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짚신의 짝 (1)
중전의 해산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볼록 나온 배의 모양을 살핀 늙은 상궁들은, 필시 이대로 두어 달만 지나면 중전께서 건강한 원자를 생산할 것이라고들 떠들고 있었다. 그러므로 귀 얇은 임금이 들뜨지 않고 배기겠는가.
별 욕심 없는 저의 형 심연원과는 달리, 윤원형이 지키던 지존 옆의 빈자리를 어떻게든 얻어낼 마음을 품고 있는 외척 심통원(沈通源)이 이때를 틈타 임금에게 헛된 바람을 불어넣었다.
이르기를,
“신이 듣기로, 회임하게 되면 옆으로 누워 자지 않고, 비스듬히 앉거나 걸터앉지 않고 오로지 자세를 올바르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음식의 맛은 반드시 정갈하게 하고 눈에 보이는 빛깔은 차분하게 하며, 귀에 들리는 소리는 조화로운 음률을 지키게끔 하고 밤에는 소경을 불러와 시를 읊게 하였으니, 이는 삼대(三代)로부터 내려오는 부도(婦道)입니다.
지금 궁궐을 지키는 흑의군은 비록 무위가 뛰어나나, 출신이 대개 한미하므로 반드시 몸가짐이 바르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날카로운 기세에 혹여 국모께서 놀라실 수도 있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자전을 모시는 궁인들의 마음이 어지러워져 자칫 그 모시는 바에 흠결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어찌 미리 대비하는 수를 마련치 않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은 그 말이 참으로 옳다 여기어, 곧장 우림위 별장 임거정을 불러 이를 논의하였다.
그리하여 지금부터 중전이 해산하고 몸조리를 마칠 때까지 약 세 달 간 흑의군 대신 창덕궁과 창경궁에서 허송세월하는 금군이 경복궁으로 돌아와 시위하게 되고, 대신 일 년의 기한은 그만큼 유예하기로 하였다.
그렇다 하여 흑의군이 떠나가는 것은 아니요 잠시 금군과 자리만 바꿀 뿐이므로, 따지고 보면 꺽정이와 그 일당이 도성에 머물 기한만 고스란히 늘려준 셈이 되었다.
“허어, 성상께서 그러셨다는 말이냐.”
마침내 보령에서 형 이지번이 보내온 선인들이 상경하여, 한동안 바쁘게 그들이 말하는 항해의 술수를 기록하고 있던 이지함이 꺽정이 말을 듣고서는 잠시 붓을 내려두고 한탄하였다.
꺽정이와 어울리면서 꽤 무엄해진 마음 속 언사로 표현하자면, 참으로 모자란 임금이었다.
심통원이 기껏 임금의 총애를 얻고자 흑의군을 일찍 몰아낼 핑계를 만들어 주었는데, 그것을 흑의군 우두머리에게 쪼르르 가서 고해바치니 이 얼마나 앞뒤 안 맞는 짓인가.
물론 반대로 생각하면, 여전히 흑의군이 종실의 명운을 쥐고 있음을 알기에 처신을 조심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지난날 주상이 윤원형을 신임하여 오만 관군 일으켰던 것을 감안하면 그렇게 깊은 고민 끝에 정해진 어심(御心)은 아닐 터였다.
“아버지가 된다는 게 다 그런 것 아니겠소. 첫 아이인 데다가 아들일 공산이 크다고까지 하니, 무언가 일을 꾸밀 때 손익을 따질 계제가 아니게 된 것이겠지.”
그러나 명을 내리는 것인지 청하는 것인지 애매한 말투로 당분간 흑의군이 궁궐을 비워주어야 하겠다고 말하던 임금의 모습과 목소리를 생생히 기억하는 꺽정이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너는 그것을 어찌 아느냐?”
“일전에 말씀드리지 않았소? 내 장래 몇십 년을 미리 살다 왔다고. 슬하에 자식은 없었지만, 나름 장가는 갔었소. 그것도 세 번이나.”
그 앞날 미리 보고 온 이야기가 나오니, 이지함도 궁금하여 구미가 동하였다.
“원체 잘 나가던 도적이라, 정말로 삼처사첩을 거느렸던 모양이로구나.”
이지함이 서안을 옆으로 밀면서 물었다.
