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거문고 줄을 고쳐 매다 (3)
경제사를 설치하는 일로 도성이 한창 시끄러울 무렵. 어느새 달이 바뀌어 이월이 되니, 흑의군은 약조한 바를 지켜 그 직을 내려놓고 경복궁을 나오게 되었다.
그마저도 예 따위 지키지 않아, 오늘부로 더는 별장이 아니게 된 꺽정이가 그 무리 모아놓고서,
“임금님, 우리는 이만 물러가 보겠소.”
하며 고개 꾸벅 숙이고, 그 뒤에 모인 흑의군 졸개들은 저들 두령이 저러는 것을 보고서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두령의 예를 따름이 마땅하다고 금새 결론짓고서는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안녕히 계십쇼!”
뒤에 남은 것은, ‘저놈 끝까지 저러고 간다’라며 궁시렁대면서도 꺽정이에게 벌 주라는 말은 아니하는 임금. 사고뭉치들 떠나는 것 보며 다리에 힘 풀리는 내관들. 임 당수나 흑의군 사람들 중 은근히 연모하는 이가 있었기에 끝내 떠나가는 사람들 뒷모습에서 눈을 못 떼는 궁녀 몇몇.
그리고 지난 한 해 동안 자신이 적은 사초(史草)가 『실록』으로 편집되는 일을 목도하지 않도록, 부디 주상께서 저들보다 장수하시길 기원하는 사관들.
그렇게 조선국 개국 이래, 아니, 어쩌면 이 땅에 임금이란 것이 선 이래 궁궐을 숙위하던 무리 중 단연 가장 특이하다 할 만한 자들이 광화문을 나섰다.
그처럼 흑의군이 위풍당당하게 오와 열 맞추어 궁을 나서니, 육조거리에 구경꾼 모여들어 정예한 기세에 찬탄을 금치 못하였다.
과연 두 해 전 도성을 쳐서 무너뜨린 이들답지 않은가? 요새 좀 편하다고 흑의군 사람들이 조금 마음 놓을 것 같으면 곧장 달려들어 결딴을 내던 임 당수 덕에 이러한 기세가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 리 없는 구경꾼들은 그리 떠들곤 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위엄 갖추며 길을 나선 임꺽정과 흑의군은 육조거리와 광통교를 지나...
“자, 고생들 많았다! 부어라!”
“마셔라!”
술통으로 직행하였다.
민주당 당청에서 큰 잔치를 열기로 하였던 것이다.
이미 양주 벌판 혼사로 크나큰 재정의 출혈을 겪은 바 있던 서림이었기에, 고작 수백 흑의군(과 슬그머니 저들 일 내려놓고 술자리에 끼는 사업당 식구들)이 벌이는 잔치 정도는 가볍게 넘어가 주었다.
더구나 이번 경제사 일로 또 어마어마한 이문 생기게 되었으니, 임 당수가 잔치 한 번 열어달라 하는데 매몰차게 아니 된다 하기도 무엇하였다.
그렇게 술자리 거나하게 벌어져 밤이처럼 술 약한 놈들은 슬슬 얼굴 벌게질 무렵, 꺽정이가 졸개들 사이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는 슬슬 저기 모주네 쪽에 갈 터이니 너희끼리 잘 먹고 마시거라.”
“높으신 분들끼리 무슨 옥액경장(玉液璚漿, 귀한 술의 통칭)을 드시려 그러십니까?”
꺽정이 앞에서 문자 쓰는 재미를 붙인 오막손이가 토를 달았다.
“아니꼬우면 네놈들도 공 세워서 높이 올라오던가.”
“지금도 족히 높지 않습니까요? 조선국 사내가 되어서 우리처럼 궁궐 안에서 지내보려면, 골방에서 몇 년을 공자왈맹자왈 외워서 과거에 급제하거나, 아니면 하초(下焦, 배 아래쪽)의 그것을 싹둑! 잘라내야 할 텐데, 우리는 글공부도 아니 하고 신체도 멀쩡한 채로 임금님 곁에 있다 왔잖습니까.”
