들에게 어느 정도 공적인 지위를 인정한다는 뜻이었기에, 조정에서 불교의 두 교단(교종과 선종)을 공인하고 법적 지위를 인정하는 양종 복설과 세트로 취급되었습니다. 원 역사에서는 보우가 오직 문정왕후와의 개인적 커넥션에만 의지하여 승과 설치를 밀어붙였고, 그 결과 문정왕후 사후 제대로 역풍을 맞게 되지요.

그러나 잠시 시행되었던 승과에 서산대사 휴정, 사명당 유정 등이 승과에 합격하여 조선 불교계를 주도할 수 있게 되었고, 이후 임란 당시 승병 활동을 통해 조선 후기에 어느 정도 불교가 공적인 지위를 회복할 수 있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이황은 당대 선비들 사이에서 청렴하고 부귀영화에 관심이 없는 것으로 유명하였는데, 오늘날에는 그의 개인 서한과 후손들의 재산 상속 문서(분재기)를 통해 실제로는 그가 재산을 증식하는 데 매우 관심이 많았음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대토지를 경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노비와 양민의 통혼을 추진하고, 노비들이 개간하거나 사적으로 소유한 토지를 (아마도 반강제로) 매입하는 등 아주 적극적이고 체계적인 ‘재테크’ 활동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경제활동 이면에는, 경제적 곤궁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지요. 결코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이황이 집안 사람들에게 보낸 서한에는 자산의 부족과 결핍에 대한 공포가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사림 사이에서 이렇게 한 지역의 지주로서 존재하며 재산을 증식하는 것은 매우 보편적인 삶의 모습이었고, 당시 양반들이 벼슬이나 친족에 의지하여 양민을 억지로 노비로 만들거나 전답을 빼앗아 자신의 농장으로 만드는 – 당장 윤원형이 그런 경우였지요 – 경우가 많았음을 고려한다면, 사회의 보편적인 규범을 어기지 않으면서 그 틀 내에서만 재산을 늘리려 한 이황은 분명 청렴한 축에 들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흥미로운 점은, 이황이 단순히 토지와 노비를 늘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목화 재배에 뛰어들어 직접 파종과 시비 등을 챙기는 등 상업작물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기업가 정신이 있었던 셈인데, 작중에서 이황이 신문업에 뛰어든 것은 이를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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