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하늘 싸움꾼 (5)
요동총병 나문치(羅文豸)는 엄숭의 무리에게 재물을 바치고 그 자리를 얻은 탐오한 자로, 재주랄 것은 딱히 없었다.
그러므로 해서여진의 합달(哈達, 하다)이 난리 일으킨 것을 수습할 엄두는 내지 못하고, 그렇다고 수수방관하자니 북경에서 서계가 칼 가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여, 진퇴유곡 형국에 처해 있었다.
그러던 와중, 난데없이 천병(天兵)을 자처하는 무리가 나타나, 합달을 정벌하고 그 추장을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
어쨌든 잘 되었다 여기면서, 대충 아무나 사절로 보내 적당히 치하하고, 천병이라는 무엄한 이름 쓴 것을 꾸짖으며 그 핑계로 상급은 대충 후려치라는 명을 내렸다.
그 ‘아무나’로 자원하여 나선 것이 바로 철령위 지휘첨사 이성량이었다.
언뜻 생각하여도 저들은 가볍게 여길 만한 무리는 아니었다. 이번에 왕주 와일란을 참살한 것이야 운이 좋았다 치더라도, 그 외 모든 것, 즉 하다를 기습한 것부터 갑자기 요동 전역에 소문이 떠들썩하게 퍼진 것까지는 운의 영역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더구나 그들이 지금 머무는 곳이 조선 바로 옆인 황성평이라지 않은가.
“무언가 있음이렷다!”
이성량은 기회의 냄새를 맡았다. 저들이 숨기고 있는 것을 밝혀내어, 저들의 편을 들어주든 나문치에게 고변하든, 어떻게든 이익으로 삼을 수 있을 듯하였던 것이다.
곧 밝혀진바 크나큰 착각이었다.
“아, 오셨소? 거 요양에서 여기까지 멀면 얼마나 멀다고, 퍽 오래도 걸렸구려. 내가 임꺽정이오.”
“그렇구려... 잠깐, 임꺽정? 임 당수가 여기 왜 있소?”
“뭐, 올 수도 있지. 내가 여기 니탕카이랑 좀 친하거든. 그러니 잘 봐주쇼.”
첫 단추부터 이렇게 끼웠으니, 결국 황성평을 다시 떠날 때까지 이성량은 계속 휘둘려 다녀야만 했다.
임꺽정과 민주당 명성은 이성량도 익히 알고 있었다. 공보를 즐겨 보기도 하거니와 - 요새는 그것이 끊기는 바람에 아쉽게 여기고 있었다 - 일전에 임꺽정이 왕직을 호송하며 요동 땅을 거쳐갔던 것을 먼발치서 보기도 했던 것이다.
“자, 여기 왕주 와일란 놈의 수급이오. 보시오.”
하다 성주 왕주 와일란은 종종 요양에 직접 오기도 했기에, 말하자면 이성량과도 구면이었다. 과연 그자가 맞았다.
“흠흠, 본관이 보아하니 이곳에 모인 군병이 모두 정예하므로, 천조의 위엄을 거스른 왕주 와일란을 능히 토벌할 수 있었음을 알겠소.”
임꺽정 눈치 때문에, 평소 다른 여진 무리 대할 때처럼 하대하는 대신 반공대가 나갈 수밖에 없었다.
여차하면 ‘내가 이래 봬도 서계 어르신과 할 짓 못 할 짓 같이 한 사이인데...’ 운운하며 위압이라도 할 심산이었던 꺽정이였는데, 다행히 상대가 먼저 슬쩍 굽혔으므로 그럴 일은 없게 되었다.
“마땅히 이를 상주하여, 건주·해서와 마찬가지로 위(衛)를 두고 칙서를 내릴 수 있도록 조처하겠소이다. 다만 그 이름은 다소 무엄한 면이 있으니 고쳐야 할 게요.”
“이름은 고칠 수 없으며, 위소를 두는 것 역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가만히 있던 니탕카이가 입을 열었다. 나름대로 공손하지만, 비굴함 대신 자신에 가득 찬 말투였다.
“우리는 압카이 아파시 구룬. 모든 주션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하늘 아래 모든 주션 사람 아우르겠노라 그러한 이름을 내세웠으니 고칠 수 없으며, 이미 와르카(瓦爾喀)·노토(老土)·오도리·우디거, 그리고 우리 백정여진까지 수없이 많은 부와 부족의 사람이 모였으므로 하나의 위(衛)를 이룰 수도 없습니다.”
