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낙장불입 (4)
“여차저차하여... 한 삼 년 쯤 조선국을 떠나 있으려 하오.”
밤에 이지함과 함께 어딜 몰래 다녀온 꺽정이가 진천뢰(震天雷) 터지는 소리를 하였다.
“이 사람이 무어라 말할지는 잘 알리라 믿네.”
사위라고 있는 자가 근심걱정을 몰고 다니기는 하지만, 결코 허언(虛言)은 하지 않음을 잘 아는 신씨 부인이 잠시 내렸던 정적을 깨뜨렸다.
명희 또한 입꼬리를 치켜세우며 억지 웃음을 짓고 있었는데, 그 기세 자못 살벌하여 지아비의 웃음과 닮아 있었다. 품에 안긴 검손이만 어쩔 줄 모르고 두리번거렸다.
“그러니 사위 또한 나름대로 항변할 논리를 준비해 왔겠지. 우선 들어보고 재고토록 함세.”
꺽정이가 중대한 결심 품었음을 수락산 돌아오자마자 밝혔으므로, 이 자리에는 그 옛날 봉산에서 봉기할 때 서약하였던 다섯 사람에 더하여 이이와 명희까지 모두 모여 있었다.
“내 수락산에서 두리손이를 만났소. 별 같잖은 모의를 하고 있던데, 여기 우리 사형과 그 자리에서 머리 맞대고 고심한바 장계취계(將計就計, 상대의 계책을 역으로 이용함)를 하면 좋겠노라 결론을 내렸지.
삼 년 먼 길 다녀와야 하니, 채비하는 데만 몇 달은 족히 걸릴 게요. 지아비 되어서 안사람 해산하는 자리를 아니 지킬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러니까 나 자는 사이에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린다든가 하지는 마시오들.”
이원수가 ‘허, 거 농담도.’라고 하려다가, 어째 안사람과 딸의 눈빛이 범상치 않음을 뒤늦게 깨닫고 입을 도로 닫았다.
“한 번쯤 서양을 다녀와야 하기는 했습니다.”
저의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없던 이지함이 당당하게 말했다.
천주 서생 이지의 서한을 받았을 때부터 이지함 머릿속에 깊게 박힌 생각이었다. 이미 대양을 누비겠노라며 분표까지 열심히 팔았으니, 움직일 때도 되지 않았던가.
“전적을 상고하여 보아도, 원(元)이 무너지면서 대식국(大食國, 아라비아 반도)과 파사국(波斯國, 페르시아)까지의 바닷길이 끊어진 뒤로 동방과 중원의 사람들이 그곳까지 왕래한 바는 없었습니다.
우리가 장차 대양으로 나아가려면, 막힌 길을 뚫고 낯선 바다와 사람을 낯설지 않게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사형 비롯하여 저 남쪽 오랑캐 만나보고 온 이들이 하나같이 말하기를, 살갗 색깔과 입말이 다를 뿐 오장육부 칠공구규는 죄다 똑같다 합디다.
내 겪어본 바로도, 사람이 귀하든 천하든, 북녘에 살든 남쪽에 살든 다 똑같소. 줘 패면 말을 듣고 만만하면 말을 안 들을 뿐이지.”
한때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의 실권을 제멋대로 휘두르던 노인의 등짝을 직접 걷어차 본 꺽정이 말이었다. 만인(萬人)의 평등함을 논하는 데에 있어 이만한 증인이 또 있으랴.
“그러니 말이 다르고 풍속 다른 자들과 사정 통하는 데는 여느 역관보다도 내가 더 나을 것이오.”
꺽정이가 싱긋 웃으며 주먹을 들어보였다.
“사정이 그러하니, 한 번쯤 먼바다를 다녀오는 것도 마땅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허나 말씀하시기를, 그 두리손이라는 자가 이미 흉계를 꾸미고 있다 하시지 않았던가요? 아무리 제갈무후라 하더라도 만리 밖에서 장계취계를 해낼 수는 없을 텐데요.”
명희가 어머니 닮은 말투로 지아비에게 물었다. 그사이 검손이는 달아나 방구석 그림자 사이 숨었다.
“어차피 내가 있어도 계책을 마련하고 세우는 데 별 도움은 안 되지 않았소? 나는 그냥 여기저기 들이받고 때려잡으면서, 가는 길에 바위 놓여있으면 그걸 들어서 던지든 으깨든 하는 사람이었지.”
