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금적금왕 (3)
자잘한 섬까지 모두 합쳐도 고작해야 대마도보다 조금 작은 정도인 고토 열도에서 후쿠에 섬은 유일하게 쓸 만한 평지가 있는 섬이었다.
왕직이 이 섬을 차지하기 전만 해도 고작해야 해적들이나 들리는 작은 포구였던 이곳은 지난 십 년 사이에 꽤 그럴듯한 마을로 변하였다. 그래본들 땅이 좁으니, 저 히라도의 성세에는 비길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곳 후쿠에 섬이 다른 섬들보다 방비가 허술하냐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왕직의 저택에서도 보이는 조그만 만에는 크고작은 섬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고, 이는 곧 든든한 망루이자 방벽이 되었다.
이 난공불락의 수채(水寨)를 치는 길은 단 하나, 동남쪽 바닷길. 그리고 고토와 마주보고 있는 규슈의 어지간한 포구는 왕직의 손에 들어와 있거나, 적어도 왕직의 사람들이 나가서 장사(겸 염탐)를 하고 있었으므로, 그 누구도 이 후쿠에 섬을 왕직 몰래 습격할 수는 없을 터였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여겼다.
왕십육과 서해 두 두령을 히라도로 보내고서, 조선 수군을 격파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만 기다리던 왕직의 귀에 우레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이 대체 무슨 일이냐!”
“적입니다, 두목! 적이 나타났습니다!”
황망한 가운데 ‘전하’ 소리는 서로 깜빡하였다.
“무어라? 놈들이 벌써 히라도를 지났다고? 서해와 왕십육 두 놈은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이냐?”
“나카도리(中通) 쪽에서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습니다! 놈들은 아마 동남쪽 바다를 통해 들어온 것 같습니다!”
“동남쪽? 어떻게...?”
헐레벌떡 저택 바깥으로 나갔다. 저택이 포구 전체가 눈에 들어오는 언덕 위에 있다 보니,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난리통도 비로소 한눈에 들어왔다.
어디 가든 눈에 띄는 큰 남만선 한 척과, 그보다는 작은 조선 배 열한 척이 나란히 늘어서서는 포구의 복선과 자잘한 다른 배들에게 양껏 화포를 퍼붓고 있었다.
“핀투, 그놈이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 내 그 오랑캐 놈을 잡으면 팔다리를 하나씩 찢어서 상어에게...”
왕직이 이를 뿌드득 가는데, 양아들 모해봉이 그제야 황급하게 달려왔다.
“헉헉! 아버지! 당장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얼른 섬 북쪽 포구로 도망을...”
그러나 왕직은 아들의 말에 응하지 않았다. 눈에 독기가 어렸으되, 궁지에 몰린 쥐의 독기가 아니라 위험한 먹잇감을 노리고자 작정한 상어의 독기였다.
“아니, 여기서 놈들을 격멸한다.”
“아버지, 하지만 지금 포구의 배들은 도저히 출항할 수 없습니다! 아직 가라앉지 않은 배도 곧 가라앉을 것이고, 거기에 타야 할 무리들도 다들 흩어져 도망치고 있습니다!”
왕직이 모해봉의 머리를 부여잡고는, 포구를 향해 돌렸다.
“이놈아, 정신 차리고 저 배들을 보아라. 저 배들 중 풍랑에 시달린 것처럼 보이는 배가 있느냐?”
“어, 없습니다. 저렇게 놈들의 기세가 높으니 우선 피신을...”
“멍청한 놈. 조선에 먼바다 오가는 재주가 있었다면 이 아비 귀에 어찌 아니 들어왔겠느냐? 필시 핀투 그놈에게 뱃일을 배운 것이다. 그 말인즉슨, 지난 몇 달 동안 저것만 죽어라 연습했다는 뜻일 터. 먼 바다 다니는 데만 힘썼으니 어디 수전(水戰)의 진형이나 제대로 짜보았겠느냐?”
왕직이 처음 잠상(潛商, 밀무역)에 손을 댔을 때만 하더라도 구색이나마 맞춘 수군이 대명의 해안에 조금은 남아 있었다. 그때 그들의 진법을 눈여겨보았던 – 목숨이 걸린 일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 왕직이 보기에, 저들 조선 수군의 진영은 영 어설펐다.
“너는 가서 내 아래의 배와 네 무리의 배를 모두 끌어와라. 저놈들은 그저 죽 늘어서서는 포구의 배에 화포 쏘는 데만 열중하고 있으니, 놈들의 뒤를 날랜 배 여러 척으로 치면 놈들은 달아나지 못한다.”
