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99화 (99/259)

32. 교각살우 (1)

대양서생 스무 명이 모두 멀쩡히 돌아왔다. 중간에 고경명 이하 세 명이 열병으로 쓰러져, 그들 병구완하는 이정과 함께 말라카에 남은 일이 있기는 했지만, 숨이 끊어진 이는 하나도 없었다.

지금껏 조선 사람으로 이만한 먼 길을 다녀온 사람도 없었고, 조선 선비로서 이토록 새로운 깨우침을 내놓은 자도 아직 없었다.

“공맹과 정주(程朱)의 뒤를 우리 조선 유자들이 이었소!”

『역』의 감추어진 뜻을 새롭게 드러내고, 『예』의 참된 뜻을 밝혔다. 옛 것을 익히고 새 것을 알 수 있다면 스승이라 부를 수 있다 하였는데, 이제 새 것을 익혀 옛 것을 새롭게 하였으니 무어라 불러야 하겠는가?

아직 그 이름조차 붙이지 못한 감격이 팔도의 선비들을 휘감았다.

이번에는 대체 무슨 장수의 비결이 나올 것인가 싶어 공보에 실린 남쪽 바다 소식을 살피던 백성들은 다른 연유로 감격하였다.

“결국 공자왈 주자왈 하던 선비들도 그 뜻을 다 모르다가 이제 와서 새로 깨달았다는 것 아닌가?”

새로운 학설을 창안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르고, 알 이유도 없던 이들 생각하기로는, 저 대양서생 스무 명이 세운 공은 천한 뱃놈 하나가 남쪽 바다에 갔더라도 능히 세울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뱃놈 말이라면 이렇게 전국을 떠들썩하게 할 수 있을 리 없었으나, 선비들을 은근히 존경하면서도 질투하던 자들 마음에는 그러한 지적이 절로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대양서생들이 남양(南洋) 다녀온 일은 그 자체로도 큰일이었고, 또한 대양서생들은 모두 천조의 명 받들어 왕직 토벌하는 데 큰 공을 세우기도 했으니, 따지고 보면 종계변무를 성사시키는 데 그 공이 작지 않았다.

그러므로 임금은 그들을 궁으로 불러 치하하는 자리를 열었는데, 입궐하여 용안 뵈랴, 틈 날 때마다 드러누워 여독 풀랴, 여기저기서 날아드는 지인들의 서한에 일일이 답하랴, 서생들 모두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그렇게 거의 열흘 남짓 지나서야, 이지함과 상 투메 호 사람들은 겨우 한가로움을 되찾을 수 있었다. 민주당이 모주님 무사 귀환을 축하하며 거하게 잔치판 벌인 것은 이때였다.

사업당도 그날 하루는 일을 일찍 마쳤으며, 아예 도성 일대에 민주당과 관계된 모든 사람들을 모아 흑의영 큰 마당에 판을 깔았다.

“마시자!”

“사우지(Saude, 건배)!”

“수키야메 오밈비(잔을 비워라)!”

워낙 흑의영을 거하게 지었다 보니, 사업당 사람들에 흑의군 놈팽이들, 그리고 핀투 선장과 선원들은 물론이요, 올 겨울에 홀라온(忽剌溫) 놈들 털 준비를 하러 한양 온 니탕카이와 그 아래 백정여진 패거리까지 모두 들어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다들 지체가 없지 돈이 없는 것은 아니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어디선가 일패기생도 몇 명 와서는 거문고 타고 노래를 불렀다. 사저 황진이를 생각하여 기생 부르는 것을 좋지 않게 보는 꺽정이에게, 그저 노래와 춤 구경만 하고 다른 수작은 절대 부리지 않겠노라고 재차삼차 사정한 덕이었다.

아무래도 흑의군과 백정여진, 그리고 상 투메 호의 뱃사람들 모두 시커먼 남정네들뿐이라, 언제 그렇게 시끌벅적했냐는 듯, 일패기생의 춤사위와 노래를 넋을 빼놓고 감상하였다.

(하비에르와 함께 북변을 돌아다닌 이래 말수가 줄어든 니탕카이는 그 자리에 없었는데, 다들 술과 흥에 취해 알지 못했다.)

