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66화 (66/259)

22. 짚신의 짝 (2)

양주목사 백인영(白仁英)은 문명 높은 백인걸(白仁傑)의 종형인데, 옳고 그름에 대한 주관이 확고하여 항상 송사를 자신의 손으로 처결하곤 하였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그놈의 학당을 만든다고 향리와 토호 집안들이 날뛰면서 저들끼리 편이 갈리고, 또 사족 집안들과도 다투게 되면서, 송사 하나를 처결하면 둘이 튀어나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가뜩이나 바쁜 판에 이제 민주당 당수 겸 우림위 별장 겸 중추부 첨지사 임거정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는 몰라도 양주에 찾아온다는 풍문이 들려오니, 속으로 원망이 아니 나올 수 없었다.

허나 목사가 무어라 생각하든 그 아래 있는 아전들에게는 또 이만한 기회가 없을 것이었다. 별 볼 일 없는 평양 구실아치 서림도 귀인을 만나더니 나라에서 가장 위세 높은 아전이 되지 않았던가.

애초에 그 풍문을 물어온 것도 공보 받으러 한양 다녀온 경저리 한가였다.

그 결과, 목사는 따로 시키지도 않았는데 육방 아전들이 모두 달라붙어, 공방은 관노를 모두 모아 길이란 길은 모조리 쓸고 닦고, 병방은 혹여나 임 별장님 오시는 길에 무엄한 자 나타날까 걱정하여 나졸을 모두 풀어 길을 지켰다.

경저리 한가의 아비인 호방은 숫제 저의 집안 사람들에 머슴들, 그리고 공보의 일을 맡아보는 저의 아랫사람들까지 모두 풀어서 공방과 병방에게 보태주고 있었다.

“임 당수께서 이쪽으로 오시는 게 맞습니까요?”

고작 한두 달 사이에 경저리 한가와 안면을 튼 백정 가도치가 빗질 하다 말고 저의 사실상 상전에게 물었다.

“낸들 어찌 알겠나. 허나 고양 쪽에 들렸다 오신다는 말은 없었으니, 도성에서 우리 양주 읍내로 직행하시지 않겠는가. 물론 워낙에 몸이 날래고 신출귀몰하신다니 축지법 쓰듯 어디 산속에서 나타나실 수도 있으시겠지만...”

가도치는 배운 것은 없어도 공보 나르는 일에 진심이었다. 더구나 고리백정으로서 양주 양반댁 곳곳에 물건을 바치곤 하였으므로 일대 지리에도 빠삭하였고, 공보 받아보는 양반들이 이런저런 잔심부름을 시키면 군말없이 따르곤 하였으므로 그 평이 으뜸이었다.

물론, 그런 호평에는 백정놈이므로 다른 양민들보다 꽤 헐하게 부릴 수 있다는 점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엇, 저기 누가 옵니다요.”

새벽부터 말끔하게 정리하여, 마치 대국 사신 오는 것처럼 준비해둔 길을 웬 사람 둘이 지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나는 관례 치른지 얼마 되지 않은 양반댁 도련님이요, 다른 하나는 패랭이 쓴 거한이니 필시 머슴이나 몸종쯤 될 것이다.

“어디... 아니, 저건 그냥 어디 양반댁 도련님 아니신가. 아마 물정 모르고 마실 나오시는 듯하군그래.”

“소인네가 가서 사정 말씀드릴깝쇼?”

“그냥 잡인도 아니고 반가의 자제 아니신가. 내가 다녀오겠네.”

그러고서 후다닥 잰걸음으로 나아간 아전 한가는 곧 고개를 연신 갸우뚱대며 돌아왔다.

“거 이상하기도 하다.”

“무슨 일입니까요?”

“저기 파주 밤골 사시는 덕수 이문(李門) 자제분이시라는데, 한양에서 오시는 길이시라더군. 헌데 이미 임 당수는 도성 떠난 지 오래요, 설령 이 길을 지났다 해도 진작에 지나쳤을 것이라고 하시는구만.”