싸움에 비유하면 공성(攻城)은 언제든 할 수 있어도 수성(守城)엔 별 도움이 안 되는 장수가 꺽정이였다.
“소생이 듣자하니, 두리손 그자가 꾀하는 모략이란 대개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이지함이 다시 나서서 한참 설명을 하였다.
그가 노리는 바가 무엇인가. 지금껏 하는 짓을 보았을 때 그자가 부리려 하는 수완은 무엇이며, 과연 그럴 만한 재간이 있기는 한가.
“... 이제 임 당수가 삼 년 기한을 그자에게 주었으니, 그는 따르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만재루 한온이가 하던 말을 빌리면, 이런 게 바로 낙장불입이라오.”
지닌바 무재(武才), 그리고 어디서 굴러먹으며 배웠는지는 몰라도 제법 쌓인 듯한 견문. 이것이 두리손이 가진 것의 전부였다.
범상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것만으로는 꺽정이와 민주당에 반하는 자들을 모으기에 턱없이 부족하였다.
심통원이며 이량이며, 그러한 작자들이 두리손이 내놓는 계책을 따르고, 그 가산을 바쳐 두리손의 하는 일을 도운 것은, 바로 두리손이 장차 그들이 바라는 바, 즉 꼴보기 싫은 임꺽정이를 고꾸라뜨리고 나라를 그들이 제멋대로 만지작거릴 수 있게끔 해줄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일 터.
그리고 어젯밤 만남으로, 꺽정이는 그러한 믿음을 정면으로 들이받아주었다.
“이제 놈들 주변의 사람들은 놈을 볼 때마다 의심할 수밖에 없겠지. 과연 이자가 천하의 임꺽정이를 무너뜨릴 수 있을까? 오히려 죽도 밥도 못 이루고 어영부영하다가 애먼 주변 사람들에게 해코지나 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녀석은 무리해서라도 일을 벌일 수밖에 없소.”
두리손이 상냥하게 저의 뜻하는 바를 다 떠들어주지 않았던가. 수양대군 없이 저 홀로 한명회 노릇을 하겠노라고.
이미 제법 쓸만한 왕자군 하나도 손에 넣었고, 듣자하니 균역법 통하여 제법 세를 불리고 있는 각지 무관들 상대로도 포섭의 손길을 뻗치고 있는 듯하였다.
“그래서, 안사람은 언제 범이 달려들지 모르는 숲속에 남겨두고 사위 홀로 멀리 가겠다는 말인가?”
“장모님, 솔직히 말해서, 장모님 따님과 범이 둘이서 있으면 명줄 걱정해야 하는 건 범 쪽 아니오? 내 배필 되겠노라고 무예 닦은 게 몇 년인데.”
그 옛날 명희의 조총 한 방에 이마가 꿰뚫려 호피 신세 되어버린 대호의 원귀가 남아있다면, 그 말 듣고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남겨두고 가는 게 아니오. 맡겨두고 가려는 것이지.
흑의군은 한 스물 정도만 대동하고 갈 심산이오. 나머지는 모두 안사람에게 맡길 테고.”
여인이 군영 하나를 이끈다는 것은 듣도보도 못한 일이었다... 고 말하기에는 이미 전례가 훤히 옆에 있었다.
하다 부와 싸울 때, 조총수들이 제대로 방포를 못하여 자칫 대사를 그르칠 뻔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한동안 흑의군들을 온통 드잡이질하였던 사람이 바로 명희였다.
개중에는 차라리 청석골 시절 임 당수만 상대할 때가 편했노라며 좋았던 옛날을 추억하는 자들까지 나올 지경이었으니 더 말할 것이 없었다.
“사업당은 이미 서 별감이 맡아서 더할 나위 없이 잘 일구고 있고, 당 전체의 운영은 여기 우리 모주께 맡길 것이오. 장모님이 괜찮으시다면 우리 사형 모주님을 좀 도와주시면 좋겠소. 우리 율곡 도령도 마찬가지고.”
“이미 나라를 바꾸어나가기 위한 씨앗은 지난 오 년 동안 모두 뿌려두었습니다. 이제 싹이 터서 줄기가 올라오고 있으니, 임 당수가 없어도 그리 쉽게 뽑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말하면서도 스스로, 그리고 곁의 다른 이들에게 대견한 마음이 드는 이지함이었다.
