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102화 (102/259)

32. 교각살우 (4)

가을걷이도 끝났으니 사람들은 대개 한가하고, 그저 다가오는 겨울철에 또 한바탕 싸움 붙을 것을 걱정(또는 기대)하고만 있었다.

그러다 보니 충주에서 전답의 폐단 고치는 것을 두고 널리 논의한다는 소식이 나오자마자, 경기 일원은 물론이요 삼남 곳곳까지 금방 소문이 퍼졌다.

조선에 태어나 이밥을 먹는 자라면 전답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법이므로, 소문이 아니 퍼진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일 테다.

이준경은 이언적과 이황 등 몇몇 사람을 초빙하여 조용히 대책을 논하려 했으나, 시국이 이러하니 ‘조용히’는 가당치도 않은 말이었다.

“종일토록 도성 소식 묻는 서한이 끊이지 않고 전해오니, 사류(士類)의 마음이 시류에 흔들림이 이와 같소이다.”

진작에 고향의 전답은 모두 처분하였으므로, 이 자리 모인 선비들 중 유일하게 홀가분한 몸이었던 조식이 말했다.

“이미 여러 고을에서 뽑은 이들이 하나둘씩 상경하고 있으니, 그들이 모두 올라오면 서한 받아볼 일도 줄어들지 않겠소?”

그 서한에 쓰이는 종이 장사-『정론보』 때문에 시작한 장사였다-로 제법 짭짤한 수익을 거두고 있던 이황이 예사롭게 대꾸했다.

아직 전정공회에 대해 성상의 교지도, 조정의 방침도 딱히 정해진 바는 없었다. 그러나 공회가 정말로 열리게 된다면 반드시 도성에서 열릴 수밖에 없는 법.

기호(畿湖) 일대에서는 이미 사람들이 삼삼오오 올라오고 있었고, 멀리 경상도와 전라도에서도 일단 상경이나 하고 보자는 쪽으로 가닥 잡고서 먼길 출발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마시던 차를 내려놓고 이언적이 가볍게 헛기침하니, 이황과 조식 모두 안색과 말투를 진지하게 고쳤다. (사림 사람들은 우기기를, 그들이 차를 즐기는 것은 사림의 종주 점필재(김종직)의 가르침 받드는 것일 뿐으로, 민주당이나 봉은사의 병해 선사와는 전혀 무관하다 하였다.)

“동고 대감께서 우리를 모으신 까닭은, 이 전정공회의 일과 붕당을 만드는 일에 관하여 중지(衆智) 모으고자 하심이겠지요.”

“그렇소이다.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니, 여기서 우리가 마음을 정하면 곧 전국의 사족들 역시 자연스럽게 전해듣게 될 듯하구려.”

“이제라도 상께 진언하여, 장차 전정의 폐단을 이정(釐整)할 것인즉 그 전정공회라는 모임은 스스로 파하도록 하라는 윤음을 내리시도록 청할 수는 없겠는가?”

지그시 눈 감고 있던 이언적이 제의하였다.

“전정의 폐단이라 말은 하지만, 애초에 폐단이랄 것이 없었으니 고칠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변법 외에는 길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언적이 아니라 공맹이 살아 돌아와도 곧장 들이받았을 성품의 조식이 바로 반박하였다.

사족들이 농장을 꾸리고 이로써 문중을 이어나갈 기반으로 삼는 것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었다.

아성(亞聖) 맹자께서 백성의 항산(恒産)을 말씀하시고, 옛 주나라의 정전제를 말씀하신 것을 모두 마음속에 새기고는 있었다.

그러나 국법으로 농장을 금한 것도 아니요, 오히려 조정의 풍파 속에서도 문중이 버틸 수 있게끔 하는 터전이 바로 농장이었으므로, 경전은 경전이요 삶은 삶이라 여기고서 눈길을 돌리곤 하였다.

눈앞의 조식처럼, 성품은 불과 같고 또 그런 성품에도 불구하고 어디 가서 봉변하지 않을 만큼의 재주가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백성을 위하여 저의 농장을 처분하겠노라 나서는 이가 드물 터였다.