“아니, 사형네 같은 양반가의 눈으로 보면 셋 다 영락없이 첩이라 해야 할 게요. 세 사람이 모두 기생이었거든.”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빙례(聘禮)를 따르면 처(妻)가 되고, 서둘러 야합하면 첩이 된다 (聘則爲妻 奔則爲妾).’
라 하였다.
예학에 밝은 서경덕 아래에서 이것저것 주워들은 것 많았던 꺽정이도 아는 구절이었다.
그 논리에 따르면 어찌 전생에 그와 혼례 올렸던 세 여인은 모두 첩일 것이다.
한온과 서림을 양옆에 거느리고 도성 저자를 휘어잡던 시절의 일이었다.
‘두령도 이제 나이깨나 먹지 않았소? 일전에 장가를 아니 가셨다 하시기에 깜짝 놀랐소.’
한온이가 하루는 까불대며 물었다.
‘아서라. 도적놈 주제에 무슨 장가냐. 언제 잡혀 죽을지 모르는데.’
꺽정이 전생에 스쳐 지나갔던 연은 결코 적지 않았으니, 그 중 여인도 많았다.
함경도 북변에서 무예를 닦을 때, 이름 모를 성저야인 아낙과 살을 섞었던 적도 있었고, 을묘년 왜변 때에는 난리통에 집을 잃고 들병이 신세가 된 어느 고을 기생을 뒷골목에서 구해주고 며칠을 함께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꺽정이는 뜨내기, 정처 없이 흘러다니는 티끌 같은 몸이었으므로 어디 눌러앉아 오래도록 함께할 수는 없었다. 그와 함께하던 여인들도 이를 알았으므로, 꺽정이가 어느 날 조용히 떠날 때 잔말 없이 배웅만 할 뿐이었다.
‘그래도 두령만한 호걸이면 여인은 여럿 거느리고 있어야 하지 않소?’
‘이놈이 무슨 바람이 들었나. 왜 갑자기 뚜쟁이 짓을 하려고 하느냐?’
‘기방 기생들이 내 볼 때마다 묻더이다. 이 한온이가 원래 여인네들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지지 않소.’
‘너는 내 부하가 되어서 두령을 난데없이 기둥서방으로 만드려고 하느냐?’
‘기둥서방 할 것이 무에 있소? 두령쯤 되면 그냥 서방 하면 되지. 기생들 중에도 평생 기생으로 지내지 않고 뭔가 다른 것 되어보려는 이가 한둘이 아니오.
특히나 우리 두령처럼 뭔가 거하게 일 벌일 기세 역력한 호걸이라면, 눈 달린 계집 치고 혹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기생도 일패(一牌, 최고급 기생)쯤 되면 따로 남편을 두기도 했다. 웃음은 팔아도 몸까지는 팔지 않고, 오직 저의 노래와 맵시로만 장사를 하겠다는 뜻이었으므로, 남편 있는 기생은 대접이 훨씬 후해지곤 하였다.
꺽정이가 드나드는 기방의 기생이라면 대개가 삼패요, 잘해야 이패 중에서 끄트머리 정도. 남편은 고사하고 기둥서방이나 제대로 구해도 다행이라 할 판이었다.
허나 이 무렵 도성 안에 윤원형과 결탁하거나 요동이나 동래에서 몰래 교역하는 식으로 부를 얻는 자들이 늘어나면서 기생들 사이의 질서도 문란해지고 있었는데, 그러니 기생들 중 더 높이 올라가려는 이들도 나오곤 하였다.
그리하여 밑질 것 무에 있겠냐는 생각으로 한온이 말을 따라 서방 구하는 기생을 여럿 만났다. 늦게 배운 오입질 무섭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물론 꺽정이는 애초에 임자 없던 몸이니 오입질이라 하기는 무엇하였지만.
처음에는, 그저 평생 거칠고 지저분하게 살다가 한껏 꾸민 여인의 분 내음을 맡게 되니 그저 눈이 뒤집힐 뿐이었다. 무엇에 씌었는지, 너도 내 여인 해라. 너도 내일부터는 내 아내다. 그렇게 장통방(長通坊)에 새살림을 셋이나 차리고 한양 올라올 때마다 돌면서 놀게 되었다.
허나 한두 번도 아니고, 여러 차례 교분을 맺다 보니, 그 안쪽의 모습도 꺽정이 눈에 조금씩 들어왔다.
