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92화 (92/259)

29. 하늘도 안심하지 못하리니 (3)

해적 두목 왕직은 임금은 되지 못하였으나 천자의 위에 서서, 재상의 명줄을 쥐게 되었다.

비록 고향 휘주로 금의환향은 못하게 되었으나, 적어도 저의 이름만은 길이 남기게 되었으니 바라던 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원망은 못하게 되었다.

“간악한 도적 왕직은 들어라! 황송하옵게도 황상께서 크나큰 은총을 베풀어, 이곳에 친히 왕림하셨느니라! 당장 그곳에서 내려와 예를 갖추어라!”

대명문에서 황급히 달려온 환관 하나가 목청을 높였다.

“싫다! 아직 고하고자 하는 바를 고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내려가겠느냐?”

“그러면 예라도 갖추어라!”

“야, 이 고자놈아! 지붕이 이따위로 경사져 있는데 어떻게 여기서 예를 갖추라는 말이냐? 부복하는 시늉하다가 굴러떨어지기 딱 좋게 생겼구만.”

몇 차례 옹졸한 실랑이가 오가고, 결국 환관 몇몇이 나아와 승천문과 대명문 사이에 띄엄띄엄 늘어섰다. 이쪽에서 하는 말을 저쪽으로 옮기기 위함이리라.

“네놈이 바라던 판은 다 깔아주었다. 멋들어지게 잘 해보아라.”

복면으로 얼굴 감춘 임가 놈이 조선말로 떠들었다. 알아듣지는 못해도 뜻은 알 수 있었다.

저 임가 놈이 엄숭의 수하 조문화가 뭔가 수작 부리려 할 때마다 저를 구해주었음을 왕직은 알고 있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멋들어지게 죽으라는 뜻인가, 아니면 이왕 한 번 죽을 것 저에게 이득 되는 쪽으로 죽으라는 뜻에서인가.

도적 간에 의리라는 것이 있을 턱 없으니, 당연히 후자일 테다. 허나 이렇게 좋은 죽을 자리를 마련해 주었으니, 왕직은 어째 전자라고 믿고 싶어졌다.

지난 새벽, 얼떨결에 다시 한 번 구함을 당했을 때, 임가 놈이 데려온 꼬마 서생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조선에도 통의부가 있어, 중죄를 지은 사람도 능히 스스로 옹호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명국의 대리시도 그것만은 못하지만 적어도 죄인에게 한 번 더 재판 받을 기회는 준다고 들었습니다.”

“이 사람 말대로요. 비록 해적으로서 죄지은 바 많을지언정 억울한 것 한둘쯤은 있지 않겠소? 하물며 엄숭 그놈을 저승 길동무로 데려가고자 한다면야 더더욱 그렇겠지.”

그 말대로였다.

왕직 저도 자신이 나쁜 짓 많이 했음은 알고 있었다. 다만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의 죄는 별로 없고, 자신이 나쁜 짓하도록 내몬 세상이 더 나쁘다 여길 뿐이었다.

자신은 그토록 곤경만을 주었던 이 세상에서 나름대로 이름을 떨쳤으니 비록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나름의 떳떳함은 있지 않겠는가.

반면 이 세상을 이토록 엉망으로 만든 죄는 누가 짊어져야 하는가. 재상 주제에 하찮은 음모나 부리며 재물 쓸어담는 엄숭이 짊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뿐인가?

“죄인 왕직은 들을지어다! 이는 황상의 조유(詔諭)이시니라!

너 직(直)은 바다의 원악도(遠惡島, 멀고 궁벽한 섬)를 근거로 삼아 해안의 백성을 괴롭게 하고 온 천하를 근심케 하였다. 마침내 짐의 명 받든 배신(陪臣)에 의하여 붙잡혔으면, 스스로 그 죄를 깨닫고 뉘우쳐도 부족할 터.

그러나 오히려 더욱 미쳐 날뛰며 천조의 동량인 내각수보 엄숭을 해치려 하였고, 이어서 천조의 위엄을 감히 그 더러운 손으로 훼손하려 하였으니 그 죄가 무겁고도 무겁도다!

짐이 도타운 황은으로써 네게 묻노라. 어찌하여 너는 이러한 악행을 하였느냐?”

