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그곳에 용이 있었네 (2)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처음 동방의 이역에 흥미를 품은 것은 주님의 해로 일천오백삼십구 년 겨울, 교황 성하께서 예수회 설립을 인가해주시기를 기다리며 로마에 머물던 때였다.
황제(카를 5세)의 용병들이 영원한 도시를 약탈한 것이 불과 십여 년 전이었으므로, 시가지 곳곳에 아직 그 상흔이 선명하였다. 그러나 폐허가 된 건물 사이에서도, 바티카노(Vaticano) 언덕의 성좌는 여전히 우뚝 서 있었다.
그곳에서 하비에르와 그의 벗 이냐치오는 오래된 세계지도를 보았다.
세상의 중심, 가장 성스러운 예루살렘이 가운데에 있었고, 그 아래쪽에는 유럽이, 위쪽에는 아프리카가 있었다. 그리고 지도의 가장자리, 인도의 해안 너머 미지의 땅에는, 산 위에서 날뛰는 세 마리 용이 그려져 있었다.
“아름답기는 하지만, 구닥다리로군그래. 요즘 뱃사람들이 보면 코웃음을 치겠지.”
견문 넓은 이냐치오가 흉을 보았다. 그 말대로, 한 백여 년 전쯤 만든 지도인지, 카스티야 사람들이 정복한 신대륙도, 포르투갈 사람들이 오가는 인도와 그 일대 바다의 섬들도 나와있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의 변두리에서 날뛰는 짐승들이,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유라고 생각하면 저 지도를 구닥다리라고만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로부터 여러 해가 지난 지금. 신의 섭리에 따라 하비에르는 이곳 아시아까지 왔다.
유럽인이 알던 것과는 다른 문명, 다른 질서가 이 땅에는 이미 수백,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오고 있었다. 하나의 또 다른 세계.
그리고 하비에르는 지금, 그 별세계만의 법도로 인하여 크나큰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신부님, 불편한 곳은 없으신지요.”
소문을 듣고 찾아온 페르낭 핀투(Fernão Mendes Pinto) 선장이 하비에르에게 물었다.
“보다시피, 일신에 상해를 입거나 하지는 않았다오. 성의 기사(무사)와 시종들도, 비록 경계는 하고 있지만 정중한 대접을 해주고 있고.”
“다행입니다.”
그 말대로였다. 생긴 것은 별나도 기풍에 있어서는 옛 유럽과 비슷한 면이 있는 자폰이었는데, 그래서인지 귀족을 포로로 잡았을 때 대우를 해주는 것처럼 하비에르에게도 부족하지 않은 정도의 대접은 해주고 있었다.
당장 그가 붙잡혀있는 이 방도, 영주의 성 한구석에 있는 그리 넓지 않은 방이기는 하지만 그럭저럭 깔끔하였고, 또 조그만 창문도 있어 바다를 볼 수 있었다.
“이미 한 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신부님. 우리는 이곳에서 그저 손님에 불과합니다. 손님은 주인이 세운 규칙을 따라야지요.”
핀투가 한숨을 푹 쉬었다.
“만약 말라카나 고아로 돌아가시려 하셨다면야, 언제든 제 배에 태워드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디오시온, 그러니까 코레는 안 된다 하였지요. 어째서입니까?”
“그것이 ‘바다의 왕(왕직)’이 세운 규칙입니다. 시나(중국), 코레. 이 두 나라의 해안은 오직 그의 허락을 받은 자들만 오고 갈 수 있다고요.”
바다의 왕이라. 칭호가 그럴듯할 뿐, 결국 저 바르바리 해적과 같은 무뢰한에 불과하다고 하비에르는 생각하고 있었다.
