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104화 (104/259)

33. 하늘 싸움꾼 (2)

먼 옛날. 세상이 지금만큼 엉망진창은 아니었던 시절.

주션(여진) 사람들은 강대하였으며, 그만큼 또 지혜로웠다.

위대한 왕얀 아쿠타(금태조 완안아골타)가 세운 주션 사람들의 나라, 암바 아이신 구룬(금나라)은 하늘 아래 모든 것을 아울렀다. 니칸(한인) 사람들도, 솔호(고려) 사람들도 모두 주션을 형으로 모셨다.

그러나 그 영광은 몽고(몽골)의 손에 불타고, 말발굽에 짓밟혔으며, 갈갈이 찢긴 채 세월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는 늙은이들이 제멋대로 떠드는 옛이야기 조각만이 남았을 뿐이다.

니탕카이 역시 그저 높은 곳 향해 올라가기만 꿈꿀 뿐, 주션의 옛이야기는 그저 옛일로 치부하고만 있었다.

그 마음이 흔들리게 된 것은, 하비에르 신부와 함께 두만강 북쪽을 돌아다닐 때부터였다.

그 무렵이면 이미 두만강 건너편의 우디거 놈들은 모두 쫓겨났거나, 아니면 ‘백정여진’에게 복속되어 인삼과 초피를 바치고 있었다. (그래도 강 건너 조선 토관들에게 헐값으로 뜯기는 것보다는 약간이나마 나았으므로, 불만이 그리 크지는 않았다.)

그러나 겨울이 되면 배고픔을 못 이기고 어리석은 짓을 범하는 놈들이 있기 마련이라, 니탕카이는 수하를 이끌고 순찰을 나가기로 했다.

아직 겨울바람을 덜 맛보았는지, 하비에르도 동행을 청하였다. 강 건너편 사람들이 어찌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믿는 바는 무엇인지를 살피기를 원한다 하였는데, 암바 버일러의 체면을 생각하여 그 청을 들어주기로 하였다.

그렇게 엄동설한을 뚫고 이틀쯤 북쪽으로 올라갔을 때의 일이었다.

“니탕카이 버일러, 저기 마을에서 연기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내게도 보인다. 지난번에 우리가 털었던 곳 아니냐? 그때 살아서 달아난 놈들은 얼마 안 될 테니, 아마 다른 떠돌이들이 빈집에 들어와 사는 것 같다.”

“우리에게 신고도 안하고 들어와 산다니, 괘씸한 놈들 아닙니까? 예절을 가르쳐줄까요?”

“아서라. 귀빈이 계시지 않으냐. 우선 어떤 놈들인지 면상만 보자꾸나. 성의 있게 어루만져주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고.”

하여, 우르르 무리지어 마을에 다가가니, 안쪽에서도 곧 그들을 발견하고 덩달아 무리지어 나왔다.

불타고 무너진 목책은 그럭저럭 보수하고, 부서진 집도 얼기설기 고쳐둔 것이, 나름 공을 들인 듯하였다.

“너희는 누구냐! 우리는 이름난 장사 보카이(甫介) 님과 함께하고 있다!”

“이 땅은 암바 버일러 임꺽정을 모시는 우리 백정여진이 다스리는 땅이다. 보카이고 누구고, 마음 내키는 대로 들어와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란 말이다!”

유르보리가 옆에서 외쳤다. 그 이름 댄 것이 유효했는지, 목책 건너편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리고, 그 우두머리쯤 되는 듯한 사내 하나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사내는 이쪽을 보자마자 얼굴이 창백해져 도망을 쳤다.

“대체 뭐하는 놈인지... 엥? 버일러?”

뒤를 돌아본 유르보리는 지금껏 본 것 중 가장 살벌한 표정 짓고 있는 니탕카이와 마주쳤다.

“저놈... 어째 이름이 익숙하다 싶더니, 우리 부락을 몰살시켰던 패거리 중 한 놈이다. 어디 숨어 있다가 이제야 고개를 내밀었구나.”

“어찌 하시렵니까?”

“저놈이 내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이지 않으면 달아날 것이다. 너희는 하비에르 화상을 지키고 있거라.”

그 말 마치고서 니탕카이는 앞으로 뛰쳐나가, 단번에 목책을 뛰어넘었다.

곧이어 날붙이 부딪히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이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날붙이 소리는 줄어들고, 그저 산 자의 비명과 죽어가는 자의 신음만 남았다.