그 덕에 흑의영 안쪽, 옛 일 기억하자는 뜻으로 당호도 ‘청석당(靑石堂)’이라 지은 본채에서 회포를 풀던 꺽정이와 다른 민주당 중진들은 제법 조용한 가운데 정담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간만에 사형을 만난 임꺽정의 첫 말은 이러하였다.

“좋은 구경은 원 없이 하셨겠소. 신수가 퍽 훤해지셨구만.”

“야, 이놈아. 그게 근 한 해 만에 본 사형한테 할 소리냐? 남들은 나 보자마자 고생 많았다는 말부터 하던데.”

서로 툴툴대는 것과는 달리, 말투에서는 정겨움이 뚝뚝 묻어나왔다.

“뭔 고생은 고생이오? 사형이 그리 좋아하는 배를 한 해 동안 실컷 타셨는데, 오히려 그 배 탈 수 있게 핀투 놈 꼬셔온 나한테 고맙다 할 일이지.”

“이놈, 입 살아있는 걸 보니 그간 잘 지냈던 모양이군그래.”

“사형도 다행히 어디 다치진 않은 것 같소.”

꺽정이가 이지함을 상석으로 모셔온 뒤 어깨 눌러 앉혔다.

“얼른 앉으쇼. 나도 그사이 사형께 하고팠던 얘기가 많았단 말이오. 천자를 발밑에 둔 이야기부터 해서.”

“그래. 천자를 발밑에... 잠깐, 뭐라고?”

“들으신 그대로요.”

“일단 술 한 잔 더 마시고 들어야 하겠다.”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니, 어느새 해가 저물었다.

그러나 밤이야 깊어지건 말건, 서로 이야기 보따리 풀어놓고 술과 더불어 지난 한 해 다사다난한 사연을 풀어놓으니 그칠 줄을 몰랐다.

서림은 저의 그 ‘자본’ 꾸리는 이야기를 하고, 명희는 꺽정이가 화해의 뜻으로 화약장과 대장장이 여럿 채근하여 구해온 조총과 화약 이야기를 하였다.

“이지 그 젊은이가 여기 있었더라면 꽤 재밌었을 듯하구나. 꺽정이 너와 얼추 동년배인데, 돌아오던 중에 고향인 천주에 내렸지.”

“아, 일전에 편지에서 말했던 그 사람 말이오? 사형 맘에 퍽 들었나 보구려.”

“아니, 당수님, 모주님, 얘기하다 말고 갑자기 그렇게 끊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남해 바다 평정한 이래로 장삿길 훤하게 열린 이야기를 이제 막 꺼내려던 차였는데... 그쪽으로 요새 슬슬 은이 막 드나들고 있단 말입니다.”

막 이야기 타래 풀던 서림이 불평하였다. 꺽정이나 이이는 이쪽에 별 관심이 없고, 신씨와 명희는 대하기가 어려웠으므로, 그나마 이런 얘기를 편하게 나눌 수 있는 상대는 이지함 하나뿐이었던 것이다.

“그야 서 별감께서 이야기를 너무 길게 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이 도령이 할 말은 아니지 않소?”

이이가 끼어드니 서림도 삐죽 대꾸했다.

“저는 아직 스승님께 제대로 얘기도 못했는데요.”

평소 행적이 행적이다 보니 괜한 오해를 샀지만, 정말로 스승 앞에서 그간 있던 얘기의 절반도 다 못한 이이였다.

“제자 말이 맞소이다, 서 별감. 여태껏 이 사람 붙잡고 있던 건 여기 이 도둑놈이었지.”

“도둑놈이 남의 이목 훔쳐가는 게 무에 탓할 일이라고.”

꺽정이 툴툴대는 것을 못 들은 체 하며 이지함이 말했다.

“어차피 서 별감과는 술 깬 뒤에도 할 얘기가 많을 듯하오. 천조에서 우리 배가 남쪽을 오갈 때 천주와 항주에만 들리라 하였는데, 앞으로도 그 예를 준용해야 하지 않겠소?”

그 말을 듣자마자, 금방 알아들은 서림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아, 그렇지요. 흐흐...”

다른 이들은 무슨 뜻인지 짐작을 못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말이 끊긴 틈을 타 이이가 재깍 입을 열었다.