이곳 자폰에서의 선교가 벽에 부딪혔다 여기던 차, 바다 건너 코레라는 나라의 소식을 듣고 고아로 돌아가기 전 다른 나라의 문을 한 번만 더 두드려볼 생각을 품었을 때도, ‘왕’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권세가 이만할 줄 어찌 알았을까. 핀투가 코레로의 항해를 거부하자, 그 대신 이곳 히라도의 신자들이 마련해준 금은으로 다른 배를 겨우 마련한 하비에르였다. 하지만 그 배의 선장은, 항구를 떠나 북쪽으로 향하는 시늉만 잠깐 하고서는 밤이 되자 몰래 히라도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코레는 구경도 못 해본 채, 이렇게 히라도 앞바다만 하염없이 바라보는 신세가 되고야 말았다.
“신부님께서 만약 제게 미리 알려주셨다면 제가 왕을 만나서 어떻게 설득이라도 해보았을 테지만... 휴, 때늦은 한탄 아니겠습니까.”
핀투가 그 말을 마치자마자, 문이 열리고 거만한 표정의 중국인이 들어왔다. 저자가 바로 ‘바다의 왕’일 것이다.
그가 무어라 말하자, 곧장 핀투 선장이 그 말을 옮겨주었다.
“왕이 말하기를, 신부님의 몸값이 들어오는 대로 방면할 것이지만, 아직 그 몸값이 정해지지도 않았으니 꽤 오래 기다리셔야 할 것이라 합니다.”
“몸값이라니, 무슨 말씀이시오? 몸값을 대신 내줄 이가 없는데.”
이곳 사람들이 청빈함보다는 화려함을 더 숭상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오우치라는 귀족 집안의 후원을 받아 일부러 호사스러운 행렬을 꾸미고 다녔던 하비에르였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선교를 위한 눈속임에 불과했고, 당연히 일신의 재산은 이 땅에 당도하기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전무하였다.
“신부님을 통해 우리 유럽의 화포를 얻어보려는 영주들이 허다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들 사이에서 경매를 붙여, 가장 높은 값을 부르는 이의 영지로 신부님을 데려간 뒤 풀어줄 것이라고 합니다.”
핀투가 왕직의 말을 재차 옮겨주었다.
그 말에 하비에르의 입안에도 씁쓸함이 감돌았다. 세 해 전 가고시마라는 곳에 처음 닿았을 때부터, 그와 일행들을 환대해주던 영주들이 화승총과 대포 따위에만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남의 입으로 확인을 받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다른 마음은 품지 말고, 이곳에서 바다를 감상하며 도를 열심히 닦고 있으라 합니다.”
핀투의 입을 거치지 않더라도, 저 ‘왕’이 자신을 비웃고 있음은 능히 알 수 있었다.
“같은 남만 사람이라 하여 무슨 허튼짓을 꾸미거나 하진 않으리라 믿는다.”
‘후랑자베루(하비에르)’가 유폐된 성의 한 귀퉁이를 나서면서 왕직이 핀투에게 툭 던지듯 말했다.
“우리는 돈만 벌면 됩니다. 계속 편의만 보아주신다면야... 헤헤.”
“그래, 바로 그것이다.”
그때, 젊은이 하나가 왕직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뒤이어 칼 찬 늙은이 여럿이 서둘러 따라왔다.
이 항구와 주변 땅을 다스리는 다이묘이자 이 성의 성주이기도 한, 마츠우라 씨의 당주 타카노부(松浦隆信)와 그 가신들이었다.
“오, 히젠노카미(타카노부의 관직명) 아니시오? 무슨 일이시오?”
“이 성은 우리 집안의 것이고, 히라도 또한 이 사람의 몫이니, 어디로 가든 누구에게 고할 이유가 있겠소? 헌데 ‘휘왕(徽王, 왕직이 자칭하던 칭호 중 하나)’께서는 가끔 이를 잊는 듯하시더이다.”
말에 가시가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조선행을 도모하던 바테렌을 붙잡은 뒤 주변의 여러 다이묘들 사이에서 몸값을 흥정한다는 계획은 나름의 위험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자신이 실은 키리시탄(크리스천)이었다며, 바테렌 구출을 명분 삼아 히라도로 쳐들어온다던가.
