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91화 (91/259)

29. 하늘도 안심하지 못하리니 (2)

마치 줄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엄숭은 섬돌 아래 축 늘어져 있고, 서계와 장거정도 덩달아 끈 떨어진 것처럼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경악하는 소리마저 새어 나오지 않았으니,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엄숭의 사람들 역시 알지 못하고 있을 것이었다.

마침내 그나마 젊은 장거정이 뭐라 말을 하였는데, 꺽정이는 굳이 역관 거치지 않아도 그 말뜻을 능히 알 수 있었다. 대꾸하는 대신 저벅저벅 나아가 엄숭의 축 처진 몸을 들어 보였다.

“숨은 붙어 있으니 걱정 마시오. 내가 이 늙다리 죽이려고 했으면 고작 등짝만 찼겠소? 그냥 뒤에 다가가 양팔로 갈비뼈 우그러뜨리면 될 일을.”

엄숭 이마에 난 상처를 대충 살핀 꺽정이가, 마치 겉옷 벗어던지듯 그 몸뚱이를 옆의 의자에 대충 걸치며 말했다.

“자, 이제 엄숭은 처리했소. 저놈이 정신 차리기 전에 천자 어르신 끌어내어 엄숭 탄핵하기만 하면 될 일이외다.”

경황이 없다 보니 역관 홍순언도 ‘천자 어르신’을 그대로 ‘천자 노야(天子老爺)’로 옮겨버렸는데, 듣는 장거정과 서계도 경황 없기는 매한가지라 딱히 토를 달지 못하였다.

“만수궁 문이 열릴 만한 일을 벌이긴 했군그래. 이제 여기 서 대인 댁에서 이런 흉참한 일 벌어졌음을 들으신다면 황상께서 친히 명을 내리긴 하실 터이니.

지금까지 엄 수보를 도모하려던 이는 많았으나 아직 누구도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 바로 그 후환이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내 말하지 않았던가?”

장거정이 황망한 와중에도 비꼬았다.

“후환이 두려워 움직이지 못했다면, 후환 닥치기 전에 일을 벌이고 매듭까지 지어버리면 그만이오. 증좌가 확실하지 않소? ”

“늦어도 내일 해 뜰 무렵까지 움직여야 할 터인데, 너무나 촉박한 일일세. 황상을 이 사람이 뵙고, 그 다음에 그 서한을 증좌로 올리고, 증인으로 그대 조선 사람들까지 데려와 대질하는 것이 어디 하루이틀에 될 일인가?”

서계가 혼신의 힘을 다해 대책을 마련하려 고심하면서도, 용케 저의 제자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단언컨대 내가 막무가내로 저 늙은이 등짝 걷어찬 건 아니오. 도적에 관한 일이라면 선비 여럿 합쳐놓은 것보다 나 한 사람이 더 잘 아니 내 말 믿고 들어나 보시오. 증좌를 더 구해오겠소. 그것도 천자조차 저의 눈으로 직접 보려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증좌를 내놓아 드리리다.”

“증좌? 구름이라도 타고 왕직의 굴혈 있었다는 그 남해 섬을 다녀올 생각인가?”

“구름까지 탈 게 무에 있소? 왕직 본인이 여기 북경에 와 있는데.”

이윽고 꺽정이가 저의 소위 계책을 내놓으니, 이이는 그럴듯하다며 고개 끄덕이고 두 대국 사람은 미친 짓이라며 고개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발을 뺄 수는 없었으니, 엄숭이 서계의 집에 와서 피 흘리며 쓰러진 이상 그들도 이 무모한 일에 이미 함께 올라탄 것과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밤이 제법 깊어가고 있었다. 허나 북경 저자 한쪽, 홍등 내건 기루(妓樓)가 즐비한 거리에는 밤이 여전히 오지 않았다.

그 기루 중 한 곳, 수보댁 망나니 엄세번이 단골로 찾는 곳의 가장 깊숙한 방.

“도련님! 도련님! 큰일입니다!”

“흐흐, 홍련아, 가까이 와보려무나... 아니, 뭐냐?”

