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말의 명재상 장거정은 예나 지금이나 논쟁적 인물입니다. 장거정은 융경제 연간에 서계의 후원을 받아 정계에서 두각을 드러낸 뒤, 자신의 후원자 서계와 그 정적 고공의 뒤통수를 모두 한 번씩 때린 뒤 마침내 만력제를 등에 업고 엄청난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그 뒤 대규모 토지측량 사업과 조세의 일원화·은납화를 골자로 하는 일조편법 개혁을 추진하였고, 이 덕에 명의 재정과 경제는 어느 정도 체력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의 이면에는 철저한 독재가 있었습니다. 장거정은 조정의 언관들뿐 아니라 지방의 신사들까지 탄압하여 자신과 개혁에 대한 반대 여론이 일어날 근간을 없애려 했고, 이에 대한 대책이나 변법을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게끔 하는 정치제도의 개혁에 대해서도 소극적이었습니다. 그 이면에는 부친상 당시에도 사직을 하지 않았던 사례 등으로 드러나는 장거정 본인의 엄청난 권력욕이 있었지요.
분명 그가 추진한 개혁은 암군에 암군이 뒤를 이은 명나라가 그나마 수십 년을 더 버틸 수 있는 힘을 마련하였지만, 그 반작용 역시 적지 않았습니다. 그의 어마어마한 부정축재는 비록 당대인들에 의해 과장된 면이 매우 많기는 하지만, 동시에 그에 대한 당대인들의 인식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한편, 한국에도 잘 알려진 판관 포청천은 본디 북송대의 명신(名臣) 포증(包拯)인데, 이미 명나라 시절부터 그를 주인공으로 한 공안소설(公案小說, 수사물과 무협이 섞인 장르라 할 수 있습니다)이 널리 퍼졌습니다. 비단 이뿐 아니라 이전에 언급되었던 『삼국지연의』, 『서유기』 등도 이 시기에 도시 소시민 문화의 발달과 더불어 널리 퍼지게 되었지요.
작중 이이가 언급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원 역사의 조선 사림 지식인들도 종계변무를 기하여 명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지니게 됩니다. 분명 조선의 노력이 여러 차례 결실을 거두는 것 같았지만, 결과적으로 돌아오는 것은 명 조정의 말장난과 공허한 약속뿐이었던 것이지요. 조선 사림이 보기에, 분명 『대명회전』에서 조선 국왕의 족보를 고치는 것은, 천조로서 마땅히 보편적이고 정확한 정보를 기재할 책무가 있기 때문에 굳이 조선이 청하지 않더라도 해야 하는 일인데, 그것을 제대로 행하기는커녕 계속 조건을 달면서 엉뚱한 짓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선조 연간까지 넘어오게 되면, 기대승 등 사림의 소장파 인물들 중에서는 혹시 명나라가 이 윤리적 문제를 조선에 대한 목줄로 활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의심까지 등장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무를 위해 계속 명에게 간곡한 어조로 개정을 청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분명 명나라에 대한 인식, 그리고 조선 자국에 대한 인식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마침내 만력 연간 초에 종계변무가 완료되고, 이어서 만력제가 임진왜란 당시 ‘재조지은’을 베풀면서 이러한 인식은 완전히 뿌리가 뽑히게 되지요 (이혜순. 2017. “종계변무와 조선 사신들의 명나라 인식.” <국문학연구> 36).
外. 재물의 근본
수탉 소리가 들려오니, 도성 사업당 안쪽에 마련해둔 저의 집 안방에서 서림은 눈을 떴다.
게으른 겨울 해가 어슴푸레하게 비출 뿐이지만, 역편(曆片)의 큼직한 글자 읽기에는 족하였다.
“계축년(1553) 일월 칠일이라... 사람날(人日)이구나.”
하품하며 서림이 혼잣말을 했다.
지난해 여름, 논상원 강의를 감명깊게 들은 관상감 관원 하나가, 역서가 두껍고 비싼 것을 깨닫고서, 딱 일 년 열두 달의 하루하루와 주요 절기, 손없는 날 등등만 적어서 싸게 많이 팔자는 발상으로 내놓은 것이 이 역편이었다.
이익 얼마간 나누는 조건으로 『공보』의 설비를 빌려 마침내 지난 동짓날에 팔기 시작하였는데, 쓴 지 며칠 되지도 않아 벌써 익숙해지는 것을 보니 앞으로도 꽤 쏠쏠한 장사가 될 듯하였다.
조반 맛나게 먹고 – 서림이 누리는 얼마 안 되는 호사 중 하나였다 – 의관을 갖추니 밖에서 소리가 났다.
“별감 어르신, 『정론보』가 나왔습니다.”
“허, 사람날에도 아니 쉬는구나.”