세 사람 모두 천한 몸으로 태어나 어떻게든 더 올라가 보려 아등바등 애쓰는 것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이 그들에게 못할 짓을 하진 않았는가. 차라리 한 사람만 딱 택하여 진짜 아내로 삼아, 알콩달콩 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
사랑인지 동정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저의 마음속에 싹틀 무렵의 일이었다.
‘그 기생들을 정말 안사람으로 여기실 줄은 몰랐소. 우리 두령께서 이렇게 정 많으실 줄 뉘 알았을까.’
‘시끄럽다, 이놈아.’
‘두령 말씀마따나 언제든 여기 장통방 새살림은 들통날 수 있소. 그때가 되면 저들 버리고 두령이랑 우리네만 몸 빼돌려야 할 수도 있지 않겠소? 너무 정을 깊게 쏟을 것까지는 없지 않겠소.’
그리고 한온이 말대로 되었다.
저의 아내 건드리는 놈팽이가 있다기에 흠씬 두들겨패주었는데, 하필 그놈이 포도대장의 서조카였던 것이다.
그놈은 원한을 품고서, 곧장 저의 숙부에게 달려가 어느 기생의 기둥서방이 장통방 어딘가에 살림 화려하게 차려놓고 사는데 아마 근래 기승 부리는 도적놈과 연줄 있을 것이라 억지 고변을 하였다.
그러나 그 억지 고변이 하필 진짜로 맞아떨어질 줄 어찌 알았으랴.
옷고름 풀어두고 자고 있던 꺽정이는 한온이 챙겨서 겨우 몸만 빠져나왔다. 며칠 뒤 그 서자 놈을 붙잡아 산 채로 배를 갈라 광통교 아래 버렸으나, 암만 복수를 하여도 전옥서에 갇힌 세 여인을 구해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끝내 꺽정이는 그들을 버릴 수 없었다.
그렇게 보름 남짓 한양에서 허송세월하던 중, 참다 못한 서림이 나섰다.
‘두령, 전옥서 경계는 늘 허술하니 조금만 기다리면 틈이 생길 것이오. 허나 지금 그보다 급한 일이 있지 않소?’
결국 봉산군수로 부임하는 이흠례를 잡아 죽이는 일이 더 급하였기에 어쩔 수 없이 한양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서림은 한양에 남겨두고 혹여 기회가 생길지 모르니 잘 지켜보고 있으라 해두었다..
꺽정이 저가 평산 이춘동이네에서 이흠례 족칠 궁리 하는 동안, 서림이 무슨 생각인지 급하게 파옥을 추진하다가 끝내 붙잡히고야 말았으므로, 따지고 보면 꺽정이 자신이 전생에 그토록 몰락하게 된 것이 모두 그 세 여인들 때문이었다.
나중에 듣기로는 모두 형조에 속한 관비가 되었다 들었는데, 다들 얼굴이 반반하였으니 아마 좋은 꼴은 못 당했을 것이었다.
“... 뭐, 사연은 대충 이렇소.”
서림이 얘기 정도는 빼고 나머지를 모두 털어놓은 꺽정이는, 갑자기 목이 말라 문 열고 물 한 잔 가져다 달라 하였다.
옛 의민당 장정 하나가 당수 목소리 듣고 후다닥 달려와 물을 바쳤다.
“나는 네가 신씨 부인을 장모로 모시기 두려워서 그토록 혼사 얘기 나왔을 때 질색한 줄 알았다. 이제 보니 또 이런 사연이 있었구나.”
꺽정이가 꿀꺽대며 물 마시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던 이지함이 말했다.
“역시 금방 알아차리시는구려.”
“네가 너를 하루이틀 보느냐.”
“우리가 그때 이루기로 약조한 것. 앞으로 계속 그것을 향해 나아가다 보면 또 지난날 황해도에서 관군과 한판 했던 것처럼 난리통이 언젠가 벌어질 수밖에 없을 게요. 그때 발목 잡힐 거리를 만들기는 싫소.”
“나도 모산수 어르신과 안사람까지 데리고서 의민당 모주 노릇을 잘만 하지 않았느냐.”
이지함의 장인 모산수 이정랑은, 이제 그 이름을 되찾은 충주 옛집에 돌아가기를 원하였으나 이미 그 집의 노비며 전답이며 감영 파옥하던 중 사라진 지 여러 해였기에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사위가 계속 장인을 모시고 살고 있었는데, 조선국에서 역적으로 선포된 사람이 그토록 오래 명을 붙이고 있는 것만 하여도 참 사위 잘 두었다 할 일이었다.
