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공변된 의론 (1)
종계변무의 낭보와 함께 동지사가 돌아왔다. 임금이 크게 기뻐하며 민주당 임거정과 서장관 이황·이이, 그리고 솔직히 별로 한 것은 없는 동지사 이택 등에게 모두 은상을 내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심통원 등이 나서면서, 중수된 『대명회전』이 나오기 전에 미리 그 공을 논하는 것은 잘못이라 하였다.
임금이 또한 그 말이 맞다 여기면서, 이왕 그렇게 된 것 내년에 『회전』이 나오면 그와 관계된 모든 이들을 공신으로 책록하면 되겠다 하였다.
혹 떼려다 혹 붙인 격이 된 심통원은 그대로 입을 다물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임 당수가 공신 책록된다는 말이 여기저기 파다하게 퍼진 고로, 그간 못 만난 손님들 모두 모아서 만나려던 꺽정이는 만나는 이들마다 그 공신 얘기 꺼내는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허나 공신이고 나막신이고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꺽정이가 알 바는 아니요, 오히려 질리기만 하였다.
“임 당수, 축하드립니다!”
도성에 머물다가 꺽정이 돌아왔다는 소식 듣고 바로 달려온 소 모리타네와 서해가 고개를 숙였으나, 뜻밖의 반응만 돌아옸다.
“네놈들은 눈치도 없느냐?”
“앗, 죄송합니다.”
공신 소리 질려할 만한 사람이 있으리라고 짐작하는 것은 눈치가 아니라 천리안이라 해야 할 것이다. 면박당한 소 모리타네와 서해만 영 머쓱하게 되었다.
“공신 어쩌고 하는 소리는 지금껏 계속 들었으니 이미 물렸다. 그러니 할 말이나 바로 꺼내라. 듣기로 도성 오가기가 제법 편해졌다던데?”
“말씀대로입니다. 다 당수님 덕이지요.”
“나는 내내 북경 오가느라 바빴는데, 내 덕을 보면 얼마나 봤으려고. 서 별감에게나 고마워 할 일이지.”
민주당 하는 일을 곧이곧대로 보지 않는 심통원 등이 그사이 발의하기를, 근래 나라의 기강이 흐트러져 왜인들과 야인, 남해 바다의 대국 사람들, 심지어 서양 승려 하비에르까지 마음대로 나라 곳곳을 쏘다니는 것이 옳지 않다 하였다.
서림이 옳거니 하면서 이원수를 통해 상소 올리기를, 그렇다면 동래 왜관과 같이 국외인들이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 포구를 한정하고 그 바깥을 오갈 때는 반드시 조정의 허가를 득하도록 하자고 하였다.
물정 모르는 이들(이를테면, 임금 본인)은 그 말 좋다고 생각하고, 이준경 등이 생각하기에도 지난날 양주에서 임 당수 혼사 치를 때처럼 국외인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것은 마땅히 단속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이야 괜찮다 쳐도, 언제고 간악한 무리가 조선 안쪽의 사정을 정탐하고자 몰래 들어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인천도호부 제물량영(濟物梁營) 앞, 건물개(제물포)라는 작은 포구에 국외인들 오가는 곳, 이른바 ‘해외관(海外館)’을 두기로 하였는데, 그 소식 듣자마자 서해와 소 모리타네가 배 몰고 찾아온 것이다.
“마침 저희 통해서 조선국에 기별 전하기를 원하는 이들이 천하 여기저기에 많아서 말입니다. 하여 서 별감 뵙기도 할 겸, 또 물길 탐색도 할 겸 이렇게 저희 두 사람이서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히젠노카미(마츠라 타카노부)는 지금 규슈 사정이 여의치 않아 못 찾아왔지만요.”
“기별이라?”
“예, 우선 하비에르 바테렌(신부) 앞으로 온 편지와 경전, 서책 등등이 있는데, 히젠과 나가토의 다른 바테렌들이 보낸 것도 있고, 말라카의 다른 남만인들이 보내온 것도 있습니다. 바테렌께서도 얼마 전 이곳 도성으로 돌아오셨다 들었는데요.”
“그 말 맞다. 지금쯤이면 꽁꽁 얼어붙은 몸이 다 녹았으려나.”
