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교각살우 (3)
얼마 지나지 않아 충주와 그 인근 고을들, 그리고 꺽정이 엄포 탓에 소문이 아주 은밀히만 돌고 있던 조금 더 먼 곳의 마을들에 공문 하나가 돌았다.
분명 관찰사 명의로 된 것이되, 문장과 행간을 통하여 피력하기를 감사 자신이 아니라 임꺽정이 억지로 팔 비틀었음을 보였다.
‘근래 전답의 올바른 제도에 관하여 온갖 소문이 떠도는바, 올바른 주장과 헛된 말을 가리기 어려워졌고 한다.
무릇 중대사를 공론에 부침이 마땅하니, 본관은 민주당 임 당수와 깊게 상의한 끝에 본도(本道) 여러 고을의 부로(父老)를 초빙하여 전정공회(田政公會)를 열게 되었다.’
또한 그 서한을 전하는 것은 감영에 딸린 판관과 비장이되, 그 뒤를 수행하는 것은 여진 마병(馬兵)들이라, 주변에서도 대략 눈치를 채게 되었다.
“부로를 초빙한다 하였으니 향회에서 향임 맡는 이를 보냄이 마땅할 것이오. 허나...”
여러 고을 사족들은 곧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하필이면 한창 치고 박을 겨울철이 다가오고 있었다. 누구를 보내든 저 난민(亂民)들의 미움을 사게 될 터였다. 그렇다고 저들 대신 부농이나 향리를 보냈다가는 자칫 충주의 옛 노비들과 한통속이 될지도 몰랐다.
“방도는 하나뿐입니다. 사류(士類)의 사람과 그나마 점잖은 촌로를 함께 보내는 수밖에요. 다른 고을 중에는 간혹 그 권점으로 사람을 새로 뽑은 향회도 있으니, 딱히 망신스러울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그 수밖에 없겠구려. 나라가 어찌 되려 하는가.”
“그나마 임 당수가 무조건 하민(下民, 서민) 뜻이 맞다며 흉포한 짓을 벌이지는 않으니 다행입니다.”
“그건 그렇지만... 휴우.”
임 당수가 무엇을 노리는지는 다들 쉽게 알 수 있었다. 어떻게 결착이 나든 민주당이 알 바는 아니니, 너희끼리 싸워서 결정하되 돌과 횃불 대신 말로써 해결을 보라는 뜻이었다.
그 ‘공회’에서 한 번 결론이 나게 되면 이를 물리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었다. 임 당수는 한양에 있지만, 죽창 든 백성들은 바로 옆 동리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그들에게 좋은 쪽으로 논의를 이끌고 가서, 후에 또 지금과 같은 헛소리 나오지 않게끔 해야 할 터.
허나 몇 해 사이에 제법 경전을 읽어, 겉핥기로나마 성현의 말씀을 읊을 수 있는 자들이 곳곳에 생겼다. 그러므로 설득 또한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이었다.
대략 이러한 과정을 거쳐, 하나둘씩 주변 고을에서 사람을 보내왔다.
가장 먼저 물망에 오른 이들은 대체로 인망 있는 이들이었다. 사족들 중 백성들로부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인사를 받곤 하던 이들, 그리고 위아래 사람들을 공히 잘 대하여 평판이 좋던 향리나 부농들이 고을마다 한둘씩 있었다.
허나 사람 욕심이, 이왕이면 저의 편 머릿수가 더 많기를 바라는지라, 양측이 슬금슬금 사람을 한둘씩 더 붙이더니 결국 한 번에 네다섯씩 나오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어지간한 거족(巨族) 문중에서는 사람 하나씩은 다 나왔고, 꺽정이가 손수 겁박하였던 음성 고을의 유눌을 비롯하여 벼르고 벼르던 향리와 부농들도 나름대로 사람을 뽑아 보냈다.
그렇게 서로 감정도 좋지 않고 사람됨도 썩 좋지만은 않은 작자들 수십이 모였다. 임 당수와 그 무서운 야인 마병들이 떡하니 감영 주변을 지키고 있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우격다짐이 터져나왔으리라.
