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123화 (123/259)

37. 계절존망 (3)

“먼 바다로 나아가, 강한 오랑캐가 약한 오랑캐를 마음대로 핍박하고 병탄하지 못하도록 타이르겠노라... 적괴 왕직을 잡은 임거정이라면 능히 그리할 수도 있을 것이외다.”

장거정이 정리해 올린 유구국 왕자의 청원 내용을 읽은 내각학사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속사정 모르는 학사들 보기에는 이러하였다.

간악한 적괴 왕직은 원악도(遠惡島)에 웅거하며 천조 전역에 손을 뻗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이름부터 참람된 소위 휘왕사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일 테다.

그자는 심지어 경사 한가운데에서도 엄숭과 결탁하여 큰 난리를 일으켰고, 종국에는 황상의 위엄에까지 누를 미치고야 말았다.

그렇다면 대체 한 번 출병하여 그를 사로잡은 임거정은 어떠한 사람이겠는가?

“참담한 이야기지만, 우리 금의위조차 왕직을 제대로 붙들지 못하여 황상의 지엄함에까지 누를 미치지 않았습니까. 그러한 왕직을 한 번 싸움으로 붙잡고, 압송하는 도중에도 그자가 일곱 번 달아났지만 모두 다시 붙잡았다 하니, 실로 천하의 장사요 뛰어난 용장입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바다 밖의 오랑캐들이 그 이름만은 알고 두려워한다는 말도 언뜻 일리가 있어 보였다.

그 임거정과 왕직, 그리고 길게 보면 자신과 제자 장거정까지 모두 한통속이었음을 차마 밝힐 수 없던 서계 홀로 뜨끔해 할 뿐이었다.

“수보 노야, 저희가 보기에는 유구 왕자의 청원을 받아들임으로써 얻을 바는 많고 잃을 바는 전혀 없는 듯합니다. 황상께 주청하여, 조칙 내리기를 승낙받음이 어떠할지요?”

“때마침 그 나전어인지 하는 오랑캐 글을 아는 서생이 경사에 머물고 있었다 하니, 이 또한 천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영락 연간에 환관 정화를 보냈을 때와 달리, 국고에서 은 한 냥 꺼내지 않고 - 물론 말이 그렇지, 천조의 체면이 있으니 약간의 은사(恩賜)는 해야 할 것이다 - 위엄을 떨칠 수 있다는 것이 솔깃하였다.

그리하여 내각의 공론이 금방 한데 모였다. 임거정의 사람됨 아는 서계와 장거정이 아무리 미심쩍게 여긴다 한들, 도저히 트집잡을 구석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여, 곧 회동관에 관원 하나가 달려와 꺽정이와 쇼 칸을 찾더니, 조만간 유구국 왕자가 올린 주청에 대해 조서가 내려올 것이요, 임거정에게도 칙서가 내려올 것이니 그리 알고 충신(忠信)으로써 몸가짐을 바로 하라고 전하였다.

주자 가라사대, 본성에 충실한 것이 충(忠)이요, 마음이 진실한 것이 신(信)이라. 그러므로 본성이 도둑놈인 꺽정이는 대국 조정의 전언을 진심으로 받아들여, 밤이 되자 검은 복면을 쓰고 회동관 담장을 넘었다.

무릇 도둑이 대성(大成)하려면 길눈이 밝아야 하는 법. 다행히 왕직과 함께 밤길 누빈 이후로 북경 밤거리가 그리 크게 바뀌지는 않았던지라, 앞서 낮에 이지의 뒤를 밟았던 그 길을 그대로 찾아갈 수 있었다.

그리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사이관 뒷뜰에 닿았다.

“그래, 관에서 밥 얻어먹으니 좋소?”

“아무도 의심은 안 합디다.”

미리 기다리던 이지가 짧은 조선말로 답했다. 사이원의 수많은 역관들 중 라틴어를 아는 이는 없었고, 고작해야 회회관(回回館, 페르시아어 담당)의 혼자 남은 늙은 역관 하나가 뒤늦게야 ‘그러고 보니 회회 서쪽 불랑기인들이 그런 말을 쓴다는 풍문을 소싯적에 들은 것도 같다.’ 회상한 것이 전부였다.

그러니 의심을 할래야 할 수가 없었다.

