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금적금왕 (1)
사람이 있으므로 비로소 만물에 의미가 있듯, 대명(大明)이 있으므로 비로소 천하에 의미가 있다.
대명은 천하의 중심이 아니라, 천하 그 자체다. 다만 그 변두리에 오랑캐 몇몇이 있는데, 개중 문명의 교화를 얻은 자들은 책봉받기를 청하고, 문명의 한두 조각을 겨우 득한 무리는 찾아와 조공을 할 뿐이다. 그 바깥에 무엇이 있든, 문명의 덕을 입지 못한 금수와 같으니 굳이 말할 것도 없었다.
천조의 위엄이 이렇게 바다와 같았다. 그런 바다에서 물 조금 퍼낸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내각수보(內閣首輔) 엄숭(嚴崇)의 생각은 그러하였다.
황상은 재위 20년째 되던 해(1541), 서원 만수궁(萬壽宮)으로 거처를 옮긴 뒤 조정의 정사를 돌보지 않았고, 환관과 도사들만을 가까이하였다. 조정의 신료들 중 천자를 알현할 수 있는 이는 둘 뿐이니, 하나는 엄숭이요 다른 하나는 그 아들 엄세번(嚴世蕃)이었다.
그러므로 같은 내각의 사람조차 황상의 용안을 뵙지 못하건만, 황명은 끊임없이 출납되었고, 그 황명은 오로지 엄숭을 거쳐 나왔다. 엄숭의 간악함을 깨닫고 그를 쳐내려 하는 자가 있을 때면, 엄숭은 노여워하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엄숭 대신 노여워해주는 황명이 내각에 내려오곤 하였다.
그리하여 달단의 우두머리 엄답이 하투(河套, 오르도스 지방)를 쳤을 때에는, 즉시 토벌할 것을 말하던 엄숭의 정적 하언(夏言)이 죽임을 당했고, 엄답이 만족함을 모르고 감히 북경을 에워쌌다가 물러난 지난 경술년(1550)에는, 병부상서 정여기(丁汝夔) 이하 수많은 신료들이 엄숭 대신 무고하게 죽임을 당했다.
엄숭 본인은 오로지 때를 기다리는 것과 때맞추어 아첨하는 것 외에 별다른 재주도, 국량(局量)도 없었으며, 엄세번의 용렬함은 아비보다도 더하여 청사(靑詞, 도교의 기도문)를 잘 지어 황상을 기쁘게 하는 것만이 유일한 재주였다.
허나 내각의 대학사들 중 엄숭은 그 재주가 가장 뛰어났으니, 내각에서 엄숭보다 더 훌륭한 사람은 이미 목숨을 잃었거나 그 기국(器局)을 숨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그간 조선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말인가! 이것을 어찌 그대로 황상께 말씀드리겠소? 말들을 해 보시오!”
‘여진 야인을 교화한 공로’ - 대체 그 일에 엄숭이 무슨 공이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로 예부상서를 다시 겸직하게 된 엄숭이 내각의 대학사들을 꾸짖었다. 번병(藩屛, 제후국)의 동정을 살피는 것이 바로 예부의 일이니, 따지고 보면 엄숭 자신이 무능한 탓이건만, 그 말 한 마디는 그 누구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장거정(張居正)은 또 누구이며, 어떻게 마음대로 나라 사이를 오갔다는 말이오? 불랑기의 승려라 함은 또 무엇이고?”
“흠흠, 장거정은 한림원에 있는 학사이고, 조선의 그자는 임거정이라 합니다.”
그 장거정의 스승이자, 본디 엄숭 대신 예부상서 물망에 올랐던 서계(徐階)가 옆에서 슬쩍 엄숭의 말을 고쳐주었다.
엄숭만큼 아첨의 재주가 있지만, 엄숭과 달리 저의 일을 제대로 하는 서계였다. 엄숭 앞에서는 항상 허리를 굽혔고, 또 다른 신료들 사이에서도 지난날 달단의 난리(경술의 변) 당시 북경을 지켜내면서 그 재주를 입증하였기에 인망이 높았다.
그러므로 이 내각에서 저렇게 은근하게나마 엄숭의 말에 토를 달 수 있었다.
“흠흠, 소호(少湖, 서계) 그대가 잘못 들은 것이오. 나는 분명 임거정이라 하였소.”