백정여진 중 진퉁 여진 사람들은 대개 육진 번호 출신이요, 그들이 황성평까지 오면서 마주친 이들 중 이 기이한 원정에 한몫 거들고 보상 챙길 심산으로 따라온 이들도 적지 않았다.
심지어 지금 이들이 있는 천막에서 살짝 떨어져서 눈치 보고 있는 교창아도, 그 조상을 따지면 오도리의 일파가 서쪽으로 옮겨온 것이었다 하지 않았던가.
“정 위소를 두고 칙서를 새로 발급하시겠다면, 우리 구룬에 속한 각 부족에게 나누어 내리셔야 할 것입니다.”
“잠깐, 지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그러니까 무슨무슨 위나 부 따위가 아니라, 조선국이니 일본국이니 하는 것처럼 하나의 나라다, 이 말이오. 나라 국(國) 자 모르시오?”
“우리 압카이 아파시 구룬은 이곳 황성평부터 멀리 동쪽 바다까지 세력이 뻗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바다 끝에서 조선국이나 일본국과도 교역하고 있으며, 또 우리 땅에서 스스로 나는 물산도 적지 않습니다. 가히 나라를 칭할 만하지 않겠습니까?”
제대로 니탕카이 아래에 들어온 영역만 따지면, 황성평‘부터’가 아니라, 황성평과 육진 건너편 일부, 그리고 동해 바닷가의 우디거 부락 몇 곳이 전부일 테다.
그러나 지금 황성평에 멋모르고 모여든 여진 사람들의 출신만 따진다면, 지금 니탕카이가 하는 말이 아예 거짓은 아니었다.
더구나 지금껏 의주에서 오가던 조선과 일본의 물산이 의주 대신 만포를 거쳐 황성평으로 들어오게 된다면, ‘나라 하나 칭할 만한 물산’이라는 것도 역시 딱히 거짓은 아닐 테다.
“후, 이보시오들. 본관이 대대로 천조의 황은을 입은 몸으로서의 체통을 잠시 내려놓고 묻겠소.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것이오?”
“대국에서 조선 사람이 요동 오가는 것을 막으니, 이렇게 가운데서 새로 장사 차리려는 약삭빠른 무리들이 나올 수도 있는 법이지. 뭔 수작이 더 있겠소?”
“그래서, 나라 하나를 세웠다고 거짓을 고하시겠다?”
“나라 세우는 게 뭐 별 거요? 세상에 나라가 얼마나 많은데, 그 나라들 모두가 다 거창하게 천명을 받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소? 개중에는 그냥 사람들끼리 모여서 이제부터 나라라 부르자고 약속하는 경우도 있는 게지.
내 처갓집에 똘똘한 서생이 있는데, 정 그 원리가 궁금하다면 그쪽에 물어보시구려.”
더 따지면 저의 머리만 아파질 것이 명백하였다. 저처럼 임꺽정과 오랑캐 추장 니탕카이 두 사람 모두 뜻이 확고한 이상, 이 자리에서 그 뜻을 말로 꺾을 수는 없을 테다.
“임 당수는 잘 알겠지만, 솔직히 우리 요동으로서도 조선과의 교역이 급하긴 하오. 더구나 그대들이 왕주 와일란을 토벌한 것은 엄연히 공이라 할 수 있지.
그대들이 정 원한다면, 이곳에 모인 무리가 황망하게도 나라를 자칭하며 교역을 청하고 있다고 총병께 고하도록 하겠소. 그리 된다면 교역은 통하게 될 것이외다.”
오랑캐 무리가 통교를 청할 때, 책봉도 받지 않은 주제에 무슨 국왕이니 대한(大汗)이니 칭하며 거들먹거리는 일이 종종 있어 왔다.
개중에는 몽고 달단 악적들처럼 진실로 저들이 대단하다 믿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개는 책봉을 두고 협상할 때에 대비하여 짐짓 허세를 부리기 위함이었다.
이성량이 이들 야인여진 무리도 그러한 계책을 부리는 것이라 둘러댄다면 요동총병도, 조정도 우선은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인 뒤, 꾸짖거나 타이를 생각을 품을 테다.
“대인께서 양해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거 처음부터 그리 말씀하셨으면 오죽 편했겠소?”