환관의 입에서 천자의 말이 나왔다.

“황상께서는 들으소서! 저, 직이 바다에서 도적질한 것은 직의 죄가 맞으나, 엄숭을 해친 것은 직이 아니옵니다!”

먼발치 대명문 문루 난간에 기대어 이쪽을 바라보는 노란 옷 사내가 보인다. 지붕 아래에서 꼬물대는 관원과 환관들처럼, 저 노란 옷도 개미처럼 작게, 하찮게 보인다.

거기에 눈이 한 번 닿으니, ‘저’라는 말은 나와도 ‘신(臣)’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오로지 엄숭 그자가 황상의 눈을 가리고 있을 뿐이니, 저 직이 도적질을 하면서도 잡히지 않은 것 또한 엄숭의 덕을 입었기 때문이요, 이곳 경사 한복판에서 큰 화를 당할 뻔하였던 것도 오직 엄숭의 잘못입니다!

저의 부하는 이미 모두 흩어지거나 죽은 지 오래인데, 어떻게 이곳 경사까지 올 수 있었겠습니까? 엄숭이 저 직의 입에서 나올 말을 두려워하매 얄팍한 수를 스스로 꾸며, 짐짓 화 입은 체를 하면서 그 어지러운 사이에 저를 해하려 한 것입니다!”

“감히 짐의 앞에서 그토록 당당히 거짓을 고하느냐? 고작 그런 뻔뻔한 거짓을 위하여 이러한 짓을 벌였다는 말이냐?”

“여기 그 증좌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 몸에 숨겨 아직껏 드러내지 못한 증좌이니, 황상께 처음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이를 살피소서!”

실제로는 이미 임꺽정도 보고, 이이도 보고, 서계와 장거정도 익히 보았던 그 서한을 소매에서 꺼내 휙 떨어뜨렸다. 천자의 말을 전하던 환관이 냉큼 받아서는 또 후다닥 대명문 쪽으로 달려갔다.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엄숭은 정신을 차렸는데, 머리의 상처에서 나던 피는 멎었으나 아작난 허리는 다시 붙지 않았다. 그러므로 침상에 누워 좀처럼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로 인해 지금 대명문 위에 오른 천자를 시위하는 대소 신료 중 으뜸은 바로 이부상서이자 내각차보(內閣次輔, 내각대학사 중 차선임)인 서계였다.

“아니, 이것은!”

그 서계가 문제의 서한을 일별하고는 짐짓 놀란 체하니, 천자부터 말단 관원까지 모두가 함께 놀랐다.

“폐하! 이것은 실로 내각수보 엄숭의 필치가 맞사옵나이다!”

“무어라 적혀 있느냐?”

“조선이 장차 오봉도(고토 열도)를 칠 것이요, 또 그들이 빌린 불랑기(포르투갈)의 대선(大船)이 절강과 복건 앞바다를 지날 것이니 각각 대비하라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어찌 가한 일이냐? 내 분명 엄숭에게 명하여 조선으로 하여금 왜구를 치도록 하였거늘...”

“또한 이르기를, 조선이 뜻을 이루는 것을 막아낸다면 금년 상납받을 금은 크게 줄이겠노라 하였습니다. 이는 그 전부터 왕직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뜻일 터입니다.”

“아, 아니다! 엄 수보가 그럴 리가 없지 않으냐! 당장 이리 내놓거라!”

떨리는 손으로 서한을 받아본 천자가 얼마 지나지 않아 수염을 파르르 떨었다.

“엄세번은 들어라.”

“예, 예! 폐하!”

“너는 이 서한에 적힌 바를 알고 있었느냐?”

“송구하옵나이다, 폐하! 신은 알지 못하나이다!”

“짐이... 쿨럭! 내가 너희 부자를 실로 총애하여 크나큰 부귀를 내린 지가 여러 해가 되었다. 이것이 너희 집안이 나의 은총을 갚는 방도더냐?”

“폐하! 이것은 모두 거짓이옵나이다! 왕직은 지금 원한을 품고 폐하의 충신을 해치고자 간악한 말로써 무함하고 있는 것이옵나이다!”

엄숭 본인이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그럴듯한 말로 빠져나갈 길을 어떻게든 찾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는 안타깝게도, 그 아들 세번은 아비보다 한참 재주가 못하였다.