“그때까지 놈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음, 네 말에도 일리가 있다. 마침 진사혜 그놈 아래에 있다 항복한 놈들이 있었지. 그놈들을 우선 히사카(久賀) 쪽에서 내보내서 저놈들의 화포에 먹이로 던져주어라. 그사이 너는 먼바다 쪽에서부터 차근차근 놈들을 에워싸도록 해라. 왕십육과 서해 두 놈에게도 연통을 보내어 속히 돌아오라 하고.”
“예, 아버지!”
어느새 왕직의 목소리가 차분해지며 여유가 돌아왔다. 그만한 담력이 없었더라면 바다의 왕을 자칭하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저의 양아비를 보며 모해봉도 어느새 두려움을 떨쳐내었다.
“알아들었으면 얼른 가라! 눈앞의 먹잇감을 놓쳐서야 되겠느냐? 나도 곧 따라가겠다!”
모해봉은 후다닥 달려나가고, 왕직도 몸을 풀기 시작했다. 휘주의 보잘것없는 소금 상인으로 시작하여 이제 생의 가장 큰 도박에 몸을 맡겼다. 그 옛날 산과 바다를 손수 누빌 때 그랬던 것처럼, 다시 칼을 잡을 때가 왔다.
“자, 들어라!”
그사이 적잖은 부하들이 모여들어 있었다. 그들 또한 모해봉과 마찬가지로 왕직의 기세가 옮아 제법 정연함을 되찾았다.
“너희는 당장 포구로 달려가라! 지금 가라앉은 배에 딸린 머저리들이 지금쯤 얼이 빠져 있을 테니, 얼른 그놈들을 붙잡아서 한데 모아라!”
“이제 슬슬 물러나서 북쪽 섬에서 오는 증원에 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핀투 선장이 수(守) 다대포첨사로서 이번 원정에서 임거정 당수를 보좌하여 (명목상으로는) 수군을 지휘하게 된 정걸에게 외쳤다.
“아니 되오! 본디 계획한 바가 있으니 어찌 지금 물러나겠소!”
화포가 쏟아지는 것을 보며 멍하게 있던 – 보면 볼수록 멋이 있었다 - 정걸이 화들짝 놀라며 답했다.
“그게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지 않습니까? 예상보다 포구에 있는 배가 적습니다. 그만큼 북쪽 후미진 곳에 많이들 숨어있다는 뜻이겠지요!”
핀투의 군사 경력이라면, 고작해야 신참 항해사 시절 이교도들과 투닥거렸던 것이 전부였다.허나 그런 핀투가 보기에도 지금 조선 함대의 진형은 위태로웠다.
“어차피 무슨 복잡한 진을 짜서 놈들을 상대할 방도도 없소이다. 이미 이곳까지 왔으니 그저 계획한 대로 밀어붙일 따름이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대와 함께 우리 뱃사람들이 수조(水操, 수군의 훈련)할 때, 화포 쏘는 것을 본 적이 있소?”
당연히 없었다.
“배 모는 이들은 일 래과라도 더 항해를 해보아야 하였으니, 화포 쓰는 수군은 따로 조련을 하였고, 수전에서 진형 짜서 맞서는 것은 해본 적도 없소. 그러니 진형 바꾸어 적습에 대비한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지.”
고작 몇 달간 핀투에게 이론을 배우고, 실습은 한 달 조금 넘게 한 것이 전부였던 이들 판옥선들이 한 척도 낙오하지 않고 이 원양까지 나올 수 있던 데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있던 것이었다.
지휘의 (실제) 총책을 맡고 있는 민주당 모주 이지함이 두 사람 다투는 것을 듣고 이물 쪽으로 올라왔다.
“훈련 부족한 것을 염두에 두고 짠 계획이외다! 핀투 선장은 걱정 거두시오!”
그들이 수전에 힘쓰지 않은 것은 물론 시일이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민주당 사람들 사이에서만 얘기된 보다 비밀스러운 목적을 위해서기도 했다.
그 말이 밖으로 새어나가면 곤란하게 될 수도 있으므로, 정걸과 핀투에게도 그 전모를 숨겼다가 그들이 며칠 전 제주도를 떠나 먼바다로 나올 때가 되어서야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어떻게 걱정을 안 할 수가 있겠습니까? 놈들이 몰려오기 전에 임 당수가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면 우리는 큰일납니다!”
“그 임 당수를 믿으라 이 말이오.”
