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122화 (122/259)

37. 계절존망 (2)

‘엄숭의 역모’가 진압된 이후에도 대명 조정에는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엄숭 부자가 비참한 죽음을 맞은 뒤, 내각수보로 올라온 서계는 그간 오래토록 몰래 갈아왔던 칼날을 드러냈다.

서계는 가장 먼저 천자가 가까이하는 도사들을 불러모아 말했다.

“그대들이 지금껏 두터운 황은을 입은 것은, 그 공력이 심후하고 경지가 그윽하기 때문일 것이오. 그렇다면 본관이 한 가지 청하노니, 영약(靈藥)을 지어 황상께서 지금 겪고 계신 불편함을 해소해주시오. 그대들이라면 할 수 있으리라 믿소.”

천자가 오래토록 진사(辰砂)를 가까이해 생긴 병증, 손떨림과 말더듬음 등은 고칠 도리 없음을 서계는 익히 알고 있었다. 도사들 또한 이를 알았으나, 저들이 진퇴유곡 처했음은 깨달을지언정 빠져나올 방도는 찾을 수 없었다.

“그리할 수 있는 영약이 없다니, 그 무슨 말이오? 그대들은 신선의 경지를 넘보는 중원 제일의 도사를 자칭하지 않았소? 처방이 없는 것이 아니라, 구하지 않는 것이겠지!”

“대인! 살려만 주십시오! 대인!”

엄숭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았던 도사들은, 황망히 목숨을 구걸하였다. 대역죄보다는 기군망상이 그나마 편하게 죽을 수 있는 죄목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서계의 노림수였다.

“폐하! 이토록 무능하고 어리석은 자들을 신선을 벗삼는 자들로 꾸며 황상의 곁에 둔 자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이 가짜 선단(仙丹)으로 지존을 해친 지 오래건만 그간 입을 닫고 있던 자들은 또 누구입니까?

마음 속에 충심(忠心)이 한 가닥이라도 남아 있었더라면 어찌 그리할 수 있었겠습니까? 밝게 헤아려주시옵소서!”

서계가 도사 다음으로 노린 것은 환관들이었다. 총명함은 흐려지고 손발은 말을 듣지 않는 천자조차 서계의 말이 누굴 가리키는지는 알 수 있었다.

“아, 아아! 짐이, 짐이 어리석었소! 짐에게는 오직 내각수보 뿐이오! 여, 여봐라! 태감들을 모두 잡아들여라! 이는 화, 황명이니라! 촌음만큼이라도 늦는다면 짐을 해치려 한 역당으로 알겠다!”

눈치 빠른 태감들은 저들의 목숨을 구하고자, 소위 엄숭의 당(崇黨)에 속했던 고관들, 그리고 그 고관들과 유독 친밀하였던 다른 태감들의 이름을 대었다.

그러나 천하의 엄숭조차 알지 못한 서계의 속마음을, 엄숭의 꼭두각시 된 지 여러 해였던 환관들이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그들에게 서계의 심중을 귀띔해준 사람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장거정이었다.

“아아, 장 대인! 이 은혜는 저희가 죽어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죽어서는 잊어도 되오. 다만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대들의 명줄이 이 사람 손에 달렸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오. 우선 동창(東廠)부터 시작하겠소...”

서계의 제자로서 갑자기 출세한 장거정이 권세에 취하여 뇌물을 그득히 받는다는 풍문이 잠시 돌았으나, 불과 하루 만에 저자에서 사라졌다. 그 풍문을 처음 퍼뜨린 자들과 함께.

