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98화 (98/259)

31. 배워서 남 주기 (2)

꺽정이가 북경 뒤집어놓을 무렵 한양을 떠난 정조사(正朝使)는 어째 여름 다 되어서야 돌아왔는데, 곧 밝혀진바 『대명회전』 중수본 나오기를 기다리느라 그리 늦었다 하였다.

본디 일 년은 족히 걸릴 줄 알았는데, 그것을 거의 절반 가까이 당겨 완성한 것이었다. 아무리 『회전』의 중수 자체는 다 끝나고 천자의 재가만을 기다리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 많은 양을 단번에 발간해낸 것은 결코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니었다.

천조에서도 이를 강조하며, 돌아오는 정조사 편에 특별히 사람 하나를 더 붙여 보냈다. 황상께 초판본이 올라간 직후에 조선에 보낼 것을 찍어내었으니, 천조가 번병 중 제일인 조선을 아끼는 마음이 이와 같았다. (예부상서 겸 내각수보 서계가 보낸 자문에 따르면 그러하였다.)

그때를 전후하여 한창 다음 동지사 서장관으로 들어가고자 심통원에게 청탁하던 이량도 발길을 뚝 끊었는데, 둘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도통 모를 일이었다.

좌우지간 임금은 대희(大喜)하며 이를 종묘에 고하였고, 이준경과 사림 대신들 역시 진심으로 기뻐하였다. 임거정의 무도함과는 별개로, 그의 군공 덕에 이 일이 원활히 해결된 것은 분명하였으므로, 심통원을 제외한 그 누구도 임거정의 공신 책록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렇게 광국공신으로 이름 올리게 된 임거정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내 팔자 서럽구나.”

무슨 잔치 베풀지도 못하고 도성 저자나 바쁘게 오가는 신세였으므로 한탄이 절로 나왔다.

자신이 벌여놓은 집안 난리통에 이이가 거하게 기름을 부으니, 졸지에 처갓집 심부름을 도맡게 되었다.

“그러게 왜 그런 생각을 집안 분들께 털어놓아서 고생을 자처하셨답니까.”

양벽이 옆에서 이죽대다가, ‘퍽’ 소리와 함께 머리통에 혹 하나를 달게 되었다.

“시끄럽다, 이놈아.”

“악!”

이건 정말로 아팠다.

억울하게 얻어맞는다 생각하니 더욱 머리통이 쓰렸다. 양갓집 규수더러 돌계집 행세하라 하면 욕먹을 수밖에 없는 노릇 아닌가?

애초에 사람은 자라다 그냥 픽픽 쓰러져 죽기 마련이고, 사내가 여기저기 쏘다니다가 호환 당하고 객사하는 것처럼 여인은 유독 해산할 때 그런 경우가 많을 뿐이다.

“그래, 나도 잘못은 있다. 그렇지만...”

꺽정이가 명희 생각하는 마음이 얼마나 애틋한지, 어찌하여 명희를 천하에서 다시 찾을 수 없는 가연이라 생각하고 아끼는지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대개 그렇게들 여길 테다.

그러나 꺽정이 또한 알지 못하는 것 있었으니, 그저 대를 잇기 위해, 일손 늘리기 위해 여인이 사내의 아이를 배는 것만은 아니었다. 명희의 마음 모르고서 그저 단정한 꺽정이 탓이 어찌 없다 하리오.

명희가 그저 여느 여인과 다르니 이해해주리라 생각한 꺽정이는 그러므로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던 것이었다.

“당수께서는 힘이 장사시니 그렇게 한숨 푹푹 쉬시면 길이 푹 파여버릴 지도 모릅니다.”

“헛소리 관둬라, 이놈아.”

“오막손이가 그럽디다. 병법에 따르면 성 안에 있으면 바깥에서 열 배나 되는 군세가 몰려와도 막을 수 있다고. 그 원리대로라면 안사람과 바깥사람이 싸울 때 항상 바깥사람이 질 수밖에 없는 이치 아니겠습니까.”

“맞고 관둘래, 그냥 관둘래?”

“제 말인즉슨, 당수의 잘잘못을 떠나서 그냥 굽히고 들어가는 게 마땅하다, 그 말입니다.”

아프게 맞은 것이 퍽 억울한지, 한 대 더 쥐어맞을 위험을 감수하고 저의 말을 계속 나불대는 양벽이었다.

