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106화 (106/259)

33. 하늘 싸움꾼 (4)

임꺽정은 왕주 와일란이 보낸 추격대의 목을 벤 뒤, 그것을 다시 치치하다 성 옆까지 가서 상냥하게 던져주고 돌아왔다.

당연히 그 도중에 한 번쯤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리라 믿고서, 빚이나 지울 생각으로 뛰쳐나갈 준비를 하고 있던 교창아는 맥이 절로 빠졌다.

“하, 과연. 허세는 아니었다는 말인가.”

암바 버일러를 칭할 만한 무력이었다. 당장 저자가 작정한다면, 홀로 교창아와 그가 데려온 전사들을 몰살시킬 수 있을 터.

“자, 이제 한판 거하게 싸울 일만 남았다! 얼른 이기고 남쪽으로 돌아가자꾸나.

양주에서 한 번 구르고 황성평에서 두 번 굴렀으니, 그 보람을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 배운 대로만 하면 산다! 배운 대로 안 하면 끝나고 나한테 죽는다. 알겠느냐?”

“돌아가면 늠료(봉급) 세 배!”

“내 이번에는 네놈 얼굴 보아두었다! 돌아가는 대로 서림이랑 독대하는 줄로 알고 있어라!”

여진 자칭하는 조선인들은 그 우두머리와 더불어 시끌벅적 떠들면서도, 팔다리 부산히 움직여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시야를 가리는 나무는 베어져 적당한 곳에 가로로 눕혀지고, 몇몇은 나무둥치에 울긋불긋한 헝겊 따위를 매어두고 있었다.

한편, 진짜 주션 사람들은 니탕카이 주변에 모여들었다. 개중에는 숙수후 부 사람도 몇몇 끼어 있었다.

“이제 우리 모두의 주인 되시는 하늘의 뜻을 널리 드러낼 때가 되었다.”

“오오, 버일러!”

“이 싸움은 하다를 멸하기 위한 싸움이 아니다. 오직 우리의 올바름을 널리 드러내어, 아직 빛을 알지 못하는 동포를 구하기 위한 싸움이다!”

분명 나라 세운다는 것은 그저 시늉, 조선을 대신하여 명에 물건 팔 핑계를 만들기 위함이었을 터.

그러나 ‘니탕카이 요한’은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듯했다. 뻔히 임꺽정 듣는 곳에서 저리 떠들고 있다는 것은, 그 역시 한 번 해보라면서 딱히 말리지는 않고 있음을 뜻하리라.

“너희도, 나도 이 가르침을 깨우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모두 진실을 알고 있지 않으냐?”

저들이 말하는 ‘진실’이 과연 참된 사실인지는 교창아도 알 수 없었다. 애초에 그런 것을 기억할 만한 자들은 암바 아이신 구룬이 몰락할 때 한 번, 몽고 놈들이 북쪽으로 쫓겨날 때 또 한 번 쓸려나가 어디에도 남지 않았을 테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스스로 교활하고 영민하다 생각하는 교창아조차 그 말이 그럴듯하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이 땅의 삶은 정직하다. 힘들여 숲을 개간하면 언뜻 척박해 보이는 땅 가운데서 옥토가 드러나고, 짐승만 다니는 듯한 오솔길 따라 꾸준히 달려 나가면 요동과 조선 사이에서 교역의 이익을 취할 수 있다. 애쓴 만큼 얻을 수 있고, 강한 만큼 빼앗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땅의 삶은 괴롭다. 저 남쪽에는 굳이 개간하지 않아도 흙이 비옥하고, 어디 멀리 가지 않아도 사방에서 교역을 위해 찾아오는 땅도 있다고 하였다. 물산이 풍족하므로 굳이 남의 것을 빼앗기보다는 스스로 벌 궁리만을 한다. 허나 그러지 못하는 이곳 북쪽에서는, 스스로 힘써야만 겨우 버틸 수 있을 뿐이다.

“어찌하여 우리의 삶은 괴로운가, 우리는 답을 얻었다! 어찌하면 이 고달픔을 벗어날 수 있는가, 우리는 길을 찾았다!