꺽정이 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겨울철 함경도 유람을 간 하비에르는 모두의 예상대로 한빙지옥을 제대로 겪고 왔다. 그래도 나름 승려답게 영험한 면이 있어서 그런가, 용케 손가락 열 개 발가락 열 개 모두 챙겨서 돌아오기는 했다.
게다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언제고 한 번 더 갈 것이라고까지 단언하기까지 했다. 니탕카이 말에 따르면 그곳에서 여진 사람 몇몇에게 포교까지 하고 온 모양이었다.
“그리고...”
서해가 종잇장 하나를 꺼내 손가락으로 짚어내려갔다.
“아이고, 이걸 먼저 말씀 올렸어야 했습니다요. 말라카에서 온 남만선 편에, 당수님 사형 되시는 우리 모주님 글월도 전해져 왔습니다.”
“뭐라? 얼른 내놓거라.”
다행히 모리타네가 건물개에서 어지간한 물건들은 모두 싸들고 온 덕에, 금방 나가서 챙겨올 수 있었다.
“고맙다. 일 더 없으면 얼른 가서 서림이나 만나보거라.”
“예, 당수님.”
두 사람 내보낸 뒤, 곧장 이이와 명희 – 저의 스승 이정도 이지함 따라갔으니 명희 또한 당사자라면 당사자였던 것이다 – 불러들였다.
늘 그렇듯 진서와 언문 섞어서 쓴 서한이었기에, 꺽정이도 능히 읽을 수 있었다.
“무어라 하던가요?”
“잘 가고들 계신다 하오. 말라카에 당도하여 암본도 향할 준비를 하면서 썼다고 하는데, 중간에 몇몇 소소한 일이 있기는 했지만 대체로 다들 멀쩡하다고 하더군.”
그 ‘소소한 일’이 사실 그리 소소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대양서생들은 바다 위를 쏘다닌다 하여도 여전히 서생이라, 말로만 듣던 대국 강남을 아니 구경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여 갖은 핑계를 대며 대국 조정에서 허용한 포구는 다 들려 구경을 했는데, 그 구경이란 곧 며칠 동안 일대 풍광과 명승고적을 돌아보고 만나는 문인마다 붙잡고 필담 나누는 것을 뜻했다.
천하의 이치를 밝히기 위하여 특별히 나라 안에서 선발한 이들이라 하고, 더구나 기이한 모양새의 배까지 타고 왔으니, 강남의 신사들도 모조리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조선 사람은 강남을 구경하고 강남 사람은 조선 사람을 구경하게 되었다.
“온통 아무개를 만났고 그 집안은 어떠하며 무슨 벼슬을 지냈다... 뭐 그런 얘기 뿐이라서 가운데는 넘겼소.”
이이가 슬쩍 편지를 끌어와 살피니, 아닌 게 아니라 각양각색 문인들이 조선 선비들과 만났다는 얘기가 적혀 있었다. 개중에는 현달한 집안의 사람도 있으나, 오승은(吳承恩)과 같이 별 볼 일 없는 한미한 이도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핀투 선장 독촉을 못 이겨 다시 남쪽으로 떠나게 되었는데, 다들 강남 구경만 하는 사이에 배에 몰래 탄 자가 있었다고 하오. 천주 젊은이인데 이름은 이지(李贄)요 자(字)는 탁오(卓吾)라 하더이다. 왜 내 주변에는 이렇게 이씨만 많이 모여드는지, 참.”
“나도 이씨인데.”
듣던 명희가 혼잣말하는 시늉을 하며 낭군을 놀렸다.
“불만 있다는 얘긴 아니오.”
두 사람 사이 오묘한 눈빛 오가는데, 남녀간 정분뿐 아니라 어지간한 사람 일에 대해서는 눈치가 없는 이이는 멋모르고 재촉하였다.
“그래서 어찌 되었답니까?”
“흠흠. 조선말은 한 마디도 못하면서 하도 감쪽같이 조선 사람 시늉을 하는 바람에, 천주를 한참 벗어나서야 눈치를 챘다 하오. 사형이 그자와 얘기를 나누어보더니, 민주당에 들기에 딱 좋은 성품의 사람이었다 하는데 이건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원래 괴짜들은 저가 괴짜임을 모르는 법이었다.