“와하하! 그 말 옳다! 오막손이가 웬일로 맞는 말을 한다!”
“과거가 별거냐! 고갯길 주인 노릇하던 우리도 궁궐 구경을 하는데!”
벌써 흥 오른 몇몇이 추임새를 넣으니, 어느새 꺽정이는 내버려 두고 저들끼리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당청 안쪽, 서림이가 기거하는 안마당에서는 조금 더 점잖은 사람들이 모여서 술판 벌이고 있었는데, 면면을 살피자면 상석에는 연배로 가장 위에 있는 병해가 앉아있고, 그 옆에 이지함과 서림이, 그리고 허엽과 박순 등이 있었다.
“스님이 술 마셔도 되오?”
“보아라, 이놈아. 이것이 어딜 봐서 술이냐?”
병해 보자마자 꺽정이가 트집을 잡았는데, 이를 예상한 병해는 저의 잔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엥? 정말이네? 그럼 이건 뭐요?”
“이것은 차라는 것이다. 정신을 맑게 해주고 잠을 쫓아주지. 내가 소싯적 전국 떠돌아다닐 때 남도 어느 산사에서 마셔본 뒤로는 처음인데, 여전히 향이 좋구나.”
“엇, 그게 진짜 차입니까? 듣기로는 저기 대국 강남에서만 난다고 했는데...”
병해가 술 대신 다른 것을 마시고 있는 줄은 알았지만, 그 대신 잔에 들어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전혀 짐작 못하고 있던 서림이 놀라서 물었다.
“별감 그대는 내가 무슨 땡중이라도 되는 줄 알았는가?”
병해가 놀리듯 물으니, 각미사는 물론이요 위세 높은 보우조차 추앙하는 병해대사를 어렵게 여기는 서림은 절로 움추러들었다.
“그건 아닙니다만...”
“올해 승과 때문에 상경한 휴정(休靜)이라는 이가 선물한 것일세. 나라 안에서 차의 맥이 거의 끊기기는 했지만, 아직 남도 산속의 선찰(禪刹)에서는 그 옛날 조주(趙州) 화상의 끽다거(喫茶去)를 이어가고 있다지.”
그때, 벌써 거나하게 취한 박순이 끼어들었다.
“오, 그렇습니까? 일본국은 여전히 불도를 숭앙하니, 그 차도 우리가 교역할 때 쓸 수 있겠군요. 수산(이지함) 형, 어떻습니까? 차도 물목(物目)에 올립시다!”
“하하, 좋지. 차도 추가.”
이제보니 저의 동문들과 얼굴 붉기가 비슷한 이지함도 술상 옆에 종이 한 폭 펼쳐두고서 뭘 끄적이고 있었다.
“아니, 이 지엄한 잔치판에 문방사우라니, 이 무슨 일이오, 사형?”
“무엇이기는. 상소문에 쓸 논거를 늘리고 있지.”
“상소문은 또 왜 쓰시려고? 지난번에 임금께 한 장 써서 바치지 않으셨소?”
“그것은 떳떳하게 알릴 수 없는 글이지 않으냐. 이제 내수사를 경제사로 혁파한다 하여 또 비판하는 자들이 나올 것이니, 그들을 설복시키기 위해 이전에 올린 글을 고쳐서 널리 퍼뜨릴 생각이다.”
세필로 ‘차’ 한 글자를 옆에 슬쩍 적은 이지함이, 먹물 마르자마자 자신이 쓴 상소문을 들고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자, 들어보거라... 흠흠.
옛일을 상고해보면, 열성조께서 대마도를 정벌하신 이래 그들에게 교역을 허락하시면서, 우리에게 흔한 미곡과 포목을 그들에게 넘겨주고 대신 유황·구리 등을 바치도록 하는 한편, 그들로 하여금 도적질에 가담하는 대신 오로지 교역에만 힘쓰게 하였으니, 그 원려(遠慮)가 참으로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일본국이 난을 당하여 국왕 원씨(源氏, 무로마치 막부)는 실권(失權)하고 소위 대명(大名, 다이묘)이라는 호족들이 할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남도를 평온케 할 길을 구하는 것은 오직 아조가 스스로 할 일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성상께서 내수사를 혁파하고 경제사를 새로 세워, 교역으로써 나라의 부를 늘리시겠노라 하교하시니 아둔한 신은 눈이 밝아지고 귀가 트이는 듯하였습니다.