“너 같은 무뢰한이 남녀간 이치를 알면 얼마나 안다고 그러느냐.”

“저도 아직 배필을 못 만나서 고작해야 기생집 문턱이나 닳게 하는 신세지만은, 그래도 이럴 때면 넙죽 엎드려서, 그냥 거창하게 귀물을 진상하여 바치는 쪽이 서로 편하다는 건 압니다. 세상 이치가 그러지 않았더라면 조선국의 방물장수 절반은 굶어죽었을 겝니다.”

그렇다면 명희에게는 무얼 바쳐야 그 기분을 풀어줄 수 있다는 말인가?

“에라이, 모르겠다. 그냥 옆에 있는 네가 한 대 더 맞아라.”

또 한 차례, 이 이치에 닿지 않는 폭력에 항의하는 억울한 비명이 골목에 울렸다.

그 소리에 대문이 발칵 열렸다. 보아하니 종놈은 아니고, 의관 다 갖춘 것을 보니 집주인쯤 되는 모양이었다. 때마침 어디 출타를 하려다가 딱 마주친 것이리라.

“예가 어디라고 잡인이 소란을 일으키느냐?”

가뜩이나 기분도 꿀꿀한데 나오는 말이 곱지 않으므로, 꺽정이 말도 절로 험해졌다.

“그래. 나 잡것 맞다. 보아하니 너는 이 집 잡것이렷다?”

문 열고 나온 사람이 덩달하 발끈하려던 차, 보다못한 양벽이 나섰다.

“에휴, 나야말로 뭔 고생인지. 여기 이분은 민주당 임 당수시고, 이 사람은 흑의군 패두 양벽이라 합니다. 혹 양 의관 어르신 되시는지요?”

“흠흠, 임 당수시라고 하셨소이까? 이 사람이 내의원에서 일하는 양예수가 맞소이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소?”

양예수가 하대하기를 그치니 꺽정이도 건성으로나마 공대하였다.

“태산(胎産)에 관한 의서를 모으고 있소. 비방(祕方)이 있거들랑 모두 내놓으시오.”

양예수도 풍문은 익히 들었다. 근래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사임당 신씨가 의녀와 아들 여럿 둔 일대 부녀자들을 모아 태산의 비법을 수소문한다 하였다.

그리고 어찌 규방의 사람이 그런 집안 사정을 바깥에 알리게끔 하겠느냐며 으름장 놓을 법한 그런 벌열가에는 임 당수가 직접 찾아간다고도 하였다.

허나 이제 보니 부녀자들만의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이보시오. 비방은 물론이요, 의서 또한 의관이 생업의 밑천으로 삼는 보배이올시다. 어찌 막무가내로 찾아와 내놓으라 한다는 말이오?”

“잠깐 빌렸다가 돌려줄 것이오.”

“지금 내어 주시면 나중에 대국에서 의서 들여올 때 조금 헐하게 값을 쳐서 드리겠습니다. 이는 사업당 서 별감께서 공언하신 바입니다.”

임 당수가 대문 앞에 서 있으니, 딱히 그런 뜻은 없었겠지만 문간이 완전히 틀어막혀버렸다. 저 어거지 청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할 터.

“아, 그리고 하나 더 해주어야 할 것이 있소.”

임 당수가 양벽이 짊어지고 있던 보따리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이것이 무엇이오이까?”

“보는 대로요. 거기 적힌 말에 가감없이 답하여 보내주시오.”

두루마리에 글자가 한 줄씩 적혀 있고, 그 옆에는 빈칸이 넓게 있었다. 다시 읽어보니 하나하나가 모두 질문이었다.

‘선생은 경술년(1550) 이래 지금까지 몇 번이나 산부(産婦)에게 처방을 하셨습니까?’

‘부인이 해산할 때 안전을 기하기 위하여 주로 쓰는 술수가 있습니까?’

‘각 술수를 통하여 효험을 본 사례는 몇 건이나 됩니까? 그렇지 못한 사례는 또 몇 건입니까?’

그리고 종잇장의 가장 왼쪽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만약 선생께서 원하신다면, 선생께서 이 일에 도움을 주셨음을 기록하여 널리 알리도록 할 것입니다. 답하실 때 가부를 말씀해주십시오.’