이번 싸움에서 이김으로써, 우리의 길이 정당함을 널리 보인다! 그리하여 아직 알지 못하는 이들조차 들을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와아아’ 하는 환호가 뒤따른다.

북방의 삶을 겪어본 이들이라면 저 니탕카이라는 녀석이 하는 말에 혹할 수밖에 없었다. 저 말을 퍼뜨리는데 딱히 달변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몇 가지 단순한 사실만 짜 맞추어, 진실은 눈앞에 있고 손 뻗어 붙잡기만 한다고 말하기만 하면 될 뿐.

오늘 싸움에서 이겨 명성을 얻기만 한다면, 저 기이한 믿음의 불꽃은, 마치 봄의 메마른 산에 불이 나듯 번져나가리라.

그렇다면 저 흐름에 (반강제로) 일찍 타게 된 자신은 어찌해야 하는가?

‘우선은 금일 이기고 볼 일이다.’

더 깊게 생각하기 전, 교창아는 몸을 일으켜 니탕카이 놈의 앞에 모여있는 저의 부족 사람들 귀를 붙잡아 끌고 왔다.

“다들 모인 듯하군.”

“그렇습니다! 버일러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왕주 와일란이 성 아래에 모인 저의 군사들을 바라보며, 망루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미 갑주는 차려입은 지 오래였다.

비록 놈들이 갑자기 나타났기 때문에 채비하는 데 다소간 뜸을 들이기는 하였으나, 이천 명이라면 치치하다와 그 인근의 장정만 모아도 능히 제압할 수 있는 규모였다.

“좋다! 놈들의 수가 의외로 많으니, 함부로 숲속에 들어가지는 마라. 그저 주변을 돌면서 놈들을 위압하고, 고개 내미는 놈들만 화살로 제압하면 족하다!”

그 니탕카이와 임꺽정 두 놈들이 이미 저를 도발하였고, 더구나 친위하는 젊은이들 여럿의 목을 베기까지 하였으므로, 치치하다의 성주이자 한 부의 버일러로서 왕주 와일란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저들이 소리소문 없이 치치하다 지척까지 왔으니, 필시 그 무장은 가벼울 수밖에 없었다. 마초를 많이 준비할 수 없으니 말도 사람 태울 만큼만 데려왔을 테요, 따라서 말이 다칠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말에서 내려 보병으로 싸우는 것이 전부일 테다.

그런 자들이므로 치치하다를 함락시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치치하다 성과 인근의 장정만 모으는 대신, 조금 시일이 걸리더라도 하다 부의 모든 전사를 소집한 뒤 산천을 에워싸고 격멸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요동총병과 투닥거리기를 시작하여, 한 번쯤은 싸워서 콧잔등을 납작하게 해주어야 하는 판국이었다. 이런 마당에, 갑자기 치치하다 앞에서 자신을 모욕한 자들을 가만 내버려두었다가는 당장 와일란 본인에 대해 곱지 않은 눈길이 쏟아질 것이었다.

저놈들도 아마 그것을 알기에 이렇게 찔러보는 것을 택했을 테다.

“놈들이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지 않겠습니까? ”

왕주 와일란의 조카 왕타이가 짐짓 신중한 시늉을 하였다.

“그러기야 하겠지만, 우선 한 번 찔러보지라도 않는다면 놈들의 밑천을 어찌 알아내겠느냐?”

와일란 본인이 주춤거리면서 저 ‘압카 아파시 구룬’이라는 잡놈들 때려잡기를 뒤로 미룬다면, 그에 대한 불만을 선동하는 것은 바로 저 왕타이가 될 터였다.

“버일러! 저기 보십시오!”

옆의 졸개 하나가 남쪽 숲을 가리켰다.

“허, 저리 나온다는 말인가?”

보통 마병끼리의 싸움에서 승리를 점할 수 없다면, 말에서 내려 지형에 의지해 싸우기 마련이었다. 헌데 저놈들은 멀쩡한 숲은 내버려 두고,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여차하면 도로 숲으로 들어가겠다는 듯, 숲 등지고 방진(方陣)을 이룬 뒤에는 더 움직이지 않았다.

‘느낌이 좋지 않다... 이놈들, 대체 무슨 속셈이냐?’

와일란은 속으로 자문하였으나, 도저히 답을 낼 수 없었다.

