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67화 (67/259)

22. 짚신의 짝 (3)

금생과 전생을 통틀어 꺽정이는 활쏘기에 그리 능하지 못하였다. 활을 쏠 겨를이 있으면 그냥 바윗돌을 들어서 던지거나 번쩍 달려가 칼을 휘두르는 쪽이 더 속편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꺽정이 눈에도, 과녁에 심상치 않을 많큼 구멍이 많이 나 있는 것이 들어왔다.

“허, 제법 잘 쏘는구려.”

“연습했지요.”

이명희가 자랑스럽게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말타기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데, 활은 제법 팔에 익더라고요. 이대로 팔의 힘만 기르면 강궁도 당길 수 있을 것 같아요.”

불현듯 검무 추던 이명희의 어머니 모습이 떠올랐다. 하기로 마음먹으면 끝내 해내고야 마는 것이 집안 내력이었다.

“후... 그리도 이 사람의 배필이 되고 싶소?”

“안 될 건 또 뭔가요.”

둘 사이에 범상치 않은 말이 오감을 눈치챈 이정은 헛기침 한 번 하더니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러나 두 남녀의 시선은 서로만을 향하고 있었으므로 이를 알아채지 못하였다.

“백정은 뿌리가 오랑캐라고 하셨지요? 차라리 잘 되었지요. 중화의 여인이 권세를 부리면 당무후(唐武后, 측천무후)와 같이 되지만, 만이(蠻夷)의 여인이 현달하게 되면 소태후(蕭太后)와 같이 될 수도 있는 법이지요.”

“소태후는 거란 사람이오. 여진이 아니라.”

스승 서경덕에게 요나라 시절 소태후라는 황후가 전장에 나가 송나라를 꺾고 국운을 크게 일으켰다는 이야기 들은 바 있던 꺽정이가 딴지를 걸었다.

허나 돌아오는 것은 미소뿐.

“낭군의 학문이 참으로 깊으니 소녀는 기쁩니다. 그리고 어쨌든 같은 오랑캐잖아요.”

“반가의 여식이 스스로 오랑캐 되기를 바란다니, 여간 말세가 아니오.”

꺽정이가 한숨 푹 내쉬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솔직히 말해보시오. 대체 뭘 보고 이렇게 내게 매달리는 게요? 내 양반들 집안 사정은 잘 모르지만, 혼처를 알아보려면 다른 데서도 족히 알아볼 수 있을 텐데?”

“사내가 아리따운 여인을 좋아하듯 여인도 훤칠한 대장부 좋아할 수 있는 법이지요.”

“내 진지하게 묻는 것이오.”

“저도 나름 진지한데... 좋아요. 그러면 말씀드리지요.”

명희가 활과 활통 내려두고 꺽정이 옆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그 곁에 털썩 앉았다.

“백정과 규수가 같은 점이 있는데, 무엇인지 아시나요?”

“무엇이오?”

“평생 굴레가 씌워진 채로 산다는 것이지요. 어머니조차 가문이 훌륭하고 재주가 빼어나시어 그 굴레를 조금은 풀어내셨지만, 아예 벗어던지지는 못하셨지요. 하지만 임 당수는 그것을 아송두리채 부수고 여기까지 왔을 뿐 아니라, 남의 굴레도 덩달아 깨부수고 있지 않나요?

굴레를 벗어던지기는커녕 지금껏 그런 굴레가 있는 줄도 잘 모르고 있던 사람으로서는, 그러니 임 당수가 좋을 수밖에 없지요. 그리고 그 곁에서 함께한다면 어디까지 같이 갈 수 있을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고요.”

강릉에 머물 때 황해도에서 가끔 전해오는 서한을 받아보며 홀로 생각하고, 파주에서 어머니와 오빠를 만나 생생한 이야기 들으며 더욱 나래 펼치며 상상하였다.

사람으로 태어나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세상. 그곳에서 자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어디까지 날아갈 수 있을까? 마침내 무엇을 남기고 갈 수 있을까?

지난 며칠, 난생 처음으로 시위를 당겨보고, 고작해야 조랑말 위에 올라타 약한 활을 쏠 뿐이지만 마음만으로는 바람과 같이 되었다 느끼면서, 스스로 묻고 답하면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었다.

“두렵지는 않소?”

“두렵다니요?”