임 당수의 실력이라면, 저의 눈앞에서 공중제비 돌던 것만 떠오르는 핀투였으므로, 이지함의 말에 썩 공감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믿지 못하는 자에게 곧 증표가 드러나니, 화포 사거리 바깥쪽에 모여서 우우 떠들던 포구의 왜구 무리들에게 곧 벼락같은 재난이 닥쳤던 것이다.
“저만하면 증거가 되겠소?”
이지함이 웃으며 말했다.
“여기서 이기면 우리는 나라의 공신이 된다! 해적 떨거지가 아니라 우리 두목님 전하의 신하가 된다는 것이야!”
왕직의 저택으로 올라가는 언덕 기슭에 족히 수백은 될 무리가 모였다. 이제는 바다와 일체가 된 배에 딸린 선원들, 그리고 본디 이곳에서 머물다가 때로는 노략질도 하고 때로는 상인들 따라 막일도 하는 자들이었다.
누구는 왜도를 붕붕 휘두르고, 누구는 바닷바람 맞아가며 잘 묵은 목봉을 휘휘 내지르면서, 이곳 뭍에 오르지는 못하고 멀리서 비겁하게 화포나 쏘는 놈들을 욕하고 놀려대었다.
“물러나지 마라! 우리 배들이 저놈들 뒤를 칠 때까지만 버티면 우리 피는 안 흘리고 이길 수도 있다!”
“저놈들 눈길만 계속 끌어라! 어차피 여기까진 안 날아온다!”
그 말을 비웃듯, 상 투메 호에서 몇 발 화포가 날아와 언덕 지척에 흙먼지를 날렸다. 그러나 못 맞춘 것은 그대로요, 그 위력도 조선 화포에 비하면 형편없어 보였다.
“우우, 이놈들! 기세만 높게 쳐들어오더니 고작해야 그놈의 화포가 전부냐?”
“하하하! 역시 소국 놈들은 싸움도 좀생이처럼 하는구나!”
“딴에는 너희도 대국 사람이다 이거구나. 그래, 왜국 싸움 솜씨는 얼추 맛보았으니 그러면 대국 솜씨도 좀 보자.”
“엥?”
비웃고 떠드는 와중에 이상한 말이 들려와 고개를 돌리려던 녀석은, 그 고개를 다 돌리지도 못한 채 목과 머리가 따로 놀게 되었다.
치솟는 피를 신호로 삼아, 검은 옷 차려입은 무리들이 언덕 옆에서 나타났다.
“쳐라!”
포구에 들어서기 직전 작은 배를 내려, 섬 기슭에 먼저 상륙하였던 흑의군들이었다. 안락하게 모래톱 밟으며 땅과 재회하는 대신 야트막한 절벽 하나를 기어올라야 하기는 했지만,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은밀하게 뭍에 오를 수 있었다.
물론 그쪽에도 보초 서는 자 없지 않았지만, 이미 포구 쪽에서 벌어지는 난장판에 모두의 이목이 쏠려 있던 터라 끽소리 내지 못하고 제압을 당했던 것이다.
그 뒤로는 아주 수월하였다. 이지함이 저의 나침의(羅針儀, 나침반)를 빌려준 덕에, ‘내린 곳에서 북서쪽으로 약 4분의 3 레구아’만큼 가면 왕직이 머무는 마을이 나온다는 핀투의 설명대로 초행길 산길을 쉽게 헤쳐나갈 수 있었다.
“이놈들,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냐!”
물 위의 싸움이라면 자신 있는 왕직조차 당황하여 뒤로 물러났다.
“야, 네가 네 입으로 다시 만날 때 본때 보여준다 하지 않았더냐? 한 번 본때 보여보거라!”
왕직의 복건 말도, 꺽정이의 조선말도 통변해줄 사람은 없었다. 대신 한쪽은 칼로 피 튀기며 비웃고, 다른 한쪽은 뒷걸음치는 것으로 대꾸할 뿐.
“여봐라! 저놈이 우두머리이니 저놈만 잡으면 된다!”
“그래! 나만 잡으면 된다! 얼른 와 보아라!”
말로는 오라 하면서, 기껏 가까이 오는 중생들은 멀리 저승으로 보내버리니 참으로 언행이 따로 노는 작자였다.
허나 저 거인 근처에서만 죽음이 노니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야! 역시 땅 밟고 싸우니 좋구만!”
“이놈들아! 지난번 설욕을 해주마! 도리깨 받아라!”