서계가 차갑게 말하였다.

“폐하, 신이 죄를 청하나이다. 엄숭이 스스로 왕직의 독에 당하였다 말하기에, 그 간사한 말을 믿고 폐하의 어심을 크게 흩뜨렸나이다.

이 모두 신이 어리석기 때문이옵나이다. 만일 왕직이 이곳 경조의 위엄을 훼손할 만큼 강성한 무리를 지니고 있었더라면, 어찌 소국 조선의 배 몇 척에 패하여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겠습니까? 또한 폐하의 금의위를 패주시키고 그 수괴를 구할 만한 군세는 대체 어떻게 구했겠습니까?

이 자명한 이치를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고, 그저 놀란 마음에 어리석은 계책만을 세웠나이다.”

말로는 죄를 청하면서, 실제로는 엄숭의 자작극이 아니고서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황망한 사태를 설명할 길이 없음을 조목조목 논거를 들며 주장하는 서계였다.

엄숭이 여기 서 있었다면, 조선국의 임거정과 눈앞의 서계가 공모하여 자신에게 누명을 씌웠다고 역으로 고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보아도 억지 주장임이 명백하였으므로, 설령 엄숭이 아니라 소진(蘇秦)과 장의(張儀)가 살아돌아온다 한들 이미 기울고 있는 천자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었다.

“신 한림원 편수 장거정 고하옵나이다. 신이 황명을 받들어 공부상서 조문화와 함께 해동(海東) 땅을 다녀올 때도 수상한 일이 있었나이다...”

스승이 길을 트니 제자도 따라왔다. 그 스승보다도 훨씬 교묘하고 치밀한 언변 속에서, 왕직이 중간에 일곱 번이나 달아난 것은 실은 조문화가 왕직을 죽이기 위한 핑계를 억지로 만들기 위해 꾸민 것으로 둔갑하게 되었다.

“또한 엄숭의 죄는 이뿐만이 아니옵나이다. 신이 이를 알면서도 황상께 직고하지 못하였으니, 실로 용렬한 신하요 사직의 죄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어서 지금까지 참고 견디면서 서계가 마음 속으로 하루에 몇 번이나 정리하고 있었던 엄숭 부자의 죄목이 하나씩 열거되어 나왔다.

“답이 도통 아니 돌아오는 걸 보니, 서한이 잘 전해진 것 같군. 하다못해 또 저 고자놈들이 와서 이 몸더러 얼른 내려오라 채근도 안 하고 있으니 말이다.”

대명문 쪽 경치가 질려서 반대편 자금성 구경하던 꺽정이가, 왕직이 무어라 말하는 것을 듣고 지붕 용마루에서 도로 내려왔다.

“만일 그렇다면, 네놈들이 나더러 해달라 한 일은 모두 이루어진 셈이로군그래.”

“뛰어내리기 전에 내게 말이나 해다오. 나는 다들 그쪽에 눈길 쏠려 있는 동안 내뺄 심산이니.”

쭈그려 앉아 있던 왕직이 몸을 일으켰다. 도성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직 안 죽을 생각이라면 저쪽 반대쪽 가서 구경이나 해라. 궁궐 경치가 제법 좋다.”

꺽정이 손가락질을 보고 뜻을 얼추 알아챈 왕직이 지붕을 기어올랐다.

그럭저럭 널찍한 호수(現 중난하이 호수)의 찰랑이는 수면이 멀리서 그를 맞이하였다.

“하! 천자들은 저 작은 연못이 바다라 여기면서 희희낙락했었겠지.”

그 보잘것없는 호수를 보니, 앞서 보았던 그 초라한 노란 옷 남자가 떠오른다.

그자가 정녕 하늘 아래 모든 것의 주인이란 말인가? 어찌하여 이 세상이 이토록 엉망진창인지 얼추 설명이 되는 듯하였다.

그리고 호수 건너편부터 이쪽까지, 마치 도시 안의 도시처럼 연이어 펼쳐진 금빛 전각의 지붕들이 보였다.

그것까지 눈에 담으니, 도적 심보가 끝내 도졌다.

“임가 놈아. 내가 네놈에게 할 부탁이 있다.”