“나는 이 나라를 앞으로도 계속 뒤집어나갈 심산이오. 힘 닿는 데까지 달리다 보면 발길이 북변 야인의 땅으로 향할 수도 있고, 대국 북경까지 갈 수도 있으며, 어쩌면 바다 건너 왜국까지 향할지도 모르지.

그리고 그 길에는 반드시 사람의 피가 흐를 것이오. 내 두 주먹과 칼 한 자루로 앞길 막는 놈들을 깨부수며 나아갈 것이니. 정말로 소태후처럼 여인의 몸으로 그런 싸움터에 나아가야 할 수도 있다는 말이오.”

“어머니께서도 검무를 배우시더니, 오라버니를 해치려던 자객을 손수 베셨다고 들었어요. 부창부수(夫唱婦隨)가 올바른 부도(婦道)라면, 지아비가 칼을 휘두를 때 곁에서 활을 쏘는 것이 오히려 합당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애초에 두려움의 문제가 아닌 걸요.”

이명희의 손이 어느새 꺽정이의 어깨에 닿아 있었다.

“아무리 두려워도, 한 번 보고 들은 것을 되돌릴 수는 없어요. 이대로 제가 규중에 돌아간들 이미 떠난 마음이 돌아올 수 있을까요? 마음은 이미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날아올랐으니, 그 바람 불어넣은 이가 책임을 져야겠지요.

그러니 제가 달리고 싶을 때 든든한 준마가 되어주세요. 그러면 저도 낭군께서 배 타고 나아가실 때 거센 물살이 되어드릴게요. 그런 사내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반석이 되고 바람이 되어 받쳐드리고 밀어드릴게요.”

“아...”

덩치 큰 사내는 조막만한 여인 옆에서 그저 입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벌어진 입은 곧 인연을 만나, 자연스레 덮이었다.

“잘 이야기가 되었는가 물을 필요도 없겠소.”

그저 말만 나누고 왔다고 치기에는, 이정이 어색한 몸가짐으로 불편하게 마당을 돌아다닌 지가 너무 오래되었다.

그것을 모르지 않는 사임당 신씨가 뒤뜰에서 돌아와 애써 태연한 표정 짓고 있는 꺽정이에게 말했다.

“매파를 보낸 것만으로도 도성 전체가 떠들썩해졌소. 하물며 반가의 여식이 말을 타고 습사(習射, 활쏘기 연습)한다는 것은 어떻겠소?”

사대부 여인이 말을 타는 것 정도야, 말군(승마용 겉바지)만 잘 차려입으면 누구도 무어라 하지 않았다. 여인의 몸으로 무예를 닦는 것도, 당장 신씨 본인부터 여간한 사내 한둘쯤은 능히 제압할 만한 솜씨를 지니게 되었지 않은가.

하지만 과년한 반가 규수가 규중에서 가만히 여덕(女德)을 닦는 대신 무과 준비하는 것처럼 말 타고 활 쏘는 법을 제대로 배운다는 것은 생판 다른 이야기였다.

자칫하면 ‘선달 각시’ 운운하며 장안의 화젯거리가 될 것이요, 혼처는 절로 끊길 터.

허나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임 별장 눈빛은 여전히 뒤뜰을 향하고 있었으므로, 신씨는 한숨만 푹 내쉴 뿐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일이 그 옛날 그의 부군이 이기에게 청탁하여 봉산군수 자리를 얻었을 때부터 시작한 것이니, 신씨 자신의 내조 잘못함을 탓해야지 누굴 탓하겠는가.

(물론 정말로 천지신명이라도 꿈에 현몽하여, 그간 있던 일을 없던 것으로 돌려주마 제의한다면 그때는 신씨도 사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님께서... 날 많이 좋아하시는 듯하오.”

“그래서 이제 어찌할 테요?”

아직까지 입가에 온기가 느껴지는 듯하여 정신을 못 차리던 꺽정이가, 신씨의 엄중한 물음에 겨우 현실로 돌아왔다.

“이미 무반(武班)으로 당상관에 올랐으니 임 당수 그대도 양반의 대열에 드는 셈이오. 임 당수의 말 한 마디면 그러니 바로 양반이 될 수 있소. 아무리 집안이 한미하다 해도, 능히 내력을 꾸미고 사실을 감추어 실제로는 은거한 명문가였다고 할 수도 있소이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민망하지만... 임 당수 정도면 우리 집안은 물론이요 파주 밤골의 문중 사람들 사이에서 견주어도 이미 지극히 영달한 축에 들지. 안사람 말이 맞소이다.”

