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118화 (118/259)

36. 낙장불입 (3)

이흠례 녀석은 전생에도 나름 재간은 있던 작자라, 무본사 안에서도 꽤나 대접받는 처지인 듯하였다.

그런 녀석도 수락산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지 못하였으니, (아마도) 수락산 어딘가에서 산 주인 노릇하고 있을 두리손 녀석이 제법 치밀하게 패거리를 굴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허나 그 말인즉슨, 저도 제가 뭔 짓을 하는지 그 전모를 모른다는 뜻이지.”

꺽정이가 이흠례와 (한쪽에게만)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나오며 서림에게 말했다.

“두어 명만 더 붙잡아다 족치면 되겠소.”

그 무예와 문재로 한량들을 다루면서 이런저런 잡일 맡아보는 이흠례는, 수락산에 무엇이 있는지, 무본사의 주인 노릇하는 이량이 누구를 모주로 삼고 있는지, 이량이 종국에 노리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 등등은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제가 아는 무본사 사정 중 무엇은 털어놓아도 무방하고 무엇은 죽을지언정 밝히면 안 되는지도 알지 못하였다.

제물포에서는 인천부사보다 민주당 임 당수의 입김이 더 셀 수밖에 없었으니, 그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곧 재물을 인천에서 은으로 바꾸던 물주 녀석이 붙잡혀 들어오고, 그놈은 다시 그 은을 수락산까지 옮기는 녀석에 대해 불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지. 그러니 누가 눈치를 채기 전에 곧장 들이칠 것이오. 돌아가는 대로 흑의군 모아서 다녀오겠소.”

“어째 너무 쉬운 듯합니다.”

서림이 슬쩍 걱정하는 말을 꺼냈다. 흑의군 한 번 움직일 때마다 항상 늠료 더 달라고 보채는 몹쓸 것들이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수락산에 숨은 그놈이 방심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믿는 구석이 따로 있는 것이겠지. 어느 쪽이든 부딪혀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오.”

정 불안하다면 확실한 패를 하나 쥐어 들고 찾아가면 될 일이었다.

『육신전』으로 인해 벌어진 소란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말을 맞이하였다. 주상이 느닷없이 전정공회 열리는 마당에 찾아와, 옛 잘못 바로잡겠노라 밝히면서 민의를 공회 사람들에게 물은 것이다.

논란은 더 큰 논란에 묻히고, 대충 아무나 뽑아 공회로 보내었던 고을에서는 급히 향회가 새로 열렸다. 공회에서 사직의 대사(大事)를 공공연히 논의하는 전례가 생겼으니, 갑자기 엄청난 위엄이 주어진 셈이었다.

똑같은 한전법이라도 그저 각지 군현의 사람들이 모여서 건의하는 것과, 주상께서 그 뜻을 중히 들으시는 모임에서 중론(衆論)이라고 밝히는 것 사이에는 천양지차가 있었다. 또한 이미 그러한 일까지 공회에 물으셨으니 다음에는 더욱 중대한 사안이 공회에 던져질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한편, 한전법 논의되는 모양새와 세태 전반을 공히 미워하던 시골 구석의 사족들은 말은 못하여도 주상께 큰 한을 품었다.

탕평당은 민주당 상대로 저들 편을 들어줄 줄 알았으나, 민주당의 뜻에 반대한다는 것과 사족 모두의 이익을 위해준다는 것 사이에는 또 큰 차이가 있었다.

애초에 경장의 절반 이상을 발의하고 또 추진하고 있는 것이 이준경과 그가 끌어모은 사림 젊은이들이었으니, 탕평당 사람들은 이것저것 갈아엎자 주장하는 민주당의 말을 모두 가로막지 않고 개중 몇몇에는 선뜻 찬성하곤 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탕평당을 믿는 이들에게는 발등 찍는 도끼질과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이 내세우던 근왕(勤王) 두 글자마저도, 전정공회에 임금이 친림하여 정축년 변고를 신원하겠노라 밝히면서 통째로 뒤흔들리고야 말았다.