본디 사람날은 일 쉬는 날이니, 서림 고향에서는 이르기를 이날 연장을 손에 잡으면 범이 물어간다 하였다.
허나 매달 초이렛날과 열이렛날, 스무이렛날에 나오는 『정론보』는 그대로 나왔다. 민간의 세시풍속 따위 개의치 않는 선비들다웠다.
혹 『공보』에서 놓친 이야기 있는가 싶어 대충 살펴만 보았는데 – 어차피 깊게 살피려 해도, 문자는 읽힐지언정 문의(文意)는 너무 어려워 머리에 들지 아니하였다 – 그런 것은 다행히도 없었다.
저의 벗 겸 ‘물정 모르는 어리석은 선비’ 이황이 이준경에게 등 떠밀려 북경으로 떠나자마자 『정론보』는 조식 혼자의 것이 되었다. 이렇게 될 것을 이황과 이준경도 알았지만, 임꺽정과 이이만으로도 걱정스러운데 그 옆에 조식까지 붙여서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황에게는 다행히도, 조식이 갑자기 노장(老莊)의 글에도 좋은 말 많다면서 그 글을 싣는다거나, 생각해보니 왕양명(왕수인)이 참 훌륭한 사람이라며 옹호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대신 이이의 글이 메우던 지면 한 구석에 평소 바빠서 하지 못하던 이이에 대한 반박을 싣고 있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비슷한 마음의 다른 선비들도 근래 시사에 대한 저의 논설을 펼쳤다.
이번 『정론보』에는 그간 조용하던 이언적이 글을 실었는데, 이르기를 율곡의 의권 논변에서 민(民)이 먼저 나고 그 뒤에 군(君)을 세웠다는 말은 온당치 않다 하였다.
“... 사람의 심성은 본디 선량하고 온후하나, 간혹 그 심성의 발(發)이 막혀 간악함으로 흐르는 자가 있다. 그런데 인군(人君)이 없다면, 만 명의 사람 중 한 사람만이 그렇게 간악하다 한들 앞에 나서서 그를 가르치거나 벌할 이가 없다.
그러므로 다른 이들도 모두 서로 경계하고 의심하다가 종국에는 서로 다투게 되니, 이것이 한 사람의 악인만 있더라도 만인이 만인에 대해 싸우게 되는 이치이다. 이 지경에 처한다면 사람이 금수와 무엇이 다르랴? 오직 나라에 군주가 있어 교화를 베풀고 옳고 그름을 가리므로, 사람은 그 바른 심성을 펼치고 비로소 사람다워질 기회를 얻는다.
즉 군신(君臣)은 마치 음양과 같이 서로 만들고 만들어지는 것이니 앞뒤를 다룰 수 없다. 군주가 이 도의를 폐하려 하면 곧 필부와 다름없게 되고, 신자가 이를 폐하려 하면 금수와 다름없게 된다...”
서림은 그 깊은 내용은 잘 이해하지 못하였으나, 이이의 논의에 반박하며 근왕(勤王)에 힘 싣고자 하는 뜻만은 알 수 있었다.
근래 외척 심통원이 같은 심씨 사람들은 물론이요 사림의 굵직한 이들을 끌어들여 뭔가 작당을 하고 있다는 말이 돌았는데, 회재 선생 이언적이 거기에 한몫 거들게 되었는지, 아니면 그저 평소 품고 있던 생각을 이제 와서 풀어놓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쪽 일은 당수와 모주 두 분 돌아오신 뒤에 맡겨도 늦지 않을 것이다.’
당장 드러나지 않은 일에 마음 기울이기에는 오늘 하루도 너무 짧았다.
몸 일으켜 동대문 밖으로 향하는 길. 사람날이라고 그냥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한담하는 사람들을 보니 그제야 『정론보』가 사람날 아니 쇤다고 이상하게 여길 계제 아님을 깨달았다.
‘나도 오늘 일하는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
평양 아전 시절에도 돈만 된다면 일 년 내내 안 쉬고 일하는 것도 가하였던 서림이다. 이 정도야 괜찮지 않겠는가?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과연 이것이 올바른가, 저도 뭔가 다른 즐길 거리 챙겨가며 쉬엄쉬엄 일하는 것이 맞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런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서림은 어느새 동대문을 지나, 왕심리(旺深里, 現 왕십리)께에 닿았다. 이곳이 바로 ‘흑의영(黑衣營)’ 들어설 자리였다.
흑의영이란 바로 이름처럼 흑의군 머무는 군영이었다. 금군역 끝나고 갈 곳 없던 흑의군들은 대개 알아서 다른 민주당 경아전네 집에 더부살이하고 있었는데, 꺽정이 생각에 차라리 옛날 청석골처럼 도성 근처에 산채 비슷한 것을 하나 지으면 좋겠다 싶었던 것이다.
