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105화 (105/259)

33. 하늘 싸움꾼 (3)

이 무렵 명에서는 여진의 족속을 대략 셋으로 나누고 있었는데, 여진 사람들 또한 그것을 대략 따르곤 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가장 강성한 해서여진은 예허·하다·울라·호이파 네 부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들은 조선과 명, 몽골 사이에 제법 그럴듯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요동총병이 관할하는 요동의 여러 성채와 마을, 그리고 조선의 평안도 일대와 가까운 곳에는 건주삼위(三衛)가 있었는데, 말이 ‘삼위’지 실제로는 여러 부족들로 나뉘어 있었다. 이들은 해서에 비하면 힘이 달렸지만 대신 명과 조선 양쪽에서 두길보기하며 쏠쏠한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건주와 해서 너머에 있는 이들을 명에서는 야인(野人)으로 통칭하였다. 육진 번호로 지내거나 육진의 동족들과 (때로는 힘으로, 때로는 재물로) 교류하며 사는 오도리나 와르카 사람들을 제외하면 대체로 고만고만하여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었으므로 딱히 그릇된 명칭은 아니었다.

심지어 멀리 북쪽과 동쪽에는 쇳조각마저 구할 수 없어 물고기 비늘로 옷을 만들고 짐승의 뼈로 화살촉을 만드는 무리도 있다 하니, 야인 소리 들어도 억울하다 할 바가 없지 않겠는가.

“우리를 그러한 무리로 착각하다가는 호되게 당할 것이오. 하다 사람들을 무찌르기 위해 왔다니, 말은 좋지만 실제로 노리는 바는 따로 있겠지.”

저의 성 허투알라(赫圖阿拉)에서 이방인 우두머리를 맞이한 버일러 교창아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지난 몇 해 사이 건주위 사람들은 조선과 명의 잠상(潛商)을 도우며 제법 이득을 많이 취했는데, 교창아는 그런 거래에 직접 나서기도 했기 때문에 제법 조선말이 유창하였다.

만포 건너편 황성평(皇城坪)에 소위 백정여진 무리가 들어온 지도 한 달이 지났다. 그들은 한양과 육진을 오가며 장사를 한다고 들었는데, 그러니 얼추 역산해보면 하다 부가 난리를 일으킨 지 얼마 되지 않아 출발한 것일 터였다.

소문에 따르면 무슨 나라를 세운다고도 하고, 또 요새 난리를 일으키고 있는 하다 부의 왕주 와일란을 토벌할 것이라고도 했는데, 워낙 허황된 말이기도 하거니와 허투알라로부터 족히 이삼백 리는 떨어진 곳의 이야기이기도 했으므로 다들 그렇게 크게 신경을 쓰진 않고 있었다.

“이제 의주를 통한 잠상은 끊겼으니, 만포(滿浦, 강계군 만포읍)에서 우리 영역을 지나는 길밖에 없겠지. 그렇지 않소?”

“지금은 그렇지. 몇 년 뒤엔 어찌 될지 모르지만.”

너희 조선 놈들은 지금 우리 눈치를 볼 수밖에 없지 않느냐며 은근슬쩍 상대를 떠보는 교창아였는데, 그와 마주 앉은 자칭 여진족 후예 임꺽정도 팔짱을 풀지 않으며 맞받았다.

“네 말대로 노리는 바가 있다.”

“우선 들어나 봅시다.”

“우리는 하다의 그 왕주 와일란 놈 때려잡으러 왔는데, 길잡이를 좀 해다오. 이왕이면 군량과 병력도 좀 내어주고.”

지금껏 조선 놈들을 여럿 보아온 교창아였지만, 이만큼 뻔뻔한 도적은 처음이었다.

“하하, 듣기로는 무슨 나라를 세우시겠다 하던데, 차라리 여기 허투알라도 내달라 하시지 그러시오?”

상상을 뛰어넘는 요구에 교창아는 비웃음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진담으로 하는 대꾸가 돌아왔다.

“그럴 것까진 없다. 이미 우리는 아주 좋은 터전을 찾았거든.