그 이후 나이 서른도 되기 전 예부좌시랑 겸 동각대학사 벼슬을 얻게 된 장거정을 필두로, 서계를 따르는 이들, 그리고 해서(海瑞)와 같이 평소 올바른 일처리로 그 이름을 알린 바 있던 이들이 크게 출세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자들은 적어도 저의 맡은바 일만은 똑부러지게 하였으므로, 시기하고 질투하는 이들도 어쩔 수 없이 서계의 인사가 타당하였음을 못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끝내 수긍하지 못하는 자들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들 역시 동창의 환관들이 한 번 차 마시러 집에 들린 뒤에는 조용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각수보로서 그간 엄숭이 맡아보았던 몇 안 되는 일과 내팽개쳤던 수많은 다른 일을 모두 훑어본 서계가 장거정을 불러 한탄하였다.

“휴우, 무엄하고도 외람된 이야기지만... 솔직히 말해 엉망일세! 제대로 되어 있는 것이 없어!”

“그나마 스승님께서 늦지 않게 집정(執政)하시어 겨우 바로잡을 기회를 얻었으니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엄숭의 역모’가 벌어지던 그날, 함께 공모한 사이였다. 그러므로 서계는 장거정을 제자 이상으로, 함께 공모한 사이이자 경장의 하나뿐인 동지로 여기고 있었다.

“우선 모든 일은 무너진 재정을 바로잡는 데서 비롯하여야 할 것입니다. 제자에게 몇 가지 방책이 있는데,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내 자네 말을 어찌 가볍게 듣겠는가.”

장거정은 실로 재주가 출중한 사람이었다. 그 재주만큼 욕심도 출중함이 문제일 뿐. 내각의 쭉정이 대신들 열 명을 모아놓는 것보다 장거정 한 사람을 앉혀두고 시무(時務) 논하는 것이 훨씬 유익하였다.

한편으로는 스승이 놓친 권세의 조각들을 쓸어담아 저의 것으로 삼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스승의 이름을 내세워 여러 관아에 쌓인 장계와 보고를 밤새도록 독파해나갔던 장거정이었다.

그 입에서 곧 여러 대책이 나왔으니, 해금의 법도를 풀어 해안의 백성들이 다시금 장사에 나설 수 있게 함이 하나요, 모든 조세를 은으로만 걷는 이른바 일조편법(一條鞭法)의 경장이 또 하나였다.

“천조를 다시 위대하게, 천조답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아니면 누가, 또 지금이 아니면 언제 이를 이루겠습니까, 스승님?”

“자네 말이 맞네.”

스승의 성정을 잘 아는 장거정이 말했다.

곧 서계가 제자의 조언을 그대로 내각의 공론에 부치니, 반발하는 이들도, 그 대의는 옳지만 욕속부달(欲速不達)이니 완급을 조절하자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제자 장거정의 ‘직언’을 귀담아 듣고 있던 서계는 그런 여론을 일축하고 경장을 밀어붙였다.

장거정의 속뜻이 다른 곳에 있지는 않을까 일순 의심은 하였지만, 그 저의가 어떻든 간에 경장이 지금 당장 필요하다는 것만은 서계가 보기에도 사실이었던 것이다.

반발하는 이들에게, ‘그러고 보니 그대도 엄숭과 친하지 않았던가’ 하며 겁박도 하고, 유배도 보내고, 천자께 모함도 하며, 서계가 권신이라는 자리가 요하는 만큼의 먼지와 티끌로 범벅이 되어갈 무렵.

“유구국의 사신이 영파가 아니라 천진(天津)에 닿았다 하였는가?”

엉뚱한 소식이 내각에 전해졌다.

“그렇습니다. 문정하는 관헌에게 답하기를, 실로 비상한 사안이 있어 부득불 급한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하였답니다.”

“허, 도대체 무슨 비상한 사안이기에...”

“심지어 사신이 스스로 밝히기를, 자신이 유구 중산왕 청(淸, 쇼 세이)의 다섯째 아들, 북곡왕자(北谷王子, 시마구치 오우지) 환이라 하였답니다.”