오우치 씨가 무너져내린 뒤 그 시체를 뜯어먹기 위해 온갖 승냥이들이 날뛰고 있는 지금, 오토모(大右), 모리(毛利), 류조지(龍造寺), 시마즈(島津) 등 쟁쟁한 집안에는 도저히 견줄 수 없는 마츠우라 씨로서는 그러므로 왕직이 지금 벌이는 이 기묘한 경매가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공은 무엇을 두려워하시오? 설마 조선에서 저 바테렌을 구하러 올까, 그것을 걱정하는 것이오? 하하하!”
그것은 알 바 아니라는 듯, 왕직이 껄껄 웃었다. 타카노부는 정색하고 있었는데, 그 뒤를 따라온 가신들은 두 사람 사이를 어색하게 살피다가 왕직의 눈길이 닿자 억지로나마 살살 웃었다.
“뭐, 몸값이 들어오면 지금껏 상리(商利, 상업의 이익) 나누어드리던 것처럼 귀공의 집안에도 응당의 몫을 떼어 드리리다. 바테렌을 잡인들로부터 지켜주고 계시니 그만한 값은 받으셔야 하지 않소?”
불과 몇 년 전, 타카노부가 열네 살 어린 나이에 가독을 물려받았던 시절만 해도 이러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느새 왕직은 당당하게 휘왕이니 정해왕이니 자칭하고 다녀도 그 누구도 막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는 적어도 오토모나 시마즈 씨 정도는 되어야 왕직과 대등하게 교섭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지금껏 항구와 사람을 빌려주는 쪽이었던 마츠우라 씨는, 이제 왕직의 무리가 주도하는 교역을 통해 떨어지는 소득 없이는 거센 풍파 가운데서 도저히 버텨낼 수 없을 지경에 처했다.
“그러니 공께서는 걱정 마시고 이 성과 저 히라도 포구만 잘 지켜주시면 되오. 그리하신다면 화란은 닥치지 않고 보화는 계속 쌓일 터이니.”
젊은 혈기에 왕직을 노려보는 것을 그치지 않던 타카노부는, 주변의 가신들 중 그 누구도 저 대신 이 왕직을 꾸짖으러 나서지 않을 것임을 뒤늦게야 직감하였다.
“저 앞이 히라도입니다, 임 당수.”
멀찌감치 언덕 위에 거대한 망루인지 성인지 모를 것이 보이더니, 이제 포구의 모습도 아른아른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꺽정이가 크게 기뻐하였다. 얼른 단단한 땅을 밟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배라는 것이 이리도 사람을 괴롭게 할 줄 알았다면, 왕직은 그냥 왕직대로 살게 내버려두고 저는 그냥 북변에서 말이나 타고 다녔을 것이었다.
오는 길에 바다 한가운데에서 격물법 이치 따라 시험해보니, 부하들이나 모리타네 데려와서 싸움질 벌일 때는 금방 멀쩡해지곤 하였다. 그러나 싸움이 그치고 한시라도 한가롭게 있게 되면 곧장 울렁거림이 다시 돌아오니 기가 막힌 일이었다.
“오, 과연 가호(家戶) 생김새부터 다르네요.”
“저기 보이는 저 성이 이곳 대명(大名), 그러니까 다이묘의 거성이겠지요?”
이씨 남매는 생판 멀쩡하였으므로, 꺽정이는 더욱 얄밉게 여겼다.
“허, 이상하구려.”
졸지에 이 선단을 이끌게 된 정걸은 한참 주변을 살피다가 고개를 갸웃대었다.
임 당수가 판옥전선으로 남쪽 바다까지 갈 수 있겠느냐 물었던 것이 계속 마음속에 맺혀 있던 정걸이었다. 자신이 고생하여 열심히 만들어낸 판옥전선을 타고 먼바다로 나가는 첫 번째 사람이 본인이 아니라는 것도 안타깝게 여기던 차.
갑자기 임 당수가 오밤중에 와서는, 일본국 가서 싸움판에 휘말릴 수도 있게 되었으니 수군 통솔할 줄 아는 군관 하나가 필요하다며 그를 끌고 가는 것이었다.