분명 새벽부터 길목을 지키고 있었는데 어느 세월에 그들을 지나쳐 양주 읍내로 들어갔다는 말인가?

그리고 정말 양주 읍내에 들었다면, 목사 얼굴도 보지 않고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도통 영문 모를 일이었다.

만약 한가와 가도치가 저쪽의 두 사람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다면, 도련님과 그 몸종일 리 없음을 진작에 알아차렸을 것이요, 조금 더 가까이 붙었더라면 ‘몸종’ 얼굴이 어째 익숙한 것도 알아보았을 것이련만, 저들끼리 임 당수 행방을 두고 떠드느라 그럴 겨를이 없었다.

“당수께서 공공연하게 가겠노라 기별하신 것도 아닌데, 이래도 되는 걸까요? 공연히 백성과 노복들만 힘들게 하는 것 같은데...”

“뭐, 저들이 좋다고 헛짓거리를 하는데 내가 구태여 말릴 이유는 없지 않으냐. 그리고 내가 이 차림새 하고서 임 당수 여기 있으니 길거리 단장하는 짓은 관두라 하면 저놈들이 퍽이나 믿어주겠다.”

이이는 백성을 걱정하고, 관과 아전들 심리를 잘 아는 꺽정이는 심드렁하게 대꾸하였다.

“그나저나 너희 부모께서는 정말로 백정 사위를 얻어도 좋다고 여기시는 게냐?”

“글쎄요. 그보다는 누이동생 마음을 쉽게 꺾을 수 없음을 아시는 것이겠지요.”

“너희 집 형제자매는 다 성품이 비슷한 것 같다.”

이이가 오해할까봐 꺽정이가 급히 말을 덧붙였다.

“칭찬 아니다.”

“글쎄요. 다 비슷하지는 않습니다. 아, 잠깐. 비슷한가?”

꺽정이 말을 듣고 뭔가 깨달은 이이가 갑작스레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아닌 게 아니라, 차분하고 과묵한 맏형 이선(李璿)을 제하면 다들 성질머리가 제멋대로였다.

큰누이는 벌써 매창(梅窓)이라고 스스로 별호까지 짓고서는 어머니 따라 그림을 그리고, 둘째형 이번(李璠)은 산수를 좋아하여 항상 강릉 어딘가를 떠돌아다니곤 하였다. 둘째누이와 막내동생도 자유분방한 기질은 비슷하였다.

자식들에게 엄하면서도, 원하는 대로 재주 펼치는 것은 오히려 권장하던 어머니 신씨의 가르침이 컸을 테다.

“어쨌든 네 녀석이 나를 감시하러 이렇게 따라붙었다지만, 우리는 이래 봬도 우리끼리 연이 깊지 않으냐. 네가 좀 네 누이에게 잘 말해주거라.”

꺽정이는 본래 조용히 본가에 다녀올 생각이었는데, 어느새 옆에 이이가 따라붙었다. 꺽정이가 셋째 딸의 얼굴을 보고 마음이 흔들리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혼사 내켜하지 않음을 알고 있던 신씨가, 혹여 꺽정이가 허튼짓할까 우려하여 그 곁에 이이를 붙인 것이다.

꺽정이 딴에도, 신씨나 그 딸 이씨가 스스로 혼사를 물리는 쪽이 가장 잘 풀리는 길이었으므로, 이이가 저 대신 백정들이 얼마나 양반과의 혼사를 꺼리는지를 증언해주면 나쁠 것이 없었다.

“당수께서는 정말로 제 누이가 부족하다 여기시는 건가요?”

“부족하지는 않지. 외려 차고 넘치니까 문제다. 네 말대로 얼굴은 참 곱던데, 백정과 통혼하기가 아깝지 않으냐?”

“양천의 구분을 부순다는 분께서 퍽 잔걱정이 많으십니다.”

이이가 꺽정이 속셈의 모순을 예리하게 꼬집었다.

