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중화를 흠모하는 나라 (2)
조선은 오랑캐 나라 중에서는 그나마 문헌과 인물이 논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그러나 나머지에 있어서는 굳이 거론할 만한 것이 없었다. 산천이 수려하다 하나 강남의 절경만은 못하며, 물산은 곤궁하여 중국에 비하기조차 민망하였다.
이것이 조선에 임하는 대명 사신들이 대체로 품는 속마음이었다. 허나 물산 곤궁하고 산천 궁벽하다 한들, 그러나 그 궁핍한 물산을 뜯어내는 데 있어서는 누구도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므로 의주대로 따라 한양으로 향하는 조문화는 애가 탈 뿐이었다.
그 옛날 태감들이 사신으로 오가던 시절에도 족히 신세 고칠 만한 재물을 받아내곤 했는데, 그보다 훨씬 품계 높은 자신은 능히 몇 곱절도 받아낼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엄숭에게 단단히 약점을 잡혔으니, 몇 곱절은 언감생심이요 갑절이나 받아내면 다행일 테다.
지난 겨울, 조문화는 엄숭이 나이 일흔을 넘기고서도 정정한 비결이 무엇인지 알아내고자 몰래 사람을 심어, 그 비법이라는 약주(藥酒)를 빼돌렸다. 그러고서는 엄 수보도 즐기는 불로장생의 비약을 구했다고 환관들에게 넌지시 말을 전하여, 엄숭을 거치지 않고 황상을 배알하려 하였는데, 알고 보니 약주에 대한 소문 자체가 엄숭의 함정이었다.
결국 엄숭의 집에 달려가, 엄동설한에 고개를 박고 한나절이나 사죄한 뒤에 겨우 조문화는 그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 이후로 일 년 내내 없는 사람처럼 지내다가, 마침 과오를 씻을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는 엄숭의 부름을 받고 이곳 조선에 오게 되었다.
‘좋은 기회는 무슨 빌어먹을 놈의 기회냐! 이 조문화, 지금은 고개 숙이고 있지만 반드시 언젠가는...’
특명이랍시고 시키는 일이 왜구 두목 압송하다가 쥐도새도 모르게 죽여버리는 것이라니, 대체 이것이 어디 대명 공부상서의 할 일이란 말인가.
허나 자기 손에 피 안 묻히고 사람 죽이는 엄숭의 재주를 옆에서 여러 차례 목도한 조문화는 그 불만을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괜히 재물을 (평소보다 더) 탐하다가 엄숭에게 트집 잡힐 일만 더 만들게 되면 그때는 한나절 사죄로도 부족할 것이다.
욕심은 많으나 그것을 마음껏 충족시킬 길은 없으니, 그 못난 심보는 더욱 부풀어올라 의주대로 타고 한양까지 오는 내내, 들리는 고을마다 생트집을 잡고 면박을 주었다. 조선 사람들로서는, 나름 평소 오는 이들보다 지체 높은 분 오신다 하여 갑절로 준비하였건만, 조문화가 알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행패마저도 접반사(接伴使) 이준경이라는 작자 때문에 계속 틀어지곤 하였다. 식사든 잠자리든 미흡한 것 천지니 이것이 천조의 사신 대접하는 법도냐며 트집 잡을 작시면, 난데없이 시 한 수 지어달라 청하지를 않나, 일대의 명승고적 얘기를 슬쩍 꺼내지를 않나.
(이준경이 그 배포는 몰라도 간악함에 있어서는 엄숭·조문화와 빼닮은 윤원형 아래에서 여러 해 동안 참고 견딘 보람이 여기서 드러났는데, 소국의 권신 따위에게는 관심 없던 조문화는 모르는 사정이었다.)
그러므로 한성에 당도하여 조선왕 환(명종)을 만났을 때는 독기가 가득 차오른 뒤였다.
허나 조선왕 환은 정승이라는 이준경보다도 더욱 대하기가 어려웠다.
“제가 찾아오면서 보니, 근래 조선국의 사정이 여의치 않음을 알겠습니다. 사신을 대할 때 갖추어야 할 공경조차 족히 갖추지 못하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사정입니까?”