멀리서 찾아온 번방(蕃邦)의 사신, 그것도 왕자쯤 되는 이였으므로 엉뚱한 포구로 왔다 하여 그저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필시 골치아픈 사연을 품고 왔으리라 짐작하면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 응천부(남경)를 통해 올라오던 유구 사신들이 경사에 머물 때면, 여타 번국과 마찬가지로 회동관(會同館)에 유숙토록 하였지. 우선 그곳으로 환과 그 일행을 인도하고, 숙대(장거정) 그대가 유사(有司)와 더불어 찾아가 그 사정을 듣는 것이 마땅하겠네.”

장거정 또한 왕자가 직접 사신으로 오는 일이라면 어차피 자신과 스승 서계 선까지 올라올 수밖에 없음을 알았으므로, 군말없이 따랐다. 예부시랑이 저의 관아 소관인 회동관에 찾아가는 것은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며칠 뒤, 유구 사신들이 입성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회동관에 찾아간 장거정은, 다시 보기를 전혀 바라지 않았던 낯짝과 상봉하게 되었다.

“어이, 장 형. 오랜만이오. 요새 잘 나가신다더니, 신수가 제법 훤해지셨소.”

쇼 칸은 정말로 임 당수가 대국의 실세 장거정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임에 놀라고, 장거정은 그저 떨떠름하니 서 있었다.

뒤늦게야 정신 차린 장거정이 손짓하니, 그제야 역관 하나가 들어왔다. 만에 하나 유구 사신들이 북쪽으로 오는 길에 조선이나 일본에 들렸을 경우에 대비하여, 두 오랑캐 말에 모두 능통한 역관을 준비해 두었던 것이다.

그사이 눈치껏 앞으로 나선 쇼 칸이 입을 열었다. 류큐의 왕실이나 명문가 사람이라면 관화(官話)에는 마땅히 능통하여야 했으므로, 유창하게 말이 흘러나왔다.

“저희 소방(小邦)이 왜인의 침학(侵虐)을 당하여, 이토록 흠례(欠禮) 무릅쓰고 경조(京兆)의 지척까지 다가와 배를 대게 되었습니다. 삼가 황상과 천조의 대소신료께 뒤늦게 사과드릴 뿐입니다.

여기 있는 임거정 당수가 왜구를 토멸한 이래로, 남쪽 바다에는 평안이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왜구와 공모하여 천하를 어지럽힌 악적의 뿌리가 모조리 뽑힌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살마주(사츠마)의 도진씨(시마즈)인데,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가 더 이상 대국에서 이익을 구할 수 없으니, 이제 빼앗을 수 있는 곳은 오로지 유구뿐이다.’

하여 소방을 침탈하고 능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바깥에서 도움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천병(天兵)을 청하는 것이오?”

“왜인들이 날뛴다 한들 천병의 정예함 앞에서는 마치 원숭이와 성성이를 모아놓은 것과 같겠지만, 저희 소방은 땅이 좁고 물산은 궁벽하여, 단 한 번 싸움에도 진폐(陳弊)함을 면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병서에도 이르기를, 싸우지 않고 이김이 상책이라 하였습니다. 저희에게는 이것이 상책일 뿐 아니라 유일한 방책이 되겠습니다.”

한 번 열린 입에서 나오는 말이 청산유수라. 류큐 사람들이 비록 시문에는 밝지 못하지만 예의 지키는 나라(守禮之邦) 자처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이 언변 덕이었다.

“왜인들은 견문이 좁고 문자에 밝지 못해, 오직 저들이 보고 들은 바만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천병의 매서움은 알지 못하지만, 여기 있는 임 당수는 흑염(黑炎) 다루는 신장(神將)이라며 두려워합니다.

이는 임 당수가 일찍이 조칙을 받들어 왜구 적당을 일전(一戰)에 쓸어 없애고 수괴 왕직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니, 모두 황상의 지극한 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왕직 잡으라는 명을 내린 것은 저의 치부 감추려던 엄숭이었다. 그러나 밖으로 나갈 때는 준엄한 황명으로서 전해졌으므로, 장거정은 저 감사하는 겉치레 말에 도저히 토를 달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북쪽으로 오다가, 잠시 한양에 들려서는 나를 이렇게 데려온 것이오. 서계 어르신도, 장 형도 잘 아시겠지만, 내가 싸움질은 좀 하지 않소.