“이놈아. 양천의 구분 망가뜨리다가 네 누이 신세까지 망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내 한 몸이야 어디 가서든 잘 살겠지만, 옆에 식구 딸리게 되면 얘기가 달라지는 법이다. 의민당 시절에도 그래서 여기 양주 사는 내 아비랑 형 알지 못하게 했던 것이고.”

전생에 형 가도치를 그렇게 잃은 바 있던 꺽정이가 말했다. 그러나 주변 여러 사람이 국법으로 죄 받는 것은커녕, 오히려 역적 소리까지 들었음에도 멀쩡히 빠져나오는 것만 보았던 이이는 영 공감하지 못하였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나요?”

“아마 내가 아직도 황해도 어디서 영 구질구질한 일 하고 있는 줄로 알 게다. 백정이 비단을 보낼 만큼 살림살이가 좋다면 그것이 떳떳한 벌이일 리가 없으니.”

“그건 효도가 아니지요.”

“어차피 내가 바로 그 소문의 임 당수다 하고 밝히더라도 아무도 안 믿을걸?”

“허나 이번에 혼사를 치르려면 밝힐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당장 납채(納采)만 하더라도 아버지와 본인의 이름에 신분까지 모두 적어야 할 텐데요.”

“혼례도 아니 올린 꼬맹이가 잘도 알겠다.”

“제 가형은 이미 혼례를 치렀거든요. 한 번 옆에서 보면 잊지 않지요.”

그렇게 둘이 아웅다웅 말다툼하면서, 때로는 잡소리를 하고 때로는 혼사의 가부를 두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읍내에서 조금 떨어진 허름한 골목에 접어들었다.

“저기가 우리 집이다.”

“말 그대로 초가삼간이군요.”

“우리 아버지랑 형이랑 둘이서 살기에는 차고 넘치지, 무어. 아, 이젠 형도 아내를 들였으니 셋이려나.”

상민들이나 양반들이나 남귀여가(男歸女家)가 통례(通禮)요 데릴사위도 적지 않건만, 백정은 그런 것 없이 살림살이가 (그나마) 넉넉한 쪽에 시집을 가든 장가를 들든 하였다. 그리고 집이라도 한 채 있고 또 꺽정이가 보내오는 비단 덕에 먹고사는 걱정은 없는 말대가리네는 백정들 중에서는 잘 사는 축에 들었다.

“좀 지저분해도 그러려니 해라.”

“봉산에서는 싸움터 구경까지 했는데요, 무어. 이 정도야.”

말쑥한 도련님이 백정들 사는 곳에 모습 드러내니, 대체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좋은 일은 아닐 것이라고들 단정한 백정들은 몸을 숨겼다. 허술하게 싸리 따위를 엮어 만든 담장 사이로 훔쳐보는 눈길이 제법 많았다.

그러든 말든 꺽정이는 익숙한 골목을 성큼성큼 걸어가, 그가 기억하는 대로 여전히 허름한 저의 집 싸리문을 발칵 열었다.

“거 뉘시오?”

“아버지! 나요! 꺽정이가 왔소!”

마루 한 구석에 앉아서 빈둥대던 말대가리가 급히 몸을 일으켰다가, 이이의 도련님 행색에 눈이 닿자 깜짝 놀랐다.

“아이고, 옆의 귀하신 분은 또 누구시고?”

“파주 율곡(栗谷)에 거하는 유학(幼學) 이 아무개입니다.”

그제야 와당탕 마루에서 내려온 말대가리가 허리를 굽혔다.

길가에서 양반을 만나면 길 아래로 내려가서 고개 숙인 채로 맞이하는 것이 본디 백정의 예법이다. 만에 하나 그러지 않았다가 성질 더러운 양반을 만나면 졸지에 멍석말이를 당할 수도 있었다,

더구나 백정의 집에 양반이 들어오는 것은, 그럴 일이 별로 없기도 하거니와 설령 있다면 관에서 누구 잡으러 올 때 뿐이었으므로, 말대가리로서는 기절초풍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어쩌다 이런 누추한 곳에 다 오셨습니까요. 얼른 마루에 오르시지요.”