일전에는 배 위에서 낯선 싸움을 하느라 고전했던 흑의군들이었다. 왜도 무서워 방패로 몸을 가리며 겨우 버텼던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이들이 외쳤다. 물론 그때 왜적은 진퉁 왜인인 마츠라 당이요, 지금 왜구는 대부분이 명국 사람들이지만, 흑의군 눈에는 다 같은 왜놈이요 다 같은 머리통이었다.
“세상에! 저것이 사람은 맞나?”
“저쪽에서도 달려온다! 뭉쳐라! 뭉쳐!”
임 당수의 단련을 손수 겪은 이들, 그리고 그것을 겪은 이들이 제멋대로 부풀린 단련을 겪은 후임들로 이루어진 흑의군 무리가 이미 저들 가운데서 날뛰는 꺽정이로 인해 전열 흐트러진 왜구들을 덮쳤다.
“아이고!”
“하하! 머리통 쪼개는 맛이 있구나!”
장창을 내지르면 그 장창 채로 붙잡혀 날아가고, 칼을 휘두르면 도리깨가 머리로 날아오며, 방패를 내세우면 몸통으로 부딪혀 자빠뜨린다.
“우리 당수가 이런 맛으로 사람을 조련시킨 모양이다! 이놈들 뭍에서는 별 것 아니구만!”
“조선은 무슨 요괴만 골라서 군졸로 쓰나? 저걸 어떻게 당해내!”
“야, 글렀다! 도망쳐라!”
배 위에서라면 마츠라 수군보다도 더 무시무시한 왕직의 왜구들. 특히나 그들의 목숨이나 재보가 걸려있다면 그에 비례하여 그들의 막싸움 솜씨도 올라가곤 하였다.
허나 물개가 암만 물에서 날래더라도 뭍에 올라오면 그냥 개보다도 못한 법.
더구나 목숨을 아끼려면 어찌해야 할지를 상냥하게 반례(反例) 들어주며 보여주는 꺽정이가 있고, 뒤이어 흑의군도 설득을 거들어주므로, 전의가 꺾이는 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꺽정이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그놈이 도망쳤다! 누구 본 놈 있느냐?”
“왕직 낯짝을 저희가 어찌 압니까?”
흑의군 패두로 따라온 양벽이 볼가에 튄 피를 소매로 훔치며 대꾸했다.
“퍽 의리 없는 놈이다. 제 아랫놈들 목숨 던져가며 홀로 내빼다니. 내가 가서 붙잡아 올 테니 너희는 본디 계획한 대로 하면 된다. 알겠느냐?”
“맡겨만 주십쇼. 도둑이 도둑질 못하면 어디 쓰겠습니까.”
“그래, 낯짝 알아보는 재주 없으면 그런 재주라도 있어야지.”
한 번 비꼬고는 곧장 뒷산 향하여 달려 나가는 꺽정이었다.
꺽정이 등 뒤에서 대신 지휘 맡은 양벽이 이리저리 지시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 저기 저 고래등 같은 집이 왕직 놈 거란다! 털자!”
후쿠에 섬은 고토의 다른 섬이 그러하듯 후미진 만과 곶이 많았다. 왕직이 머물던 포구에서 북쪽, 산과 곶 사이에 절묘하게 움푹 들어간 만이 하나 있었는데, 자잘한 섬과 다른 곶으로 드나드는 수로가 가려져 밖에서는 쉽게 알 수 없었다.
이름도 그럴듯하게 ‘안쪽 포구’(奧浦, 오쿠우라)라 지어진 그곳을 향해 왕직은 부하 몇 명만을 대동한 채 힘껏 달리고 있었다. 모해봉 녀석이 꽤 끌고 나갔겠지만, 아직 배 한두 척은 남아있을 터.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임가 놈아!’
지금껏 많은 싸움을 해 왔지만, 마지막에 웃는 것은 항상 왕직이었다. 오늘의 싸움도 마찬가지일 터.
어디선가 나타난 조선 군졸들, 그것도 명에서도 본 적 없던 정병(精兵)들로 인하여, 저의 저택에서 여유만만하게 버티는 시늉을 하며 위엄을 세우려던 심산은 완전히 어그러졌다.
그러나 결코 끝이 아니었다. 지금쯤 그의 수양아들이 북쪽 섬에서 제법 배들을 모아 남하하고 있을 터. 그들과 합류하여 왕직 자신이 선단을 손수 지휘하면 된다.
“헉, 헉. 잠깐 쉬다 가자꾸나.”
“예, 두목.”
“이 짓도 오랜만에 하니 숨이 꽤 찬다.”
“아이고, 두목처럼 정정하신 분이 어딨다고 그러십니까.”