“뭐라는지 못 알아들으니 손짓이나 발짓으로 해라. 아까 이이 녀석 있을 때 할 말 있으면 다 하지 그랬느냐?”

“이제 막 떠올랐으니 어쩔 수 없다. 들어나 보아라.”

다시 임가 놈 옆으로 내려와 왕직이 말을 이었다.

“이 몸 어르신은 소금장수로 시작해서 네가 알던 그 패거리의 우두머리까지 올라갔다. 그런데도 이런 궁궐은 꿈도 못 꾸고, 고작해야 조그만 부둣가에 저택이나 하나 짓고 거들먹거렸다.

그런데 저 천자라는 놈은 고작해야 조상 잘 둔 덕에 이런 곳에 살면서, 정작 하는 일은 없는 놈팽이 아니냐? 원래 도적이란 그렇게 부귀가 넘쳐나서 주체 못하는 작자들을 털어먹고 사는 게 도적이겠지. 고작 왕 따위에 매달릴 게 무어란 말이냐.

너는 꼭 앞으로도 도적질을 잘 해서 큰 도적이 되어라. 그렇게 해서, 이런 얼간이들이 눈에 띄면 보이는 족족 털어먹어라. 나 같은 동업자 털지 말고, 저 엄숭 같은 놈이나 계속 털어서 꼭 후대에도 이름을 떨쳐야 한다.

그래야만 네놈에게 뜻 꺾인 이 휘왕께서도 덩달아 이름이 높아질 것 아니냐? 네놈이 어딘가에 안주해서 벼슬살이나 하게 된다면, 내 반드시 귀신이 되어서 네놈 괴롭히러 나올 것이다.”

딴에는 인생의 마지막 앞두고서 하는 말이지만, 그것을 관화도 아니요 저의 고향 말로 하니 당연히 쇠귀에 경 읽기였다. 한숨 한 번 푹 쉬고, 손짓 발짓을 하며 뜻을 전하였다.

“큰, 도적, 너, 되어라.”

“아, 그 소리였구만. 그건 걱정 마라. 어차피 너 아니었더라도 그렇게 하려고 했으니.”

하고서는 다시 손짓과 발짓으로 응대했다.

“네, 말, 알아들었다.”

“그러면 가라. 너는 내가 뛰어내리는 사이에 내빼려 한 것 아니더냐?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놈들 눈길을 오래 못 끌 것이다. 이 몸께서 저승 가기 전에 저 관노야 나리들께 한 마디 하고 갈 테니, 너는 그사이에 얼른 달아나거라.”

또 한 차례 손발짓 오간 뒤, 꺽정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이면 들킬 공산 적은 쪽이 더 나았다.

“잘 가라.”

“고맙다.”

왕직은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대명문 문루에서는 아무 말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대명문과 승천문 양쪽을 그저 번갈아 보면서 멍하게 있는 금의위 군사들과 동창 환관들의 귀에 곧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장 두려워하며 모두가 귀를 막았다.

목청이 커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니요, 그 내용이 살벌하였기 때문이었다.

“황상! 황상은 들으시오! 사실 엄숭 외에도 도적질 뒷배가 하나 더 있었소! 내 얘기 들어보시오!

그자의 조상은 못난 대머리 중놈이었는데, 때를 잘 만나서 아주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소! 그놈 성은 주가요, 이름은 중팔이(주원장의 초명)였다오!

그놈이 못된 법을 만들고, 그놈 아들들도 하나같이 성정이 더러워서 꼭 저 같은 놈들만 부하로 거느렸소! 그 주가 놈들이야말로 바로 이 사람은 물론이요, 역대 모든 도적들의 뒷배였다오!”

과연 모두가 귀 막으면서도 손짓발짓 다급하게 하는 것을 보니 효험이 있었다. 저들끼리 이 사태에 당황하여 저들보다 높은 나리께 어찌 대처할지 묻느라 바빴으므로, 큼직한 사람 그림자 하나가 문루 지붕을 내려가 슬그머니 사라지는 것은 아무도 보지 못하였을 것이다.

“주가 놈이 그 부하를 여기저기 보내서 애먼 사람들을 쥐어짜니, 주변 백성들도 하나같이 성질머리가 못되게 변하여 정직한 벌이 관두고 도적질을 하게 되었소!”