그들이 절망이야 하건 말건, 저의 출세를 위한 장작만 되어주면 그만이었던 두리손에게는 오히려 더 잘 된 일이었다. 허나 금상의 외척으로서 권세를 부릴 심산 품고 있던 심통원과 이량 등에게는 이야기가 달랐다.

용상 위에 앉은 이가 (명목상으로) 휘두를 수 있는 권세가 커야만, 그들이 임금의 이름을 빌려 부릴 수 있는 몫도 커지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이를 위하여 취했던 모략이 거꾸로 그들을 해치게 되었으니, 어찌 당황스럽고 분통하지 않겠는가?

“이보게, 문보(이흠례).”

나흘 만에 무본사에 얼굴 보인 이흠례에게 이량이 아는 체를 했다.

이흠례는 안색이 온통 흙빛이었으나, 이미 심통원의 집을 다녀온 바 있던 이량 역시 비슷하였으므로 이를 알지 못하였다.

“조만간 수락산을 한 번 다녀와야겠네. 무예 출중한 이들로 사람을 좀 모아주게나.”

“수, 수락산이라 하셨습니까?”

“궁시와 환도는 다들 챙겨서 와야 할 것이야. 그곳에서 만나야 할 사람이 있는데, 그쪽도 나름대로 무리를 모아 거느리고 있단 말이지.”

이량은 두리손에게 찾아가, 이 어찌 된 곡절이냐, 어찌 책임질 것이냐 따져 물을 심산이었다. 기껏 얻은 장자방이 조맹덕에게 연환계 진언하는 방사원이(방통) - 요즘 한량들이라면 모두 그 『삼국지연의』 한 번쯤은 읽어보는 것이 통례였다 - 인가 싶은 짓을 하였으니, 한 번쯤 큰소리 낼 때도 된 것이었다.

근래 두리손이 심통원의 집을 드나들며, 일전에 하였던 것처럼 칼날 들이대며 겁박하는 일은 그쳤으므로 이량은 쉽사리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이량에게 사람의 재간 판단하는 안목이 있었더라면야, 수락산 산장에서 종종 보았던 두리손의 수하들이 여간내기 아님을 알고서, 무본사 한량 열댓 정도로는 택도 없음을 진작 깨달았을 것이었다.

허나 그만한 안목이 있었더라면 애초에 임꺽정과 그 무리를 적대하여 뭔가 모략을 부리고자 마음을 먹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

“연통을 바로 돌리겠습니다.”

“두 시진 주겠네. 해질녘에는 수락산 자락에 닿아야 하네.”

이흠례가 돌릴 연통 중 하나는 무본사 한량들 대신 다른 이에게 전해질 것임을 알지 못하는 이량이었다.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 아니겠소?”

꺽정이가 너스레를 떨자, 옆에서 이지함이 타박을 놓았다.

“시끄럽다, 이놈아. 아직도 날 궂으면 뱃가죽 흉터난 곳이 아린데.”

해 떨어지는 것을 기다리며, 꺽정이는 이지함과 흑의군 몇몇과 더불어 수락산 기슭 으슥한 곳에 숨어 있었다.

이흠례에게 노름빚 씌운 덕에, 굳이 이량의 집에 찾아가 놈을 보쌈해올 것도 없이 그저 조용히 그 뒤를 밟기만 하면 되었다.

잘하면 이량과 두리손 둘이 수작질하는 것 듣고서 뭔가 건질 수도 있을 듯해, 꺽정이는 머리 쓰는 사람 하나 데려올 생각까지 품게 되었다. 그리하여 기대승에게 사단칠정 논변에 대해 서한 한 통 쓰려고 하고 있던 이지함도 졸지에 붙들려 왔다.

“그나저나 그 이흠례라는 자는 어떻게 그리 쉽게 꼬드긴 것이냐?”

“그리 어렵진 않았소. 조금 어르고 타이르니 금방 온순해집디다.”

전생에서 신계현령 시절 하도 꺽정이네 패거리를 자주 괴롭히다 보니, 그 신상 정도는 꺽정이도 들어 알고 있었다.