소싯적에 소금 등짐 메고 관을 피해 산 넘기를 예사로 알던 왕직이다. 그때 단련된 허파와 다리 힘줄이 아직 주인을 배반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이는 속일 수 없었다. 그러므로 산길 따라 한참을 달린 뒤, 좀 숨 돌릴 만한 여유 생겼다 여겨지자마자 이렇게 주저앉았다. 부하들도 그 안목을 믿으므로, 두목 따라 경계를 조금 내려놓았다.
허나 긴장이 풀리면 잡생각이 일어나는 법.
“필시 핀투 그놈이 일대의 뱃길을 안내하면서 이 섬의 지리도 모조리 고해바쳤을 겝니다. 오쿠우라로 가는 대신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떨지요?”
“퍽이나 위엄이 살겠다, 그러면. 조선 수군이 불타는데 바다의 왕 자칭하는 놈은 바다 위도 아니고 산속에 쳐박혀 있었다? 만약 내가 잔챙이 노릇하던 시절에 위에 그런 두령이 있었더라면, 당장 나부터 나서서 그놈을 상어밥으로 만들고 그 세력을 꿰찼을 게다.”
“그건 그렇지요. 저라도 그랬을 것 같긴 합니다.”
유유상종이라지만 영 섬뜩한 문답이었다.
“핀투 그놈이 오쿠우라를 몇 번 오가기는 했으나, 그 조선 도마뱀 놈도 지금쯤 우리 뒤를 밟고 있을지도 모르지. 허나 이 산길을 놈이 어찌 알겠느냐?”
높지는 않아도 꽤 험한 산이다. 그 골짜기 따라 굽이굽이 들어가는 이 산길은, 설령 신선이 하늘에 떠서 내려다본다 한들 쉽게 알아보지는 못할 것이다.
졸개 놈 말마따나, 핀투도 영 떳떳지 못한 물건(예컨대, 사람의 말을 하고 두 발로 걷는 물건)을 거래할 때 오쿠우라에 종종 들리곤 했다. 남만 오랑캐의 기이한 재주로 오쿠우라가 대충 어디쯤인지 알아챘을 지도 모르는 일. 그러나 이 산길마저 알아채지는 못했을 것이다.
“숨 다 돌렸다. 가자.”
“예!”
다행히 조금 지나니 내리막길이 시작되어, 무릎이 아플 뿐 숨은 덜 벅찼다.
마지막 구비를 돌 무렵, 먼발치에 익숙하고도 반가운 모습이 들어왔다.
“다 왔구나!”
“아직 배도 몇 척 남아 있습니다.”
“그래, 얼른 가서 패거리를 모아라... 잠깐. 저것이 무엇이냐?”
길가에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왕직과 수하들이 달려가 살핀즉, 바로 사람의 시체였다.
“여기 오쿠우라에서 배 몰던 놈입니다. 죽은 지 얼마 안 되었군요.”
“역시 알아보는구만. 안 오는 줄 알고 걱정하던 차였다.”
조선말과 함께, 길가 수풀에서 그림자 하나가 자라났다. 그리고 그 그림자에서 뻗어나오는 서늘한 빛 한 줄기.
“안타깝게도 너희는 두목 한 사람 빼고 여기서 다 절명하게 되었다. 팔자려니 하거라.”
“뭣...?”
외딴 산길에 다시금 피가 튀며, 서글픈 메아리가 울렸다.
“이제는 정말로 물러나야 합니다!”
임 장군의 친위대가 항구를 습격한 지도 벌써 꽤 시간이 흘렀다. 핀투의 계산에 따르면, 이제 언제라도 그들의 등 뒤에서 약이 잔뜩 오른 왜구 함대가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동남쪽으로 우회하여 들어오면 쉽게 이곳 후쿠에까지 들어올 수 있다는 말은, 뒤집어 생각하면 나머지 북쪽과 북동쪽, 동쪽으로는 반드시 다른 섬 옆을 지나야 한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그 섬은 지금쯤 후쿠에 앞바다로 열심히 돛 펼치고 노 저으며 나아오고 있을 왜구들에게는, 몸을 숨기고 바짝 다가와 그들을 급습할 수 있는 천혜의 가림막이 되어주고 있을 터.
핀투의 신경이 잔뜩 곤두설 무렵, 돛대 위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장! 적선입니다! 북쪽에서 두 척... 네 척... 다섯 척입니다! 동북동에서도 발견! 역시 다섯 척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뒤에 더 작은 배들도 뒤따르고 있습니다!”
언덕 위의 왕직네 저택을 약탈한 흑의군이 사람 보내어 알려오기를, 왕직은 섬 북쪽으로 도망친 고로 임 당수가 홀로 추격에 나섰다 하였다.