어찌하여 해적이 생기는가? 나라가 잘못된 법을 만들었고, 또 관원도 잘못 뽑았기에, 백성들이 땅 위에서도, 바다 위에서도 정직한 삶을 살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해적은 간악한가? 간사하고 악독한 자들이 아니고서는 그런 삶, 정직함과 거리가 멀고 오로지 힘만이 법이 되는 그런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왕직이 조금만 더 이 생각을 먼저 하였더라면, 그 집안이 가난한 농군의 집안이 아니었더라면, 떠돌이 소금장수를 하면서 틈틈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국법의 테두리 안에서 찾을 수 있었더라면.

이 생각을 조금 더 세련되게, 조금 더 일찍, 조금 더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었으련만.

그러나 때는 늦었다. 시원하게 욕설이나 한 번 하고 가면 그것으로 족하다 해야 하리라.

“주가 놈의 부하들 중 못난 놈은 스스로 백성을 괴롭히며 그 재물을 빼앗고, 잘난 놈은 아예 법을 만들어서 그런 나쁜 짓이 영영 이어지도록 만든다오! 그러니 부하들 중 못난 놈 하나를 쳐죽인다 한들 그 효험이 얼마나 가겠소?

그러하니, 황상께서 그 주가 놈을 만나시거든 지금 엄숭에게 하시려는 것처럼 반드시 벌을 주시기 바라오! 주가 그놈의 대가 끊어지고, 아예 비슷한 짓을 하려는 놈들이 엄두조차 못 내게 되면 비로소 천하 만백성이 편하게 될 것이며, 그러지 않는다면 도적은 결코 끊어지지 않을지니!”

그제야 천자가 자신이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것을 들었던 모양이었다. 환관 하나가 대명문에서 내려와 조금 가까이 와서는 귀를 기울이더니,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도로 문루 위로 올라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찮은 노란 옷 사내가 노발대발 날뛰는 것이 보였다.

“쏘아라! 당장 쏘아라! 저 천한 도적놈의 입을 막아라!”

“쏘아라! 어명이다! 쏘아라!”

그러나 왕직이 한 발 더 빨랐다.

“주가 놈아! 엄숭이나 빨리 길동무로 보내다오!”

하고서 껑충 뛰어내리니, 목에 감겨 있던 무명줄은 곧 팽팽해졌다.

그리고 북경 하늘을 잠시 뒤덮었던 화살은 사람의 살에 닿는 대신 ‘승천문’ 현판에만 가득 박혔다.

“어어?”

그 충격 견디지 못한 현판이, 그대로 기울어 아래로 떨어졌다.

“떨어진다!”

웃은 채 숨을 거둔 바다 임금의 시체를 지나,

“피해라!”

바닥에 그대로 닿아 박살이 났다.

그렇게 하룻밤 사이의 난리는 끝이 났다.

간밤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 전말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거의 없고, 그 아는 사람들은 당최 저들이 아는 바를 솔직히 털어놓지 않으니, 그저 추측만 난무할 뿐.

누군가는 엄숭만큼이나 서계와 장거정도 수상하다고 지적할 만도 했다. 그들의 진술하는 바에도 구멍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천자는 이 모든 일이 엄숭 때문이라 생각하였다. 그리고 천자가 그렇게 생각하였으므로 그것이 옳았다.

왕직이 도망쳐, 저의 머리 위에 서서 그런 망언을 당당하게 던진 것도, 북경이 온통 뒤집어진 것도, 지엄한 자금성이 욕을 당한 것도.

이 모든 일이 엄숭의 농간에서 말미암은 것이었으니, 그간 그에게 주었던 총애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겨우 부축 받으며 나아온 엄숭이 천자 앞에 엎드려 자비를 구걸하였으나, 이미 돌아선 황상의 마음 속에서는 자(慈)와 비(悲) 두 글자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엄숭과 엄세번이 아무리 청사(靑詞)를 잘 지어도, 그 사라진 두 글자를 되돌릴 수 있는 도술은 결코 부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놈 죽었다더냐?”

동평관 구석에서 뒹굴거리던 꺽정이가 저자에 나갔다 온 홍순언에게 물었다.

그런데 홍순언 뒤에 따라붙은 그림자가 하나 더 있었다.