나를 불러 옆에 두었더라면, 일전에 승천문 위에서 그 난리통이 벌어졌을 때 왕직을 도왔다는 이름모를 장사도 진작 붙잡을 수 있었겠지. 그렇지 않소?”

이제는 천안문이 된 승천문 위에서 해적 괴수 왕직이 난동을 부렸을 때, 그를 도와 지붕 위에서 날뛰었던 복면 쓴 거한이 있었다. 끝내 그 누구도 거한을 잡지는 못했는데, 서계는 이 또한 엄숭의 잘못으로 돌려 황상의 분노를 겨우 무마한 바 있었다.

그러나 ‘서계 어르신과 장 형’ 두 사람은, 그 거한이 누구였는지, 왕직이 어떠한 곡절로 승천문 위에까지 올라갈 수 있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꺽정이가 넌지시 그때 그 일을 언급하니, 무어라 한 소리 하려던 장거정은 도로 말문이 막혔다.

그 틈을 타서 쇼 칸이, 한양에서 들은 바를 그대로 옮겨 말했다.

“임 당수의 무용은 왜국뿐 아니라 무도한 불랑기인들, 여송(呂宋, 루손 섬)의 오랑캐들 등 바다를 오가는 제이(諸夷)에게 널리 퍼졌습니다. 바라건대 그로 하여금 원해(遠海)를 돌며, 끊어지려 하는 약한 나라들은 스스로 지탱할 수 있도록 하고, 이미 망한 나라들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계절존망(繼絶存亡). 중원의 사람들이 그토록 아름답다 외쳐왔지만 저의 손으로 스스로 내버린 지 오래였던 대의(大義)를 쇼 칸이 말했다.

끊어진 바닷길을 다시 잇는다는 점에서는 꺽정이의 당 역시 진심이었으므로, 계절존망을 명분으로 내세우는 것이 그리 거짓된 것만도 아니었다.

“내가 듣기로 말라카인가 뭔가 하는 나라도 포르투갈 것들에게 망하였다고 들었소. 허락해 주신다면 류큐 들리는 길에 겸사겸사 거기까지 가서, 못된 놈들에게 ‘떼끼놈’ 한 번 해주고 오겠소.”

‘포르투갈’이니 ‘말라카’니 하는 말은 역관이 들어본 적 없는 것이라, 통변이 옮기다 말고 몇 번 버벅였다. 눈치껏 쇼 칸이 대신 장거정에게 꺽정이 말을 옮겨주었다.

“대인께서 승낙해 주신다면, 지금 아뢴 사정을 보다 상세히 적은 표문을 황상께 올리고자 합니다.”

표문이라 함은 이지가 그럴듯하게 적은 글이었다. 팔고문(八股文) 양식으로 그럴듯하게 적었으니, 스스로 쓸모없다 여겼던 과거 공부가 이렇게 도움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우선 내각에 전하여 논의한 뒤 답변토록 하겠소. 그리고... 우리 ‘임 아우’는 잠시 밖으로 나와보심이 어떻겠소?”

장거정이 온화한 표정을 가장하니, 쇼 칸 또한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읍을 하였다.

그렇게 회동관 뒤뜰에 장거정과 꺽정이 둘만 남았다.

“역관은 필요 없소?”

꺽정이가 묻자마자 옆의 풀숲이 들썩였다.

그리고 사람 머리통 하나가 쑥 나왔는데, 젊은 사내의 모습을 하였으되 콧수염은 어째 어색했다. 딴에는 풀을 잘 붙여 고정하였지만, 덤불 속에 숨어 있다 보니 그 가지에 닿아 흐트러진 것이다.

“아, 말로만 듣던 동창 내시로구만?”

“흠흠, 그, 조용히 하시오. 나는 그냥 통변만 하는 사람이외다.”