허나 이미 군사는 모았고, 저들도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물릴 수는 없게 되었다.

“니탕카이는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뜨내기요. 임꺽정은 비록 장사로 유명하다지만 그래보아야 조선 사람이다. 그러니 예허조차 꺾은 우리 하다 부의 실력을 알지 못하고 저렇게 거들먹대는 것 아니겠느냐?”

“버일러 말씀이 옳습니다! 명령만 내려주시면 쓸어버리겠습니다!”

치치하다 성과 근처 여러 부락에서 급히 모은 병력은 대략 삼천. 한 번쯤 찔러보고 여차하면 밀어버릴 수도 있는 병력이었다.

왕주 와일란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군사는 내가 직접 이끌겠다. 왕타이, 너는 성을 지켜라.”

“예, 버일러.”

투구를 내려쓰며, 와일란은 성벽 아래로 내려갔다. 그의 말과 궁시가 모두 준비되어 있었다.

급히 달려나왔다지만, 다들 여러 차례 싸움으로 몸에 상처 한둘 이상은 간직한 자들이었기에 당황한 기색은 없었다. 궁시나 갑주가 조금 부족할 수는 있어도, 경험과 머릿수로 족히 밀어붙일 수 있으리라.

“다들 이 내가, 그리고 하다 부가 저 근본 없는 놈들에게 어떤 모욕을 받았는지 들었을 것이다. 저놈들을 어찌 무찌를지, 그것을 굳이 이제 와서 더 떠들 것은 없으리라 믿는다.”

같은 주션 사람들끼리 무리지어 싸울 때에도, 저렇게 보병들만 뭉친 무리를 습격하는 일이 적잖이 있었다.

먼저 궁시 든 자들이 말 타고 달려가, 바짝 붙어 화살을 잔뜩 쏘아준다. 그것만으로 진형을 무너뜨릴 수는 없지만, 놈들의 기세를 죽이기에는 족하다.

이어서 창 든 자들이 달려들어, 놈들의 진형을 깨뜨린다. 뒤이어 보병들이 달려가, 이미 무너진 진형을 헤집으며 저항하는 자들을 모조리 죽인다.

마병과 보병이 모두 있는 패거리로 보병만 있는 패거리를 상대한다면, 그 이상의 책략은 필요하지 않았다.

“요새 내가 장사에만 정신이 팔려서 싸움을 잊었다고 헛소리하는 놈들이 있던데, 허연 닭의 해(1551)에 예허의 추쿵어(出空格)를 누가 잡아 죽였는지는 벌써 잊은 모양이더라. 이번에 저놈들의 목으로써 기억을 되살려주도록 하겠다. 자, 가자!”

함성과 더불어 말과 사람이 함께 움직였다.

이미 치치하다 성에서도 보이는 곳에 저들 진형이 있었으므로, 싱거울 만큼 금방 놈들 앞에 당도하였다.

방진 한가운데서 거한 하나가 창을 들고 나왔다. 앞서 아침에 보았던 임꺽정이었다.

“네놈들이 뜸 들여준 덕에 낮잠까지 거하게 자고 왔다. 한 판 붙어 보자꾸나.”

“흥, 네놈의 건방진 그 혀를... 엇?”

와일란이 뭔가 그럴듯한 대꾸를 내놓기도 전, 임꺽정이 창대를 잡고 빙글빙글 제자리에서 돌다가 휙 창을 던졌다.

“컥!”

“하, 운이 좋군.”

족히 일백 보는 넘을 거리까지 날아와, 와일란 뒤에 있던 마병 하나를 맞추었다. 조금만 더 옆으로 날아왔더라면, 와일란의 목에 그대로 맞았으리라.

“이... 이!”

“와볼 테냐? 아니면 돌아가서 한 자루 더 들고 와볼까?”

와일란이 그 와중에 겨우 칼을 뽑아들고 외쳤다.

“쳐라!”

그것을 본 임꺽정도 피식 웃더니, 저의 무리 가운데로 돌아갔다.

하다 쪽에서는 궁시 든 무리가 우르르 앞으로 나와, 오른쪽으로 몰려나갔다. 저쪽 방진이 숲을 등지고 있으니, 빙빙 도는 대신 방진 앞을 왕복하며 화살비를 쏟아줄 심산이었다.