장거정과 중화에 대하여 논쟁한 얘기, 어머니 신씨와 동생 명희와 함께 격물법을 적용하여 사리 궁구한 얘기, 그리고 권점의 방도 도입하여 양주 고을에서 다툼 해결한 얘기 등등. 못다한 말이 허다하여 입이 근질근질한 판이었다.

“자, 이제 한 번 들어보자꾸나, 제자야.”

“막상 말씀 올리려니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지 감이 잘 안 잡힙니다.”

두서없이 이것저것 떠오르는 대로 마구 이야기하였는데, 이지함 또한 총명한 사람인 고로 그렇게 꼬리대가리 생략하고 나오는 말도 금방 알아들었다.

“...하여, 공보 통하여 임 당수의 형이 어떻게 향안에 이름 올리게 되었는지까지 퍼뜨리게 되었습니다. 그만한 지지를 받았으니 향임(鄕任) 맡은 것과 다름없게 되었고, 전례가 남았으니 필시 다른 곳에서도 본받게 될 테지요,”

“그래, 그렇구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이지함의 들뜬 표정이 점차 가라앉았는데, 워낙 주변이 흥겹다 보니 눈치채는 이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숙취로 머리 싸매고 있는 이들 사이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이가 있으니, 어지간해서는 술에 취하지도 않거니와 남을 괴롭히는 것을 재미로 삼는 못된 버릇을 지닌 꺽정이었다.

“하하, 이놈들. 똑바로들 서라! 이게 어딜 봐서 조선국 제일이라는 흑의군 꼬라지냐?”

“으으... 당수, 오늘은 좀.”

“어쭈? 이놈들이 아주 기고만장해졌구나. 청석골 때는 물론이요 금군 노릇할 때만 해도 눈도 제대로 못 맞추던 놈들이 말대꾸를 해?”

아직 기대승과 몇몇 선비들이 가설로만 생각하고 있는, 소위 지동설(地動說)을 몸소 겪고 있던 흑의군 졸개들이 연신 비틀거렸다.

다행히도 그들에게 구원이 찾아왔으니, 바로 똑같이 숙취에 머리 싸매면서도 걸음은 똑바로 하고 있는 그들의 모주, 수산 선생 이지함이었다.

“임 당수, 잠시 긴히 논의해야 할 바가 있소이다.”

“마침 나도 사형 나오시길 기다리고 있었소. 어제는 술맛 떨어질까 못 꺼낸 얘기들을 슬슬 해야지.”

신씨 부인이 그새 집안 사람들 보내 말끔히 치워둔 청석당 마루에 이지함이 털썩 앉았다.

“너부터 얘기해 보거라.”

늘 그렇듯 사람들 눈길 없는 곳에서는 편하게 말하는 이지함이었다.

“어디 보자... 지금 대국 정승인 서계 어르신과 그 수제자 장거정이가 민주당을 곱게 보지 않게 되었다는 것도 있고, 또 두리손 그놈이 아무래도 어디 박혀 있다가 도로 고개 내밀었다는 것도 있고.”

하나는 무슨 일이 앞으로 벌어질지 눈에 훤하여 두려운 일이요, 다른 하나는 무엇이 벌어질지 도저히 알 수 없어 걱정되는 일이었다.

“두 가지 모두 가볍게 여길 것은 아니로되, 내 걱정하는 바에 비하면 그나마 덜 무겁구나.”

“대체 뭘 걱정하시기에 그러시오?”

“스승으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숙헌, 제자 녀석이 이렇게 일을 크게 벌였을 줄은 몰랐다.”

이이가 툭툭 무언가 던질 때마다 자신이 맞장구를 쳐주었고, 때로는 도움도 제법 주었으므로 꺽정이 역시 찔리는 구석이 있었다.

“뭐 잘못한 것이라도 있소?”

“하나하나만 따져보면 잘못은 없다. 오히려 우리가 일전에 봉산 관아에서 맹세한 바가 있으니, 모두 그 세 가지 목표에 부합하는 일이지.

허나 너무 빠르다. 수십 년 세월에 걸쳐 차근차근 장구지계를 마련해도 모자랄 판에, 그것을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해치우고 있으니, 탈이 생길 수밖에 없다.”