“허나 누구도 이 땅에 그만한 세력이 나타났다는 것은 믿지 않을 것이오. 내 잘 말씀 올려보겠으나, 아무리 잘 풀려도 다른 위와 마찬가지로 지휘사 정도가 최선일 터. 왕작(王爵)은 이 사람이 함부로 논할 바는 아니나, 조정에서 결코 그러한 관작을 내리지는 않을 것이외다.
더구나 교역을 임시로 허통하는 정도야 요동총병 각하의 재량으로 행할 수 있으나, 그대들이 참람되이 허명(虛名) 내세웠다 하여 조정에서 금령을 내려버리게 되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소. 나중에라도 좋으니, 불과 몇 년의 이익을 위하여 허세를 부리는 것은 재고해보기 바라오.”
그때가 되면 스리슬쩍 요동총병과 니탕카이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자처하며 뭔가 더 뜯어낼 심산으로 이성량이 끝내 한 마디 덧붙였다.
그러나 니탕카이가 툭 내놓는 답변은 마지막까지 이성량의 허를 찔렀다.
“왕이나 국주(國主) 되기를 원하여 이룩한 나라가 아니므로, 어떤 관작을 내려도 개의치 않습니다.”
“무어라? 허나 이만한 세력을 일구었다면 마땅히...”
“이곳에 모인 이들은 모두 자신의 뜻으로 모였으며, 저와 같은 주션 사람입니다. 우리 위에는 오직 압카 어전 한 분뿐입니다. 그러니 설령 왕작을 내려주신다 한들 어찌 한 사람의 것으로 전유하겠습니까?”
이성량은 물론이요 꺽정이도 금시초문이었다. 그러나 니탕카이는 여전히 한 치도 흔들리는 기색이 없었다. 필시 하루이틀 고민하여 내린 결론은 아니리라. 어리둥절해하던 꺽정이도, 그 기세를 읽고서 니탕카이에게 찬동하는 티를 팍팍 내주었다.
“버일러의 자리는 민의에 따라 사람에서 사람에게 전할 것이요, 결코 집안이나 혈통을 따지지 않을 것입니다.”
두 사람을 몇 차례 둘러보던 이성량이 결국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으로 손을 휘 내저었다.
“정 그러면, 그대들이 책봉도, 관작도 바라지 않고 오직 교역만을 원한다고 말씀 올리겠소.단, 그 ‘천병’ 운운하는 이름만은 반드시 고쳐야 할 게요. 이것만은 본관도 타협할 수 없소.”
결국 니탕카이와 이성량 두 사람이 몇 번 더 이야기 나눈 후, 나라의 이름은 그대로 하되 뜻 대신 음을 따서 ‘자칭 아개국(兒凱國)’이라는 표현을 쓰기로 했다. 오랑캐 무리가 ‘천(天)’을 자칭하는 것은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며 이성량이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선은 최대한 니탕카이 그대의 뜻을 요동총병 각하께도 전하도록 하겠소. 나라를 자칭하는 것만큼이나 도리를 모르는 소리이므로 나중에 돌아올 후환도 더 클 것이지만, 본관이 알 바는 아니지.”
천명이 황조(皇朝)에 있으니, 하늘 아래 모든 나라는 천조의 번방(藩邦, 제후국)이었다. 이 이치를 깨닫고 예의를 갖추어 책봉을 받느냐, 교화가 닿지 못하여 이 이치를 모르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물론 이성량은 무관으로서, 실제로는 결코 그렇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당장 달자(韃子, 몽골 등 북방 유목민의 멸칭)들만 하더라도 힘이 부족하여 딱히 조공을 받지도 않건만 마시(馬市)를 훤히 열어주고 있지 않던가.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그만한 힘이 받쳐주기 때문이었다. 지금 저 니탕카이가 청하는 바가 요양을 거쳐 북경으로 전해진다면, 괘씸하다는 평이 내각 모두에게서 나올 테다.
그로 인해 이곳 요동이 시끄러워진다면, 싸움이 일어나야 비로소 현달할 수 있는 이성량에게는 그리 나쁜 일이 아니었다.
“어떤 후환이 돌아오든 감당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니탕카이의 담담한 답변이었다.
“이봐, 니탕카이야. 정말 괜찮겠느냐?”
떠나가는 이성량을 배웅하며, 꺽정이가 물었다.
“뒷감당 말씀이십니까? 여차하면 모두 다 제 잘못이라고 인정하고서 배 타고 남쪽으로 도망치면 그만이지요. 그만한 각오 없이 어떻게 지금껏 암바 버일러를 따라다녔겠습니까.”