질문 한둘은 양예수가 쉽게 답할 수 있는 것이었으나, 나머지는 그런 질문 자체를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이라 매우 낯설었다.

무릇 환자란 사람 하나하나가 다르고, 그 병세 또한 다르다. 그러므로 의학의 기본은 정(精)과 기(氣), 그리고 신(神)의 작용을 알고, 바깥에 드러나는 증상을 토대로 환자의 안쪽을 짐작하는 데 있었다.

그리하여 올바르게 정·기·신의 상태를 구하고, 그 사람에게 맞는 치법(治法)과 처방을 찾는다. 이것이 의학의 요체였다.

차라리 그저 의서를 짓기 위하여 수소문한다면 모르겠으나, 누가 언제 얼마나 많은 병자에게 처방을 해주었는가 하는 것이 어찌 중하다는 말인가? 그렇게 숫자로 뭉뚱그리기만 한다면 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렇게 하여 무엇을 알고자 하는가?

양예수는 비록 의관의 집안에서 태어나 의학만을 익혔으나, 다른 학문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여겼다. 근래 민주당이 학당을 세우면서 각종 잡학들이 나름대로 짜임새를 갖춘다 하였는데, 그 모양새 또한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듯하였다.

“이것을 왜 묻는지 여쭈어도 되겠소?”

“필요하니까 묻겠지. 나는 잘 모르오. 정 궁금하시면 이 종잇장에 답변 적어서 보낼 때 함께 글을 보내 물어보시오.”

성의 없는 대꾸만 돌아왔다.

참된 앎이란 무엇인가?

양명 선생은 일찍이 격물치지에 뜻을 두고 며칠 동안 대나무만 바라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머리만 혼미해질 뿐 아무런 깨우침이 없었다고 하였다.

반면 화담 선생은 글자 하나를 벽에 붙여두고 궁구하기를 반복하여 마침내 일문(一門)을 이루었다.

양명은 모르고 화담은 알던 것이 무엇인가? 바로 격물법이다.

왕양명은 대나무를 멍하게 바라볼 것이 아니라, 대나무에 대한 모든 것을 떠올리고 의심해보았어야 했다.

옛사람들이 남긴 대나무에 대한 글을 널리 살피고, 손수 대나무를 쪼개보고, 죽순을 여기저기 옮겨 심어보고, 그로써 참과 거짓을 스스로 궁구해야 했다. 그리 하였더라면 머리는 똑같이 혼미해질지언정 깨우치는 바는 있었으리라.

『화담자의』가 어떻게 세상에 나왔는지 잘 알지 못하는 이이가 생각하기에는 그러하였다.

“오라버니, 그렇게 골똘히 생각할 겨를이 있으면 와서 돕기나 하셔요.”

명희가 뭔가를 툭 던지며 말했다. 나무 틀 안에 구슬인지 말린 은행알인지 싶은 것들이 예닐곱 개씩 줄지어 있었다.

“주판 처음 보셔요?”

“처음은 아니지만...”

사업당이 장사를 거하게 벌인다 하니, 고토 열도의 서해가 서림에게 잘 보이려고 주판 여러 개를 마친 바 있었다. 사람이 워낙 많아 기껏 산가지 펼쳐놨더니 누가 툭 치고 가는 일이 많았던 사업당에서 꽤 요긴하게 쓰고 있었는데, 개중 하나가 명희 손까지 넘어온 모양이었다.

“그냥 머릿속으로 하면 되는 것을 번거롭게 그런 도구까지 써야 하느냐?”

“사천이백삼십오에서 구백팔십이를 빼면 얼마인가요?”

“삼천이백오십삼.”

“주판을 쓸 게 아니라 그냥 오라버니를 여기 앉혀두면 될 일이었네. 얼른 여기 와서 앉으셔요. 어머니! 어머니! 그 산가지 내려놓으시고 여기 어머니 아들 쓰셔요!”

머리 한쪽으로는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툭툭 던지는 산수를 하면서 간간이 다른 생각을 하는 이이였다.

꺽정이가 원하는 것은, 언제 어디서든 통용될 수 있는 배움이었다. 꺽정이 말마따나, 누이동생이 아이를 배게 된다면, 어디서 해산을 하게 될지 장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난리를 피해서든, 본인이 난리를 일으키기 위해서든, 저 멀리 북변의 숲속이나 일본국 어딘가, 심지어 남쪽 대양 한가운데에서 해산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어머니 사임당과 누이동생이 모아들인 앎은, 거기에 하등 쓸모가 없었다.