무릇 교역에서 이로움을 얻는 요체는, 우리에게 귀하지 않으나 저들에게는 귀한 물산을 찾아, 우리에게 귀하지만 저들에게는 흔한 물목과 바꾸는 데 있습니다.
예컨대 목화는 아국에서는 쉽게 재배하나 풍토가 다른 일본국에서는 그렇지 않아, 예로부터 왜인들이 이를 귀하게 여겼습니다. 이에 우리 땅에서 나지 않는 후추·단목·유황 등을 가져와 동래에서 포목으로 바꾸어 가고 있습니다.
근래 조정에서, 후추와 단목이 거의 백 년치가 쌓였는데 목화는 백성에게 귀한 것이므로 이를 막아야 한다는 논의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귀물(貴物)이 쓰이지 않고 쌓이고 있다면, 이를 나라 안의 요호부민(饒戶富民, 부유한 백성)이나 북변 야인의 추장들에게 다시 팔아 이익을 얻으면 될 일입니다.
또한 신이 왜인들을 만나본바, 그들은 우리가 쓰는 도기(陶器)를 참으로 훌륭하다 여깁니다. 이르기를, ‘귀국의 술잔 하나로 아국에서 성 하나를 능히 살 수 있다’ 하는데, 과장과 아첨이 섞인 말이지만 왜인들이 아국의 그릇을 귀하게 여김을 능히 알 수 있습니다. 흩어진 장인들을 다시 모아 질그릇과 사기그릇을 굽게 만든 다음 이것을 일본국에 팔면 능히 큰 이익을 얻을 것입니다...
자, 이제 여기에 남도의 차가 일품이니 이것도 팔아보자고 하면 되겠구나.”
아무리 장사가 말업(末業)이라지만, 내수사에서 그간 벌이던 온갖 행각보다는 더 도리에 맞을 것이다. 내수사 혁파까지 염두에 두었던 이준경과 그의 무리들 또한 여기에 따로 반박은 못할 것이다.
“퍽 통쾌하신 모양이오, 사형. 목소리가 붕 떴소.”
“그러냐?”
“임 당수, 어찌 통쾌하지 않겠습니까? 이로써 임 당수가 금궁을 지키던 일 년 사이 우리 당이 아주 우뚝하니 서게 되었잖습니까.”
서림이 이지함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이제 – 적어도 이지함과 그 동문들 중 당상관의 자리에 오르는 자가 나오기 전까지는 - 통의부나 중추부 세울 때처럼 민주당이 직접 나랏일에 관여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그사이에 학당 세우는 것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일을 벌여나간 덕에 민주당은 황해도 한구석 의민당 시절에 비할 수 없는 위세와 이름값을 얻게 되었다.
당장 경제사의 일만 해도 그러하였다.
어지간한 선비들조차 저 바다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하물며 내수사 서제(書題)들이 어디 그런 일을 알겠는가?
개중 정신 일찍 차린 자들은 부리나케 논상원으로 찾아와 제발 교역하는 법도를 가르쳐 달라 청할 것이요, 여전히 내수사 권세만 믿고 있는 어리석은 자들은 졸지에 한량 신세가 될 것이다.
또한 만에 하나 재주 있는 자가 내수사에 있어, 손수 교역에 나서려 한들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지난날 소·쇼니·오우치 사신들이 서림을 만나고 간 뒤로, 동래부의 왜인들은 이미 민주당에서 보낸 이들이 아니라면 사사로이 교역하지 말라는 그들 상전의 명을 철저히 받들고 있었다. 이제 봄이 되어 바다가 잠잠해지면, 그들이 보내오는 배들이 귀물을 싣고 일본에서 건너오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니 경제사에서 일 맡아볼 자들은 이미 정해진 것과 다름없었다.