이원수도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꺽정이는 결연한 표정으로 반대의 뜻을 밝혔다.

“그야 그렇겠지. 하지만 따님은 내가 그런 쉬운 길 가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오. 솔직히 말하면 나도 그렇고.”

꺽정이 그는 저승에서 돌아온 이래 지금까지 남들이 가지 않으려는 험난한 절벽만 골라서 넘어왔다.

그리고 이제 그것을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좋다고 하는 짝이 생겼다.

어찌 여기서 물러나겠는가. 그간 주저하던 자신이 새삼스레 어리석게 느껴진다. 물론 방금 전 뒤뜰에서 있던 일로 심기일전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생각할 일도 없었겠지만.

“나는 양반이 되지 않겠소. 천한 백정의 자식으로서 반가의 여식을 안사람으로 맞이할 테요.

험담하는 놈들은 주먹으로 짓뭉개버리겠소. 박살내겠다 공언한 양천의 구분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나아가 양민이 오히려 백정을 부러워하게 만들어버리겠소.

그만하면 따님을 이 내게 주어도 괜찮다 싶지 않소?”

신씨 부부가 서로 몇 번 눈길을 주고받더니, 부부가 일심동체로 한숨을 푹 쉬었다.

“그것이 가하겠느냐 묻는 것은, 임 당수 앞에서는 별 의미가 없지. 봉산에서 보고 들은 것이 있으니 이를 잘 알고 있소이다.

임 당수 그대가 정녕 명희를 책임질 수 있다면, 이번 혼담을 두고 세간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오든 이제 우리는 개의치 않겠소.”

평산 신씨 집안에서 무언가 볼멘소리가 나온다면, 사임당의 부친 신명화가 기묘년 명현에 든다는 것만 슬쩍 꺼내면 금방 제압이 될 것이다.

덕수 이씨 집안에서는, 풍성부원군 이기의 원수를 갚아준 임거정을 두고 감히 무어라 말할 수도 없거니와, 파주 밤골이 한양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 오밤중에 임거정 본인이 마당에 나타나는 꼴을 두려워해서라도 함부로 떠들지 못할 것이다.

“단, 그럴듯한 계책을 가지고 오시오. 그리한다면 혼사는 물론이요, 혼인의 예식까지 모두 임 당수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하여주리다.”

중추부에서 국정 논하는 것이 의외로 편리하다는 사실은, 이제 조정 중신들 사이의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가고 있었다.

임 당수와 흑의군을 좋게 보지 않는 이들조차, 이렇게 국정 전반을 총괄하는 기구가 하나쯤 있어야 함을 인정하고, 앞으로도 중추부는 지금과 같이 운영해야 한다고 말하곤 하였다.

허나 편리하다 함은 그뿐이 아니었다. 어전에서 아뢰고 하교를 받아와야 할 사안에 대하여 먼저 중신들끼리 논의할 수 있으니, 업무를 처결하는 것이 자못 쉬워졌으며, 더구나 궁궐 안의 빈청(賓廳)이나 편전에서 회의할 때에 비하여 거쳐야 할 절차도, 갖추어야 할 몸가짐도 훨씬 간결하였다.

“자, 이리하여 금일 마지막 사안인 일본국 사절들의 안건까지 모두 논의하였소. 혹 중신들 가운데 더 논의할 바가 있다 여기시는 이가 있다면 지금 말씀해주시오.”

영중추부사 심연원이 금일 모임을 슬슬 마치기 위해 운을 떼었다.

임거정이 기묘명현 신원과 승과 복설이라는 거창한 안건을 던진 이래로 그만큼 묵직한 일이 중추부에서 논의되지는 않고 있었다.

애초에 그만큼 중대한 사안이 자주 중추부에서 오르내린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문제였다.

그러므로 오늘 모임도 그럭저럭 싱겁게 끝나는 듯하였다.

“흠흠, 한 가지 걱정되는 바가 있소이다.”

욕심이 많고 처첩과 자식들을 둘러싸고서 물의가 끊이지 않으나, 그 문장 하나만은 조선국 제일이라 일컬어지기에 물갈이된 조정에서도 예조판서 자리를 꿰차고 있던 정사룡(鄭士龍)이 손을 들었다.

“지금 왜인들이 동래부에 머물고 있는데, 듣기로 그곳까지 『공보』가 널리 전해져 사족은 물론이요 호민(豪民, 살림살이가 넉넉한 백성)들 중 글을 얼추 읽는 자들도 받아서 보고 있다 하였소이다.”