“노야보다 한참 연소한 사람으로서 민망할 따름입니다.”
엄숭의 억지에 서계가 금방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렇게 잘 아는 그대가 먼저 답을 하여보시오. 이번 조선의 일을 어떻게 상주할지.”
조선이 임거정의 반역도당 토벌을 위하여 오만 대병을 모으고 있다는 소문은 요동으로도 들려온 바 있었다. 그러나 엄숭이 그것을 믿고자 하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헛소문으로 정해졌다. 이미 북쪽 달단과 남쪽 왜구가 모두 시끄러운데, 동쪽까지 시끄럽기를 엄숭이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오만 대군 얘기는 사라지고, 한 도 전체가 들고 일어났다는 말도 수그러들었다.
임거정이 오만 대군을 모조리 무찌르고 그 나라 도성을 불태웠다는둥, 국왕을 내치고 꼭두각시를 세웠다는둥 헛소문이 잠시 돌았으나, 이는 더욱 허무맹랑한 말이라 역시 금새 사라졌다.
아마도 달단의 침공으로 민심이 놀랐기에 그런 유언비어가 돌았던 것일 테다. 서계와 같은 이들도 이렇게 단정하고서는, 조선의 일에 관심을 거두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임거정은 멀쩡히 살아있다 못해 마음대로 바다를 누비고 있었고, 조선왕 환(峘) 역시 그대로 있었다. 더구나 갑자기 불랑기가 어쩌고, 왜구의 수장 왕직이 저쩌고 하였으므로, 이 또한 놀랍다 못해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흠흠, 우선 황당하여 믿을 수 없는 것을 제쳐두고 사리에 맞게 헤아려보면, 아마 조선국의 사정은 이러할 것입니다.”
서계가 자신이 나름대로 결론지은 바를 내각 사람들에게 전하니, 여러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임거정은 그 나라의 군관으로, 오만 대군을 내었다는 말은 그가 나서서 병마를 조련하던 것이 와전되어 요동으로 전해진 것일 테다. 오만까지는 아니어도 어쨌든 그만한 군사를 지휘하였고, 또 그 다음에는 조선왕을 시위하는 금군의 장이 되었다 하니, 반드시 국왕 환의 총신일 테다.
이후 조선왕 환이 재물을 탐내어 경제사를 만드니, 총애를 받는 군관 임거정이 그 일을 도맡게 되었을 것이다.
“허나 어찌하여 바다 건너 왜국에 가게 되었다는 말이오?”
“주문(奏文)에 이르기를, 왕직과 그 무리가 대국에서는 왜구를 자칭하나, 정작 왜국에서는 스스로 참람되게 칭왕(稱王)하고 있다 합니다. 그러면서 주변 바다 오가는 이들을 모두 마음대로 가로막으니, 조선국에 귀부한 대마도라는 작은 섬의 왜인들이 도움을 청했다 합니다.”
왕직의 이름이 나오자 엄숭은 저도 모르게 잠시 움찔하였다. 그러나 곧장 평온한 낯빛을 다시 꾸며내었으므로, 눈매 날카로운 서계조차 이를 보지 못했다.
“그리하여 임거정이 이를 꾸짖고자 왜국 평호(히라도)에 나아갔는데, 마침 불랑기 배도 붙잡혀 있기에 이를 구한 것이라고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로 이는 사리에 맞습니다. 왜구 중 실제로는 천조의 백성으로 그저 머리를 밀었을 뿐인 가왜(假倭)가 많음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그처럼 무도한 자들이니, 반드시 왜인의 가운데서도 흉포한 본성을 감추지 못할 것입니다.”
“조선이 천조의 제일가는 번병이라 하나, 그래본들 일개 소국이오. 우리 또한 왜구를 제어하지 못하는데, 저들이 배 몇 척으로 그러한 공을 세웠다는 것을 어찌 믿겠소?”
“금상 즉위 초, 영파(寧波)에서 왜노(倭奴)들이 작변하였을 때, 조선왕 역(懌, 중종)이 그들의 돌아가는 수로를 막고 모조리 격파한 뒤 그 수괴와 구해낸 아국 사람들을 바친 바 있습니다. 조선이 능히 왜인을 제압할 수 있음이 이때 증험되었습니다.”
“그렇지. 혹여 그대가 알고 있는가 시험하고자 물어보았소.”