“아니, 그건 당연한 얘기니까 굳이 말할 것도 없고. 임금 노릇 하기 싫다는 것 말이다. 나름 나라까지 세웠으니 감투도 써야 하지 않겠느냐?”
“욕심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요.”
니탕카이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느새 서녘으로 기운 햇살이 황성평 들판을 비추고 있었다.
그 자리에는 그럭저럭 멀쩡히 돌아온 백정여진과 흑의군, 그리고 저들에게 떨어지는 것 없을까 싶어 따라온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의 부락 사람들, 꺽정이나 니탕카이 입에서 저의 몫에 대한 얘기 나오기만 기다리는 교창아와 그의 숙수후 부 사람들 등이 제각각 어지럽게 모여 있었다.
그 와중에 하비에르는 열심히 조선말로 강론을 하고, 그것을 다른 이들이 여진 말로 옮겨주고 있었다. 그사이 설교에 제법 자신감도 붙고, 또 군살도 붙었다.
그 주변에는 하비에르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머릿속에 새기는 듯한 표정의 동족들이 둘러앉아, 마치 어린아이가 할아버지로부터 옛이야기 듣는 것처럼, 완전히 그 말에 빠져있었다.
“허나, 이 모든 것은 제 손으로 이룬 게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이루지 않았는데 어찌 그 주인을 자처할까요.”
“하, 앞서 이성량이 앞에서 제법 그럴듯하게 떠들더니, 진심이었던 모양이로구나.”
“당장 저들 중 임 당수나 제게 제대로 복속해온 자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 말이 제법 일리가 있었으므로. 꺽정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민주당 장삿속 차리고자 시작한 나라 시늉이요, 위엄이라 한들 고작 한 차례 싸움에서 이긴 뒤 마구 떠벌린 것에 불과하였다.
이대로 수십 년이 지난다든가, 아니면 꺽정이와 흑의군이 남쪽으로 돌아간 뒤 니탕카이가 백정여진만을 이끌고 그럴듯한 군공을 여럿 세운다든가 하지 않는 한, 지금 저기 들판에 모인 잡탕 무리가 니탕카이 아래 묶이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이 자리에서 또 한 차례 억지로 풍파를 일으킨다면, 그리하여 정말로 하나의 구룬으로 부락들을 묶는다면, 니탕카이 또한 요한 대신 ‘요 한汗’으로 불릴 수 있을 테다. 그러나 아직 그리할 여력도 안 되거니와, 설령 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한으로 불리기 위해 마구잡이로 원한을 쌓고픈 마음은 없었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이왕 세운 나라를 제법 오래 끌고 가고픈 욕심이 있는 모양이구나.”
꺽정이와 민주당 입장에서는, 이지함과 서림이 강남과 이어지는 장삿길을 뚫기 전까지만 버티면 될 일이었다.
허나 이미 하비에르를 만나 세례까지 받은 니탕카이 요한은 생각이 달랐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저길 보십쇼. 저 사람들이, 이런 자리가 아니었더라면 한데 모여서 어깨 붙이고 있었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너나 내가 이곳을 뜬다면 금방 흩어질 수밖에 없겠지. 누구 한 사람이 가운데를 잡지 않는다면 말짱 도루묵 아니겠느냐.
물론 똘똘한 놈들 몇몇은 교역이 이득 되는 것을 알고서 꿋꿋이 남을 것이고, 너처럼 그 천주도(天主道)에 귀의한 이들도 꽤 남을 테지만 그뿐이겠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에서는 꺽정이가 하비에르 다음으로 가장 유식한 사람이었다.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을 꺽정이가 용케 지적하니 니탕카이가 고개를 떨구었다.
“흠, 그러고 보니...”
“무엇입니까, 암바 버일러?”
“조선에서는 요새 권점으로 저들 대신하여 말해줄 이를 뽑곤 하는데, 여기서도 그리할 수 있지 않겠느냐? 다른 놈들도 제 입으로 너를 그 우두머리로 섬기겠노라 공언한다면, 마음에 찔려서라도 한동안은 두 말 못 하겠지.”
지난 겨울 충주에서 이지함과 나누었던 대화를 되새기며 꺽정이가 말했다.
임금조차 백성들이 마음대로 뽑을 수 있는 나라. 조선국이야 당장 그렇게 되기 어렵다지만, 아예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나라라면야 얘기가 다르지 않겠는가?