이지함은 재차 저의 사제를 믿으라 하였으나, 핀투로서는 벌써 눈앞이 캄캄해지는 일이었다.
그나마 정걸이 그 말을 듣고서는, 반 시진이면 끝날 줄 알았건만 아마 반나절은 걸리게 될 듯하니 이제라도 일자진((一字陣)을 만들어야 하겠다며 나섰으니, 핀투의 뜻이 조금은 통하였다.
그러나 그마저도 모양새가 느릿느릿하고 굼떠, 언제 놈들이 나타날지 두려워하는 핀투로 하여금 잔뜩 긴장토록 만들었다. 더구나 막상 진을 갖춰놓고 보니, 후쿠에 앞바다는 화포로 진형 이루어 제대로 교전하기에는 너무 좁았다.
“그래도 마침 진을 다 갖춘 다음 저렇게 몰려오니 다행이오.”
“화약은 얼마나 남았습니까?”
“아마 한두 번 더 쏘면 동날 게요. 될 수 있는 대로 가깝게 붙어서 쏴야지. 그래도 저 배들은 나름 몸집이 있으니, 일전에 평호(히라도)에서 보았던 왜선보다는 맞추기 쉽겠소이다.”
“아니, 그게 지금 할 말입니까?”
“그만 좀 떠시오. 이 사람보다도 더 바다 위에서 오래 지낸 사람이 뭘 그리 호들갑이오? 죽어도 이렇게 멋진 배 위에서 죽는다면 나는 여한이 없겠소.”
임 장군 옆에 있으면 사람이 다 이렇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이렇게 어디 한 군데 이상한 구석 있는 사람만 임 장군 근처에 모여드는 것인가?
어느 쪽이든, 핀투 또한 그의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다시 고찰해볼 때가 되었다 할 만했다. 여기서 살아나갈 수만 있다면.
그때, 오로지 포구 쪽만 보고 있던 이지함이 외쳤다.
“되었다! 되었어! 꺽정이가 해냈다!”
그리고 저의 뒤에 정걸과 핀투가 있음을 깨닫고는 조금 더 점잖게 말했다.
“흠흠, 임 당수가 왕직을 잡아왔소. 지금 작은 배에 태워서 오고 있는데, 모양새를 보니 생포한 모양이외다.”
“아니, 사람이 어떻게...”
나름 세상 여러 곳을 돌면서 자칭 도인이니 마법사니 많이 보았던 핀투였다. 그리고 임 장군은 결코 그런 축에 들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단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저것은 대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나침의 그것이 참으로 신통한 물건이오. 저렇게 땅에서도 쓸모가 많다니.”
오포(오쿠우라)가 이곳 복강(후쿠에) 정북쪽에 있다는 말을 듣고, 나침의 바늘 따라 우직하게 북쪽으로 달려간 꺽정이었다. 사람들이 오가는 산길은 구불구불한데 꺽정이는 직선으로 움직이고, 왕직은 해적인데 꺽정이는 산적이므로, 유불리가 명백하였다.
물론 길이 구불대는 데는 지형이 험하다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지만, 벼랑 타고 벼락같이 움직일 수 있는 이, 이를테면 꺽정이쯤 되는 사람이라면 그런 이유를 능히 무시할 수 있었다.
“임 당수 비법은 나중에 듣기로 하고, 우선은 계책 베풀 준비들을 하십시다. 저들 배가 히라도 왜구의 소선보다는 크고 둔하지만, 그래도 기세가 제법 맹렬하니 머뭇거릴 겨를이 없소.”
핀투도 그 말 듣고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임 장군과 동양의 신비에 대해서는 나중에 고민해도 늦지 않을 터.
곧 지시가 여러 차례 오갔다. 왕직을 실은 배가 상 투메 호에 돌아올 무렵에는 모든 준비가 마쳐진 상태였다.
“하, 놈들도 때맞추어 왔구만! 이보쇼, 핀투 선장, 총통이나 한 번 갈겨서 놈들이 잠깐 멈추게 해주시오. 그리고 여기 이놈 께우게 바닷물도 한 동이 떠와주고.”
꺽정이가 갑판에 오르기 무섭게, 저쪽 배들도 화포 사거리에 거의 닿았다. 곧 선장 명 받들어 상 투메 호의 베르수(Berço, 불랑기포) 한 문이 불을 뿜으니, 빠르게 나아오던 복선과 세키부네도 잠시 속도를 줄였다.