임금 앞에서 이렇게 말을 바늘처럼 가다듬어 푹 찔렀는데, ‘아야’ 소리는커녕 그냥 쑥 들어가버리는 것 아닌가.
“아, 참으로 그렇소. 흉년이 잇따르고 도적이 일어나 근래에 겨우 고식(姑息)에 이르렀는데, 얼마 전에는 도적이 이곳 도성까지 들어와 범궐(犯闕)까지 하였다오.”
임꺽정 패거리의 무도한 계책에 별 수 없이 따르게 된 이준경이 저에게 누차 일러준 대로 답변하는 임금이었다. 본디 성정이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람이다 보니, 그 받아치는 모양새가 매우 자연스러워 조문화가 아무리 말로 주먹질을 한들 하등 타격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슬슬 조문화의 속을 긁는 조선왕이었다.
“조선의 국왕 전하께서는 실로 검소하십니다. 어찌 백성의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연회의 자리에서 반찬을 보면서 또 트집을 잡으니,
“과인이 부덕하여 아직 왕자(王者)의 도리를 잘 알지 못하는데, 우리 수군이 황명 받들어 큰 공을 세운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천사께서 이렇게 찾아오셔서 과찬을 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바로 왕직 붙잡은 공을 언급하니, 이제 아무리 조선과 그 왕을 칭송하는 척하면서 대접 박하다고 흉을 보려고 해도 소용이 없게 되었다.
그런 조선국조차 단번에 왜구 수령을 사로잡았는데 대국은 어쩌다가 몇 년이나 그렇게 애를 먹었느냐는 지적을 굳이 말로 꺼내지 않아도 모두가 염두에 둘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조문화의 울화통만 터져나갈 판이었다.
“이보게, 장 학사.”
경복궁에서 나오는 길, 장거정을 손가락질하여 부른 조문화가 말을 걸었다.
“예, 상서 대인.”
“조선이 천조를 업신여김이 이와 같네. 무릇 불공(不恭)한 자는 불인(不仁)하기 마련이니, 금번 왕직을 추포한 일에 있어서도 반드시 잘못이 있었을 것이야. 본디 상국의 사람으로서 작고 피폐한 번국에 폐를 미치지 않기 위해 적당의 수괴만 데리고 가려 하였으나, 정황이 이와 같으니 의심하지 않을 수 없네.”
그러나 스스로 발로 뛰면서 트집 잡기에 조문화는 너무나 지체 높고 고귀한 사람이었다. (적어도 조문화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 몸은 황명 받들어 왔으니 함부로 상하게 할 수 없네. 여독이 아직 풀리지 않았으니, 그대가 나서서 이 일의 전말을 면밀히 살피게.”
“예, 대인. 말씀 받들겠습니다.”
장거정 입에 미소가 서린 것을 조문화는 보지 못하였다. 만약 잘 보았더라면, 엄숭이 재물이나 관직 뜯어낼 기회를 득하였을 때 짓는 미소임을 깨달았을 것이었다.
형주 사람 장거정은 나이 서른도 채 되지 않았건만 벌써 한림원에 들어간 전도 창창한 젊은이였다. 이제 조선까지 나아와 그 이름 떨치게 되었으니, 대명의 그 누가 그를 부러워하지 않으랴.
장거정에게 있어 이번 조선행은 명성도 명성이지만 재물과 권세를 얻을 수 있는 귀한 기회였다. 엄숭이 조문화를 사신으로 보내기로 했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스승 겸 뒷배 서계에게 달려가 저를 보내달라 청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물론 어떻게 그 재물과 권세를 얻어낼지는 아직 그 단초를 구하지 못했으나, 지금 돌아가는 사세를 보면 어느 모퉁이에서 횡재와 영달의 발판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조선 조정, 그것을 보면서도 애먼 사람들에게 행패부리는 것 외에 제대로 항의 한 번 못하고 있는 조문화 등등.
그러나 장거정 눈에 가장 의심스러운 것은 바로 조선의 민주당이었다.