“조만간 칙서가 내려온다고 하오. 준비한 대로 적당히 휘갈기고 나오면 되겠소. 그나저나 일 다 본 다음에는 어찌 빠져나올 심산이오?”

“모르겠는데요.”

“그러면 버리고 가는 수밖에. 내가 ‘장 형’에게 잘 얘기해두겠소.”

일말의 지체도 없이 매정한 답변이 나왔다.

“농담도 못 합니까? 당연히 생각하고 있는 수가 있지요.”

사실 임꺽정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고, 그저 여러 오랑캐 말을 하는 역관들이 신기하여 이리 찾아가고 저리 묻는데만 열중하였을 뿐이었지만, 꺽정이 앞에서까지 그것을 밝히지는 않는 이지였다.

“장 대인이 정말로 임 당수를 아우로 여기는 것은 아니지요?”

“내 속 시커먼 것을 진즉에 간파하긴 했소. 내 앞길 가로막겠노라며 호언장담까지 하였지.”

“흐흐, 그럼 잘 되었습니다. 그것을 이용하면 되겠군요.”

잠시 그 좋은 머리를 격렬히 굴린 뒤 이지가 술술 계책을 자아내었다.

다 듣고 난 뒤 입이 떡 벌어진 꺽정이가 물었다.

“우리 당에 가만 냅둬도 제가 알아서 역적질을 할 법한 놈들이 여럿 있는데, 임자는 개중에서도 으뜸인 듯하오. 여기 명나라에서는 기군망상을 해도 죄를 안 받나 보오?”

“뭔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이게 다 정충보국(精忠報國)의 길입니다.”

이지는 진심으로 그리 믿고 있었다. 중화의 흥성함이니 천조의 위엄이니 하지만, 실제로는 그저 말뿐이요, 중원 사람들 스스로나 그렇게 믿을 뿐이지 않던가.

중화가 정녕 중화가 되려면, 서슴지 않고 만리 밖까지 나아가서, 배울 바가 있다면 배우고, 또 가르쳐줄 바가 있다면 가르쳐주어야 할 것이었다.

“여하간 그 계책대로 한 번 해 보시오. 잘 되면 좋고, 만약 안 풀리는 듯하면 그때는 또 이렇게 찾아올 테니.”

“당수께서 다시 찾아오실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흐흐.”

그리고 그 말대로 되었다.

다음날, 예부시랑 장거정이 이지를 불러들였다. 향시나 겨우 급제한 일개 수재(秀才)에게는 제법 과분한 만남이 아닐 수 없었다.

“칙서의 초안이 완성되었소.”

“바로 나전어(라틴어)로 옮겨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 하시오. 일말의 지체도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외다.”

이지가 잠시 뜸 들이는 시늉을 하였다.

“헌데... 대인께 이 아무개가 감히 한 가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무엇이오?”

“제가 함부로 마음 둘 일은 아닌 듯하나, 대인께서는 이번에 조칙 내리는 것을 두고 석연치 않게 여기시는 듯합니다.”

장거정은 침묵을 지켰으나, 그의 눈에 잠시 이채 서린 것을 이지는 놓치지 않았다.

“저는 일찍이 임거정의 사형 되는 조선 서생 이지함과 더불어 항해하면서, 그 임 아무개의 사람됨에 대해서도 들었습니다. 비록 그 무용은 뛰어나나 사람은 경망스럽고 교만하며, 저의 힘만을 믿고 날뛰니 홀로 대사(大事)를 맡아보아서는 아니 될 자라고 하였습니다.”

저의 스승 서계조차 임거정과 그 당을 그리 나쁘게만 보지 않아 답답히 여기던 차, 생면부지 서생이 목전에서 그놈 흉을 보니, 장거정은 자못 통쾌함을 느꼈다.

“이 사람 또한 그러한 세평을 들어 알고 있소만.”

“그런 자가 칙서의 중함을 알겠습니까? 염려되는 바가 적지 않아, 나라의 은혜 받은 이로써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는 장거정 또한 걱정하던 바였다. 임거정이 정말로 그 칙서를 들고 얌전하게 유구국만 다녀올 리는 없었다. 만랄가든 천축이든, 들리는 곳마다 평지풍파 몰고 다닐 공산이 훨씬 컸다.