왜인들은 때로는 일본국왕(쇼군) 명의로 찾아올 때도 있고, 또 때로는 그 거추(巨酋, 다이묘)의 이름을 걸고 찾아오기도 하는데, 기실 입조는 핑계요 무역이 본뜻이었다.

헌데 이번에는 갑작스럽게 대마도주 종씨(宗氏, 소 씨)와 대내전(大內殿, 오우치 씨), 소이전(小貳殿, 쇼니 씨)이 동시에 사신을 보내왔고, 동래부에서 치계한바 들고 온 물목도 평소보다 빈약하여 급히 찾아온 기세가 역력하였다 하였다.

“생각건대 『공보』는 그 취지가 나쁘지 않으나 엄연히 군국의 기무(機務)를 담고 있는데, 이것이 왜인들에게 들어가게 되면 자칫 국사에 해가 될까 두렵소이다. 왜관으로 『공보』가 들어가지 않도록 막고, 또 그 내용을 왜인들에게 전하지 못하도록 각별히 주의시키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정사룡 본인의 평판과는 별개로 나름대로 타당한 지적이라, 중신들이 고개를 하나둘씩 끄덕였다. 좌중을 한 차례 둘러본 이준경이 꺽정이에게 물었다.

“『공보』는 본디 조보의 내용 중 백성들이 흥미롭게 여길 만한 것을 추려내어 간행하는 것이니, 정말로 중대한 사안이라면 애초에 조보에 오르지 않을 것이요, 혹여 기밀스러운 일이 실린다 하더라도 간행되기 전 능히 막을 수 있을 것이외다. 임 당수께서는 어찌 보시오?”

꺽정이는 고작 첨지사로서 이 자리에 참석한 이들 중에서는 가장 품계가 낮았지만, 중추부의 그 누구도 실상을 모르지 않았으므로 곧 모두의 이목이 꺽정이에게 몰렸다.

“조선국 기강이 기강일진대, 막으려 한들 막을 수 있겠소? 아예 동래부로 가는 『공보』를 모두 회수해버린다면 모를까.”

“참으로 명안이외다.”

저의 말에 찬동하는 줄 안 정사룡이 추임새를 넣었다. 꺽정이의 묵직하면서도 거친 화법에 익숙하지 않았던 중신들 중에는 아직도 이러한 실수 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대신, 이미 백성들이 낸 『공보』 값은 모두 나라에서 갚아주어야 할 것이오.”

결국 그 말에 정사룡의 제의는 유야무야되고야 말았다. 민주당 ‘사업’ – 『정론보』에서 쓰인 이후 이제는 사대부들도 널리 쓰는 말이 되었다 - 을 함부로 건드리기는 무엇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그날의 중추부 모임이 파하고, 중신들이 삼삼오오 자리에서 일어나 저들 갈 길을 가는데, 이준경 한 사람은 남아서 꺽정이를 기다렸다.

“임 당수의 집안에 곧 크나큰 경사가 있으리라 들었네.”

“소식이 퍽 빠르시오.”

“그럴 만한 소식 아닌가? 갑작스레 반가의 여식이 말 타고 활 쏘는 연습을 한다 하니, 소문이 아니 퍼질 수 없는 일이었다네.”

이준경이 이런 잡스러운 소문을 입에 쉽게 담을 사람은 아니었으므로, 꺽정이는 영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들어보게나. 금헌(琴軒) 선생께서 소싯적 화를 당하셨을 때 함흥 양수척(고리백정)의 무리 가운데 의탁하셨다는 이야기는 알음알음 벌열가 사이에서도 전하고 있었다네.

그 후실 되시는 정경부인 양씨가 기실 양수척의 딸이라는 것은 어리석은 백성들이 떠드는 헛소문이지만, 금헌 선생이 후에 함경도관찰사로 봉직하시면서 함흥 백정들을 크게 챙겨주셨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라네.

그 부인 이야기도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겠지. 세 사람만 입을 맞추어도 없던 범이 생기는데 (삼인성호三人成虎) 백정 정경부인은 어찌 불가할까.”

“옛이야기는 갑자기 왜 꺼내시오?”

“요새 반가 사이에서 금번 혼사를 두고 무어라 소문 도는지를, 임 당수 자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네.”