한창 재미 보려는 차였던 엄세번이 원망 담아 물었는데, 이어서 나오는 말에 금방 술이 깨어버렸다.

“수보 대인께서, 독(毒)에 당하셨답니다!”

“무어라? 독? 어디서? 누가?”

“이부상서 서 대인 댁에 찾아가셨는데, 뭐라 말씀을 꺼내시기도 전에 비틀거리시다가 쓰러지셨다고 합니다! 다행히 귀한 명(命)은 지켜내셨으나, 넘어지시면서 머리를 다치셨다고...”

저의 목숨, 저의 즐거운 삶이 모두 아비로부터 나오는 것은 모르지 않는 엄세번이 급히 기루를 뛰쳐나섰다.

“아, 잘 와주었네, 잘 와주었어!”

서계의 집에 들이닥치니 서계 본인이 쌍수 들고 맞이하러 나왔다.

“엄 수보께서 쓰러지시기 직전 단 세 글자를 말씀하셨다네.”

“그게 무엇이오?”

“‘독’, 그리고 ‘왕직’이라고 하시더군! 그놈의 세력이 아직 남아서 수를 쓴 것이 틀림없어!”

믿기 어려운 이야기라, 엄세번 눈이 놀라면서도 절로 의심을 담았다.

“나도 아네. 내가 그대라도 의심을 거둘 수 없겠지. 허나 하늘에 맹세컨대 나는 엄 수보를 해치지 않았네!

그리고 지금은 의심할 때가 아니네! 왕직의 흉수들이 얼마나 있는지, 무엇을 노리는지 어찌 알겠는가! 자네는 속히 만수궁으로 달려가 황상께 이 일을 고하게! 당장!”

아버지 엄숭의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 하였다. 만약 서계가 흉계를 꾸미고 있었다면 아버지가 기력을 되찾으신 뒤에 황상의 뜻을 ‘받들어’ 그 죄를 물으면 그만. 더구나 정말로 서계가 잘못을 범했다면 그 잘못을 엄세번 자신더러 황상께 고하라 말하지는 않지 않겠는가?

그제야 왕직의 흉수가 북경 저자에 얼마나 숨어있을지 모른다는 서계의 말에 생각이 닿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서계의 군재(軍才)는 엄숭도 인정하는 바였다. 서계가 작정하고 자신과 황상을 속이려는 것이 아니라면, 그의 말은 나름의 근거가 있을 터.

그리고 내각수보 아버지마저도 주저 없이 독살할 만큼 간악한 자들이라면, 엄세번 자신도 해치려 들 수 있지 않겠는가? 문득 자신이 그 기루에 그대로 있었더라면 큰 화를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며 벌컥 겁이 났다.

“이 엄 아무개, 반드시 서 대인 말씀을 따르겠소! 황상께 지체없이 달려가 이 일을 고하고, 반드시 죄인을 붙잡아 원한을 갚을 것이오!”

한편 그 무렵, 장거정은 급히 금의위 북진무사(北鎭撫司)로 향하고 있었다.

“멈추시오! 관등과 존함을 여쭙겠소!”

황급히 달려오는 그를 수직(守直, 당직)하는 금의위 군관이 잡아세웠다.

“한림원 편수 장거정이오! 지휘사(指揮使) 대인을 급히 뵈어야 하겠소!”

금의위는커녕 병부(兵部)와도 연 없는 한림원의 젊은 관료가 왜 여기 와 있다는 말인가?

“이부상서 서 대인께서 지휘사 육 대인께 보내는 서한을 들고 왔소! 지금 사안이 일각을 다투니 부디 들여보내주시오!”

그 엄 수보가 왕직이 보내온 흉수에 당해 쓰러졌으며, 지금 북경 저자 안에 활보하는 그 무리가 몇이나 되는지는 알 수 없다 하니, 금의위 군관의 표정에도 비로소 두려움과 황망함이 번졌다.

“아, 알겠소! 내 육 대인 처소에도 바로 사람을 보내겠소! 여봐라! 들여 보내드려라!”