예컨대 그 임거정 – 하필 자신과 이름 비슷할 것은 또 무어란 말인가 – 이라는 자만 하더라도 그러했다. 대관절 그는 어디서 나타난 자이며,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나름대로 수소문한 바에 따르면 그는 북경 조정이 믿고 있는 것처럼 조선왕의 충직한 신하는 결코 아니었으며, 고작 일 년 조금 넘게 관직에 있던 것이 전부였다. 그저 민주당이라는 이름도 이상한 사당(私黨)을 꾸려서 그 당수로 있을 뿐.
그 당이 일어난 이래로 조선에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저 글 읽는 선비와 농사만 하는 백성뿐이던 나라였건만, 갑자기 어디선가 나온 은을 들고 요동까지 나아와 장사를 하지를 않나, 조선양보라는 기문(奇文)을 만들어 퍼뜨리지를 않나.
심지어 몇 년 전까지도 포목과 미곡으로 물건을 사고팔았다 하였는데, 이곳 한양은 물론이요 오는 길에 들린 평양과 개성에서조차 지금은 은을 쓰고 있었다.
내수사에 쌓여 있던 미곡을 요동과 일본에 내다 팔면서 은이 꾸준히 들어오고 있었거니와, 무엇보다 논상원에서 나오는 논변을 듣거나, 『공보』에 실리는 소식을 보고서 장사에 구미가 동한 백성들이 너도나도 은을 구비하고 미곡 대신 그것을 쓰기 시작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상세한 내막은 조선 조정조차 아직 알지 못하니, 장거정도 그저 짐작만 할 뿐이었지만, 결코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배 몇 척을 내더니 단숨에 왕직을 붙잡은 일은 어떠하던가? ‘가운데 나라(中國)’ 바깥의 일에는 눈길조차 아까워하는 이들은, 그저 조선이 고려 시절부터 강병(强兵)으로 이름났다 하고서 넘어갈 테지만,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보면 이 또한 더욱 의심하고 지켜봐야 할 일이었다.
“미리 대비한 것이 이렇게 빛을 발하는구나!”
이러한 사정을 밝혀내면 밝혀낼수록 모두 자신의 공이 되지 않겠는가? 물론 무엇을 찾아내든 조문화의 귀에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요, 서계에게만 전해질 것이었다. 가운데서 민주당에게 무언가 뜯어낼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테다.
득의양양하게 먼저 숙소로 돌아간 장거정은 곧 사람 여럿을 불러모았다.
“들어라. 내 이때에 대비하여 너희를 데려왔다.”
“예, 대인!”
왜구가 절강성 바닷가를 여러 해 동안 노략질하여 조정의 크나큰 근심이 되었으니, 그 우두머리 왕직의 압송 역시 여느 죄인과 같이 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요동을 지날 때 그곳에 딸린 군사 여럿을 차출하여 호위로 삼았다. (조문화가 자신이 원하는 만큼 대접을 받지 못하는 데는 이런 이유도 있었다. 조문화가 알려 하지 않았을 뿐.)
상서쯤 되는 사람이 이런 일을 직접 관할하지는 않는 법이므로, 장거정이 그 일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가운데서 적당히 이것저것 챙기면서도, 고려 시절 건너와 아직 그 말을 능히 할 수 있는 자들을 특히 많이 뽑았으니, 이 모두 지금과 같은 때를 대비한 것이었다.
“지금부터 변복하고 이곳 한양의 저자를 돌면서 소문을 모으되, 소위 민주당과 그 당수 임거정에 대한 것을 유심히 살피도록 하여라. 특히 유심히 들어야 할 바는 다음과 같다...”
일을 나누고 지시를 내리는 데 있어 하나같이 짜임새 있으니 과연 될성부른 인재라.
허나 그리 크지 않은 도성에 사람 여럿을 풀었건만 돌아오는 소식은 없으니, 잔뜩 기대한 장거정만 허탈할 따름이었다.
당장 어디 가든 눈에 띄는 불랑기(포르투갈) 국외인들조차 그 동정을 알 수 없었다.