그나마 꺽정이가 왕직 때려잡으러 가기 전 이준경에게 얘기하여, 저들이 도성 안에 있는 것보다는 성문 밖에 머무는 쪽이 피차 편하리라고 설득해주었으므로 그 실무는 제법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이준경은 여차하면 임금께서 심도(沁都, 강화도)로 몽진하실 때 가로막지 못하도록 동대문 밖에 터를 마련해주었고, 거기에 병기의 출납은 반드시 포도청 군관이 상주하며 이를 감시토록 하였다. 그러나 그 외 다른 조건은 더 붙이지 않았다.
그 덕에 공사도 그럭저럭 원활히 진행되어, 이미 큼직한 본채와 흑의군 조련할 널찍한 마당은 마련되었고, 저의 집 없는 패두와 군졸들 기거할 곳과 창고 등등은 이제 막 짓는 중이었다.
“아이고, 별감님 오셨습니까요?”
“좀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십쇼.”
꺽정이 없는 사이 흑의군 총괄하는 오막손이와 임밤이 - 존경하는 당수님 성을 따르겠노라 하여 마침내 뜻을 이루었다 - 가 나와서 인사를 올렸다.
흑의군도 생긴 지 여러 해가 되다 보니 자연스레 체계가 잡히고 있었다. 성황산성 싸움 이후 검은 옷을 벗은 최만복이 외에도 정직한 새 삶 찾아 떠나간 이들도 여럿 있었고, 또 저도 흑의군 하겠다며 찾아오는 도적과 무뢰한, 나졸 등등도 꽤 많았다.
그리하여 꺽정이 아래 굵직한 패두들 중 오막손이와 밤이, 양벽 이렇게 셋이서 흑의군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문자도 깨우치고 일머리도 제법 있는 오막손이가 이런저런 군정(軍政)을 맡고, 의민당 시절부터 서림 아랫사람들과 안면이 있는 밤이는 사업당 오가며 조율하는 일을 맡았으며, 양벽은 자신이 꺽정이에게 당한 일을 신참들에게 그대로 베풀어주는 일, 다시 말해 조련을 맡았다.
다만 지금은 양벽도 꺽정이 따라 대국 갔으니, 오막손이와 밤이가 남은 흑의군 중에서는 가장 윗사람들이었다.
“별 건 아니고, 사람날이라 사업당 일이 조금 한산하여 이 흑의영 공사 어찌 되고 있는가 살피러 왔다네. 이 일도 결국 당의 재정으로 하는 것 아닌가.”
임밤과 오막손 두 사람 거느리고 안쪽으로 걸음하려던 차, 갑자기 쾅 하는 소리가 마당에서 들려왔다.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는데, 지나고서 생각해보니 익숙한 우레소리였다.
“저것은 총통 소리 아닌가?”
“맞습니다. 이제 막 말씀드리려던 차였는데, 당수님 아내분께서 화약을 좀 더 구해오셔서, 일전의 그 조총 쏘는 것을 시범 보이고 계십니다.”
“여기서? 아니, 아무리 그래도 양반댁 규수신데...”
반가 여인이 어찌 외간 남자들 여럿 앞에서 몸 쓰는 일을 선보인다는 말인가? 서림 저야 별 신경 안 쓰지만, 누군가 다른 이들, 예컨대 고루한 선비들이 들으면 흉 잡기 좋은 일이었다.
“규수가 홀로 외간 남자를 만난다면 아름답지 못한 행실이니, 집안 어른이 함께 와서 보아주고 있다네.”
등 뒤에서 목소리 나기에 돌아보니 신씨 부인이었다.
“힉! 아니, 언제 오셨습니까?”
“여식과 함께 찾아왔다네. 임 당수가 먼 길 떠났으니, 그사이 민주당을 남은 우리가 잘 이끌어야 하지 않겠는가.”
봉산 관아에서 연명하여 글 쓸 때 이름 올린 신씨 부인이 그리 말하니 서림도 할 말은 없었다.
또 한 차례 총통 소리가 났다. 서림이 마당까지 가서 보니, 의외로 ‘아씨’께서 쏘신 것이 아니었다.
“잘 했어요!”
“하하, 감사합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조총을 조심스레 내려놓으며, 흑의군 하나가 머쓱하게 웃었다.
“자, 들으세요! 오늘은 준비한 화약이 다 떨어졌으니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이 조총이 언제 동래에서 넉넉하게 나올지는 알 수 없지만, 그때가 되면 적어도 흑의군 셋 중 한 사람은 이 조총을 능숙히 다룰 수 있어야 할 거에요. 이는 제 부군 되시는 임 당수께서도 강조하신 바입니다.”