“그건 이야기가 다르지 않소. 사형은 어쩔 수 없이 그분이랑 사형 아내분이랑 모시고 청석골에서 지냈던 것이고. 나는 아예 그럴 소이(所以)를 면하고 싶은 것이고.”
“글쎄다. 솔직히 말해보거라. 걸리적거릴까 봐 꺼리는 게 아니라, 성혼(成婚)하여 아내와 가족이 생기게 되면 나중에 자칫 잃어버리지 않을까,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 아니냐?”
“젠장할. 좀 사람이 눈치 없으면 어디가 덧나오? 사형네 제자 녀석을 닮아보시오.”
“암만 내 제자가 총명하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승이 제자 닮아가면 되겠느냐.”
“뭐, 여하간 내 마음을 잘도 꿰뚫어보셨소. 신씨 부인이 장모가 되는 게 부담스러운 면도 없지 않지만.”
그런 면에서는 사임당 신씨보다는 이원수가 대하기 편하였다.
물론 이원수와 덕수 이씨 쪽에서도, 풍성부원군 이기를 해친 윤원형을 무너뜨림으로써 집안의 원수를 갚아준 꺽정이에게 어떻게든 보은할 이유가 차고 넘치기는 했지만, 적어도 꺽정이 저가 결연히 싫다고 하면 더 캐묻지 않고 마음을 돌리지 않겠는가.
허나 사임당은 꺽정이가 싫다고 할수록 더욱 열렬히 그 꽉 닫힌 마음의 문을 깨부수려 애를 쓸 것이었다.
“그리고 신씨 그 아주머니가 암만 대하기 어렵다 한들, 우리 당의 중요한 한 사람이고, 또 의민당 시절부터 당 살림에 적잖이 도움도 주었지 않소. 나 같은 사위가 생기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그쪽에도 차마 못할 짓이오.”
“그래도 사람이 사내로 태어났으니 대는 이어야 하지 않겠느냐?”
“사형, 백정들은 그런 것 없소. 그냥 남녀가 눈 맞아서 둘 사이에 아이 나오면, 되는 대로 키워서 일손으로 쓸 뿐이지. 조상에게 물려받은 건 빌어먹을 놈의 백정 신세뿐인데 대를 이어서 뭔 덕을 보겠소?”
“후... 정말 네 뜻이 강고하구나.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지.”
백정 집안을 어떻게든 억지로 양반으로 만들지 않고서는 혼례의 예식 자체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명백하였다.
명색이 반가의 여식인데, 첩을 들이거나 노비들끼리 통혼할 때 하는 것처럼 정한수 떠다놓고 천지신명 앞에 약조 한 번 하고 맞절한 다음 끝낼 수는 없는 노릇.
그러니 어떻게 의혼(議婚, 혼담)은 넘기더라도, 납채(納采)부터 곤란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꺽정이 본인부터 자신이 태어난 일시를 모를 터였다. 그러니 사주단자 주고받기부터 언감생심이었다.
“내 말이 바로 그거요. 그러니까 이번 혼사는 애초에 언어도단이다 이 말이지. 신씨 심지가 암만 궂다 한들 반가의 규수에, 또 귀한 자식을 둔 어머니 아니오? 내가 백정이라고 조용히 운만 띄워도 알아서 혼담을 거둘 테요.”
“솔직히 꺽정이 너를 위해서도 영 아쉽기는 하다. 허나 네 뜻이 그렇다면 거기에 따라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꺽정이와 이지함 모두 아직 세상을 너무나 쉽게 여기고 있었다.
깨달음은 늘 그렇듯 뒤늦게 찾아왔다.
처음 임 처사라는 사람이 숭례문 앞에 나타났을 때만 하더라도 점잖은 벌열가에서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예로부터 기인 행세하면서 백성을 모아 이상한 짓을 하는 자들은 한 대(代)에 꼭 한둘씩은 있었다.
어느 집안이 몰락하여 먼 친척에게 의탁하게 되었을 때, 따라가지 못하고 남겨진 서자들이 그런 신세가 되기도 했고, 이서(吏胥)의 무리나 얼자들 중 양반 흉내는 내고 싶으나 도저히 학문이 되지 않는 자들이 그런 얼치기 노릇을 하기도 했다.
그런 자들의 입에서 도참(圖讖)과 같은 허황된 말도 나오는 법이었으니, 의민당이라는 것도 아마 그와 비슷하게, 잠시 백성을 홀리고 끝나지 않겠는가.