“예? 그게 무슨..,”
“그러고 보니 네 아랫사람 유르보리 놈이 말하기를 저 몽고 놈들도 저들 임금을 이렇게 뽑는다고 했었지. 그 ‘암바 버일러’ 소리는 접어두고 조용히 따라와 보거라.”
꺽정이가 뚜벅뚜벅 걸어가, 여전히 소란스러운 패거리들 사이에 가만히 섰다. 니탕카이도 영문 모른 채 따라왔다.
그렇게 가만히 서 있다 보니, 어느새 주변에서는 저들이 알아서 목소리 낮추고, 그 자리에 없는 이들을 데려오러 후다닥 뛰어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노을이 질 무렵에는 자연스럽게 모두가 두 사람을 바라보며 모이게 되었다. 압록강 강물 흐르는 소리와 강바람 따라서 부는 소리까지 훤히 들릴 지경이 되었을 때, 꺽정이가 입을 열었다.
“너희들 중에 스스로 여진 사람이라고 여기는 놈들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옆으로 빠져라.”
처음 흑의군 데리고 북상할 때 내세운 핑계가 무색하게, 흑의군 사람들은 모두 일어나 옆으로 빠졌다. 백정여진 가운데서도 본디 지리산 백정이었던 자들은 적잖이 - 그러나 모두는 아니었다 - 흑의군 따라 자리를 옮겼다.
치치하다 성 싸움에서 다친 놈들까지 부축 받아가며 비키고, 멍하니 있던 하비에르도 ‘신부님도 옆으로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는 유르보리 말 듣고 급히 자리를 떴다. 그러자 꺽정이가 말을 이었다.
“너희들 모두, 우리가 여진 사람들의 나라를 세우려 한다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압카이 아파시 구룬 만세!”
“그런데 그 나라의 임금이 없다. 여기 니탕카이도 저는 아직 임금 하기 싫다더라.”
이번에는 누구도 목청 높이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니탕카이는 아직까지는 버일러 칭하기에도 부족하였다. 그들 사이에서야 무어라 부르든, 제대로 된 부는 커녕 백정여진 한 무리만 이끌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무리가 좀 많이 세고, 그 뒷배도 막강하지만 그뿐이었다.
이를 알기에 니탕카이 따르는 육진 번호 젊은이들도 조심스레 침묵을 지켰다.
나머지도 사정은 비슷하였다. 애초에 여기 모인 부락 사람들 중, 니탕카이 다음으로 강력한 것은 막판에 억지로 끼어들게 된 허투알라의 교창아였으니, 니탕카이와 교창아 두 사람이 조용히 있는 판에 자신이 나설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내가 한 가지 제안을 하려 한다. 나라에 꼭 임금이 있을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 여기 모인 사람들끼리 뜻을 합쳐서, 누구 한 사람을 너희들 우두머리로 내세우는 것이다.”
꺽정이는 교창아를 포함하여 백정여진 뒤를 따르는 다른 모든 부락 사람들에게 약속하기를, 군량과 사람을 내는 만큼 그 몫을 챙겨주겠노라 하였다.
이제 군량은 몰라도, 사람을 많이 낸 부락은 그만큼 덕을 보게 되었다.
그 이치를 깨달은 여러 부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잠깐. 여러 부의 뜻을 모은다는 말이 아니다. 여러 ‘사람’ 뜻을 모은다는 것이지. 애초에 여기 니탕카이가 말하기를, 같은 하늘을 이고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끼리 모인 게 이 나라라고 하지 않았더냐?
그렇다면 멀쩡한 사람 하나하나의 뜻이 한결같이 중할 터. 내가 사는 조선에서도 요새는 이런 도를 따르고 있다.”
이번에는 술렁이는 소리가 더 커졌다. 니탕카이 한 사람만 따르는 백정여진 패거리는 오히려 조용하였으나, 다른 부락들 앉은 쪽에서는 여기저기 눈치를 보며 고개 돌리는 소리가 제법 요란하였다.
“그래, 누군가는 억울하겠지. 이곳 황성평에 사람은 조금 보냈지만 군량을 많이 댄 곳도 있고, 저기 벌써 불만 가득한 교창아 녀석처럼 군사와 군량에 길잡이까지 대준 이도 있다.