그 뒤로는 배 타고 남쪽으로 가면서 본 기이한 문물과 사람들에 대해 죽 적고 있었다. 슬슬 적도에 가까워지면서 예상대로 지구설이 맞았다는 증거가 하나씩 드러나고 있다는 말로 이지함의 서한은 마무리를 지었다.
“무사히 돌아오시면 좋겠구만. 그래도 먼길 멀쩡히 가고 있는 듯하니 다행이오.”
“그러게 말이에요.”
그런데 그 이후로 이이가 어째 조용하였다.
“이보쇼, 율곡 선생 여기 계신가.”
눈앞에서 손을 흔드니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아, 딴생각을 좀 하고 있었습니다. 항주와 천주에서 여러 서생 만났다는 대목에서 떠오른 게 있어서요.”
꺽정이만큼이나 이이도 한양 돌아온 뒤 내내 바빴다.
특히 그사이 저의 의권론에 반박하는 글을 쓴 이언적에게 찾아가 그 문의(文義)를 질정하고, 장차 다시 반박할 근거를 찾느라 궁리하고 있었는데, 아직 여의치 못하였다.
나이도 환갑 넘긴 사람이 어찌도 그리 기운이 넘치는지, 이언적은 대학자의 풍모를 뽐내며 『정론보』에 실린 글에서 미처 다 지적하지 못한 의권론의 허점을 하나하나 짚어주었다.
(세간의 설에 따르면 이언적이 그토록 신체 건강한 것은 일찍이 이황이 흑의군 조련하는 것을 보고 지은 소위 ‘활인심방(活人心方)’을 열심히 익힌 덕이라고 하였다.)
“무슨 생각인가요?”
명희가 오라버니에게 물었다.
“그게... 지금 의권론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는데, 한동안 거기서 막혀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하필 그 부분을 회재 선생께서 짚으시는 바람에 그만.”
의권론 논변은 아직 나온지 오래 되지 않아 여러 허술한 부분이 있었는데, 개중 가장 약한 고리는 바로 ‘그래서 백성이 인군을 폐한다면 다른 치세(治世) 방도가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삼대 이래 국인(國人)이 들고 일어나 그 군주를 폐한 일도, 새로운 사람이 민심 받들겠다며 떨치고 일어나 역성혁명을 하는 일도 적지 않게 있었다. 그러나 결국 다시 새 왕을 위에 모시고 군신의 도리를 복원하는 것으로 결착이 났다.
이것을 보면 백성이 스스로 그 의권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임금을 세울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었다. 백성은 나라를 버릴 수 없고 나라는 백성을 버릴 수 없으니, 오히려 자신이 제시하는 군신상생(君臣相生)의 설이 이이의 의권론보다 더 올바른 치도(治道) 드러내는 것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 이언적의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 스승님께서 이렇게 여러 강남 서생들의 이름을 보내주시니, 북경에서 그 육왕학(양명학) 하는 이들 만났던 것이 떠올라서. 어쩌면 그쪽에서 뭔가 단초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던 중이었지...”
이이가 뭔가 더 어려운 얘기를 꺼내려는 듯하였으므로, 꺽정이는 오라버니와 누이동생의 정다운 대화를 위해준다며 짐짓 생색 내고는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나서자마자 엉뚱한 사람과 마주쳤다.
“임 당수. 도대체 무슨 중대사를 논하시기에 사람을 한 시진이나 밖에 세워두신다는 말이오? 그것도 소생 같은 구면(舊面)을. 자못 섭섭하다 아니 이를 수 없소이다.”
바로 각미사 한량 황언징이었다.
“여긴 또 웬일이오? 병해 스님은 여기 아니 계시오.”
“아, 각미사 일 때문에 찾아온 것은 아니오.”
의민당이 윤원형 붙잡은 이래로 각미사 사람들도 다들 제 갈 길 갔다. 병해를 종종 만나며 좋은 이야기 나눌 때가 없지는 않았으나, 이번에 북변 나간 유극량이나 이지함 따라 남쪽 바다 간 이정 등, 다들 나름의 원하는 바에 따라 여기저기 흩어지게 된 것이었다.