“괜찮습니다.”

“아버지, 걱정 마시오. 여기 이 도련님은 나랑 아는 사이인데, 그렇게 예를 차릴 필요는 없소.”

“무슨 큰일 날 소리를 하고 있느냐, 이놈아!”

“뭘 그 정도 가지고 큰일이라고. 잘못하면 여기 이 도령네 집안이 우리네랑 사돈을 맺을 수도 있으니 그게 더 큰일이지.”

“그게 왜 ‘잘못하면’입니까, 임 당수?”

그제야 눈앞에서 들려오는 말 몇 마디가 귓속에 들어온 말대가리는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이 무슨 일이냐... 양반댁과 사돈? 도련님은 꺽정이에게 왜 또 공대를...? 아니, 그리고 임 당수? 임 당수는 거기서 왜 나오고?”

“에라이... 거기서 왜 또 그런 말을 해가지고. 아버지, 내가 임 당수요.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임 당수 임거정이가 아버지 아들놈 꺽정이라 이 말이오.”

말대가리가 혼절한 것은 그쯤이었다.

임 당수 맞이하려다가 허탕만 치고 돌아온 가도치는 기묘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배가 불러오기 시작한 아내는 마당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고, 마루 위에는 아버지 말대가리가 큰대자로 쓰러져 있으며, 그 옆에는 어디서 보았던 양반댁 도련님과 그 몸종이 앉아서 아버지 맥을 짚고 있는 것 아닌가.

“아, 형님 오셨소?”

“아니, 잠깐. 배도치 아니냐? 이게 대체 무슨...?”

꺽정이가 한숨 푹 쉬더니 말했다.

“내가 민주당 임 당수요. 여기 이 도령은 내 사형의 제자인데, 지금 자칫하면 내 처남이 되게 생겼소.”

“그게 뭔 소리냐?”

“지금 다 말했잖소? 사람이 말하면 좀 알아들으시오.”

“임 당수 말씀이 다 맞습니다.”

다행히도 가도치는 아직 젊어서 기력이 왕성했으므로, 그 아비처럼 혼절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혼절하는 대신 꺽정이가 던진 그 벽력같은 말을 곱씹었다.

가도치 역시 곱씹을수록 몇 번이나 아찔한 위기를 겪었으나 다행히 모두 견뎌내었다. 누군가는 집안의 중심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휴우... 처음부터 좀 차근차근 말을 해보거라. 흠흠, 도련님. 옆에 조금 앉겠습니다.”

“그러시지요.”

가도치가 조심스레 마루에 앉아 꺽정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꺽정이는 저의 형이 시킨 대로,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지는 그때, 그러니까 서경덕에게 찾아가 공부를 하였을 때부터 벌어진 일을 죽 털어놓았다.

꺽정이가 홀로 말한다면 이놈이 밖에서 대체 무슨 엉뚱한 것을 먹고 왔느냐면서, 혹 실성한 것은 아닐까 의심하겠지만, 옆에 번듯한 양반 자제가 앉아서 꺽정이에게 꼬박꼬박 존대하고, 또 그러면서 꺽정이 말이 모두 옳다고 확언해주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얘기가 늘어지는 사이 해는 저물고, 어느새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 하여 별장 벼슬까지 받고, 여기에 이르게 되었소. 그랬는데 여기 이 도령네 누이동생이 갑자기 나랑 혼담 맺자고 달려들어서, 어떻게든 단념케 할 생각을 하고 있소.”

그제야 떡 벌어진 입을 겨우 다문 가도치가 힘겹게 말했다.

“그나마 잘 했다. 암만 내가 백정 안 하려고 애쓰고 있다지만... 그래도 우리 처지에 양반님네와 혼사가 어디 가당키나 한 소리냐.”