그러니 그냥 그런 사람 있더라 하는 정도로만 알고 그치면 그만이었다.
허나 임거정이 역적으로 선포되고, 이어서 저의 힘으로 그 역적 허물을 벗어던지고서 경복궁에 웅거하게 된 이래로는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저와 같이 전례없는 큰일을 성사시켰음에도 스스로 본관이나 출신을 밝히지 않았고, 또한 아호(雅號)를 쓰지도 않고 자(字)를 밝히지도 않았다. 그러니 임 당수는 필시 어느 거족(巨族)의 얼자일 것이다!”
얼자라 하면, 특히 그 출생이 떳떳하지 못한 얼자라 하면 본디 피로 이어진 집안의 성씨 대신 다른 성을 달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이는 비단 선산 임문과 나주 임문 등 임씨 집안들만의 일이 아니었다.
임 당수가 통의부 의송을 통해 죄를 벗고, 이어서 그 윤원형조차 임 당수에게 귀부하여 저의 재산을 바쳤으며 나아가 기묘년 명현들의 신원까지 주동하였다는 소식이 전국을 떠들썩하게 달구게 되자, 이는 숫제 하나의 광풍(狂風)으로 비화하게 되었다.
“찾아야 한다! 우리 문중과 연이 있는데 모르고 넘어간다면 후대에 얼마나 원통하게 여길 것인가!”
“족보와 노비문기를 모두 가져와라! 집안의 늙은 종들도 모두 불러모아서 물어보아라!”
하다못해 이준경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경기 일원의 친족들에게 글을 돌릴 지경이었으니, 다른 집안들은 어떻겠는가.
그 과정에서 엉뚱하게도 각미사 유극량이 얽혀들어가기도 하였다.
조정이 물갈이되면서 벼슬이 문형(文衡, 대제학)에 이른 홍섬(洪暹)이 혹여 임 당수나 그 무리 중 자신의 집안과 연이 있는가 속속들이 찾아보던 중 그의 아버지 대에 도망친 계집종이 신분을 숨기고 양민과 통혼한 사실을 알았는데, 그 아들이 유극량이었던 것이다.
홍섬은 두 번 고민하지 않고 유극량을 집에 초빙한 뒤 그 눈앞에서 어미의 노비문기를 불살라버렸다. 이로 인해 성품 곧은 유극량은 홍섬을 은인으로 모시게 되었는데, 세간에서는 홍섬이 오히려 더 운이 좋다고 하였다.
유극량은 그냥 선달이라면 모를까 각미사 사람, 그것도 임 당수와 안면이 있고 도망하던 윤원형을 추포하는 데 일조하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만일 홍섬이 재수가 없어 한두 해 일찍 그 사실을 깨닫고 유극량을 핍박했더라면, 지금쯤 그가 임 당수 손에 어떤 화를 당하였을까 뻔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임꺽정의 집안 내력을 찾기 위해 명문가에서 벌어지고 있던 소란 가운데 있었던 하나의 일화에 불과하였다.
그렇게 좀처럼 잦아들지 않는 혼란 가운데, 도성의 양반가 사이에서 놀라운 말이 퍼지기 시작했다.
“혼사라니?”
“덕수 이씨 문중에서 혼담을 넣었다고 합니다. 옆집 박문(朴門)이 관례를 치르고 혼처를 알아보는데, 그 집에 드나들던 매파가 그리 말했다고 하네요.”
아무리 신씨가 꺽정이와 여러모로 연 깊은 사이라지만, 반가의 여인으로서 혼담을 자신의 입으로 당사자에게 먼저 거론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리하여 도성에서 가장 입 무겁고 처신 점잖은 매파(媒婆)를 수소문하여, 꺽정이가 이지함 집에 있을 때 찾아가서 만나도록 미리 말을 넣어두었다. (꺽정이가 지금 머물고 있는 창덕궁에 매파를 보낼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문제는, 매파 자신의 입이 아무리 무겁다 하더라도 그 주변 사람 입단속까지 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매파의 업이라는 것 자체가 소문과 평판에 의지하는 법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매파의 말은 규방(閨房)에 전해지고, 규방과 규방 사이를 건너뛰며 퍼지는 소문은 다시 그 집의 사랑방에 전해지게 되었다.
“... 풍문이 이만큼 널리 퍼질 줄은 몰랐소.”