엄숭이 둘러대며 짐짓 아는 척을 하였다.
“그렇다면 이 청은 어찌하여야 하겠소? 그들이 말하기를 정학의 이치를 탐구하고자 먼바다로 나가려 하는데, 그 도중 천조의 포구에 정박코자 한다 하지 않았소?”
은근슬쩍 종계변무의 일은 빼놓고 말하는 엄숭이었다.
이전, 그러니까 공희왕(중종)의 대에 조선이 종계의 변무를 청할 때,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무시한 것도 당시 예부상서였던 엄숭이었다. 겉으로 내세운 핑계는, 황조(皇祖, 주원장)의 큰 가르침을 함부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그 청을 받아들였을 때 엄숭에게 돌아오는 이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번에도 황상의 귀에 그 말이 들어가기 전 적당히 쳐내려고 이미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었다. 이왕이면 천조의 앞바다를 지나겠다는 저 청까지 거절할 핑계가 있으면 좋겠다 여겼는데, 안타깝게도 서계에게는 그런 엄숭의 속마음까지 읽는 재주는 없었다.
“저들이 천조의 번병으로서 그 도의를 다하여, 남왜(南倭)의 근심을 없앤다면 그 청 또한 들어주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저들이 천지의 형상을 탐구하고자 남쪽으로 향한다는 것은 구색을 맞추기 위한 명분이겠지만, 그것만 하더라도 오직 이익만을 탐하는 다른 오랑캐와 같지 않으니, 그 교화의 정도를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저들이 천조의 해안을 지나 남쪽으로 나아간다면, 주현(州縣) 중 번듯한 포구를 갖춘 항주(杭州)·천주(泉州)와 같은 곳은 모두 왜구가 날뛰는 곳이므로 안전하지 않습니다. 생각건대 작은 어촌 몇 곳을 지정하여 조선인들이 빌린 불랑기 배가 그곳에 머물도록 한다면, 황상께서 번국을 위하는 마음이 두터움을 저들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엄숭 머릿속에 번뜩이는 명안 – 딴에는 그리 여겼다 – 이 하나 떠올랐다.
“그대의 말대로, 저들이 번병의 도리를 다하겠다는데 이를 막는다면, 황은(皇恩)을 드러내는 이치에 맞지 않을 것이오. 허나 조선의 서생과 불랑기 오랑캐들을 궁벽한 어촌에 머물게 한다면, 저들이 천조의 번영함은 알지 못하고 오히려 우습게 여길 것이외다.
지금 그대가 말한 항주, 천주와 같은 고을은 큰 배가 오가는 포구로서 오래토록 번영하였소. 그러니 불랑기의 대선(大船)도 능히 수월하게 정박할 수 있을 터.”
“허나 말씀드린 것처럼, 그러한 곳에는 왜구가...”
“그러면 더욱 잘 된 것 아니겠소? 조선이 스스로 왜구를 토벌하겠다 청했는데, 마땅히 싸워서 물리치겠지. 이이제이의 계책이 이런 것 아니겠소이까.”
“수보(엄숭) 노야!”
“이 사람의 생각에는 지금 스스로 말한 바가 절묘하다 여겨지는데, 다른 신료들은 어떠하실지 모르겠소이다.”
무어라 더 반대하려던 서계는 스스로 입을 막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내가 어리석어 황은을 마저 갚지 못하였는데, 이제 충성스러운 번국에 대해서도 잘못을 범하는구나!’
가만히 있어도 조선이 왜구를 무찔러줄 터인데, 어찌하여 조선으로 하여금 천조의 뜻을 의심하게 할 빌미를 마련하려 하는가.
돌이켜보면, 서계가 애써 대처해낸 경술의 변 이후에도 엄숭은 이러하였다.
결국 엄답의 무엄함은 징치되지 않았고, 조정-즉 엄숭-은 오히려 엄답이 요구한 모든 조건을 들어주었다. 그리하여 손상된 천조의 위엄은 돌아오기는커녕 허울만 남았고, 엄답은 북쪽으로 물러나 호의호식하고 있었다.
서계와 다른 뜻있는 이들은 이것이 전연의 맹(澶淵之盟)과 무엇이 다르냐며 한탄하였으나 한탄으로 그칠 뿐이었다.