뒷감당 어찌할까 걱정하면서도, 막상 배가 부산포를 떠나니 올라가는 입꼬리를 도저히 내릴 수 없던 정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 공, 무엇이 이상하다 하십니까?”
왜인 종성종 – 어째서인지 임 당수와 다른 당원들은 모두 그의 이름을 왜말로 읽어 소머리 어쩌구라 불러주고 있었는데, 정걸 입에는 도저히 익지 않았다 – 이 정걸에게 물었다.
“저들이 보기에 우리는 황당선(荒唐船)과 같지 않겠소? 그런데 태수(太守)나 수사(水使)쯤 되는 이가 배를 보내어 문정하여야 마땅할 터인데, 아무런 움직임이 없지 않소이까.”
“조금 더 다가가면 아마 포구에서 사람을 보낼 것입니다. 우리 선단의 규모가 작지는 않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 히라도 사람들 보기에 그렇게까지 특이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무슨 말씀이시오?”
“그것이... 저도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하였으나, 저 항구를 드나드는 남만인들의 배는 훨씬 생김새가 기이하고, 무엇보다도 그 크기는 바다 위의 산과도 같다고 들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아마 대국의 어느 도고가 보낸 선단 정도로 보이겠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 정걸은 그 말의 뜻을 알게 되었다.
“와.”
“히야...”
지금껏 정걸이 알았던 그 어떤 배보다도 거대한 배가 포구 앞을 지키고 있었다.
배를 잘 모르는 이씨 남매 역시 그 크기에 압도되어, 탄성만 내놓고 있었다. 남만선 얘기를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이었던 모리타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꺽정이는 홀로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암! 저쯤은 되어야지! 이보시오, 내가 지난번 좌수영에서 말했던 게 바로 저런 배요. 어떻게 머리 좀 굴려서, 우리도 저런 배 좀 만들어서 굴려봅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판옥선 위의 흥분은 가라앉고, 대신 부두 쪽이 소란스럽게 되었다.
조선에서 교역하는 배가, 그것도 바닷가 백성이 몰래 띄운 쪽배가 아니라 큼직한 배로 세 척이나 당도한 것이다.
물론 남만선은 말할 것도 없고, 왕직의 무리 또는 왕직 무리에게 신세를 지는 대국 상인들의 소유인 복선(福船, 복건성 일대의 정크선), 광선(廣船, 광동 지역에서 건조한 정크선) 등에 비해서도 딱히 크다고 하기 어려운 판옥선과 대맹선이었으므로, 배의 크기로는 딱히 대단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좀처럼 일본과 교역하는 일이 없고, 고작해야 대마도 소 씨, 이제는 거의 망한 오우치 씨, 오우치보다는 조금 덜 망한 쇼니 씨 등과 아주 조금씩 무역하는 일이 전부인 조선국에서, 그들 딴에는 아주 먼 바다라 할 수 있는 히라도까지 번듯한 선단을 꾸려 보낸 것은 분명 비상한 일이었다.
하물며 그들이 도자기와 인삼, 초피, 포목 등 조선의 귀물을 한가득 가져왔음에랴.
“그게 그토록 귀한 것인가?”
“그렇지요. 그러니까 저희 쓰시마에서 가운데를 막고 꽤 많은 이익을 올리던... 아차!”
꺽정이 옆에 정걸이 있는 것을 뒤늦게 떠올린 모리타네는 저의 입을 탓했다. 워낙 털털하여 옆에서 무슨 말을 하던 다 받아주는 임 장군과 그 아내, 그리고 율곡 선생 옆에서 지내다 보니, 입단속이 일시 느슨해졌던 것이다.
“흠흠, 하지만 근래 귀국 조선의 사정이 어려워진 뒤로는, 저희도 장사가 썩 여유롭진 못했습니다. 세견선이 줄어든 이후로는 말할 것도 없고요. 그러니 여기 히라도 같은 곳은 조선의 귀물이라 하면 눈에 불을 켤 수밖에 없지요.
