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진 것처럼, 이베리아 반도 국가들이 신항로 개척에 뛰어든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오스만 투르크의 발호에 있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가 동방무역을 제한하였기에 신항로를 개척할 수밖에 없었다는 통념은, 당시의 상황을 과하게 단순화한 면은 있으나 아예 틀린 것도 아닙니다. 애초에 지중해 무역에 관여할 만한 국력이 되지 않았던 포르투갈과, 유럽 전체를 두고 오스만 투르크와 경쟁하던 합스부르크 하의 에스파냐 모두 오스만 투르크를 우회하여 해양으로 진출할 유인이 있었던 것이지요.
여러 착오를 겪으면서도 꾸준히 세계 곳곳에 거점을 마련하고 있던 유럽 세력이었지만,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던 오스만 투르크 앞에서는 여러 차례 좌절을 겪어야 했습니다. 작중 언급된 것처럼 오스만 투르크는 1차 빈 포위, ‘붉은 수염(바르바로사)’ 하이르 앗 딘이 이끈 프레베자 해전 등으로 유럽 국가들을 몰아붙이는 중이었고, 희망봉을 통해 인도와 홍해·페르시아만까지 진출한 포르투갈을 상대로도 여러 차례 공격을 감행하였습니다. 작중 언급된 것처럼 핀투 역시 그 과정에서 잠시 포로로 잡혀 노예 생활을 한 적이 있었지요.
그러나 결국 16세기 말이 되면 오스만 투르크의 군사적 성공도 한계에 봉착하게 됩니다. 동지중해 패권은 확립하였지만 레판토 해전 이후 더 이상의 팽창은 불가하게 되었고, 인도양에서도 포르투갈을 상대로 결정적 승리는 거두지 못해 결국 아체 술탄국 등 포르투갈 거점 근처의 무슬림 세력을 활용하여 간접적인 견제를 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게 되지요.
外. 어느 거룩한 하루
주님의 해 1555년은 예수회의 동방선교에 있어서는 참으로 성과가 많은 해였다..
북변에서는 니탕카이 요한이 압카이 아파시 구룬에 모여드는 와르카·노토 등 사람들을 모아 강가에서 조금 떨어진 완만한 언덕 위에 성을 세우고 기린울라(吉林烏拉)라는 새로운 이름을 정했다. 황제도 없는, 매일같이 커나간다지만 아직은 작은 정착지에 ‘황성평(皇城坪)’이라는 이름은 과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기린울라 성에는 일전의 그 ‘성모상’을 모신 조그만 성당이 세워졌다. 용서와 화해, 새로운 시작을 위한 교회였다.
우연인지, 아니면 보다 높은 곳의 섭리인지, 기린울라의 성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한 지 일주일 만에 제물포의 성당도 공사가 일단락되었다. 제물포에 포르투갈 배가 들어오는 때를 맞추어 간만에 한양으로 돌아온 하비에르에게는 호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첫 미사 이후 이틀 만에, 히라도의 코스메 데 토레스(Cosme de Torres) 형제로부터 기쁜 소식이 전해져 왔습니다.”
하비에르가 북쪽으로 떠나면서 이제 막 시작한 조선 선교를 이어받게 된 니콜라스 보바디야(Nicholas Bobadilla) 신부가 찻잔에 차를 따르며 말했다.
이 동양의 취미는 임꺽정의 스승이자 벗이라는 병해 대사가 하비에르에게 전해준 이래 예수회 사람들 - 그래보아야 아직 북방과 조선, 일본을 합해 일곱뿐이었지만 - 모두가 공유하기에 이르렀다.
북쪽에서는 즐기기 어려운 향인지라, 하비에르는 자기 자신에게 잠시 이 세속의 즐거움에 잠기는 것을 허락하였다.
“히라도에서도 영주가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교회의 건설을 허용했다더군요.”
그 말을 들은 하비에르는 즐거움에서 빠져나왔다.