아리따운 처자가 눈앞에 지나가면 희롱부터 하고 볼 몹쓸 무뢰배들도 흑의군 중 적잖이 섞여 있었으나, 그들 중 그 누구도 헛소리 하지 않고 명희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그 남편분 때문이기도 했지만, 저 아씨께서 그들 눈앞에서 조총으로 과녁들 박살내는 솜씨를 이미 여러 차례 보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알겠습니다, 아씨!”
그렇게 모두들 흩어보낸 뒤에야 명희는 비로소 저의 어머니와 서림 찾아온 것을 알아챘다. 총을 어깨에 걸머지고서 저벅저벅 걸어오는 모습이 낯설면서도 어여뻤는데, 서림은 어째 칼춤 추는 신씨 부인 모습이 그 위에 겹쳐보여 도저히 아름답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였다.
“아, 서 별감께서도 오셨군요.”
“흠흠, 그, 수고가 많으십니다.”
“수고가 많긴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요. 황해도 산채 시절에는 수산 선생님께서 흑의군 조련도 잠시 맡으셨다 들었는데, 지금 저도 모주 일을 맡고 있지 않던가요?”
그때, 신씨 부인이 끼어들었다.
“겨울바람 매섭소. 본청 들어가서 마저 얘기들 하십시다.”
“예? 얘기라 하시면...”
“마침 서 별감을 만나게 되면 우리 딸아이가 하고자 하는 말이 있었다 하오. 서 별감께도 분명 나쁘지는 않은 이야기일 것이오.”
명희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상량 마친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본청은 사람 머무는 곳 같은 느낌이 물씬 풍겼다. 신씨 부인 턱짓 한 번에 다과상까지 나오는 것을 보면, 누구 덕인지 익히 알 만했다.
“조금 손을 썼소. 사위뿐 아니라 딸아이도 종종 이곳을 드나들 것 같아서 말이오.”
이게 ‘조금’이라면 신씨네 외조모 때부터 대대로 가꿔왔다는 강릉 오죽헌은 어느 정도일까. 우중충한 남정네 냄새만 나는 사업당에도 여인의 손길이 조금 필요하지 않을까 잠시 딴생각하게 되는 서림이었다.
마치 신씨가 붓을, 황진이가 거문고를 애지중지하듯 자신의 조총을 소중하게 곁에 내려놓으며 명희가 본론을 꺼냈다.
“다름이 아니라, 지금 사업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조금 듣기를 바랍니다.”
자신이 일군 사업당 일에 대해서는 명희나 신씨 부인은 물론 임꺽정 앞에서도 쉽게 뜻 꺾지 않을 서림이다. 경계하는 마음이 자연스레 먼저 일어났다.
“그, 송구스럽지만 그 연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이 조총을 보면서 얘기해보지요.”
명희가 저의 곁에 놓은 총자루를 슬쩍 들어보였다.
“조총 한 자루 값이 일본국에서는 병정 한 사람의 일년치 늠료라고 합니다. 복건 대장장이 장삼 말에 따르면, 노야(대장간)를 더 늘리고 사람을 많이 붙이면 훨씬 싸게 만들 수 있다고 하는데, 그 값이 아무리 떨어져도 지금의 삼사분지 일 정도나 되겠지요.”
많이 만들면 값이 떨어지는 이치에 대해서는 이미 허엽이 논상원에서 나온 논변을 정리하여 밝힌 바 있었다.
“그리고 장차 우리 당은 이 조총을 적어도 수백 자루는 확보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도 이삼 년 사이의 이야기고, 더 나아가 수천, 수만 자루도 만들어낼 기반을 마련해두어야 하겠지요.”
“앞서 말씀하실 때는 흑의군 셋 중 하나만 익히면 된다고 하시지 않았는지요?”
“언제까지 제 낭군과 흑의군의 무용(武勇)으로만 버틸 수 있으리라 생각하시나요?”
날카로운 물음이 훅 들어왔다.
“저는 연소하고 식견이 짧지만, 그런 제 눈에도 근년 사이 조선이 아주 빠르게 변하고 있음이 보입니다. 이게 과연 자연스러운 일인가요? 언제까지 이게 계속될 수 있을까요?”
서림은 물론이요 신씨 부인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노둔한 사람은 결코 아니었으므로, 금방 명희가 하는 말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몇십 년은 걸려야 족히 바뀔 수 있을 조선국 풍토가 고작 두세 해만에 급변하고 있었다. 이대로 변화가 이어진다면, 수백 년 걸릴 일이 수십 년, 어쩌면 십 년도 채 되기 전에 모두 이루어질 수도 있을 터.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반발하는 자들을 억눌렀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마음대로 변하려 할때 그것을 눈꼴시게 생각하는 이들의 몽둥이가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보장, 즉 의민당과 민주당의 무위(武威)라는 보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는 말이 당의 무위지, 실상을 따지면 거의 제 낭군의 무예 덕택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요. 그렇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민주당이 승승장구할 수 있던 또 다른 이유는, 조선국 조정과 관헌이라는 익숙한 상대를 두고, 그 허실을 너무나 잘 아는 서림과 아전들이 힘을 합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민주당이 세를 불리면 불릴수록, 민주당의 허실을 아는 이들도, 민주당을 미워하고 거꾸러뜨리려는 자들도 늘어나게 될 것이다.