앞서 문정하러 왔던 그 서리가, 우리가 챙겨온 물목이 무엇인지를 모두 보았을 테니, 이제 짐을 내리기만 하면 손을 먼저 대려는 상인들이 한가득 몰려올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쓰시마 사람 본성으로, 교역으로 얻을 이익을 머릿속으로 셈하기 시작한 모리타네였다. 그런데 임 당수가 매몰차게 그 속셈을 끊어버리는 것 아닌가.
“잠깐. 잠깐. 우리가 여기 장사하러 온 건 아니잖아? 귀한 물건, 아니지, 귀인을 데리러 온 것이지.”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다들 모여보시오! 이제 우리가 중하게 나눌 얘기가 있으니.”
꺽정이 말에, 배의 난간에 붙어서 히라도 포구와 저자, 그리고 주변의 온갖 배들 구경에 여념이 없던 명희와 이이, 그리고 정걸이 망루 위에 모였다.
“자, 우리는 이제 그 후랑 어쩌고 하는 도깨비 중을 구할 것이오...”
꺽정이가 운을 떼며, 이제 어찌할지 얘기를 듣기 시작하였다.
그럴듯한 계획 여럿과 전혀 그럴듯하지 않은 계획 하나가 나왔는데, 안타깝게도 그럴듯하지 않은 계획을 내세운 사람이 임 당수였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일시 넋이 나간 모리타네가, ‘이건 미친 짓입니다. 전 나가렵니다.’ 하고 배 밖으로 뛰어내리려다 붙잡히는 사소한 일화가 있었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준비가 순순히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조선국 배 세 척이 포구에 정박하니, 이는 근래에 드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히라도는 중국부터 남만까지 수많은 나라의 배와 상인이 오고가는 곳. 그러므로 어찌 조선이라 하여 다른 법도를 둘까.
히라도에서 무역하는 배라면 마땅히 세(稅)를 내야 했는데, 포구 주인 마츠우라 씨에게 한 번, 바다 주인에게 한 번씩을 바쳐야 했다.
히라도 사람이라면 왕직과 마츠우라 씨 사이에 양다리 걸치는 것이 근년 사이의 흔한 일이었으므로, 보통 포구에서 두 가지 세를 한 번에 받곤 하였다.
그것을 위하여 배 앞에서 기다리던 무사 산자에몬(三左衛門)은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지는 변고를 겪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저의 눈이 어두워진 게 아니라, 거한 하나가 배 위에서 껑충 뛰어내려 저의 눈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다른 조선 사람들도 하나씩 내렸다. 특히 미녀 한 사람이 눈에 띄었는데, 이를 검게 물들이지도, 눈썹을 밀지도(오하구로お齒黑, 일본 전통 화장법) 않았지만 그 미모가 찬란하여 산자에몬의 눈길을 단번에 붙잡았다.
그러나 엄연히 그의 직분이 있었으므로, 머리를 한 번 도리도리 흔든 뒤 개중 그나마 멀쑥하게 생긴 사내에게 물었다.
“조선국에서 오셨다 들었습니다. 상행을 이끄시는 분의 존함을 여쭈어도 될지요?”
그랬더니, 그저 경호하는 사람인 줄 알았던 거한이 조선말로 대꾸하고, 미녀가 거한 옆에 서서는 그 조선말을 통변하는 것 아닌가.
“조선국 민주당 당수 임꺽정이오, 라고 하십니다.”
산자에몬이 요새 절간의 화상들이나 배움이 깊은 사람들이 즐겨 읽는다는 ‘세이론보’니 ‘코보’(정론보·공보)니 하는 것을 읽어보았더라면 여기서 까무러쳤을 테지만, 그는 문자와 그리 연이 깊지 않았다.
그저 히라도와 그 일대 바다에 ‘마츠우라 당(黨)’이 있는 것처럼, 조선국에는 ‘민슈(民主) 당’이 있나보다 하고 넘어갈 뿐.
“제가 알기로 조선국에서 이렇게 상행을 번듯하게 오시는 것은 처음입니다. 마땅히 성으로 함께 가셔서 인사를 올리셔야 할 것입니다.”