개중에는 처음부터 그들이 뜻하여 벌인 일도, 그때그때 임시변통으로 응하다 보니 제법 그럴듯한 성과를 거둔 일도, 그저 누굴 골탕먹이려고 했던 일이 좋게 풀리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 기원이 어찌 되었든, 큰 일과 사소한 일 여럿이 모여 마침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아들아, 저게 무슨 말이더냐.’ 하고 조용히 묻는 이원수에게 이이가 열심히 설명해주었다.
논밭을 갈아서든, 재주껏 물건을 만들어서든, 나라 안팎의 물산을 팔아서든 재주껏 치부할 수 있는 세상이 다가오고 있었다. 두려워하는 이도, 싫어하는 이도, 반기는 이도, 기뻐 날뛰는 이도 있었지만, 그들 모두 저들의 어버이 대와는 다른 세상을 살아가게 되었음을 이제는 알았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구분은 생기고, 그 격차는 앞으로도 좁혀지기는커녕 더욱 넓어지겠지만, 적어도 가진 자 사이, 가지지 못한 자 사이의 양천 구분은 그 의미를 잃게 될 터였다.
선비와 백성이 모여서, 나라의 정책과 올바른 법도, 심지어 선대왕의 잘잘못까지 논할 수 있게 되었다. 선비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귀양을 가거나, 사람 한 명 잘못 만나고 말 한 마디 잘못하였다 하여 그 목숨을 잃는 일은 지난 오 년간 단 한 번도 벌어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임금 또한 이렇게 되어가는 세상을 비로소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섣불리 뽑으려는 놈이 나온다면 더욱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겠지. 장계취계라는 것은 그것을 이름이오.”
꺽정이가 단언하였다.
“물론 작정하고 훼방을 놓으려면 능히 놓고도 남을 것이오. 이미 두리손 그 녀석에게 청석골에서도 한 번 당하지 않았소이까. 된통 당하지 않으려면 마땅히 대비를 해야겠지. 녀석이 눈 뜨고 당할 수밖에 없도록.”
임 당수가 조만간 어디 멀리 가려 한다는 말이 한양을 시작으로 조금씩 퍼져나갔다.
그리고 마치 그 소문 참인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꺽정이네로 끌려온 사람이 하나 있었다.
“아이고, 왜 또 접니까?”
제물포에 돌아오자마자 이쪽으로 붙들려 온 페르낭 멘데스 핀투가 제법 능숙한 조선말 - 자연스레 ‘Aigo’ 소리가 나오는 데서도 짐작할 수 있었다 -로 투덜거렸다.
그사이 제물포에서의 교역에 자신의 명운이 걸리게 되고, 또 조선 사정도 조금은 더 알게 되었기에, 꺽정이 앞에서 볼멘소리할지언정 공대하는 말투는 변하지 않았다.
“그야 임자가 가장 만만하니까 그렇지. 근래 제물포나 히라도 드나드는 포르투갈 사람이 좀 많소? 그대가 조선에서 큰 이문 거둘 수 있으리라고 허풍 쳤다는 얘기는 이미 우리 당도 잘 알고 있소.”
그리고 제물포에서 심통원의 집에서 나온 재물이 은으로 바뀌는 것도 알아챌 만큼 소식 밝은 사업당이었으므로, 핀투 따라 말라카에서 넘어오는 포르투갈 사람들 통하여 핀투 쪽 사정을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꺽정이는 핀투를 데리고 곧장 사업당으로 향하였다. 이미 서림이 『천하전도』를 펼쳐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내 그대 나라를 한 번 놀러 갔다 올 생각이오. 배 좀 빌려주어야 하겠소이다.”
배 빌린다는 얘기는 이미 서림에게서 들었던 핀투였다. 지난날 암본 다녀온 것보다 더 긴 항해가 될 것이라며,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양의 은을 꺼내보였다.
그러므로 덜컥 받아들였는데, 하필 태워야 하는 승객이 임꺽정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오가는 시일 포함하여 대략 이 년 반에서 삼 년쯤 생각하고 있소. 그대 고향까지 가는 데는 대략 얼마나 걸리겠소?”
“계절에 따라 다릅니다.”
“계절은 어떻게 잘 타고, 중간에 폭풍을 만나면 알아서 잘 피하든 목숨을 걸고 뚫든 한다고 치면?”
“그렇다면...”
인천을 떠나 말라카까지는, 중간에 천주쯤에서 한 번 기착한다 치면 대략 세 달.
말라카에서 고아까지 - 역시 천운이 따른다는 전제 하에 - 한 달 보름.