‘흠례 너 외에도 대신 노름빚 갚아줄 사람 많이 있지 않으냐? 네가 싫다면 그들에게 찾아가주마. 네 배다른 형 숭례(崇禮)가 혼사 치르면서 그렇게 처갓집 덕을 많이 보았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조곤조곤 - 꺽정이 딴에는 - 읊어주니, 이흠례는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하였다.

“따로 피 보거나 험한 말 주고받거나 하진 않았소.”

“누가 거기까지 물었더냐.”

“당수님! 저기 사람 한 무리가 오고 있습니다.”

“자, 복면들 쓰십시다.”

이런 짓 한두 번 해본 것이 아니었던 흑의군들이, 당수님 말씀 떨어지기 전 알아서 검은 천을 썼다.

땅거미 지고 마지막 남은 햇살이 앙상한 나무 사이로 겨우 늘어지는데, 그 사이를 뚫고 사람 열댓이 우르르 산길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나름 비장한 기세로 그렇게 이량의 무리가 지나간 뒤, 꺽정이가 슬쩍 손짓을 했다.

“가자.”

두리손도 이런 쪽으로는 여간내기가 아니므로, 아마 산길 중턱쯤에 망 보는 자 한둘쯤은 두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꺽정이 패거리는 하다못해 개중 가장 몸이 덜 날랜 이지함조차, 청석골 시절에는 멸악산 자락깨나 탔던 몸이었다. 작정하고 감시하여도 놓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하물며 저렇게 기척 숨길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이 저벅저벅 걸어가는 무리가 부지불식 간에 길잡이 노릇을 하고 있음에야 어떻겠는가.

그렇게 얼마나 산길 따라 움직였을까. 게으른 달이 막 비출 무렵, 그 달빛이 기와에 닿아 바스라지는 것이 보였다.

“허, 녀석. 언제 저런 산채를 다 마련했대.”

“형세를 보니, 누가 급히 지은 것은 아닌 듯하다. 아마 윤원형이나 다른 권세가가 지어둔 것을 그대로 저의 것으로 삼았겠지.”

꺽정이 일행은 산장을 에워싸며 그 모습을 감추고 있던 산등성이 위에 올라, 아래쪽에서 오가는 인영의 모습을 살폈다.

그사이 저들이 두리손에게 횡액을 가져다주는 줄 알 리 없는 이량과 한량들은 대문에 닿았다.

“이보게, 두리손이 있는가? 내 공거(이량의 字)일세! 문 열어보게!”

이미 기다리고 있었는지, 곧 문이 열렸다. 마당에서 그들 맞이하는 인영이 제법 많았는데, 그 기세는 엄정하고 몸가짐은 정예하여, 묘지 앞에 세워두는 석인(石人)을 방불케 하였다. 결코 이량 패거리를 환대하고자 저렇게 모인 것은 아닐 테다.

“염탐을 하러 왔으니 제대로 살펴야겠지. 사형, 함께하실 테요? 간만에 도술이나 좀 부려보십시다.”

꺽정이나 이지함 저나 담장 훌쩍 넘어다니는 것은 똑같은데, 도술 부린다는 풍문은 이지함에 대해서만 돌고 있으니 기묘한 일이었다. 얼마 전에는 건천동 사는 이정의 철부지 아들이 경신법(輕身法)이니 허공답보(虛空踏步)니 하는 말은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제게도 가르쳐달라며 찾아오기도 하였다.

“설마 그 도술 타령을 꺽정이 네가 시작한 것은 아니겠지?”

“나는 모르는 일이오.”

그리 말하고서, 저들이 부를 때까지 미동도 하지 말라 당부하고 이지함과 함께 스르륵 산등성이 내려가는 꺽정이었다.

(어디 갈 때마다 이지함 도술 이야기를 떠들어대곤 하였던 오막손이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몰래 내쉬었다.)

“벗들을 제법 많이 데려오셨소.”

두리손이 객을 맞이하며 운을 떼었다.

“그래야만 해명을 들을 수 있을 판이니 내 달리 어찌하겠는가?”

“무슨 해명 말이오?”

“시치미 뗄 텐가? 분명 임거정과 그 꼴불견 무리를 능히 제압하고 우리 뜻에 따르는 이들을 한데 모을 계책이 있다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지금껏 자네 뜻대로 된 일이 어디 있는가?”