“생각건대, 임거정의 옆에 천조의 관원 하나를 붙여, 그가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하는지, 또 혹여 천조의 위엄을 범하지는 않는지 살피도록 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관원이라.”

아무 사람이나 옆에 붙일 수는 없었다. 내각수보 엄숭조차 거침없이 발로 걷어차는 작자 아니던가.

그러나 대놓고 임거정을 감시한다는 명목으로 사람을 붙인다면 사정이 달라졌다. 그 임거정조차 언행을 조금은 자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감찰을 위해 붙인 이가 임거정 손에 죽든 병으로 죽든, 어떤 식으로든 해를 입는다면 이 또한 임거정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었다.

“감히 스스로 천거하고자 합니다. 제게 그러한 소임을 맡겨주신다면, 돌아온 뒤 그간 임거정의 행적과 그가 다닌 나라의 사정 등을 모두 세세히 정리하여 조정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장거정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때마침 임거정의 무리와 어울린 적도 있고, 또 설령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장거정 본인에게 돌아올 손해는 전혀 없는 자가 눈앞에 하나 있지 않던가? 더구나 나전어까지 한다고 하니, 설령 임거정이 서쪽에서 무언가 수작을 부린다 한들 능히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하필 이 시기에 경사에 나타난 것을 비롯하여 수상쩍은 면도 없지 않았지만, 정말 그가 임거정과 한패라면 일을 마치고 그저 조용히 사라지기를 바랄 뿐, 위험천만한 바닷길에 스스로 나아가려 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좋소. 이 또한 내 내각의 여러 대인들께 품의토록 하겠소.”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유구국 북곡왕자 환은 칙서를 받들라!”

곧 쇼 칸 앞으로는 저의 탄원에 대한 답변이 칙서로서 내려왔다.

물론 그 칙서는 칸이 아니라 그 아버지인 중산왕 쇼 세이에게 내려지는 것이었으므로, 아직 내용은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대강이 어떠할지는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미사여구와 천조의 위엄 운운하는 것을 모두 떼어놓고 보면, 청원한 대로 배신(陪臣) 임거정으로 하여금 유구국 돕도록 하겠노라, 그 외에 별반 중대한 내용은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칸이 스스로 북경까지 가서 천자의 옥새 찍힌 칙서를 받아왔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류큐 사람들에게 큰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었으므로, 내용은 어차피 중요하지 않았다.

임 당수가 아니었더라면 이토록 빨리, 또 이렇게 매끄럽게 칙서를 받들 일도 없었을 것이었으므로, 칸은 임 당수의 연줄과 힘에 다시금 감탄하였다. (그저 화근덩어리를 빨리 쫓아내기 위해 장거정이 이면에서 분발하였음은 알지 못하였다.)

“조선국 민주당 당수 임거정은 나아와 칙명을 받들라!”

더불어 꺽정이도 저의 바라던 바를 이루었다.

그 글에 이르기를,

‘황제가 조선국 임거정에게 명하노니, 온 힘을 다하여 받들지어다.

너의 나라 조선은 대대로 공순하였으며 예악을 모두 갖추었고, 또한 군병은 강대하여 능히 동쪽 번병(藩屛)이 되어 왔다. 적도가 창궐하여 바다로 떨어져 있음만을 믿고 행악할 때, 너 거정은 황명을 받들어 분연히 떨쳐 일어나, 조선의 장사들을 이끌고 그 우두머리를 토멸하였으니, 천하 만민이 더불어 통쾌하게 여겼다.

아아, 네가 황위(皇威)를 입어 그러한 공을 세웠으니, 만민의 어버이로서 짐 또한 기뻐하였느니라.

짐이 하늘의 밝은 명을 받들어 중화와 뭇 이적을 거느리니, 만국은 평안하고 사해(四海)는 잠잠하도다. 그러나 아직 미련한 이적의 추장들이 이를 알지 못하고 횡행하며, 원방(遠方)의 소국(小國)을 괴롭히니 짐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왔다.

네가 스스로 이를 알고, 먼저 나아와 짐의 큰 뜻을 받들겠노라 밝히니, 어찌 기쁘지 않겠느냐?

짐은 명하노라. 너는 장차 원해(遠海)로 나아가 해내외(海內外) 오랑캐를 타이르고 또 위엄을 드러내어, 유구국을 돕고 간악한 자들을 깨우칠지어다!’