“임거정이 말한 붕당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우선 이를 확실히 하여야 우리가 가히 대책을 논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준경이 나서서, 임거정에게 들은 두서없는 말을 나름대로 정리하여 설명해주었다.

“대저 사람이 모이면 마음이 갈리고, 한 사람이 ‘이렇다’ 말하면 다른 사람은 ‘저렇다’ 하기 마련.

자칫 전국에서 사람이 모여들면 아무런 소득 없이 난장판으로 끝날 수도 있으니, 미리 마음 맞는 이들끼리 모여 당을 이루고, 다툼이 다툼으로만 끝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라 하였다네.”

당이 이루어지고, 그에 맞추어 사람과 여론이 갈리게 되면, 다툼이 지리멸렬한 논쟁을 벗어나 실속 있는 논의로 이어지게끔 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임거정이 말하지 않은 것, 그리고 이준경과 다른 사림 사람들이 능히 짐작할 수 있던 것도 있었다. 그렇게 당을 나누게 되면 스스로 다툼을 그치고 화합하는 것 역시 어려워지리라는 점이었다.

“지금까지 임 당수가 행한 일을 돌이켜보면, 모두 조정의 위엄을 훼손하고 국사(國事)의 가지런함을 흐트리는 데 있었소. 이번 전정공회 역시 겉으로는 폐단을 바로잡는데 뜻이 있다 하지만, 반드시 다른 꾀하는 바가 있을 것이오.”

“스승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지만...”

이황이 말꼬리를 흐렸다.

그 ‘다른 꾀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통의부와 중추부를 조정에서 떼어낸 것처럼, 이제 국법을 새로 세우고 폐하는 일까지 조정에서 떼어내겠다는 뜻일 테다.

이번 전정공회가 두 번 다시 열리지 않는다 한들 변하는 것은 별로 없었다. 이 나라 안에 전정(田政) 외에도 조정의 힘만으로 해소할 재간이 없는 문제는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면, 그때는 굳이 임거정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전정공회의 선례를 거론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나 그것이 과연 나쁘게만 볼 일인가? 모든 국사(國事)를 군주 한 사람, 그 곁의 외척과 폐행(嬖幸, 간신배)의 뜻대로 농단할 것이 아니라, 학문 이룬 이들의 공론을 널리 듣고 깊은 성려(聖慮) 끝에 조심스레 행해야 한다고 외쳐온 것은 바로 그들 사림 아니었는가?

‘통의부와 중추부가 있었더라면 지난날 사화(士禍)가 있었겠는가?’

누가 말하지 않아도 모든 이들의 머릿속에 감도는 자문(自問)이었다.

갑자년 사화로 조부(이세좌)와 부친을 잃고, 기묘년 사화로 벼슬을 한 차례 잃었으며, 을사년 사화로 수많은 선비가 죽어가는 것을 목도해야만 했던 이준경의 머릿속에서는 특히 무겁게 느껴지는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이미 충주에서의 일로 드러났듯 이 전정공회가 정녕 중론(衆論) 따르는 것으로 귀결된다면 한전법이 공론의 힘을 타고 국법으로 정해지게 될 터. 그 후과가 어찌 될지도 생각해주시게.”

그것을 읽은 이언적이 한 마디 덧붙이곤 입을 다물었다.

이황이나 조식처럼, 또 사임당 신씨의 집안처럼 시류를 잘 타고 집안의 부귀를 보전하거나 심지어 더욱 늘리는 집안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시류를 끝내 타지 못하고, 그저 전전긍긍하며 제자리에 머물다가 끝내 무너져내리는 집안도 있을 것이요, 근근이 버티면서 세상을 원망하는 문중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미 이 나라는 백성의 원한을 제때 다루지 못하여, 그 흐름을 저의 것으로 삼은 임거정의 손에 한 차례 뒤집혔다.

사족의 원한이 사무쳐, 겨우 겉으로나마 평안 되찾은 이 나라를 또 한바탕 뒤엎게 된다면 어찌할 것인가?

“그 점에 있어서도 마땅히 대비토록 하겠소이다.”

불평(不平)한 사족을 빌미로 임거정이 또 한 차례 난을 일으키든, 아니면 사족들 중 용렬한 자들이 끝내 불의를 택하든, 다음번 난리는 마땅히 사림의 손으로 해결해야 할 터였다.