강 건너편에 금나라 황제 무덤 있다길래 뭐 보배라도 나올까 싶어서 찾아가 봤더니, 잘은 모르겠지만 서두에 추모왕(鄒牟王) 운운하는 걸 보니 옛날 고구려 비석이더라. 고구려가 도읍 세울 만큼 좋은 땅 아니었겠느냐? 이런 산골짜기 벽촌은 줘도 안 가진다.”

살아있는 천자도 우습게 여기는데 죽은 천자 따위 무엇이 두려울까. 적당히 글줄도 읽는 꺽정이가 가서 보았더니, 얼추 보아도 금나라 비석은 아니었다.

그러나 교창아 귀에는 그저 농담따먹기로 들릴 뿐이었다.

“이보시오, 임 당수. 솔직히 이야기합시다. 비록 여기 허투알라가 터가 좋고, 내가 이끄는 우리 부족도 근래 조선과 명 사이에서 제법 이득을 취하여 세가 늘어난 것은 맞지만, 그래본들 우리 숙수후(蘇克素滸) 부에서도 조그만 세력에 불과하오.

그러니 임 당수께서 다른 곳 제쳐두고 여기로 온 것도, 뭔가 다른 노림수가 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오. 지금 강 건너에 모이고 있는 당수의 백정여진은 고작 이천이니 하다 부를 치기에는 한참 부족하지만, 이곳 허투알라 정도는 노려봄 직하지.”

애초에 같은 여진 사람이라고 하여 서로 챙겨주는 것도 없었으므로 백정여진이라고 자칭하는 무리에 대해, 건주고 해서고 애초에 그리 진지하게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그저 조선에 권신이 새로 들어왔다 하니, 억지 명분을 붙여 그 아래에 들어갔을 뿐이라고들 생각하곤 했던 것이다.

동쪽 떨거지들이 암바 버일러라고 과분한 칭호를 붙여준 그 우두머리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나마 교창아는 명과 조선 사이에 있는 저들 처지를 십분 활용하는 것이 더 높이 올라갈 방도임을 알고 있었고, 또 눈앞의 임꺽정과 민주당이 저에게도 유리한 판을 깔아준 바 있음을 알았으므로, 이 정도의 성의라도 보이고 있는 셈이었다.

“하하하! 내가 무엇이 아쉬워서? 아까 분명히 말하지 않았느냐. 여긴 줘도 안 가진다고. 굳이 탐내는 바가 있다면, 네놈과 네놈 부락이겠지.”

“이 사람을 탐낸다니, 그 무슨 말씀이시오?”

“네놈이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얼추 알고 있다. 백정여진 이끄는 니탕카이 녀석과 동류(同類) 아니냐?”

이어서 나오는 말을 들으며 교창아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조선 놈들은 여진 사람들을 그저 오랑캐로 여길 뿐이라지만, 민주당은 달랐다. 애초에 얼마를 들고 있느냐, 무엇을 사고 파느냐가 중할 뿐. 저 섬나라 모리 씨도, 포르투갈 사람 페르낭 핀투도 다 같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난 수 년 간 요동 오가며 장사할 때, 건주여진 우두머리들 중 누가 특히 이재에 밝으며 교역으로 세력 넓힐 욕심을 품고 있는지를 사업당 예방에서도 면밀히 기록하고 있었다.

“그저 빼앗는 대신 장사를 할 생각을 품었다는 데서부터 능히 짐작할 수 있지. 위로 올라갈 욕심과 그리할 수 있는 머리를 모두 갖춘 놈은 몇 안 되는데, 그 중 하나가 네놈 교창아더라.

네놈 말대로 지금 황성평에 모인 우리 무리는 수가 좀 부족하긴 하다. 이만큼으로도 왕주 와일란 그놈을 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머릿수 많은 쪽이 좋긴 하겠지.”

“... 생각할 겨를을 주시오. 우리 부 안에서 우리만 홀로 움직인다는 것은, 아무래도 부담이 작지 않소.”

“그러다가 요동총병이 너희 부와 다른 건주 놈들을 부려서 왕주 와일란 그놈을 제압하게 되면 곤란하지 않으냐? 아니면 그사이에 하다 놈들과 직접 교섭해서 이번 소란을 아예 없던 일로 만들 수도 있고.