허나 그 모임을 이끌던 황언징만은 관운(官運)이 도저히 트이지 않아, 천생 한량으로 살다 죽는가보다 하였는데, 임 당수가 서양 승려를 데려오면서 그것이 한바탕 바뀌게 되었다.
“실은 소생이 금번에 새로 사업을 열게 된바, 앞으로 민주당과도 좋은 연을 이어나가고자 이렇게 찾아왔소이다.”
“사업?”
“통의부 옆에 새로 작은 집 한 채를 사서, 상경하는 이들 위해 의송(재판) 도와주는 일을 하게 되었소.”
저의 벗들은 다들 출세하여 떠나가고 저만 남게 되어 한창 울적하던 차, 서양 승려가 잡설을 떠든다는 말을 듣고 옛적에 절간 때려부수던 가락을 살려 논박하고자 찾아갔다.
그러나 본디 뜻은 이루지 못하였고, 오히려 어쩌다 보니 인생사 하소연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자 하비에르가 어색한 조선말로 제안하기를, 언변이 출중하니 그것으로 출세의 발판을 삼으면 어떻겠느냐 하였다.
“비록 내 글솜씨는 없고, 무예도 출중하지 못하지만, 옳고 그름을 따지고 드는 데는 나름의 소질이 있지 않겠소이까.”
말이 그렇지, 실제로는 생트집 잡는 데 능한 것이었다. 허나 생트집도 잘만 잡으면 생트집이 아니라 근거 있는 고변이 될 수도 있는 법이었다.
“통의부가 요새도 일감이 있소? 큼직한 사안이 딱히 없는 듯한데...”
“그러니 소생 같은 이들이 들어설 틈새가 있는 것이외다.”
의민당과 윤원형의 안건, 그리고 구색 맞추기 위하여 통의부에 넘겼던 기묘명현 신원의 건 이후로, 조정 중신들이 우르르 위관이나 추관·호관으로 들어옴 직한 큰 사안은 없었다.
허나 부민고소 금하던 법도 사라지고, 또 민주당과 쟁쟁한 사족들 사이에서도 송사가 잦았다. 게다가 올해 겨울도 어김없이 벌어진 향전으로 인해, 송사는 그칠 줄을 몰랐다.
벌어지는 송사에 시달리던 각지 관찰사들이 통의부 법제 따라 비슷한 제도를 감영마다 두었고, 거기서도 결착이 나지 않으면 통의부로 올려보내곤 하였으니, 불과 두어 해 사이에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관례가 되었다.
“대개 그런 일들은 관찰사가 처리하기는 번잡하고 조정에서 거론하기에는 사소한 다툼들이라, 위·추·호 삼관(三官)도 각각 한 사람뿐이고, 대개 형조에서 좌랑(佐郞, 정6품)이나 삼사의 연소한 언관을 뽑아서 보내곤 한다오. 그러니 그들은 곁가지로 두고 실제로 국법 두고서 논쟁 벌일 이가 생기게 되었는데, 바로 우리 같은 사람들이외다.”
“그러니까 그냥 율관이나 대송인(代訟人, 사설 법무·변호인) 같은 일 한다 이 말이구려.”
“흠흠, 그런 치들과는 달리 아주 지체 높은...”
둘러대려던 황언징이 결국 한숨과 함께 변명을 관두었다.
“아니, 말씀대로 대송인 맞소. 물론 통의부 위엄이 어디 수령 앞에서 송사 벌이는 것에 비할 수 없으니, 우리끼리 부르기로는 대의사(代義士)라고 하지만.”
대의사도 한두 해 사이에 제법 짜임새가 잡혀, 요새는 형조정랑과 그 아래의 율관들의 심사를 거쳐야만 통의부에 들 수 있다고 황언징이 급히 말을 덧붙였다.
“우리 사이 얘기지만, 벌이도 제법 쏠쏠하다오. 율관들도 요새는 형조에 붙박이로 있기보다는 대의사 아래에서 함께 일하는 쪽을 더 좋아한다고 하더이다.”
“뭐, 그야 내 알 바는 아니고, 좌우지간 소질 맞는 일 찾았다니 다행이오. 그 옛날 담장 넘다가 나한테 멱살 잡히던 시절에 비하면야 뭘 하든 낫겠지.”
“너무 말이 심한 것 아니오, 임 당수?”