장거정은 모를 일이었지만, 이 역시 민주당 쪽에서 선수를 친 결과였다. 무릇 인신무외교(人臣無外交)가 천조와 번국의 도리이니, 만에 하나 하비에르나 핀투를 두고 조문화가 ‘조선이 제멋대로 외국과 통교하였다’라고 트집을 잡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여, 하비에르는 지친 심신도 조금 쉬게 할 겸 니탕카이 따라 함경도 유람을 갔다. 주변에서는 겨울에 북변 가는 것을 만류하였으나, 핀투 선장의 측정에 따르면 조선의 위도는 대략 포르투갈과 비슷하였으므로, 이미 파리의 겨울도 겪은 적 있던 하비에르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 조문화가 무슨 딴지를 걸지 모르므로, 민주당은 핀투 선장을 재촉하여 항해 준비를 서둘러 마친 뒤 대양서생 스물을 데리고 휙 떠나게 하였다. 만일 이를 두고 명국에서 뒷말이 나온다면, 바닷바람 때문에 어쩔 수 없었노라 둘러대면 될 일이었다.
이렇게 장거정이 제법 그럴듯한 계책에도 불구하고 허탕만 치고 있을 무렵, 마침내 큰일이 터졌다. 허나 장거정이 기대하던 그런 종류의 일은 아니요, 장거정이 감당할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일도 아니었다.
천조의 사신이 머무는 곳은 당호를 모화관(慕華館)이라 하니 그 이름부터 중화를 흠모한다는 뜻이요, 그 앞에 세워진 영은문(迎恩門)은 곧 황은을 맞이한다는 뜻이다.
대명의 제일가는 번국 조선이 천조를 모시는 마음이 대개 이와 같았다.
그래야 하는데, 대체 이것은 무슨 꼴이란 말인가. 아무리 그래도 설마 천조의 사신에게 마땅한 ‘성의’를 아니 보일까 생각하며, 여독 푼다는 핑계를 대며 여러 날에 걸쳐 머물고 있었는데, 저쪽에서 보이는 성의는 문자 그대로의 성의뿐이었다.
그뿐이랴? 궁에 들지 않는 날에는 천사 뵙고 귀한 말씀을 듣거나 시문 받기를 원하는 오랑캐 서생들을 상대해야 했는데, 글 짓는 것이야 조문화의 문재(文才)가 쓸만하니 괜찮았지만 그를 뵙고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자들이 있어 문제였다.
예컨대 진사 이이라는 애송이 서생이 나아와 시를 바치는데, 그 글귀에 이르기를,
‘화하(華夏)의 밝음은 태양과 같으니 하늘 아래 비추지 않는 곳이 없어라.’
하였는데, 조문화는 트집을 잡기를 태양은 반드시 하루에 한 번 뜨면 또 한 번 지니 이는 적절치 못한 비유라 하였다.
그러자 답하기를, 설령 태양이 지더라도 사람의 마음 속에 그 빛이 남았으니 결코 진 것이 아니며, 근래 일설에 따르면 이 땅은 둥글다 하니 만일 그 말이 맞다면 해는 결코 지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
어린놈이 시시콜콜 말대꾸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건만, 그 답하는 것조차 불손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나이 연소한 오랑캐 서생이라 여기고서 손수 꾸중하려 마음 먹은 것이 잘못이었다.
어떻게 사람이 한 시진 동안 그치지 않고 입을 놀릴 수 있다는 말인가? 역관이 먼저 지쳐 중간에 한 번 갈아야 할 지경이었다. 결국 조문화가 먼저 기진맥진하여 나가떨어지고야 말았다.
이처럼 뜻대로 풀리는 것이 없어 짜증이 샘솟는 판에, 장거정 그놈도 큰소리 친 것에 비하여 소득이 없으니, 아예 다 집어치우고 왕직 놈이나 붙잡아 돌아가는 쪽이 낫지 않을까, 슬슬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조선에게 응당의 교훈을 주는 것은 조금 뒤로 미루어도 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단단히 마음 먹은 조문화는 접반사 이준경을 만나자마자 선포하였다.
“황명은 지엄하고 귀국의 사정은 여의치 않은 듯하니, 이제 죄인을 압송하는 것을 더 미룰 수 없게 되었소이다. 왕직 그자를 귀국의 전옥서에서 내어, 오늘 중으로 모화관으로 보내시오.”