“당장 이번 남정(南征)도 그랬지요. 물론 단번 싸움에 왕직을 낭군께서 붙잡기는 했지만, 그에 앞서 판옥선과 그에 실린 화포, 그리고 무엇보다 핀투 선장의 재주가 있었기에 그리할 수 있었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닥쳐오게 될 다음 싸움에도 그렇게 대비하는 수밖에 없겠지요.”
“그리고 그 수가 바로 이 조총에 있다... 당수와 아씨께서는 그리 보시는군요.”
“바로 그렇답니다. 그리고 그 비용은 적지 않겠지요.
조총은 하나의 예시일 뿐이에요. 앞으로 우리 당이 계속 뜻을 이루어나가려면 무비(武備)는 허술히 할 수 없을 텐데, 가면 갈수록 이 무비의 일은 곧 재정의 일과 다름이 없게 되겠지요.”
사업당에서 벌어지는 일의 흥망은 임꺽정이 반대하는 이들을 때려잡는 데 달렸고, 임꺽정이 앞으로도 무패로 일관하려면 결국 그만큼 많은 재정으로 뒷받침해야 할 터였다. 같은 당이니 흥망을 함께함이 이치에 맞는 일이기는 했다.
“후,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미리 언질을 주셨더라면 문서라도 몇 장 들고 와서 말씀을 드렸을 텐데... 우선 힘 닿는 데까지 지금 사업당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지요.”
비록 경제사 쪽으로 사람이 많이 빠져나가면서, 경아전과 향리들 외에 총명한 일반 백성의 자제도 모으고 있다지만 – 이대로 몇 년 지나면 전국의 학당에서도 인재가 적잖이 나올 테다 – 아직 사업당의 대다수는 아전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업당은 아전들에게 익숙한 육방 체제로 나뉘어 있었다.
“이방은 군현의 지부와 연락 주고받는 일과 전형(銓衡, 인사)을 맡고, 호방은 재정 출납을 맡습니다. 근래에는 경제사 일이 보태지면서 호방 일이 좀 늘었지요.”
경제사의 재정은, 내수사전과 어장, 염장(鹽場) 등을 처분하고 나온 수익을 다시 사업당 쪽으로 보내 그 밑천으로 쓰게끔 하고, 그렇게 나오는 수익 중 일부를 경제사에 돌려주는 식으로운영되고 있었다. 한 해도 다 지나지 않았지만 얼추 그렇게 자리가 잡혀가고 있었는데, 말이 쉽지 실제로는 번잡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예방은 왜국과 여진, 그리고 요동 쪽과 교역하는 일을 맡습니다. 병방은 흑의군과 여타 고임(雇賃, 인력업), 형방은 여러 창고를 관리하고 출납을 감시하는 일, 그리고 공방은 『공보』와 여러 장인들 거두어 물건 만드는 일을 맡지요.”
“하지만 육방에 다 맞지 않는 일이 분명 있을 텐데요? 당장 전국의 학당 일만 해도 그렇고요.”
“잘 보셨습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각 방 아래에 또 부(部)를 두어서 나누고 있지요. 대동법 일이 추가되면 호방 아래에 을부(乙部)를 새로 차리는 식으로요.
마찬가지로 말씀하신 학당 일은 예방 아래 병부(丙部)를 새로 두어 맡게 하고 있고, 장차 동래에서 좋은 소식이 전해지면 공부 아래에도 조총 만드는 병부(丙部)와 배 만드는 정부(丁部)를 두게 되겠지요.
앞으로도 계속 사업은 늘어날 테니, 육방 아래 부의 수도 더 늘면 늘었지 줄지는 않을 것입니다.”
말하다 보니 어느새 신이 나서 점차 말이 빨라지는 서림이었다. 사람마다 일을 딱딱 나누고, 그에 맞추어서 맡은바 일을 규격 따라 처리하니, 서림은 감히 조선국 여느 관아보다 사업당이 훨씬 짜임새 있게 돌아간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서림은 이어서 육방과 그 아래 각 부의 사업 현황에 대해 자신이 아는 대로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마치 눈앞에 장부를 두고 읽는 것처럼, 어느 부에 어떤 사람이 있는지, 주된 벌이는 어떤 도 어느 군현에 있으며 수익은 얼마나 유망한지 등등을 모두 털어놓았다.