사업당에서 분주하게 장사의 일을 맡아보는 이들, 아니면 의민당 시절 서림 아래서 배운 재주 바탕으로 저도 한 번 스스로 입신(立身)해보겠다며 장사 뛰어든 이들, 그리고 몇 년 뒤에는 민주당이 세운 학당에서 막 공부 마친 싱싱한 장사꾼들.
마치 지금 전국 군현에 속한 아전들이 나라의 이속인 동시에 민주당의 손발인 것과 같은 이치로, 개편될 경제사 역시 민주당 없이는 아무 것도 못 하는 관서가 될 것이다.
“그뿐이오? 임 당수, 우리 자랑스러운 막내 사제 임 당수 덕에 스승님의 학통이 마침내 광영을 보게 되었소.”
고매한 선비 티를 못 벗은 사형 허엽과 달리, 그 스승 서경덕의 본을 받아 잡인들과도 쉬이 어울리는 박순이 서림 어깨에 팔을 턱 올리며 웃었다.
“새삼스럽게 그건 또 무슨 소리요?”
물었더니 허엽이 대신 답하였다.
“주상께서 우리 수산의 글을 눈여겨 보셨으니, 총신(寵臣)이 어찌 되지 못할까? 조정의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우리 스승님 문하에 있던 이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오.”
아직도 지난날 정순붕과 이기 두 사람의 상소 한 번에 삭탈관직을 당했던 설움을 잊지 않은 허엽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것도 꺽정이가 충주 감영을 파옥한 일 때문이었는데, 허엽은 거기까지는 알지 못했다.)
“주상의 총애가 그리 귀하오? 내가 아는 임금님은 귀가 얇기로는 거의 종잇장이던데...”
자신이 아는 임금을 떠올리며 꺽정이가 물었는데, 임 당수 화법을 겪어본 적 없는 허엽은 대경(大驚)하였다.
“임 당수, 말을 삼가시오!”
“아니, 사실대로 말한 것인데 무얼...”
“초당(草堂, 허엽). 그만하게.”
이지함이 나서서 허엽을 제지하였다.
그러나 이미 술판 흥은 적잖이 깨져 있었다. 술에 취해서는 저 홀로 저기 바깥 민주당 아전들 사이로 가서는, 이(理)와 기(氣)가 어찌하여 별개가 아니요 하나에서 나오는 것인지를 열심히 떠들고 있는 – 듣는 아전들만 고역이었다 - 이이의 들뜬 목소리만 들려오고 있었다.
“꺽정아. 우리가 비록 나라를 새로이 하고 군민(君民) 사이 도리를 뜯어고치는 것을 위하여 함께하고 있지만,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바뀔 수도 없거니와 결코 바뀌지 않을 것도 있는 법이다.
네가 너의 맘대로 하는 것을 내 어찌 막겠냐만, 다른 사람들이 예의와 법도 지키는 것을 두고 미련하다 해서야 되겠느냐.”
이지함이라고 어찌 모르겠는가.
그들이 지금까지 하고 있는 일. 의권의 논변부터, 백성을 부유한 재간꾼으로 만들어낼 여러 잡학(雜學)들, 그리고 이제 교역의 일까지.
사람의 욕심을 북돋아, 지금껏 그들에게 막혀있다 여겨왔던 것을 뚫고 나가게끔 부추기는 것.
올 겨울 터진 향전은 고작해야 앞으로 벌어질 일의 한 귀퉁이에 불과하였다.
그렇다면 한 귀퉁이를 넘어 그 전모가 다 드러난다면, 이 나라는 어찌 될 것인가?
양천의 구분이 사라져 그 누구도 다른 사람 아래에 있지 않게 되고, 선비가 마음껏 저의 품은 바를 세상에 개진하여도 결코 화를 당하지 않게 되며, 바꾸지 못하는 법도조차 없어지게 된다면.
그들이 바라왔던 나라를 이룩하게 된다면, 그 나라에 그들이 알던 옛 조선국의 풍모는 얼마나 남을 것인가?