금의위 지휘사 육병(陸炳)은 그 전임자들과는 달리 그 자리의 위엄 내세워 못된 짓은 전혀 하지 않았으므로 세간에 평이 좋았다. 그러나 보다 올바르게 말한다면 아무 일도 안 하기 때문에 못된 일도 덩달아 하지 않는 것에 가까웠다.

그런데 황상의 총애를 독점하는 엄 수보가 엄밀히 말해 자신의 관할인 북경 안에서 흉수의 손에 해를 입었다? 지금껏 살아온 나날이 눈앞에 스쳐 지나가는 기분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이보게! 내 무슨 일이든 하겠네!”

“그보다 우선 이 서한을 읽어주십시오.”

“아니, 볼 것도 없네. 자네 스승이 서 대인임을 누가 모르는가? 서 대인 말씀대로 따를 터인즉 얼른 말이나 해주게!”

급히 차려입은 의관이 흐트러지는 것조차 알지 못하는 육병이었다.

“우선 죄인 왕직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합니다. 놈들이 엄 수보를 독으로 해코지하였으니, 필시 그 우두머리가 잡혔을 때부터 이곳 경사(京師, 도성)에 숨어들어 흉계를 꾸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곳 북진무사 관할의 조옥(詔獄)에 왕직이 갇히리라는 것도 알고 있겠지요.”

조옥은 말 그대로 천자의 조칙에 따라 중죄인 가두는 곳이다. 그런 곳에 어찌 도적이 들겠는가... 라고 답하기에는, 당장 엄숭부터 도적의 손에 목숨 잃을 뻔하였다는 ‘현실’의 압박이 너무나 강하였다.

“동창(東廠) 또한 모든 사람을 풀어 경사 인근을 수색해야 할 것이니 그쪽으로 옮길 수는 없습니다! 왕직을 속히 대리시(大理寺, 이미 판결이 난 중범죄를 재검토하는 상급법원) 감옥으로 옮기고, 남은 금의위 사람들은 모두 끌어모아 만수궁을 지켜야 합니다!”

달단 무리가 북경을 에워싸고 교외를 모조리 불태울 때도 서계가 평정을 잃지 않았던 것은 무관이라면 모두 기억하고 있다. 지금처럼 비상한 일을 맞이하였음에도 급히 수립한 계책이 조리 있으니 나중에라도 감탄할 일이었다.

설령 서계가 뭔가 다른 마음을 품었다 한들, 그가 엄 수보를 내세우며 말을 꾸미니 어쩔 수 없이 따랐노라 둘러댄다면 육병 자신이 책임을 질 일은 없을 것이었다.

“알겠네! 이 육 아무개는 그 말씀을 따르겠네!”

“감사합니다, 대인! 대리시 쪽에는 제가 찾아가 왕직 지키는 일을 감독할 테니, 지휘사 대인께서는 속히 만수궁으로 향해주십시오!”

만수궁 역시 발칵 뒤집혔다.

도사들이 손수 정제한 진사(辰砂, 황화수은)로 만든 영단(靈丹)을 장복하여 밤에는 잠을 자지 않아도 되고, 낮에는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아도 되는 경지에 오른 천자는, 감히 자신의 백일 기도를 잡인이 방해한다는 데 노여워하였으나, 그 잡인이 바로 엄세번임을 깨닫고 마침내 귀를 열었다.

사정을 모두 들은 천자가 격노하여, 실로 오랜만에 지엄한 황명을 저의 입으로 지어서 내렸다.

“마, 만수궁으로 금의, 금의위들이... 모두 모이는 즉시! 경사의 모든 성문을 걸어 잠가라! 왕직, 그 악독한 도적은 반드시 짐이 치, 친국하여 엄 수보를 해친 죄를 묻겠다!”

그때였다.

“폐하! 급보입니다! 적당(賊黨)이 금의위 군사를 급습하여 그 수괴 왕직을 빼앗아 달아났다 합니다!”

조옥을 떠나 대리시로 향하던 장거정과 금의위 군사들이, 지름길을 택하고자 골목길로 접어들 무렵, 갑자기 검은 옷 입은 무리가 사방에서 나타나 왕직을 구해낸 것이다.