그것을 위하여 군정(軍政)을 이미 크게 고치고 있었다. 각지 군영의 아병(牙兵)들은 제대로 된 군졸이 되고, 장부상으로만 있던 군량과 병기는 뒤늦게나마 실체를 갖추어나가고 있었다.

당장 이번에 임거정이 큰 폐만 남기고 온 충주 병영만 하더라도, 불과 두어 해 전에는 백여 마리 군마를 먹일 마초(馬草)조차 없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늙은이 또한 더 할 말은 없네. 당을 이룬다면 그 당명을 어찌할지, 그것만 정하면 되겠군.”

그런 사정까지 세세히 알지는 못하는 이언적이, 이준경과 그 형 윤경의 눈빛을 고루 살핀 뒤마침내 말하였다.

“그저 사림이나 유당(儒黨) 정도로 하여, 다름을 드러낼 수 있을 정도로 하면 족하지 않겠는가?”

이언적과 이준경 사이 오가는 의미심장한 눈빛에는 별 관심 없던 조식이 곧장 반박했다.

“허나 저들은 이미 의민당과 민주당이라는 이름을 드러냈지 않습니까? 그저 선비들의 모임이라고만 한다면, 우리가 무슨 대의를 표방하는지 알기 어려울 것입니다.”

두 사람이 운을 떼니 이황도 냉큼 생각을 드러냈다.

“민주당의 사업당과 임거정 그이의 집이 모두 이곳으로부터 동남쪽에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빗대어 우리 스스로 북인(北人)이나 서인(西人)이라 하는 것은 어떨는지요.”

허나 이준경 생각에 동서남북같은 별 뜻 없는 것으로 당의 이름을 정할 것 같으면 차라리 ‘유당’ 자처하는 쪽이 나을 듯하였다.

“이 사람이 살핀즉, 각지 군현의 선비들은 대개 그 고을 향회의 좌수(座首)이거나, 성암(省庵, 이지함의 형 이지번)과 같은 명유(名儒)들로서 모두 돈후(敦厚)한 덕이 있었소.

반면 상민들 대신 상경하는 이들은 대개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더이다. 그러니 우리 당이 더 배운 사람이자 더 연로한 사람으로서, 윽박지르고 겁박하는 대신 타이르고 가르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소?”

그러면서 ‘노론(老論)’이라는 이름을 슬쩍 제시하는 이윤경이었다.

그렇게 화제가 당명 정하는 데로 완전히 치우치게 되었으므로, 자연스레 임거정의 붕당 제의를 받을지에 대한 고심은 마음 뒤편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탕평당(蕩平黨)은 어떻습니까?”

입 근질거리는 것을 참지 못한 조식이 또 한 마디 던졌다.

“차라리 방원당(方圓黨, 모난 동그라미 당)이라 하지 그러는가? ”

이언적이 비꼬았다. <홍범(洪範)>에 이르기를 무편무당(無偏無黨)하면 왕도가 탕탕평평(蕩蕩平平)하게 된다 이르렀으니, ‘탕평’과 ‘당’이라는 말은 어울릴 수 없던 것이다.

허나 조식이 그것을 생각 못 했을 리 없었다.

“우리가 이 당을 만든다면, 그 까닭은 나라의 선비로서 오로지 성상의 정사가 왕도(王道)를 벗어나지 않게끔 힘쓰는데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껏 천하에 있던 당들은 대개 권세나 영예를 원하는 소인배의 모임이었으니, 당을 오래 이루어서 좋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홍범>의 그 말씀 취하는 것이 가당할 것입니다.”

대개 정답 없는 일을 두고 논쟁이 벌어지면, 목소리 크고 뻔뻔한 사람이 이기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좌중에서 조식은 그 두 가지를 모두 충족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삼사 언관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연명으로 상소하기를,

“무릇 전제(田制)의 올바름은 나라의 기틀과 다름없습니다. 중외(中外) 민심을 고루 받아들여, 전정공회를 널리 여소서.”

“산림의 유생과 백성 중의 현량한 자들이 스스로 뜻을 모아, 장차 국책으로 삼을 바를 헌책하고자 하니, 선대에도 없던 기특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였다.