“막아라!”

“어딜!”

저들 우두머리 지켜보겠노라며 몇 놈이 나섰으나, 이미 복수에 혈안이 된 니탕카이 앞에서 오래 가지 못하였다.

그사이 보카이(甫介) 놈은 뭔가 금은보화라도 챙기려는지, 달아나는 대신 어느 큼직한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하찮은 졸개 놈들을 도륙 내며 마을 안쪽으로 달려오던 니탕카이가 곧 그 뒤를 따랐다.

무슨 보화를 숨겨놓은 줄 알았더니, 조그만 불상 하나를 챙기러 들어온 듯하였다.

문은 하나뿐. 그 문을 등으로 가리며 니탕카이가 칼을 고쳐 쥐었다.

“부처님에게 벌 받을 놈! 축생으로 마흔 번 전생해도 죄 못 씻을 놈 같으니!”

궁지에 몰린 보카이 입에서 욕이 나왔다.

“그게 인두겁 쓰고 할 소리냐? 네놈이야말로 우리 부락에서 그런 패악질을 해두고 벌 안 받을 줄 알았느냐?”

“너희는 패악질 당해도 쌌다! 뼛가루 흩어날려도 시원찮을 너희 할아비 볼로두가 우리 작은아버지 부얀을 먼저 해코지하지 않았더냐?”

보카이가 악에 받쳐 떠들어대는 그쪽의 사연은 이러하였다.

서른 해도 더 전, 후룬(훌라온)이 여러 갈래로 찢어져 서남쪽으로 내려올 때, 호이파 강가에 살던 볼로두는 일족을 이끌고 동쪽, 옛 모련위(毛憐衛) 땅으로 넘어왔다.

그 땅은 요동총병보다는 조선의 입김이 더 강하게 닿는 곳이었는데, 근래 수십 년간은 거의 방치가 되어 있었으므로 더 동쪽에 살던 우디거 사람들이 여럿 넘어와 살고 있었다. 그러므로 볼로두는 제멋대로 – 또는, 새로 정착할 기반을 닦기 위해 – 그 우디거 부락들을 마구 약탈하였다.

결국 참다못한 우디거 사람들은 저들끼리 뭉쳐서 볼로두 일족 멸하기로 작당했는데, 이를 알아챈 볼로두가 먼저 부얀을 쳐서 무리를 흩어버렸다.

그 원한 잊지 않은 이들은 여러 해 뒤 다시 세력을 모아 마침내 복수를 이루었으나, 이미 볼로두는 죽어서 그 몸이 재가 된지 오래였다.

거기까지 다 떠든 보카이가, 오금에 힘이 풀렸는지 털썩 주저앉았다. 금시초문이라는 듯한 니탕카이의 반응을 보니, 더 욕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죽이려면 죽여라. 젠장할.

이제 보니 네놈은 너희 할아비가 한 짓도 잘 모르는 모양인데, 말로 꾸짖은들 뭔 소용이 있겠느냐. 다 이놈의 세상이 글러먹은 탓이다.”

니탕카이가 칼을 휘두르려다 그 말 듣고 멈칫하였다. 그 틈을 타고 보카이의 넋두리는 계속 이어졌다.

“그저 억울할 뿐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 대체 우리는 무슨 죄를 지었기에 서로 빼앗고 빼앗기며, 모두에게 오랑캐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냐?”

니탕카이는 이 춥고 척박한 땅 밖에서 더 넓은 세상을 보았다.

임 당수의 뜻을 따라,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불과 몇 년 사이에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반면 그들 주션 사람들은 그대로였다. 선대로부터는 이름과 원한만 이어받을 뿐.

만약 니탕카이나 임꺽정이 죽는다면, 이 백정여진이란 무리가 얼마나 이어질 수 있겠는가?

생각이 그에 닿으니, 니탕카이는 덜컥 죽음이 두려워졌다. 자신이 죽어 잊히는 것이 두렵고, 자신이 무엇을 이룬다 한들 허무하게 씻겨 사라져버릴 것이 두려웠다.

“... 그러던 차에 나라를 만들어보자는 말을 듣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암바 버일러의 권유(를 가장한 명령)라지만, 나라를 만들자는 것은 그리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그저 막연히 더 높은 자리를 바라던 니탕카이조차 덜컥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앉아 지금에 안주하는 것, 임 당수의 말에 따라 앞을 알 수 없는 무모한 싸움에 뛰어드는 것. 두 가지 모두 두려운 모양이로군요.”