금의위는 급히 모았던지라 그 수가 많지 않았고, 아마도 왕직의 무리일 그 검은 옷 도적들은 하나같이 무예가 출중하였다.

다행히 그들이 날붙이 들고 있지는 않아, 장거정과 금의위 모두 맞고 다치기만 했을 뿐 죽은 이는 없었다.

“마, 마치 미리 내통이라도 한 것 같구나! 어찌 짐이 기거하는 이 황도에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금의위 안에 간자(間者)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폐하! 거리에서 금군이 악적에게 당하게 되었으니 언제 이곳도 위태로워질 지 알 수 없습니다! 속히 자금성으로 환궁하시옵소서!”

태감 하나가 간만에 입바른 소리를 하였다.

“무슨 말이더냐? 금의위 가운데에도 간자가 있을 것이라 짐이 말하지 않았느냐? 어찌 자금성 안이라고 간자가 없을까? 네놈이야말로 역적이로구나! 여봐라! 이 자를 즉시 가두어라!”

간자가 있다는 가정제의 말은 참이되, 그 간자는 금의위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장거정 본인이었다. 미리 골목 어디에 숨어있으라 귀띔을 해주고 그쪽으로 왕직과 금의위를 이끌고 갔으니, 꺽정이의 계책을 위한 준비는 모두 마친 셈이었다.

자금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만수궁을 지킬 것이라 하는 황명이 떨어지니,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노라며 나선 서계는 그 황명 받들어 자금성의 금군도 다수 차출하였다.

그리하여 만수궁으로 가는 길목을 모두 막고 지키게끔 하였으므로, 자금성, 그것도 자금성 가장 바깥쪽 성벽은 경계가 매우 허술하게 되었다.

그 성벽을 두 도적이 올랐다. 급하게 사다리 여럿을 묶은 엉성한 운제(雲梯)였지만, 도적으로 잔뼈 굵은 둘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족하였다.

성곽을 밟자마자, 이번에는 그 운제 끄트머리의 사다리를 떼어낸 뒤 어둠 속에 몸을 숨기며 승천문 문루까지 갔다.

문루 지켜야 할 금군은 모두 북경 시내만을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그 반대쪽, 자금성 안쪽 방면에 사다리 대고 지붕 오르는 두 인영은 그 누구도 포착하지 못하였다.

“경치는 좋구나.”

두 사람 중 하나. 바다의 임금 휘왕을 자칭하던 사내 왕직이 말했다.

“장관은 장관이다.”

함께 지붕 위로 올라온 또 다른 도적 임꺽정도 말을 덧붙였다.

왕직은 왜말과 저의 고향 말. 그리고 사투리 진하게 섞인 관화(官話)만 할 줄 알 뿐이요, 꺽정이는 그 셋 다 못하였다.

그러나 여기 오르기 직전, 자금성 옆 어느 골목에서 왜말 하는 이이를 만나 통변을 맡겼으므로 왕직도 얼추 돌아가는 사정을 알고 이 미친 짓에 동참하게 되었다.

“왕직을 잡아라!”

“악적의 무리가 저기 있다!”

“아니다! 우리도 금군이다! 여기 이 패 보아라!”

백만 백성이 거하는, 천하에서 아마도 가장 큰 성시(城市)일 이 북경의 거리 하나하나가 등불 들고 오가는 이들로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들이 찾는 것은 왕직 한 사람, 그리고 그들의 수괴를 구하기 위해 북경에 잠입하여 엄숭을 해치고 금의위까지 쳐부수었다는 도적 무리였다.

그러나 ‘왕직의 무리’ 흑의군은 이미 동평관 돌아가서 단잠 자고 있을 것이요, 왕직 본인은 여기 지붕에 올라 개미처럼 보이는 금의위가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 구경을 하고 있었다.

“끈도 모두 매어두었다. 때가 되면 알아서 하면 된다.”

꺽정이가 왕직에게 무명끈 한 다발을 건네주며 말했다. 말은 알아듣지 못해도 뜻은 통하였다.