네 말에 네놈 한 사람 목숨만 달린 게 아니니, 주저하는 게 이해는 간다. 정 불안하면 우리 군대 구경이라도 한 번 하고 가거라.”

이대로 순조롭게 커나간다면, 교창아 대에는 무리여도 아들 탁시(塔克世) 대에는 능히 부 전체의 권세를 노려봄 직하였다. 이대로 명과 조선의 교역이 끊긴다 한들, 몇 년만 지나면 또 어딘가에 구멍이 날 테니 가만 기다려도 될 일이기는 했다.

반면 임꺽정과 함께하게 된다면, 엄청난 위험과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있을 터. 민주당이 얼마나 많은 재보를 만지는지를 얼추 짐작하고는 있던 교창아에게는 솔깃한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흠... 그것은...”

“좋다고? 알겠다. 진작 그리 말하지 그랬느냐.”

갑자기 임꺽정이 묵직한 팔로 교창아 어깨를 잡아끌더니, 방을 나서며 어설픈 만큼 우렁찬 여진 말로 외쳤다.

“말을 준비해라!”

“이보시오! 이것 놓으시오! 놓아라!”

마음 급해지니 조선말은 여진말이 되었는데, 임꺽정 팔을 풀어놓는 데는 어느 쪽도 효험이 없었다.

“이봐, 잘 들어라. 나에게 납치당할 테냐, 아니면 내가 말한 대로 ‘구경’을 나올 테냐?”

“미쳤군, 미쳤어!”

“이미 마음이 제법 동하지 않았더냐? 어차피 그렇게 먼길도 아니다.”

“잠깐, 먼길이 아니라니?”

“황성평은 여기서 산길로 삼백 리 길은 되지만, 이미 니탕카이 그놈이 이끄는 패거리는 지척까지 와 있거든. 내가 떠났을 때 삼십 리 정도까지 와 있었으니, 지금쯤이면 슬슬 여기서도 흙먼지 정도는 보일지도.”

이미 오래 전부터 조선 잠상들이 (건주 사람들에게 두둑히 인정 바쳐가며) 만포에서 요양까지 다니곤 했으므로, 황성평에서 이곳 허투알라까지 찾아오는 것도 아예 불가한 일은 아니었다.

허나 교창아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으므로, 당연히 길목마다 사람을 보내어 감시하고 있었다. 오는 길에 마주쳤을 얄루 기양(압록강) 부락들이야, 어떻게 잘 우회했든 그쪽에서 보내는 소식보다 더 빨리 달려왔든 했겠지만, 교창아 아래의 사람들은 어떻게 이 지경이 될 때까지도 가만히 있었다는 말인가?

“거 봐라. 네놈도 분하게 여기기보다는 궁금해하는 마음이 앞서고 있지 않으냐? 네놈이 우리를 따른다면 그 비법도 가르쳐주마.”

작정하고 맞아 싸우더라도 아직 백정여진을 이겨내지는 못할 허투알라였다. 하물며 미처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저들의 급습에 맞서게 된다면 어떻겠는가.

“휴우, 알겠소. 내 ‘구경’을 나가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구경거리가 허투알라 성벽 바깥까지 직접 찾아왔다. 그와 더불어 아직 그리 크지 않은 성 안쪽도 온통 소란스러워졌다.

“큰일 났다! 얼른 성벽 위로들 올라와라!”

“적이다! 적이다!”

“적이 아니다! 우리 손님께서 데려오기로 한 군사들이니 호들갑 떨지들 말거라!”

이 모든 것이 저의 뜻대로라고 우기면서 – 여전히 그 옆에 찰싹 붙어 있는 ‘암바 버일러’의 존재도 설득력을 높였다 - 부락 사람들을 애써 안심시키던 교창아는 곧 탄식하였다.

“아니, 비법이 뭔가 했더니...”

교창아를 알아보았는지, 백정여진 사이에 끼어 있던 보초 놈들이 후다닥 대열 뒤로 숨는 게 보였다. 제법 두둑한 주머니를 옆에 차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세상에 은으로 해결 안 되는 건, 보통 더 많은 은으로 해결할 수 있더구만. 여차하면 건주여진 때려치우고 백정여진이나 하러 남쪽으로 내려오라면서 쥐어주니 다들 입 다물고 조용히 따라오더라.”