“타카노부 경은 영민하지만 세속적인 사람이지요. 그랬던 그가 무슨 계기로 회심하였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왕직과 타카노부 두 사람으로 인해 히라도에서 제법 마음고생을 하였던 하비에르였다. 손수 겪어본바, 타카노부는 자신에게 이익을 주지 않는 신앙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지 않았다.
“코스메 형제의 전언에 따르면, 영주 본인의 의사가 아니라 새로운 신도들의 청원 덕분이라 하더군요.”
보바디야가 다소 씁쓸하게 대답했다.
“새로운 신도라니요?”
“히라도의 상인들이 갑자기 선교에 호응하기 시작하더니, 그들의 마땅한 권리라면서 영주에게 교회의 건설을 탄원했답니다.”
“아...”
하비에르는 얼추 어찌 된 영문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조선에서 가장 실력 있는 사람이 - 장군? 영주? 기사? 하비에르는 임꺽정을 에우로파의 말로 어찌 표현해야 할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 손수 히라도로 찾아와 하비에르를 구출했고, 히라도 사람들 모두가 이를 눈앞에서 보았다.
그리고 뒤이어 ‘바다의 왕’은 임꺽정에게 사로잡혔고, 히라도의 영주와 해적 잔당의 우두머리 등이 모두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그러므로 ‘바테렌(신부)’이 퍼뜨리고 다니던 그 ‘에반게리온(Evangelion, 福音)’에 귀를 기울인다면, 히라도의 상인들 역시 임꺽정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임꺽정 본인이 어찌 생각하느냐보다는, 주변의 영주와 무뢰한들로 하여금 그렇게 믿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였다.
“모든 신도들이 신실한 뜻으로 찾아오는 것은 아니겠지요. 비록 처음은 불순할지라도 차차 그 마음을 깨끗이 해나가면 될 일 아니겠습니까. 저는 코스메 형제를 믿습니다.”
하비에르는 신실할지언정 순진하지는 않았다. 신앙에 귀의하는 이들 모두가 정직한 뜻으로 찾아오지는 않는다는 것 정도는 이미 파리와 로마에 머물던 때부터 잘 알고 있었다.
하다못해 저 북쪽의 신도들 역시, 믿음으로써 주션 겨레를 하나로 뭉치고, 몇 년 내로 거세게 닥쳐올 중국 사람들의 견제와 음모를 막아내어야 한다는 보다 세속적인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믿음의 이름을 내세워, 니탕카이와 교창아 두 사람은 벌써 수많은 건주위 부락들을 내분시키고 흡수하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여기저기서 치이기 마련인 상인들이 겉치레 신앙을 가지는 것 정도야, 못 받아들일 것도 없지 않겠는가.
“저 또한 그리 되기를 바랍니다. 어쨌든 좋은 소식은 좋은 소식이니, 밝은 면만을 보아야 하겠지요.”
차 한 모금만큼의 정적이 흐르고, 보바디야가 인장이 뜯어진 서신 한 통을 꺼냈다.
“조선의 속담에, 좋은 일에는 많은 악마가 따른다(好事多魔)고 하더군요. 코스메 형제로부터 온 서신과 함께, 로마로부터의 연락도 닿았습니다.”
“악마라. 과연 어떤 악마이기에 그리 말씀하시는지요.”
“파사우(Passau)에서의 협의가 곧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에서 열리는 제국의회를 통해 모든 제후들 앞에서 공인될 것이라고 하더군요. 어두운 나날이 곧 닥칠 듯합니다.”
보바디야가 침울하게 말했다. 연락이 닿을 때까지의 시일을 고려하면 이미 지금쯤 그런 나날이 에우로파에 당도하였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갑작스러운 질병으로 동방선교에서 빠지게 된 뒤, 보바디야는 황제(카를 5세)를 따라 종군하며 마르틴 루터의 삿된 언설에 반박하는 글과 말을 퍼뜨리는 데 열중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황제는 여러 차례 ‘신교’ 제후들을 상대로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창칼만으로는 제후들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다고 보았다. 황제는 타협책을 모색하였고, 보바디야는 여기에 반대하다가 반강제로 동방으로 보내지게 되었다. 때마침 하비에르가 조선에서 보낸 소식이 로마에 닿았던 것이다.