그랬는데, 거한이 상상도 못할 무례 – 코웃음 – 를 범하는 것이었다.
“임 당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의 성 주인이 왕직인지 마츠우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누가 되었든 당장 이곳 포구로 튀어나와야 할 것이라 하십니다.”
“뭐, 지금, 그,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 조그만 포구 하나를 거느리고 성주라 하는 것을 보니, 대충 급이 조선의 도호부쯤 될 것인데, 어찌 감히 나라 하나 거느린 분께 도호부 하나 거느린 자를 찾아가라 하느냐, 당장 성주가 튀어오지 않으면 무례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라 하셨습니다.”
이윽고 다른 배에서도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하는데, 그 실력은 알 수 없으나 근골은 분명 훈련된 무사의 그것이라.
그런 자들이 한둘도 아니요 수십, 아니, 수백 무리를 이루어 포구에 내리니, 비로소 구경하던 이들도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여기저기 달음박질을 하였다.
이는 산자에몬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지금이 그 옛날 원구(元寇, 몽골의 일본 원정군) 시절도 아니고, 조선에서 오랜만에 찾아온 배에 무사들이 가득 실려 있을 줄 알았겠는가?
“얼른 성으로 뛰어가지 않는 것을 보니 다리가 아픈 것이냐. 정 그렇다면 너를 끌고 저 성에 쳐들어가겠다, 라고 하십니다.”
통변하는 이의 미모는 이제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왕직에 이어 이제는 조선까지 말썽이란 말인가.
타카노부는 그저 신불(神佛, 신과 부처)이 원망스러웠다.
민주당 임 당수, 그러니까 ‘하야시 쇼군’이 포구에 나타났다 하니, 타카노부는 물론이요 막 성을 나서던 왕직도 그저 헛소리라고 여겼다.
그런데 이게 웬걸. 적당히 겁주어 쫓아내라며 가신 하나를 보냈건만 그가 멍투성이 되어 돌아오는 것 아닌가.
“이게 무슨 일이냐?”
“임 쇼군이 아무래도 맞는 모양입니다, 당주!”
“그게 어떻게 말이 되느냐! 조선 도성에 있어야 할 자가 왜 여기에 있어!”
저의 말이 맞다고 해도 믿어주지 않으니, 좀 맞아야 하겠다면서 임 장군이 대련을 청했다고 하였다.
무사답게 겨루자 하니, 마츠우라의 체통이 있거늘 어찌 물러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 결과가 눈앞의 이 꼴이었다.
대체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자신이 나서야 할 일은 맞는 듯하였다.
하여, 급하게 포구로 향했는데, 아주 기가 막힌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자! 초피 보시오! 이런 것 댁에는 없지 않소?”
“이 영롱한 사기그릇 보시오! 일본국에는 이런 것 없다고 들었소!”
알아들을 수 없는 조선말이지만, 궤짝에서 온갖 귀물을 써내어 자랑하는 수작은 만국 공통이라 그 뜻을 타카노부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본디 무사 수백이 갑자기 포구에 내렸다면, 이쪽에서도 급히 군사를 모아 에워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저쪽은 근골의 강건함이 무사와 닮았을 뿐, 갑주도 차려입지 않고 그저 옷의 색만을 검게 맞추었을 뿐.
그리하여 처음에 놀라 달아났던 이들도 다시 고개를 내밀고, 개중 용감한 상인들은 대열의 맨앞에 섰다.
그 결과, 불상사 대비하여 달려온 군사들과 구경꾼들, 어떻게 저들이 좀 저 보화에 손을 대보려 하는 상인들, 그런 사정 아는지 모르는지 조선말로 떠들어대는 작자들까지 어우러져 포구가 온통 시장통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거한 하나. 저자가 자칭 임 당수일 테다.
“오, 귀티 나게 생긴 걸 보니 그대가 태수인가 다이묘인가 하는 사람인가 보군그래.”
“라고 하십니다.”
대뜸 던지는 말의 무례함에 한 번, 거한의 흉흉한 기세에 두 번, 그리고 아리따운 여인이 통변을 하고 있다는 데 세 번 놀랐다.