백정여진을 그저 야인보다 조금 나은 동쪽 잔챙이들로 여겼던 다른 부족민들의 눈도 휘둥그레 뜨이고 있었다.

말이 여진이지, 실상 명이나 조선의 군관과 비슷한 정도로 무장하고 있었다. 더구나 개중 검은 옷 입은 자들은 이상한 쇠 대롱을 들고 있었는데, 종종 장사하러 요양 다녀오는 이들은 모양이 이상하긴 해도 그것이 화포의 일종임을 금방 알아보았다.

민주당이 엄청난 재보를 다룬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정말 저렇게 하나의 나라에 견줄 만한 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말인가.

군량을 현지에서 조달할 것이라며 사업당에서 받아온 은이 저렇게 쓰인다는 것을, 그 돈줄을 쥐고 있는 서림이 안다면 한두 번 지청구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었으나, 교창아가 알 길은 없었다.

허투알라 성 앞에 백정여진 군사들이 진을 쳤다. 수는 적었으나, 모두가 말을 타고 있었다. 남들의 눈을 피해 그토록 빠르게 움직일 수 있던 또 다른 이유였다.

“하하, 눈 돌아가는 것 보아라. 역시 너도 궁금한 게로구나.”

꺽정이가 저를 따라온 교창아를 슬쩍 놀렸다.

“나는 일신 무력은 어디 가서 꿀리지 않지만, 수천 대 수천이 맞붙는 그런 싸움에는 별 재주가 없어, 남들의 꾀를 대신 빌려야 한다. 그러니 이렇게 꼼수를 쓰는 것이다.”

그러나 그 꼼수가 여간 꼼수는 아닌 듯하였다.

장수에게 부족한 것은 그만큼 그 아랫사람들이 채워주고 있었다. 백정여진이란 무리에 조선과 여진 사람이 섞여 있다 하여, 당연히 조선 쪽이 쳐지고 여진 쪽이 날쌜 줄 알았는데, 이제 와서 보니 저 흑의군 눈빛이 여진 사람들보다 더욱 형형하였다.

특히 개중 패두 노릇하는 자들은, 여진 땅에 있었더라면 족히 부락 하나의 장정들은 이끌 수 있을 듯하였다.

“우리 민주당은 아주 정직하게 장사를 한다. 네놈이 길잡이 내어주는 것은 이제 정해진 것과 다름 없지만, 군량이나 군사 얼마나 낼 지는 아직 네놈 마음에 달려 있지.

그리고 네가 내는 만큼, 우리가 나라 세워서 벌어들일 이득 중 네게 돌아가는 몫도 늘어날 것이다.”

“우선은 계획을 마저 듣고 결정하겠소.”

“네 맘대로 해라.”

어느새 말에서 내린 자들이 천막 여럿을 치고 있었다. 꺽정이는 그 중 한 곳으로 교창아를 데리고 들어갔다.

“여기 이 사람이 백정여진 이끄는 버일러 니탕카이 요한이다.”

교창아는 ‘니탕카이’ 뒤에 붙는 생소한 이름에 한 번, 백정여진 이끈다는 말에 또 한 번 놀랐다.

“백정여진은 암바 버일러 그대의 무리가 아니었소?”

“뭐, 따지고 보면 내 아래에 있긴 한데, 그리 따지면 내 아래 있는 놈들이 한둘이어야지. 자, 그리고 이것이 너희들 사는 이 땅의 지도다.”

제법 정확한 지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서 저런 것을 구했느냐 물으려다가 관두었다. 보나마나 그 많은 은으로 요동총병 아랫사람 누군가에게 구했을 것이 명백하였다.

“왕주 와일란 그놈의 하다 부는 여기 북쪽, 치치하다(現 창춘 인근)가 거성(居城)이라 들었다. 여기서 북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산세가 덜 험준하다고 하였다. 그쪽으로 빠르게 달려가, 놈의 성을 친다. 네놈이 길잡이만 붙여주면 할 수 있는 일이지.”

설령 교창아와 여타 조그만 부락들까지 합세한다 한들 삼천을 넘기 어려운 전력이다. 그만큼으로는 치치하다를 함락시키기는커녕, 들판에서 한판 붙는다 한들 승리를 장담치 못할 듯하였다.