조선 출신 화자(火者, 고자)인지, 아니면 그런 조선 사람에게 말을 배운 것인지는 몰라도, 제법 억양도 없고 유창한 조선말이었다.

“아무래도 사이관(四夷館) 역관은 비밀을 지킨다는 보장이 없어서, 이렇게 동창 안에서 사람을 따로 구하게 되었네.”

본디 중원 안에서만 움직이는 동창이, 굳이 다른 나라 말 하는 이를 구했다는 것은 함의가 작지 않았다.

이어서 다른 동창 내관들도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는데, 환관치고 제법 힘깨나 쓰게 생긴 이들이었다. 꺽정이를 위압하기 위해 부른 것은 아니요, 그저 엄숭 신세 되지 않기 위한 장거정 나름의 대책이었다. (아직도 그때 그 발길질을 떠올릴 때면 괜히 허리가 시리곤 하였다.)

“허, 정말로 신세가 펴셨소. 그 대단한 동창을 쥐락펴락하신단 말이지?”

꺽정이가 눈 깜짝 안 하고 너털웃음만 지었다.

동창의 위엄(과 횡포)에 대해서는 꺽정이도 이지함을 통해 들은 바 있었다. 꺽정이 태어날 무렵에 동창 우두머리 아무개가 역적질 하려다가 능지처참을 당한 이후로는 예전같지 않다고는 했지만, 부잣집 망해도 삼대는 간다 하지 않던가.

“그건 그렇다 치고, 왜 불러내셨소? 정말로 이 아우 생각해서 회포나 풀자는 건 아닐 테고. 아니면 또 내가 누구 등짝 걷어차 줄 일이 생겼소?”

장거정이 저를 곱게 보지 않는 것 뻔히 아는 꺽정이가, (딴에는) 싱글생글 웃으면서 장거정을 놀렸다. 한 대 쥐어박고는 싶었지만, 어째 그새 더 다부지게 된 듯한 저 몸뚱이에 손찌검을 했다가는 저의 가냘픈 주먹이 먼저 박살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대체 속에 무슨 뜻을 품고 있는가?”

“류큐 사람들이 나더러 도와달라 하지 않소? 이 임꺽정이는 워낙 사람이 착해서, 곤경 처한 이들 돕기를 게을리하지 않소.”

“헛소리는 관두게.”

“정말이오. 저 왕자님 말한 것처럼, 바다 돌면서 못된 것들한테 한 소리씩 하고 올 생각이오. 배 한 척으로 그냥 세상 한 바퀴 돌고 올 생각이니, 너무 괴이쩍게 생각하지는 마시오.”

이미 천조 조정의 승낙을 받아 멀리 남쪽 어딘가의 낙도(落島)까지 조선인들이 다녀온 바 있었다. 그러니 무슨 그럴듯한 이유 없이 무작정 가로막기도 곤란하였다.

더구나 앞서 유구왕자 환이 말한 것처럼, 어쨌든 천조에서 도저히 막지 못한 왕직을 단숨에 때려잡은 것이 눈앞의 임거정이었다.

“바라는 것도 딱히 없소. 이 임꺽정이가 천자 폐하의 뜻을 받들어, 일전에 왕직 그놈 잡은 것처럼 바다 오가는 못된 잡것들에게 꿀밤 한 대씩 놓아주러 간다. 그렇게 적고 옥새 한 번 꽝 찍은 다음 돌려주시면 되오.”

통변하는 환관이 ‘꿀밤’이 무엇인지 몰라 물어보기에, 상냥하게 손수 주먹 들어 설명해주는 꺽정이었다.

“그대가 스스로 이익되지 않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음을 알고 있네. 무엇을 노리고 있느냐는 말일세.”

“조선 안에만 있기가 심심해서, 한 삼 년 잡고 세상 구경이나 하고 올 심산이오. 이왕 가는 길에 여러 사람 도와주면 또 좋지 않겠소? 그러니 내가 하자는 대로 해 주시오. 그렇게 되면 천자 폐하 위엄도 떨치고 좋지.