“아이고, 우리 장 형 아니신가.”

“누가 그대 형이란 말인가?”

“지난번 ‘그 일’에서 서로 공모하였으니, 태어난 달과 날은 달라도 여차하면 같은 날 같은 때 죽을 수도 있지 않겠소? 내가 듣기로 옛날옛적에 관운장이랑 장익덕이라는 사람이 그러기로 약조했었다는데, 마침 형씨도 성이 장씨고 좋구만.

형씨가 형 노릇 하기 싫으면 아우 노릇 해도 되오. 조선국 돌아가면 나더러 어르신 어르신 하는 이들이 한가득이니, 뭐, 형님 소리 더 듣는 정도야.”

장거정이 헛소리 못 들은 체하며 저의 용건을 꺼냈다.

“대역죄인 엄숭과 엄세번의 형은 나흘 뒤로 잡혔네. 그 일이 끝나면 소소하게나마 논공행상이 있을 것이야.”

“아, 그거 내가 좋아하는 일이기는 하지. 적당히 챙겨주시오. 엄숭 그놈 재산만 털어도 뭐가 꽤 나올 테니, 우리네 지분만큼만 챙겨주면 된다오.”

“먼저 그대들이 청한 종계의 변무는 급선무로 삼아 반드시 이루어줄 것일세.

기실 『대명회전』의 중수는 진작에 되었어야 했는데, 엄숭 그치가 모든 정사를 틀어잡고 있다 보니 좀처럼 하지 못하였지. 정식으로 조선에 조서를 내려 은상 베풀 때 이 사실을 명시할 것이며, 아마 다음번 동지사 올 때는 개정된 『회전』을 실물로 받아갈 수 있을 것이야.

그리고 그대에 대한 은상도 빼놓을 수는 없겠지. 조선국 유생 임거정은 황명 받들어 악적을 붙잡았고, 또 다른 역적 엄숭의 농간으로 인하여 황상의 눈이 가려지는 것을 막았으니, 그 공이 크다... 대략 그렇게 될 것이야. 그와 더불어...”

장거정 말을 옮기던 홍순언이 차마 웃음을 금치 못하였다. 그러면서도 기어이 말을 모두 옮겨주었으므로, 꺽정이도 곧 폭소에 합류하였다.

“잠깐, 잠깐. 유생? 푸하하하!내가 유생이라고? 장 형, 일전에 금의위랑 같이 몽둥이 맞을 때 어딜 좀 심하게 다치셨소?”

허나 장거정은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다.

“자네 스승이 조선에서 이름 높은 화담 선생이었다고 들었네. 그러면 자네도 유생은 유생이지. 마저 듣게. 중한 것은 자네를 부를 때 ‘민주당 당수’라 아니 부를 것이라는 데 있네.”

“엥, 어쩌다 그리 되었소?”

“그야 그대들 민주당의 품은 뜻이 잘못되었으므로,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라네.”

꺽정이 앞에서는 모두 얘기하지 못하지만, 그에 맞추어 견제하는 이런저런 조치도 이루어질 것이었다. 그간 거의 기능이 멈춘 예부를 혁파하다시피 하며 다시 고치고, 무엇보다 조선에서 벌어지는 심상치 않은 일에 예의주시하게 될 터였다.

그리고 장거정이 포착한 것들. 조선과의 정의(情誼) 해치지 않으면서 민주당만 해칠 수 있는 일들은 모두 하나씩 해나갈 것이었다.

“뭐, 칠순 노인네 등짝 걷어찬 것 때문에 그러쇼? 어지간히도 노인 공경하는구만.”

“아니, 그 때문이 아닐세. 자네 당이 내세우는 위태로운 생각이 문제인 것이야.”

조금 일이 가라앉자마자 이황과 이이 두 사람은 대국 북경의 정취를 만끽하였다. 그리고 선비답게, 그 ‘만끽’이라 함은 대개 희귀한 서책을 마음껏 사모으거나, 다른 문인들과 필담으로 교류하는 일을 뜻하였다.

그리고 두 사람과 글을 통해 이야기 나눈 명의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조선국에서는 정녕 이러한 언설을 내놓고도 높이 올라갈 수 있다는 말인가?’

명에서는 잘못하면 목 날아가기 딱 좋은 소리들을 두 사람이 모두 하였던 것이다.