아무리 범속함을 한참 벗어났다지만, 이지함 역시 선비다. 선비라면 누구든 경세(經世)를 위한 대책 한둘씩은 떠올리기 마련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면 그 대책을 실제로 조정의 시책으로 삼았을 때 어떠한 반발이 있을지도 염두에 두기 마련이었다. 그것을 소홀히 하였다가, 기묘년에 그토록 수많은 선비가 죽음을 맞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지함의 소중한 제자 이이는 아직 연소하였고, 이지함 본인을 포함하여 그가 아는 여느 서생보다도 총명했다. 자신은 능히 그 후과를 감당할 수 있으리라 여긴 것인지, 아니면 후과가 딱히 없으리라 단정한 것인지, 어느 쪽이든 스승으로서 걱정이 안 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 권점의 제도로 향임 정했다는 것은 참으로 두렵구나. 네 형은 사람됨이 훌륭하니 걱정하지 않지만, 다른 고을 사정은 결코 그렇게 쉽게 풀리지만은 않을 테다.”

“우선 몇 달 지나는 동안 얼추 다툼은 잦아들었다고 들었소. 우리 뜻대로 풀리지 않고 민주당 당세가 그대로 움츠러든 고을도 적지 않지만, 어차피 서림이네 ‘자본’인지 뭔지 장사가 자리 잡는다면 큰 문제는 아니 될 것이오.”

“그것은 걱정하지 않는다. 권점이 자리를 제대로 잡은 뒤의 일이 오히려 걱정스러울 뿐이다.”

권점의 제도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그것이 의권론과 서로 부합한다는 이이의 말에는 이지함도 동의하였다. 하지만 그것을 단번에 전국에 퍼뜨려, 그 예를 따라 시행케 한다면, 반드시 뒷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둑을 부술 때, 미리 조금씩 물길을 내어 물을 흘려보내지 않고 단번에 둑을 허문다면 물난리가 날 수밖에 없지. 헌데 내가 보기에, 지금 우리 당이 하는 일이 그러하다.”

허나 꺽정이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물난리 한 번쯤 나면 어떻소?”

“꺽정아, 그게 무슨 말이냐?”

이지함이 무어라 더 따져 물으려던 차, 숙취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밤이 녀석이 들어왔다.

“모주님, 모주님을 급히 찾는 이가 찾아왔습니다. 모주님 장인 되시는 분께서 보내셨다 합니다.”

아직 정정한 이지함의 장인 모산수 이정랑은 정미년 역모 고변이 통의부 통하여 무고로 밝혀진 뒤 고향 충주로 돌아가 살고 있었다.

분명 며칠 전에, 자신이 멀쩡히 돌아왔음을 알리고자 글을 주고받았건만 그사이 무슨 일이 터졌단 말인가? 이지함이 꺽정이에게 눈빛으로 허락을 구하고서 그 사람을 불러들였다.

찾아온 사람은 이정랑의 서자 이령(李領)이요, 전하고자 한 급보는 과연 급보의 이름값을 하는 것이었다.

유신현 이름도, 그런 이름을 받게 된 계기도 모두가 잊기 위해 애쓰고 있던 충주 고을에 파란이 닥쳤다.

여러 해 전, ‘서림’이 충주감영을 파옥한 일은 그 원인이 된 이지함의 역모 혐의가 사라지면서 절로 유야무야되었다. 그 뒤로 별다른 소식은 없었고, 충청도 아전들이 유독 사업당 서 별감을 두려워하는 정도의 변화만이 있었다.

서림 이름을 댄 꺽정이가, 파옥에 필요한 머릿수를 급히 모으기 위해 붙잡혀간 사족들에게 딸린 논밭을 그 아래 협호와 노비들에게 모조리 나누어주었던 일은 그저 조용히 묻혔고, 다들 알지만 쉬쉬하는 비밀로 남을 것만 같았다.

굳이 트집을 잡을 만한 사족 집안들은 모두 이약빙의 옥사에 연루되어 풍비박산이 났다.