하비에르가 동정과 위로 담은 눈빛을 건네었다.

“제가 조언을 드려도 될지요.”

니탕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땅히 있었어야 했을 것을 돌려놓는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니탕카이 버일러께서는 부름을 받아 그 선두에 서게 된 것이고요.”

“예? 그게 무슨...?”

“그 마을에서 가져온 저 불상 말입니다. 어째서 저것이 제 이목을 끌었는지, 그리고 그 이후로 제가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 아직 한 번도 말씀을 드린 적이 없더군요.”

보카이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관세음보살상을 하비에르가 가리키며 말했다.

거친 연장으로 아무 나무나 깎아 만든 것이었으나, 그 솜씨만은 범상치 않았다. 자애로운 미소를 품은 여인의 상. 아마 불상을 깎은 이름 모를 장인이 제대로 그 재주를 발휘할 수 있었더라면, 가히 걸작이라 부를 만한 작품이 나왔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병해라는 그 스님에게 물으니, 이 ‘관세음보살’은 본디 사내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나, 중국을 거치며 아리따운 여인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하더군요.”

그마저도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요, 더구나 불교의 교리에 따르면 겉모습이 그렇게 중한 것도 아니어서, 사내의 모습을 한 불상과 여인의 모습을 한 불상이 함께 쓰이고 있다 하였다.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며, ‘중국을 거쳐’ 여인의 모습을 하게 되었다 하니, 처음 하비에르가 그 불상을 보았을 때 불현듯 뇌리를 스쳤던 직감은 어느새 제법 그럴듯한 추측으로 변해 있었다.

“어떤 시점에서 그렇게 바뀌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추측되는 바가 있었습니다.”

예수회의 첫 해외선교가 동방 선교로 결정된 직후, 하비에르는 벗들을 도와 – 그때만 해도 자신이 이 자리에 오게 될 줄은 몰랐다 - 동방에 대한 기록을 찾아 교황청 곳곳을 뒤진 바 있었다.

그리고 칸발릭(Khanbaliq, 북경)의 대주교 몬테코르비노의 요한(Giovanni de Montecorvino)과 그가 일구어낸 칸발릭 교구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동방의 나라들은 더 이상 복음을 알지 못한다는 말인가? 이곳에서 동방 역사에 해박한 여러 ‘선비’들을 만나면서 하비에르는 비로소 사실의 편린들을 짜맞추어 진상을 추측할 수 있게 되었다.

칸발릭 교구가 비로소 우뚝 서게 될 무렵, 카타이(Cathay)라고도 알려진 화북 땅에 강남에서 시작된 반란의 불길이 닿았다. 몬테코르비노의 요한과 그의 뒤를 이은 프란치스코회 신부들은 칸의 벗이었고, 따라서 반란군의 적이었다.

중국의 새로운 황제는 옛 지배자들의 모든 것을 증오하여, 칸의 이방인 벗들이 가져온 참된 믿음 역시 증오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하여 잔혹한 박해 속에서 믿음은 꺾이고 부서져, 왜곡되고 변질된 단편만이 남았다. 본디 성모상이었을 이 관세음보살상처럼.

하비에르는 그것 외에, 본디 사내의 형상을 하였다는 성인이 여인의 모습으로 탈바꿈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 그리고 그렇게 믿음의 명맥이 끊어진 지 이백 년. 마침내 이렇게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어쩌면 조선 사람들보다 저 북변의 순박하고 거친 사람들이 하비에르의 포교를 더 잘 받아들인 것도, 단순히 그들의 삶이 더 고달팠기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저들 ‘야인’들이 탄압을 피해 척박한 혹한의 땅으로 도망친 신도들의 후예일 지도 모른다는 그 상상은 하비에르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어쩌면 이 모든 일이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런 말씀이십니까?”

“운명이라기보다는, 섭리에 따른 인도겠지요.”

하비에르가 상냥한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니탕카이는 어째 어디선가 본 듯한 인상을 받았다.

나중에야 그것이 임 당수나 율곡 선생이 이야기 나눌 때 종종 보이던 그런 눈매임을 깨달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자신의 믿는 바를 설파하기 위해 세상 반대편까지 온다는 것은 여간내기 마음가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하비에르와 이야기 나눈 이후로 어째 마음이 편해졌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근래 외직(外職) 나갈 때가 된 신료들 사이에, 양주목사를 할 바에야 제주목사를 한다는 말이 돌고 있었다.