당장 내일이라도 귀로에 오를 것처럼 잔뜩 겁을 주었으니, 저들이 두려움을 안다면 오늘 중으로 찾아와 용서를 구하리라.
“예, 대인.”
웬일로 이준경이 군말 없이 따르는가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토를 달았다.
“다만 모화관은 오직 상국의 대인들을 모시기 위한 곳이므로, 황조(皇朝)에 죄지은 악적을 가두기에는 적절치 않을까 두렵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대인께서는 재고해주십시오.”
가뜩이나 마음속 불만 가득하던 차, 그 열불에 화약 한 뭉치를 던져준 격이었다.
“대체 그대와 그대의 나라는 천조를 섬긴다는 말의 뜻을 알고는 있는 것이오? 의주에서 한양 이곳에 닿을 때까지 대접은 한결같이 소홀하고, 이제는 이 사람의 명조차 듣지 않으려 하니, 이 조 모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외다.”
조금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조선 쪽의 불만도 나름 이해하려 하였을 것이다. 애시당초 당연히 해주어야 하는 종계의 변무를 차일피일 미루면서 조건을 붙이고, 조선이 그 말에 따라 바로 왕직을 붙잡았더니 치하하기에 앞서 먼저 그놈 몸뚱이부터 내놓으라 하니, 따지고 보면 상국이 오히려 무례를 거듭 범한 셈이었다.
그에 더불어, 조선이 평소에 사신 접대하던 것에 비해 나름대로 공을 들여 접대하였건만, 그것조차 성에 차지 않는다며 이 난리를 치니, 스스로 예의지국이라 자부하는 조선으로서 어찌 이를 가만 앉아 받아들이기만 할까.
그러나 그런 무례를 범하게끔 한 엄숭도, 그 엄숭이 보내서 온 조문화도 그만한 양심은 없는 사람이었다.
“조선이 우리 태조 고황제(주원장)로부터 책봉을 받아 나라를 세웠을 때 이래로 이러한 무례가 있었소? 그대가 이 작은 나라에서 소소하게 배움을 이루어 재상의 자리에 올랐으니 스스로 생각해보시오.”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한 도적이 먼저 꾸짖기를 회초리 내리치듯 하니 이것이 바로 적반하장이라.
“대답하고자 한다면, 그 대답을 궁리할 겨를에 왕직 그자부터 데려오도록 하시오. 이 일을 위하여 천병(天兵, 천조의 군사) 수십을 데려왔으니, 모화관이 아니라 들판 한가운데라 한들 그 위엄이 어긋나는 일은 없을 것이외다!”
그 윤원형조차 참고 견뎠던 이준경의 인내도 이제 슬슬 끝머리에 달하여, 안색은 붉게 변하고 숨은 가빠졌다.
“그러나 대인, 왕직은 실로 큰 도적의 수괴로 그 교활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만에 하나 그가 도중에 포승을 풀고 달아난다면 이는 천조의 위엄에 크나큰 누가 될 것입니다.”
“흥! 그토록 망령된 처사를 하였으면서 이제 와서 천조의 위엄을 거론한다는 말이오?”
“의주대로 중 황해도는 크고 작은 산이 많고, 평안도는 여러 사람이 섞이는 대읍(大邑) 평양과 의주가 있을 뿐 아니라 강 하나를 두고 여진 야인과 맞닿아 있습니다.
자칫 불상사가 일어날 때 신속히 붙잡을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함이 마땅하지 않을지요. 이를 위하여 미리 장수와 군졸을 모두 선발하여 두었는데, 허여해주신다면 이들로 하여금 왕직을 호송토록 하겠습니다.”
“듣고 싶지 않소! 내 거듭 말하건대, 금일 이 시각을 기하여 왕직에 대한 모든 일은 천조에서 맡을 것이외다. 이 말도 그저 바닥에 흘리려거든 마음대로 하시오. 단 그 허물은 이 나라 전체가 쓰게 될 것이오!”
모화관 앞, 명과 조선의 여러 사람들이 오가는 곳 앞에서 호통은 호통대로 치고 손가락질은 어지럽게 하면서 일국의 재상을 꾸짖는 조문화였다.