“수보 노야의 헤아림이 참으로 치밀하니, 황상께서도 반드시 기뻐하실 것입니다.”
“어찌 천조의 복(福)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엄숭 또한 뒷맛이 시원치 않기로는 마찬가지였다.
아직 정정하기는 하지만, 이미 고희(古稀)를 넘긴 엄숭이었다. 오직 자신의 재주로 가문을 크게 일으켜 세웠건만, 안타깝게도 그의 아들 세번에게까지 그 재주가 다 전해지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연성공(衍聖公, 공자의 적손이 세습하는 작위)의 집안에 손녀딸을 시집보내고, 또 황상의 총애를 받는 도사와 환관들에게 아들을 소개시켜주어, 저의 뒤를 이을 수 있도록 준비해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준비 중 하나로, 엄숭은 왕직 그자에게서도 적잖은 상납을 받고 있었다. 왕직이 노략질하거나 장사를 하여 버는 수익은 황금이 되어 돌아오고 있었으니, 이만한 사냥개가 또 어디 있으랴. 그 사냥을 당하는 이들이 같은 천조의 백성이라는 것은 엄숭에게는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왕직이 칭왕까지 하였다니 괘씸하기는 하지만, 아직은 그 목줄을 버리고 솥을 대신 꺼낼 때가 되지는 않았다.
이제 엄세번을 통해 왕직에게도 조선의 움직임에 유의하라는 말이 전해질 것이다. 왕직 또한 저의 주제를 안다면, 한동안 적당히 몸을 사리면서 보다 안전한 돈벌이만 열중할 터.
그러나 만에 하나, 정말로 조선이 왕직을 토벌하게 된다면 어찌 될 것인가? 그럴 공산이 얼마나 되겠느냐 스스로 위안하면서도 마음 한 편 걱정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올해 농사는 소풍(小豊)이라 부르기에 족하였다. 삼남의 사람들이 겨울철에 열심히 사람 머리통을 깬 덕분에, 누구도 감히 가운데서 장난질을 칠 엄두를 못 내었고, 또 백성들 민심을 어떻게든 끌어모아야 했으므로 수탈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올해도 이전 몇 해와 마찬가지로 소소한 재변이 끊이지 않았건만, 백성들 먹고사는 일은 제법 풍족하게 될 것이라고들 하였다.
임자경장의 세 법도, 올해 가을 몇몇 군현에 적용해본 뒤 폐단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대동법은 충청도에, 균역법은 전라도에, 사창제는 경상도에 각각 시험해보기로 하였고, 그러고도 문제가 없다면 다시 이듬해에는 전국에서 시행하기로 하였으니, 백성들 중 호들갑스러운 이들은 벌써부터 성세(盛世)를 운운하였다. (주로 지난 겨울에 다치지 않고 남을 다치게만 한 이들이 그렇게 말했다.)
그와 더불어, 대마도 종씨가 어려운 가운데서도 끌어들인 상인들이 벌써 동래와 사카이를 오가고 있었고, 또 북변의 ‘백정여진’들도 종종 저들이 ‘사들인’ 귀물을 바치거나 팔기 위해 도성을 오가고 있었으므로, 한양 저자에 도는 재물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이처럼 그럭저럭 태평한 가운데 꺽정이는 느닷없이 중추부로 출두하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올해 그럭저럭 풍년이라 다들 낯빛 밝을 줄 알았는데, 이 무슨 일이오?”
꺽정이가 중추부 대신들을 휘 둘러보고는 툭 말을 던졌다.
이제 별장도 아니요, 경제사의 일을 도울 뿐 그쪽에서 무슨 벼슬을 받은 것도 아닌 꺽정이였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 불려와 서는 것은 영 의아한 일이었다.
“예부로부터 자문(咨文)이 내려왔다네.”
마음고생 심한 만큼 주름은 깊어지고 눈빛은 형형해지는 이준경이 중신들을 대표하여 답하였다.
“예부라면 대국의 예조 아니오? 꽤 빨리 답이 왔구려.”
“빠른 것보다 중한 것은 자문의 내용 아니겠는가.”
자문은 조선이 번병의 도리 다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라면서 겉치레 칭찬하는 문장으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그 말미에, ‘항주와 천주 두 곳은 왜구가 날뛰어 천조의 근심이 된 지 오래인데, 문명을 아는 조선의 사람들이 이곳을 지난다면 반드시 민심이 안정될 것이다.’라는 말이 살짝 들어가 있었다.
