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중화를 흠모하는 나라 (3)
왕직의 일은 앞으로 천조에서 알아서 하겠노라고 일국의 정승에게 험한 말 퍼부어가며 단언한 지 고작 하루만에 그 왕직이 종적을 감추었으니,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그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할 것이다.
“이 모든 일은 조선국의 잘못이니, 마땅히 혼신을 다하여 악적을 다시금 추포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조문화는 어지간한 사람이 아니었다. 제멋대로 한성판윤과 포도대장을 불러와 꾸짖은 뒤 그들 아래에 있는 사람 모두를 풀어 왕직을 붙잡게 하니, 조선 조정과 조문화 사이에 낀 부사 장거정만 서러울 따름이었다.
“반드시 붙잡아라! 붙잡지 못한다면 네놈들 이름 하나하나를 적어 황상께 고해바칠 것이다! 알겠느냐?”
“예, 대인!”
조선 조정에 알린다면 처음 장거정이 찾아갔을 때처럼 ‘이제 우리 알 바 아니다’ 하는 답이 돌아올 것이므로, 천사(天使) 말씀에 꿈쩍할 수 없는 배신(陪臣, 제후국의 신하)들을 직접 부리기로 작정한 것이다.
헌데 누가 보아도 무리한 짓이건만, 한성판윤과 두 포도대장의 낯빛은 노기에 물들기는커녕 점잖기만 하였다. 나중에는 천사의 어려운 사정을 십분 이해한다며 예 갖추어 인사까지 올리는 것 아닌가.
급히 달려온 역관에게 장거정이 부리는 요동 병사 몇몇이 미리 다가가 수작을 부린 덕분이었다.
그리하여 ‘이 모든 게 조선 잘못이다’ 하는 조문화의 가시 돋힌 말은,
‘이 일은 조선 또한 잘못이 있다고 모함받을 소지가 되오. 그러니 부디 그대들도 이 악적을 추포하는 데 힘을 빌려주시오.’
하는 정중한 부탁이 되고,
‘만일 그대들이 공을 세운다면, 어찌 그 이름이 황상께도 전해지지 않겠소?’
하는 포상의 약속이 되었다.
영문 모르는 조문화는 마침내 조선인들이 공손하게 군다고 생각하고만 있었다.
당연히 조문화가 조선국 도성 사정을 알 리 없었고, 설령 안다 한들 뭔가 일을 꾸밀 만한 깜냥은 아니 되는 고로, 이 합동 기찰(譏察, 수사)은 장거정의 몫이 되었다.
장거정은 우선 최대한 정중하게 조선 정부에 글을 보내 이번 일의 추인을 구한 뒤, 사대문에 포졸들과 요동 병사들을 함께 세우고, 모화관 주변을 샅샅이 수색하여 어떻게 왕직이 달아났으며 어디로 향했는지 그 단서를 찾으려 했다.
간밤에 내린 눈 덕분에 발자국이 간혹 남아 있기도 하여, 어째 수상하다 싶은 족적을 찾기도 했는데, 기이하게도 모화관 쪽으로 오는 발자국은 있는데 모화관에서 멀어지는 발자국은 없었다.
더구나 창고의 벽에 뚫린 구멍은, 장거정이 직접 면밀히 살펴보니 그냥 구멍이 아니라 누가 미리 부순 다음 그 조각을 벽돌처럼 차곡차곡 맞추어둔 것이었다. 그러니 무슨 연장을 가져올 것도 없이 조용히 벽을 해체할 수 있었으리라.
허나 그 벽의 조각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하나하나가 묵직하여 결코 쉽게 빼고 옮길 수 없을 듯했다. 요동 병사들을 시켜 범행을 재연해보았는데, 장정 두셋은 붙어서 낑낑대어야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
“하, 이 장 아무개가 아니라 포 효숙공(포청천)이 왔어야 마땅할 것이련만.”
요동 군사들에게 보고를 받은 장거정이 한탄하였다.
창고의 벽에서 수작 부린 흔적을 발견한 뒤, 혹시나 싶어 모화관의 다른 곳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모화관의 다락과 담벼락, 영은문 옆의 연못 등지에 누군가 몰래 드나들 수 있도록 손을 보아둔 것이 드러났다.