“백정도 법으로 따지면 양민은 양민입니다. 그리고 당장 선대왕 시절에도 백정이 나라의 벼슬을 하고 공신에 책록된 일도 있지요. 만약 두 분이 원하신다면, 언제든 백정 신세를 벗고 양민으로 대접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이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도 계속 날뛸 거요. 형님도 알겠지만 내 성정이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잖소. 거기 휘말렸다가 형님도, 아버지도 어찌 될지 모르오. 애초에 그래서 의민당 우두머리 하던 때도 내 무엇하고 있는지를 숨겼던 것이고.”

“... 꺽정이 네가 잘 하였다.”

언제부터 정신 차렸는지 모를 말대가리가 겨우 말을 꺼냈다.

“꺽정이 너라도 그렇게 잘 되었으니 아비는 기쁘다. 허나 네 말대로, 너한테 기대어 팔자에도 없는 양반 노릇 하다가는 언제 화를 당할지 모르지.

혼사로 말할 것 같으면, 이 아비가 먼저 물으마. 그 처자, 아차, 규수분을 만나 뵈었다면서? 너는 그쪽이 마음에 드느냐?”

“솔직히 말하면 내게 과분하다 싶소. 그리고 내 팔자에 주변 사람들이 편히 살기 어려울 텐데, 괜히 양갓집 규수 처지를 망치기는 싫고.”

“하지만 또 언제 네가 그런 양반댁과 연을 맺겠느냐? 차라리 가서 네가 천애고아라고 말해라. 그리하면 적어도 양반이 백정과 맺어졌다며 주변에서 손가락질은 안 하지 않겠느냐?”

“후... 나도 아버지 말이 맞다고 본다, 꺽정아. 이제 나도 고리백정 말고 번듯한 일을 하고 있으니, 비단도 이제 안 보내도 된다. 어차피 너도 멀쩡히 장성하여 어른 노릇 하고 있으니, 이제 그냥 모르는 사람으로 치고서 너 홀로 살아가도 되지 않겠느냐.”

“혼사 치르기 싫다 했잖소. 아버지랑 형님하고 연 끊기도 싫소.”

“혼인은 백년가약입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천륜을 끊으면서 성혼하는 것이 어찌 가당할까요.”

이이가 또 한 차례 끼어들었다. 그러나 말대가리는 결연한 표정으로 답했다.

“도련님, 하지만 우리네 천것들은 양반님네들과 어울릴 수 없습니다. 꺽정이가 정녕 도련님 댁과 통혼하게 된다면, 이렇게 하는 것이 가장 낫습니다.”

눈치가 없는 이이지만, 백정들이 양반을 어찌 대하는지는 이미 눈앞의 두 사람을 보며 충분히 파악하였다.

그리고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 임 당수가 얼마나 비범한 사람인지도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허나 비범함이란 말 그대로 범상치 않음이니, 나머지 꺽정이의 일가들에게까지 그런 비범함을 기대할 수는 없을 터.

“자, 보았지? 백정과 양반의 통혼은 안 된다. 우리 집안 사람들도 어렵다고 한다. 천륜도 끊을 수 없다. 그러니 혼담도 불가(不可).”

꺽정이가 뭔가 섭섭함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억지로 눌러가며 결론을 내렸다.

“백정과 양반이 통혼한 예가 아예 없나요?”

이이가 재차 묻자, 가도치가 조심스레 답했다.

“저희 사이에서 전하는 말로는, 옛날 폐주 시절에 죄 받고 도망하던 이교리(이장곤)라는 분이 백정 여인과 정분이 나서 나중에 첩실로 들였고, 정실로 올라가서 정경부인까지 받았다, 뭐 그런 얘기가 있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내가 여인을 취할 때 얘기고, 아예 제대로 혼사 치르는 것은 다르지 않겠습니까. 이교리댁 처갓집이 백정 신세 벗어났다는 얘기도 들은 바 없습니다.”

“에고야.”

“왜 ‘에고야’냐?”

“어쨌든 전례가 있다는 것 아닙니까? 누이동생 성정을 생각해보면, 저 얘기는 아예 안 꺼내는 게 나을 것입니다.”