심지어 종계변무의 일에 대해서는, ‘번신(藩臣)으로서 직분을 다한다면 어찌 그 충근(忠勤)이 보답받지 않겠는가?’ 하는 문장 하나로 그쳤을 뿐이었다.
우선 뭔가를 청하기 전에 너희가 장담한 대로 왕직과 왜구부터 잡고 보라는 뜻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아니, 이건 너무한 것 아니오? 물론 지난번 싸우면서 보기로 화포만 있으면 왜놈들은 능히 물리칠 수 있을 것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국이라고 해서 배포가 클 줄 알았는데 땅만 큰 모양이오.”
명과 조선 사이는 군신과 부자의 관계이니, 조선의 관원이라면 명국의 배신(陪臣)으로서 또 그 의리가 있다. 허나 벼슬하지 않는 꺽정이에게야, 대국 천자건 주씨네 둘째아들 후총(厚熜)이건 그냥 남 아니겠는가. (굳이 따진다면 천자는 만민의 어버이지만, 아마 황제도 꺽정이 같은 아들은 사양할 것이다.)
그러므로 꺽정이가 시원하게 대국 흉을 보니, 대신들도 말은 못하지만 은근히 찬동하였다. 하지만 이준경은 그런 좌중과 마음을 함께할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수상한 배가 외딴 섬이나 바닷가 으슥한 곳 근처를 배회하고 있다는 장계가 남쪽에서 올라오고 있네. 오늘까지 합하면 제주, 대정, 흥양, 해남, 영암. 벌써 이렇게 다섯 고을에 달하네.”
“아이고.”
“‘아이고’가 맞는 말이지. 필시 왕직일 것이야.”
이준경으로부터 꽤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이윤경이 말했다.
지난날 의민당을 막지 못해 사직에 죄를 지었다며 한사코 벼슬을 거부하던 이윤경이 이 자리에 돌아온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엥? 어르신은 그것을 어찌 아시오?”
“자네 처갓집의 율곡이 『공보』에 ‘남양신문(南洋新聞)’이라고 싣고 있지 않던가. 내 재미있게 읽고 있네. 그 행간만 유심히 읽어도 족히 헤아릴 수 있는 사실이라네.”
남양신문이란, 이이와 명희가 – 물론 『공보』에 실릴 때는 율곡 두 글자만 적힌 채로 나갔다 – 일본 다녀온 이야기에 더하여 핀투와 하비에르에게 들은 온갖 새로운 사정을 모아서 싣고 있는 글이었다.
“아, 남양신문. 그거 내 안사람도 함께 쓰고 있소이다.”
꺽정이가 제법 자랑스럽게 말했는데, 듣는 고관들 생각에는 반가의 규수가 백정과 혼사 치르는 것만큼 규방 바깥의 일에 대해 글 쓴다는 것 역시 썩 떳떳하지는 못한 일이라, 머쓱한 헛기침만 돌아왔다.
“흠흠, 좌우지간, 대국에서도 저리 답하고, 이미 남쪽 근해에서도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보이고 있으니, 그대들이 말하는 말라가와 암본도로 나아가기 전 반드시 왕직을 물리쳐야 하게 되었네.”
“웬일로 나리들께서 우리 민주당 일을 이렇게 걱정해주시오?”
이윤경은 농 섞어 대꾸하고, 그 아우 이준경은 진지하게 답했는데, 두 사람의 말에 모두 진실이 담겨 있었다.
“그야 민주당만의 일이 아니게 되었으니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일개 벼슬아치가 감히 정학의 앞길을 막을 수는 없지. 요즘 선비들이 얼마나 그 항해를 두고 의기(義氣)가 등등하던지, 참.”
“허나 더 중한 것은, 종계변무의 일일세. 성절사(聖節使)가 부쳐온 글에 따르면, 여전히 엄숭 그자가 천조의 정사를 농단하고 있으니, 우리가 큰 공을 세우고 그것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다시 변무를 청하기가 어렵게 되었네.”
그리하여 조선국은 어떻게든 왕직과 그의 왜구를 물리쳐야 하는 지경에 처하였는데, 준비할 시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저 돈벌이 때문에 이런 사달이 났다면 임 당수만 탓하겠지만, 종계변무라는 중대사가 엮여버렸고, 더구나 그 중대사와 이번 항해를 엮은 것은 다름아닌 주상이었으니, 누구를 탓할 계제는 더더욱 아니었다.