아들 일곱을 순산하여, 일대의 아낙들이 아이 낳을 때마다 두둑한 사례 바쳐가며 모셔간다는 노파가 말했다. 아이를 순산한 다른 여인의 경도(經度, 월경혈)가 묻은 속옷을 빌려 입으면 따라서 순산할 수 있다.

또한 그리 이름은 나지 않았지만 제법 잔뼈가 굵다는 어느 의원은 단언하였다. 민간의 처방은 대개 허황된 것이 많으니, 산도(産圖)에 따라 산부의 머리를 어느 쪽에 놓을지만 잘 정하면 된다고.

한편, 의기(醫妓)로 일하다가 속량(贖良)한 여인은 말하기를, 삼각산 자락에 삼신(産神, 삼신할미)의 기운이 깃든 샘이 있는데, 정한수 뜰 때처럼 새벽에 치성드리고 그 물을 떠온 뒤 산실(産室)에 가져다 놓으면 산부가 해산한 뒤에도 탈이 없다 하였다.

“따지고 보면 모두 똑같이 허황된 말이다.”

“칠백사십오에서 삼백팔을... 아, 오라버니, 좀! 세상에 입 달려서 말을 하는 산가지도 있던가요?”

“아니, 들어보거라. 우리가 지금껏 모은 처방이 족히 백 개는 넘는데, 그것을 모두 지킨다 한들 죽을 사람은 죽고, 지키지 않더라도 살 사람은 살지 않느냐?”

분명 처음에는 이렇게 하다 보면 그런 각양각색 처방들 중 유용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드러나리라 여겼다.

“후... 명희야, 지금까지 드러난 바로는 너희 오라버니 말에도 일리가 있는 듯하구나.”

가뜩이나 조금씩 늘어나던 눈가 주름이 지난 한 달 사이 더욱 두드러지게 된 사임당이 말했다.

사임당 또한 서책을 가까이한 사람으로서, 아들 이이의 계획에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여겼다.

보통 산부가 해산할 때에는 여력 닿는 대로 모든 처방을 하기보다는, 경험을 토대로 정말로 효험 있는 것 몇 가지만 골라서 행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의원과 의기들, 그리고 해산 돕는 일을 많이 해본 부인들에게 물은 바를 정리하여, 개중 어떤 처방이 가장 효험 있는지 밝히는 것은 제법 쉬워 보였다.

벽에 붙인 두루마리에 그 결과가 정리되어 있었다.

금줄은 쓸모가 없었고, 아이 많이 낳아본 여인을 초빙하여 그 기를 받게 하는 것은 그나마 효험이 있었다.

의원들의 약 처방은 당연히 써야 하는 것 몇 가지를 제외하면 모두 제각각이라 우열을 가릴 수 없었는데, 개중 특출난 것도, 특별히 무용한 것도 없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가장 위에 있는 것은 삼신할미 기운 받은 정한수 처방이었다.

여러 의서에 나오는 처방은 뚜렷한 효험 없는 듯하고, 누가 보아도 허황되다 싶은 것은 효험이 있다니, 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내가 너희를 낳을 때도 사실 저렇게 하였다. 강릉 친정의 대나무숲 사이에 작은 우물이 있는데, 그곳에서 정한수를 떠와 산실에 두곤 했었지. 너희 외조모도 그리하셨고, 나의 외조모도 그리하셨으니 아주 오래된 가법(家法)이다.

하지만 다들 여기기를, 가법이니 따를 뿐 딱히 효험은 없으리라 하였다. 장사치의 속된 말로, ‘밑져야 본전’이라고도 하지 않더냐.”

그 말대로였다. 여러 처방을 마구잡이로 하다 보면 그중 하나쯤은 효험이 있기 마련. 무엇이 얼마나 효험 있는지를 따질 겨를이 있다면 용하다고들 하는 처방 하나를 더 구해오는 쪽이 더 옳았다.

하지만 여기 보인 신씨와 그 아들딸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든 효험이 있는 처방. 그리고 어째서 그것이 항상 그렇게 효험 있는지를 드러내 밝힐 수 있는 처방.

그것을 찾아야만 꺽정이의 그 못된 생각을 고쳐줄 수 있을 터.