왕직 잡을 때도, 덕분에 우리 대국 분들은 가만 있다가 코 푸시지 않았소? 이번에도 그렇게 또 한 번 맡겨주시오.”

장거정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유였다. 하기야, 애초에 천조의 권신에게 냅다 발차기부터 박고 보는 작자를 이해한다면 얼마나 이해할 수 있겠는가.

조선국 민주당 앞길 가로막겠노라 공언한 뒤로, 장거정은 이런저런 수를 써 왔지만 아직까지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장거정은 조선 안의 뜻있는 자들과 몰래 통하여, 임꺽정의 무리가 스스로 무너지게끔 할 만한 수를 써 왔다. 그들이 드러내놓고 죄를 짓지는 않았으므로, 그렇게 자잘한 수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허나 분명 요양을 통한 교역도 막고, 해금령도 풀었으니, 민주당과 그 속하(屬下)들이 얻는 교역의 이익도 크게 줄었을 터였다. 모리배 무리는 이익이 줄어들면 절로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의주 국경을 막으니 여진 야인들을 통해 그대로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 소위 아개국을 어찌 처분할지는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 강남의 상인들은 그 사업당 분표라는 종잇쪽을 윗돈 얹어 사들이는 데 열중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토록 질긴 자들의 우두머리가 돌연 나타나 엉뚱한 청을 하니, 장거정의 그 총명한 머리로도 쉽게 대책이 세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왕이면 여러 나라 글로 써 주시면 좋겠소. 당장 조선국이나 일본국에도 진서 모르는 무식쟁이 천지인데, 더 멀리 나가면 말할 것도 없지 않겠소?”

“사이관의 역관들은 모든 오랑캐들의 말에 능통하였으니, 그 정도는 들어줄 수 있을 것이야.”

임거정 말에, 사이관에 지금 있는 관(館)의 숫자를 무심결에 헤아리며 장거정이 대꾸했다. 뒤늦게야 자신이 그 청을 들어준다는 것을 전제로 답변하였음을 깨닫고서 급히 말을 덧붙였다.

“그, 어디까지나 내각에서 그대들의 청을 황상께 그대로 올리기로 했을 때의 이야기일세.”

허나 지금 임거정이 유구 왕자를 내세워 - 장거정은 왕자의 뒤에 임거정이 있으리라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 올린 청을 대명 조정이 거절할 이유는 딱히 없었다.

아무리 장거정이 동창을 시작으로 이곳저곳에 발을 뻗치고 있다 하지만, 그래본들 서계가 내각수보에 오른 뒤 출세한 사람 중 하나일 뿐이었다.

장거정이야 임거정의 실체를 알지만, 당장 서계만 하더라도 그의 우악스러움과 일신의 무용만을 알 뿐, 그 무리가 장차 중화(中華)라는 생각 자체를 무너뜨리려 한다는 장거정의 말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애초에 중화가 하나의 생각이나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발상부터가 중원 사람에게는 버거운 일이었으니, 서계가 장거정의 경계하는 마음을 지나치다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뭐, 무리한 청도 아니니 대국의 여러 훌륭한 대신들께서 잘 숙고해주시리라 믿소. 그리고 다른 나라 말로 옮길 때는, 번거롭게 이런저런 사람 고생하게 할 것도 없소. 딱 한 가지 말만 진서 옆에 적어주시면 된다오.”

“어느 말을 이르는가?”

장거정은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묻고야 말았다.

“여기 사이원에, 그, 뭣이냐. 나찐인가 라틴인가 하는 나라 글을 아는 역관도 있소?”