거기에, 이번 일이 어떻게 풀리든 저들 삶에 막대한 영향이 있을 수밖에 없는 고로 일대의 백성들 역시 삼삼오오 충주목 읍내에 찾아왔다.
그 북적이는 모양새를 보며, 니탕카이 아래에 얼마 전 들어왔다가 좋은 구경을 하게 된 유르보리(栗甫里)가 말했다.
“몽고 사람들은 저들 칸도 이렇게 뽑는답니다.”
“네놈이 그걸 어찌 아느냐?”
팔짱 끼고 함께 구경하던 꺽정이가 물었다.
“일전에 예허(葉赫)부 사람 하나가 종성부까지 와서는 요동에서 노략질한 물건을 몰래 팔고 간 일이 있었는데, 그때 같이 술 한 잔 하다가 들었습죠. 모임 이름이 몽고 말로 쿠릴타이인가 구루다이인가 아마 그랬을 겁니다.”
“거 이름도 퍽 구리다.”
멀리 북쪽의 알탄 칸이 듣는다면 어디 이런 누추한 모임을 감히 위대한 쿠릴타이에 비유하느냐며 격분할 만한 대화였다.
“그런데 요동에서 노략질한 것을 종성에서 판다고?”
“스님들도 말씀하시기를 세상사 돌고 돈다고 하지 않습니까. 조선에서 들여온 은으로 요동총병 나리는 군마와 병기를 사고, 화살 아니면 뇌물을 바쳐서 그것을 여진 사람들이 챙기고, 그것이 도로 조선으로 돌아오기도 하는 것이지요.”
“너희도 꽤나 복잡하게 사는구나.”
“요새 요동을 오가는 재보가 제법 늘지 않았습니까. 재보가 흐르게 되면 거기에 기대어 사는 사람도 생기기 마련이지요.”
그렇게 시시한 세상 이야기가 오간 지 얼마나 되었을까. 이지함이 감영 안쪽에서 걸어나왔다.
“다들 불만은 그득하지만 아직까진 별 탈 없이 이야기들 나누고 있더구나. 고성 몇 번 오간 것 빼고는 다툼은 없었다.”
의권의 논변을 창안한 사람 스승이 나와서, 전답을 아예 나누어주지 않는 것도, 막무가내로 모조리 빼앗는 것도 이치에 닿지 않는다고 차근차근 말하니, 그 뒤에 있는 꺽정이가 무서워서라도 모두들 말을 들었다.
그렇게 운을 뗀 뒤, 한전법을 비롯하여 여러 방안이 있으니, 고을 대표하여 나온 이들끼리 한 번 심사숙고들 해보라 하고서 이렇게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뭐, 좀 드잡이질하며 싸우는 정도까진 괜찮을 게요.”
“다만 쉽게 합의를 할 듯하지는 않다. 반상을 막론하고 독기가 가득하더구나.”
“저들끼리 저 안에서 선 지키며 싸운다면야, 우리가 알 바는 아니지 않겠소.”
일대 고을 중 가장 큰 충주목의 사족들은 그 뿌리가 뽑혀버렸고, 더구나 상민들은 땅을 어떻게든 뜯어내겠다는 일념으로 뭉쳐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렇게까지 사족들에게 유리한 판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지함이 경자유전에 일리가 있다 하면서도, 무작정 땅을 빼앗는 것은 불가하다 못을 박아두었으므로, 상놈들 위하여 나왔다고 주장하는 향리와 부농들 역시 사정 여의치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결론이 나든, 감영 안에 모여든 이들 사이에서도, 은근슬쩍 담장 너머로 고개 내밀고 귀 기울이는 저 백성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나올 것이다.
“사형이 나보다 더 잘 알겠지만, 잃는 자는 잃었다고 불만을 품고, 얻는 자는 족히 얻지 못하였다고 불만 품을 수밖에 없소. 우리는 판만 깔고 저들끼리 싸우게 하는 게 원한 안 사는 상책이지.
그리고...”
“그리고?”
“아니, 이 일은 나중에 다시 말씀드리겠소. 남들 귀 없는 데서.”
저의 머릿속에서 튀어나오는 대로 말하곤 하는 꺽정이가 웬일로 자제를 하니, 이지함은 언뜻 궁금하기도 하면서 불안해지기도 했다.