마지막 난관은 근래 국정의 흐름에 불만 많은 심통원과 그의 무리였는데, 의외로 그들 또한 순순히 사림의 발의에 따랐다.

그리하여 조정이 일색(一色)으로 전정공회 여는 것을 허락해달라 청하니, 곧 그 상언을 받아들이겠노라 하는 윤음이 내려왔다.

이때까지 몇 달이 또 걸렸다. 해가 바뀌어 갑인년(1554)이 될 무렵에는 전국 모든 고을 사람들이 한양에 당도하였다.

북변 고을의 대표들은, 훌라온 4부 중 가장 가깝고 또 가장 만만한 호이파(輝發) 부의 부락을 치고 전리품 가득 챙긴 백정여진 사람들과 함께 상경하였다.

또한 제주도에서는 자유민주당의 복선(福船)을 빌려 타고 제주목과 대정·정의 세 고을 사람들이 상경하였다.

그렇게 올라오는 이들 중, 암만 보아도 사족은 아닌 티가 역력한 자들에게는 곧 민주당 사람들이 따라붙곤 했다.

그러고서는, 저의 당이 그 말에 힘을 실어줄 터인즉 당원으로 이름을 올림이 어떠하겠느냐 제의하곤 했다.

반면 그 모습에 눈쌀 찌푸리는 선비들은, 미리 서한 나누었던 다른 사림 사람들에게 가서는, 숙고 끝에 그 탕평당이 뜻을 이루고 해산할 때까지 함께하겠노라 밝히곤 했다.

한편, 민주당 사람들 몇몇은 뜻밖의 가족 상봉을 하게 되었다.

“형님께 어째 못할 짓을 한 것 같구나.”

전정공회 일로 올라온 선비들 여럿을 만나고 돌아온 이지함의 단평이었다.

이지함의 형 지번은 본디 보령의 사족들 가운데 명망이 으뜸이었는데, 민주당과 이지함의 명성이 올라가면서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그 명망이 더욱 올라갔다.

그러므로 보령의 양반과 상것들이 보기에, 이지번을 뽑아 올리지 않을 이유는 티끌만큼도 없고, 그를 뽑을 이유는 강가 모래알만큼 많았다.

“우리 형은 아우 덕에 또 감투 썼다고 어안 벙벙하면서도 좋아하긴 하던데.”

이지번과 같은 이치로, 제 이름 앞에 딸린 땅이라면 백정들 무덤으로 쓰려고 사놓은 녹양평 땅뙈기뿐인 가도치도 양주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 남양 홍문과 경씨 노인네도 덩달아 올라왔다 – 상경하게 되었다.

“내 가형께서는 우리가 의민당 하던 시절부터 고생이 많으셨다. 이미 금상 즉위하실 적에 조정의 어지러움을 보시고, 벼슬을 버리고서 낙향하셨는데, 이 아우 때문에 억지로 다시 속세의 일에 관여하게 되셨으니 어찌 죄송하지 않겠느냐.”

“그, 사형께 말씀드리긴 좀 조심스러운데, 이왕 죄송한 김에 조금 더 죄송스러움을 감내하셔도 되겠소?”

그만한 뻔뻔함에 탄복하기에는 이미 너무 오래 함께 붙어 있던 사형과 사제였다.

“무엇이냐?”

“어째 너무 순조로우니 조금 불안해서 말이오. 충주에서야, 우리가 일전에 벌여둔 일 때문에 충주 상것들이 켕기는 구석이 있어서 순순히 중론에 따랐지만, 이제 전국에서 이렇게 모여들었으니 그리 쉽게 말을 맞추진 못할 것 아니오?”

그 말대로였다. 상경한 자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은 그저 모임에서 엉뚱한 소리 – 즉 한전법을 포함하여 이미 보유한 논밭을 뱉어낼 만한 소지가 되는 모든 일 – 나오는 족족 훼방 놓을 생각만 품고 있었다.

“그래도 이 공회가 제법 인화(人和) 이루는 효험은 있다고 벌써 얘기들 하더라.”

“그렇소? 내가 알기로 벌써 드잡이질 하다가 포도청 신세 진 작자들만 열서넛은 된다 들었는데.”