“아무리 허황되게 보인다 할지라도, 숫자는 거짓을 말하지 않겠지요.”

갑자기 내려앉은 정적을 명희가 깼다.

“강릉의 정한수와 삼각산 샘물 양쪽에 모두 삼신의 기운이 깃들어 있다기보다는, 그 물 자체에 무언가 다른 성질이 있어서 도움이 되는 것 아닐까요? 아니면 물을 떠놓는다는 것 자체에 효험이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아, 격물법! 그렇지!”

이이가 탄성을 내질렀다.

지금쯤 모든 일이 잘 풀렸다면 슬슬 귀로에 오르고 있을 스승 이지함과 그 일행이 어찌하여 그 남쪽 먼 바다까지 가게 되었는가.

만약 이 땅이 둥글다면, 태양이 정수리 위에 뜨는 남쪽에서는 북극성이 보이지 않으리라 전제를 세웠다. 그러고서는, 그 전제를 검증하기 위해 저 남쪽까지 배를 타고 나아갔다.

땅이 둥글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도, 이 내력을 모두 듣는다면 그나마 순순히 수용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렇다면 부인의 해산과 정한수 사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별과 다르게 사람의 몸은 다른 이들에게 드러내 보일 수 없다. 규방 바깥에 드러낼 수 없는 규방 안의 사정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숫자. 명희 네 말대로 수(數)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 법이지.”

강릉과 한양 두 곳에서, 정한수를 산실에 떠 놓았더니 무사히 산부가 해산을 하곤 하였다.

그렇다면 다른 곳에서도 그러할 것인가? 꼭 삼각산이 아니라, 예컨대 관악산이나 목멱산, 아니면 한강수를 떠와도 그러할까?

그저 물을 떠오기만 하면 그것으로 족한가? 아니면 정한수 떠오기 전후에 하던 다른 일이 영향을 주었는가?

지금까지는 사람 한둘이 던져보았을지언정 깊게 궁구할 연유가 없던 질문이었다. 그것을 탐구할 방법이 없고, 설령 깨달았더라도 굳이 다른 처방을 제쳐놓고 자신만 옳다고 할 이유도, 그렇게 주장할 근거도 없었다.

그러나 단순히 처방 한 줄을 적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통용되는 배움, 능히 배워서 남에게 퍼뜨릴 수 있는 그런 것을 추구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눈빛이 오가고 이야기가 오간다. 그대로 밤은 깊어지고, 이원수는 오늘도 안채 대신 사랑채에 이부자리를 깔고 홀로 잠들어야 했다.

호롱불은 도통 꺼질 줄을 몰랐다.

도성 사람들이 민주당 임 당수와 그 일가분들의 기이한 동향을 두고 입소문 주고받을 무렵, 소문을 더욱 부채질할 만한 새로운 질문들이 도성 안의 의생과 의녀, 그리고 부녀자들 사이에 전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해산이 임박한 몇몇 집안에서 - 주로 살림살이 곤궁하고 따질 체통은 그닥 없는, 그런 집안들이었다 – 정한수 떠 놓고 정말로 해산에 도움 되는지를 판별하게 되었다.

후대의 사람들이 본다면, 도합 백여 건도 되지 않는 수증(數證, 데이터)으로 무슨 의미 있는 결과를 도출하겠느냐 할 것이요, ‘해산이 잘 되었다’ 하는 것도 사실 그렇게까지 엄밀하게 정의내릴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또한 낭군을 생각하는 명희와, 딸과 사위를 생각하는 신씨 부인의 간절한 마음이 있었으므로, 그렇게 모이는 수증의 해석도 사실 처음 노렸던 것만큼 엄밀하지는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다시 석 달이 지난 뒤에 신씨 부인의 부름 받고 찾아온 홍순언과 남사고 두 사람의 눈은 곧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이게 효험 있는 처방입니까?”

“백약(百藥)보다 손 씻기 한 번이 더 도움이 된다니, 믿기 어렵소이다.”

“내 그리할 줄 알고 이와 같은 그림을 그렸소.”

그림 한 폭이 펼쳐졌는데, 운치 있는 산수 풍광도, 정갈한 아름다움 있는 초충도도 아니요, 그저 들쑥날쑥한 막대 몇몇이 있을 뿐이었다.