그러나 황제의 타협책은 그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나마 독실한 제후들조차 그의 독선에 질려 반감을 품었다. 한때 패배했던 제후들은 그사이 다시 반기를 들고, 황제를 급습하여 그들의 땅에서 쫓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베리아로 돌아간 황제는 협의 비준을 거부하는 한편 어떻게든 제후들의 마음을 돌려보려 노력하였으나, 그간의 불만을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마지막으로 제후들의 후방에서 반란을 책동하여 판을 뒤엎어보려 시도하였으나, 이마저도 무위로 돌아가고야 말았다는 것이 서신의 내용이었다.
“‘그의 왕국에, 그의 신앙을... (Cuius regio, eius religio)’이라...”
소위 파사우에서의 협의의 골자는, 영주들 각각에게 자신의 믿음을 선택할 권리를 주는 것이었다. 한 번 영주가 루터의 교리를 따르겠노라 결심하면, 그 영민들 모두 영주를 따라 믿음을 갈아야만 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동방에서는 이토록 신앙의 싹이 트고 있건만, 우리 본토에서는 시련이 그치지 않으니.”
속세의 권세가 교회의 위에 서게 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무게는 날이 갈수록 무거워지고 있었다.
이제 제국의 땅에서 루터의 일파를 몰아내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 셈이었다. 황제조차도 자신의 뜻을 그의 봉신들에게 강제하는 데 실패하였으니, 그 누가 새로운 십자군의 선두에 서길 바라겠는가?
“그리고 그것만이 아닙니다. 요새 제가 이곳 한양에 올 때마다 임꺽정 그이가 얼마나 귀찮게 구는지...”
지금껏 에우로파 정세와 바른 신앙의 미래를 걱정하던 것을 무색하게 만드는 한탄이 툭 튀어나왔다. 그러나 하비에르와 보바디야 두 사람은 무척 진지하였다.
두 사람이 어려운 동양의 인명 중에서 유독 확실하게 알고 발음할 수 있게 된 이름이 바로 ‘임꺽정’이었다. 본인의 해명 아닌 해명에 따르면, 소싯적부터 주변에 걱정거리를 하도 많이 만들고 다녀서 그것이 이름으로 굳어졌다는데, 참으로 올바른 작명이 아닐 수 없었다.
하비에르가 처음 궁궐에 인사를 올리러 갔을 때 그를 이용하여 한바탕 소란을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임꺽정 그자와 얽힐 때면 항상 골치아픈 일이 벌어지곤 했다. 이는 임꺽정 주변의 사람들도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다른 이들은 ‘돈 리’, ‘도냐 리’로 불러줄지언정 유독 임꺽정만은 ‘돈 림’이 아닌 ‘임꺽정’으로 부르는 것이 몇 년 사이에 굳어졌다.
“귀찮게 한다니요?”
“아내인 도냐 리의 해산일이 다가왔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 모양입니다. 제가 한양에 올 때마다 찾아와서는, 순산의 비방(祕方)을 알려달라고 보채더군요.”
(원칙적으로는) 임신과 출산에 있어 성직자만큼 거리가 먼 사람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임꺽정이 - 하비에르와 보바디야가 싫다고 몇 번이나 눈치를 주어도 - 종종 그들에 빗대곤 하는 동방의 승려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여태껏 하비에르가 여러 선비들과 마주 앉아, 진땀을 흘리면서도 한 치도 밀리지 않고 대담하던 것을 보았던 꺽정이 생각에는, 그토록 아는 것 많은 서양 중이라면 명희에게 도움 될 만한 것 하나쯤 알고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의학에 있어서는 우리 두 사람 모두 문외한이니 안타까울 뿐이군요. 자연스레 그의 환심을 사면서 우리 교리를 알려줄 기회일 텐데요. 히라도에 있는 후안 페르난데스(Juan Fernandez) 형제라도 데려올 것을 그랬습니다.”