“손님에게 화살을 대접해드려라!”

“잘 따라붙어라!”

저쪽에서 경계하듯 화살 몇 발이 날아올 뿐, 그 외에는 별 움직임이 없었다. 자신만만하게 궁기병 무리가 비스듬히 방진 앞까지 달려오려던 차.

콰광 소리가 울렸다.

“화포! 화포다!”

“무어라? 어디?”

연달아 방진 가운데서 화포 소리가 나고,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재수 없는 자들 몇몇이 고꾸라지고, 간혹 소심한 어린 말을 탄 이들은 날뛰는 말 잔등에서 떨어질 뻔하기도 했다.

결국 대열은 방진에 바짝 붙어 화살비 내리는 대신, 그대로 거리를 유지하며 뒤로 빠졌다.

그러나 한 발 물러나 그 광경을 보는 와일란은 그저 비웃을 뿐이었다.

“하하! 믿는 구석이 고작 저런 갸냘픈 화포 따위였는가? 퍽이나 ‘하늘의 싸움꾼’ 답구나!”

갑작스러운 일에 다들 놀라기는 했으나, 낙마하는 이들이 고작해야 서넛뿐인 것을 보니 별 것 아니었다. 저쪽에서도 회심의 일격이랍시고 준비한 것이 거의 물거품 된 것을 알았는지, 조선말 욕지거리가 마구 튀어나왔다.

반면 이쪽에서는 와일란 따라 조소하는 소리가 여럿 튀어나왔다.

“화살 낭비할 것도 없다! 바로 들이친다!”

창을 겨눈 마병들이 바로 달려들었다. 저쪽에서 또 한두 차례 우레소리 들려왔으나 그뿐. 마치 가랑비 내리듯 한두 발씩 나누어 쏠 뿐이니, 사람이 쓰러지는 것보다 말이 놀라는 것을 더 걱정할 뿐이었다.

저쪽에서도 그 갸냘픈 화포 – 이제 보니 사람이 들고 쏘는 쇠대롱이었다 – 를 포기하였는지, 우르르 사람이 뒤로 빠지고 대신 창과 칼을 빼든 자들이 앞으로 나왔다.

“물러나라!”

“숲속으로 빠져라!”

“단병(短兵) 앞으로!”

허나 부딪히기 직전 그 모양새를 보니, 여러 무리가 얼기설기 뭉친 티가 역력하였다. 기세야 예리해 보이지만, 기세만으로 싸움을 할 수는 없는 법.

“하, 고작 저 정도 창으로 마병을 막겠다고? 뭔가 그럴듯한 수가 있는 줄 알았더니... 하하하!”

그때였다.

“엇?”

맨 앞에서 달려나가던 자 하나가 말과 함께 고꾸라졌다.

이어서 바로 뒤에 달려가던 자의 말이 두 조각 나 바닥을 뒹굴었다.

“내가 바로 임꺽정이다, 이놈들아! 얼른 와서 칼을 섞어보자꾸나!”

보병이 마병을 만나면 짓밟힐 수밖에 없는 것이 이치이거늘, 어찌 저럴 수 있다는 말인가.

마치 마병 상대로 싸우는 법만 한평생 연마한 것처럼, 이리 풀쩍 뛰고 저리 껑충 뛰며 기수와 말의 머리만을 노린다.

주션 놈들로 이루어진 쪽을 막 짓밟던 이들도, 어느새 더 나아가지 못하고 하나둘씩 쓰러졌다.

임꺽정 하나에게만 눈이 팔린 사이, 다른 놈들도 그 무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앞서 보았던 니탕카이 놈이 하나, 그리고 암만 보아도 주션 사람은 아닌 듯한 검은 옷 입은 장사가 여럿.

방진을 파고들려 하면 바로 짧은 창칼로 낙마를 시키고, 이어서 그 목숨을 끊으니, 역시 하루이틀 해본 솜씨는 아니었다.

어디서 저런 독종들을 모아왔단 말인가. 이대로라면 이겨보았자 말값이 더 나갈 판이었다.