그렇게 목이 말라가는 것도 잊은 채 한참 떠들었더니, 서림이 신씨 앞에서 질색하는 대신 신씨가 서림에게 질색하는 기이한 일도 벌어지게 되었다.
“와...”
마침내 물 한 잔으로 서림이 목을 축이는 사이 명희가 내놓은 찬사였다.
“그 일을 지금까지 혼자 다 도맡아 하셨나요? 앞으로도 홀로 하실 생각이시고요?”
“뭐, 그렇습니다. 일을 나누어 맡길 사람은 많아도, 모든 일을 두루 헤아리고 살필 만한 인재는 아직 찾지 못했으니 말이지요.
사실 많은 걸 바라지는 않습니다. 생긴 건 잔나비(원숭이) 일가붙이처럼 생겨도 좋고, 조선말만 잘하면 조선이 아니라 어디 왜국이나 대국 사람이라도 괜찮습니다. 허나 재주가 있으면 미덥지 못하고 미더우면 재주가 부족하곤 하니 어쩌겠습니까.”
“이곳 흑의영에 사람날 되어서야 겨우 짬을 내어 찾아오실 수 있던 것은 그 때문이었군요.”
“하하, 정확히 보셨습니다.”
설명의 열기가 식고 나니 쓴웃음이 남았다. 명희도 감탄하기를 관두고 걱정하는 낯빛을 보였다.
“말씀하신 것을 들으니, 사업당이 필요한 재정을 못 댈 것을 걱정할 이유는 없겠네요. 대신 다른 걱정이 생길 뿐입니다.
만기친람(萬機親覽)은 일국의 임금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 사업당의 일을 듣고 보니, 짜임새 있기로 여느 나라의 조정보다 더한 것 같은데, 서 별감께서는 오히려 진수성찬을 챙기는 데 드는 겨를마저도 아깝게 여기신다 들었어요.”
그러자 신씨의 그 엄하디엄한 얼굴에도 동정하는 눈빛이 깃들었다. 서림이 새장가도 들지 않고 홑몸으로 살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여차하면 이 사람이 살림살이에 손을 좀 보태주겠소. 호의호식할 욕심만으로 이 일을 하는 것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사람이 어찌 일만 하고 살겠소?
이 사람이 검을 배워서 심화 다스린 것처럼, 서 별감 그대도 이 사업당 일에만 전념치 말고 다른 일에도 흥취를 조금 가져보는 것이 좋을 듯하오.”
종종 황진이가 개성에서 저의 벗을 보러 올라오면 만나서 옛날 봉산 시절 추억을 되살리곤 하는 – 이상하게 그럴 때마다 이원수는 난데없이 저의 관아에서 숙직할 일이 생기곤 했다 – 신씨가 말했다.
“하하, 그럴 일은 없으니 염려를 거두십시오.”
서림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만기친람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라 하는 명희 아씨의 말은 그대로 가슴 속에 남았다.
서림은 돌아오자마자 찬모에게 주안상 차려달라 말하였다. 사업당 문 연 이래 술도 거의 입에 아니 대던 서림이 난데없이 낮술을 내오라 하니, 찬모는 깜짝 놀랐다.
그 서 별감이 일은 아니하고 낮술을 마실 정도라면 얼마나 큰일이 터진 것인가?
비상한 일이 틀림없었으므로, 찬모는 사람을 여기저기 보내 금방 구할 수 있는 것들 중 가장 좋은 술과 안주를 마련해 왔다.
그렇게 사람이 오가면서 소문도 퍼졌으므로, 어제 남은 일 하러 등청한 사업당 사람들도 다들 깜짝 놀라 몸을 사렸다.
그런 오해가 퍼지건 말건, 서림은 저의 안채 독방에 앉아 술을 벗으로 삼았다. 서안 위에 올려둔 종이에는 지금 사업당에서 벌이고 있는 육방 관할의 온갖 사업들 목록이 적혀 있었다.
“만기친람이라... 이대로라면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만 가지 일이 될 수도 있겠구나.”
마치 의민당이 강음부터 재령까지 황해도 군현에서 열리는 장시를 손에 꽉 잡고 있던 것처럼, 민주당도 장차 조선 팔도와 그 너머에서 오가는 물산의 움직임을 모두 관할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 왔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것은 무리한 생각이었다. 당장 그의 앞에 있는 저 역편만 해도, 민주당의 도움을 받았지만 당에 속하지는 않은 관상감 관원이 만들어 팔고 있지 않던가?
명희 아씨 말마따나 조선은 지난 몇 년 사이에 빠르게 변하고 있었고, 나라 안팎에서 새로운 일이 펑펑 터질수록 그 변하는 기세는 멈출 줄을 모르게 되었다.