곧 무어라 외치는 소리가 나고 잠깐의 머뭇거림이 사라졌다. 다시금 상 투메 호와 판옥선이 이룬 일(一)자 향하여 복선과 세키부네 행렬이 쇄도하려던 차, 어설픈 왜말로 된 우렁찬 외침이 후쿠에 앞바다를 메웠다.
“왕직의 왜구들은 들어라! 너희들의 우두머리는 이미 잡혔다!”
그 말 나오기 무섭게, 상 투메 호에서 우는살(鳴鏑) 하나가 하늘을 가르고, 그와 함께 후쿠에 앞바다에서 아주 잘 보이는 왕직의 저택에 불이 붙었다.
“너희가 정 사생결단을 보겠다면야 말리지는 않겠지만, 왕직은 그렇게 되면 목이 떨어질 것이다! 그놈의 금은보화도 태반이 우리 배에 실려 있고, 우리는 죽기보다는 차라리 화약에 불 던져 죽기를 구할 테니 너희에게 무슨 이익이 남겠느냐?
차라리 지금이라도 편을 바꾸는 쪽이 이로울 것이다! 특히 너희에게!”
“닥쳐라! 우리를 대체 무엇으로 보고서 그런 말을 하느냐? 너희 나라의 임금이 원하는 대로 우리가 따라줄 줄 아느냐?”
저쪽에서도 마침내 목청 큰 놈을 구하였는지, 날선 답변이 돌아온다. 감히 더러운 도적이 성덕(聖德)을 입에 담으니, 정걸의 표정이 굳었다. (그 옆에 있는 꺽정이가 임금 대하는 것을 볼 때는 저런 반응이 나오지 않았는데, 참으로 기이한 충심이었다.)
“그러면 우리 임금 뜻을 안 따르면 될 일이지! 나도 잘 안 따르는데 너희가 굳이 따를 것까지 있겠느냐?”
눈에 띄게 당황한 티가 났다. 저쪽 배 위에서도, 또 임 당수 속내 모르고 따라온 나머지 판옥선 위에서도.
“때마침 우리 배 위에 대국 황상이 하사한 은과 비단이 있다! 지금 우리 민주당에 들어오면 너희에게 나눠줄 것이요, 너희 동무들을 많이 데려오면 데려오는 데로 그 몫을 많이 떼어줄 것이다! 두령이 찾아온다면 왕직 이놈의 재산도 모조리 나눠주겠다! 두령이 제 발로 찾아오든, 그 목만 찾아오든 상관 없다!”
“이보쇼, 은과 비단이라니 뭔 말이오? 그건 내 것인데...”
이 와중에 정신 퍼뜩 차린 핀투가 무어라 말했는데, 이지함이 웃으며 그 말을 가로챘다.
“선장 몫은 그대로 드릴 테니 걱정 마시오.”
그제야 그들이 동래에서 제주도로 떠날 때 실었던 정체불명의 화물을 떠올린 핀투가 입을 닫았다.
그러는 동안 꺽정이의 민주당 홍보는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 나도 본디 도적이요 너희도 천생 도적이니, 우리가 합치면 어찌 이익이 없겠느냐? 네놈들이 왕직 아래에 들어갔던 것처럼 내 아래에 들어오기만 하면 된다! 그리하면 막대한 이익이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물러나, 섬 남쪽으로 빠져나간 뒤 그리 멀지 않은 바다에 닻을 내리고 내일까지 머무를 것이다! 생각 있는 자들은 밤이든 낮이든 알아서들 잘 찾아와라!”
재갈 물려진 채 함께 갑판에 선 왕직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왕직이 진사혜를 멸하고 그 무리를 저의 것으로 만들었을 때와 동일한 수법이었던 것이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자신은 죽음이냐 삶이냐만 물었지만 이 임가 놈은 눈앞에 번쩍이는 은량과 비단을 보이면서 부귀를 약속하고 있다는 것.
대체 지옥 어디서 이런 놈이 기어 올라왔다는 말인가? 재갈만 안 물려 있었더라면 그 간교한 수법에 혀를 내둘렀을 왕직이었다.