하비에르가 별 생각 없이 말하자, 보바디야도 그제야 때늦은 후회를 잠시 하였다.
임꺽정이 누구인가. 살아 숨쉬는 화근덩어리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이 나라에서 가장 목청 크고 힘 있는 권력자다.
그들 스스로의 믿음으로 인해, 또는 에우로파 나라들보다 정교하게 짜여진 제도와 관례에 의해 제약받는 국왕이나 동고 경(이준경) 등과는 달리, 임꺽정은 그 말 한 마디면 아래의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놀라운 결과를 제깍 만들어내곤 하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들이 조선 정부로부터 선교를 딱히 허락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았던 것도 임꺽정 덕분이었다.
완고한 조선의 지식인들마저 교리를 두고 논쟁을 벌일지언정 선교 자체를 막지는 않았다. 하비에르를 데려온 것이 임꺽정 본인이기도 했거니와, 유학자들에게는 요새 다시 기를 펴고 있는 그들의 숙적 불교도들을 상대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었다.
“페르난데스 형제를 지금이라도 불러들어야 할까요? 듣기로는 아직 보름 정도는 여유가 있는 듯하던데.,,”
갑자기 미련이 생긴 보바디야가 말을 늘어뜰이니, 하비에르 역시 솔깃한 마음이 들었다.
그 어떤 신도보다 동방선교에 큰 도움을 준 임꺽정이건만 정작 신앙에는 별반 관심이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러하였다.
이를 계기로 그를 교회의 품에 안을 수 있다면, 그만한 우군이 없을 터. 따지고 보면 일본에서 영주들의 환심을 사던 것과 별반 다를 것도 없지 않은가.
그때, 밖에서 우당탕 소리가 났다.
“하비에르 어르신 계시오? 하비에르 어르신!”
『천주실의』의 번역에 참여한 역관들의 제안으로 ‘신부(神父)’라는 호칭을 쓰게 된 것도 제법 되었건만, 여전히 제멋대로 하비에르를 부르는 꺽정이였다.
그러나 곧 허겁지겁 마당으로 뛰쳐들어온 꺽정이 모습을 본 하비에르는 이를 차마 지적하지 못하였다.
“비방이고 무엇이고 상관없소. 와서 그냥 기도라도 해주시오!”
하늘 아래 무서운 것 없어 보이던 그 임꺽정이, 완전히 사색 되어 식은땀 범벅으로 하비에르네 마당에 서 있었다.
“아이는 아니 나오고 안사람만 반나절 넘게 고생하고 있단 말이오!”
아내를 끔찍이도 아끼는 임꺽정이다. 처음 느끼는 무력감 앞에서, 이렇게 허둥지둥 달려온 것일 테다.
갑작스러운 청에 하비에르와 보바디야 두 사람 모두 머뭇거리고 있으니, 홀로 애 타는 꺽정이가 또 한 차례 발을 굴렀다.
“좋소! 좋아! 그렇게 댁들 믿음이 대단하다면 내 믿어드리겠소! 저기 십자 목상에 절하면 되오? 내가 일백여덟 번 절을 할 테니, 어르신은 얼른 안사람에게 가 주시오!”
엉겁결에 하비에르는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사람 목숨이 중하지요. 기도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임꺽정과 도냐 리 모두 딱히 신앙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특히나 임꺽정은 딱히 악의는 없었다지만 여러 차례 신앙을 모독하는 발언도 한 바 있었다.
넌지시 대가를 걸고자 한다면 걸 수 있을 것이다. 환심을 얻고자 한다면 조금 더 생색을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비에르의 입에서는 끝내 그런 말이 나오지 못했다.
“고맙소, 고마워! 얼른 가십시다!”