“어차피 오래 끌 생각은 없다.”

“아무래도 군량이 부족하니...”

“군량을 사들일 은도 아깝고, 또 사람이 부족한 판에 치중 옮기는 데 더 할애할 병력도 없긴 하지. 성을 함락시키든, 와일란 목을 따든, 명나라 놈들보다 먼저 그럴듯한 군공만 세워서 자랑질을 하는 게 목적이다.”

여태껏 듣도 보도 못한 싸움의 목표였지만, 그리 따지면 장사를 위해 나라 세운다는 것도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그쪽으로 생각하기를 관둔 교창아가 다른 것을 트집 잡았다. 들으면 들을수록, 이들 무리와 엮이게 되면 비록 큰 공을 세울지라도 마음의 평안을 얻기는커녕 더욱 곤란한 일만 늘어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올라왔던 것이다.

“지금 이렇게 달려온 것처럼 빠르게 움직인다면, 하다 부의 허를 찌를 수는 있을 테요. 허나 그들이 성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다면, 군량도, 병력도 부족한 당수의 이 백정여진은 뜻을 이룰 수 없지 않겠소?

더구나 하다 부를 치는 것이 아니라 그 공을 요동총병에게 드러내는 것이 목표라면, 어떻게 그 공을 드러낼지도 생각해보아야 하오.

하다의 군세를 정면으로 격파하는 게 아니라, 예컨대 가축이나 조금 빼앗아 달아난다든가, 곳간을 불태운다든가 한다면 저들이 공으로 쳐줄 리 만무하잖소?”

“그것은 걱정 마시오. 우리가 세우려는 나라는, 비록 다른 목적도 있을지언정 본뜻은 아주 올바르다오. 이 대의를 명명백백히 드러낸다면 왕주 와일란과 요동총병 모두 우리에게 눈길을 줄 수밖에 없을 터.”

임꺽정 대신 옆에서 지금껏 가만히 있던 니탕카이가 입을 열었다. 그제야 그에게 시선 돌린 교창아의 눈에, 그 목에 덜렁이는 기묘한 십자 나무조각이 보였다.

교창아는 더 묻는 대신 다른 것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 나무조각 외에도 암바 버일러의 이 괴상망측한 계획에 물고뜯을 부분은 차고 넘쳤다.

“뭐, 이 사람이 그것까지 걱정해줄 이유는 없지. 곤란한 것은 우리 부족의 명운을 걸고 함께 출전했는데 건지는 것 하나 없이 인명만 상하는 일이오.

지금 보니 이 백정여진 군세에 엄청난 보화를 쏟아붓고, 또 열심히 훈련하여 정병을 만들어놓은 것은 족히 알겠소. 허나 사람 하나에 군마 한둘뿐인 듯하던데, 마병(馬兵)을 그렇게 꾸리면 싸움에서는 별 쓸모가 없소.”

“그건 말 타고 싸울 때의 일이지. 우리 조선이 문약하다 하여 말 타고 싸움하는 이치까지 까먹었을까. 저 말들은 그저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데 쓸 뿐이다. 싸움터에서는 진퉁 마병만 빼고 모두 말에서 내려서 싸운다.”

“그것은 우리 여진도 마찬가지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험지에서 싸울 때의 일이외다. 마병과 보병이 섞여 있으면...”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어차피 네놈들이 쉽게는 심복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한 번 거하게 무력을 드러내 보일 심산이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알게 될 게다.”

때마침 흑의군 패두 양벽 – 분명 천민 아닌 양민이었으나, 그의 악명 아는 이들 중 그 누구도 토 달지 못했다 – 이 장막 들추며 고개를 들이밀었다.

“준비 다 되었습니다, 두령, 아차, 암바 버일러.”

“그래, 가서 보자꾸나.”

얼마 지나지 않아, 천지 뒤흔드는 소리가 허투알라 성벽을 울리고, 그 위에서 백정여진 모습 바라보던 이들은 모두 넋이 빠졌다.