이이가 모든 사람에게 의권이 있다 하는 말을 내놓으니, 그 무렵의 사풍(士風) 따라 육왕지학(양명학) 따르는 선비들은 모두 그 말이 옳다 여겼다. 당연히 심즉리(心卽理)라면 마음 가진 사람 하나하나에게 의로움이 있는 것이요, 그 의로움을 따르고 마침내 이룰 ‘의권’도 있는 것.

그것을 양명학의 틀 바깥에서 새롭게 정립하니 어찌 흥미롭지 않겠는가.

허나 더욱 놀라운 것은 이황이었다. 정학(正學)을 숭상하고 이교를 배척한다는 것은 왕양명의 논변 싫어하는 이들도 호응할 만한 것이었으나, 치도(治道)는 반드시 군주의 수신(修身)에서 비롯되어야 하니 무릇 도학(道學)에 뜻을 둔다면 이 일을 거들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다닌 것이 화근이었다.

이황도 (그 벗 조식과 달리) 눈치가 있으니 얼마 전의 정변 이후로는 말을 아꼈지만, 이미 산해관 지나오며 여기저기 고을에서 풀고 다녔던 말이 이곳 북경까지 닿아버렸다.

어찌 놀랍지 않으랴? 엄숭의 잘못은 사소한 것이요, 오직 황상께서 수신을 그르치시었기에 이렇게 되었다는 뜻이 되니 말이다.

자신이 조식처럼 인군(人君)의 신상까지 입에 담은 것도 아니건만 거의 같은 대접을 받으니 이황에게도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게 그리 위태롭소?”

“본디 조선은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라고들 하였으니 평소라면 그러려니 하였겠지. 허나...”

장거정이 대충 손짓을 하였는데, 그 손짓을 따라가보니 승천문 쪽이었다.

“아.”

민주당의 논변은 백성을 말하였으며, 그에 맞서는 사림은 선비를 논하였다. 그 어디에서도 임금은 그리 중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쪽이든 미루어보면 왕직이 악에 받쳐 떠들었던 그 몇 마디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너무 깊게 파고든 아니오? 그냥 나쁜 놈이 자신이 나쁘게 된 건 세상 탓이라며 주절주절 떠든 것에 지나지 않는데.”

“설령 그럴지라도, 듣는 이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네. 황상께서 중신을 모아놓으신 가운데에 그 말이 전해졌고, 또 다들 귀를 막았음에도 어떻게 알음알음 퍼져나가게 되었으니.”

“그래서, 그와 비슷한 못된 생각이 버젓이 돌아다니는 우리 조선국을 괴롭히시겠다? 정말 왕직 그 사람 말대로 못된 놈 몰아내니 더 못된 놈이 들어섰다, 그렇게 생각해도 되겠소, 장 형?”

“말은 바르게 하게. 조선은 대명의 번국이요, 우리 대명을 천조로 만들어주는 나라일세. 자네의 벗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그런 나라가 자신뿐 아니라 천조의 밑바탕까지 갉아먹으려 하는 것을 좌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네.”

장거정은 이번 사행에서 그 증거를 이미 여러 차례 보았다. 허나 왕직 그 무엄한 자의 말을 듣고서야 그 증거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그는 내각을 새롭게 꾸리느라 바쁜 스승 서계에게 찾아가 자신의 깨우친 바를 털어놓았고, 서계 또한 심사숙고 끝에 그 말을 따르게 되었다.

그들의 눈앞에서 그토록 미친 짓을 벌인 자, 그런 자가 우두머리로 있는 당. 그 당이 이미 수 년에 걸쳐 뿌리를 내린 나라. 경계하지 않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천조의 신하로서 도리를 저버리는 일이었다.

“그래서, 조선은 잘 대해주겠지만 민주당은 박대할 것이다, 그런 말이오? 앞으로도 우리가 제풀에 쓰러질 때까지 사사건건 발목 붙잡을 것이고?”

“쉽게 말하면 그렇지.”

“그리고 그 말을, 조선 사람들만 우글거리는 이 동평관에 혼자 몰래 찾아와서 이 내게 전해주신 것이고.”

“그... 렇지?”