“잠시 채비를...”
하비에르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 임꺽정은 익숙한 솜씨로 마루 위로 뛰쳐올라와서는 하비에르를 낚아챘다.
“꽉 잡으시오, 어르신!”
장난감 다루듯 가볍게 하비에르를 등짝에 업은 꺽정이가 곧장 질주하기 시작했다.
솟을대문을 솟구치듯 지난 뒤, 거리로 뛰쳐나갔다.
“이놈들아, 비켜라! 비켜!”
하늘에는 어느새 구름이 잔뜩 드리우고, 하비에르의 뺨을 스치는 바람은 습기를 머금었다. 언제고 소나기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날씨였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리에는 제법 행인이 많았다.
곰과 덩치 비슷한 시커먼 놈이 시커먼 옷 입은 코쟁이 신부를 업고 미친 듯 달리니, 웬만해서는 구경거리가 될 터였다. 그러나 꺽정이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나갔으므로, 구경을 하려다가 그 덩치에 치이고 싶지 않았던 행인들은 알아서 양쪽으로 갈라졌다.
그렇게 번개처럼 달려나간 지 얼마나 되었을까. 슬슬 임꺽정 입에서 가쁜 숨소리 들려올 무렵, 그 숨소리를 묻히게 만드는 여인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안사람 들으쇼! 내 하비에르 어르신까지 모셔왔소! 좀만 참으란 말이오!”
고래고래 소리 지른 꺽정이가 저의 옆집 신씨네 마당에 하비에르를 내다 꽂다시피 내려놓았다.
“기도도 좋고 뭣이든 좋으니 안사람한테 도움 될 일은 다 해주쇼. 필요한 것 있으면 모조리 구해드리겠소!”
꺽정이가 하비에르 양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둘러보니 이미 주변에는 염불 외고 있는 병해 대사를 비롯하여 걱정하는 남정네 여럿이 모여 있었다. 굳게 닫힌 눈앞의 문 뒤편에서는 비명과 신음이 연달아 들려오고 있었다. 아마 저 안쪽이 산실(産室) 차려둔 안채일 테다.
“아예 북악산 산신령까지 데려오지 그러느냐?”
병해가 애써 놀리는 시늉을 하였다. 꺽정이만큼이나 어두운 표정과 바짝 마른 입술은, 그가 그런 농담을 던져도 될 만큼 일찌감치 찾아와 갖은 치성을 다 드렸음을 보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염라대왕에 저승차사들까지 다 끌고 올라오고 싶소. 그놈들 여기 붙잡아놓고 어디 못 가게 묶어놓으면 안사람은 못 건드릴 것 아뇨.”
그새를 못 참고 벌써 서성이기 시작한 꺽정이였다.
“하비에르 어르신. 이제 내가 뭘 하면 되겠소? 기도든 뭐든 용한 게 있을 것 아니오?”
“그, 우선은 기도를 드립시다. 무릎을 꿇고...”
“야, 이놈들아! 멍석 가져와라!”
흑의군 여럿이 곧장 그 말대로 멍석을 대령하였다.
“꺽정아, 네 마음 타들어가는 것은 알겠지만, 너무 과해도 못 쓴다. 네 안사람은 몸을 단련한 지 여러 해요, 신씨 부인도 이미 규방의 여러 일에 한없이 밝지 않으시더냐. 믿고 견디거라.”
그사이 다가온 이지함도 위로의 뜻으로 한 마디를 하였다.
그러나 이미 눈 뒤집힌 꺽정이의 귀에는 그 말이 들어가지 않았다. 명희의 비명 한 번 들려올 때마다 저의 어미 꽃분이가 저를 낳다가 숨 거둔 것만 떠올랐던 것이다.
멍석이 다 펼쳐지자, 사형 말은 듣는 체도 하지 않고서 무릎 털썩 꿇는 꺽정이였다.