모든 사람 위에 서 있는 사람. 사대부 중의 사대부로서 날 때부터 성(聖)이라는 글자가 붙는 사람.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는 법도를 세우는 사람.
그런 사람이 국초부터 늘 있었으니, 사람은 하나이되 일컫는 말은 여럿이었다. 임금, 주상, 상감, 국주(國主), 인군(人君). 군왕...
그러나 거기까지 생각할 수는 없었다. 생각이 그에 미치면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으니, 설령 이지함이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다른 선비를 그 자리에 앉혀두어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글쎄, 아무리 그래도 임금님은 내가 보기에...”
허나 꺽정이는 선비가 아니었다.
그가 본 임금은 그냥 사람. 그 아비가 임금이요 어미가 중전이었기에 절로 지존의 자리에 올랐을 뿐인 소년.
“꺽정아. 술이나 마셔라. 이 좋은 날에 다툼이 웬 말이냐.”
꺽정이 마음속에 막 떠오른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 전, 병해가 술잔으로 그 벌어진 입을 막았다.
“스님이 그래도 되오?”
“네놈은 칠장사 시절부터 건달바(乾闥婆) 같은 무뢰한 아니었느냐? 그런 놈에게 술 먹이지 말라는 계율은 내 듣도보도 못했다.”
그리하여 성상에 대한 무엄한 말은 자리에서 더는 나오지 않게 되었다.
그나마 이지함에게 다행이었던 일은, 이준경이 가만 앉아 당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신경 쓸 일이 마구 늘어났다는 사실이었다.
희희낙락 잔치 파한 지도 며칠이 지났다. 갑자기 할 일 없어진 흑의군들은 이때를 맞이하여 저들 고향에 다녀오기도 하고, 그간 못했던 한양 저자 구경하느라 도성 골목을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도 하였다.
왈패부터 포도대장까지 그 누구도 흑의군은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니 도성 구경하기에 지금같은 때가 또 언제 있으랴.
그러나 흑의군 졸개들을 제외한 나머지 민주당 사람들은 통 쉴 틈이 없었다.
“설날은 고사하고 대보름날에도 못 쉬었습니다. 이 기세로 봐서는 삼짇날(음력 3월 3일)도 못 쉬게 생겼습니다요.”
이지함으로부터 긴히 논의할 바 있으니 당청에서 보자는 소식 받고서 달려온 꺽정이의 발목을 잡고 서리 몇몇이 간청할 정도였다.
“뭣이 그리 바쁜가?”
“아니, 당수님께서 그걸 모르시면 어떻게 합니까? 당수님께서 벌이신 일인데...”
“내가 모르면 네놈이 어쩔 건데. 이걸 확!”
한 번 째려보니, 곧장 서리들은 놀라서 쭈그러들었다. 감히 그에게 대들 만큼 용기 충만한 것을 보니, 황해도에서 따라온 이들이 아니라 이곳 한양에서 합류한 경아전 출신인 모양이었다.
“히익! 죄송합니다. 실은 그... 이번에 시행하게 된 대동법 말입니다. 그것 때문에 그간 방납 준비하던 것을 더욱 규모 크게 시행하게 되었습니다. 전국의 토산품을 모두 헤아리고, 개중 무엇이 어디서 나는지, 어디서 사들이는 게 가장 헐하게 드는지 등등. 산가지가 남아나질 않을 지경입니다.”
그래서인지 잔뜩 두려워하면서도 할 말은 모두 다 하는 서리 녀석이었다.
헌데 듣고 보니 정말로 자신의 잘못도 있는 것이었다. 어느새 노기 풀린 꺽정이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 내가 서 별감에게 말해서 뭔가 조처를 하라고 하겠네. 늠료를 곱절로 늘린다던가?”
“정말입니까요?”
“아마 민주당 재정에 그만한 여력이 있지 않을까?”
그 말 한 마디에, 늠료의 일 맡아보는 서리 또한 졸지에 삼짇날에 등청(출근)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동법 때문에 밤낮 구분없이 일하는 이들이 알 바는 아니었다.