“우리가 함구하면 되지... 에휴, 아니다. 네가 함구하길 기대하느니 차라리 서림이가 정승 되길 기대하겠다.”

‘서림이’와 ‘정승’을 꺽정이가 태연하게 얘기하니 가도치와 말대가리는 모두 깜짝 놀랐다. 새삼스레 그들의 아들 또는 아우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음을 재차 느낀 것이다.

“잠깐, 그렇지!”

어느새 답답함에 벌떡 일어나 마당을 몇 번 빙빙 돌고 있던 꺽정이가 불현듯 뭔가를 떠올렸다.

“형이 옛날 이야기를 말하다 보니 떠오른 것인데, 옛날에 우리 소싯적에 저기 뒷동네 곱사등이 할배가 그런 말 하지 않았소? 까마득한 옛날에 원래 저기 뒷산에 목장이 있었고, 거기서 말 키우고 소 키우던 게 우리네 백정이었다고?”

누군가 기록을 살핀다면, 그것이 고작해야 백여 년 전 일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만하면 백정들 사이에서는 족히 서너 대가 바뀔 만한 세월이었다. 글도 모르고 딱히 옛일 기억해보아야 좋을 것도 없다 보니, 이미 희미한 추억과 믿거나말거나 옛이야기로만 그 시절 일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들었던 것 같기는 한데... 그것과 이 일이 무슨 상관이냐?”

“이 혼사, 백정과 양반 통혼이 못할 일이라는 건 우리 모두 동의하지 않소? 그러니까 저쪽 규수댁만 단념을 시키면 되지.

영 터무니없는 조건을 걸어서, 그것을 따르지 않으면 혼사도 안 된다고 강짜를 부리면 그쪽도 단념할 수밖에 없을 게요. 흐흐.”

꺽정이 딴에는 아주 훌륭한 계책이라서, 절로 음흉한 웃음이 나왔다.

그로부터 며칠 뒤, 꺽정이는 의기양양한 채로 한양에 돌아왔다.

여전히 임 당수 기다리느라 양주목사와 아전들 모두 정신이 없는 사이, 양주 고을의 늙은 백정들 몇 명을 찾아다니며 그럴듯한 거짓부렁을 지어내고는 거기에 저의 입맛대로 몇 가지 황당무계한 말까지 집어넣은 것이다.

“제가 이것 모두 거짓말이라고 누이에게 털어놓지는 않을까 걱정은 아니 되시나요?”

“뭔 상관이냐. 내가 백정이지 네가 백정이냐? 백정들 사이에서 전해내려오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라고 우기면 누가 무어라 하겠느냐.”

그 아버지의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이명희에게 당당하게 헛소리할 생각에 꺽정이 입가에 웃음이 서렸다.

어쩌면 그때 보았던 고운 얼굴을 다시 본다는 생각에, 무심결에 입꼬리가 조금은 더 올라갔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꺽정이 본인은 극구 부인할 것이었다.

어느새 낯익은 골목에 접어들었다. 옆에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이이가 엉뚱한 소리를 한 것은 그때였다.

“그런데 말입니다, 임 당수.”

“뭣이냐.”

“제가 청석골 아랫말에서 스승님과 함께 공부를 하면서 온갖 서적을 다 섭렵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고금의 사서(史書)도 여럿 읽어보았는데, 어쩌면 임 당수가 지금 누이동생에게 하려는 말에 일말의 사실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싶습니다.”

“뭐, 사실이 무에 중하더냐. 정 그게 사실같다 싶으면 나중에 네가 책이나 하나 쓰던가.”

“그것도 좋네요. 『백정고(白丁考)』라.”

대문에 들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이명희가 나타났다.

도대체 사대부들이 남녀간 엄격하게 내외를 한다는 말은 누가 만들었는가. 하필 스승으로 보신 것은 황진이를 문하에 들였던 서경덕이요, 가장 친하게 지내는 양반 집안은 가풍이 특이하고 꺽정이 때문에 더욱 특이해진 사임당 신씨의 집안이다 보니 엉뚱한 오해를 품게 되는 꺽정이었다.