민주당 임 당수가 어느 명문가의 얼자가 아니라 일개 백정이었다는 소문이 만일 이번 혼사 이전에 퍼졌더라면, 곧장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치부되었을 것이다.

아무리 정국을 주도하는 것이 급하더라도 그러한 유언비어를 퍼뜨려서야 되겠느냐며, 민주당에 반대하는 사림 사이에서 엉뚱한 이준경을 탓하는 자가 나올 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 그런데 ‘이전에는’ 그랬을 것이라 하시면, 지금은 다르다는 말씀이시오?”

“그렇지. 그때와는 또 정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가. 금헌 선생도 기묘년 명현 중 한 분이시니.”

“엥, 잠깐. 그랬소?”

꺽정이 반응을 보고서, 벌열가 사이에 도는 소문을 은근히 믿고 있던 이준경은 자신이 틀렸음을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 오히려 백정들 사이에 의리가 있다고들 하는 것 아니겠는가? 선비들이 미처 성덕에 누가 될까 두려워 꺼내지 못하였던 일을 먼저 꺼내었으니. 정녕 임 당수 그대가 백정이라서 혼사에 있어 예를 갖주치 않는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떠들지언정 그렇게까지 나쁘게 보지는 않을 것일세.”

어찌하여 반가의 여식이 갑자기 무과 준비를 하는가? 무과 준비가 아니라 백정의 혼사 예법이 본래 그렇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웬 백정의 예법을 말하는가? 임 당수가 실은 백정이라서 그렇다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임 당수의 정체에 대해 관심 많던 판에, 백정과 양반이라 하니 누군가 선대의 명신(名臣)이었던 이장곤의 일화를 떠올렸다.

“그리하여 의리를 잊지 않고 권병(權柄)을 잡자마자 기묘명현의 신원을 말하였고, 그 덕을 입게 된 신씨 부인와 수운판관 이 공이 혼담을 넣게 되었다... 이런 것이지.”

그러나 이미 마음을 정한 꺽정이는 영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선비들은 비례물청(非禮勿聽)이요 비례물언(非禮勿言)인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오? 그런 잡스러운 소문을 말씀하실 줄이야.”

“임 별장. 내 오죽하면 그리하겠는가. 이처럼 좋은 풍문이 돌고 있으니, 차라리 양반이 되시게.”

임거정의 재주를 여전히 아깝게 여기던 이준경이었기에 여전히 미련이 남아있던 것이었다.

“싫소.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소. 오히려 그리 말씀하시니, 무슨 양반의 덕을 입은 의리 있는 백정 소리를 아니 듣고 싶은 마음만 더 커지는구려.”

꺽정이를 하루이틀 겪어본 이준경이 아니다. 그 고집 어떠한지를 잘 알았으므로, 곧장 단념하였다.

그렇게 꺽정이는 이준경이 나름 깊게 고민하여 내놓은 충고를 단호하게 내치고서 중추부를 나섰는데, 앞을 가로막는 사람이 또 있었다.

이제 슬슬 질리려고 하는 그놈의 방울소리. 다름 아닌 조식이었다.

“『정론보』에 허황된 풍문이 실리지 않도록 확인하러 왔다네.”

“무어, 내가 백정이라는 것 말씀이시오?”

“사실인가?”

“그럼 내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짓이겠소?”

그랬는데 조식은 오히려 반색하는 것 아닌가.

“이보게, 임 당수. 이것은 참으로 훌륭한 기회일세! 이 나라의 잘못된 풍습을 고치고 마침내 올바른 법도를 널리 세울 수 있는 기회! 하늘이 돕는다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어르신, 혹시 어디 불편한 곳 있으시오?”

“들어보게. 나중에 실제로 혼사를 올리게 되면, 반드시 친영(親迎)의 예법을 따르도록 하게나.”

“친영이 무엇이오?”

“대단한 것은 아니나 마땅히 따라야 하는 것이지. 그럼에도 정작 지켜야 할 자들이 아니 지키는 것이기도 하고.

신랑이 신부를 맞아들여 그 집에서 예를 치르고 새살림 또한 신랑의 집에서 시작하는 일이라네. 무릇 남녀와 부부가 유별하니, 마땅히 음(陰)이 양(陽)을 따라야 하는 법. 이는 『주자가례(朱子家禮)』에도 나와 있네.”