그때 도망친 이들 중 몇몇은 붙잡히고, 몇몇은 객사하였으나, 대개는 조용히 숨죽이고 살다가 겨우 돌아왔다. 허나 이전 주인이 돌아왔다 하여 한 번 흩뿌려진 논밭과 노비까지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저도 그때 파옥 이후로 제 어미와 함께 산골짜기 으슥한 전사(田舍)에 몸을 숨기고 살다가, 조용히 본래 터전으로 돌아와 살고 있었습니다.”

“장인어른으로부터 이야기는 익히 들었다. 옛 노비들끼리 조금씩 부담하여 옥토를 제법 넓게 돌려주었다면서.”

모산수 이정랑을 비롯하여 그때 어떤 곡절 끝에 노비들을 모두 풀어주게 되었는지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 은혜를 생각하여 아쉽게는 여길지언정 아쉬운 소리를 대놓고 하지는 않았다.

노비들 역시 그렇게 옛 상전의 일가가 돌아오면, 옛정 생각하여 최소한의 체통 차리며 살 만큼의 논밭 정도는 돌려주곤 하였다.

더구나 이정랑은 그 수산 선생 이지함의 장인이요, 엄연히 종친의 범주에 드는 사람이었다. 상전으로서의 인망 또한 그리 나쁘지는 않았으므로, 저는 사위를 잘 두었으니 필요 없다고 사양했음에도 – 물론 그렇게까지 열심히 사양하지는 않았다 – 그렇게 옥답 여러 결을 돌려받았다.

“허나 모든 사람들이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평소에 험담 많이 듣던 상전도 있었고, 저의 논밭 불릴 욕심에 함께 행랑살이하던 다른 이들을 선동하여 상전 있었다는 것을 잊어버리자고 떠들어대는 옛 노비도 있었다.

천석꾼 친척 집안이 갑자기 영락한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이들이나, 그저 염치없는 이들, 작고한 친척이 충주 어디쯤 농장 가지고 있었노라 듣고서 그것을 상속받고자 하던 자들 등등은 이렇게 떠들곤 하였다.

“충주에 갑자기 저의 전답을 지닌 농군이 늘어난 것은 어째서인가? 정미년 화변 때, 상전의 것을 훔친 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마땅히 찾아서 본디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이다.”

반면 욕심 많은 협호나 옛 노비들, 또 정미년에 노비들에게 뿌려진 전답 일부를 뜯어내 저의 것으로 삼은 향리나 부농들은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근래 정미년 환란의 사정을 알지도 못하는 자들이 허황된 말을 꾸미고 있다. 우리 충주 사람들이 스스로 땅을 일구어 정직한 벌이를 하는데, 어찌 그리할 수 있다는 말인가?”

허나 그렇게 변죽 울리며 으르렁댈지언정 어느 쪽에서도 정작 그럴듯한 움직임은 취하지 않았다.

사족들은 의송을 벌이려 해도 토지문기며 노비문기며 모두 정미년에 재가 되어버렸으므로 증좌가 없었고, 농군들 역시 이제 와서 ‘나도 정미년에 감영 파옥하는 데 일조하고서 이 논밭 두어 마지기를 받았소이다’ 하고 선뜻 나설 수는 없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임 당수 가형께서 양주 고을에서 향임(鄕任) 맡게 되신 것을 계기로 뒤바뀌었습니다.”

충주의 유향소는 이미 향리들이 거의 차지하고 있었다. 정미년 화변으로 사족이 한동안 고개를 내밀지 못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네놈들만 그런 자리 나눠가지면 되겠느냐는 소리 나올까 봐, 양주 고을 권점 이후 충주에서도 나름 흉내를 내어 요호(饒戶) 농부 몇몇을 향안에 올려주었다.

“그 뒤로는 선후(先後)를 쉽게 가릴 수 없는 일 두 가지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는, 갑자기 사족들이 뭉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족의 빈자리를 농군으로 채우는 것은 그 뜻이 아주 불순하니, 반드시 그들이 공론을 모아 관찰사의 처분을 구해야 한다는 말이 여기저기 나돌았다.

다른 하나는, 권점 통해 향안에 오른 농군 중 학당깨나 다녔다는 자 몇몇이 이렇게 뻔뻔한 주장을 내놓은 것이었다.