“여기까지 넉 달 보름입니다. 허나 아무리 마음이 급하다 하더라도 고아에서는 최소 한 달은 머물러야 할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소?”
“고아에서부터는 정말로 험난한 여정이 될 것이기 때문이지요.”
고아를 떠난 뒤에는, 인도양, 이이가 『격몽요결』 <천지(天地)> 편에서 쓴 역어로는 천축남양(天竺南洋)을 가로질러 아불리주, 즉 아프리카 동안(東岸)까지 항해해야 했다.
“동쪽 해안에는 제법 괜찮은 항구들이 많이 있지만, 개중 우리에게 제대로 복속된 곳은 한참 남쪽으로 항해해야만 나옵니다. 모가디슈나 잔지바르 같은 곳에서 발목을 잡히지 않는다고 가정하더라도, 모삼비크(모잠비크 섬)의 상 세바스티앙(São Sebastião)까지는 가야 제대로 숨을 돌릴 수 있겠지요.
그러니 그나마 안전하게 가려면, 고아에서 싣을 수 있는 만큼 건량과 술을 쟁여놓은 다음 단번에 희망봉을 도는 수밖에 없습니다.”
핀투 눈앞의 도적 두목에게 지금껏 그래왔듯 운이 계속 따른다면, 고아를 떠나서 희망봉을 돌 때까지는 석 달.
그리고 희망봉에서 북상하여 리스본에 닿을 때까지는 다시 석 달.
모든 일이 잘 풀린다 치더라도, 편도로만 일 년이 걸리는 꽤 먼 길이었다.
“더구나 말라카나 고아에 기착할 때 말썽이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도, 중간에 역병 한 번 돌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게다가 가는 길에 적어도 한 번은 폭풍우를 만나게 되겠지요. 최소한 열다섯에서 열여덟 달은 걸린다고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너무 오래 걸리는데.”
말이 삼 년이지, 실제로는 넉넉잡아 몇 개월 전쯤에는 조선 근처로 돌아올 심산이었던 꺽정이가 한 소리 하였다.
“위험하기도 하고요.”
명희도 한 마디 덧붙였다. 갈 때 일 년 반, 올 때 일 년 반이라면 그저 그 포르투갈 도읍 구경만 하고 와도 삼 년이 꼬박 걸린다는 말 아닌가.
“차라리 이쪽으로 가는 건 어떨까요?”
삼 년 내내 지아비를 바깥에서 노닐게 할 마음은 없던 명희가 모가디슈에서 한참 북쪽, 소코트라(Socotra)라고 표시된 작은 섬에서 들어가는 뾰족한 만(홍해)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이고, 아씨, 그쪽은 절대 안 됩니다.”
대충 이십 년 전, 멋모르고 홍해 안쪽까지 들어가는 위험천만한 항해에 따라갔다가 투르크 해군에 나포당하여 수난을 거하게 당한 바 있던 핀투가 몸서리를 치며 말했다.
“그곳에는 크리스탕(Cristão, 기독교인)이라면 치를 떠는 악독한 자들이 득시글거립니다. 애초에 그 악마의 자식들이 동방으로 향하는 길을 막았기에 아프리카를 도는 항로를 개발하게 되었는데...”
“그거다!”
갑자기 탄성이 나기에 돌아보니, 꺽정이도, 이지함도 아니요 서림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헤헤, 그렇지. 당수, 이번에 가실 때 꼭 저쪽으로 가셔야 하겠습니다.”
“서 별감님, 홍해 쪽은 정말로 곤란합니다.”
“선장네 나라 사람들이야 그렇겠지. 우리는 그쪽과 하등 원수진 바가 없지 않소?”
꺽정이가 서림 말을 거들고 나섰다.
“그리고 뭔 요괴의 씨앗이니 하는 소리까지 하시오. 듣기로 그쪽에서 믿는 바나 그 천주도인지나 별 차이 없다 하던데. 우리 조선국 중들도 선종이니 교종이니 하지만 다들 잘 곰살맞게 잘 지내고 있소이다.
그나저나 서 별감, 하던 말 마저 해 보시오.”
기독교인들과 무슬림들의 일천 년 싸움을 고작 선·교 양종(兩宗)에 빗대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 사악한 술탄 술레이만이 비엔나 앞까지 쳐들어온 것이 고작 삼십여 년 전이요, 저주받을 붉은 수염(하이르 앗 딘)이 신성동맹의 해군을 무너뜨리고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한 것은 이십 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천주실의』 옮기면서 서방 사람들의 믿음에 대해 제법 이해한다 자부하게 된 이이가 꺽정이에게 말하기를, 결국 극락과 지옥의 설을 신봉하고, 조물주 또는 천주 외에 다른 신은 모시지 않는 것은 다 똑같다 하였다.