곧 이 큰 배와 조선 배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후쿠에를 뒤로 하고 바다로 빠져나갈 때까지 그 앞을 가로막는 배는 복선과 세키부네를 막론하고 한 척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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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여러 차례 등장했던 페르낭 멘데스 핀투는 1509년 몰락한 중소 귀족의 자제로 태어났습니다. 적당한 교육을 받은 뒤 리스본에서 귀족의 시종, 산티아고 기사단(Ordem Militar de Sant'Iago da Espada)의 행정직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한 핀투는, 자신의 부귀에 대한 욕망과 역마살을 만족시켜줄 천직을 찾아 바다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포르투갈은 인도와 동남아시아 곳곳에 무역 거점을 마련하였으나, 인도양에 대한 영향력을 두고 이슬람 세력들과 충돌하고 있었고, 핀투 역시 거기에 휘말렸지요. 그는 몇 차례 전투에도 참여하였으나 딱히 능력을 드러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상재(商材)나 언변으로 두각을 드러냈는지, 1539년 인도네시아 일대의 토후국들과 우호적 관계를 구축하는 임무를 맡고 항해에 나서면서 핀투는 보다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 시기에 대한 핀투의 기록은 매우 허무맹랑하여 (명 황제의 무덤을 도굴하다가 걸려서 만리장성 축조 노역에 끌려갔다는 둥, 그곳에서 알탄 칸에게 사로잡힌 뒤 그를 따라 동남아시아까지 원정을 갔다는 둥) 믿기 어려운데, 시기상으로 보았을 때 왕직에게 협력하여 영 떳떳하지 못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렇게 포장하지 않았을까 의심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던 중 1540년대 말 핀투는 규슈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치던 일본인 안지로를 만나게 되었고, 그를 말라카까지 데려다주게 됩니다. 이후 안지로와 함께 일본으로 향하려던 하비에르를 규슈까지 데려다주게 되었는데, 이 덕에 예수회와도 연이 생기게 되었지요.
그 뒤로도 핀투는 여러 차례 새로운 교역 상대를 찾으려 시암(현 태국), 버마 등지를 전전했지만 하나같이 실패하고, 빚더미에만 앉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간의 고생을 담은 신세한탄 편지가 예수회 수도사들을 통해 유럽에 소개되면서 갑자기 본국 포르투갈에서 그의 명성이 뛰어오르게 되었지요. 이를 알게 된 핀투는 1562년 포르투갈로 돌아가 자신의 회고록을 발간하였습니다. 마르코 폴로 풍의 과장된 모험담으로 가득한 회고록은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고, 핀투는 그 수익으로 리스본 교외에 농장 하나를 사들인 뒤 은퇴하였습니다.
원 역사의 조선은 을묘왜변 이후 빠르게 화약무기를 정비하였고, 당시 기준으로는 최신 문물이었던 불랑기포까지 도입합니다. 윤원형의 전횡이 극에 달하던 시기에도 이렇게 기민한 움직임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지요.
불랑기포는 그 이름에서도 드러나듯 ‘포르투갈 포’인데, 1517년 광저우 앞바다에서 명 수군에 나포당한 포르투갈 카락선에 적재된 화포를 역설계한 것입니다. 후장식 화포로 장전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명종 연간 말에 조선에 들어온 뒤 양란을 거치며 빠르게 퍼졌습니다.
불랑기포가 빠르게 도입된 또 다른 이유는 바로 화약 문제였습니다. 화약의 원료인 유황은 수입하고 염초는 자체생산할 수밖에 없던 조선으로서는 화약 마련이 실로 큰 문제였고, 실제로 임진왜란 당시에도 천자총통과 같은 대형 화포는 그 경제성 문제로 인해 보조적 역할로만 활용되고 보다 작은 지자·현자총통이 주력으로 사용되게 되지요. 다만 작중 조선은 아직 그러한 정비를 막 거치는 단계이기 때문에, 화약무기 사용에 있어서도 한동안 헤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원양항해 전통이 거의 없던 조선이었기에, 나침반이 얼마나 보급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연안에서의 항해라면 나침반에 의지할 필요 없이 주변의 지형지물만 보면서도 항해할 수 있고, 또 정해진 항로로만 항해하기 때문에 복잡한 기술 없이 경험에만 의지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나침반 제작 기술 자체는 꾸준히 존재했고, 수요도 적잖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장 나침반 아래 들어가는 판(윤도輪圖)을 만드는 기술이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는 데서도 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참고할 만한 것은, 조선시대의 여러 표류 기록 중 유일하게 나침반 사용 기록을 남긴 사람이 18세기 제주도 선비 장한철이라는 점입니다. 그는 과거 응시를 위해 육지로 향하던 중 난파당했는데, 이때 친인척들이 마련해준 나침반의 도움을 상당히 많이 받았습니다. 이는 첫째로 비교적 궁벽한 제주도에서도 나침반을 구할 수 있을 만큼 나침반이 많이 보급되어 있었다는 것과, 둘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침반이 대체로 항해에는 잘 쓰이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