연달아 쏘아진 날선 물음은 차가운 비웃음 되어 돌아왔다.

“뭐, 돌이켜보면 욱재 대감(심통원)이나 공거 그대의 뜻이 모두 이루어졌다고는 할 수 없겠구려. 허나 이 사람 뜻은 지금껏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이루어져 왔소.”

“말장난은 관두게.”

“참으로 하는 말이오.”

“그러면 그 뜻이 대체 무엇인가? 얼마나 잘난 심모원려가 있는지 사뭇 궁금하구만.”

“답변이야 이 사람 품속에 고이 있지만, 한 번 듣게 되면 물릴 수 없소. 그래도 듣기를 원하시오?”

“물릴 수 없다? 어디, 백마 목이라도 베어 맹세라도 시킬 셈인가?”

“사람 목이 눈앞에 있는데 백마 찾을 것까지 있겠소? 내 이번 일을 보면서 소란을 제압하는 방도를 깨우쳤소. 더 큰 소란으로 덮으면 됩디다.

무본사 이량의 목 매달린 시체가 사업당 옆에 떡하니 나타나면 그만한 소란이 없겠지. 그렇지 않소?”

“사업당이라! 내가 만일 이 길로 임거정에게 달려가 모두 고해바친다면? 그때도 이렇게 비웃을 수 있겠는가?”

옛날 서슬 퍼런 칼날로 겁박당하던 것이 뒤늦게 떠올라, 저도 모르게 주눅 드는 것을 애써 억누르며 이량이 짐짓 허세를 부렸다.

“하, 해보려면 해보시오. 임거정 그자에게 붙으면 명줄이야 부지할 수 있겠지, 아마도. 허나 그 뒤로 그대에게 볕들 날이 오기나 할까?

임거정의 세상은 어떤 세상일지 생각해본 적은 있소? 누구나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세상? 말이야 좋지. 허나 실지로는 무엇이겠소? 재주만 있으면 천것도 능히 천금을 만질 수 있고, 비상한 머리만 있으면 벼슬하지 않아도 여느 고관대작보다 더 큰 광영을 누릴 수 있는 세상이오.”

두리손이 코웃음치며 마루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량뿐 아니라 그 뒤의 무본사 한량들을 고루 돌아보며, 곧 말을 이었다.

“물론 그런 세상이라면, 별다른 욕심 없이 그저 정직한 벌이로 하루하루 삶을 살아가기 원하는 자들은 제법 편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런 삶을 원해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건 아니지 않소?

임거정의 세상이 당도하여 조선에 완전히 뿌리를 내린다면, 별다른 재주도 없고 머릿속에 든 것도 없으면서 욕심만 많은 자들은 암만 귀한 정(精) 받아 이 땅에 태어났든 개털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오.

공거 그대를 비롯해 무본사 사람들도 죄다 그런 무리뿐이지. 아, 그 얘기 나온 김에. 이보게, 아우분들?”

“예!”

마당에서 기다리던 옛 문객들이 일제히 대답하더니, 이량을 따라온 한량들에게 달려들었다.

그간 저들을 떼어놓고 부산히 달려나가는 세상을 원망하며 갈고 닦았던 무예가 마침내 드러났다.

“아니?”

“으억!”

등 뒤에서 바람처럼 급소 향해 주먹과 발을 내지르니, 촌음 사이에 여기저기서 한량들이 쓰러졌다.

그나마 환도 뽑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던 것은 이흠례 하나뿐이었다.

“이놈들, 이 무슨 짓이냐?”

“그래, 저 이흠례는 개중 조금 나은 축에 들지. 그래보아야 손에 조금 재물 들어가면 기생집과 노름판에 모두 허비하는 작자 아닌가? 장담컨대 조만간 한 번 크게 데이겠지.”

그 말 듣고 찔리는 구석이 아주 많던 이흠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었다.

“자, 어찌하시겠소?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내 본뜻을 듣거나, 아니면 조용히 물러나 저 ‘벗들’ 구완이나 해주시거나. 둘 중 하나요.