예법에 밝았던 서경덕의 제자 꺽정이는 『주자가례』가 무슨 책인지 얼추 알고 있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주자가례』에 나와 있다? 그런데 왜 사대부 집안들은 다들 색시 있는 쪽으로 장가를 가는 게요?”

“바로 그게 문제라네. 아국은 거의 모든 문물이 중화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혼사는 남귀여가(男歸女家, 신부 집에서 혼인하고 신혼생활을 함)의 속례(俗禮)를 벗어나지 못하니 사대부들도 다르지 않네.”

백정들이야, 그냥 살림살이 형편에 따라 남자가 여자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가기도 하고 그 반대로 살기도 하므로 정해진 도리는 없었다.

그런데 정작 사대부들이 그들이 숭앙하는 주자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니 퍽 놀라우면서도 우스운 일이었다.

그제야 꺽정이도 조식의 노림수를 짐작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한낱 백정으로서 그 친영인지 뭣인지를 따른다면...”

“그렇지! 나라 안의 모든 사대부들이 그 소식을 듣게 되면 마땅히 가례(家禮)를 고칠 것이야.”

곰곰이 생각하던 꺽정이가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양천의 구분을 깨부술 수 있는 단초 하나가 눈앞에 보이는 듯하였다.

“좋소, 어르신.”

“참 잘 생각하였네!”

“허나 맨입으로는 아니 되오. 내가 무슨 얼자 따위가 아니라 고작 백정일 뿐임을 꼭 그 『정론보』에 써서 알려주시오.

그러면서 백정이 결코 천하지 않으며, 다만 그 출신과 역분(役分)이 조금 다른 양민일 뿐임을 널리 설파해 주시오. 어르신도 잘 아는 밤골 도령, 아차, 이이 그 사람이 이쪽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궁구한 바가 있는데, 그의 글을 싣는 것 또한 한 가지 방도가 되겠소.”

“으흠... 잘 알겠네.”

“고맙소.”

『정론보』까지 함께한다면 『공보』 하나에 써서 알리는 것보다 훨씬 효험이 좋을 것이다. 물론 서림은 또 입이 한 번 툭 나오겠지만, 꺽정이가 지금 즉흥으로 내놓고 있는 구상의 전모를 듣는다면 생각이 바뀔 것이다.

사람이 거짓말을 했으면 책임은 져야 하는 법. 허나 거짓 자체를 비틀어 참으로 만들어버리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여진족의 혼례고 뭣이고 아무런 근거 없이 거짓부렁으로 지어냈다 한들, 전국의 백정들을 한데 모아 말을 맞춘다면 거짓이 들통날 일도 없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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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소태후로 알려진 예지황후(睿智皇后)는 요 경종의 황후이자 요 성종(聖宗)의 어머니로, 요나라의 기틀을 다진 것으로 유명합니다. 애초에 황제는 야율씨, 황후는 소씨(솔률씨)에서 독점하던 요나라였기에 대부분의 황후가 소씨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지황후 홀로 후대에 ‘소태후’로 알려지게 된 것만으로도 그 비범함을 알 수 있지요.

특히 1004년 어린 아들 성종과 함께 북송과의 전쟁에 나가, 송나라 군대를 패퇴시키고 마침내 (송에게는 굴욕적인) 전연의 맹(澶淵之盟)을 맺은 것, 그리고 거란과 한족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 구축을 추진하고 내정을 다짐으로써 아들 성종 대에 요나라가 – 고려와의 전쟁을 제외하면 – 번영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여러 업적을 남겼습니다.

조식이 언급하는 친영례는 본디 중국 고대의 혼인 예법이었던 것이 『주자가례』를 통해 정립된 것으로, 한반도에 전해 내려오던 데릴사위제와 그 후신이라 할 수 있는 남귀여가혼 전통과는 배치되었기에 사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착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특히 문제가 되었던 것은 성혼 첫날 신부집에서 남녀가 합방한 다음 사흘째 되는 날에 양가 부모가 상견례를 하는 당시 남귀여가혼 전통이었는데, 16세기 사림 사이에서는 이것만이라도 수정하여 합방 전 상견례를 하도록 하는 이른바 반친영(半親迎) 예식이 고안되었습니다. 서경덕이 이것을 창시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 실제로는 그랬을 가능성은 낮습니다 - 조식과 이황 역시 자녀들의 혼례에 이를 따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데릴사위 풍습은 물론이요 시댁에서의 신혼생활 자체가 사족들 사이에서 고착화되어 있었기에 반친영은 널리 확산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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