어떻게 사람을 뽑아도 볼멘소리 나올 수밖에 없겠지. 그렇지 않으냐?”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지는 가운데, 용기 있는 놈 하나가 ‘그렇소!’ 하고 답하였다.
“그러니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떻겠느냐? 너희들의 우두머리를 이 자리에서 사람 손 세어 뽑되, 한 번 뽑힌 사람이 영영 남의 머리 위에 서는 게 아니라, 적당히 임금 비슷한 노릇 하다가 때가 되면 내려오는 것이다.
한 몇 년쯤 하면 되겠느냐?”
불쑥 들어오는 질문에 놀란 니탕카이가 얼떨결에 답했다.
“그... 네 해 정도면 어떻겠습니까?”
“그렇다고 한다. 네 해. 그 정도면 이번에 우두머리 아니 된 사람도 낙담하지 않고 다음번을 노릴 수 있겠지.”
그때, 교창아가 마침내 일어나 목소리를 내었다.
“임 당수, 이 사람이 겪어본 바로, 사람의 마음은 쉽게 바뀌고 욕심이란 것은 금방 샘솟기 마련이오. 오늘 이 자리에서 누구 한 사람을 짚어 모신다 한들, 네 해 뒤에 그자가 제대로 내려온다는 보장은 없지 않겠소?”
그러나 꺽정이는 씩 웃으며 저의 주먹을 들어보일 뿐이었다.
“그 보장 여기 있지 않으냐?
우리 민주당 딴에도 꽤 공을 들인 일이다. 기껏 너희들 도와서 터전을 닦아두었는데, 막 장사를 하려던 차에 말썽이 생기면 곤란하지. 그렇게 되면 장사 접어야 하지 않겠느냐.”
사람을 붙잡아 허리를 접어버리는 시늉을 하며 꺽정이가 대꾸했다. 분명 장사를 접는다는 게 그 뜻은 아닐 테지만, 이미 꺽정이의 무력을 본 교창아의 입을 막기에는 충분했다.
“우선 한 번 해보자는 것이다. 해보고 잘 되면 계속 이어가고, 안 되면 사 년 뒤에 다시 바꾸고. 너희끼리 산골짜기에서 홀로 버티며 근근이 살아가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느냐?”
“자, 그러면 너희의 조상과 너희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들 하는 것이다. 오늘 여기서 손을 들면, 앞으로 네 해 동안은 군말 없이 이 나라를 위해 우두머리 말을 듣는 것이다.”
“암바 버일러는 임 당수가 이미 선점했으니, 수장의 이름은 수러 버일러(영명한 버일러) 정도가 좋을 듯하오.”
“그건 너희 맘대로 해라. 제법 그럴듯한 이름이긴 하구나.”
벌써부터 사 년 뒤를 생각하고 있던 교창아가 진지하게 제의했다. 그러면서도 이 모임이 정말로 제대로 된 나라가 될 수 있을지, 그리 되었을 때 저의 손익은 어찌 될지를 따지고 있는 교창아였다.
우선, 숙부의 뒤를 이은 하다 부의 왕타이와 척질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반대로 그 하다 부를 무찌른 흑의군과 백정여진을 저의 편으로 삼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앞으로 교역으로 엄청난 이익 얻게 되면, 그것으로써 저의 세력도 불리고, 나아가 숙수후 부 전체를 도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한동안은 이 나라 놀음에 함께해주어도 되지 않겠는가. 명분이 조금 거창할 뿐, 여러 부락들 간의 동맹이라고 생각하면, 이미 여러 번 있던 일이기도 하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주션 사람’이라는 말에 홀리지 않고 나름대로 이익 계산하는 이들은, 교창아와 얼추 비슷한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깨닫게 된바, 그 말에 홀린 이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훨씬 많았다.)
“자, 그러면 권점을 해보자꾸나. 사람 수는 많고 종이는 따로 없으니, 그냥 머릿수 세는 것밖에는 방편이 없겠다.”
가장 먼저 니탕카이가 나섰다.
“볼로두의 손자이자 부얀의 아들인 나 니탕카이 요한은, 압카이 아파시 구룬의 수러 버일러 되기를 원하오. 이에 같은 주션 사람 모두의 동의를 구하오.”
그리고 교창아도 일어났다.
“건주좌위지휘사 겸 오도리 만호 두두(도독) 먼터무의 후손, 시버오치피양구의 손자이자 푸만의 아들인 교창아요.