제주도 오갈 때 제물포에서 왜인들이 모는 배를 타고 안전하고 빠르게 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별 해괴한 일들이 양주목에서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었다.

지금만 해도 그러하였다.

흑의영을 여전히 전정공회가 쓰고 있었으므로, 흑의군들과 여진 사람들은 그나마 가깝고 만만한 양주 녹양평에 모였다.

“자, 다들 조총 한 자루씩 받으셨지요? 이것 한 자루만 있으면 범도 혼자서 능히 잡을 수 있으니, 여러분의 목숨과 같다 여기고 애지중지하셔야 할 것입니다.”

명희가 조총을 들어보이며, 저의 앞에 모여 앉은 흑의군과 백정여진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사이 동래에 자리를 잡은 공방에서는 제법 많은 조총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당분간 이 조총 장사로 중국과의 교역이 끊어지며 생긴 손해를 벌충해야 하였으므로 서림이 열심히 재촉을 한 덕이었다.

독촉을 이기지 못하여 대장장이들이 모두 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화포장 이 아무개의 어린 아들 장손이(李長孫)가 한 사람이 한 번에 한 자루를 만드는 대신 그 공정을 나누면 훨씬 수월해지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였다.

그것이 큰 효험을 거두어, 이렇게 녹양평에서 제법 많은 사람들이 저의 조총을 들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흑의군 분들, 이전에 시범 보였을 때의 일은 다들 기억하고 계시지요? 새로 온 분들에게 잘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물론입죠, 아씨.”

일전에 흑의영에서 보았든, 얼마 전 범 사냥 때 보았든, 흑의군들은 저 조총은 물론이요 조총 쏘는 명희 모습도 잘 보았다.

반면 알음알음 이번 북정(北征) 소문이 돌면서 슬쩍 찾아온 다른 백정들이나 향화인(向化人, 조선에 귀화한 여진족)들은 저게 무슨 말이냐며 옆의 사람에게 슬쩍 묻곤 했다.

“장차 북변에 나아가면, 여러분 수백이서 수천 기는 넘는 마병을 상대해야 할 수도 있어요. 그때 당황하지 않고 방포하려면, 여러분 머리 대신 몸이 기억하도록 하면 됩니다.”

“예, 아씨!”

아무 생각 없이 몇몇이 좋다고 답변했다. 이번에는 청석골 출신들이 갸우뚱하였다. ‘몸이 기억하도록 한다’라는 말을 일전에 어디서 들어보았던 듯하였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잠시 파할 테니, 얼른 중화(中火)들 하시고 낮잠까지 자고들 오세요. 여차하면 오늘 밤은 잠을 아니 재울 수도 있으니까요.”

명희가 범상한 말투로 섬뜩한 말을 덧붙였다.

“아이고, 세상에.”

“이럴 줄 알았으면 조총 받는 게 아니었는데.”

그제야 ‘몸이 기억할’ 때까지 굴리는 것이 임 당수가 정병(精兵) 기르는 비결이었음을 되새긴 이들이 뒤늦은 한탄을 하였다.

“자, 중화 들러들 오시오!”

멀찌감치서 밥 다 되었노라고 알리는 소리가 나니, 한탄하는 것과는 별개로 다들 후다닥 달려갔다.

다들 먹느라 바쁜 사이, 일취월장하는 조선말로 하비에르가 열심히 선교를 하고, 십자가 목걸이 한 여진 사람 몇몇은 아직 조선말에 밝지 못한 자들을 위해 옆에서 여진 말로 옮겨주었다.

먼 옛날 이 동방 땅에 있었다는 선배 교인의 존함을 따와,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받은 니탕카이도 그 중에 섞여 있었다.

“거 다들 열심이구만.”

“열심히들 해야지요. 저기 들어가는 은이 몇 냥인데.”

꺽정이는 그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고, 같은 모습을 서림은 불평불만 그득한 눈으로 보았다.

“그나마 일본 쪽에서 유황을 좀 싸게 들여와서 관에서 만드는 화약과 바꾸니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더라면 저렇게 조총 쏘는 일도 못했을 것입니다.”