“에잇, 빠져라! 제깟 놈이 암만 장사라 한들 에워싸서 창칼로 치면 끝이다!”

끝내 와일란이 목청껏 지시를 내렸다.

“보병, 앞으로! 말 탄 놈들도 모두 내려라! 삼면에서 에워싼다!”

정직한 힘과 힘의 대결. 그것으로 승부를 보려던 차.

“야, 다들 물러나라! 포수 놈들이 모두 뒤로 빠졌다!”

“숲속으로!”

마병들이 물러난 틈을 놓치지 않고 저쪽 놈들이 등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놈들이 도망친다! 쳐라!”

이제 걱정할 것은 눈먼 유시(流矢)가 전부일 터. 와일란이 숲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사세가 재미 적게 돌아가는 것을 알고 병력을 물리는 걸 보면, 그 임꺽정 놈도 아예 가망 없는 멍텅구리는 아니었다.

허나 저렇게 물린 병력으로 다시 대열을 꾸리는 것이 가능이나 하겠는가? 그저 사방팔방으로 달아날 뿐.

“다 이겼다! 앞으로!”

“놈들의 목을 따자!”

여러 차례 싸움 겪으며, 그 이치를 체득한 다른 전사들도 진심으로 외쳤다.

“야, 조총쟁이들.”

“예... 당수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이구동성으로 답한다.

“뭐? 늠료 세 배? 하는 짓거리를 보니 목숨은 세 개인 것 같은데. 흑의군 흑의군 떠받들어주니까 아주 그냥 세상이 쉽지? 엉?”

괴성 지르며 달려오는 여진 놈들이 무서운가, 바로 옆에서 눈 부라리는 임 당수가 무서운가.

당연히 답은 후자다.

“헉, 헉, 암바 버일러! 다들 물러났습니다!”

과연 양주와 황성평에서 군령 따라 뒤로 빠진 뒤 다시 정렬하는 연습 하나는 죽어라 한 보람이 있었다.

“잘했다.”

교창아를 비롯해 중간에 따라붙은 놈들은 조총수들과 함께 뒤로 빠졌기에 이미 대열까지 다시 만들어놓고 있었다.

이들은 패색이 짙어지면 진작 도망갔을 무리였다. 그럼에도 계획대로 예정한 곳까지 제대로 물러난 까닭은, 첫째로 임꺽정이 어떻게든 살아나와 저들을 해코지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요, 둘째는 아직까지는 계획이 그렇게까지 틀어지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총쟁이들아, 여기서 내게 죽을 테냐, 아니면 한양 돌아가서 죽기 직전까지만 구를 테냐?”

“한양에서 구르겠습니다!”

느닷없는 일성에 다른 이들도 기세가 조금 돌아왔다.

“똑바로 해라, 이번에는.”

“예, 당수!”

그사이 말에서 내린 하다 부 전사들이 숲의 가장자리를 넘어왔다.

“니탕카이, 오른쪽으로 가라. 교창아 놈도 이제는 도망치기도 글렀음을 알 테니.”

“예, 암바 버일러.”

말에서 내린 놈들도 창칼 빼들고 멀리 좌우에서 에워싸려는 형세로 달려들고 있었다.

앞서 멍청한 놈들이 사거리 안으로 들어오기도 전에 제멋대로 조총을 방포하는 바람에, 충분히 그 예봉(銳鋒)을 꺾지 못했다. 포수들이 후퇴할 겨를을 벌기 위해, 나머지 흑의군과 백정여진들이 적잖이 상했다.

그러나 기세가 아직 꺾이지 않은 것은 저들만이 아니었다.

“백오십 보!”

미리 베어둔 나무둥치가 사람의 물결에 묻히는 것을 본 누군가 외쳤다.

“백 보!”

“와아아, 죽여라!”

여진 말 함성이 귀를 멍멍하게 할 무렵, 말 탄 무리 몇몇이 보병과 함께 숲 안쪽으로 들어왔다. 필시 저놈이 와일란이리라.

“칠십 보!”

“쏴라!”

그리고 천지가 뒤집혔다.

“뭐, 뭐냐?”

앞서 그 어설픈 화포 소리와는 도저히 같은 것이라 할 수 없는 굉음. 그리고 순식간에 나자빠지는 전사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게냐?”