“다녀오셨나요? 집안의 어르신들께는 허락을 구하고 오셨고요?”

“그렇소.”

꺽정이가 답하니 명희 얼굴에 미소가 서렸다.

“어떤가요? 아무리 집안이 한미하다 하나, 가세를 크게 일으킬 수 있게 되었으니 그리 꺼리지는 않았을 듯한데...”

꺽정이가 이이를 한 번 돌아보고는 말했다.

“이것은 가법을 생각하면 본디 그대의 부모님 모셔두고 말하여야 할 내용이지만... 흠흠, 들어보시오. 어찌하여 백정이 천하다 손가락질받는지, 그대는 아시오?”

“글쎄요. 저는 규방에서만 지내었기에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세상에 처음부터 천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노비가 생긴 것은 기자가 팔조금법을 정한 이후이니, 백정 또한 비슷하지 않겠어요?”

“백정은 본디 전조에 우마(牛馬) 기르는 것을 업으로 삼으며 팔도를 떠돌아다니던 이들의 후예인데, 그 뿌리는 곧 거란과 몽고에게 수난당하여 이 땅에 의탁하게 된 여진인들이오. 즉 거슬러 올라가면 오랑캐다 그 말이지.

그리하여 백정은 객(客)이요, 본디 이 조선 땅에서 농사짓고 살던 이들은 주인되는 셈이라, 객이 주인보다 높을 수는 없는 법인데 그대로 세월이 지나다 보니 백정이 천하다는 소리를 듣게 된 것이외다.”

거짓부렁도 양주에서 돌아오는 길에 여러 차례 연습하다 보니 제법 술술 튀어나왔다. 그 옛날 목장에서 일했던 이들 또는 그 목장에서 말과 소를 훔쳐내어 저의 재산으로 삼았다가 국법이 바뀌면서 모두 빼앗겼던 이들의 후예들이 증언한 바를 짜깁기한 다음, 꺽정이 자신이 전생에 북변에서 지내면서 보고 들었던 여진 야인들 삶을 덧붙인 것이었다.

어색하지 않게 꾸며서 말하는 데 집중하다 보니, 이명희가 눈을 반짝이며 듣고 있음은 미처 알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긴 세월이 흘러, 백정들 사이에 전해오던 예법은 거의 잊히게 되었소. 하다못해 백정들 스스로 그 이름을 잊고 그냥 ‘백정’이라 부르고 또 불리게 되었으니, 그 예법이 남으면 얼마나 남았을까.

그러나 백정이 양반과 통혼하는 일은 그 예법을 되살려 빠짐없이 시행하기에 족한 경사라, 마땅히 거기에 따라야 할 것이오. 이를 따르지 못한다면 차라리 혼례도 치르지 않음이 마땅할 것이라고, 우리 양주 백정의 가로(家老) 분들은 입을 모아 말씀하시더이다.”

“백정의 예법이라니... 그것이 무엇인가요?”

“별 건 없소. 그저 조상들 하던 대로 하는 것이지. 사내든 아낙이든, 백정은 본디 말 타고 활 쏘며 천하를 누비던 이들이었소. 그러니 혼약을 할 때도 그것으로 상대가 통혼하기에 족한지를 가리곤 하였다더군.

나는 무예로는 어디 가서 지지 않을 만한 사람이오. 그 배필이 되려면 그대도 능히 기사(騎射, 말 달리며 활 쏘기)의 재주는 보여야 하지 않겠소?”

“아...”

“그렇소. 안타깝지만 우리 인연이 이러하니, 어쩔 수 없소이다.”

꺽정이 말투에 은근히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것이 느껴져 – 꺽정이 본인도 모르는 일이었다 – 명희는 꺽정이 말이 사실이라 믿게 되었다.

꺽정이 또한 잘 되었다 여기고서, 이원수와 신씨 앞에서 똑같은 거짓부렁을 털어놓고서는 창덕궁에 돌아가 홀로 술병 하나를 비웠다.