“요는, 오늘 여기서 결판을 못 짓고 끝내 일을 더 키우게 되는 것이 우리에게 더 이득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 생각하고 있었소.”
“어찌 그렇더냐?”
“한 번 들어보시오...”
사실 무슨 제대로 된 계책은 아니고, 꺽정이의 장기(長技)라 할 수 있는 남의 공들인 계책에 훼방 놓는 데서 비롯한 어설픈 꾀였다.
허나 이지함은 그런 어설픈 말도 능히 들어줄 수 있는 귀와 그것을 그럴듯하게 꾸며줄 수 있는 머리가 있었다.
둘이 막 작당을 마치던 무렵, 안쪽에서 싸움 소리가 들려왔다.
터질 것이 기어이 터졌구나 싶어 두 사람이 후다닥 달려가서 보니, 합의가 안 되어서 싸우는 게 아니라, 합의가 너무 빨리 되는 바람에 싸움이 붙은 것이었다.
“그대는 저 상한(常漢)들과 한통속이로다! 선비가 되어서 그토록 부화뇌동을 하니, 실로 위군자(僞君子) 아니더냐!”
“고루하기가 이를 데 없소이다! 이미 중론(衆論)의 추이가 명백하거늘 어찌 이제 와서 말을 돌리려 하시오?”
“야, 이 상놈의 자식아! 아예 간이고 쓸개고 다 팔아먹지 그러느냐? 저기 남 생원이 어디 제 딸내미라도 첩으로 준다 하더냐?”
“뭐라? 너야말로 배알도 없는 아전의 자식이 뭔 농사일을 안다고 설치느냐? 보자보자 하니까...”
충주 사람들로서는, 이미 몇 해 동안 잘 일구고 있던 저의 논밭만 안 빼앗기면 그만이었다. 그리하여 그나마 사족들이 받아들일 만한 안에 곧장 찬동하고 나섰다.
사족들 역시 올해 향전이 걱정되기도 하고, 또 몇몇은 이미 향약이며 사창이며 사족들끼리 뭉쳐서 일을 벌일 무렵 저의 농장을 처분하고 다른 수익나는 일에 슬슬 손을 대고 있었다.
그리하여 반상 합쳐서 대략 절반가량이 선뜻 합의하기를, 삼십 결(結) 이상의 전답은 즉시 처분하되, 그 값은 장차 삼십 년 동안 마치 전호(佃戶, 소작농)가 전주(田主)에게 바치는 것처럼 차근차근 갚도록 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삼십 결이면 농장을 완전히 쪼개서 나누어준다는 데서 한참 못 미치는 것이요, 반대로 제대로 농장 꾸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넓이였다.
“이보시오들! 다들 진정하시오! 체통을 지키시란 말이오!”
유눌이 애써 수습하려 목청을 높였으나, 마치 흘러가는 강물에 두레박 하나 쏟아부은 것처럼 하등 효험이 없었다.
“체통은 빌어먹을 놈의 체통! 그래, 나 상놈이다! 어디 상놈 돌주먹 맛 좀 봐라!”
그러나 갑자기 좌중이 조용해졌는데, 눈치없이 언성 높이던 이들도 그제야 정신 차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임 당수와 이지함이 서서 구경을 하고 있던 것이었다. 미간 찌푸리는 이지함과 달리 꺽정이는 싱글생글 웃고 있었는데, 그로 인하여 오히려 이지함보다 더욱 무서워 보였다.
“아, 난 신경들 쓰지 말고 하던 것 마저 하시오. 잘들 싸우고 계셨소.”
“...”
“보아하니 여기서 오가는 말이 영 마음에들 안 드는 모양인데, 정 아쉬움이 남는다면 다른 데서 사람 더 구해와도 좋소.”
“사람을 더 구해온다 하시면...”
“임 당수 말씀이 옳소이다! 충청도에 딸린 고을이 어디 한둘이오? 우리 호서 사림의 공론을 한데 모아 정론(正論)을 펼쳐야 할 것이오!”