“자, 하비에르 어르신, 내 무릎 꿇었소. 이제 합장하고 어르신께서 모시는 천주께 빌면 되오?”
신앙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듯한 꺽정이였다. 오늘이 지나면 지금의 이 모습도 금방 사라지고, 하늘 위아래에 두려운 것 없이 날뛰는 행보를 이어갈 것이다.
“제발 말씀 좀 해 주쇼. 천주께서는 죄 사해주는 것을 잘해주신다고 들었소. 죄 많은 내가 천주님 말씀 받들기로 하면 안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겠소?”
그런 이가 가장 마음 흔들리는 지금, 그를 타일러 신앙에 귀의하게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이제 막 동방에 싹을 틔운 올바른 믿음은 강력한 우군을 얻고, 임꺽정은 마음의 안식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하비에르는 끝내 그런 생각을 뿌리쳤다. 무엇이 올바른지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우선 꺽정이를 타일렀다.
“그러한 일은 사람이 함부로 말할 수 없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우선은 진실된 마음으로 기도를 올리십시오.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교리에 따르면 완전히 틀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비에르는 눈앞의 이 무식하고 무례하지만 마음만은 진실된 사내에게 저의 마음 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권유의 말 중 한 마디도 차마 꺼내지 못하였다.
그리고 하비에르는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고맙소, 어르신.”
이 선량한 이교도 집안에 평안이 깃들기를 기원하려던 차.
하비에르의 침묵을 제멋대로 해석한 꺽정이는, 곁가지로 하비에르 모습 따라 두 손을 모으더니, 하늘 향해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천주님, 부처님, 공자님, 그리고 그 밖에 사방천지 신령분들 다 들으시오! 이 임꺽정이는 죄 많은 백정으로 태어나서 또 거기에 죄를 많이 보탰소. 앞으로도 죄 더 짓지 않는다고 확언은 못하겠지만, 우리 안사람이 무사히 해산하게 해주신다면 덕 많이 쌓으려 애쓰겠소.”
또 한 차례 찢어질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 꺽정이의 외침도 그에 맞추어 더욱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그리고 또 들으시오! 천주님이든 부처님이든, 아니면 염라대왕이든, 내 안사람과 태어날 아기에게 손 함부로 댈 것 같으면 내가 죽을 때 머리맡에 도끼 두고 죽어서 그 손모가지를 베어버릴 것이오. 똑똑히 들으란 말이오!”
기도인지 악을 쓰는 것인지 분간이 안 될 무렵.
마침내 비명과 비명 사이에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임 당수! 아이가 나왔소! 아주 튼실한 사내아이요! 이 사람 딸도, 손주도 모두 건강하다오!”
안뜰 문이 발칵 열리고 신씨 부인이 달려나왔다.
“아이고. 아이고, 하하하하!”
그만 뒤로 주저앉은 꺽정이는 하늘 향해 웃었다 울었다 하였다.
그리고 그 너머로 하비에르는 보았다.
때맞추어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은 갈라지고, 햇살이 내리쬐었다.
그중 한 조각이 활짝 열린 문을 뚫고, 산방 안쪽을 비추니, 산발한 채로 아이를 안고 있는 아리따운 여인의 뒤에 언뜻 빛이 서렸다.
찬바람 들어올까 두려워한 누군가가 급히 문을 닫았지만, 그 모습은 하비에르의 머릿속에 생생히 새겨졌다.
정신없는 꺽정이는, 하비에르에게 고맙다는 말 세 번을 하고서 어딘가로 사라졌다.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하비에르는, 슬슬 돌아가도 좋을 듯하다는 병해의 말을 듣고서 그에 따랐다.
“고생이 많으셨소. 우리 사제(師弟)가 저래 봬도 잔정이 많아서, 아마 오늘 일은 적잖이 사례해줄 것이오.”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닙니다. 대사께서도 마찬가지 아니십니까?”