회령 아전 국세필(鞠世弼)은 전주에 살다가 죄를 짓고 일가와 함께 회령으로 유배되었는데, 전주 사람들 중에는 아직도 이를 가는 자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놈이 뻔뻔하게 고개를 내밀고 도성에 찾아왔으므로, 전주 사람들은 죽일 놈을 죽일 놈이라고 알아보기만 하고 넘어가는 대신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이룩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 외에도 원수 집안 사람들끼리 마주쳐 다툰다던가, 남의 흉을 보다가 싸움이 붙는다던가, 우리는 저렇게 싸우지 말고 배운 사람들답게 품격 있는 언쟁 벌이자고 했다가 태껸 품새를 견주게 된다던가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그렇긴 하지만, 이렇게 저들 중 시끄러운 자들이 모두 한양으로 왔으니, 그 고향에서는 올 겨울 향전은 없으니 평소처럼 석전이며 쥐불놀이며 하기로들 했다더라.”

향전이든 석전이든 아이 머리통만한 돌멩이가 날아다니는 것은 똑같지만, 맞고 죽으라고 던지는 것과 맞고서 죽지는 말라며 던지는 것은 엄연히 달랐다.

“뭐, 네 생각은 얼추 알겠다. 우리 가형께서 졸지에 민주당과 저 ‘탕평당’ 양쪽에 모두 연을 두게 되셨으니, 한 번 말씀드려 보겠다.”

지금이야 웬일로 딴지 거는 자가 없어, 이렇게 순순히 천 명 약간 안 되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을 조정이 방치하고 있다지만, 아무런 성과 없이 우격다짐만 이어지면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꺽정이 생각은, 우선 ‘우리 이렇게 일하고 있노라’ 하는 티를 낼 수 있도록 최소한 합의볼 수 있는 사항만 먼저 도출하자는 것이었다.

아직 날이 추워 아무 벌판에서나 모일 수는 없고, 그렇다고 궁궐이나 육조거리를 잡인과 선비 섞인 무리에게 내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전정공회 모이기에 마땅한 곳은 널찍한 마당이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는 흑의영 한 군데뿐이었다.

탕평당과 민주당 양측으로부터 공회의 좌수로 추대된 이지번이, ‘누가 그러더라’ 하면서 꺽정이와 이지함의 말을 전하니, 다들 수긍하였다.

애초에 선을 지켜가며 싸움박질하라는 뜻으로 소집한 모임이었으니, 그 선 긋자는 논의에 대해서는 굳이 반발할 이유까지는 없었던 것이었다.

때마침 임금마저 재밌는 구경 났다면서, 모일(某日) 흑의영으로 거둥하겠노라는 뜻을 전해왔다. (성심(聖心)이 순수하게 구경하는 데만 있다는 것은 중전도, 심통원도 모르고 오직 내시 몇몇만 알고 있었다.)

그 장엄하다면 장엄하고 엉망진창이라면 엉망진창인 모임 가운데서, 마침내 이지번 이하 공회 회임(會任) 구백여 명이 연명한 상소가 임금 앞으로 전해졌다.

“신 지번 등은 이와 같이 엎드려 상소하옵나이다.

하해와 같은 성은을 입어, 궁벽한 촌로와 고루한 선비까지 모두가 품은바 뜻을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에 전정(田政)에 관하여 부족한 배움과 좁은 식견을 모아 청원드리옵나이다.

백성의 기한(飢寒, 빈곤)은 전토(田土)가 불균(不均, 고르지 못함)한 데서 비롯되니, 인자한 정사를 이루는 데는 균전(均田)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열성조께서 대대로 기업(基業)을 이어오시며 널리 성덕을 베푸셨는데, 균전은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겸병(兼幷)의 폐단은 심해져만 갑니다.

신 등이 엎드려 생각건대, 이는 재산의 가운데 오직 토지만이 확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농가에서 행여 농사의 이로움을 얻게 되면, 이를 바탕으로 학교를 세우거나 다른 백성을 돕는 대신 곤궁한 이웃의 전답을 사들이는 데 매진합니다.