여전히 저 기괴한 군대가 하다 부를 격파할 수 있을 지는 의심스러운 교창아였으나, 이미 그렇게 넋이 나간 부족 사람들을 보니 돌이킬 수 없게 되었음을 비로소 알아차렸다.

모르는 이가 보면 그토록 강성해 보이는 화포. 그것을 그리도 많이 가지고 있는 자들이라면, 함께 할 때 얻을 전리품도 엄청날 것이 분명했다. 그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찬 버일러가 될 수는 없었다.

부디 겉보기에는 그럴듯한 저 이상한 무리가, 실전에서도 그 힘 드러내 보이기를 기원할 뿐.

치치하다 성주 왕주 와일란은, 대명에 반기를 들었으나 딱히 후환을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대명의 천병(天兵)이라는 자들도 말이 ‘하늘의 싸움꾼’이지 그렇게까지 대단하지는 않았다. 요동총병 아래의 군사들이야 그나마 날랜 축에 들지만, 나머지는 영 시원찮았다. 당장 몇 해 전에도 그 잘난 황도 앞까지 알탄 칸의 전사들이 들이닥치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렇게 투닥거리는 것이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었다. 가끔 교역을 하다가 못해먹겠다고 때려치고 나오면, 저쪽에서는 토벌하는 시늉을 한두 번 한다. 총병의 앞잡이 노릇하는 건주 놈들이 여럿 개죽음을 당하고 나면, 이쪽에서 먼저 숙이는 시늉을 한다.

그렇게 되면 저쪽도 체면 차린답시고 관대하게 마시(馬市)를 다시 열어주고, 이쪽에서는 입 발린 소리를 몇 번 해준다. 한 번 혼쭐이 난 한인 놈들은 이전보다 관대한 조건으로 거래를 해 준다.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나면, 다시 한인들은 슬그머니 값을 후려치기 시작하고, 그것이 족히 쌓이면 다시 한 번 난장판을 벌인다.

“그래도 이렇게 옛날로 돌아가니 후련하면서도 섭섭하군그래. 지난 몇 해는 벌이가 제법 좋았는데 말이지.”

와일란의 조카 완타이(王台)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삼촌께서 예허 놈들의 칙서까지 모조리 빼앗아 오셨으니, 이전처럼 돌아간다 한들 반드시 이득이 크게 남을 것입니다.”

“그래,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다.”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완타이 저놈에게 와일란 본인의 목이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하다의 영주로 군림하면서, 이 치치하다 성을 쌓고 큰 부를 쌓아올린 와일란의 직감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그의 조카 완타이가 저의 본거지를 버리고 귀부해온 것은, 오직 요양에서 나오던 그 엄청난 부 – 적어도 하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엄청났다 – 에 이끌려서라고.

그러므로 이번 난리로 요동총병의 눈길을 확실히 끌어와, 잠상이 끊긴 만큼의 이익을 칙서를 통한 교역으로 벌충할 수 있게끔 하지 않는다면, 야심만만한 완타이는 그 정도는 자신도 할 수 있다면서 들고 일어날 것이다.

그때였다.

“버일러, 큰일입니다! 남쪽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가 나타났습니다! 우리 성채 쪽으로 달려오던 중 갑자기 숲속으로 숨어들었다고 합니다.”

“수효는 얼마나 되느냐?”

“대략 이삼천 가량이라 합니다. ”

함부로 쫓아내기는 어렵고, 그렇다고 즉시 성을 버리고 도망치거나 주변 다른 부락의 군사를 급히 끌어모을 만한 정도도 아닌, 애매한 규모였다.

“천병인 듯하더냐?”

“그렇지는 않다고 합니다. 말 그대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입니다.”

지금 치치하다에서 끌어모을 수 있는 하다의 정병(精兵)만으로도 적대하려면 적대할 수 있을 터. 그러니 우선 저들과 한 판 싸웠을 때의 손익을 따져보아야 하리라.

“우선은 지켜본다. 놈들이 숲에 숨어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사람을 조금 내어...”

와일란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 쩌렁쩌렁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다 성주 왕주 와일란은 들어라!”

“아니, 대체 어디서...?”

“성 밖입니다!”