“아깝게만 생각하지 마시오. 내 듣기로 장사도 밑천을 거하게 부을수록 이득이 더 난다던데. 그, 뭣이냐, 자본이라는 것 말이오.”

자본이라는 말을 가장 먼저 쓴 사람이 서림 본인이었으니, 말하자면 공자 앞에서 문자 쓰는 격이었다.

“밥이나 덜 먹었으면 그나마 지출이 덜하였을 터인데, 또 어찌나 많이들 퍼먹는지, 참.”

언제고 핀투를 또 만나면, 바다 건너에서 가져오든 별세상에서 훔쳐오든 상관은 없으니 좀 싸게 배불리 먹일 수 있는 그런 곡식 있느냐고 물어볼 다짐을 스스로 하는 서림이었다.

“출정하여 압록강 넘어가면 군량 마련할 길이 넘쳐나니, 그때까지만 잘 대어주시오. 그나저나, 그 사이 관에서는 별 말 없었소?”

꺽정이가 화제를 돌렸다.

“조정 말씀이시라면, 여전히 모르는 체 하고 있습니다.”

“잘 되었구만.”

그들의 계획은 이러하였다.

요동의 장사판이 그간 어떻게 돌아갔는지를 잘 아는 서림의 예상에 따르면, 조만간 요동에 가까이 붙어 살던 건주삼위(建州三衛)나 해서여진, 즉 홀라온 네 부(울라·호이파·하다·예허)에서 소란이 일어날 것이었다.

허나 건주든 해서든 요동에서 아예 교역하지 않고 살 수는 없는 신세요, 요동총병과 그 수하들도 그리 만만한 이들은 아닌 고로, 가만 내버려두면 오래 지나지 않아 진압될 것이 뻔했다.

헌데 그들이 움직이기 전, 갑자기 어디선가 듣도보도 못한 ‘백정여진’이 나타나 말썽 일으킨 쪽을 때려잡는다면 어찌 될 것인가?

대국의 편을 들어 요동의 화평 되찾는 일에 일조했으니 내치지는 못할 것이요, 경계하면서도 적어도 한동안은 교역을 허용할 테다.

언젠가는 들통이 나겠지만, 그때쯤에는 이미 이지함과 서림이 핀투와 자유민주당의 도움을 받아 강남과 직통으로 교역, 아니, 교유하는 길을 터 두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관군은 안 움직인다 쳐도, 흑의군은 엄연히 조선 사람들 아닙니까? 당수께서 대체 어떤 말씀을 하셨기에 조정이 잠잠한 것인지요?”

“동고 대감과 탕평당 사람들께 찾아가서, 아주 진솔하고 유익한 대화를 나누었지. 아마 그 덕일 테요.”

서림 걱정대로, 여진 야인들의 일은 예나 지금이나 대국과 조선 양쪽에 모두 얽혀서 간혹 두 나라 사이를 어렵게 만들기도 했던 사안이었다.

그러니 조선 사람들이 번호(藩胡, 성저야인)들과 함께 요동 일에 개입하였다는 것이 알려지면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걱정들 마시오. 우리 백정은 여진의 후예라니까? 동족들 위해 의용(義勇)이 떨쳐 일어난다는 것도 있음직한 일이지. 그 뜻에 감명한 몇몇 조선 사람들이 벗들과 함께 도강(渡江)할 수도 있는 게고.’

지금껏 사림의 인사들이 들어보았던 꺽정이의 터무니없는 논리 중에서도 그 억지의 정도가 심하였다. 엄연히 조선 사람 데리고 북상하는 것인데, 어찌 이를 숨길 수 있겠느냐며 이준경이 반박하자, 꺽정이가 껄껄 웃으며 비꼬았다.

‘백정이나 종놈들이 언제부터 제대로 된 조선 사람이었소? 설마 같은 조선 사람이라 여기면서 지금까지 그따위로 대접해온 건 아니시겠지?’

꺽정이가 ‘유익한 대화’ 나누었다는 말 듣고서 서림도 이러한 전말을 얼추 지레짐작할 수 있었다.

“당수, 그러다가 언제고 한 번 크게 화 당하십니다. 이 서림이가 걱정하여 하는 말입니다.”

“막말로 화 당할 것 같으면 나보다 먼저 화 당할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내 사돈댁에도 하나 있고, 탕평당에도 하나 있는데.”

“군관들이 요새 민주당을 퍽 고깝게 본다 합디다.”