저의 망신스러운 이야기를 거론하니 황언징이 짐짓 노여운 체를 하였다.
“헌데 그건 그렇다 치고, 정말로 그것 때문에 인사 올리려 한 시진이나 꼬박 기다린 게요?”
“아, 그건 아니고... 이번 겨울도 향전이 일어났지 않소이까. 우리 같은 이들에게는 대목이 아닐 수 없소.
헌데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민주당 사람들 사이에서도 제법 싸움이 많이 일어나서, 이 사람이 어느 한쪽 편을 든다는 말이 나오거든 그저 목구멍 풀칠 위하여 그리하였을 것이라 양해해주기를 바라며 미리 찾아온 것이오.”
“그게 무슨 말이오? 민주당 사람들끼리 싸운다고?”
“모르셨소이까?”
“그야 당연히 모르지. 나는 대국 가 있었는데.”
황언징 붙잡고 물어보느니 차라리 서림을 데려오는 것이 나으리라. 그리 결론짓고 황언징 등을 대충 떠미는 꺽정이었다.
놀랍게도, 서림 역시 잘 모르는 일이었다. 열흘 말미만 주면 그사이 전말을 파악하여 상세히 알려드리겠노라 하기에, 열흘간 푹 쉬고 나서 이이와 명희까지 데리고서 사업당 찾아갔더니 서림이 하는 말은 이러하였다.
“사실, 근래 각지 군현의 당원들끼리 다투는 일이 있다고는 들었습니다. 우리 아전들과 살림 조금 넉넉한 농군들, 그리고 학당에서 잡학 가르치는 여러 역(役) 사람들 등등, 온갖 부류가 다 섞이다 보니 으레 그러려니 했지요.”
“싸우다 못해 통의부까지 올라올 정도라면 ‘으레 그러려니’가 아니겠지.”
“말씀대로입니다. 하여 우리 사업당의 형방 사람들을 모두 풀어서 우선 가까운 경기도 및 경기 인근의 다른 도 군현들 사정만 조사하였는데, 심상치 않은 것을 찾았지요.”
대개 군현에는 각각 향회(鄕會)가 있기 마련이었는데, 유향소(留鄕所)가 향회 노릇하는 경우도, 그 유향소 대신 사족들이 세운 사마소(司馬所)가 있는 경우도, 또 언제 생겼는지는 몰라도 그저 관례로서 사족들이 저들끼리 만든 모임이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 향회는 대개 향임(鄕任)을 선출하고 군현에 부과되는 조세의 양을 두고 수령과 논의를 하기도 하였으며, 그 입김이 센 경우에는 향리의 임면도 좌우하곤 하였다.
무엇보다 향안(鄕案)이니 연계안(蓮桂案)이니 하는 그들만의 명단을 만들고, 그 안에서 끼리끼리 모여 군현의 일을 논의하곤 하였으므로, 그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말고가 꽤 중요하였다.
“황해도에는 그런 것이 없지 않았던가?”
“있기는 했습니다. 워낙 유풍(儒風)이 약해서 의민당이 조금 세력을 뻗치자마자 금방 흩어져버렸으니 거의 눈치조차 못 챘던 것이지요. 허나 삼남은 물산이 풍족하다 보니 향회에 얽힌 이권도 결코 작지 않아, 이 향회의 권한도 제법 큰 편이었습니다.”
민주당이 들어선 이래로 향리들이 다른 백성들까지 끌어들여 저들의 모임을 만들면서, 향회는 제법 입김이 줄었다. 거기에 향전까지 벌어지면서 목소리 큰 사족은 말 그대로 뭇매까지 맞곤 하였으니, 위신이 결코 예전 같지 않게 되었다.
허나 오랜 세월에 걸쳐 군현에 뿌리내린 사족들이었으므로, 비록 위축될지언정 아예 뽑혀나가지는 않았다. 대개는 향약과 사창을 중심으로 뭉치면서, 그들 나름의 세력을 다시 재편하려 애쓰곤 하였다.