이것은 백성이 불인(不仁)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조정에서 작은 풍파가 일어날 때마다 구풍(颶風, 태풍)이 되어 백성을 덮치니, 곡식을 쌓아두면 반드시 빼앗기고, 남을 위하여 내어주면 오히려 그것이 빌미 되어 핍박을 당하며, 설령 사족일지라도 문명(文名)과 관록(官祿)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권세 있는 자들은 그 권세가 있을 때 속히 백성을 괴롭혀 농장을 만들기를 꾀하고, 서민들 또한 이를 알기에 사족을 원수와 같이 여깁니다.

바라옵건대 성상께서는 윤음을 내리시어, 국인(國人)의 지닌바 재산은 응당 누려야 할 의권(義權)으로서, 종류를 막론하고 모두 그 사람만의 것이니, 지엄한 국법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음을 중외와 상하(上下)에 하유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그 국법이 조변석개(朝變夕改)하여 백성이 놀라고 서로 의심하는 폐해가 없도록, 공론을 거치지 않고 재산에 관한 국법이 바뀌지 않을 것임을 만세의 법도로 정하여 주시옵소서.

이 두 가지 뜻이 널리 반포되어, 가장 번화한 경사(京師)부터 가장 궁벽한 원악지방(遠惡地方)까지 성덕(聖德)이 퍼진다면, 비로소 전정의 폐단은 눈 녹은 듯 사라지고 삼대(三代)의 아름다움이 그리 멀지 않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윽고 임금이 지극한 덕을 베풀어 이른바 갑인대훈(甲寅大訓)을 내리니, 그 내용은 이지번 등이 상소한 바에서 몇몇 글자를 고쳤을 뿐 그 대강은 그대로였다.

심지어 ‘의권’이라는 두 글자마저 그대로 썼으므로, 졸지에 이이 또한 크나큰 성덕을 입은 것과 다름없게 되었다.

“이게 무엇인가? 응? 이게 무엇이냐고!”

수락산 산장에 찾아온 이량이 문짝을 걷어차며 외쳤다.

“뭐가 말이오.”

두리손이 시큰둥하게 받았다.

“저 대훈(大訓) 말일세! 지존을 능멸하는 말을 성상 스스로 윤음으로 내리시게끔 하였지 않은가!”

“그것이 지존을 능멸하는 것임을, 그 머리로 용케도 알아보셨구려.”

“말 똑바로 하게. 참아주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거 신기하군. 나도 마찬가지인데.”

바람이 휙 부는 듯하더니, 뭔가가 툭 떨어졌다.

“그 무슨... 어?”

머리가 시원해졌다 싶더라니, 갓이 두 동강 난 채 양쪽 어깨 타고 떨어졌다. 상투는 멀쩡하고 얼굴에도 흉터 하나 남지 않게 저리 베었으니, 여간 칼솜씨가 아니었다.

“이제 우리는 한 배를 탄 사이다. 뱃사공은 천한 몸이니, 어찌 귀하신 네놈이 그런 일을 맡게 할쏘냐?”

“...”

“그 무본사 모임에 재밌는 사람들이 많이 오가더군. 덕흥군 그자는 술이 조금 들어가더니 못 하는 말이 없던데... 내 아비가 살아 있던 시절에는 능히 옥사를 대여섯 번은 일으킬 수 있을 법한 말을 하더군.

내가 갑자기 사직에 대한 죄를 깨닫고, 이를 갚기 위해 고변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

칼날을 거두지 않은 채 두리손이 웃으며 말했다.

“아마 심통원 그자에게 찾아가서 한 소리 듣고 온 것이겠지? 다음에 찾아가면 이렇게 전해주거라. 모든 것이 뜻대로 되고 있다고.”

“그 무슨 말이냐... 말이오?”

이량이 절로 말투를 고쳤다. 칼이 무서워서가 아니요, 두리손의 눈빛에 위압되었기 때문이었다.

“지존의 위엄을 능멸하는 말이 어디서 나왔느냐? 이제 그 상대를 뻔히 알 수 있게 되었으니, 나중에 트집 잡을 때 누구를 죄 주어야 할지도 명백하게 되었다.