물론 여기서 물러난다면, 앞으로 나를 만날 일은 없을 것이고. 욱재 대감께는 대의멸친 하시라 말씀드리겠소. 그쪽은 그나마, 눈앞의 동아줄은 나 한 사람뿐임을 잘 알고 계실 테니까.”

그나마 군현의 사족들과 서얼 군관들, 그리고 쉽고 빠른 영달을 원하는 모리배들을 하나로 묶을 만한 사람은 두리손 하나뿐이었다.

임금의 외척으로서 그나마 누리고 있는 하찮은 권세마저, 임금이 저의 위엄을 여기저기 흩뿌리면 따라서 사라질 수밖에 없음을 모르지 않는 심통원은 그를 따를 수밖에 없으리라.

반면 이량 저는 아직 아무것도 아니었다. 고작해야 덕흥군과 여타 도성 한량들을 묶어주는 것 외에 딱히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여전히 그에게 이를 가는 언관들이 많으니 홀로 뭔가 해볼 수도 없었다.

결국 이량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와 더불어 오금의 힘이 풀렸기에 끝내 두리손을 앞에 두고 주저앉고야 말았다.

“좋네. 들어나 보세.”

“내 팔도와 북변을 떠돌며 견문을 나름 쌓았고, 이곳에 머물면서는 또 나름대로 서책을 벗하였소. 그리고 때로는, 서책보다 민간에 나도는 유언(流言)이 더욱 진실된 뜻을 담고 있기도 함을 깨달았지.

『육신전』 때문에 근래 소란이 있었으니 그 얘기나 마저 해 보십시다. 상당부원군 압구(狎鷗, 한명회) 대감, 서원부원군 간이재(한확韓確) 선생, 인산부원군(홍윤성洪允成) 위평공. 이 세 사람에게 비슷한 점이 있소. 무엇인지 아시오?”

“모두 계유년 정난으로 공신에 오르고 그 뒤로도 영달을 하지 않았는가?”

“그렇지. 헌데 압구 대감은 칠삭둥이 못난이였고, 간이재 선생은 누이를 대국에 팔아넘기고 권세를 휘둘렀으며, 위평공은 그저 사람 죽이기를 즐기는 미치광이였소.

그런데도 하나같이 공신의 반열에 올랐지. 이 이야기를 듣고 깨닫는 바가 있지 않소? 개자식과 허섭스레기들이 높이 올라가는 길은, 그런 세상을 한바탕 불태우고 뒤엎는 수밖에 없소. 그때가 될 때까지 장작을 쌓고 섶을 올리는 것이오.”

“잠깐, 그 말은...”

저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말에 이량은 몸서리를 쳤다. 그러나 두리손의 눈빛, 원한과 탐욕이 사무쳐 범인(凡人)을 뛰어넘은 그 눈빛을 직시하게 되자 차마 말을 더 잇지 못하였다.

“그렇소. 이 조선 팔도는 불타야 하오. 근왕을 마음에 품었다가 좌절당한 시골의 어리석은 무리들, 이름만 사족인 자들의 마음속은 더욱 시커멓게 타야 하고, 때를 만나 과분한 권세 얻게 된 천둥벌거숭이들은 더욱 날뛰어야 하오.

그리고 마침내 다시 싸움이 붙어, 정말로 전란이라는 이름이 어울릴 만큼 각지에 피가 흐르게 되면, 그때는 누구든 정난(靖難)을 바라게 되겠지.”

아직 봄이 되려면 멀었으므로, 산중 밤바람은 서늘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지금이 말복 즈음이었더라도 이량은 식은땀을 그대로 흘렸을 것이었다.

그때였다.

“하하하! 우하하!”

실로 무지막지한 말이 오가는데, 역시 실로 무지막지하게 우렁찬 웃음이 수락산에 울려퍼졌다.

“하하, 아이고. 내 가만 훔쳐들으려다가 웃음이 나와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바로 임꺽정 본인이었다. 두리손조차 놀라 입을 떡 벌리고, 한량들을 그토록 쉽게 농락하였던 문객들은 그 옛날 광통교에서 썰려나가던 저의 동무들 생각에 절로 손발을 떨었다.