“그놈들? 부러워서 그런 게지. 요새 균역법이다 뭐다 해서 좀 배 좀 불러오니까 허튼 생각도 하는 모양인데... 흠. 언제고 유극량이 만나면 물어봐야 하겠소. 마침 북쪽 만포(現 강계 일부) 쪽으로 옮겼다니 만날 수 있겠지.

그보다, 언제쯤 움직여야 할 듯하오? 서 별감 말마따나, 가만 앉아서 군량만 축내다가 우리네 곳간이 동나면 그것대로 곤란한 일이잖소.”

“제가 요동의 정세에 대해 들었던 바가 참이라면, 조만간 그럴듯한 명분이 생길 것입니다. 싸워서 이기는 게 어렵지, 그 전에 싸움 일어날 것을 예측하는 건 쉽지 않겠습니까.”

산동과 강남에서 그 땅의 물산을 싣고 바다 건너오는 상인들은, 요양에서 조선인들과 만나곤 했다. 조선인들은 군마나 유기 따위를 팔곤 했는데, 언제부턴가 일본에서 구해온 은도 들고 오게 되었다.

그것이 지난 몇 년 사이에 더욱 규모가 커져, 마치 같은 대명 안에서 교역하는 것처럼 흥성하게 되었다.

지금껏 칙서를 들고 와 말과 인삼, 초피 따위를 팔던 해서와 건주의 여진 야인들도, 스리슬쩍 그곳에 끼어들게 되었다. 요동의 탐욕스러운 관원들 눈치 보는 것보다, 저들의 물건을 조선이나 산동 상인들에게 곧장 넘기는 쪽이 훨씬 이득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나다 보니, 대명 호부(戶部)의 수많은 짐덩이 중 하나였던 요동은 어느새 교역만으로도 능히 재정을 꾸릴 수 있게 되었다.

허나 요동총병으로서는 그것이 모두 잠상(潛商, 밀무역) 덕분이라고 밝힐 수는 없었으므로, 핑계 내세우기를 사민된 백성들과 둔전(屯田)이 모두 크나큰 성과를 거두어 홀로 설 수 있게 되었다 하였다.

더구나 여진 야인들도 경전을 비롯해 각종 서책을 그렇게나 탐한다 하니 – 요새는 조선에서도 서책을 제법 찍어내는지라 조금 시들해졌다곤 했다 – 마침내 태종 영락제 이래로 추진해온 요동 땅의 경략이 완성되었구나, 그렇게 서계와 장거정이 착각할 법도 했다.

그런데 이제 그 교역이 툭 끊기게 되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잠상 막는 비용으로서 의주부사와 평안도의 변장(邊將)에게 줄 은도 그토록 사정 좋은 요동의 재정으로 대도록 하였으니, 조선과의 교역을 위해 찾아온 산동과 강남 상인들도 어마 뜨거라 하고 달아날 일이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잘만 우리네 인삼과 초피 사 주시지 않으셨소?”

“이보게, 그건 그때 일 아닌가. 지금은 조선이든 자네 숙여진(熟女眞)이든 함부로 거래를 못 하네. 섣불리 돈 있다고 밝혔다가 뜯기기라도 하면 곤란허이. 우리들 오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칙서 들고 와서 관노야들 앞에서 거래하는 수밖에.”

“그쪽도 이미 알아보았소. 아주 날강도가 따로 없던데.”

요동총병과 그 아랫사람들로서는, 교역이 끊기면서 발생한 재정의 빈틈을 어떻게든 메꿔야 했다. 여전히 가난한 요동의 농민들은 털어보아야 나오는 것이 없고, 지난 수십년간 강 건너온 조선놈들은 저들 나라가 다시 살기 좋아졌다 하니 또 스리슬쩍 돌아가버렸다.

그러니 쥐어짤 구석은 만만한 여진 야인들, 그리고 간혹 남아 있던 상인들 뿐이었다.

“애초에 너희 교활한 니칸(한인) 놈들을 믿은 우리가 바보였지! 되었다! 네놈들이 그리 날강도질을 하려 드니, 우리도 날강도질을 해주마!”

“너희가 우리 초피를 받지 않는다면, 대신 화살을 주겠다!”

“죽여라! 모두 빼앗아라!”