허나 그것마저도 의심하는 눈으로 보니 겨우 드러났을 뿐. 범상한 장정의 몸으로는 이곳에 손을 봐두었다고 미리 알려준들 드나들 엄두도 내지 못할 터였다. 저자 이야기꾼들이 말하는 경신공(輕身功)이라도 익혔다면 모를까.
“대관절 조선의 그 누가 우리 천조의 사신이 머무는 이곳을 이리도 당당하게 훼손하였다는 말인가? 또 이처럼 무엄한 짓을 범할 장사는 어디서 구하였다는 말인가? 조선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중화를 흠모하는 나라였거늘...”
천사를 대하는 조선의 태도가 공손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장거정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조문화와는 달리, 그 원인이 사실 천조, 보다 정확히는 엄숭에게 있음 또한 장거정은 잘 알았다.
만일 조선이 처음부터 그만한 반심을 품고 있었더라면 진작 천조에도 알려졌을 것이요, 먼바다까지 나아가 왕직을 붙잡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엄숭 그자가 종계변무를 두고 치졸한 짓을 벌이지 않았더라면, 조선이 상국을 모시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을 터. 모화관의 전각과 창고를 훼손하는 이런 무엄한 짓을 누군가 꾀하였다면 그들이 먼저 붙잡아 벌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조선 조정이 아니라, 후환을 두려워하지 않는 조선 안의 다른 누군가가 이 일을 꾀하였다면? 그러한 반당(叛黨)은 보통 조정에서 가만 내버려두지 않으므로 어지간히 나라가 망가지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지만, 장거정은 지금 조선의 사정이 범상하지 않음을 얼추 짐작하고 있었다.
“게 누구 있느냐.”
“예, 대인.”
지나가던 요동 군관 하나가 곧장 나아와 고개를 숙였다.
“내 왕직의 종범(從犯, 공범)으로 의심하는 자가 있다. 그러나 이미 천병과 조선 군병이 뒤섞여 기찰하고 있으니 말이 새어나갈까 무섭구나. 한 각 내로 조선말을 하는 군사 둘을 내되, 반드시 조선 사람과 같이 변복하고 오도록 하여라.”
“알겠습니다. 상서 대인께도 그리 전하면 되겠습니까?”
“이미 상서 대인께서도 아시는 일이다. 본관이 말한 것과 같이 널리 발설되면 일을 그르칠 수 있으니 입을 조심하거라.”
물론 여전히 모화관 구석에서 조선과 이 세상 전체를 싸잡아 욕하기에 바쁜 조문화는 전혀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왕직이 어떻게 모화관을 빠져나갔는지는 짐작만 겨우 할 뿐이요, 어디 숨어있는지는 전혀 알 방도가 없지만, 누가 그를 도왔는지는 얼추 알 수 있었다.
능히 그리할 수 있는 자만 추려내면 될 일. 그리고 지금 조선국에서 그런 대담한 범행을 할 수 있는 이는 단 하나뿐이었다.
“대인, 이곳은...”
“걱정 말거라. 내 들어가자마자 정체를 밝힐 터이니, 너희는 통변만 가운데서 잘 해주면 된다.”
멀찌감치 보이는 ‘민주당 사업당’이라는 현판을 흥미롭게 살피며 장거정이 말했다. 복장으로만 보면 조선의 여느 서생과 그 구종과 같았으니,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 누구도 의심하지 못했을 테다.
(실제로는 장거정이 모화관 나설 때부터 따라붙은 눈이 있었는데, 장거정은 이를 알지 못했다.)
그러면 어떻게 들어갈 것인가? 일시 걱정하는 군졸이었는데, 곧 드러난바 이는 헛된 걱정이었다.
“비키시오. 사람 지나가는데 길이나 막고 있고.”
“어이, 염 서방! 염 서방! 단자(單子) 놓고 갔네!”
“김 서원! 김가 놈아! 어딨냐! 북변에서 오신 당수님 ‘친족분’들이 팔고 간 초피값 어찌 되었느냐고 반나절도 전에 물어보지 않았느냐?”
오늘도 바쁜 사업당이었기에, 문앞에서 어떤 핑계 대고 들어갈 것인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어어 하다가 세 사람 모두 사업당 마당까지 들어가게 된 것이다.
장거정 눈으로 보아도 지체가 그리 높지는 않아 보이는 이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누구는 담장에 종이 대고 세필로 휘갈기고, 누구는 찬바람 아랑곳하지 않고 마루에 앉아 산가지 열심히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도저히 말을 걸 엄두가 나지 않아 한참 머뭇거리던 요동 군사 둘은 장거정의 눈빛에 옆구리 찔린 뒤에야 겨우 지나가는 사람 하나를 붙잡고 서 별감 어디 계시느냐 물었다.