“야, 두리손 이놈아. 나름 오랜만에 만났는데, 네놈 애비 아래에 있을 때도 좀스럽더니 지금도 똑같이 좀스럽구나! 나도 내가 아직 변변치 못한 도적이라 여기고 있었는데, 이제 보니 네놈이야말로 장터 좀도둑만도 못한 놈팽이다!”

십 년 전, 염라대왕이 저를 보았을 때 심정이 대략 이러하였을까? 웃으면서 생각하는 꺽정이었다.

허나 해서대적 시절에도 그저 바라는 대로 날뛰면서 욕심껏 빼앗고 죽여 임꺽정이라는 자 살다 갔음을 알리는 것만이 그의 뜻이었다. 무슨 정난 어쩌고 하는 헛바람 든 소리는 꿈도 꾸지 않았다.

그렇지만 꺽정이는 또한 이번 생에서 나름 견문 있었으므로, 두리손의 허세 가득 채워 늘어놓은 말에 일말의 참이 담겨 있음을 알았다. 당장 경덕궁지기 한명회 이야기는 개성 어디서든 들을 수 있지 않았던가.

어쩌면 저렇게 헛물켜는 작자들이 모여서 힘 한 번 썼더니, 어어 하는 사이에 나라가 넘어갔던 것이 꺽정이 자신이 그토록 욕했던 임금의 고조할아비 수양대군이 보위에 오를 수 있던 사연이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그 또한 우스운 일. 그러므로 꺽정이 입에서 절로 또 한 차례 웃음이 거하게 나왔다.

“하하! 그리고 뭐, 이 나라를 불태워? 그래서 네가 지금까지 한 짓이 무엇이냐? 고작 좀스럽게 숨어서 여기저기 불장난한 것뿐이잖으냐? 그나마도 이 몸이 달려가서 한두 번 후후 불었더니 금방 꺼지는 조그만 불이었다.”

“닥쳐라!”

이량 앞에서는 그토록 냉소로 일관하던 두리손의 평정심이 호방한 웃음 두세 번에 금방 무너져내렸다.

“네놈이라고 얼마나 다르더냐? 그저 일신의 용력이 좀 있고, 시운을 약간 얻었기에 과분한 곳까지 올라갔을 뿐이지 않으냐? 고작해야 황해도 산골에서 도적질이나 하였으면서...”

“내가 너희 애비 몰아내고 민주당 세우기까지 고작 삼 년이 걸렸다, 이놈아. 그때부터 지금 다섯 해가 지났는데, 너는 뭘 하였느냐?”

“쳐라! 저놈을 쳐라!”

문객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아니, 달려들고자 하였다.

마치 방금 전 그들이 이량의 무본사 한량들을 제압했던 것처럼, 뒤통수 향해 날아오는 주먹과 몽둥이, 돌덩이에 맞아 쓰러졌을 뿐.

“적습이다!”

“그래, 우리 적(賊) 맞다, 이놈들아!”

그 짧은 틈에 남 머리통 깨면서 다른 이들 놀리는 것까지 잊지 않는 오막손이를 필두로, 흑의군 장정 여럿이 담장 밟고 뛰쳐들어왔다.

허나 문객들 또한 쉽게 당해주지는 않았다. 몇몇이 재수업게 먼저 당해 쓰러지는 사이, 금방 마당 반대편으로 몸을 피한 뒤 대열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마당 안으로 뛰쳐들어온 흑의군 뒤에서, 지금껏 모습 드러내지 않고 있던 문객 여럿이 마침내 병장기의 서늘한 빛을 뽐내었다.

“하, 나름 대비는 했군그래.”

저를 향해 칼까지 뽑은 두리손을 보며, 꺽정이가 피식 웃었다.

이대로 싸운다면 꺽정이 저야 어떻게든 살아나갈 수 있겠지만, 흑의군과 이지함 중에는 다치고 죽는 자 없다는 보장이 없었다.

이미 저의 모습 드러내기 전, 이지함과 이야기 나눈 바가 있었으므로 두리손 놀리기는 이쯤 하기로 하였다.