말은 장황하지만, 그 속에 포상을 어찌 하겠노라, 어떤 지원을 해주겠노라 하는 말은 하나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꺽정이는 칙명을 받들면서 오히려 - 나름 - 공손함을 잃지 않았으니, 저놈이 또 무슨 짓을 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예부시랑 장거정은 안도하면서도 의아하게 여겼다.

일전에 그의 임금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꺽정이는 제법 제대로 무릎까지 꿇고 칙명 받드는 예를 갖추었는데, 그로 인하여 장거정은 임거정 입에 함박웃음 지어진 것을 보지 못하였다.

꺽정이 입꼬리가 내려오지 않는 것은, 칙서에 동봉된 라틴어 번역본의 내용을 미리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의도된 오역으로 가득한 그 번역본 내용은 이러하였다.

‘이 글을 들고 있는 조선 사람, 임(Rhim) 가문의 코우지오니스(Cougionis)는 곧 하늘의 명을 받드는 자요, 하늘의 아들(天子)을 대리하는 사람이다.

그의 나라 조선은 짐의 으뜸가는 봉신이 다스리는 강대한 왕국이며, 코조니우스는 그 나라에서 호민관(Tribunus, 민주당) 중의 일인자(Princeps)로서, 동등한 백성들 가운데서 가장 앞선 이(Primus inter pares)로다.

또한 그는 나라를 빛내는 영예로운 신하(光國功臣)로서 임금의 제일가는 벗이요, 흑갑(黑甲) 기사단(흑의군)의 단장이며, 깃털 숲 근위대(羽林衛)의 장군이며, 하늘 받드는 용사들의 영수이자 결백한 사내(白丁)들과 진실된 여인(女眞)들의 보호자이다.

이 글을 보는 에우로파 사람들은, 그 나라와 민족을 막론하고 마치 짐을 받들듯 온 힘과 정성을 다하여 그를 모셔야 할 것이다. 이는 하늘의 제국(天朝, Imperium Caeleste)을 다스리는 황제의 전언이로다.’

그곳에 쓰인 어휘들이 서방 사람들에게는 얼추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이이와 핀투를 통해 대충 들어 알고 있던 꺽정이는, 얼른 이것을 에우로파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렇게 칙서와 칙명 받드는 예식이 모두 끝나고, 회동관에 다시 평온이 돌아올 무렵, 꺽정이 앞을 가로막는 자 하나 있으니 저의 공언한 대로 제 발로 걸어서 사이관을 나온 이지였다.

“흠흠. 감찰어사(監察御史) 나가십니다. 길을 비키십시오.”

“고작 정7품 감찰어사가 천자의 말씀 받드는 대리인 앞에서 망발이 퍽 심하군그래.”

꺽정이가 농담으로 받았다.

“망발이라니 그 무슨 말입니까. 거인(擧人)도 되기 전에 도찰원(都察院)에 들었으니, 고향 천주에 이 소식을 전한다면 아주 가문의 영광이라며 몇 달은 잔치를 벌일 텐데요.”

감찰어사란, 비록 정7품이라지만 어디 성에 나가면 그 성의 순무조차 벌벌 떠는 자리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임시직으로, 꺽정이가 항해 마치고 돌아오는 대로 반납할 벼슬이었지만.

“그래서, 장거정 그 깐깐한 사람을 어떻게 설득했소?”

“임 당수 일거수일투족을 옆에 철썩 붙어서 감시할 것이요, 끝나고 돌아오는 대로 그간 임 당수 행적과 우리가 들린 별의별 오랑캐 나라의 사정과 습속을 샅샅이 적어서 조정에 고한다는 조건을 붙였지요. 그랬더니 흔쾌히 승낙하시더이다.”

“정말 그렇게 할 것이오?”

“당연히 그래야지요. 열심히 쓸 뿐 아니라, 보는 사람이 누구든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입니다. 당나라 시절 얘기인 『서유기』도 그리 잘 팔리는데, 금세(今世)에 새로 쓴 서유(西遊)의 소식은 더욱 불티나게 읽히지 않겠습니까.”

“설마 그걸 돈 받고 팔 생각이오?”