한쪽은 콧김 내쉬며 말을 참고, 다른 한쪽은 콧방귀 뀌며 말을 마구 던졌다.
“예, 대인. 말씀 받들겠습니다.”
그러나 그마저도 이준경이 선뜻 고개 숙이며 동의해버리니, 조문화가 더 꾸짖을 빌미를 멀리 치워버리고야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준경이 군관 하나와 군졸 여럿을 대동하여 왕직을 데려왔다.
‘도대체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맞게 굴지를 않는구나! 어디 상한 구석도 없고, 얼굴에 병색 한 점도 없지 않은가?’
가는 길에 왕직을 죽이고 나서 조선 탓을 하려면, 그쪽이 편하였다. 허나 어디를 보아도 금방 급사하게 생기지는 않았으니, 끝까지 사람 곤란하게 하는 오랑캐들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일에만 마음이 온통 쏠렸기에, 군관과 군졸들이 자금성의 금군들보다도 더 건장하게 생겼다는 데는 전혀 눈길을 두지 못하였다.
“말씀하신 대로 왜구의 수괴 왕직을 이와 같이 데려왔습니다. 이로써 부디 불운한 오해를 풀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앞서 자신의 꾸짖음을 ‘오해’로 치부하려는 것이 괘씸하여 또 한 소리 하려던 차, 익숙한 말투가 들려왔다.
“아, 엄 수보가 보내서 왔구려. 반갑소.”
조문화는 절강성 자계(慈溪) 사람이요, 왕직은 그로부터 그렇게까지 멀리 떨어지지는 않은 휘주 태생으로 절강과 안휘 일대를 돌아다니며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가 절강 말로 떠드니, 조선의 역관들이나 요동 병사들은 생판 처음 듣는 말이었지만 조문화 귀에는 곧장 들어왔다.
오랑캐의 건방짐이 묻었는지, 허리 꼿꼿이 세우는 왕직이었다.
“날 죽이려 오셨소?”
그러나 조문화는 고개 돌리고 관화로 외쳤다.
“저 망측한 도적이 또 무슨 흉악한 수작을 부리려 하는구나! 여봐라! 당장 이자를 가두어라!”
“예, 대인!”
“하하하! 엄숭의 개 주제에 사람의 말을 하는구나! 개에게 붙잡힌 몸으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지! 그래, 오늘 밤에 죽이려느냐?”
“저놈의 입에 재갈을 물려라!”
그렇게 모화관에서 있던 숭모의 감정도 다 떨어지기에 족한 한판 소란이 끝났다.
이제 볼 장 다 보았으니 다들 집에 가라는 양, 때마침 하늘에 먹구름 드리워 함박눈이 퍼붓기 시작하였다.
아무리 조선의 사람을 미워하더라도 하늘마저 미워할 수는 없는 법이라, 조문화의 분기도 슬그머니 가라앉게 되었다.
“흠흠, 상서 대인, 악적을 가둘 곳이 마땅치 않다는 접반사 이준경의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제야 슬며시 나타난 장거정이 조용히 말을 걸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그냥 묶어두고 감시만 하면 될 일이지.”
“대저 포승은 풀 수 있고, 질곡(桎梏, 차꼬와 수갑)은 부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일을 벌이지 못하도록 사람을 두어 감시하고, 감시 소홀할 때를 노리지 못하도록 모퉁이와 그림자로 가려지지 않고 높은 벽으로 가로막힌 곳을 골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모화관이 누추하다지만 그만한 곳이 하나 없는가? 고작 하룻밤 지키면 될 일인데.”
“소관이 군사들과 함께 의논하기로는, 이 모화관의 다락방이 그나마 지킬 만한 곳이요, 그 외에는 대인이 지금 주무시는 곳의 옆방뿐입니다.”
“무어라? 지금 내게 죄인의 아래에서 자거나 옆에서 자거나, 둘 중 하나를 고르라는 말인가? 아니 될 일이다! 군사가 몇 명인데 어디든 지키지 못할까.”
조문화가 바로 퇴짜를 놓았다.
“내 보니 저쪽에 창고도 하나 있었다. 그곳에 넣어놓고 자물통으로 잠그면 그만이다.”