‘서로 비슷하니 더욱 애써 다투면서 일통(一統)을 꾀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중원과 삼한의 사적을 보아도 대개 그러하지요.’
하비에르가 들으면 귀를 씻고 싶어질 소리였는데, 꺽정이는 그 똑똑한 율곡 도령이 그렇게 정리해주었은즉 맞는 말이겠거려니 여기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들이 투닥거리며 싸우고 있다는 애우로파 땅의 너비를 보면 얼추 중원과 비슷하기도 했다. 진나라 사람과 초나라 사람이 싸우는 것과 같은 형국이라 하면 많은 것이 설명되었던 것이다.
“들어보십시오. 우리가 장차 도자기며 차며, 애우로파에서 금보다 비싸게 판다는 온갖 문물을 팔면서 이문을 크게 남기려면, 결국 값을 헐하게 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는 굳이 논상원에서 오가는 상학의 배움을 동원하지 않아도 금방 이해할 수 있는 이치였다.
“도자기나 차, 비단 같은 것이야 중원 아니면 조선에서 나오니 그렇다 쳐도, 향료는 사정이 다르지요. 남들이 선점한 장사에 우리가 뛰어들려면, 뭔가 하나는 더 특출난 바가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명희가 앞서 짚었던 땅, 서양인들이 ‘지중해’라 부르는 작은 바다 동쪽 편의 사람들과 서쪽 편의 사람들이 갈라져 싸운 것이, 핀투와 같은 이들이 이렇게 지구를 한 바퀴 빙 돌아서 조선까지 찾아온 이유라 할 수 있었다.
허나 그것은 그들의 사정일 뿐이다. 조선 사람들이 장사를 하는데 그런 작자들 사정까지 보아줄 필요가 있겠는가.
“서양 배들은 희망봉을 돌아서 족히 수만 리 뱃길을 거쳐야 겨우 천축에 닿을 수 있지만, 우리 배들은 에기도(Egito, 이집트)에 닻을 내리고 곧장 저들이 지중해라 부르는 바다까지 갈 수 있다면, 오가는 시일이 훨씬 단축되는 만큼 이득을 남기게 될 것입니다.”
머릿속 주판을 굴려본 서림이 단언하였다. 에기도에도 태수든 제후든 있을 터이니, 그쪽에 제법 조세와 인정 따위를 바쳐야 하기는 하겠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꽤 이득을 남길 수 있으리라는 것이 명백하였다.
“잠깐, 잠깐. 지금 무어라 하셨습니까? 향료를 파시겠다니요? 아니, 그렇게 되면 우리 포르투갈 사람들은 어떻게 하라고...”
핀투가 황급히 끼어들었다.
“세상은 넓고 장사할 것은 많지 않소? 우리가 향료 좀 판다고 해서 댁들이 아예 못 팔게 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핀투 그대는 어쨌든 죽든 살든 우리랑 같이 갈 수밖에 없는 처지 아니오?”
만약 이 자리에 핀투 대신, 레오네우 지 수자(Leonel de Sousa)처럼 동인도제도 향료무역의 실태에 밝은 자가 있었더라면, 중국과 조선, 일본의 부를 하나로 모아 그 자본으로 밀어붙인다면 포르투갈인들은 속절없이 밀려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을 것이었다.
그러고서는, 차라리 저를 죽이라 하든, 어떻게든 임꺽정과 그 패거리를 방해할 방책을 세우든 했을 터였다. 허나 페르낭 멘데스 핀투는 고작해야 배 한 척 몰고 다니는 선장이요, 꺽정이 만나기 전에는 해적 두목 왕직과 겨우 교역하는 처지였다.
그러므로 꺽정이의 가벼운 협박에 핀투도 금방 넘어가고야 말았다. 이미 받은 은을 뱉어내고픈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여차하면 그냥 이 동네에 뿌리 내리고 살면 그만이지, 무어. 니탕카이네 고을에 모여들어 세례 받은 여진 여인들 중에 참한 이들이 그리 많다던데, 하비에르 어르신 찾아오면 내 문의나 한 번 드려보겠소.”