“아, 말투 보니 요양(遼陽)에서 오셨구만? 그쪽 담당은 여기가 아니라 저기 별채 쪽이오. 여기서 저쪽으로 가다 보면 나오는 두 번째 쪽문으로 들어가서 안 녹사(錄事) 찾으시면 되오.”
“헌데 서 별감은...”
“하하, 이 사람 보소. 우리 사업당은 저기 요양이나 의주 같은 데서 소소하게 도고(都賈) 노릇하는 곳과는 급이 다르다오. 서 별감님도 아주 바쁘신 분이셔서 쉽게 뵐 수 없지. 걱정들 말고 안 녹사 찾아가면 어지간한 일은 다 해결될 것이외다.”
서 별감을 찾노라 말했다가 졸지에 물정 모르는 촌뜨기 대접을 받게 된 장거정 일행이었다.
그때, 장거정 어깨에 묵직한 팔 하나가 털썩 얹혔다. 놀라서 돌아보니, 장거정 본인은 물론이요 곁의 두 병사도 알지 못하는 사이 거한 하나가 슥 등 뒤에 다가와 있었다.
“나리, 여기서 뭣 하고 계시오? 남의 장사하는 데 와서 함부로 훼방을 놓아서야 쓰나. 조용히 따라오시오.”
허나 장거정도 고작 이 정도로 겁먹을 사람은 아닌지라, 무어라 말하려는 병사들을 제지하고는 통변이나 하라 하였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면서 그토록 무례한가?”
“여기 마당은 너무 시끄러워서 나리가 뭐라 하든 내 귀에는 아니 들릴 게요. 두 발로 가시겠소, 아니면 업혀서 가시겠소? 이 나라 임금도 붙잡고 자칭 정해왕(왕직)도 붙잡은 나인데, 고작 한림원 편수(編修)쯤이야.”
저런 말을 능히 할 사람이라면 임거정 하나뿐이다. 임거정 찾아간다는 저의 목적을 이룬 장거정이 순순히 따르니, 이미 한 차례 주눅이 든 요동 병사들도 그 뒤를 따랐다.
사업당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니, 소란스러운 소리는 멀어져 갔다. 마침내 안채에 오르니 여러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명희와 서림, 이이, 그리고 통변 노릇할 요양 잠상(밀무역) 담당 안 녹사까지.
“부사(副使) 나리 데리고 왔소.”
하니 나머지 사람들이 나름대로 예를 갖추었다. 허나 꺽정이는 여전히 장거정 어깨에 얹은 팔을 풀지 않았다.
마침내 꺽정이가 자리에 털썩 앉으니, 그 무게에 눌린 장거정도 엉거주춤 옆에 앉게 되었다.
“본관 오는 것을 어찌 알았는가?”
“요동에서 조선말 하는 군사 여럿을 데려오셨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군사들이 도성 저자에서 우리 민주당 이야기를 캐묻고 있더라 하는 소문이 돌았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뒤를 밟으니 부사께서 계셨을 뿐입니다.”
저의 스승 없는 사이 대리로 맡게 된 이 모주 노릇을 꽤 진지하게 하고 있던 이이였다. 그가 이런 일에 머리를 쓰고 있다는 말을 신씨 부인이 듣는다면 질겁하겠지만.
“필시 왕직의 파옥(破獄) 이전부터 저희 당을 의심스럽게 보고 계셨겠지요. 파옥 이후에는 저희가 그 뒤에 있으리라 단정하시고 이리 바로 찾아오셨을 테고요.”
그제야 이이를 알아본 장거정이 말했다.
“자네는 그때 그 시구를 바쳤던 이 진사가 아닌가? 상서 대인께서 크게 노여워하셨기에 이 사람도 알고 있다네. 과연 그 시구에 불측한 뜻이 있다 싶었더니, 이러한 공모를 하고 있었군.”
‘화하(華夏)의 밝음은 태양과 같으니 하늘 아래 비추지 않는 곳이 없어라.’ 하는 구절이었다. 조문화는 그저 태양 하나만 트집잡았지만, 조금 더 생각이 트인 장거정은 그 뒤에 더 깊은 뜻이 있으리라 의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니, 속뜻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태양은 아무리 밝다 하나 하늘에 있고, 천조는 아무리 강성하다 하나 땅 위에 있지. 그러니 화하는 천조의 것만이 아니요, 문명만 갖추었다면 중원과 사이(四夷)의 땅 사이에 차이가 없다. 그런 무엄한 뜻 아닌가?”