그렇게 대충 일거리를 여기저기 던져준 뒤에 안채에 들었더니, 심각한 표정의 이지함과 서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무슨 일로 부르셨소?”
“동고 대감이 준비한 경장의 시무(時務)가 내수사 혁파 하나로 그치지 않았던 모양이다. 곧 『공보』에도 소식이 실릴 것이다.”
각미사와 연 있는 말단 벼슬아치들 중 조보에 실릴 소식을 한나절쯤 빨리 민주당 쪽에 알려주는 이들이 있었다. 어차피 조보로 나갈 소식이므로 나라의 기무(機務, 기밀스럽고 중요한 일)를 누설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좋은 벌이가 아닐 수 없었다.
헌데 그렇게 전해온 조정 소식에 결코 민주당에게 이롭지 않은 사안이 가득했던 것이다.
‘군정(軍政)의 폐단을 고쳐, 오직 형해(形骸)만 남았을 뿐인 군제를 새로이 정비해야 할 것입니다,’
꺽정이와 오막손이가 문리가 트여, 내수사와 공납에 관한 장부와 서책만 훔쳐간 것이 따지고 보면 화근이었다.
그들의 일과 무관하다 여겨 제쳐놓았던 서책들 안에 이러한 궁리가 들어있었을 줄 어찌 알았을까.
‘이미 각 도의 병영에서는 이른바 방군수포(放軍收布)의 관례가 깊게 뿌리를 내려, 부방(赴防)하는 군졸은 매우 적습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정군(正軍)과 보인(保人) 나누는 법도를 폐하고, 모든 양민에게 군포(軍布)를 받아 이로써 군역을 짊어질 이들을 널리 초모하는 것이 정병(精兵)을 얻는 상책일 것입니다.’
풍문에 따르면, 이준경이 중추부에서 ‘두 해 전의 일이 어찌 괜히 일어났겠느냐.’ 하면서 의민당 난리를 거론했다는데, 꺽정이가 그 자리 앉아있었더라면 결코 없었을 일이었다.
“이것이 어찌 문제가 된다는 게요? 끽해야 수령방백들이 거느리던 아병(牙兵)들이나 조금 늘어나고 말 텐데.”
“‘조금’ 늘어나는 정도가 아닐 것이다. 지난날 우리가 상대했던 이들 중 저 남치근이 이끌던 정예한 경군과 같은 자들이 어쩌면 수만 명 넘게 모일 수도 있다.”
미리 계산을 마쳐둔 이지함이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자신이 셈한 결과를 말해주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는 꺽정이 너도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겠지.”
꺽정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그리고 임금 앞에서 그간 그토록 무례하다 소리를 들었음에도 누구도 제지하지 못했던 것도, 관군의 기강이 해이하다 못해 땅에 떨어진 지경이 아니었더라면 불가했을 일이었다.
이제 민주당의 그늘 밖에서 마음대로 관군을 새로이 모을 수 있다면, 적어도 지금의 흑의군만으로는 더 이상 마음껏 전횡하지 못하게 될 터.
“그간 대립군 세우는 사업도 하면서 적지 않은 수익을 올렸는데, 그것도 날아가게 되었지요.”
서림이 침울하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어떻게 막아볼 수는 없겠소? 밤골 도령 시켜서 반박하는 글을 싣는다던가...”
“동고 대감이 대동법을 쌍수 들어 받아들이지 않았더냐? 속내야 어쨌든, ‘이것이 경장의 뜻에 맞다’ 운운하였지. 그리고 같은 뜻에서 나라의 군역에 폐단 쌓인 것을 고치겠다는데, 우리가 이제 와서 무어라 트집을 잡겠느냐?”
이준경이 발의한 경장의 절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또한 오늘날 군현에서 소위 향전이 벌어지는 까닭은 아직 지방까지 덕화(德化)가 닿지 않았기 때문이요, 덕화가 닿지 않은 까닭은 바로 백성에게 항산(恒産)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각 군현의 뜻있는 사족들이 옛 법도를 따라 향약을 만들고 있는데, 이와 더불어 주자께서 창안하신 사창(社倉)의 제도를 다시 두어 향약을 운영하는 사인(士人)으로 하여금 사창을 만들고 그 군현의 백성들을 널리 이롭게 하도록 하시옵소서.’