와일란이 급히 좌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누구에게서도 답이 나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엉거주춤 서 있는 사이, 자욱한 화약 연기가 걷혔다. 그사이 놈들은 벌써 여러 보 뒤로 물러나 있었다.

저것이 과연 패색 짙은 군대인가? 갑작스러운 회의는, 그렇게 뒤로 물러난 대열의 가장 앞에서 그 빌어먹을 쇠대롱이 입 내밀고 있음을 깨닫게 되자 곧장 그쳤다.

또 한 차례 굉음. 또 한 차례 생기는 시체 더미.

“버일러, 피하십시오!”

“시끄럽다! 물러나지 마라!”

그 와중에도 와일란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저들은 무질서하게 물러나던 것이 아니었다.

숲의 바닥 여기저기에 가로로 눕혀진 나무둥치. 병졸들 쓰러진 곳 근처에 휘날리는 헝겊.

초장부터 이들을 숲으로 끌어들여 저 화포로 짓밟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허나 임기응변으로 그런 수를 써야만 할 정도라면... 아직 와일란 그에게 승산은 있었다.

“도망쳐라!”

“뒤로 빠져!”

“시끄럽다! 앞으로! 앞으로!”

와일란이 급히 대책을 마련하는 동안, 승리를 확신하며 달려 나가던 대열은, 이제 죽은 자와 죽기를 바라지 않는 자들이 뒤섞여 그 자리에 멈추고야 말았다.

“물러서지 마라! 도망치는 놈은 모두 죽여!”

나자빠진 자들만 해도 벌써 일백은 넘은 듯했다. 이만큼 인명이 상했으니, 이제는 완승을 거두고 저 화포라도 빼앗는 수밖에 없었다. 화포가 귀하다는 것 정도는 와일란도 알았다.

“저 화포는 가운데에만 있다! 좌우로 돌아라!”

“마병들과 합세해라! 놈들을 짓이겨버려!”

부관들이 그 뜻을 눈치채고 목청을 높였다.

그나마 제정신 붙들고 있는 자들, 그리고 눈앞에서 칼날 번뜩이는 것에 겨우 정신 차린 이들이 그 말 듣고 양옆으로 빠졌다.

뒤늦게 또 한 번 화포 소리가 울렸으나 – 이제는 제법 익숙해지고 있었다 – 아까만큼 쓰러지지는 않았다.

물론 그만큼 이미 많이 쓰러졌기에 대열에 빈틈이 생긴 탓도 있었으나, 와일란은 애써 그 점은 무시하였다.

“거 보아라! 놈들의 화포는 수도 적고, 또 몇십 보만 떨어져도 무용지물이다! 양옆으로 돌아라!”

이미 죽고 다친 자들, 그리고 꺾인 기세를 생각하면, 어중이떠중이 이천 대 이곳 현지의 노련한 전사 삼천의 싸움이라지만 더 이상 하다 쪽이 유리하다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물러날 수는 없다. 어떻게든 전공을 세워야 한다. 그러므로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며, 그럴듯한 계획이 있는 양 병사들을 내몰았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 여러 차례 방포로 매캐해진 눈앞을 말끔하게 치워주웠다.

그리고 그제야 와일란은 보았다.

“죽어라.”

함성 한 번 지르지 않고, 임꺽정과 그의 군사들이 연기를 뚫고 눈앞까지 달려와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병사를 양옆으로 흩는 만큼, 중앙은 빌 수밖에 없음을.

그리고 눈앞의 저놈은, 어쩌면 치치하다의 모든 장정이 달려든다 한들 못 당해낼 지도 모르는, 흉신악살 그 자체임을.

“하다의 전사 왕주 와일란, 물러나지 않는다!”

그래, 영 미덥잖은 왕타이 놈이지만, 뒤를 이을 놈으로는 그만한 녀석이 또 없다. 이만하면 되었다.

이길 생각은 관둔 채 악에 받쳐 칼을 맞댄다.

아니, 맞댔다고 생각했다.

“허, 허억...”

가슴팍에 불길이 일고, 사지의 힘이 빠진다.

“네깟 놈이 버티면 무엇할 테냐.”