“잘 보셨습니다.”
이이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 나라가 중화를 흠모하는 뜻은 이미 천하 모두가 아는 바일세. 비록 금번의 아름답지 못한 일의 뿌리는 우리에게 있다 하지만, 그리하여 우리에게 앙갚음을 하려 한다면 이 어찌 중화 받드는 번국의 행실이라 하겠는가?
이제 그대가 실토한 것과 다름없으니, 당장 왕직을 돌려주게. 이 사람이 이곳에 온 것은 상서 대인도 알지 못하니, 약조컨대 지금 귀정(歸正)한다면 그대들에게 어떤 죄도 닿지 않게끔 하겠네.”
“말씀하신 바대로 아국은 중화를 흠모하고 숭상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대명의 뜻에 따르지는 않으니, 대명이 반드시 중화의 나라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천하의 모든 것을 의심하고 또 의심하여, 스스로 참인 것을 알아낸 뒤에야 비로소 참으로 여기는 것이 격물법의 이치다. 천조와 중화에 대해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이의 말에 장거정과 명희의 낯이 공히 차갑게 식었다. 그러나 이이는 눈치가 없고, 서림은 그 말이 얼마나 의미심장한지 알지 못하며, 꺽정이는 중화고 뭣이고 엄숭 목을 따서 자신이 더 큰 도적임을 이승과 저승에 널리 알릴 마음뿐이었으므로, 오히려 놀라는 쪽의 수가 더 적었다.
“다음 말을 고를 때는 부디 조금 더 신중하여야 할 것이야. 자네가 지금 누구를 앞에 두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보게.”
그 말이 옮겨지니, 다시 장거정 어깨에 묵직한 팔이 턱 얹혔다.
“이보쇼, 나리 옆에 누가 있는지부터 다시 생각해보지 그러시오? 내가 왕직 아래에 있던 대국 사람 모가지를 많이 따 봐서 아는데, 나라가 크다고 해서 목숨이 두세 개씩 있지는 않더이다. 나리 윗사람 조가 놈도 이 이치를 잘 모르는 듯하던데, 이 기회에 잘 깨우쳐서 그 어르신에게도 알려주는 게 좋겠소.”
“임 당수, 우리가 장 대인을 겁박하는 데 뜻이 있지는 않잖습니까.”
“아, 말이 과했나? 미안하오.”
이이 말에 전혀 미안하지 않은 말투로 성의 없는 사과를 건네는 꺽정이였다. 장거정 역시 저를 겁박하려는 뜻은 아니라는 이이 말에 전혀 설득되지 않는 눈치였다.
“그대 말대로 본관을 겁박하는 데 뜻이 있지 않다면, 대체 어디에 있는가?”
“본디 저희 당은 조 상서에게 크나큰 망신을 줌으로써 대국 조정에서 엄 수보에게 반대하는 이들의 눈길을 끌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난 며칠간 장 대인의 거취를 살핀즉 이미 이목을 족히 끌어온 듯하더군요. 어찌 잘 되었다 하지 않겠습니까?”
“엄숭. 우리는 그놈을 치고자 하오. 그놈 있으면 종계(宗系)인지 씨닭(種鷄)인지도 못 고칠 테고, 또 이번에 하는 꼬라지만 보아도 알 수 있듯, 우리가 장차 뭍과 물 오가며 장사판 벌이는데 사사건건 발목만 잡을 게 뻔하거든.
그리고 여기 이 사람 말에 따르면 그대 윗선에서도 엄숭을 고깝게 여기는 것은 매한가지라 하던데.”
이이의 말은 쉽게 옮겨지고, 꺽정이 말은 아주 어렵게 옮겨졌으니, 말이 어렵기 때문이 아니요, 그 상스러우면서도 정직한 말을 가다듬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끙끙대는 안 녹사를 안쓰럽게 여긴 서림이 슬쩍 ‘이번 달 늠료는 곱절로 줌세.’ 했으니 다행이었다.)