이번에 윤원형에게 벼슬을 샀던 이들이 대거 퇴직한 덕에, 전함사 수운판관(水運判官)이라는 편한 자리를 얻게 된 이원수가 아내 신씨와 함께 이지함 집에 와서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 듣고서 꺽정이는 급히 발걸음을 하였다.
그랬는데 이원수는 물론이요 신씨 얼굴에까지 보기 드문 당혹스러움이 서려 있는 것 아닌가.
“이렇게 곧장 찾아오실 것이었다면, 애초에 매파는 왜 쓰신 것이오?”
“이리 될 줄 알았다면, 차라리 반가의 법도는 잠시 제쳐두고 처음부터 손수 찾아왔을 것이오. 봉산군 동헌에서부터 대면한 사이였으니, 무슨 거리낄 것이 있겠소.”
신씨가 한숨 한 번 푹 쉬고는 말을 이었다.
“허나 이 사람인들 온 도성의 명문가들이 이렇게 임 당수에게 온 관심을 기울이고 있을 줄 알았겠소? 예법을 조금 지키려 하였다가 크나큰 곤경에 처하게 되었으니 난처할 따름이구려.”
“곤경이라니, 그 무슨 말씀이시오?”
“임 당수의 집안이 많이 한미하다고 들었소. 이미 황해도에서 함께할 때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렇소. 많이 한미하오.”
이원수가 아내 대신 묻자, 꺽정이가 얼떨떨해 하면서도 대꾸하였다.
“외인(外人)의 이목은 없으니 기탄없이 말해주시오. 얼마나 한미한 것이오?”
“나는 본디 양주 살던 백정이오.”
“그냥 백성인 것은 우리 부부도 공히 눈치를 채고 있었소. 허나 반상의 구분이 있다 한들 국법으로는 같은 양민이니...”
“아니, 백성 말고 백정.”
꺽정이가 저의 답을 잘못 들은 이원수에게 고쳐 말해주었다.
“백정?”
“그렇소. 소 잡고 고리 짜는 그 백정이오.”
“허...”
낭패라는 표정으로 부부가 얼마간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신씨가 비장한 눈빛을 띄우며 말했다.
“백정이면 뭐 어떻소?”
“엥? 그건 또 무슨 말이오?”
“이번 혼례를 계기로 양반이 되면 될 터.”
“내가 말이오?”
가만 듣던 이지함이 추임새를 넣었다. 아무리 꺽정이와 함께 지내며 엉뚱한 생각도 많이 한다지만, 조선국의 현실을 잊지는 않은 이지함이었다.
“신씨 부인 말씀이 맞다. 네 대에 당당하게 가문 하나를 만들고 이씨 문중과 연을 만들면, 비록 당대에 뒷말이 조금 나오기는 하겠지만 두어 대만 지나도 어엿한 집안 하나가 서게 될 것이다.
사실 오늘날 소위 명문거족이라고 하는 집안들 중에도, 정말 유서 깊은 집안도 물론 없지 않으나 전조 고려 때 멋모르는 무신들이 마구잡이로 성을 가져와 붙인 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때로부터 거의 이삼백 년이 지나기는 했지만, 어쨌든 굳이 하려고 하면 못할 것도 없다.”
만일 신씨에게 꺽정이 저의 출신을 밝힌다면, 아마 평산 신씨와 덕수 이씨 두 문중이 달려들어 어떻게든 꺽정이에게 그럴듯한 집안을 만들어주려 애쓸 것이다.
그뿐이랴? 정 안 된다 싶으면 조정에 슬쩍 집안이 한미하다 말만 흘려도 될 것이다. 꺽정이의 사주단자와 선대 내력조차 확인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벼슬을 내렸으니, 조정에서 응당 그 책임도 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보아야 집안의 격이 맞지 않음은 명백하므로 군말이 나오지 않게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당대에는 그런 말을 입밖에 뻥긋할 자가 없을 것이며, 그렇게 몇 대만 지나면 그냥 내력이 조금 독특할 뿐 별반 다를 것은 없는 집안으로 굳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꺽정이는 더욱 질색하며 대꾸했다. 전생의 멋모르던 때라면 모를까, 두 번 인생을 살면서 뒤틀리고 뒤틀린 심성에 양반 되기는 질색이었다.
“사형, 내가 사형도 좋아하고, 군수, 아, 이젠 판관 나리지. 좌우지간 이씨와 신씨 양반님네들도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양반 되기는 싫소.”