지금 그의 귀에 닿는 여진 여인 어쩌고 하는 얘기는 제하더라도, 이 동양인들과의 거래는 지금껏 핀투가 성사시켰던 그 어떤 거래보다도 많은 이득을 남기고 있었다.
그리고 왕직을 배신하고 임꺽정에게 붙었을 때처럼, 핀투는 항상 저에게 이득 되는 쪽을 택하는 사람이었다.
어젯밤 하계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태양은 오늘도 멀쩡히 동쪽에서 떴다.
그리고 역시 어제와 마찬가지로 서쪽으로 저물었다.
“흐, 좀도둑이라.”
노을을 바라보며, 두리손은 실소를 흘렸다.
문객들에게 맞아 쓰러진 한량들은 겨우 몸을 추슬렀다. 넋이 절반쯤 나가 돌아오지 않은 이량의 등짝을 밀쳐내어, 그 편에 함께 하산시켰으니, 지금쯤이면 다들 집에 돌아가 고약이나 한두 첩씩 붙여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로 아직 심통원에게서도, 이량에게서도 별다른 연락은 오지 않았다. 그들에게도 두리손 저 외에 다른 길은 남지 않았으니, 설령 그들이 용케도 제 정신 차리고 있다 한들 별반 수를 쓰지는 못할 것이다.
“형님, 어찌하시렵니까?”
눈에 든 멍이 아직 다 가시지 않은 문객 하나가 조용히 다가와 물었다.
“무얼 어찌하겠느냐. 그놈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줄 수밖에.”
저의 앞에서 그토록 당당하게 서서, 이뤄놓은 것 없다고 빈정거리던 임꺽정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였다.
“다 들통났으니 관두고 그냥 시골로 알아서 돌아가겠느냐?”
“만약 형님이 그러자고 하였더라면 오늘 밤 목을 베어서 임꺽정에게 바쳤을 게요.”
“그래, 너희 모두 다 그런 생각이겠지.”
이미 두리손은 외통수를 당했다. 이제 앞으로 달려가는 길밖에 남지 않았다.
그 길 끝에 임꺽정이 기다리고 있다 한들, 칼 빼 들고 달려드는 것 외에 다른 수는 없었다.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이다. 임꺽정 그놈이 교만함에 가득 차 삼 년 시한 주겠노라 공언하였으니, 그 기대에는 부응해줘야 하지 않겠느냐.”
“거기까지는 이 아우도 예상했습니다. 그러니 어찌하시렵니까?”
“좀스러운 짓은 이제 관둬야지. 임꺽정이 떠나는 대로 움직인다. 너희도 간밤에 보았겠지만, 임꺽정만 없으면 흑의군 정도는 우리도 당해낼 수 있다. 광통교 싸움의 원한은 갚아야 하지 않겠느냐.”
호랑이가 골을 비워준다고까지 공언하였는데, 그럼에도 고개를 내밀지 않는 여우라면 생쥐와 별반 다를 것 없었다.
그리고 두리손은 적어도 칡범쯤은 되기를 바라는 자였다.
“장거정 그자가 일찍이 호언장담한 대로 동창(東廠)의 고자들을 휘어잡은 모양이다. 곧 의주로 은이 들어올 것이다. 국경 지키고 잠상들 막는 대가로 보내주는 은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 중 절반만 의주부사에게 전해질 테다.
그 은이 들어오는 대로, 우리도 움직인다. 큰 도적 때문에 살 길 잃은 나라 안의 모든 좀도둑을 그 은으로 사들일 것이다. 좀도둑이 한둘이면 그저 좀도둑이지만, 일천 명, 일만 명이 모이면 나라 하나 못 뒤엎겠느냐.”
“그만하면 죽더라도 이름은 남기고 갈 수 있겠지. 좋소, 형님. 그대로 전하리다.”
“다른 녀석들이 너를 내세운 모양이지?”
“그렇소. 아무래도 형님 성정이 성정이니, 이럴 때 잘못 건드리면 목숨이 달아나기 십상임은 다들 알거든. 내가 재수 없어 제비를 잘못 뽑았지 뭐요.”
“칼을 뽑아라. 네겐 안 된 말이지만, 오늘 네 피를 흩뿌려야만 다른 놈들도 정신을 차릴 듯하구나.”
“제기랄. 내 이리 될 줄 알았지. 곱게는 안 죽어드리겠소.”
“곱게 죽여줄 생각도 없었다.”
마당이 곧 노을을 닮아 붉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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