그러나 그 뜻이 그대로 전해진다 한들 믿기 어려운 것은 매한가지였다. 황도 북경에서도 지금까지 엄숭을 쳐내려다 자신이 먼저 목숨을 잃은 이들이 한둘이 아니거늘, 어찌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그런 계책을 꾸미고 있었다는 말인가? 또 대체 무슨 수로 그것을 이루려 한다는 말인가?
“왕직 그놈이 모두 불었소. 내가 손수 증좌도 찾았고. 왕직 그놈이 여태껏 아니 붙잡히며 날뛴 것은 모두 엄숭이 뒤에 있었기 때문이라오. 그 아들 엄세번이 통해서 상납한 금은도 한무더기라던데.”
“무어라?”
“이미 저희가 조 상서에게 이만한 망신을 주었으니, 이미 민주당이 숭당(嵩黨, 엄숭의 파당) 아님은 명백히 드러났으리라 믿습니다. 장 대인의 뒤에 어떤 중신께서 계시는지 말씀해주신다면, 그분께서 엄 수보를 탄핵하는 데 필요한 모든 도움을 저희 민주당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반대로 이 길로 모화관으로 돌아가 조 상서께 이실직고할 수도 있겠지.”
“허나 부사 대인, 생각해보십시오. 파옥이 일어나기 며칠 전부터 두 분 천사들과 모화관을 지켜야 할 천병들이 누군가의 지시를 받고 다른 일에 열중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이미 붙잡은 왕직이 종적을 감추었으니, 누가 본들 수상히 여기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저희 조정 역시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고 가만히 있지는 않을 터인즉 필시 천조에 그 사정을 고변하려 하겠지요.
그뿐이겠습니까? 엄연히 이 일에서 도의를 먼저 벗어난 것은 천조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아국은 그저 중화를 숭상할 따름이지요. 이미 조선양보는 요동에서도 종종 읽힌다 들었는데, 개중 『공보』는 저희 당의 것이요 소생 역시 부족하게나마 『정론보』에 글을 싣곤 합니다.”
뻔뻔한 겁박이 또 한 차례 돌아오니, 당하는 장거정만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앞서 말한 그 ‘조선은 중화를 흠모할 뿐 대명을 흠모하는 것이 아니다’ 하는 궤변을 널리 퍼뜨리겠다는 것 아닌가? 하필 자신과 조문화가 돌아간 뒤에 그런 글이 퍼지게 된다면, 조선도 조선이지만 장거정 자신 역시 크나큰 화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희의 뜻은 겁박에 있지 않습니다. 간신에 항거하는 대의(大義)를 논했으니 이제 뒤이어 이익을 논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왕직 그놈과 아랫사람 몇 놈만 죽고, 그 오도(고토) 섬에 살던 해적들은 그대로 있소. 그들이 떳떳한 일에만 손댄다 한들 수익이 그렇게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오. 개중 얼마쯤은 우리 장 대인께도, 또 어쩌면 장 대인의 윗선까지도 갈 수 있겠지.”
만약 장거정 뒤에 아무 연줄도 없다고 하면, 호구 잘 잡았다 여기고서는 그를 꼭두각시로 내세워 북경에서 새로 연줄 만들 심산이었는데, 꺽정이와 서림에게는 아쉽게도 장거정 뒤에는 이미 거물 하나가 있었다.
한참 머릿속에서 저울질하던 장거정이 끝내 입을 다시 연 것이다.
“이부상서 서 대인(서계)이 감사하게도 본관의 스승 되시네. 그분께서는 바른 뜻을 품고 계시지만 아직 드러내지 못하고 때를 기다리고 계시지.”
“잘 되었습니다. 그러면 장 대인께 감히 청하건대, 그분과 저희 당 사이에서 다리가 되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것이 무슨 뜻인가?”
“말씀대로입니다. 상국의 상서께 힘을 보태고자 한다면, 마땅히 찾아가서 뵈어야 하겠지요.”
상국을 모시는 도리에 따르면 이것이 더 합당한 말일 테지만, 장거정은 불현듯 자신이 이 말을 따른다면 후에 저의 스승에게 한바탕 불호령을 듣게 되리라는 불안에 휩싸였다.
허나 이미 여기까지 말해버렸으니 어찌 주워담을 수 있으랴.
결국 그 허무맹랑한 ‘계책’에 동참하기로 하고 터덜터덜 돌아온 장거정은, 모화관에 닿자마자 아랫사람들을 시켜 이이라는 자가 쓰고 있다는 『정론보』를 모두 모아온 뒤, 받자마자 급히 읽기 시작하였다.