대개 총명한 사람들은 스스로 헤아리는 바가 아주 넓고 세세하기에, 막상 그 범주 벗어나는 것을 앞에 두면 실수를 범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장거정은 총명한 사람이었고, 꺽정이는 그의 범주를 벗어나는 사람이었다.

“내가 칠순 노인은 나름 공경해서 그 정도로만 발로 차 준 것이오. 알고 계시오?”

“...”

홍순언이 말을 옮겼으나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꺽정이가 씩 웃더니, 느닷없이 외쳤다.

“왁!”

장거정이 득달같이 달아나는 꼴을 보며 꺽정이는 껄껄 웃었다. 그러나 앞날에 대한 근심은 끝내 한 터럭 남았으니, 웃음 또한 아주 완전히 진실되지는 못하였다.

그로부터 몇 달 뒤.

사람이 죽는 상서롭지 못한 일이 일어난바, 승천문은 그 이름을 고쳐 천안문(天安門)이 되었다. 왕직이 직접 들고 날뛰다가 끝내 박살이 나 버린 현판 조각은, 도사들이 나중에 액땜할 때 쓰겠다면서 옆에 잠시 모아두었는데, 어느 밤사이에 모조리 사라졌다.

그 조각의 향방은 한참 뒤에야 밝혀졌으니, 북경의 가난한 백성들이 저들이 사는 지저분하고 좁은 골목에 소위 ‘휘왕사(徽王祠, 휘왕의 사당)’를 세우고 그곳에 조각을 모셨던 것이다.

감히 황상께 무엄한 짓을 저지른 악적을 왕이라 부르며 모시니 참으로 괘씸한 일이었다. 금의위 군사들이 곧장 출동하여 일대를 모두 뒤엎고, 그 자칭 사당은 송두리째 불살랐다.

허나 또 몇 달 지나지 않아 다른 골목에서 휘왕사가 발각되고, 그곳마저 불태웠건만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성 밖 통주에 그 사당이 세워졌다.

대체 어찌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은 왕직과 같은 무도한 자를 임금이랍시고 기린다는 말인가? 진사에 찌든 천자 주후총(가정제)과 벌써 사대부 사이에서 명재상이라 소문이 나기 시작한 서계, 그리고 그 이하 문무백관 중 그 누구도 알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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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의 천안문은 명이 망할 때까지 승천문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는 남경에 있던 황궁 남문의 이름을 따온 것이었습니다. 이후 후술할 이자성의 난 당시 소실되었고, 1651년 재건될 때 '천안문'이라는 새 이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명말 민중 사이에서 작중 왕직과 비슷하게 숭앙받은 도적이 있으니, 바로 ‘틈왕(闖王)’ 이자성입니다. 섬서성의 몰락한 부농 집안 출신으로, 당시 일어나던 여러 반란군 무리 중 두각을 드러내 마침내 왕을 자칭할 만큼 큰 세력을 얻게 됩니다. 이후 1644년 북경으로 진격해 숭정제를 자살로 내몰고 복왕(福王) 주상순을 참살 – 야사에 따르면 삶아서 잡아먹었다고 합니다 – 하였지요. 북경 점령 직후 청군 및 반란 토벌을 빌미로 청에 귀순한 오삼계 휘하 명군과의 회전에서 대패해 끝내 비참한 죽음을 맞았으나, 그 이름은 계속 남아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명은 이미 주원장 시절부터 강력한 전제군주 체제를 구축하였는데, 사상에 대한 통제 역시 그 중 하나였습니다. 주원장이 『맹자』의 혁명적인 이야기를 보고 크게 분개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지요. 반드시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명은 개국 초부터 정학(正學), 그것도 국가에 의해 공인된 해석만을 강조해 왔습니다.

그 결과 완전히 주자와 성리학의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조류, 양명학이 크게 부흥하여 16세기 초중반에는 중앙관료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대부들이 양명학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후술하겠지만 양명학 역시 우리가 잘 아는 성리학만큼이나 나름의 병폐와 한계를 지니고 있었고, 17세기에 들어설 무렵에는 성리학과 양명학의 통합을 꾀하는 사상적 흐름도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상적 흐름은 유의미한 열매를 맺지 못한 채, 만주족이 주도하는 탈중화적 헤어스타일의 센세이션에 묻혀 사라지게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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