“그래, 맞다! 너희 충주 상것들은 줏대없는 놈들이라 금방 꼬리를 내렸지만, 이 충청도에 바늘 꽂을 땅 한 뼘 없이 고생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느냐? 임 당수! 우리도 그 말에 따르겠소!”
과연 저의 뜻대로 되는 모양새라, 꺽정이가 또 한 번 헤벌쭉 웃었다. 또 한 차례 시끄럽게 떠들려던 자들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절로 입을 다물었다.
“우리 민주당은 백성의 뜻을 받들어 좋은 정사 이루는 데 뜻이 있소. 이곳 충청도는 물론이요, 전국에서 사람 다 끌어와서 이야기 나눈다 한들 우리로선 반대할 연유가 없으니 그리들 아시오.”
의미심장한 말 한 마디 던지고 꺽정이가 휙 돌아섰다.
그 뒤로 또 다시 언쟁 소리가 크게 일어나고, 멀찌감치 내아(內衙)에서 전전긍긍하던 관찰사 이정(李楨)은 하늘을 원망하였다.
그렇게 또 하루 시끄러운 날이 지나가고, 밤이 돌아왔다.
오늘도 보람차게 보냈다면서, 백정여진 패거리들은 저의 집처럼 병영으로 돌아가 놀자판을 벌였다. 당연히 말먹이며 사람 먹이며 모두 충주진(忠州鎭) 병영의 재정으로 대는 것이었다.
그러나 꺽정이로서는 민주당 곳간에서만 그 비용이 나가지 않으면 만사형통이었다. 별 걱정 없이 이지함과 함께 모산수 이정랑의 집으로 향하던 중, 일전의 그 익숙한 두렁길 중간에 턱 멈추었다.
“아주 이 자리에 세를 내든가 하거라.”
“혹시 아오? 나중에 우리 모두 대성(大成)하면 여기에 아예 울타리 치고 이지함과 임꺽정 두 분 선생 노니시던 자리라고 표식할 지도.”
“지금 너와 내가 이렇게만 살아도 조정 사람들 근심이 끊이지 않을 텐데, 여기서 더 대성을 하면 어찌 되겠느냐.”
이지함이 농을 농으로 받으며 곁에 털썩 앉았다.
“그래, 하려던 말이 무엇이냐?”
“두리손 말이오. 뭘 노렸을 것 같소?”
“그야 우리가 이 싸움판에 휘말려들어 어떻게든 곤란해질 것을 노리지 않았겠느냐?”
“글쎄? 오히려 그놈은 우리가 무작정 백성들 편을 들면서 사족들을 때려잡으리라 생각하고 일을 벌였을 듯하오.”
“그래서?”
“이건 그냥 문득 든 생각인데... 왜, 난세에 영웅 난다고 하지 않소. 두리손이 노리는 것은 그 난세를 도로 일으키는 데 있지 않을까 싶소. 우리를 부추겨서 더 분탕질을 치게 하고, 참다못한 양반님네들도 우르르 일어나게 하고, 둘 사이 싸움 부추기는 것이지.”
두리손 그놈이야 (아마도) 염라대왕에게 무슨 내기빚을 지지는 않았겠지만, 대신 어떻게든 위로 올라가고자 하는 사무친 마음만은 그대로일 테니, 판돈을 키워야 한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꺽정이 저와 묘하게 닮은꼴인 셈이었다.
“나라면 그랬을 게요. 스승님 못 만나고 사형도 못 만났는데, 막상 이 나라는 윤원형도 없고 그냥 태평성대였다면, 그렇게 싸움 부추기면서 불장난이라도 한 판 거하게 벌여야 했겠지.”
반신반의하는 눈치의 이지함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꺽정이가 말을 덧붙였다.
“네 말이 맞다 치자.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게냐?”
“그 놀음에 어울려주면 어떻겠소? 저 감영에서 떠들던 놈들더러 이왕이면 전국 만백성을 모조리 끌어들이라 했던 것처럼.
그놈이 또 비슷하게 분탕질을 할 것 같으면, 우리는 그 옆에 가서 기름을 끼얹고, 다만 불길이 우리 쪽으로 오지는 않게, 또 애먼 사람이 너무 많이 죽지는 않게 관리만 하는 게지.”