“왜구는 무릇 약탈로서 군량을 충당하니, 작정하고 큰 무리를 이루어 쳐들어온다면 반드시 벼나 보리를 거둔 뒤, 즉 계춘(늦봄)이나 계추(늦가을)에 입구(入寇, 도적이 쳐들어옴)할 것이야.”
“그리고 놈들이 정탐하는 꼴을 보니, 내년 봄보다는 올 가을걷이 끝날 무렵 쳐들어올 공산이 크다, 이 말씀이겠구려.”
“그렇다네. 그래서 자네를 이렇게 부른 것 아니겠는가. 우리 조선 땅에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군세 중 흑의군이 가장 정예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고, 또 근래에 왜적과 싸워 이긴 장수는 자네뿐이니.”
“틀린 말은 아니구려. 아, 그 얘기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만약 그 종가놈(소 모리타네) 같은 왜인이 흑염의 도마뱀인지 뭐시긴지 말할 것 같으면 모두 흰소리니까 믿지 마시오.”
엉뚱한 말이 사족처럼 붙었는데, 중신들은 이미 꺽정이와 민주당 등쌀에 여러 차례 시달린 바 있었으므로 또 저놈이 저만 아는 얘기 하는구나 여기면서 가볍게 넘겼다.
“흑의군도 흑의군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전선이오. 이 사람이 타보니까, 그 판옥전선이 꽤 쓸만합디다, 그때 이후로 몇 달은 족히 지났으니 적잖이 만들어지지 않았겠소?”
과연 윤원형의 위세 속에서도 어떻게든 나라가 나라 꼴 갖추고 이어가도록 애썼던 이준경답게, 임꺽정이 그 도깨비 중 데리고 오면서 한창 시끄럽던 시국 가운데서도 왜변에 대한 준비는 나름대로 갖추어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빠르게 일이 닥칠 줄은 이준경도 알지 못했다.
“정걸, 이제는 정 첨사지. 좌우지간 그이가 하필이면 저 서양의 대선을 보는 바람에, 판옥전선을 더 개량하는 데만 힘을 쓰고 있었다 하네. 뒤늦게 독촉하여 우선 낡은 맹선을 모두 판옥선으로 바꾸도록 하였지만, 만시지탄(晩時之歎)만 하게 되지 않을까 두려울 따름이라네.”
“그러니까... 의지할 만한 군세는 우리 흑의군 밖에 없고, 전선도 제대로 정비되려면 한참 멀었고, 막아내기는 어려운데 놈들이 쳐들어올 곳은 많고, 실패라도 하게 되면 나라의 앞날이 어둡게 된다, 얼추 그런 말씀이시구려.”
꺽정이가 거칠게 정리하였으나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준경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전생의 을묘년 왜변을 기억하던 꺽정이 생각에는, 그렇게까지 암울한 상황도 아니었다.
“그러면 우리가 막을 게 아니라 먼저 쳐들어가면 될 일이지. 그렇지 않소?”
그리하여 을묘년에 조선이 왜구의 변을 당하는 대신, 임자년에 왜구가 조선에게 변을 당하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왜적을 성토하는 글이 양보에 모두 실렸고, 이는 대마도 통해 규슈로도 들어갔다.
그리고 그로부터 다시 며칠 지나지 않아, 오랫동안 끊겼던 조선과 무로마치 막부 간의 연락이 다시 통하였는데, 구구절절한 양국 수호(修好)의 말을 모두 지운 다음 요체만 따지면 바로 이것이었다.
“도적을 정벌하려 하니 길을 빌려주시오.”
그와 함께 대마도 소 씨는 히라도의 마츠라 당에게 슬쩍 글 하나를 보냈는데, 보는 사람의 편의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조선의 언문과 한문을 마구잡이로 섞어 쓴 서한이었다.
알아보는 사람이 없어, 함께 하야시 쇼군에게 시달리는 사이이니 좀 도와달라며 소 모리타네에게 부탁해 겨우 해독하였다.
그리고서는 가신들 앞에서 당당하게 읽는 시늉을 한 뒤, 크게 외쳤다.