논상원과 전국 학당에서 재주 배우던 이들 중 성미 급한 이들은 벌써부터 큰돈 만져보겠노라며 뛰쳐나오고 있었다.
한양뿐 아니라 평양, 개성도 마찬가지였다. 개성에서는 유서 깊은 송상(松商) 집안들이 뭉쳐 인삼으로 뭔가 이익을 취해볼 방도를 구하고 있다 하였으며, 평양에서도 서림 저를 박대하던 아전들이 저들끼리 뭉쳐 얼른 그들의 재산을 복구하고자 이런저런 사업을 벌이고 있다 하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심지어 고지식하게 농장만 경영할 줄 알았던 지방의 사족들 중에서도 이 장사 열풍에 뛰어드는 이들이 있었다.
사창을 만드는 법도가 시행되자, 그냥 사창을 만드는 데서 그치지 않고 남는 곡식을 은으로 바꾸어 장사치들에게 빌려주고 이자를 뗄 생각을 한다던가, 우직하게 벼와 보리, 기장 등만 심는 대신 이윤이 남는 작물을 심을 궁리를 한다던가 한다는 풍문이 각지 군현의 아전들 통하여 들려오고 있었다.
물론 사족이 백이면 이렇게 장사 뛰어드는 이들은 고작 한둘에 불과하였지만, 시일이 흐르면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 막 싹트기 시작한 것만 해도 이 정도이니, 몇 년이 지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양반들은 장사라고 하면 여전히 다들 질색하는 이들이 많으니, 임 당수를 통하여 청탁하면 조선에서 오직 우리 민주당을 통해서만 장사할 수 있도록 국법으로 막는 것도 가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서림 자신이 어떻게든 통제할 수 있는 정도까지만 제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 된다면 자신이 평양 아전 시절 그토록 미워하고 답답하게 여기던 저의 상전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기껏 얻은 이 위세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이 이루어놓은 이 사업당. 나라의 조정보다도 훌륭한 이 모습.
‘그렇지만 이대로 눈덩이처럼 장사 벌이는 이들과 그 규모가 불어나게 된다면 민주당의 위세도 예전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모조리 틀어막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놓아둘 수도 없는 노릇.’
하염없이 술잔을 기울이고 안주를 입에 우겨넣었다. 근래 함경도에서 새로 잡힌다는 명태 또는 북어라는 물고기를 말린 것이라는데, 짭쪼름하면서도 쫄깃하니 제법 맛이 좋았다.
‘하, 이만한 맛이라면 이것도 제법 장사가 되겠구나. 어물전은 신나겠군.’
그때, 무언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놓칠까 두려워 재빨리 벼루에 물을 대고 먹을 갈았다.
지금까지는 어물전 장사가 잘 된다고 하면 그 어물전 주인들을 죄다 민주당으로 끌어오거나, 아니면 민주당 사람만 어물전 열게끔 할 심산으로 임하였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물고기는 바다에서 잡히니, 배를 만들어 파는 일만 독점하면 절로 어물전도 민주당의 품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 장사를 할 수 있게끔 하는 밑바탕, 그것만을 우리 사업으로 삼으면 되겠구나!”
그저 자신이 하면서도 알지 못하였을 뿐, 민주당은 이미 장사를 하고자 하는 이들이 마음 놓고 장사판 벌일 수 있게끔 하는 기반을 마련해오고 있었다.
이제 그 일을 조금 더 드러내놓고 하면 될 뿐이었다.
멀리 요동과 북변부터 왜국까지 이어지는 장삿길, 어쩌면 지금쯤 이름도 모르는 남해 어딘가를 지나고 있을 핀투 선장과 이지함의 항해로 인해 더욱 넓어질 지도 모르는 그 장삿길.
그에 필요한 사업 몇 가지, 예컨대 배 만드는 일이나 그 조총이라는 화포 만드는 일, 경제사의 재정 융통하는 일 등은 철저하게 민주당만의 것으로 삼고, 나머지는 때가 되면 하나씩 놓아준다.
“하하하! 이것이다! 그래, 나도 앞으로는 좀 즐기면서 살아보자꾸나! 내년 사람날에는 나도 반드시 하루종일 놀자판을 벌일 것이다!”
마음껏 하고픈 일 하며 여기저기 누비고 다니는 임 당수와 이 모주가 부럽다든가, 신씨가 언제고 찾아와 저를 괴롭힐지 몰라서 두렵다든가 하는 것 때문만은 결코 아니었다.
실성한 사람처럼 한참 혼자서 웃던 서림은, 그제야 저의 서안에 놓인 종이에 다시 눈이 닿았다.
사업당에서 벌어지는 온갖 장사를 적어놓은 이 종이에, ‘장사 밑바탕’ 주고받는 사업은 어떻게 적혀야 할 것인가?