“그렇게 해서 무엇을 얻고자 하느냐? 아무리 너라지만, 그저 위세 얻고자 이 나라를 더 어지럽게 하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다.”
이지함 눈매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가늘어지고, 미간에는 주름이 잡혔다.
“천하의 이치를 바꾸고 싶소.”
“무어라?”
“이제 윤원형도, 왕직도, 엄숭도 모두 죽었지 않소. 하지만 나는 여기서 멈출 생각은 없소. 뭔가 더 훔쳐내고, 뜯어내고, 난리를 일으켜야 직성이 풀릴 듯하오.”
오랫동안 속에 품었던 저의 생각, 왕직과 함께 천자를 발밑에 두었을 때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던 생각이었다.
분명 이이를 이지함 앞에 데려왔을 때 꺽정이는 그렇게 말했다. 저보다 못한 놈들이 머리 위에서 거들먹대는 꼬라지는 보기 싫다고.
그리고 전생에 비할 수 없이 견문을 넓게 쌓은 꺽정이 눈에, 사람의 잘나고 못난 것과 그 사람이 귀하고 천한 것은 별반 관련이 없어 보였다.
“우리 임금은 성품은 모난 데 없이 착하긴 한데, 솔직히 말해 줏대도 없고 못난 사람이오. 천자란 작자는 내가 보니까 제 사지도 제대로 못 가누는 하찮은 놈이고.
그런 것들이 만백성의 어버이라면, 그 백성들의 진짜 부모들은 얼마나 서럽겠소?”
이지함 입이 간만에 떡 벌어졌다.
“꺽정아...”
“이 나라에 임금이 있는 이유는 천명이라는 것을 받았기 때문이라지. 그 천명을 훔쳐낸 다음 갈기갈기 찢어서 만백성에게 골고루 나누어준다면 꽤 그럴듯한 도둑질이 되지 않겠소?”
꺽정이도 이번 생에서 사서(史書)의 내용은 얼추 배웠다.
항우, 성길사한(징기스 칸), 석숭, 주원장. 그놈들조차 하지 못한 일을 해내려면, 지금껏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하였던 그만한 일, 온 천하의 근심이 될 법한 일을 질러버려야 할 테다.
“이이 녀석이 일전에 권점 고안하면서 했던 말이 있었지. 임금이라고 권점으로 뽑지 못할 것은 무엇이냐고. 그놈이 꼭 이런 말을 한 건 아니지만, 내 귀엔 그리 들렸소. 그런데 그 뒤에 곧장 당장 범궐하여 임금을 내쫓자는 말은 아니라고 하니, 솔직히 좀 아쉽더이다.”
“설마, 저 전정공회의 일을 전국에 널리 퍼뜨리자는 것도 그것 때문이었느냐?”
이지함이 간신히 물었다.
조정이 정하여 시행하고 또 마음대로 고치는 그런 법이 아니라, 반상 모두가 죽어라 싸우고 우격다짐한 끝에, 서로 묵사발 된 채 겨우 합의하여 만드는 법.
농장은 속절없이 늘어나고 백성은 하나둘씩 전호로 떨어지는 이 일을 지금껏 나라에서는 막지 못하였는데, 백성의 손으로 이를 뜯어고치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어떻게든 한 번 전례가 남으면 그 뒤로도 이어질 수밖에 없을 테다. 만약 제대로 성공만 한다면.
“거기까지 생각하고 내지른 일은 아니었소. 내 말했지 않소? 두리손 그놈의 뜻대로 놀아나지 않기 위해 떠올렸을 뿐이오. 뭔 깊은 뜻이 있다고 보아주시니 고맙긴 하지만.”
묵혀둔 것을 털어놓으니 어째 가슴이 가벼워진 느낌이 드는 꺽정이였다. 반면 이지함은 영 어지러운지, 뒤로 넘어가는 몸을 겨우 팔 뻗어 지탱하였다.
“사형이 정 하지 말라고 하면 다른 길을 찾기는 하겠소. 하지만 내 생각에, 어영부영 기다리다가 두리손이든 다른 못된 놈이든 농간 부려서 사람 여럿 다치게 하는 것보다는, 적어도 우리가 선수를 쳐서 먼저 내달려가는 쪽이 서로 좋을 듯하오.