회동관 나선 장거정은 곧장 서계에게 향하여, 저의 문정한 바를 (거의) 곧이곧대로 전했다. 임거정이 이곳 경사에 나타났으니, 이는 서계와 단둘이서 논의해야만 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장거정이 예상하였던 - 또는 우려하였던 - 대로, 서계 또한 오랑캐가 나서서 오랑캐 일을 스스로 해결한다는데 말릴 것 없지 않느냐는 생각뿐이었다.

“임거정 그자가 비록 흉포하기는 하지만, 이는 바다 밖의 오랑캐도 마찬가지 아닌가? 오랑캐로 오랑캐를 다스리며 흉포함으로 흉포함을 다스린다면 현책(賢策)이라 아니할 수 없겠지.

숙대 자네가 임거정을 미워하는 것은 이 사람도 알지만, 가끔은 나라를 위하여 사감(私感)은 접어두어야 할 때도 있다네. 아마 내각의 학사들도 다들 비슷한 생각일 듯하군그래.”

그러면서 이르기를, 우선 임거정이 원하는 그 ‘나전(라틴) 글’이 무엇인지 알아보라고만 할 뿐이었다.

내각수보 서 대인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어찌하겠는가. 장거정은 이번에는 사이원으로 향했다.

사이원의 ‘사이(四夷)’란, 사방 오랑캐를 가리킬 뿐이었다. 실제로 그 아래 딸린 관(館)의 수는 훨씬 많았다. 비록 개국 직후에 비하면 그 수가 줄었다고 하지만, 지금만 하더라도 달단(몽고)부터 서천(산스크리트어)까지 수많은 오랑캐의 말과 글을 다루는 역관들이 그 재주를 이어가고 있었다.

“참으로 송구스러운 말씀이오나, 저희 중 면전(緬甸, 버마) 말을 아는 자는 있어도, 그 ‘나전(羅甸)’이라는 것은 아는 자도, 들어본 자도 없습니다, 대인.”

그러나 사이원 당도한 장거정이 암만 수소문을 하여도, 돌아오는 답변은 오직 이뿐이었다.

“대인! 저는 잘못 옮기지 않았습니다! 그 임 아무개는 분명 ‘나전’이라 하였습니다!”

그를 따르던 동창 역관은 저의 억울함을 탄원하였다.

“어쩔 수 없다. 다시 가서 물어보는 수밖에.”

관자놀이 어루만지며 장거정이 말했다.

그렇게 회동관 나선지 얼마나 되었다고 도로 돌아왔는데, 임거정 녀석은 피식 비웃는 것 아닌가.

“아, 그런 어려움이 또 있었구려. 대국에는 당연히 그 말 아는 사람이 있을 줄 알았지 무어요. 조선에는 있거든.”

“무어라?”

“사실 이 사람, 아차, 아니지. 유구국 사신들 따라서 한 명 함께 오기도 했소. 성은 핀투 씨요 명(名)은 페르낭인데, 본디 뱃놈이지만 글재주도 제법 있다 합디다.

정 마땅한 역관을 구할 수 없다면, 그놈 데려와서 옮기라 해도 되지 않겠소?”

임거정이 데려온 자, 그것도 심지어 불랑기 오랑캐를 믿고 조서를 옮기도록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정직하게,

‘우리 역관이 부족하여, 네가 이른 그 말과 글을 아는 자를 구할 수 없었다.’

하고 인정할 수도 없었다. 하늘 아래 모든 귀한 것이 모이고, 모든 오랑캐가 귀부하는 천조. 그 천조의 경사에서 옮기지 못하는 오랑캐 말이 있어서야 되겠는가?

“이 넓은 경사에 어디 그 말 아는 자 하나 없겠는가? 그저 확인차 물어본 것일 뿐일세.”

“거 사람 싱겁기는.”

그렇게 대충 둘러대고 예부로 돌아왔지만, 장거정의 미간에 새겨진 주름은 풀릴 줄을 몰랐다.

멀리 남쪽 광주에서 불랑기인들과 교섭하던 이들을 데려와 물어보니, 그들 또한 직접 불랑기 말을 한 것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불랑기인들이 어디선가 통변하는 이를 데려오곤 했다 하였다.