그리고 목에 서늘한 것이 와 닿는다.

“왕주 와일란이 하늘의 벌을 받았다!”

“압카이 아파시 구룬 만세!”

숲속에서 우렛소리와 비명이 이어지고, 마침내 혼비백산한 전사들이 하나둘씩, 이어서 수십씩 무리지어 숲을 빠져나왔다.

비록 왕주 와일란이 참살을 당하고, 그 시신마저 빼앗겼다고는 하나, 정작 죽은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싸움 초장에 가장 앞에서 진형에 달려들었던 마병들, 그리고 숲 속에서 맨 앞에서 달려들다가 포화를 정면으로 얻어맏은 보병들. 다 합쳐본들 손실은 삼백이 채 넘지 않을 터. 물론 그것도 가벼운 손실은 아니었으나, 하다의 기둥뿌리가 흔들린다고는 빈말로도 말할 수 없었다.

허나 살아있는 입이 많은 만큼, 경악스러운 패배의 소식도 빠르게 퍼졌다.

“하다의 이름을 대는 모든 부락에 전해라. 숙부의 원수를 갚는다.”

“놈들은 기고만장한 만큼 지쳐 있을 터. 죽은 만큼 보충하여, 다시 삼천 군세를 이루는 대로 출진한다.”

왕타이가 실추된 하다 부의 이름과 그로 인한 손해를 생각하며 미간을 좁혔다. 숙부의 원수를 갚고 그 시신을 되찾아온다는 명분에 비하면 썩 애통해 보이지는 않았으나, 누구도 이를 지적하지 않았다.

“숲에서 밥 짓는 연기가 올라오는 것을 보면, 그 이천 군세 외에도 반드시 군량과 마초 옮겨주는 아랫것들이 있는 게다. 지금 바로 보낼 수 있는 놈들을 보내어, 누가 어디서 그것을 대어주는지를 살피도록 해라.”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의 숙부와 함께 서 있던 망루에서 숲 쪽을 바라보며 왕타이가 말했다.

“놈들이 못 이기고 빠져나갈 때면 그 길로 나갈 것이다. 그사이 모여든 자들 중 날랜 이를 선발하여, 끝까지 추격한다.”

“예, 버일러.”

이미 와일란의 아랫사람들 중 많은 이들은 왕타이를 버일러로 부를 마음의 준비(두둑한 궤짝 여럿은 덤이었다)를 해두고 있었던 터라, 자연스럽게 그런 호칭이 승계되었다.

“움직여라. 이 원한은 반드시 갚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왕타이의 원한은 영영 갚을 수 없는 것이 되고야 말았다.

밥 짓는 연기는 가짜였고, 이미 자칭 하늘 싸움꾼들은 야음을 틈타 멀찌감치 사라져 있었다.

뒤늦게 사람을 꾸려 추격하였으나, 이미 늦어 있었다.

“황성평? 대체 그곳에 어떻게... 정녕 조선이 임꺽정 그자의 것과 다름없다는 말인가?”

놈들의 흔적은 압록강변의 황성평으로 이어졌다. 강 하나만 건너면 조선인 그곳.

그 압카이 아파시 구룬이라는 놈들이, 조선이 도강하여 쳐들어올 것을 걱정하지 않을 정도의 세력일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저, 확실히 믿는 구석이 있으므로 조선 코앞에 머물고 있는 것일 테다.

섣불리 군대를 보냈다가는 – 건주 놈들 영역을 어찌어찌 잘 통과한다 치더라도 - 조선과의 싸움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왕타이에게 더욱 억울한 것은, 그 뒤의 일이었다.

“버일러, 송구하오나... 추격하면서 저희가 수소문한 모든 부락에 아주 잘못된 소문이 돌고 있었습니다.”

“잘못된 소문?”

퍼져나가는 빠르기나 그 범위를 생각하면, 누군가 작정하고 퍼뜨린 소문이라고밖에는 볼 수 없었다.

“하다 부의 교만하고 간악한 왕주 와일란이 하늘의 벌을 받았다!”

“같은 주션 사람을 겁박하고 괴롭히는 자는 압카이 아파시 구룬이 반드시 벌한다!”