천한 사람이 양반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니, 이 무슨 말인가. 꺽정이 곁의 양반 셋이 모두 놀랐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나 형을 양반으로 만든다 한들 주변에서 진짜 양반으로 대해주기는 하겠소? 차라리 그때 우리끼리 뭉쳐서 약조한 대로 아예 양천의 구분을 무너뜨리고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난다면 모를까.”
“그러면 그렇게라도 해야겠지.”
신씨 부인이 한숨 푹 쉬더니 묵직한 말을 던졌다.
“우리 딸이 임 당수를 많이 마음에 들어하고 있소. 집안 한미하다고 매파가 말을 전하였더니, 그렇다면 오히려 그렇게 낮은 곳에서 몸을 일으켜 도성을 뒤흔드는 자리까지 올라왔으니 일세의 호걸 아니냐고 하더구려.”
호랑이도 잡을 듯한 기세의 신씨 부인이건만, 자식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지곤 했다.
애초에 이이를 파주에서 훔쳐왔을 때도 그로 인하여 결국 의민당 역적질에 함께하기로 하였던 신씨였다.
딸이 원한다면 백정과 양반이 통혼하는 것쯤 못 이루어줄까.
“허나 그보다 우선 임 당수 그대와 그대 집안의 의향이 중할 것이오.”
“내 말씀드리지 않았소? 나는 양반 되기 싫소. 지금도 나라의 중신은 물론이요 임금조차 날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데...”
“그러나 임 당수의 집안 사람들도 그리 생각하겠소? 혼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인만큼, 집안과 집안 사이의 일이기도 하오. 정 아니 된다면 어쩔 수 없이 다른 길을 찾아야 할 것이나, 우선은 임 당수 그대도 집안의 어른들께 뜻을 물어봄이 어떻겠소?”
“그렇지만 이 사람은 도성을 떠날 수가 없는...”
“마침 금궁을 지키는 일에서도 한동안 풀려나지 않았느냐, 꺽정아.”
암만 생각해도 이이를 닮아가는 것 같은 이지함이 옆에서 또 끼어들었다.
“아, 사형, 좀!”
그러나 결국 저의 집안까지 거론하며 설득하는 세 사람 앞에서 무너지고야 말았다.
“에휴. 우선 알겠소. 그러나 백정과 통혼하기가 그리 쉬울 것이라 생각하지는 마시오. 나는 이 혼사 반대요, 반대.”
꺽정이가 투덜대며 몸을 일으켰다.
그때, 벌컥 문이 열렸다.
“제가 그리도 싫으신가요?”
“얘! 명희(明姬)야!”
대체 가도(家道)가 어떻기에 반가의 여인이 이토록 쉽게 외간 남정네들 앞에서 맨얼굴을 드러낸다는 말인가.
... 라고 꾸짖기에는, 첫째로 꺽정이 본인이 양반은 아니요 양반 되기도 싫다 공언하였고, 둘째로 반가의 가도를 말하기에는 이미 신씨 부인을 너무나 많이 겪었으며,
셋째로 꺽정이 생각보다도 훨씬 처자의 얼굴이 고왔다.
“아니, 무어... 싫다는 것은 아니고...”
“그러면 어째서인가요? 소녀가 장차 낭군 되실 수도 있으실 분을 뵙고자 강릉에서 이렇게 상경하였는데, 이토록 매몰차게 말씀을 하시니 차마 참을 수가 없더군요.”
양반 처녀가 이처럼 가까이서 대드는 것은 처음 겪어본 꺽정이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며 핑계거리를 열심히 찾았다.
“흠흠, 내 임자 어머니 말씀마따나, 우리 집안 사람들 말도 들어보아야 할 것 같소.”
갑자기, 양주가 너무나 한양에 가깝게 붙어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꺽정이었다.
조만간 갑작스럽게 민주당 임 당수가 양주에 찾아온다는 기별을 받게 될 양주목사도 비슷한 원망을 속에 품게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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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의 바로 손아랫동생인 이씨는 그 어머니 신사임당과 마찬가지로 본명이 따로 전하지 않습니다. 별호 매창(梅窓)이 전하는 이이의 첫째 누나 역시 본명이 전하지는 않지요. 작중에 쓰인 ‘명희’라는 이름은, 허난설헌의 본명 초희(楚姬)를 참고하여 창작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