“뭐, 너도 억울한 것은 있겠지. 너희 애비는 그저 제 세상이라 여기고서 백성들이야 어찌 되든 하등 눈길을 아니 주었으니, 그 백성들 모아다가 내가 무서운 작당 하는 것도 모르고 있다가 그만 뒤통수가 깨져버렸다.

허나 네 상대는 이 몸이었으니, 딱히 성과 못 낸 것도 이해는 할 수 있겠다.”

여전히 할 말을 못 찾고 부들대는 두리손 향해, 꺽정이가 말을 던졌다.

“그러니 내 이 나라를 잠시 비워주마. 어디 마음껏 날뛰어 보거라.”

“무어라?”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느냐? 이 나라는 불타야 한다고. 어디 한 번 거하게 불놀이를 해 보거라. 네놈이 장작을 열심히 쌓은 뒤 불태워주면 우리도 불구경하고 좋지. 내 듣기로, 불타고 남은 잿더미 땅에서는 오곡도 잘 자라고 뽕나무며 닥나무며 돈 되는 나무들도 쑥쑥 큰다더라.”

그제야 두리손은 임꺽정이 허리춤에 아직 달빛을 만나지 못한 칼을 차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임꺽정의 무예와 용력이라면, 자신이 달려들기 전 먼저 몸을 날려 마당을 피로 물들이는 것도 불가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능히 문객들을 죽일 수 있음에도 죽이지 않았고, 그 우악스런 주먹과 발만으로도 사람을 절명시킬 수 있으나 그리하지 않았다.

두리손의 ‘형제’들 또한 두 눈과 두 귀가 모두 열린 채, 숨죽이며 이 문답을 듣고 있었던 것이다.

“한 이삼 년이면 되겠지? 내가 이렇게 너를 위해주는데 아무것도 못한다면 너는 그저 허풍선이일 뿐 하등 쓸모없는 놈임을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좋다! 네놈의 그 웃음을 내 지워주겠다!”

그의 직감이, 어딘가 석연치 못하다는 것을 외치고 있었으나, 두리손은 끝내 저의 입에서 튀어나가는 답변을 막지 못하였다.

산 타고 다니는 것을 예사롭게 하던 흑의군인지라, 한 번 온 산길을 그대로 되짚어 내려가는 일쯤은 이 어두운 밤에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내려가던 중 이지함이 문득 물었다.

“그래서, 어디로 갈 것이냐?”

“듣자 하니 고경명인가 그 양반은 조만간 사업당에서 배를 빌려서 강남 뱃놀이 시켜주는 사업을 시작한다 하던데, 강아지나 송아지나 갔다오는 게 일본이요 강남이라면 나는 더 멀리 가야겠지.”

두리손의 웅장한 대계를 듣자마자 꺽정이와 이지함 두 사람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저것을 역으로 저들에게 유리하게 써먹을 소지가 매우 다분하다는 생각이었다.

꺽정이는 농담하듯 던졌지만, 어디 산불이라는 것이 꼭 한 군데로만 번지라는 법이 있던가. 한 판 거하게 나라를 뒤엎고 그 위에 꺽정이와 이지함, 그리고 이이와 명희 등등이 원하는 나라를 세워나가는 것이 더 쉬울 수도 있었다.

어차피 흘러야 할 피요, 언제고 터져나올 불길이라면, 그들이 미리 준비하고서, 힘 닿는 한 적은 사람들이 휘말리게끔 하면서, 그저 묵은 나무와 수풀만 있는 쪽으로 불길을 몰아갈 수도 있지 않겠는가.

“정말로 한 이삼 년 다녀올 게요. 그 안에 나 없이 당을 잘 이끌어주실 수 있으시겠소?”