수러 버일러를 뽑는다면, 마땅히 그 처음은 여기 이 니탕카이가 되어야 한다고 보오. 그가 아니었더라면, 여기 암바 버일러가 이곳까지 올 일도 없었을 테니.
허나 앞으로 이 나라의 제도가 어찌 될지도 모르는데, 처음부터 모두가 한 사람에게만 뜻을 몰아주어 잘못된 전례가 남는 것은 옳지 않다 보오. 그러므로 이 사람도 이렇게 일어서게 되었소.”
그러면서 은근슬쩍, 이 자리에 모인 온갖 잡다한 부락 사람들에게 저의 인상을 깊게 심어주는 교창아였다.
그리고 그 뒤로는 일어서는 자가 없었다.
그리하여 해가 어두워질 무렵, 약 이천오백여 명 중 이천여 명의 지지를 받아 압카이 아파시 구룬의 수러 버일러로 니탕카이 요한이 선출되었다.
나라 하나 세우는 것 치고는 자리가 제법 조촐하였으나, 모여든 이들 중 가축이나 술을 들고 온 이들이 별로 없었으므로 딱히 거창한 연회를 열지는 못하였다.
돌아올 때에 대비하여 미리 사둔 술이 만포에 제때 도착하기는 하였으나, 그것으로는 흑의군들 마시기에도 부족하였다.
그러나 꺽정이가 내놓으라 하면 내놓아야지, 별 수 있겠는가. 자리에 모인 부락의 우두머리들에게 돌아갈 만큼은 빼돌릴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꺽정이가 니탕카이를 따로 불러내어 물었다. 제법 장난기 가득한 말투였다.
“이렇게 얼렁뚱땅 나라 하나 세웠는데, 연 깊은 조선에도 국서 하나 보내야 하지 않겠느냐?”
“그것은 그렇습니다만...”
“내가 임금이랑 천자 다 만나보아 아는데, 너 정도면 그래도 어디 가서 꿀리지는 않을 정도다. 명분 세운다 생각하고, 글이나 한 통 지어보자꾸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양에도 기묘한 국서(國書)가 전해졌다. 황성평에 모인 백정여진과 흑의군 중 가장 문리 밝은 사람이 고작해야 꺽정이였고, 더구나 니탕카이도 나라의 이름을 그럴듯하게 꾸미기보다는 본디 음 그대로 싣기를 바랐으므로, 그 국서는 조선의 언문으로 쓰였다.
당연히 한양의 예조에서는 그 국서 받기를 거절하였지만, 어차피 명분이 중요할 뿐이었으므로 꺽정이는 그리 깊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예조에서 받는 것보다 공보와 정론보 통하여 소식 퍼지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상냥하게도, ‘압카이 아파시 구룬’이라 쓰고 주해까지 달아 ‘하늘 싸움꾼 나라를 이름이라’ 하는 식으로 여진 말의 뜻까지 풀어 쓴 국서 끝에는, ‘수러 버일러 니탕카이 요한’의 이름과 서명도 들어갔다.
그리고 그 아래 이르기를,
‘수러 버일러는 곧 나라를 통령(統領)하는 이의 관직명이니 곧 군왕이면서 재상과 같은 위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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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종종 언급되었던 이성량이 본격적으로 등장했습니다. 원 역사에서는 엄숭이 전횡하던 시절, 위에 상납할 뇌물을 구하지 못하여 나이 마흔 넘을 때까지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였는데, 작중에서는 엄숭의 횡포에 시달리는 대신 꺽정이의 막나가는 행보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영락제가 요동 경략에 나서면서 기존의 요동도사와 진수대장 직책을 합하여 만든 요동총병관 직책은, 요동이 지리적으로 북경에서 다소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온갖 부패의 온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작중에 등장한 나문치 역시 1557년 탐관오리 행적이 발각되어 탄핵당한 바 있지요. 이성량 역시 훗날 요동총병직에 오르면서 숫한 공을 쌓았지만, 그와 상응하는 부패행각을 보인 바 있습니다. 다만 이성량은 그 전임자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군사적 역량과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고, 수십 년 동안 요동총병을 역임하며 사실상 군벌로서 지내게 되었지요. 그러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나오는 이치로, 훗날 누르하치는 그런 이성량의 여진족 통제정책을 역이용하여 자신의 세력을 일구게 됩니다.
작중 교창아가 제안한 수러 버일러 칭호는, 원 역사에서는 누르하치가 건주위 통일 후 자신에게 부여한 칭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