영 조심스러워하는 수하의 입을 통하여 그 허황된 소문을 전해들은 왕타이가, 허탈함을 이기지 못하고 의자에 털썩 걸터앉았다.

“임꺽정 그놈이 장사처럼 생겼기에 진짜 장사인 줄 알았더니, 순 도적놈 아닌가. 승리를 훔쳐가다니.”

그제야 깨달았다. 이 모든 일은 그저 그럴듯한 공을 세우기 위함이었을 뿐이었다. 하다 부를 친 것은, 그저 그 압카이 아파시 구룬의 이름을 여기저기 퍼뜨리기 위한 것이었으며, 왕주 와일란은 거기에 휘말려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을 뿐이라는 것을.

하다의 군주가 목숨 잃은 것을 제하면, 이번 일은 그렇게까지 큰 공이라 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이삼천 대 이삼천으로 붙어, 삼백 정도 죽어자빠지는 일은, 그렇게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드문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저들은 왕주 와일란이 죽지 않았다 하더라도, 다른 엉뚱한 말로써 그들의 공을 포장하고 마치 하다 부가 거의 박살이 난 것처럼 거짓을 퍼뜨렸을 테다.

이미 저 소문 속에서 압카이 아파시 구룬은 이미 하다 ‘따위’는 언제든 벌할 수 있는 막강한 세력이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저들을 상대로 누군가 소문이 거짓임을 입증하기 전까지는, 누구나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을 테다.

십중팔구가 거짓인 말을 반절이라도 믿게 만든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모두가 입을 모아 떠들게 되면, 반드시 요동총병의 귀에도 들어갈 수밖에 없을 테다.

그렇게 왕타이가, 기껏 앉은 버일러의 의자 위에서 한탄하며 홀로 앞날을 고민할 무렵, 황성평에는 요동총병이 보낸 사절이 당도하여 소문 자자한 니탕카이 만나기를 청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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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족은 농업을 주력으로 하면서도 목축과 수렵, 교역을 병행하고, 또 사회구조(및 군대 조직)는 유목민의 그것을 유지하는 등, 독특한 면모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특유의 다면성은, 여진족이 상황에 따라 매우 높은 군사적 적응력을 지닐 수 있게 하는 저력의 근원이 되었지요.

작중 시점에서 두어 세대 뒤, 한창 누르하치가 활약하던 시절의 여진족은 보병과 창기병, 궁기병의 조합을 유연하게 운용함으로써 조선과 명의 골머리를 썩였습니다. 이후 후금이 본격적인 팽창을 시작할 무렵에는 화기까지 빠르게 도입하여 운용하기에 이르지요.

왕주 와일란이 신생 ‘이스라엘’의 명성을 위한 먹잇감이 된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원 역사에서 누르하치도 단번에 건주여진 전체에 명성을 떨치게 된 바 있습니다. 소위 ‘갑옷 열세 벌’만 들고 거병한 직후, 명의 후원을 받던 가문의 원수이자 당대 건주여진 최대의 거물이었던 니칸 와이란(왕주 와이란과 마찬가지로 별명입니다)을 칠 것이라고 당당하게 선포하고 이를 실행에 옮긴 것이지요.

교창아의 형제와 자식들로부터도 떨어져 나와 신생 세력을 일구고 있던 누르하치가 니칸 와일란이 머물던 투런 성을 공격하자, 와일란은 급히 도망치고 투런은 누르하치에게 함락되게 됩니다. 그로부터 3년 뒤에는 마침내 니칸 와일란을 붙잡아 죽이게 되지요.

그런데 후금과 청에서 과하게 윤색한 기록의 행간을 살피면 다소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습니다. 니칸 와일란이 누르하치를 피해서 도망칠 이유는 없었는데, 누르하치 아래에 있던 노미나라는 자가 미리 누르하치의 출정 사실을 니칸 와일란에게 고변하였고, 그 직후 니칸 와일란은 피신을 결정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누르하치는 투런을 점령한 뒤 노미나를 숙청하게 됩니다. 이후 니칸 와일란과 누르하치 사이의 싸움도, 누르하치가 한때 서른 군데나 창에 찔렸다는 말이 나올 만큼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리기까지 하는 등 결코 호락호락하지는 않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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