“그건 그렇소. 다만 우리네 중들은 아무래도 꺽정이, 아니, 임 당수에게 빚진 게 많다오. 저기 봉은사에서도 임 당수 안사람의 순산 비는 향이 제법 많이 피워졌을 게요.”
“저희도 임 당수 덕에 선교가 훨씬 수월해졌으니, 따지고 보면 빚을 진 셈입니다. 만약 임 당수가 정 사례하기를 원한다면 이 점만 말씀해주십시오.”
“그리하시겠다면야...”
병해가 눈치껏 흑의군 두엇을 시켜, 하비에르 화상 모셔다드리라 하였다.
금방 소나기 내릴 것 같던 구름장은, 앞서 내리쬔 햇빛 한 가닥을 시작으로 여기저기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올 때는 쏜살같이 꺽정이 타고 왔지만, 그리 가까운 길은 아니다 보니 돌아갈 때는 제법 시간이 오래 걸렸다.
코쟁이 도깨비 신기하다고 구경하는 이도 오늘은 딱히 없어, 돌아가는 내내 하비에르는 홀로 생각할 겨를이 있었다.
과연 방금 전 그는 올바른 결정을 한 것이었을까?
분명한 것은, 만약 그가 고뇌하는 임꺽정을 어떻게든 다른 마음 품고 이용하려 했더라면, 여전히 그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그 모습, 아이를 안은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을 때 순수한 환희와 감탄을 품지는 못했으리라는 점이었다.
‘마음 흔들리는 사람을 유혹하여 믿게끔 한들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참된 믿음은 스스로 말미암아야 하는 것. 후회는 없다.’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하비에르는 길을 마저 걸어갔다.
그때 그의 머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그의 나라에, 그의 믿음을’. 황제와 교황청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교’를 지지하는 군주들에게는 환희를, 참된 신앙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비탄을 주는 그 말.
그러나 믿음에 강요가 없어야 한다면, 세속의 그 어떤 군주도 그들을 가로막아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땅 위의 권력 대신, 순수하게 사람의 양심과 지성만으로 이단에 맞선다면, 참된 신앙은 온갖 역경을 뚫고 종국에는 승리하게 될 것이다.
이미 잉글랜드 사람 모어(Thomas More)나 살라망카 대학의 저명한 비토리아(Francisco de Vitoria)도 비슷한 논변을 펼친 바 있지 않던가?
올바른 나라에서는 모든 사람이 스스로 믿고자 하는 바를 믿고, 또 자신의 믿는 바를 남에게 가르치려 힘쓸 수도 있어야 할 것이다. 이단과 이교도에게는 관용을, 그들이 언제든 회심하고 교회의 품으로 찾아오거나 돌아올 수 있는 자유를 주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이 땅의 배운 이들은 말하기를, 백성이 난 뒤에 그들이 뭉쳐 나라를 세웠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나라의 주인은 그 어떤 세속의 군주도 아니요, 나라를 이끄는 것은 민심(民心)인 동시에 천심(天心)일 테다.
믿음의 자유. 하비에르는 머릿속에 양피지 하나를 불러내어 자신의 생각을 써내려갔다.
돌아가자마자 그 내용을 그대로 종이 위에 옮기고, 인장을 찍어 임꺽정 편에 서쪽으로 보낼 심산이었다. 설령 중간에 악명 높은 술탄이 그 서한을 채간다 한들, 그가 기독교인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이상 이를 악용하지는 못하리라.
한 번 갠 하늘은 다시 흐려지지 않았으므로, 앞서 임꺽정의 집을 비추었던 것과 같은 햇살이 하비에르의 앞길을 비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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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의 기린울라 성은 강희 연간에 지금의 지린(吉林) 시에 지어졌습니다. ‘기린울라’라는 지명은 단순히 ‘큰 강의 강가’라는 뜻으로, 원 역사에서는 송화강 연안에, 작중에서는 압록강 연안에 각각 지어져서 그런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코스메 데 토레스는 하비에르와 함께 일본에 처음으로 발을 딛은 예수회 선교사로, 하비에르가 중국 선교를 위해 떠난 뒤 규슈에 남아 1570년 선종할 때까지 일본 선교를 전담하였습니다. 특히 나가사키의 다이묘 오무라 스미타다의 후원을 받아, 교육과 선교를 병행하면서 현지인들 사이에서도 큰 인망을 얻었지요.