마침내 해가 떠오를 무렵. 재수 없게 밤길 돌아다니던 백성들을 모조리 붙잡았건만 정작 왕직은 코빼기도 보이지 아니하였으므로 밤새 바쁘게 움직인 금의위 군사들과 동창 환관들 모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그때, 승천문 앞 전문대가(前門大街)를 지키던 누군가가 하품을 하다가 마침내 기이한 모습을 눈에 담았다.

헛것 보았나 싶어 눈 비비고 다시 보았건만 사람 둘이 지엄한 금궁(禁宮) 승천문의 문루 지붕 위에 올라가 있는 것은 그대로였다.

“저, 저기 보십쇼!”

“아니, 저게 대체 무슨 일이냐?”

“적이다! 적이 자금성에 들어왔다!”

황급히 일대의 모든 금군이 승천문 앞에 달려왔다.

개중 꽤 품계 높아보이는 자도 있는 것을 확인한 왕직이 호탕하게 한 번 웃고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들어라! 내가 바로 해적 두목 왕직이다!”

남쪽 사투리 확연한 관화였으나, 왕직 두 글자는 다들 알아들을 수 있었다.

“무어라? 왕직?”

“왕직이 저기 있다!”

“문루 지붕 위 저놈이 왕직이란다! 빨리 만수궁에 사람을 보내라!”

뜻밖의 일에 모두가 허둥대었다.

“내 황상을 뵙고 고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 만수궁에 가는 길에 내 말도 함께 전해다오!”

근처에서 왕직 일당 색출 작업을 진두지휘하던 지휘사 육병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무엇들 하느냐? 저 무엄한 자를 당장 끌어내려라!”

“하하! 네놈들 손에 끌어내려지느니 차라리 여기서 뛰어내려 죽겠다! 여기 이 무명 끈이 보이느냐?”

왕직이 손을 번쩍 들어보이며 말했다. 모두의 눈길이 쏠리자, 그 앞에서 끈을 한 차례 동동 감은 뒤 저의 목에 걸었다.

“내 다시 말하겠다! 황상을 뵙고자 하니 모셔와라! 황상께서 이리 친림(親臨)하지 않으신다면 나는 여기서 뛰어내리겠다!”

“이놈! 당장 내려오지 않는다면 네놈을 고슴도치로 만들어버리겠다!”

“하하! 시석(矢石)을 쏘려거든 맘대로 쏘아라! 내 이것으로 막을 테니!”

‘숭천문’ 세 글자 적힌 거대한 현판을 탕탕 두드리며 왕직이 말했다. 대체 언제 저 크고 무거운 것을 떼어내 지붕 위로 들고 올라갔다는 말인가? 영문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저, 저런 무엄한 놈을 보았나!”

“지휘사 대인! 지금 모인 이들 중 궁시(弓矢) 든 이가 적지 않습니다! 명만 내려주시면 쏘겠습니다!”

교위 하나가 옆에서 말했다.

“멍청한 놈! 네놈 눈에는 저곳이 어디인지 보이지 않느냐! 자금성이다! 자금성! 네놈들이 쏜 화살이 저 문루 기와를 벗기거나 현판에 구멍을 낸다면 그 감당을 너희가 하겠느냐?”

“하면 어찌 하시겠습니까?”

갑자기 너무나 주변이 더워, 투구를 벗고 머리를 벅벅 긁던 육병이 궁색한 답을 내놓았다.

“우선 저놈을 붙잡는 수밖에 없다. 문루 이층으로 올라간 뒤 그곳에 사다리를 대면 지붕까지 올라갈 수 있을 터.”

“예, 알겠습니다! 여봐라! 사다리를 준비해라!”

두어 각쯤 지나 겨우 사다리를 마련하여, 금의위 군사 몇몇이 그것을 대고 지붕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때 왕직 뒤에서 검은 옷에 검은 복면까지 쓴 거한 하나가 나타났다.

“어림도 없다, 이놈들아.”