“하늘이 제게 재주를 주셨으니 반드시 써먹어야 하겠지요. 조정에 바친 글을 그대로 민간에 푼다고 하면 그것만한 홍보가 또 없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이런 천하의 도둑놈을 다 보았나! 나라의 벼슬을 빌려다가 저의 장사 밑천으로 삼겠다니!”

꺽정이 딴에는 극찬이었다.

순풍 타고 인천으로 돌아온 꺽정이와 이지는 곧장 상 투메 호로 갈아탔다.

꺽정이가 칙명을 받아 왔음을 조정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또 무슨 절차니 예의니 운운하며 그를 귀찮게 할 것이 뻔하였으므로, 칙명과 그 번역본은 세상의 빛도 보지 못한 채 변변찮은 궤짝 속에 담겼다.

“그래도 구경 한 번 해 보면 안 됩니까?”

여전히 눈치 없는 이이가 말했다.

“우리 사형 앞에서라면 몰라도, 할 말 안 할 말 못 가리는 사람 앞에서는 못 보여주겠는데.

그리고 지금 그것을 얘기할 때가 아닐 텐데? 이 호탕하고도 인품 훌륭한 사돈을 앞으로 삼 년은 못 본다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야지.”

“이왕이면 같이 가고 싶은데 말이죠.”

“아서라. 그랬다간 장모님께 내가 죽게 생겼는데, 무어.”

명희가 바우를 낳고 몸이 멀쩡해지니, 이제 신씨의 모든 관심사는 다시 셋째아들 혼처 알아보는 데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전에도 그러하였듯 여전히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전에는 민주당과 얽히면 이곳저곳 견제 들어올 것을 걱정하여 혼담을 피하였다면, 이제는 순전히 그 가풍(家風)이 저들의 귀한 딸과 맞지 않아 시집살이 고될 것을 걱정하여 혼담에 응하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금 혼담 오가는 쪽은 솔직히 정말 마음에 안 든단 말입니다.”

그리하여 신씨는 무반 집안 사이에서 혼처를 구하기에 이르렀는데, 전라우수사를 지내다가 사람됨 탐욕스럽다 하여 탄핵당하고 잠시 저의 고향 평택으로 돌아와 있던 원준량(元俊良)이 거기에 응하였다.

원준량 슬하에는 장차 공신 책록될 상이라 하여 집안의 기대를 한데 받는 장남 균(元均) 이하로 자식이 아홉이나 있었는데, 개중 고명딸도 하나 있었다. 그러니 딸을 귀하게 여길 법도 하였지만, 안타깝게도 원준량은 딸이야 고생을 하든 말든 민주당과 연줄 만들어 돈벌이할 생각이 더 컸다.

그 심사 모진 것은 마음에 걸렸으나, 그래도 간만에 혼담에 진심으로 응하는 집안이 나온 고로 신씨는 제법 진지하게 응하고 있었다.

“그러면 우선 혼사 치른 다음에 타박을 주어서 쫓아내든가 하면 되지. 그냥 지금 하는 대로만 안사람 대하면 매일매일이 타박놓는 꼴일 텐데.”

“에휴, 모르겠습니다. 어디 가서 참한 규수 있으면 조선국 율곡 선생 이름이나 대 주십시오.”

이이 다음은 사형 이지함이었다.

“잘 다녀오거라.”

“여기 이지 이 친구가 바닷길 오가면서 겪는 것 모두 적어 책으로 내겠노라 하였소. 돌아오는 대로 사형께도 전해드리리다.”

“그저 어디 가서 앓아눕지나 말고, 또 너무 과하게 말썽부리지나 말고 무사히 돌아오면 그것으로 족하다. 삼 년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몰라도, 어쨌든 뭔가 일어나지 않겠느냐.”

“이미 우리끼리 잘 논의한 바가 있지 않았소? 여기 사형 제자도 있고, 또 동고 대감도 아직 정정하니, 걱정 말고 잘 준비해 주시오. 내 반드시 멀쩡하게 돌아올 테니.”

두리손 녀석이 좀도둑 처지를 못 벗어나고 거기서 그칠지, 아니면 어떻게 발버둥치다가 뭔가 큰일을 벌이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허나 어느 쪽이 되든, 민주당이 아무런 대비 없이 지내다가 호락호락하게 당하는 일은 없어야만 했다. 그것이 조선에 남을 이지함과 이이 등의 일이었다.