불랑기 말을 아는 이가 없었으니, 그 나전인가 하는 것은 더 물을 것도 없었다.

그때였다.

“장 대인! 장 대인! 나전 글을 아는 서생을 찾았습니다!”

동창 내관 여럿이 급히 그를 찾았다.

“허, 그것이 참인가?”

“그렇습니다! 천주의 유생으로 경사의 광경을 구경코자 상경한 자인데, 불랑기 배를 타고 조선 사람들과 더불어 남쪽 바다를 다녀왔기에 불랑기 사람들이 같은 부류와 통할 때 쓰는 나전 글을 익혔다고 합니다.”

그 서생은 이름을 이지라 하는데, 천주에서는 (괴짜로) 잘 알려져 있다고 하였다.

이지라는 자가 나전 글을 아는지 모르는지 검증할 수 있는 이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렇게 저의 출신을 당당하게 밝히는 자가 거짓을 고하지는 않을 듯하였다.

예시로 몇 줄 글을 써보라 하고서는, 광동에서 벼슬살이한 이들에게 가져가 보여주었더니, 과연 불랑기인들이 이렇게 생긴 문자를 쓰더라 증언해주었다.

참으로 다행이라 여기면서, 장거정은 명하기를, 유구왕자가 주청한 바에 대해 황명이 내려질 때까지 그 이지라는 문사(文士)를 사이원에 모시도록 하였다.

그 누구도 이지가 라틴어를 전혀 알지 못하며, 그저 천연덕스레 아는 척 시늉만 했을 뿐임을 눈치채지 못했다.

사이원으로 향하는 이지의 속옷에는 핀투가 대신 써준 라틴어 글귀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는데, 이 또한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아직 그 문구가 정해지지도 않은 천자의 조서였지만, 그것이 어떻게 라틴어로 옮겨질지는 미리 정해져 있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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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언급된 일조편법은 원 역사에서는 한참 뒤인 만력 연간, 장거정이 서계까지 밀어내고 권력을 독점하게 된 뒤에 수면 위에 오르게 됩니다. 이는 이미 그 이전부터 상업의 발달로 인해 지역별로 조금씩, 독자적으로 시행되었던 것을 하나로 뭉치고 전국에 일률적으로 시행했다는 데 그 의의가 있지요. 일조편법 외에도 장거정은 만력 초기에 여러 개혁을 시행했는데, 여기에 대해 반발하는 여론이 일어나자 강압적인 언론 통제로 맞선 바 있습니다. 작중에서는 서계가 훨씬 일찍 집권하면서, 상황이 꽤 달라지고 있지요.

엄숭을 쳐내고 집권한 서계는, 소위 삼어(三語) 정강, 즉 ‘권위는 황제에게 돌려주고, 정무는 조정 여러 부처에 돌려주며, 관리의 임용과 상벌은 공론에 돌려준다(以威福還主上, 以政務還諸司, 以用舍刑賞還公論)’라는 표어로 대표되는 개혁에 착수했습니다. 그러나 앞의 두 가지는 그럭저럭 잘 이루어졌어도 마지막은 그러지 못했는데, 결국 이는 서계가 실각하는 한 가지 원인이 됩니다.

명의 대표적인 첩보기관이자 적폐이기도 했던 동창은, 작중 서술된 대로 환관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명의 막강한 황권을 등에 업고 많은 전횡을 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정덕 연간에 황제의 총애를 받던 태감 유근이 역모죄로 처형당하고, 가정 연간에는 엄숭의 등장으로 인해 그 위세가 다소 위축되는 등, 작중 시점에서는 다소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위상이 약해진 실정입니다. 하지만 명 특유의 절대적인 황권으로 인해, 동창의 전횡을 원칙적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황제뿐이었고, 결국 수십 년 뒤 천계 연간에는 위충현이라는 희대의 간신이 등장하여 조정을 다시 장악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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