“이건 또 왜 문제요?”
“향리와 부민들에게 기울어 있는 향전의 판세를 다시 사족들에게 유리하게 돌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아라. 향약을 운영하는 이들이 사창도 운영한다면, 향약에 들지 않은 이들에게 과연 곡식을 빌려주겠느냐?”
이미 한 번 데인 바가 있으니, 토호들의 전횡으로 사실상 장리(長利)의 수단이 되었던 국초의 사창과는 다를 것이다.
사족들의 속마음이 어찌 되었든, 한동안은 정말로 청렴하게 운영되며 이식(利殖, 이자수익)은 최소한으로 유지하게 될 터였다.
그리 된다면 지금까지 민주당이 내세우는 바에 들떠서 그 뒤를 따르던 군현의 농군들도 조금은 눈길이 돌아갈 수밖에 없을 터.
“이러한 경장이 언제 그 뜻한 바를 이룰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민생에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니 어찌 우리 당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하여 훼방을 놓을까.”
이지함의 한숨이 결론을 갈음하였다.
서림도 뾰족한 수가 없어, 손가락으로 서안이나 똑똑 두드리고 있었다.
“예로부터 고려공사삼일(高麗公事三日)이라 하지 않았소? 경장이니 뭐니 하지만 얼마나 오래 가겠소. 특히나 아전들은 모두 우리 당의 편인데.”
“대동법도 저 경장의 이름으로 행해지지 않았습니까, 임 당수? 자칫 우리네 발목을 우리가 찍는 격이 될 수 있습니다.”
“외통수다, 이 말이구려.”
“그렇지요.”
이지함이 씁쓸하게 말했다.
“물론 저들이 어찌하여 그간 그토록 조용히 있었는지는 십분 이해를 하지만... 얄궃기는 하구나. 이토록 열심히 경세제민의 법도를 말할 수 있었거늘 어찌 그간 가만히 있었는가.”
“우리 덕에 한 대 얻어맞고 정신 차렸을 수도 있지. 기운 내시오, 사형.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이 세상을 더 좋게 만들고 있는 것 아니오?”
여전히 침울한 두 사람에 비해 웃는 낯을 유지하고 있던 – 이곳 당청으로 달려오기 전 내내 명희와 함께 있었던 덕이 컸다 - 꺽정이가 저의 사형 기운 내라며 격려하였다.
“고작 도적놈 일고여덟 명만 데리고 시작하여 여기까지 온 우리요. 의민당이 황해도를 점거하고 윤원형이 거꾸러뜨리는 데도 삼 년밖에 안 걸렸소.
저쪽에서 달리면 우리는 더 빨리 달리면 되고, 저쪽이 궁시(弓矢) 들고 나오면 우리는 총통(銃筒) 끌고 나오면 그만이오.”
생각해보니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이미 눈앞에 있었다. 꺽정이가 쾌활하게 말을 던졌다.
“군제를 뜯어고치는 일이나, 그 사창인지 뭔지를 두는 일이나 몇 년은 족히 걸릴 일이오. 우리가 그 전에 더 크게 조선국을 뒤엎어버리면 되지.
어차피 흑의군도 한가로워졌으니, 그들 데리고 내 일본이나 한 번 다녀오겠소이다. 배 만드는 것이야 저기 동래부 내려가서 사람들 독촉하면 금방 될 것이고. 바다 건너가서 뭔가 거창한 이익 하나 건져오면 절로 우리 쪽 기세가 다시 오르지 않겠소? 양반님네들 하는 명분이니 의리니 하는 말에 혹한 백성들도 눈앞의 보화를 보면 눈이 다시 돌아갈 것이오.”