함께 등장한 니콜라스 보바디야는 본디 하비에르 대신 동방으로 오기로 되어 있던 예수회 초기 멤버로, 특히 언변에 능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갑자기 병으로 쓰러지면서 그 대타로 하비에르가 투입되게 된 것이지요. 이후 병에서 회복한 보바디야는 카를 5세의 군대와 함께 독일과 북이탈리아를 누비면서 활발한 강연과 저술활동을 통해 대중적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 와중 신교 지지자들로부터 암살 시도도 여러 번 당했지요.) 강경한 反프로테스탄티즘 성향을 지녔던 카를 5세도 그를 존중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아우크스부르크 임시협정(Augsburg Interim, 1548)이 선포되자 보바디야는 여기에 대해 강력히 반발하였고, 그의 영향력을 부담스럽게 여긴 카를 5세는 그에게 추방령을 내리기에 이르렀습니다.
보바디야가 분개하며 말하는 ‘어두운 나날’이란, 1555년 9월 카를 5세의 명의를 빌려 독일왕 페르디난트 1세와 신성로마제국의 프로테스탄트 제후들 사이에 체결된 아우크스부르크 화약(Peace of Augsburg)을 말합니다. 완고한 구교도였던 카를 5세는 신성로마제국의 신교도 제후들이 슈말칼덴 동맹을 맺고 제국에 항거하자, 그들을 빠르게 제압하는 한편 신교와 구교 제후 모두를 만족시키기 위해 아우크스부르크 임시협정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작중에 서술된 것처럼 이는 양측 모두의 반발만을 샀고, 신교도 제후들은 작센 선제후 모리츠를 중심으로 다시 결집하여 황제를 독일에서 쫓아내기에 이릅니다. 이미 카를 5세의 후계자 문제 등으로 황제로부터 이반하고 있던 구교도 제후들의 민심 역시 그에게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카를 5세의 공식적인 후계자이자 독일의 제후들 사이에서 인망이 높던 그의 동생, 로마왕 페르디난트가 앞장서서 구교와 신교 제후들 사이의 화약을 이끌어내게 됩니다. 이것이 나중에 카를 5세의 이름만을 빌려 공식으로 선포된 것이 바로 1555년 9월의 아우크스부르크 화약이지요.
아우크스부르크 화약은 30년 전쟁 후에 체결된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초석으로 평가받습니다. 특히 ‘그의 나라, 그의 믿음’이라는 원칙은 근대국가 주권 개념으로 발전하게 되었지요.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후대의 관점이었을 뿐, 당대인들은 말 그대로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제압하지 못해 궁여지책으로 맺는 평화협정 정도로만 인식하곤 했습니다.
종교적 자유의 개념은 종교개혁과 근대 주권국가의 등장 이후에 비로소 제도적 토대를 얻게 되었지만, 여기에 개입한 신교와 구교 종교인들과 제후들 중 그 누구도 처음부터 그러한 목적의식을 지니고 협상에 임하지는 않았습니다. 임시변통과 타협이 이어진 끝에 근대의 초석이 놓이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종교적 자유의 개념 자체가 근세 유럽에 낯설었던 것은 아닌데, 이미 작중에 언급된 것처럼 토마스 모어나 프란치스코 데 비토리아 같은 학자들은 (제한적인 맥락에서지만) 종교의 자유를 언급한 바 있습니다 (Miethke, 2016. “The Concept of Freedom in the Political Theory of Late Medieval Scholasticism.” <서양중세사연구> 37(1); Kessler, 2002. “Religious Freedom in Thomas More’s ‘Utopia.’” Review of Politics 6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