또한, 지금이야 저 공회가 화기애애하게 돌아가는 성싶지만, 시일이 흐르고 이야기가 오갈수록 다툼이 다시 생길 수밖에 없다. 거기서 밀려난 자들, 그리고 공회에서 나온 말로 인하여 가산을 잃는 자들을 근왕(勤王) 기치 아래 모을 수 있는 것이지.”

아직 두리손에게는 심통원과 이량이 필요했다. 그들을 내세워 벌여야 할 일도 많았고, 이준경이 만일에 대비하여 여기저기 키우고 있는 군사들을 낚아챌 방편도 그들을 통해 마련하여야 할 것이었다.

“근왕의 기치... 그렇게 모아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오? 설마 역모라도...?”

“역모라니. 말이 심하군.”

다시금 칼날이 번쩍였다. 이번에는 의관에 딱히 해는 없었지만, 서늘한 칼바람은 그대로 살갗에 닿아 소름을 돋게 하였다.

“반정(反正)이다. 지존의 자리에 누가 앉을지는, 지존의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

아직 더 말해주기는 여러모로 일렀다.

“때가 되면 더 말해줄 것이다. 어차피 이제 와서 네가 갈아탈 곳도 없지 않으냐? 계속 나를 따른다면, 쓸만한 계책, 도움 되는 일, 모두 너에게 몰아주겠다. 조선이 한바탕 뒤엎일 때, 공신 중에서도 으뜸가는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칼날이 마침내 칼자루로 돌아갔다.

“혹여 딴짓을 할 생각이라면 지금이라도 마음을 고쳐먹어라. 정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글쎄, 한 번쯤 우리 재간을 시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두리손이 이량의 애첩이 얼마 전 잃어버린 비녀를 휙 던져주며 말했다. 애첩이 이량의 품에 안길 때만 풀어놓던 비녀였다.

“아, 그리고 슬슬 민주당 놈들을 정신없게 할 만한 일이 하나쯤 더 터질 때도 되었다. 그만하면 심통원 그자도 얼추 만족할 테지.”

그 말대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림 앞으로 급보가 전해져 왔다. 요양에 나간 사업당 예방 사람들로부터 온 전갈이었다.

요양에서 의주로 글 한 통이 전해졌는데 그 내용이 범상치 않다는 것이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응당 지켜야 할 도리가 있으니, 하물며 몸통과 팔다리와 같은 사이인 천조와 조선은 어떠하겠는가.

그런데 국경의 기강이 해이해진 지 여러 해가 되어, 그 도리를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천조는 이제라도 허물을 깨닫고 마땅히 고치고자 하니, 그대 배신(陪臣) 의주부사도 따라야 할 것이다.

압록강을 넘어 사사로이 교역하는 행위를 엄히 금하며, 단속의 책임은 요동총병과 의주부사 두 사람이 나누어 질 것이다. 이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은 천조에서 조선에 내려줄 것이로되, 조선 사람이 금령을 어긴다면 그 죄 역시 조선이 짊어질 것이다.

이 글은 곧 예부의 자문으로 조선국 조정으로도 전해질 터이니, 부사는 미리 알고 준비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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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몇 번 언급되었던 이지번이 다시 등장하였습니다. 목은 이색의 칠대손이자 이지함의 맏형으로서 이지함 본인과는 아홉 살 터울이 있는 이지번은, 본디 효성과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사림의 중진들과 폭넓게 교류하여 ‘백의재상(白衣宰相)’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바 있었습니다. 원 역사에서는 윤원형의 횡포가 계속되자 세상에 환멸을 느끼고 단양에서 은거하게 되었습니다. 선조가 즉위한 뒤에야 다시 벼슬길에 나아와, 청풍군수 등 말직을 잠시 맡게 됩니다.

이지번의 사상이나 행적에 대해서는 그리 많은 자료가 남아있지 않으나, 야사에 따르면 이지함과 비슷하게 도인과 ‘공돌이’의 면모를 살짝 지니고 있었던 듯합니다. 그가 기거하던 귀담(龜潭)에는, 이지번이 칡덩굴로 절벽 양쪽을 연결한 뒤 그 위에 모형 학을 달아놓고 그것을 타고 다녔다는 민담이 전합니다. 즉 오늘날 지자체들이 관광 목적으로 이곳저곳에 설치하는 케이블카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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