장사는 곧 재물을 불리는 일이니, 그 밑바탕이라 하면 곧 재물의 근본이다.
화식(貨殖)이라는 말에서 따와서, 화본(貨本)이라고 하면 저들 선비들도 말이 천하다고 무어라 하지는 못할 터.
그렇게 화본 두 글자를 턱 써놓고 또 한참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드는 서림이었다.
그러다가 북어 안주 조각이 목에 걸려서 한바탕 켁켁거렸는데, 하필 붓을 쥐고 있다가 사레가 들리는 바람에 먹물이 몇 방울 종이에 떨어졌다.
다음날 아침 술이 깬 서림이 그 종이를 다시 들여다보니, 화본(貨本)은 어느새 한 글자가 바뀌어 자본(資本)이 되어 있었다.
숙취로 인하여 다시 쓰기도 귀찮았고, 또 이것도 딱히 나쁘지는 않다 싶어서, 서림은 곧장 등청하던 육방 사람들을 모아다놓고 선포하였다.
“장차 우리 민주당이 벌이는 사업은, 이 자본을 만들고 늘리는 것을 그 주의(主義)로 삼을 것이오.”
‘사업’ 두 글자와 마찬가지로, ‘자본’ 역시 그로 말미암아 조선말의 낱말 중에 깊게 뿌리를 박게 되었다.
어젯밤 일은 서림 스스로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지라, ‘자본’이라는 말이 나오는 데 마른 북어 안주가 깊이 공헌하였음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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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사회에서 역법은 농사와 직결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일이었고, 작중 나온 역편만큼은 아니지만 조선시대에도 나름대로 매년 달력을 만들어 유통하는 절차가 있었습니다. 원칙적으로는 중국의 책력을 받아와야 하지만 이는 구색맞추기였고, 실제로는 관상감에서 미리 이듬해 달력을 만들어 동지에 문무관료들에게 나누어주었지요. 조선 초에 이미 그 인쇄 부수가 4천 부에 달했다고 하고, 또 관료들이 자신의 친지에게 나누어주거나 각 지방에서 따로 인쇄하는 물량이 있었을 것을 고려하면, 달력은 그리 희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희귀하지 않았을 뿐, 모든 집에 하나씩 놓을 만큼은 분명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작중의 관상감 관원은 이를 노린 것이지요.
사람날은 본디 중국의 기준으로는 음력 정월 초이렛날인데, 본래 한반도에는 다른 세시풍속이 있던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와전된 것인지는 몰라도 새해 첫 범날(寅日)이나 납날(申日)에 쇠는 지방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 세시풍속도 제각각이었다고 하는데, 공통적으로 일을 하지 않고 새해를 잘 보내기 위한 준비를 한다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왕십리에 얽힌 유명한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전설은 근세에 들어와 창작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본디 그 일대의 지명은 ‘왕심리’였고, 그것이 세월이 지나면서 ‘왕십리’로 굳어진 것이기 때문이지요. 조선 후기에 서울 일대의 지리를 그린 고산자 김정호의 『수선전도』에도 ‘왕심리’로 지명을 기재하고 있습니다.
작중 여러 차례 언급된 것처럼 신사임당의 집안은 대대로 모계로 재산이 내려온 경우로, 남녀 균분상속과 데릴사위가 흔했던 조선시대에도 다소 독특한 축에 든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죽헌은 본디 강릉 최씨의 고택이었는데, 역시 강릉의 거족(巨族)인 함씨와 혼인한 최응현의 대부터 모계로 상속되게 되었습니다. 즉 최응현은 데릴사위 이사온에게, 이사온은 데릴사위인 신명화에게 물려주었고, 신명화 사후 오죽헌은 이원수나 이이가 아니라 역시 데릴사위인 권화의 아들 권처균(權處均)에게 상속됩니다. 그리고 권처균에 대에 이르러 오죽헌은 다시 부계로 상속되기 시작하고, 그 일대에는 안동 권씨의 집성촌이 형성됩니다. 오죽헌의 ‘오죽’도 권처균의 호이지요. 즉 오죽헌의 상속 관행은 조선 전기와 후기의 풍속 변화와 궤를 함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원 역사 이언적의 경세사상에 있어서도 임금의 도덕적 수양은 아주 높은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성리학적 경세사상의 한 전형을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보여주는 그의 경세론은, 군주가 학문을 터득하여 그 마음을 중(中)에서 잃지 않는 것이 치세의 근본이며, 바르지 못한 군주 아래에서 출사하여 세상을 바로잡으려 애쓰는 것은 선비로서 올바르지 않다는 주장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박홍규·박설수. 2014. “이언적과 中의 정치.” <한국정치연구> 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