“설령 그 논밭의 출처가 의심스럽다 한들 뭐 어떻다는 말인가? 땅의 주인은 땀 흘려 그 땅을 간 사람이니, 다른 고을은 몰라도 우리 충주에서는 우리 향회 사람들이 나서서 여기에 못을 박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사족들은 저들의 땅을 되찾을 길이 영영 사라질 것을 두려워하고, 옛 노비와 비부들은 하루아침에 저들이 몇 해 동안 일구던 땅이 사라지고 저들은 도로 행랑살이 신세로 돌아갈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잠깐, 선후를 가릴 수 없다니 무슨 말인가?”

“지금 생각해보면 두 가지 모두 그럴 만한 기미가 있던 일이기는 했으나, 이레 전쯤 갑자기 충주의 모든 사람들이 저 두 가지 일을 두고 떠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무엇이 먼저 원인이 되었는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레 전?”

꺽정이가 끼어들었다.

“한양에서 충주까지 얼추 삼백리 길이니, 어지간히 날랜 말을 타고 간들 이틀은 걸렸겠지. 거기에 하루이틀쯤 더하면...”

“꺽정이 네 말이 맞다. 시기가 수상하구나.”

딱 이지함 일행이 한양에 돌아온 이후 누군가 그간 계획했던 바를 실행에 옮겼다고 하면 아귀가 맞아떨어졌다.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두 사람 모두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어찌하겠느냐?”

우선 이령을 나가있게 한 뒤 이지함이 물었다.

“어찌하기는? 우선 얼른 수습을 해야겠지.”

“그래, 내 서 별감을 부를 테니...”

“두리손 그놈이든, 아니면 그놈과 같은 패거리인 놈이 손을 썼든, 지금쯤 우리 귀에 들려왔다는 것도 예상했을 테요. 서림이에게도 물론 알리기는 해야겠지만, 서림 아래 있는 아전들 손을 빌리려다간 때를 놓치기 십상이오.”

이지함이 무슨 뜻인가 잠시 갸우뚱하는 사이, 꺽정이가 웃으며 말했다.

“배 탔다가 내린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말을 타게 되셨소.”

“그 무슨 말이냐?”

“무슨 말(馬)이냐면, 내 일가붙이들의 말이지.”

꺽정이 말장난에 웃어주기에는 상황이 심각하였다.

“면밀하게 잘 짜인 계책에 훼방을 놓으려면, 기상천외한 수를 써야 하지 않겠소?

마침 니탕카이 놈과 그 패거리들이 여기 와 있지. 이미 내 아래로 들어온 놈들이니, 이럴 때 써먹어주어야지 않겠소, 사형.”

꺽정이가 더 고민하지 않고 청석당 문을 박차고 나갔다. 여전히 머리 싸매고 돌아다니는 이들 가운데, 반들반들한 돼지꼬리 머리통 여럿이 눈에 들어왔다.

“야, 백정놈들아! 힘 좀 쓰자꾸나!”

해장술 권하는 조선사람 출신 백정여진과, 조선에는 이런 풍습도 있나 보다 하면서 멋모르고 받으려던 진짜 여진 사람들 모두 깜짝 놀랐다.

때마침 부하들 데리러 왔던 니탕카이가 달려왔다.

“암바 버일러의 명을 받듭니다.”

다른 백정여진 놈들과 달리 술냄새도 별로 풍기지 않는 놈이 진지하게 저들 말과 조선말을 섞어 말하니 꺽정이도 순간 당황하였다.

“암밤바... 뭐?”

“우리 우두머리라는 뜻입니다.”

잠깐 생각하던 꺽정이는, 곧 그 생각을 관두기로 결정했다.

“그래, 내가 바다 건너에서는 용가리 소리도 듣는데 그 정도면 양반이다. 네놈 부하들 모아라. 우리가 긴히 갈 곳이 있다.”

왜 가야 하느냐. 가서 무엇을 할 것이냐. 그러한 질문은 니탕카이의 마음속에 스치지도 않았다. 마음에 맺히고 곧장 입 밖으로 나오는 물음은 단 하나.

“어디입니까?”

“충주. 여기서 동남쪽으로 고작 삼백 리 길이다.”