사다리가 올라오는 족족 어린아이들 공 차듯 뻥뻥 차버리니, 기껏 구해온 사다리는 문루 아래로 떨어져 박살이 났다. 재수 없는 군사 하나는 사다리와 함께 떨어지다가 겨우 저의 동무 손을 붙잡고 명을 부지하였다.

문루 뒤편에서 또 사다리 대고서 올라오려 했는데, 그것도 득달같이 알아채고는 달려드니 이번에는 사다리를 통째로 빼앗기고야 말았다.

그것을 본 육병이 주변의 민가를 모두 뒤져서라도 사다리를 더 구해오려 할 무렵.

“멈추시오! 멈춰!”

동창의 환관 하나가 급히 달려왔다.

“지휘사 대인! 황명이 있었습니다! 황상께옵서 왕직 저자를 친국하시겠노라 어명을 내리셨습니다!”

친국이라 하면, 국문하는 사람과 국문당하는 사람이 모두 살아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이다.

“하면 더욱 저놈을 붙잡아야 할 것 아닌가?”

“그러다가 저자가 떨어져 죽기라도 하면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러면 저놈이 원하는 대로 황상께 주청하여 이곳까지 친림하시라 할 것인가?”

두 사람 모두 말이 궁색해졌다.

황명(皇明, 황제국 명나라)은 황명(皇命)을 하늘의 명과 같이 받드는 나라.

그것을 어기려면 몰래 하거나, 아니면 대신 책임져줄 이를 구하여야 하였다.

또 한 차례 머리 쥐어뜯던 육병이 말했다.

“엄 수보, 엄 수보께 말씀을 올려서 황상께 아뢰게 한다면 될 것이오.”

“엄 수보께서는 독에 당하셔서 여전히 인사불성이십니다.”

“그러면 서 상서께라도...”

북경까지 도적 무리가 숨어들어와 전대미문의 흉악한 짓을 벌였고, 황상께서 총애하시는 엄 수보까지 해를 입었으니, 흙먼지 가라앉은 뒤에는 또 한 번 피바람이 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왕직을 붙잡는다는 핑계로 자금성에 흠집을 낸 장수가 있다? 황명이 있었는데도 자칫 그것을 어그러지게 할 만한 짓을 감행하기까지 했다? 그만큼 트집 잡기 좋은 일이 어디 있으랴. 적어도 저 대신 화살 맞아줄 이를 구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퍽 우스웠다. 이제 와서 관헌들 앞에서 공손한 시늉 할 이유가 어디 있으랴? 그 자리에서 깔깔대며 웃어제끼니, 임금의 체통은 없되 도적의 호탕함은 있었다.

“하하하! 내 바다로 나가기 전까지는 저런 못난 것들을 관노야(官老爺)라 부르며 두려워하였다. 돌이켜 생각하니 참 우스운 일 아닌가? 내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도적이 될지언정 저런 자들을 상전으로 모시지는 않을 것이다! 우하하하!”

오직 충심으로 이 무엄한 짓을 거들게 된 서계가 청하였다.

“폐하, 단문(端門, 천안문 안쪽에 있는 문) 문루에 오르소서. 승천문과 높이가 대략 같으니, 능히 왕직을 마주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리하시어 도성의 백성들에게 황위(皇威)를 떨치시고 도적을 제압하시옵소서.”

사실 이것마저도 천자의 위엄을 손상케 하는 일이었다. 지금처럼 비상한 시국이 아니라면 어찌 한낱 천한 도적의 우두머리가 황상을 마주하는 것을 허하겠는가? 오로지 그들의 모의한 바를 성사시키기 위해, 저 무도한 청을 가납하시라며 황상께 말씀을 올릴 뿐이었다.

“폐하, 아니 되옵니다! 체통을 지키시옵소서! 금군에게 자금성 문루 훼손하는 것을 허여하시어, 화살로써 악적을 제압하도록 하시옵소서!”

엄세번이 눈치 없게도 딴지를 걸었다.

“체통이라? 네, 네가 지금 체통을 말하느냐? 너의 아비가 저 악랄한 무리에게 당하였고, 하늘 아래의 자미원(紫微垣, 천구의 북극 일대를 부르는 말)인 이곳 경사가 이미 모독을 당하였다. 자금성마저 그 위엄을 훼손당한다면 치욕스러움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서계의 말이 옳다! 짐은 그것을 취하겠다. 단, 단 하나만 빼고.”