“과연 기개가 조선의 천하인답구나!”
그리고 어리둥절해 하는 가신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조선이 쳐들어온다! 마츠라 수군의 이름을 걸고 막아야 한다! 휘왕(왕직)에게도 알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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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화 작가의 말에 살짝 언급되었던 엄숭은, 명나라 후기의 대표적 간신입니다. 1480년생으로 87세까지 장수하면서, 명나라에 많은 해악을 끼쳤지요. 가정제가 정사에 흥미를 잃고 여색에 빠지고, 그 다음에는 도교에 빠지자, 이를 이용하여 엄숭은 작중에 나온 것처럼 황제의 권력을 대신 행사하며 막대한 위세를 부렸습니다.
특히 그는 정적을 직접 해치는 대신 교묘한 처세로 정적의 경계를 풀고, 그러다가 남의 손을 빌려 정적을 제거하는 수법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엄숭도 세월의 흐름은 이길 수 없었습니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의 총기도 쇠하게 되었고, 기민하게 가정제의 환심을 사던 아첨의 재주도 무뎌지게 되었지요. 그리고 마침내 1562년, 엄숭과 같은 수법으로 은인자중하며 조금씩 엄숭에 반대하는 여론을 모아나갔던 서계에 의해 마침내 탄핵을 당했고, 아들 엄세번은 처형당하고 엄숭 자신은 삭탈관직을 당하게 됩니다. 이후 구걸하면서 연명하다가 1567년 어느 묘지의 사당에서 굶어죽은 채 발견됩니다. 한 시대를 좌지우지하던 권신치고는 매우 비참한 죽음이었지요.
작중 언급된 왕직과 엄숭의 결탁은, 원 역사에서는 서계가 엄세번을 탄핵할 때 내걸었던 명분 중 하나였습니다. 당시 엄세번의 남경 저택에서 발견된 금괴만 이만 냥에 달했다고 하니, 충분히 근거가 있는 고발이었다 하겠습니다. 실제로 엄숭은 당시 절강성 해안 일대를 방비하며 왜구를 막던 – 비록 군재는 평범했지만 나름의 성과도 냈습니다 – 장경을 탄핵해 죽이고, 그 자리에 자신의 사람인 호종헌을 앉힌 바 있습니다. 호종헌은 군재가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가 애용한 수법은 왜구 내부의 분열을 이용하거나 왕직을 잡아 죽였을 때처럼 왜구 지도자들의 개인적인 약점을 파고드는 식이었는데, 만약 정말로 엄숭과 왕직 사이에 관계가 있었더라면 이것 역시 엄숭이 제공한 내부정보 덕분이었을 것입니다.
한편, 사람 눈앞에서 듣기 싫은 말은 하지 않던 엄숭의 처세술 때문에, 조선 역시 처음에는 엄숭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종계변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오래 이어지고, 엄숭의 악명 역시 조금씩 중국 밖으로 퍼져나갔기 때문에, 1550년대 말이 되면 어전에서 군신이 합심하여 엄숭의 험담을 하고, 사관까지 덩달아 엄숭 욕을 덧붙이는 나름대로 훈훈한 기록이 실록에 보이게 됩니다. 이후 명이 멸망하면서 더욱 엄숭을 마음대로 욕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는데, 특히 북로남왜라는 격동의 시기에 기승을 부린 간신이라는 점으로 인하여 엄숭은 명나라를 배경으로 하는 조선의 고전소설 속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악역이 되었습니다.
작중 언급된 이이제이, 즉 조선으로 하여금 왜구를 진압하게 하자는 것은 원 역사에서도 실제로 명 조정 내에서 제안된 바 있는 아이디어였습니다. 영파의 난 당시, 해안을 약탈하고 돌아가던 오우치 씨의 함대 일부가 풍랑을 당해 조선 해안에 난파한 일이 있었는데, 조선은 이들을 쉽게 격파하고 포로는 모두 명으로 보내게 됩니다. 체면을 크게 구겼던 명은 이 일을 두고 조선을 크게 치하하였고, 정통성이 약했던 중종 역시 이를 자신의 치적으로 내세우면서 일은 윈-윈으로 끝나는 듯했지만, 명이 조선의 일본에 대한 영향력을 과대평가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지요. 이는 나비효과를 일으켜, 임진왜란 초기에 명이 조선의 구원 요청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