“흠흠. 이 사람이 바로 마츠우라 당의 당주, 타카노부요. 이러한,.. 일은 고금에 없던 것인데, 어찌하여 이 히라도에 찾아와 이런 어지러운 일을 벌이는 것이오?”
“저기 장사판 벌인 것은 내 본의가 아닐세. (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귀공의 본의는 무엇이오?”
“그대가 왕직 그놈의 편을 들어, 귀인 한 사람을 붙잡고 있다 들었네.”
귀인이라 할 만한 이라면 바테렌 하나뿐이다.
‘설마 정말로 조선이 그 바테렌을 구하러 왔다는 말인가?’
매정한 신불이 더욱 더 원망스러워지는 타카노부였다. 그러나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만 했다.
“흠흠, 귀인이라 하시면 아마 바테렌 후랑자베루를 이르시는 것일 듯하오. 이미 소식을 들으셨겠지만, 바테렌에게는 지금 복잡한 사정이...”
“몸값을 내라는 것이겠지. 그러면 다른 놈들보다 더 귀한 몸값을 이 사람이 마련하면 될 것 아닌가?”
“그것은 다른 곳에서 몸값의 제의가 모두 들어온 뒤에 비로소 말씀드릴 수 있을 것이오. 이렇게 포구에서 상스러운 무리와 뒤섞인 채 나눌 말은 아닌 듯하오이다. 일전의 ‘무례’는 사과드릴 터이니, 성으로 함께 와서 보다 정갈한 자리에서 이야기 나눔이 어떠하겠소이까?”
그러나 거한은 섬뜩한 웃음으로 답할 뿐이었다.
“걱정 말게. 내가 제시할 몸값은 그 무엇보다도 중한 것이니. 천금 보화를 내민들 사람의 목숨보다 귀할까?”
“사람 목숨이라니...? 엇?”
갑자기 몸이 붕 떴다.
“자! 튀어라!”
“가자!”
“왜국 사람들! 이거 담비 가죽은 임자들이 가지쇼!”
어느새 타카노부는 거한의 옆구리에 붙들려 있었다.
“이것 놓아라!”
“미안. 왜말은 내 안사람이 알지 나는 모른다. 백 번 떠들어도 소용 없으니 그리 알거라.”
“이것 놓으란 말... 으어어?”
또 한 번 몸이 공중에 뜨더니, 어느새 배 한 가운데에 닿아 있었다.
“출항! 출항! 닻을 올려라!”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인질에는 인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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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의 기원은 1529년 파리대에 재학 중이던 만학도 이냐시오 드 로욜라(바스크어: 이냐치오 로욜라코아)가 기숙사 룸메이트였던 피에르 파브르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달리기와 높이뛰기 등 각종 운동에 능통한 ‘인싸’였다고 전해집니다-를 성직의 길로 꼬드긴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후 로욜라는 여러 해에 걸쳐 파리대 동창 중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을 모았고, 마침내 1534년 몽마르트르 언덕에 있는 한 교회의 지하실에서 일곱 명의 파리대 동창들이 청빈과 순결, 순종의 서약을 하게 됩니다. 1540년 교황 바오로 3세가 일곱 명의 사제서품을 허용하고 동시에 새로운 수도회의 설립을 인가하면서 본격적으로 예수회의 활동이 시작되지요.
때마침 포르투갈 국왕이었던 경건왕 주앙 3세(João III ‘o Piedoso’)는 교황청에 빠르게 확장하고 있던 자국의 아시아 거점들(인도의 고아, 말레이 반도의 말라카 등등)에 선교사를 파견해줄 것을 청원하고 있었고, 새로 결성된 예수회는 이 일의 적임자로 추천되었습니다. 그런데 본디 인도로 향하려 했던 니콜라스 보바디야가 갑자기 병을 앓게 되면서, 하비에르가 급하게 대타로 지목되게 되지요.