“지난 오 년을 우리가 어디 허송세월 하였느냐. 나나 서 별감이 아니더라도 몇 년은 능히 스스로 이끌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큰 해코지 없이 네가 코털 건드린 저치를 막아내려면... 마땅히 더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걱정 마시오. 당장 내일모레 떠나겠다는 건 아니오. 이런저런 준비 하고, 아들인지 딸인지는 몰라도 안사람이 잘 해산하는 것까지 보아야지. 그러지 않았다가는 안사람에게는 좋은 구경 나 혼자 했다고 얻어맞고, 장모님에게는 처갓집에서 안 좋은 것만 배웠다고 한 이삼 년 내내 지청구 들을 게요.”

꺽정이가 농담 섞어 대꾸했다.

“한 대여섯 달이면 족하겠지. 그렇지 않소?”

“네 말대로, 삼 년 기한 안에 나라도 한 번 뒤엎었거늘 여섯 달이 어찌 짧다 하겠느냐.”

이지함이 듬직한 미소로 꺽정이에게 화답하였다.

“그래서 대체 어디로 가겠다는 것이냐?”

“애우로파 다녀오면 얼추 삼 년은 되지 않겠소? 장차 말라카 동쪽에서의 모든 교역을 독점하려면, 도적질 하기 전에 맞수들 동정을 잘 염탐하여야겠지.”

핀투의 보고서를 받고 동양에서의 세력 확장에 대해 제법 그럴듯한 계획을 세우고 있던 리스본 리베이라 궁(宮)의 주앙 3세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독일과 이탈리아, 카스티야, 아라곤, 레온 등등 읽다가 숨이 넘어갈 법한 여러 나라의 왕관을 쓰고 있던 카를 5세 등 수많은 유럽의 군주와 상인들은, 저들의 운명이 엉뚱한 곳에서 벌어진 엉뚱한 사건으로 인하여 곧 한 차례 큰 변란을 겪게 될 것임을 알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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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진 것처럼, 계유정난 당시 수양대군을 따라 공을 세운 훈구대신들은 정인지·신숙주 등 세종 시기부터 활동하였던 엘리트 관료와 한명회·권람 등 제도권 변두리에 머물던 이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두리손이 꼬집은 것은 이 중 후자의 경우에 속합니다.

한명회·홍윤성과 더불어 지목당한 한확은 영락제의 총애를 받은 - 그리고 그로 인해 영락제가 죽자 순장을 당한 - 후궁 강혜장숙여비 한씨의 남동생이었습니다. 이후 한씨의 미색을 전해들은 선덕제에게 누이동생(공신태비 한씨)을 사실상 공녀로 바쳤는데, 이는 『실록』에 기록될 만큼 당대에도 올바르지 못한 짓으로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공신태비 한씨는 선덕제 사후에도 순장을 당하지 않고 성화 연간까지 장수하였는데, 한확의 일가는 오히려 이를 이용하여 조선에서 떵떵거리며 살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한확 역시 두 딸을 왕가에 시집보내어 성종의 외조부까지 될 수 있었습니다.

대양서생 중 하나로 종종 언급되었던 고경명은, 원 역사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노구를 이끌고 의병장으로 활약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까지는 초야에 묻혀 있을 수밖에 없던 사연이 있었지요. 원 역사에서는 1558년 식년과 장원급제로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는데, 이후 1563년 홍문관 교리로 재직하던 중 삼사 언관들이 이량을 탄핵하려 한다는 것을 장인 김백균을 통해 이량에게 누설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탄핵당합니다. 이후 그 재주를 아낀 선조가 그를 사면하려 하자 사림 언관들이 극렬히 반대하는 등, 이 사건으로 고경명은 제대로 ‘찍히게’ 되지요.

이 사건의 전말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경명의 능력과는 별개로 그 성품에 선비답지 않은 화통한 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그에게 얽힌 야사와 민담을 보면, 젊었을 적 황해도 유람을 갔다가 기생과 얽혀 ‘스캔들’을 겪었다든가, 저승사자에게 끌려갔다가 사자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뒤 도망쳤다는 둥, 여러모로 차분한 선비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가 많습니다. 이러한 일화가 『어우야담』 등 당대인들의 글에 남은 것을 보면 이미 그 시대에 이러한 인식을 받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한 성품의 고경명이라면, 다른 선비들보다 먼저 조선에서 등장한 ‘자본주의 코인’에 빠르게 탑승하는 것도 불가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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