충주에서 상경하는 삼백 리 길을, 이정랑의 서자 이령은 그저 두 발로 열심히 걸어서 왔다. 아무리 요새 도로가 잘 닦였다고는 하지만, 건장한 사내가 궂은 날씨와 호환 염려치 않고 힘껏 걷는다 한들, 사나흘은 족히 걸리는 제법 먼 길이었다.

꺽정이는 이준경에게 ‘잠시 야인 떼거리들이 충주에 나타날 것인데 뒷처리좀 해 주시오.’ 하는 간략한 글 하나만 보낸 뒤, 니탕카이 패거리와 함께 말 달려 충주로 향했지만, 그럼에도 채비에 반나절 걸리고, 또 산길 오르내리느라 늦어지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일행이 충주 닿을 무렵에는 벌써 격앙된 말이 충주 한 고을을 넘어 여기저기 퍼져나가고 있었다.

“의권의 논변을 알지 못하는 고루한 유생이라면 모를까, 우리처럼 물정 밝은 이들은 이미 그 땅이 누구의 것인지 잘 알고 있다.

의권론의 이치로 따져보면, 경자유전(耕者有田)이야말로 모든 농군의 의권 아니겠는가? 다른 고을은 몰라도, 우리 충주에서는 우리가 나서서 이를 법도로 정해야 할 것이다!”

어설픈 배움이 욕심과 만나니, 그 불길이 꺼질 줄 몰랐다. 감정은 갈수록 가열되고, 그저 남들의 환심 또는 저의 욕심을 얻기 위해, 아니면 걱정이 꼬리를 물고 다른 걱정 낳는 것을 끊어버리기 위해, 말에서 중용을 버리고 극단을 취하는 이들이 나왔다.

“아니, 어찌 거기서 그치겠는가? 내 듣기로 맹자께서도 정전(井田)이라는 법도를 두어 백성들에게 땅을 나누어주어야 한다 말씀하셨다 했다. 맹자를 떠받드는 선비들이라면, 그 말씀대로 우리가 행한다 한들 말려서는 아니 될 것이다!”

정미년에 갑자기 노비와 비부쟁이는 줄어들고 저의 논밭 지닌 농군은 늘어난 사연을 불문에 부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마땅히 다른 고을도 충주와 같이 되어야 한다고 외치는 것이었다.

“그 말 옳다! 애초에 선비라는 자들이 글은 아니 읽고 농장이나 꾸리고 있는 게 어디 마땅한 일이었더냐!”

일이 비상하게 돌아가니, 그간 조용히 충주에 들어와 근근이 살고 있던 옛 사족들, 그리고 외지에 의탁하고 있던 이들 역시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우리네 등골 휘는 동안 너희는 거들먹거리고 있으니, 너희가 죽은 윤원형이보다 나은 게 무엇이냐?”

다른 것도 아니고 땅. 소중한 논밭의 이야기다. 자신이 떳떳지 못하게 얻은 논밭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농군들이 선창하고, 어떻게 저에게 떨어지는 것 없을까 호시탐탐 노리는 욕심 많은 이웃들이 뒤따랐다.

“논밭은 논밭 가는 자들의 것이다!”

“땅을 내놓아라! 모조리 내놓아라!”

--- *** ---

경자유전 원칙, 보다 정확하게는 맹자와 주희에 의해 이상화된 주나라 시절(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정전제(井田制)는 성리학자들의 이상으로서 조선 후기 숱한 토지개혁론의 사상적 근원이 되었습니다. 이는 사방 1리의 토지를 정(井)자 모양으로 9등분한 뒤, 가장자리의 여덟 구획은 1가구당 1구획씩 경작하여 소출을 모두 가지도록 하고, 가운데 1구획은 공동으로 경작하여 그 소출을 세금으로 걷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양란으로 기존의 사회적 질서가 해체된 17세기 초의 현실은, 오히려 유학자들이 새로운 토지제를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는데, 정전제는 이를 가능케 하는 사상적 기반이자 목표가 되었습니다. 특히 17세기 초 한백겸(韓百謙)이 평양의 기전(箕田)이 기자가 설치한 정전의 흔적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제도를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수많은 토지개혁론이 나올 수 있는 직접적인 사상적 원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작중에서는 그러한 주장이 아래에서부터, 그리고 훨씬 옹졸한 이유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