사형도 생각해보시오. 우리가 기껏 통의부니 중추부니 만들어냈지만, 정말로 나라의 제도가 크게 바뀐 게 얼마나 되오? 우리가 없는 동안 언제든지 조정에서 바꾸기로 마음을 먹으면, 하룻밤사이에 무위로 돌릴 수도 있는 것 아니오?”
“그러니 바꾸려 한들 도저히 바꿀 수 없도록, 민주당으로 그칠 게 아니라 아예 나라의 제도를 뜯어고쳐버리자...”
그때 이 자리에서 이지함은 꺽정이와 함께, 나라를 고치기 위해 역적 노릇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지금, 이지함은 도저히 역적이라고도 할 수 없는, 무어라 형언해야 할지 아직 감조차 잡히지 않는 허황되고 무모한 짓을 위해 힘 빌려달라는 말을 꺽정이로부터 듣고 있었다.
“우선 이번 전정공회의 일이 뒤집히거나 옆으로 새지 않도록 하는 데 힘을 쏟자꾸나. 그 뒤의 일은... 내게 생각할 시일을 다오.”
그러나 이미 자신은 확답을 해준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지함 본인이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꺽정이가 지금껏 해온 일 하나하나. 지엄한 국법과 관헌의 권위를 무시하고 저의 뜻대로 사람 모아 엉망진창으로 새 제도를 세우는 일.
이 모든 일이 이미 지금 꺽정이가 말하는 그 원대하고 허황된 길을 향해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전정공회도 마찬가지였다.
며칠 지나지 않아 충주에서 외지 오가는 이들이 크게 늘어났다. 누구는 사람이 직접 가고, 누구는 인편에 서한만 얹어서 보냈다.
그 덕에 곧 도성에서도 충주에서 벌어진 일을 훤히 알게 되었다.
관찰사 이정이 저는 아무 잘못이 없고, 만에 하나 잘못이 있다면 임꺽정이라는 놈과 같은 하늘 이고 사는 죄밖에 없다고 구구절절 적은 글이 먼저 도성으로 올라갔고, 이어서 충청도의 사족들이 도성 사는 저의 친족들에게 돌리는 글이 올라갔다.
이약빙의 육촌 아우 되는 이준경과 이윤경 형제에게도, 충주의 살아남은 사족들 몇몇이 하소연하는 서한이 빗발쳤다.
임꺽정은 대체 왜 이렇게 저를 곤란케 하는 일만 골라서 하는가. 이준경은 그저 고소(苦笑) 삼킬 따름이었다.
거의 일백에 달하는 여진족과 여진족 시늉하는 백정들이 충주 일대를 들쑤시고 다니는 일만 하여도 수습하기가 곤란한 판인데, 어쨌든 이준경은 조정의 사람이므로 뒷수습을 아니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제 무슨 공회를 열 것인데 충청도 한 고을로는 부족하니 적어도 기호(畿湖) 사림은 뜻을 모아야 할 것이라며 도움을 청하는 글이 올라오기에 이르렀다.
차라리 윤원형 있을 때가 속은 편하지 않았는가, 기억 속 깊숙한 곳의 옛일일수록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치를 직접 경험하는 이준경이었다.
“그래도 아우님이 조정의 가운데를 지켜주니, 나라의 공론이 화를 걱정하지 않고 이렇게 일어나는 것 아니겠는가.”
이윤경이 위로라고 건네는 말이 썩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그때 익숙한 인영이 마당을 어기적어기적 걷는 모양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고, 두 분 어르신께서 한 곳에 계시는구려. 잘 되었소.”
화근 임꺽정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통상 이맘쯤이면, 어떻게 들어왔느냐 물으면서, 예의는 어디에 두었느냐 호통을 쳐야 하겠지만, 둘 다 소용없으니 관두겠네.”
“역시 숭덕재(이윤경) 어르신이시오.
그 전정공회 얘기를 들으셨으리라 믿소. 이 모임을 장차 도성에서 열었으면 어떨까 싶어서 청하러 왔소이다. 아, 그리고 한 가지 청이 더 있는데...”