하비에르와 로욜라가 보았다고 묘사된 지도는 ‘보르지아의 지도(Borgia map)’입니다. 예루살렘을 지도 중앙에 놓고 남쪽을 위로 두는, 중세의 유럽의 전통적인 지도 형식을 유지하고 있는 금속제 지도로, 15세기 중엽 제작된 뒤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18세기 말 스테파노 보르지아 추기경이 소장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보르지아 콜렉션이 교황청에 증여되면서, 이 지도는 ‘보르지아의 지도’로 알려지게 되었지요. 대항해시대 직전, 중세 유럽의 세계관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문화재라 할 수 있겠습니다.
지도의 가장자리에 있는 미지의 영역에 각종 괴수를 그려넣고, 기이한 괴수와 동물이 서식한다고 기록하는 것은 고대 로마 시절부터 내려오던 유럽 지도의 전통이었습니다. 코끼리, 사자 등 실재하는 동물과 용, 바실리스크 등 상상 속의 괴수들이 모두 등장하곤 했는데, 미지의 영역을 뜻하는 관용구 ‘이곳에 용이 있노라(hic sunt dracones, ‘Here be dragons.’)’라는 표현은 여기서 기원하였습니다.
가정왜구의 활동에 대한 믿을 만한 기록은 대부분 명 조정과 사대부들이 남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인보다는 왜구 가운데서 활동한 중국인들 – 명 입장에서는 반역자니까요 – 에 대한 기록의 비중이 크고, 그들의 역할 역시 과장되어 기록되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왕직과 그의 왜구들은 중국인 출신 두목들이 이끈 다른 무리와 구별되는 면이 있습니다. 왕직은 자신의 근거지 고토 열도가 아니라 마츠우라 씨 세력의 중심지 히라도를 자신의 수도(京)라 칭하였으며,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왕을 자칭하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규슈 영주들의 후원을 받았다고 볼 여지가 충분한 다른 지도자들과는 다른 면모입니다. 1550년 초반 왕직이 유력한 경쟁자였던 진사혜(陳思盻)를 제거하고 그 세력을 흡수하여 해상에서의 패권을 확립한 반면 마츠우라 씨는 오우치 몰락 이후 급변하는 규슈의 정세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일시적으로나마 왕직이 마츠우라 씨보다 우위에 서는 상황이 되었다고 볼 여지가 있습니다.
또한 흥미로운 것은 왕직과 포르투갈 상인들 사이의 관계입니다. 명 측 기록에는 타네가시마에 조총을 전파한 것이 왕직 아래에 있던 포르투갈인들이라고 하는데, 은퇴한 후 고향 포르투갈에 돌아와 자신의 항해담을 과장 섞인 책으로 편집해 큰 명성을 누린 멘데스 핀투는 그때 조총을 넘긴 것이 바로 자신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지요.
또한 왕직 세력이 몰락한 1557년, 그 전까지 광동성 일대에서 공무역과 밀무역을 병행하던 포르투갈 상인들이 마카오에 본격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했고, 이듬해인 1558년에는 히라도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이 추방되고 이어서 포르투갈인들이 집단 린치를 당해 살해당하는 사건(1561)도 발생하게 되지요. 이어서 1565년에는 히라도 앞바다에서 포르투갈과 마츠우라 씨 사이의 충돌까지 벌어지게 됩니다. (결과는 마츠우라 측의 완패였습니다.) 이처럼 왕직 몰락 이후 발생한 변화는, 역으로 왕직이 중국과 일본, 포르투갈 등을 모두 하나로 묶는 강력한 중간세력으로 기능하였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작중에서는 아직 왕직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묘사된 마츠우라 타카노부는, 원 역사에서는 1599년까지 장수하면서 마츠우라 씨가 에도 시기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무역의 중심지가 나가사키로 이동하면서 히라도는 쇠퇴하기 시작했지만, 그간 무역으로 얻은 부는 남아있었고, 조총의 생산과 유통, 화약 수입 등에 손을 대기도 했지요. 그리고 그 ‘약발’이 다할 무렵 재빨리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새로운 연줄을 마련하는 데 성공하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