“그간 계속 우리 민주당이 벌이던 온갖 일에 당해 왔으니,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면서 뭉치는 것은 족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몇몇 고을에서, 그간 사족 몇몇이서 수령과 함께 군정(郡政)을 마음대로 한 것이 잘못이었다며 순순히 향리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면서 이르기를, 장차 그들끼리 공론에 따라 향안에 향리들 중 인품이 훌륭한 이들을 올려줄 터이니 앞으로 함께 고을을 올바르게 이끌어나가자곤 했다.
향리도 다 같은 향리가 아니요, 외지에서 들어온 사대부 문중들과 피를 섞으며 깊은 연을 맺은 집안도 적지 않았다. 그러니 어느 고을이든 그렇게 선뜻 사족들이 내미는 손을 붙잡는 향리 집안들이 꽤 나왔다.
또한, 민주당 손을 거치는 재물이 늘어나면서 그 이권을 두고 다투는 경우도 조금씩 생기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정분이 틀어지면서 대신 반대편으로 가겠노라 하는 집안도 종종 있었다.
“허나 이상한 것은, 바로 그 시기입니다. 나라의 온갖 사정이 숨 가쁘게 변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향회에 아전들 받아주겠다는 말이 올 늦가을에 일제히 나왔다 하니 기이한 일입니다.”
“누군가 뒤에서 농간을 부린 게로군.”
꺽정이 결론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무래도 이런저런 전력이 있는 이준경과 사림 선비들이었다.
“하지만 이는 동고 대감과 그 문하 사람들이 할 만한 일은 아닙니다. 설령 수를 쓴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알린 다음 조정의 정령(政令)을 통해 당당하게 행했겠지요.”
“우리 율곡 선생 말이 맞소. 서 별감, 혹시 그 외에 각지 군현에서 전해온 특이한 소식 같은 것은 없었소?”
곰곰이 생각하던 서림이 한 가지 일을 꺼냈다.
“이것과 연관이 있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임 당수, 최만복이를 기억하십니까?”
“기억하다마다. 내 주먹과 발로 단련시켜가며 한 사람 몫 하게 만들었으니.”
“일전에 성황산성 지키는 일도 맡지 않았던가요? 저도 그 이름을 들었던 듯합니다. 지금은 평산부 나장(羅將)으로 있다고 언뜻 들었던 듯한데요.”
이이도 알 만큼 나름 흑의군 패두 중에서 이름을 떨쳤던 최만복이었다.
의민당이 해산된 지는 꽤 되었지만, 실제로는 황해도 전역에 당원들과 그들이 만든 연줄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황해도 일대 나졸들이 지금도 ‘의(義)’자 완장을 차고 다니는 판국이었으니, 흑의군에서 빠진 최만복이 그대로 동헌에 들어가 나장 노릇하는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사업당 형방 사람들이 수소문하던 중 최만복 그이에게도 찾아가 물었는데, 한두 해 전에 나그네 하나가 황해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이름난 사족 문중은 어디에 있으며 혹 다른 집안과 은원이 있지는 않은지 수소문하는 일이 있었답니다.”
“나그네?”
“그때도 영 수상하다 여긴 최만복이가 사람을 풀어 그 족적을 되짚어보았는데, 의민당 사람들이 여전히 많이 사는 봉산이나 재령, 평산 같은 곳은 피하면서 해주나 연안 같은 곳만 슥 훑고서 경기도 쪽으로 빠졌다고 하였습니다.”
덜미 잡히지 않고 황해도를 지나 경기도로 넘어갔다면, 거기서 다시 강원도나 삼남 쪽으로도 언제든 갈 수 있었으리라.
“최만복이가 그 나그네 생김새도 전해들었다 하더이까?”
뭔가 촉이 온 꺽정이가 서림에게 물었다.
“봉산 관아 앞의 어물전 기억하십니까? 거기 어물전네 셋째아들이 강음에 와서 그 아비처럼 물장사를 하는데, 최만복이가 찾아가 수소문하니 답하기를 봉산 어물전 단골 하나가 때마침 지나가긴 했었다고 하였답니다. 그게 거의 한 해 전 일이긴 하지만...”
“어물전 단골? 그러면 봉산 사람 아닌가?”
“그건 아니랍니다. 어디 보자...”
형방 사람들이 모아온 소식을 정리해둔 종이쪽을 훌훌 흩던 서림이 마침내 답했다.