“안에 먹물이 찬 막대는 부인이 해산한 집안의 수요, 속이 빈 막대는 부인이나 아이가 해산 후에 상한 집안의 수라네.

가장 오른쪽에 있는 것이 평소처럼 처방한 경우요, 그 옆은 정한수를 떠놓기만 하되 손을 대지 않은 집안이며, 그 다음은 정한수 대신 평범한 우물물을 떠놓은 집안, 그리고 가장 왼쪽이 바로...”

“정한수를 떠 놓고 나서 그것으로 손을 씻은 집안입니다.”

워낙 여기저기서 새로운 수증(數證, 데이터)이 들어오다 보니, 사임당네 안채에 있는 종잇장은 더러워져 갔다.

그것을 도저히 두고 볼 수 없던 신씨가 새로 종이를 붙인 뒤, 말끔하게 막대기 그림을 그려서 정리하였는데, 그림을 그리는 한 사람으로서 참다 못해 붓 휘두른 것이 의외로 보기 좋았다.

당장 이렇게 홍순언과 남사고 두 사람의 눈길을 잡아끌고 있지 않던가.

“원리가 잘 이해되지 않소이다. 수기(水氣)가 산부에게 좋은 것이라면, 차라리 정한수를 마시는 쪽이 더 나을 텐데...”

“그것까지는 우리도 따로 격물(格物)해보지는 못하였네. 의심스럽다면 언제든지 더 검증해보면 될 일 아니겠는가?”

“이 그림만 싣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우리가 이 그림에 나온 결과를 얻었는지, 어떤 방법을 썼으며 누구의 도움을 받았는지 등등을 모두 실을 생각입니다.”

“지금 말씀하신 것을 들으니, ‘의심된다면 더 검증해보라’ 하는 말도 함께 공보에 실어주시면 더 좋겠네요.”

신씨와 아들딸들이 한마디씩 덧붙이니, 남사고도 반론할 마음을 잠시 접었다. 생전 처음 보는 논증의 방식에 여전히 머리가 혼란스럽기도 했거니와, 세 사람에게서 노곤함만큼이나 뿌듯함도 뻗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우선 저 그림은 모양이 단순하니, 굳이 목각할 것도 없이 지금 쓰는 주자(鑄字, 금속활자)만으로도 능히 펴낼 수 있을 듯합니다.”

“다행이구려.”

“아, 그리고 꼭 한 문장을 덧붙여주십시오.

이 이치를 궁구하는 데 쓰인 격물법에 대해 더 알기를 원한다면, 곧 발간될 『격몽요결』을 보시라, 이렇게 말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양이 어떠하건, 사람이 사람 다스리는 이치가 어떠하건 대부분의 백성들은 신경 쓸 마음도, 여력도 없다 하였다.

그러나 대를 잇고 말고 하는 문제, 안사람 또는 첩이 살고 죽고 하는 문제라면 누구든 지금 남사고와 홍순언이 그러는 것처럼 우선 읽고 볼 수밖에 없을 터.

그리고 – 이이는 자신하고 있었다 – 정말로 이 정한수 처방이 효험 있음을 깨닫는다면, 뒤이어 다른 이들이 격물법 따라 저의 깨우친 바를 펴낸다면 그것에도 덩달아 눈길 줄 수밖에 없으리라.

그저 경전 속에 있는 성현의 말씀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쓸모가 있는 배움. 배우고자 하는 뜻만 있다면 누구든 익힐 수 있고, 또 그것을 보고 자신 나름대로 깨우친 바를 언제든 덧붙일 수 있는 그러한 배움.

만약 배움 즐기는 이들이 이번 논고를 접한다면, 지금 남사고가 연신 고개 갸우뚱하며 원리를 두고 고심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고민하게 될 터였다.

그리고 어쩌면, 주변의 다른 일에 대해서도 이전과 다른 눈으로 보게 되리라. 무엇이 허황된 것이고 무엇이 진실된 것인지, 검증하고자 하는 마음과 능히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을 공히 얻게 된다면.

“그리 하겠습니다. 서 별감께서도 이번 일에 대해 처음 전해들으셨을 때부터, 반드시 이익이 남을 것이니 세 분 말씀대로 하라 하셨습니다.”

“아, 그리고 우리 어머님 존함도 꼭 써주셔요.”

“명희야!”

“존함이 안 되면 당호라도... 어머니께서 얼마나 열심히 하셨는데, 오라버니 이름만 올릴 수는 없잖아요.”