예허 부와 원수까지 져 가며 명과의 무역에 부의 명운을 걸었던 하다 부가 마침내 들고 일어났으니, 서림의 예상보다도 약간은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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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금나라 시절부터 중앙권력에서 상당히 배제되어 있던 만주의 여진족들은, 이후 몽골 왕가들의 통치와 그 뒤로 이어진 혼란기 속에서도 새로운 국가나 정치집단을 형성하지 못한 채 남아 있었습니다. 이는 여진을 하나로 묶을 구심점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명과 조선의 의도적인 개입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명은 위소제(衛所制)를 통해 – 소위 해서여진이나 건주여진 등의 명칭은 모두 이들이 봉해진 위(衛)의 이름입니다 – 여진족을 통제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둔 바 있지요.

위소제는 여진의 유력한 부족을 위(衛)로 삼고, 일정량만큼의 교역을 허용하는 칙서를 발급해주는 형태로 운영되었습니다. (아마도 의도적으로) 칙서를 다른 부족이 빼앗아 사용하는 경우에도 교역을 허용함으로써, 부족 간의 갈등을 유발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16세기 중반이 되면, 여진 부족 간의 갈등을 통제하고 유력한 세력의 성장을 막던 명과 조선 모두 혼란기에 빠지면서 이전의 통제 정책들이 효력을 잃게 됩니다. 니탕개의 난 당시 성저야인들이 두만강 북쪽의 여진 세력까지 끌어들여 조선측 추산 3만여 기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할 수 있던 것도 이 덕분이라 할 수 있지요.

특히 유력한 부족들은 다른 부족의 칙서를 빼앗아 사실상 무역을 독점하고, 근거지에 제대로 된 성을 쌓아 국가로 성장해나가는 발판을 닦게 됩니다. 지난 화에 언급된 하다부의 왕주 와일란이 예허부의 칙서를 모두 빼앗은 것(원 역사에서는 1551년에 일어납니다) 역시 이러한 움직임의 일환이었지요. 원 역사에서 왕주 와일란은 이듬해에 가신들의 반란으로 사망하지만, 하다부는 강력한 세력을 꾸려 16세기 말엽에는 해서여진(후룬/홀라온)의 맹주로 부상합니다.

관세음보살을 여성으로 묘사하는 것이 기독교 전래와 관련이 있다는 하비에르의 견강부회 해석은 당연히 허구지만, 송대 이후에 그러한 묘사가 민간신앙 차원으로 퍼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의외로 시기상 그렇게까지 차이가 나지는 않습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미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경교)는 당나라 말기에 중국 본토까지 유입되었고, 이후에도 실크로드를 통해 전파되어 사제왕 요한(프레스터 존) 전설을 낳기도 했지요. 이후 몽골 제국이 실크로드를 통일하면서 카톨릭 교회도 중국 선교에 나서게 되는데, 지오반니 다 몬테코르비노(몬테코르비노의 요한)는 북경 교구의 사실상 처음이자 마지막 대주교로 봉직하던 14세기 초에는 북경에 교회 두 곳을 짓고 남중국으로의 선교도 시도하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몽골 제국이 붕괴하면서 교회의 명맥도 끊어지게 됩니다. 유럽에서 아시아로 향하는 육로는 갈수록 위험해졌고, 교황청에서 파견한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들이 도중에 사망하는 일도 잦아지게 되었지요. 1336년, (중원 왕조로서의) 원의 마지막 황제 혜종 토곤테무르가 교황 베네딕트 12세에게 보낸 서한에 따르면, 1328년 몬테코르비노 대주교가 사망한 이후 북경 교구에는 성직자가 부재한 상황이었습니다. 아비뇽 유수로 인해 여러모로 어려운 상황이던 교황청은 어떻게든 북경 교구를 되살려보고자 노력했지만 끝내 실패하였습니다.

작중에서는 이장손(원 역사에서는 비격진천뢰를 발명하는 사람입니다)이 말한 분업을 통한 조총 생산 공정의 효율성 증대는 원 역사에서 광해군 시기 화기도감(火器都監)을 운영하면서 채택된 바 있습니다. 이미 그 이전 군기시(軍器寺)에서부터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던 분업을 체계화한 것으로, 후금의 부상에 대응한 군비 증강이라는 국가전략에 부합하여 빠르게 각종 화기를 생산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화기도감은 엄연한 임시 관청이었고, 이러한 분업 구조를 유지하는 데는 그 효율성과는 별개로 많은 자원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인조반정 이후 폐지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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