급히 나서보니, 과연 그만한 목소리 내게 생겼다 싶은 장사 하나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장사가 저의 이름을 불렀으니, 나서지 않는 것도 체통 깎이는 일이다. 곧 성벽 위에 올라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행색을 보니 와일란 본인도 요양에서 종종 보았던 조선인이요, 그 옆에 있는 것은 영락없는 주션 사람이었다. 갑주를 제법 그럴듯하게 차려입은 것을 보면 떠돌이는 아닌 듯하였다.

“너희는 누구냐!”

“나는 조선국 민주당 당수 임꺽정이고, 여기는 압카이 아파시 구룬(Abkai afasi gurun, 하늘 전사의 나라)의 니탕카이 요한이다!”

이제 보니, 주션 놈이 무어라 말하면 그것을 저 거한이 받아서 (다소 어설픈 말투로) 대신 외쳐주고 있었다.

“여기는 후룬 구룬(Hulun gurun) 재흥(再興)의 터전 치치하다다! 너희는 어디서 굴러먹던 족속이기에 그런 괴이한 이름을 자처하느냐?”

그러자, 이번에는 임꺽정이라는 놈 옆의 니탕카이가 입을 열었다.

“괴이한 이름이 아니라, 마땅히 되찾아야 할 이름이다! 우리는 다 같은 하늘을 이고 살며 다 같은 말을 하는데, 그 아래 또 무슨 부가 있고 위(衛)가 있겠느냐?

우리가 어찌하여 주션 사람인가? 어전(주인)을 모시기에 주션(아랫사람)이라 부른다! 모든 이의 주인이란 누구를 이름인가? 하늘이 바로 우리 모두의 주인이다!”

하비에르와 대화 나누고 마침내 세례까지 받으면서 니탕카이가 스스로 깨우친 바였다. 하비에르 신부는 말하기를, 이미 먼 옛날 그의 조상들이 이 믿음을 따랐다고 하였으니, 어찌하여 겨레의 이름을 ‘주션’이라 하였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적어도 니탕카이 요한 본인은 그렇게 믿었다.)

“우리는 이것을 알기에, 어느 부도, 부족도 아닌 하늘과 주션 사람만을 위하여 싸운다. 그러므로 나라의 이름은 압카이 아파시 구룬으로 지었다.”

그러고서는 다시 거한이 말을 받아 외치기 시작했다.

“너희 하다의 모자란 것들은 이를 알지 못하여, 오직 서로 싸우고 원한 쌓기만을 꾀하고 있다! 이번에도 허튼짓을 하여, 정직하게 사는 이들이 교역하지 못하게끔 만들었으며, 그 전에는 죄 없는 예허 사람들을 쳐서 그 버일러를 죽였다!

그리하여 우리가 단죄하러 왔으니, 너 왕주 와일란이라는 잡놈은 얼른 나오거라! 지금 나온다면 죗값으로 네놈의 머리꽁지와 수염만 밀고 놓아줄 것이로되, 두려워 머뭇거린다면 반드시 몸과 머리를 떼어버릴 것이다!”

그렇게 외치고서, 왕주 와일란이나 그 옆의 왕타이가 무언가 대꾸하기도 전에 두 사람 모두 냉큼 말에 올라탔다.

“왕주 와일란은 죄인이다!”

“하늘의 싸움꾼들이 왕주 와일란을 벌하러 찾아왔다!”

그렇게 치치하다 성을 한 바퀴 돌고 유유자적 사라졌는데, 정신 차린 왕주 와일란이 급히 곁의 몇몇을 보내 쫓으라 하였으나 그저 그 목만 돌아올 뿐이었다.

한편, 그 ‘압카이 아파시 구룬’이 하다 부의 왕주 와일란을 정벌하기 위해 나섰다는 소식은 건주위를 통하여 요양에도 닿았다.

‘정벌하겠다’도 아니요, ‘이미 정벌하러 갔다’였으나, 요동총병 이하 한인들의 눈길을 끈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하늘의 싸움꾼’이라 하면 곧 천병(天兵)이다. 대체 누가 감히 천병을 참칭하여, 그들보다 먼저 나섰다는 말인가?