급히 이원수의 집으로 오라는 기별을 받은 것은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이미 여러 차례 넘나든 솟을대문 문턱을 넘자마자, 안쪽에서 갑작스럽게 냉풍이 불어오는 듯하였다.

그 냉풍의 근원, 신씨 앞에 나아가니, 따가운 눈총이 꺽정이의 두꺼운 낯을 뚫고 느껴졌다.

“이보시오, 임 당수.”

“흠흠, 무슨 일이오이까.”

“그때 양주에서 돌아와서 했던 그 이야기, 참이었소?”

“참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오? 어차피 가당치 않은 혼사잖소.”

“사실 여부가 극히 중하게 되었으니 이리 묻는 것이오.”

“그 무슨 말씀이시오?”

영문 모르는 꺽정이가 되묻자, 무어라 쏘아붙이려던 신씨가 끝내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말했다.

“후... 뒤뜰에 가서 직접 보시오.”

사람을 함부로 오라가라 한다고 불평할 계제는 아닌 듯하여, 그대로 뒤뜰로 향했다.

그리고 여기에 있으면 안 될 법한 사람과 마주쳤다.

“임 당수. 잘 오셨소.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족녀(族女)가 하도 간곡히 청하니 재주껏 가르치고는 있지만서도...”

머나먼 친척이라 하여 졸지에 이 일에 끌려들어오게 된 한량 이정이 머리를 긁적이고,

“아, 당수님 오셨나요? 얼른 낭군으로 모시고자 이렇게 힘쓰고 있답니다.”

열심히 몸을 놀린 끝에 발그레한 홍조가 두드러지게 된 – 하필이면 그게 또 퍽 아리따워, 꺽정이 마음을 심란케 하였다 – 이명희가 방긋 웃었고,

뒤뜰 맞은편, 화살 자국 가득한 과녁 옆에서는 조랑말 한 마리가 풀을 뜯어먹다가 ‘푸르륵’ 소리를 내었다.

예로부터 거짓말은 후과가 좋지 않은 법이었는데, 꺽정이는 그것을 비로소 실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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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의 가족관계에 대해서는, 1566년 이원수 사망시에 집안의 재산을 나누었던 화회문기가 남아있기 때문에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조선 중기까지 일상적이었던 남녀 균분상속에 따라 이원수의 유산을 나누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매창이라는 별호가 전해지는 이이의 첫째 누이 – 기생 겸 여류시인 이매창과는 다른 인물입니다 – 를 비롯하여 총 4남 3녀였던 이이의 형제자매들이 1566년까지 모두 생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이의 맏형 이선은 생원까지만 오르고 그 이상의 벼슬을 하지는 않았는데, 두 아들이 모두 이이의 친우 성혼의 문하에 들었던 것을 감안하면 아우 이이와도 교분이 깊었던 듯합니다.

둘째형 이번은 따로 과거를 보지 않았고, 별도의 기록도 없는 것으로 보아 그리 현달하지는 못했던 듯합니다. 그러나 이이가 남긴 여러 글을 잘 보관하여 이이의 사후 『율곡집』이 간행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본디 이름이 위(瑋)였지만 1566년 이후 어느 시점에서 이름을 바꾼 막내 이우(李瑀)는 형제자매들 중 가장 장수하여 광해군 연간에 군자감정 벼슬까지 지냈고, 시서화뿐 아니라 거문고에도 조예가 깊어 사절(四絶)이라 불렸다고 전해집니다.

작중에 이명희로 등장한 이이 바로 아래의 동생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바가 거의 없지만, 홍천우(洪天佑)라는 사람과 결혼하였고 1566년 시점에서 이미 과부였음이 화회문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강절교위 조대남과 혼인한 이이의 첫째 누이 이매창, 충의위 군관 윤섭과 혼인한 둘째 누이 등의 예를 보았을 때, 아마 집안의 여계 내력대로 한미한 집안에서 데릴사위를 들이지 않았을까 추정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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