저의 각시와 이야기한 대로, 세상 구경을 하러 나갈 때가 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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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8년 신라 승려 대렴(大廉)이 당나라에서 차나무 묘목을 가져와 지리산에서 재배하기 시작한 이래로, 차 문화는 한반도에서 본격적으로 흥성하게 되었습니다. 불교계뿐 아니라 고려 왕실과 귀족 사이에서도 차가 유행하였고, 송이나 거란에 보내는 예물 중에 차가 포함되기도 했지요. 조선 초까지도 이러한 차문화는 남아있었으나, 여말선초를 직접 겪으며 차에 익숙하였던 이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결국 사그러들게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로,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재직하던 1471년, 공납품인 차를 구하기 위해 전라도 일부 지역에서 소량으로만 재배되는 것을 비싼 값에 사와야 했다는 기록이 전합니다. 결국 김종직은 지리산 산속의 어느 절 뒤편 숲에서 야생화된 차나무를 찾아낸 뒤 백성들의 밭을 사들여 새로 다원(茶園)을 조성했다고 하지요. 김종직도 이때 차에 맛을 들였는지, 그가 남긴 글에는 차를 즐기는 것에 대한 내용이 간혹 보입니다.
그로부터 100여 년 뒤에는 그나마 남은 차 문화마저 거의 소멸하여, 남도 산간의 몇몇 사찰에서 근근이 명맥만 잇게 된 듯합니다. 일례로, 정유재란 시기 전라도 남원에 머물던 중 현지에서 재배하던 차를 접한 명나라 장수 양호가, 이만하면 명 기준으로도 상등품이라 무역으로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는데, 여기에 대해 선조는 ‘우리나라에는 차를 마시는 풍습이 없다’고 답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선조실록』 선조 31년 6월 23일 기사).
임란 당시 승병장으로서의 활약으로 잘 알려진 서산대사 휴정은, 본디 평안도 안주 출신입니다. 그러나 소년 시절 지리산 유람을 갔다가 그곳에서 출가하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지요. 이후 원 역사에서는 문정왕후의 위세를 업은 보우가 실시한 승과에 급제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에 이르렀으나, 1556년 사직하고 전국의 명산을 두루 돌게 됩니다.
이 일로 인하여 사림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았는지, 1589년 정여립 옥사 당시 무고당하여 잠시 옥고를 치렀을 때, 끝내 무죄가 밝혀지자 선조가 친히 묵죽(墨竹)을 내리고 휴정은 그 자리에서 시를 지어 바쳤다고 합니다.
초반에 언급되는 ‘끽다거(차 한 잔 하고 가게)’는 선종 불교에서 언급되는 화두 중 하나입니다. 차를 좋아한 것으로 유명했던 중당(中唐) 시기 선승 조주대사가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언제나 차를 권했다는 데서 나온 말이지요.
이준경이 공납 혁파가 무산된 뒤에 밀어붙인 두 가지 개혁은, 모두 원 역사에서 실제로 추진된 것입니다. 대동법과 합하여 생각해보면, 어느새 조선 후기에 가까운 형태를 향하여 조선이 변화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원 역사의 조선도 양란의 혼란을 거친 뒤 그간 사실상 보편화된 방군수포를 양성화하여, 모든 양민 성인 남성에게 군포를 걷고 그 재정으로 상비군을 편성하는 형태의 군제를 완비하게 됩니다. 그리고 현역이 아닌 모든 남성들은 양천을 불문하고 일종의 예비군인 속오군으로 편성되었지요.
사창제는 작중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주자가 시행하였다는 강력한 명분도 있었고, 이론상으로는 미곡의 수급 불안정이라는 농업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를 향촌 내에서 해결할 수 있는 제도였기 때문에 조선 초기부터 도입이 추진되었습니다. 그러나 토호와 향리들이 이를 이용해 사실상 고리대를 운영하는 등 여러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혀 곧 좌초되게 됩니다.
이후 양란 후에 조선의 통치제도가 정비되면서, 공권력을 통해 어느 정도 관리가 이루어지는 환곡 제도로서 이것이 재도입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역시 조선 말에는 한계를 드러냈고, 대원군에 의해 사창제가 다시 도입되게 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