“자네는 참 얼굴도 두꺼우이.”
“부모님께서 훌륭한 몸에 훌륭한 낮짝까지 물려주셔서 그렇소. 좌우지간 청이 하나 더 있는데... 그렇게 사람을 전국에서 모으면 말이오, 아무래도 누가 나서서 관리를 좀 해야 하지 않겠소? 안 그러면 숫제 중구난방이 되어버릴 테니.”
이지함이 끝내 이 전정공회 일을 위하여 내어준 계책을 스리슬쩍 꺼내는 꺽정이었다.
“혹시 두 분 대감께서는, 붕당을 만들어보실 생각이 있으시오? 이 나라에 우리 민주당만 있으면 재미가 없지 않소.”
“...”
“이제 와서 못 들은 것으로 할 테니 얼른 나가라고 한들 소용은 없겠지?”
“역시 숭덕재 어르신이시오.”
형과 아우의 한숨이 동시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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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언급한 것처럼, 니탕카이(니탕개), 유르보리(율보리) 등 여진 인명의 재구는 『조선왕조실록』 등에 언급되는 다른 여진족 인명을 참고하여 작가가 창작한 것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세종장헌대왕실록 DB, “몽골, 여진(만주) 인명” 참고). 행여 만주어에 능통하신 독자님이 계신다면 언제든 조언해주시기를 청합니다.
율보리는 실존인물로, 종성 근방에서 큰 세력을 이끄는 추장이었습니다. 니탕개의 난 당시 니탕개와 더불어 변란을 일으켰지요.
그가 언급하는 예허부는 해서여진의 일파로, 본디 몽골의 투메드부 사람 싱언 다르한이 여진의 나라 씨족을 정복하고 예허 강가로 이주하여 창건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부침은 있었으나 대체로 강성한 세력을 유지하였고, 몽골과도 교류를 이어갔습니다.
예허부는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을 상대로 끝까지 버틴 마지막 여진 세력이기도 했는데, 사르후 전투에서도 조명연합군의 편에서 참전한 바 있습니다. 그 세력이 워낙 컸기 때문에 누르하치도 예허부를 정복한 뒤 노예로 삼거나 산산히 흩어버리는 대신 그대로 팔기의 일원으로 편입시켰습니다. 예허를 통치하던 예허나라 씨족도 그대로 후금의 귀족이 되었으며, 대대로 아이신교로 황실과 통혼하며 큰 위세를 누렸지요. 서태후로 더 잘 알려진 자희태후 예허나라씨도 그중 한 사람입니다.
지방 군현의 행정에 있어 공론정치의 형태가 나타나는 것은 원 역사의 조선에서도 나타났던 흐름입니다. 향회는 단순히 사족들의 결속만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향리의 임면권을 행사하거나 조세제도의 실무(예컨대, 구체적인 세액의 결정이나 각종 부역의 부과 등)를 담당하면서 때로는 수령보다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지요. 사족들의 향촌 지배가 조선 후기에 들어와 흔들리면서 촉발된 향전은, 단순히 사회적 지위를 위한 다툼을 넘어, 이러한 향회의 주도권을 얻기 위한 정치적 투쟁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조선의 전통적인 토지 측량 단위는 크게 두락(마지기)과 결부법(結負法)으로 나뉘는데, 이중 결부법은 수세(收稅)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통상 1두락은 논밭의 비옥함에 따라 200~300평 정도였고, 반면 1결은 본디 절대적인 기준(33보×33보)이 존재하기는 하였으나 실제로는 유동적이었습니다. 즉 면적이 미리 정해진 단위가 아니라, 일정량의 세금을 부과하는 단위로서 생산량에 따라 결정되었던 것이지요.
조선 중기에는 통상 8결 정도가 이상적인 자작농 1호(戶)의 경작지로 간주되었고, 실제로 부역을 책정할 때도 8결당 1호의 원칙이 통용되었습니다 (김건태(2019), “결부제의 사적 추이” <대동문화연구> 108). 작중 언급된 30결 기준 한전법은 정조 연간에 실제로 건의된 바 있으나 시행되지는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