좋든 싫든 귀추에 주목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이름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소식은 다시 남쪽으로 흘러, 황성평에 모여들었다가 세력이 부족하거나 뒤늦게 왔다는 이유로 백정여진에 합류하지 못한 이들에게 열심히 선교를 하고 있던 하비에르에게도 닿았다.

“허허, 정녕 이것이 섭리라는 말인가?”

요한이 어쩌다가 그런 이름을 새로 세울 나라의 국명으로 정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기묘하였다. 니탕카이 요한이 내세운 국명은 이미 성경에 나오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창세기부터 나오는 그 이름은, 곧 이스라엘(Israel)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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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꺽정이가 언급하는 고구려 비석은 곧 광개토대왕릉비를 말합니다. 고구려 멸망 이후 어느 시점에서인가 옛 국내성 터였던 현 지안(集安) 일대는 ‘황성’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이것이 와전되어 고려 말에는 금나라 황제의 능묘가 있는 곳으로 고려와 여진 양측에 인식되게 된 듯합니다.

지안에서 압록강 반대편에 있는 만포는 건주여진과 조선 사이에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곳으로, 종종 조선 쪽에서도 도강하여 정찰을 하거나 지나치게 강가에 붙어서 거주하는 여진족을 쫓아내는 등의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비석에 그리 깊은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아마도 굳이 금나라 황제의 능묘라는 곳까지 가서 그 비석을 읽어볼 생각이 없던 듯합니다. 가끔 만포까지 오곤 하던 조선의 문관들도, ‘황성에 있는 큰 비석’의 존재는 언급하였으나 비명(碑銘)을 읽으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청대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조선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금석학에 대한 관심이 생길 무렵에는 압록강 건너편은 더 이상 함부로 건널 수 없는 땅이 되어버렸지요.

작중 언급된 ‘주션’의 뜻이 언제부터 위에 ‘어전’을 모시고 있는 ‘아랫사람’의 뜻이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처음 숙신(肅愼) 등의 민족명으로 사서에 등장할 때부터 그런 뜻이었는지 - ‘보통 사람들’의 총칭이라고 생각하면 딱히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 아니면 어느 순간부터 다른 언어의 유의어와 섞여서 뜻이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진족을 통일하기 전부터 누르하치는 언제부터인가 자기 휘하의 여진족을 ‘만주 구룬’으로 지칭했고, 홍타이지는 숫제 만주라는 표현이야말로 오래되었고 대대로 이어진 것이라 주장하면서 ‘주션’이라는 표현을 엄금하였다는 점입니다. 여담으로, 훗날 만주 구룬이 ‘아이신 구룬(후금)’을 이어 ‘다이칭 구룬(대청)’이 되었을 때도 ‘다이칭’이 실제로는 ‘전사’를 뜻한다는 민간어원이 널리 퍼진 바 있었습니다.

작중 등장한 교창아는 누르하치의 조부로, 훗날 후금이 세워지면서 흥경(興京)으로 개칭되는 허투알라에 처음으로 성을 쌓고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인물입니다. 누르하치가 ‘갑옷 열세 벌만 지닌 채’ 시작했다는 유명한 설화가 전하기에, 교창아와 그 아들 탁시의 세력도 약했던 것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이미 교창아 만년에 이르러 이들의 세력은 적어도 숙수후 부 안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정도였습니다.

이성량이 이끄는 명군이 교창아와 그 아들 탁시를 오인사살했을 때, 사과의 의미로 이성량이 누르하치에게 명마 30필과 칙서 30통을 준 적이 있었는데, 당시 여진족 전체 칙서의 총량이 1500통이었음을 감안하면 대략 누르하치 집안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왕주 와일란(본명이 아니라 별명입니다)과 왕타이는 해서여진 중 하다를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시킨 군주입니다. 두 사람 모두 교역을 독점하여 큰 부를 걸머쥐는 방법을 절묘하게 이용하였고, 왕주 와일란이 ‘부하들에게 살해된 뒤 그 어린 아들의 간절한 청을 받아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이어받은 왕타이는 거기에 절묘한 정치술까지 발휘하여 ‘완 한’을 자처하는 세력가가 됩니다. 한때 해서 전체를 연맹으로 묶기도 했지만, 그가 일군 세력은 여진족 통일에 근접했음에도 그의 사후에 공중분해되고야 말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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