다리 달린 사람이라면 몰라도, 발 없는 금괴와 은자는 어떻게 안전하게 보관하는지 다년간 경험으로 아주 잘 아는 조문화가 말했다.
결국 장거정도 조문화 마음을 돌리지 못하여, 왕직은 그대로 재갈 물린 채 춥고 지저분한 곳간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이러다가 밤사이 동사하는 것은 아닐까, 은근히 걱정하는 – 물론 왕직의 목숨이 아니라 저의 앞날을 – 장거정이었는데, 다음날 밝혀진바 이는 괜한 걱정이었다.
조선국왕에게 성의 없는 인사나 대충 올리고 곧장 떠나려 하였건만, 먼길 떠날 채비를 위해 창고를 열었더니 얼어죽은 왕직은커녕 살아 있는 왕직도 없었던 것이다.
대신 한쪽 벽이 휑하게 뚫려 있을 뿐.
이 무슨 요괴의 조화도 아니고, 수십 명 병사가 지키는 곳간의 벽을 아무도 모르게 뚫고 사람을 꺼내간다는 것이 가한 일이란 말인가?
황당함을 뒤로 하고 조선 쪽에 이 사실을 통보하려 하였건만, 돌아오는 답은 이러하였다.
“송구한 말씀이오나, 어제 조 대인께서 천병들이 왕직에 관한 일체의 일을 맡아보라 하셨지 않습니까? 조 대인께서 이를 거두기 전까지 저희로서는 함부로 돕기 어렵습니다.”
어쩔 수 없이 빈손으로 돌아간 장거정이 그 말을 전하였으나, 조문화가 전언 듣자마자 뒷목 잡고 쓰러졌으므로 답변을 금방 받지는 못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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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에 언급되는 엄숭의 불로장생 술 이야기는 실제 야사에도 전하는 바입니다. 심지어 개중에는, 어리석은 가정제가 조문화가 진상한 보약을 엄숭 앞에서 자랑했다가 덜미를 잡혔다는 설도 있는데, 황제의 전제권력이 막강했던 명에서 이러한 야사가 돌았다는 것은 당시의 민심을 방증한다 하겠습니다.
명은 건국 초기부터 외국에 사신을 보낼 때 환관, 특히 외국인 출신 환관(대항해로 유명한 정화도 여기에 속합니다)을 보내는 것을 관례로 삼았는데, 이는 조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선 초에 고려 또는 조선 출신 환관들이 사신으로 자주 왔던 것도 이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조선에 대해서는 이러한 정책이 곧 한계를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황제의 칙서나 조서 외에도 실무적 차원의 사신들도 종종 오가는 상황에서, 실무 능력이 떨어지고 학식과 품행도 부족한 환관을 사신으로 보내는 것은 양측 모두 곤란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세종 연간 말엽부터는 점차 명의 문관들이 사신으로 오는 경향이 생기게 됩니다. 명 역시 이것이 파격적인 예우임을 종종 강조하곤 했지요. (그러면서도 명의 내정에 대한 일에는 정·부사 모두 문관을 보내고, 조선의 내정에 대한 일에 있어서는 정·부사 중 한 명만 문관으로 하는 등 차등을 두기는 했습니다.) 성종대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너무 문장이 뛰어난 인물들이 사신으로 오게 되어 조선 측이 난처해지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서 명의 사신이 올 때마다 조선의 관료와 문인들과 더불어 서로 시를 짓고 답시를 하고, 이를 『황화집(皇華集』이라는 문집으로 편찬하는 관례가 생겼는데, 작중 이준경이 조문화가 뭔가 허튼짓을 하려 할 때마다 시를 청했다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명이 멸망하면서 『황화집』의 편찬도 끝나게 되었지만, 조선 내에서는 영조 대에 모든 『황화집』을 모아 통합본을 내는 등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였기에 아직도 그 전문이 전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시문을 통한 양국 관료·지식인의 교류 양상을 살피면, 서로 체면을 세워주는 문화외교의 측면도 있었지만, 동시에 주요 이슈에 대한 양측의 의사를 간접적으로 확인하는 비공식적 채널로 기능한 면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