황상이 엉뚱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금의위 안에도 간자가 있을진대, 자금성 안에 흉수가 없다는 보장은 또 어디 있겠느냐? 짐은 자금, 자금성으로는 가지 않는다. 서안문(西安門)으로 나선 뒤 대명문(大明門, 천안문 바깥쪽에 있는 문)에 오르겠다.

그리하여 간악한 도적을 위엄으로 제압하고, 그 죄를 물을 것이다.”

대명문은 승천문보다 한참 높이가 낮으니, 오히려 도적이 천자를 내려다보는 꼴이 될 터였다. 그러나 황명이 이러하니 어찌하리오.

천자가 자금성 안에 들기를 한사코 거절하였으므로, 결국 승천문 앞의 모든 민가와 관아를 사람 하나 남기지 않고 비운 뒤 황상의 어가를 청하기에 이르렀다.

“임 당수. 나는 오직 왕이 되기만을 바랐소.”

그 모습 보며 왕직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꺽정이가 알아듣지 못함을 알면서도 던지는, 혼잣말인지 아닌지 애매한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왕이라 해보았자 천자의 아랫사람일 뿐이었소. 이제 임 당수 덕에 이런 자리까지 올랐으니, 그대를 원수라 불러야 할지 은인이라 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외다.”

그 말대로였다. 화려한 어가가 서쪽에서부터 나아와 대명문에 닿더니, 마침내 그 문루에 급히 휘장이 쳐지고, 쇠약한 부잣집 늙은이같이 생긴 작자 하나가 누런 옷 걸친 채 걸어나와 난간에 몸 기대는 것이 보였다.

저자가 바로 자칭 하늘의 아들, 천자였다.

그리고 천자는 지금 도적의 발 아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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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은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세에 이르기까지 젊음과 건강을 가져오는 신비의 물질로 인식되었습니다. 그 독성에 대해서는 이미 고대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이는 오히려 수은을 ‘적절히’ 복용하면 된다는 결론으로 이어졌지요.

만성 수은중독의 증상으로는 사지 말단과 입술·눈꺼풀 등의 떨림과 구강 내의 만성적 염증, 그리고 불면증과 식욕손실, 정서불안 등의 정신적 변화 등이 있다고 합니다. 원 역사에서 심각한 중금속 중독으로 고통받은 가정제 또한 비슷한 증상을 겪었을 것입니다. 엄숭의 몰락 이후 서계는 가정제의 증상이 바로 그가 가까이한 도사들 때문이라 주장하여 가정제의 신임을 얻어내었지요.

자금성은 그 웅장함과는 달리 반란이 일어날 때마다 맥없이 털린 영 이상한 이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1457년 탈문의 변 당시에는 정변 세력을 이끌던 정통제의 말 한 마디에 성문이 열렸고, 1644년 이자성의 난 시기에는 북경의 금군 전체가 이자성에게 항복하는 바람에 역시 성벽을 두른 보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한참 뒤인 1813년에는 백련교의 일파인 천리교 교도 70여 명이 환관을 포섭하여 자금성 안까지 들어오는 바람에 황태자(훗날의 도광제)가 손수 권총까지 쏘면서 진압해야 했지요.

작중 언급된 대명문은 자금성 정남쪽, 천안문과 정양문 사이에 있던 문으로, 명목상으로 자금성의 영역이 시작되는 지점을 표시하는 문이었습니다. 어디까지나 명목상이었기 때문에 그 주변에는 야트막한 담장만 쳐져 있었고, 따로 성벽과 같은 방어시설을 두르지는 않았지요. 청대에는 대청문(大淸門)으로, 신해혁명 후에는 중화문(中華門)으로 개칭되었는데, 이후 1952년 천안문 광장이 조성되면서 철거됩니다. 사진으로 남은 대청문의 모습을 보면 그 뒤편의 천안문보다 한참 낮은 것을 볼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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