이것이 사임당 신씨와 검손당(黔遜堂) 이씨, 그리고 율곡 선생 세 사람 이름으로 그 기묘한 처방에 대한 소위 ‘격물고(格物考)’가 나가게 된 사연이었다.

반가 체통에 영 맞지 않는 일이라며 혀를 차는 사람들조차 한 번 읽으면 잊을 수 없게 되었으니, 과연 그 막대기 그림의 공이 컸다.

핀투 선장의 상 투메 호가 강화도 앞바다에 돌아오게 된 것은 대략 그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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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명과 청에 일년삼공(一年三貢), 즉 한 해에 세 번 사신을 보내는 것을 관례로 삼았습니다. 이는 곧 매년 설에 보내는 정조사, 천자의 탄신일에 보내는 성절사, 그리고 매년 동지에 보내는 동지사로 이루어졌습니다. 목표 일자보다 두 달쯤 전에 출발하여, 북경에서 두 달쯤 체류하고, 다시 두 달 동안 요동을 통해 귀국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대중매체를 통해 허준의 스승으로도 알려진 – 실제 근거는 희박합니다 – 의관 양예수는 출생 연도가 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1563년 순회세자가 병으로 쓰러졌을 때 양예수가 다른 내의들 몰래 그를 진찰하고 처방한 사건이 있었음을 감안하면, 대략 그가 1550년대부터 의관으로 명성을 떨쳤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습니다. 양예수는 순회세자가 사망하였는데도 벌을 받지 않았고, 오히려 이듬해에는 벼슬이 오르기까지 했는데, 이는 그가 이미 내의원에서 상당한 힘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후에도 양예수는 명종과 선조 두 임금의 총애를 받으며, 1597년 사망할 때까지 의관으로서는 가장 높은 대우를 받게 됩니다.

주판이 널리 쓰인 중국과 일본과는 달리, 조선에서는 산가지가 계속해서 계산도구로 애용되었습니다. 상업의 발달로 단순한 사칙연산을 빠르게 처리하는 것이 중요했던 중국·일본과 달리, 조선에서는 보다 범용성이 높은 산가지의 가치가 더 높았던 것입니다. 조선에 주판이 제대로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시기로 추정되는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인조 시기의 수학자 최석정은 그의 저서 『구수략』에서 주판은 산가지로부터 오히려 퇴보한, 번거로운 계산도구라고 단언한 바 있습니다.

조선시대 의녀들은 조산사 업무도 함께 수행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 수가 그리 많지 않았을 뿐더러 사회적 지위도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 의녀는 처음부터 비녀(婢女) 가운데서 선발되었고, 법적으로는 항상 천민이었습니다. 이후 연산군 시기부터는 의녀가 기생을 겸하는 – 이른바 약방기생(藥房妓生) 또는 의기(醫妓) - 일이 생겼는데, 그 이후로도 이러한 풍조가 대체로 유지되었습니다. 물론 이에 관해서는 관기의 인건비를 절약하기 위해 겸업을 허용·권장하던 시대상을 감안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의녀의 한계를 생각하면, 조선의 여성들이 출산을 할 때 의지할 수 있는 조산사는 별도의 전문 의료인이 아니라, 이웃이나 친족들 중 출산의 경험이 많은 여성들이었을 것입니다. 조선 후기 왕실의 출산지침서인 『임산예지법』에서도 출산 전에 ‘나이가 많고 유식하며 성품이 유순한’ 부녀 서넛을 가려 모시게 할 것을 명시하고 있지요.

이들을 통해 전해지는 산부인과 지식은 분명 주술과 미신, 개인의 경험 등이 혼재된, 순수한 의미에서 비과학적인 것이었을 터입니다. 하지만 현대의학의 등장 이전에는 오히려 전문적 훈련을 받은 의료인력보다 이러한 전근대적 지식과 경험이 더 우위를 점하기도 했습니다. 유명한 사례로, 이그나츠 젬멜바이스(Ignaz Semmelweis)가 산욕열 예방을 위해 기본적인 위생을 주장하던 19세기 중엽, 제대로 된 의학교육을 받지 못한 산파들이 간호인력으로 근무하던 병원의 산욕열 치사율은 산부인과 면허를 보유한 의사와 수련의들이 근무하는 병원의 3분의 1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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