이이가 쓴 글만 띄엄띄엄 읽었음에도 그날 밤이 다할 무렵에야 겨우 마쳤다. 그리고 마지막 한 장을 내려놓자마자 장거정은 허탈함에 뒤로 자빠지고야 말았다.
“허, 참으로 도적 같은 서생이 아닌가? 이미 그 말을 모두 퍼뜨려놓았으면서, 장차 퍼뜨리겠노라 겁박을 하다니.”
무엇보다도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의권의 논변이었다.
그 말에 이르기를 오로지 백성의 의권을 지키기 위하여 나라가 있다 하였다. 군신(君臣)의 도리를 전면으로 뒤엎는 말이었다.
그리고 천조와 번국의 사이는 군신의 사이와 같으니, 그러므로 번국의 임금은 국서를 올릴 때 칭신(稱臣)하고 천조는 번국의 임금과 그 이하 신료를 모두 배신(陪臣)으로 일컫는다.
그러나 백성이 먼저 있고 그 뒤에야 임금이 생겼다면, 마찬가지로 번국이 먼저 있고 천조가 그 뒤에 생겼다는 논리도 가당할 터. 그것을 대놓고 쓰지 않았을 뿐, 이 『정론보』를 통해 모두 퍼진 것과 진배없었다.
장거정의 머릿속에, 사업당 나서는 길에 이이 한 사람만 세워놓고 앞서 말한 중화의 논변이 그릇되었다고 설득하려 했을 때 나누었던 대화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종계의 변무는 이미 성조 문황제(영락제)께서 조칙으로 남긴 바요, 설령 그런 뜻이 없다 하더라도 신자(臣子)된 도리로서 마땅히 고쳐야 할 일입니다.”
“그 말은 일리가 있고, 종계변무를 두고 조건을 붙이면서 마치 흥정하듯 한 것 역시 불인(不仁)한 처사라 보네. 허나 그것을 두고 우리 상국이 더는 중화가 아니라 하면 이 또한 무도하고도 지나친 말일 터.”
“중화가 어찌 한 나라의 것이라 말씀하십니까? 중화가 정녕 한 나라에 속해 옮겨갈 수도, 여러 나라가 함께 누릴 수도 없는 것이라면, 하후씨(夏后, 하나라 왕실)의 대가 걸왕에 이르러 끊어졌을 때 중화 또한 사라졌을 것입니다. 어찌 이것이 가당한 일이겠습니까?
또한 중화가 정녕 중원의 사람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삼대(三代, 하·은·주)의 강역 바깥에서 나고 자란 이들은 모두 오랑캐일 뿐이니 중화에 이를 수 없을 것입니다.”
형주, 그러니까 주나라 때만 해도 형만(荊蠻) 오랑캐의 땅이었던 곳 태생인 장거정을 빤히 쳐다보며 이이가 말을 이었다.
“면전(버마), 섬라(시암, 現 태국). 만랄가(말라카), 안남, 유구, 일본. 이들 나라에게 한 가지 같은 점이 있는데, 무엇인지 아십니까?”
“모두 천조에 입조하는 번국이 아닌가?”
“맞습니다. 천조에서 보기는 그렇지요. 그리고 포르투갈 사람들이 배를 타고 나아왔을 때 그들과 거리낌 없이 통상한 나라들이기도 합니다. 우리 조선은 포르투갈 배 한 척이 당도하니 곧장 천조에 알려 그 가는 곳을 전하였는데, 다른 나라들은 이미 그 배가 오간지 삼십여 년이 넘었습니다. 상국에서는 이를 알고 있었습니까?”
이이는 불랑기 사람 ‘하비애루’를 만나 그 사정을 모두 들었다 하였다. 대국의 사람으로서 장거정은 하비애루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우기고 싶었으나, 냉철한 그의 머리는 저 말이 맞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니 대명의 번국 중 번병으로서 도의를 다하는 나라는 우리 조선 하나뿐입니다. 이 도의마저 철폐한다면 대명에 과연 진실된 번국이 남겠습니까?”
천조가 천조인 까닭은 천명이 있어 천하를 관할하기 때문이다. 천명이 없다면 아무리 그 강역이 넓다 한들 군웅이 할거하던 시절과 다름이 없으니, 화하의 나라와 오랑캐 나라 사이 차이가 없으리라.