“아, 봉산 장터에 종종 와서 홀로 술만 마시고 가던 이라더군요. 장돌뱅이 김가라고 하는데, 의민당 거병이 끝난 뒤로는 한 번도 아니 오다가 느닷없이 나타난 것이 좀 유별난 일이라 기억을 하고 있었답니다.”
“장돌뱅이 김가?”
장돌뱅이 김가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의민당 난리 끝난 이후 한 번도 봉산에 들리지 않았다는 것을 듣고서 얼추 짐작은 할 수 있었다.
“하, 어디 가서 죽은 줄 알았는데, 용케 다시 고개를 내밀었구만.”
“누구 말씀이십니까?”
“두리손. 기억하느냐?”
두리손과 악연 있는 이이도 그 이름 듣고 잠시나마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놈이 어디 믿음직한 뒷배를 새로 찾은 모양이다.”
“어찌하시렵니까?”
“어찌하기는. 우선 이 난리통부터 해결을 해야지. 그 다음에는 그놈이 무엇을 노리고 있든 그 산통을 거하게 깨주고.”
갑자기 방 안에 한기가 도는 듯하였다.
--- *** ---
작중 지나가듯 언급된 오승은은 『서유기』의 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재능을 드러냈으나, 자유로운 성품과 어려운 집안 사정 등으로 인해 마흔을 넘겨서야 겨우 미관말직에 올랐고, 이후에도 출세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한미한 삶에 머물러야 했지요. 그 이전까지는 다양한 구전설화를 묶어놓은 것 정도에 불과했던 『서유기』를 편집하여, 불합리한 세상에 대한 거대한 풍자극으로 재구축한 것은 그의 업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함께 언급된 이지는 그의 자를 따라 이탁오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양명학 좌파의 거장입니다. 본디 천주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국제 교역항이었고, 이지도 어려서부터 그 자유롭고 다채로운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일례로, 그의 7대조 조상은 무역에 나섰다가 호르무즈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이란 여인을 아내로 맞는 바람에 호적에서 파이고 성도 임씨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이지도 초명은 임재지였는데, 1551년 수재(秀才) 시험 합격 후에야 비로소 종가의 성씨를 다시 따르게 되었지요.
이지는 이후 성리학을 깊게 익혀 성공적인 관료 생활을 하다가, 불혹의 나이에 비로소 양명학에 입문하게 됩니다. 그리고 곧 양명좌파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급진적 성향을 드러내게 되었고,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리며 문제적 인물로 부상하게 됩니다. 자신의 문집 제목을 ‘불태워야 할 책(焚書)’, ‘숨겨야 할 책(藏書)’ 등으로 지었던 데서도 그의 비범한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데, 아직 작중 젊은 시점에서는 그 ‘똘끼’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작중 언급된 활인심방은 다재다능한 예술인이었던 주원장의 서자 주권(朱權)이 지은 구선활인심방(臞仙活人心方)을 이황이 정리하여 다듬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간단한 체조와 식이요법 등 생활건강 관련 내용을 담고 있는 활인심방은 퇴계 종중에만 전해오다가 20세기 말에 들어 공개되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보았을 때 그가 한창 활발한 관직활동을 하던 시기가 아닌, 도산서원을 창립하고 제자를 가르치던 노년기에 완성되었던 듯합니다. 작중에서는 엉뚱한 계기로 편찬되게 되었는데, 아마 그 내용도 식이요법보다는 운동 쪽에 치중하게 되었을 듯합니다.
조선 초에 설립된 일종의 지방자치 기구인 유향소는 잘 알려진 것처럼 조선 전기의 사회적 변화와 맞물려 여러 차례 부침을 겪었습니다. 세조 연간에 철폐되었다가 성종 연간에 복설되고, 그 기능과 권한 역시 여러 재조정을 겪었지요. 함께 언급된 사마소는 유향소가 훈구 세력과 연줄 있는 집안들에게 장악되자 고을에서 사마시(생원·진사시)를 통과한 이들끼리 모여서 만든 자체 협의 기구였습니다. 이후 그 세력이 강화되면서 명종 연간에는 훗날 서원과 비슷하게 함부로 백성을 침탈하고 향리들에게 사적 제재를 가하는 등 폐단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양란 이후 유향소의 기능이 재정비되는 과정에서 사마소는 완전히 혁파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