“민주당은 오직 이 나라 조선을 더 좋은 나라로 고치고자 뭉쳤습니다. 저뿐 아니라 임 당수나 서 별감, 그리고 지금쯤 저 남해 바다에 나아가 계실 저의 스승 수산 선생에게 물어도 똑같은 답이 나올 것입니다.
바라건대 장 대인께서도 이 문답을 두고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중화가 한 나라에 속한 것이 아니요 노력하여 이룰 수 있는 것이라지만, 문물과 인물이 모두 천하의 제일인 대국만큼이나 이를 쉽게 얻을 수 있는 곳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지금까지 이 땅에서 일어난 나라들이 대개 상국을 모시며 두 마음을 품지 않았던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 아니, 만약 지금 이 말이 조선의 본심이 되어버린다면, 그때는 차라리 두 마음 품기를 바래야 하지 않을까?
번국이 먼저 있고 그 뒤에 천조가 있다면, 천조가 천조로서 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과연 지금의 대명은 그 일을 능히 해낼 수 있는가?
차라리 밤이라도 길어서 오랫동안 숙고할 여유가 있다면 좋았으련만, 애석하게도 무정한 수탉 울음소리가 새벽을 알렸다.
남해 바다에서 왕직 붙잡은 공을 세운 민주당 당수 임거정이, 천사가 처한 곤경의 소식을 듣고 의기로운 마음에 흑의군을 다시 풀자, 악적 왕직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한양 근방의 산에서 하루 만에 다시 붙잡혔다.
이것이 어찌하여 그 왕직이 민주당 당청에서 나타났는지에 대한 변명이었다.
이에 부사 장거정이 조선국 조정에 제의하기를, 조선의 강병(强兵) 정예한 것은 이미 여러 차례 증험되었으니, 천하의 악적 왕직을 압송하는 길에도 저 흑의군 여럿을 붙인다면 이번과 같은 근심이 없어질 것이라 하였다.
그 뒤에서는 저들과 뜻을 함께 하였으니 약속드린 이익을 미리 조금 나누어드리겠노라 하면서, 왕직의 저택에서 나온 귀물을 처분하고 나온 은 일부가 오갔는데, 조문화는 알지 못하는 사정이었다.
이미 조선의 불손함에 치를 떨던 조문화는 당연히 반대하였지만, 한양에 머물 때 왕직이 달아났으니 망정이지 저 의주대로 산속이나 벌판 어딘가에서 달아났더라면 어찌 찾을 수 있었겠느냐 하는 장거정의 설득에 끝내 마음이 돌아섰다.
그 결과, 이 일은 사행(使行)이 아니니 글을 올릴 것도, 조공을 올릴 것도 없다는 확약을 받아낸 뒤 조선 사람들을 대열에 붙이기로 하였다. 임거정과 그가 이끄는 흑의군 오십, 그리고 서장관 몇몇과 역관까지 하여, 대열이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장거정은 서장관으로 유생 이이를 추천하였는데, 아무리 그래도 문명과 예의의 나라 조선의 체통이 있으므로 그 연소한 사람을 홀로 보낼 수 없었다. 그러므로 학식과 문장으로 이름 높은 전 풍기군수 이황이 서장관 중 으뜸으로 가게 되었고, 그 뒤에 이이가 따라붙는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그 뒤에는, 임거정과 이이 두 사람이 뭉쳤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알 수 없다는 이준경의 극렬한 반대가 있었다. 이는 민주당에 벌써 여러 차례 시달린 사림의 거유들도 모두 동의하는 바였다.
이후 북경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왕직은 여러 차례 탈주를 시도하였다. 천병조차 붙잡지 못하는 날랜 자였건만, 수상할 정도로 산길을 잘 아는 임거정과 그 수하들에 의해 번번이 붙잡혔다.
더욱 수상한 것은, 조문화가 오늘에야말로 왕직 그놈을 몰래 죽여야겠다고 결심할 때마다 왕직이 달아났다가 붙잡히곤 했다는 점이었다.
그리하여 왕직이 개성에서 의주 사이에서만 여섯 번을 달아났다 붙잡혔으니, 한양서 도주한 것까지 합치면 이것이 바로 칠종칠금(七縱七擒)이라.
사로잡힌 것은 왕직이로되 손이 붙잡힌 것은 조문화였다. 졸지에 남만 추장 맹획과 같은 꼴이 되었건만, 어디 한 군데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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