“바우가 아비를 퍽 닮았소.”

“제 눈에는 예쁘기만 한 걸요.”

그 다음으로 배에 오른 명희와 신씨 부인이 한 마디씩 하였다.

“그럼 지아비는 못생겼단 말이오?”

“그러면 각시 내버려두고 멀리 가는 낭군더러 헌걸찬 장부라고만 할까요.”

명희가 짐짓 삐진 시늉을 하니, 꺽정이가 자못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게 되었소.”

“이미 몇 번이나 사과하지 않았던가요. 물론 아직 한참 모자라지만, 돌아온 뒤에 갚으면 되니 걱정 마셔요.”

“조심히 다녀오시오. 딸아이가 어찌나 임 서방 걱정을 하는지, 만에 하나 제때 못 돌아올 것 같으면 스스로 자맥질해서라도 찾으러 갈 기세라오.”

“‘그대 나를 생각한다면 치마 걷고 진수 강물이라도 건너겠지만, 그대 나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찌 다른 사람 없을까요.’”

명희가 『시경』의 <건상(褰裳)>을 읊었다.

명희에게 꺽정이 외 다른 사람은 없고, 꺽정이에게도 명희 외 다른 사람은 없을 것이므로, 두 사람 모두 깔깔 껄껄 웃었다.

그리고 진한 포옹 한 번 하고 둘은 떨어졌다. 한쪽은 돌아가서 베갯잎 적실 것이요, 다른 한 쪽은 류큐 슈리성에 닿자마자 술을 찾을 것이지만, 적어도 지금은 서로를 위해 웃어주었다.

마지막으로 서림은, 이 기회에 유구국을 아예 사업당 편으로 끌어들일 심산으로 쇼 칸이 몰고 온 류큐 배에 탔다. 그러므로 서림과의 작별은 다소 미뤄지게 되었다.

“흠흠, 당수. 그럼 앞으로 삼 년간 잘 부탁드립니다.”

핀투 선장이 옆에서 헛기침을 했다.

“그래, 잘 해보십시다.”

내릴 사람은 다 내리고, 탈 사람은 다 탔다.

마침내 핀투가 우렁차게 외쳤다.

“닻을 올려라!”

정말로 천운이 따르는 것일까? 제물포를 떠난 배는 순풍을 타고 남쪽으로 향했다. 류큐 배는 상 투메 호는 물론이요 내선보다도 느렸지만, 바람이 워낙 순풍 일색이다 보니 그렇게까지 상 투메 호의 발목을 잡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오래 지나지 않아 슈리의 외항, 나하(那覇)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임 당수, 다시 한 번 감사드리오.”

쇼 칸이 선실로 들어와, 선뜻 고개를 숙였다.

쇼 칸의 배가 먼저 입항하고 그 뒤에 현지 사람들의 안내를 받아 상 투메 호가 나하 앞으로 들어오기로 하였으므로, 꺽정이와 그 일행은 오늘 아침에 미리 쇼 칸의 배에 옮겨 탔다.

“류큐 사람들의 홍복이 아닐 수 없소이다.”

“내가 여기저기 복을 뿌리고 다니는 사람이긴 하오.”

동의할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은 자화자찬이었다.

“남만선 한 척만으로도 능히 여러 사람을 위압할 수 있는데, 이제 또 한 척을 더 불러오시니, 누구도 임 당수의 위엄을 의심하지 못할 것이외다. 한 각 내로 포구에 닿을 듯하니, 미리 준비해주시기 바라오.”

“알겠소이... 잠깐, 한 척이 더 온다니, 무슨 말씀이시오?”

꺽정이가 뒤늦게 놀라서 물었다.

“그... 지금 남쪽에서 다가오고 있는 큰 배가 한 척 더 있는데, 저 상 투메 호와 같은 남만선이더이다. 이 일대를 지나는 남만선이라면 모두 조선을 거치는 배 아니겠소?”

꺽정이가 서림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서림 또한 금시초문이었다. 지금쯤 이쪽을 지날 법한 카락선은 고작 한 척, 노사 세뇨라 다 그라사 뿐이었는데, 그마저도 이미 그들이 히라도를 거칠 무렵에 지나쳤던 것이다.

“직접 나가서 보는 수밖에.”

꺽정이와 서림, 이지 세 사람은 갑판으로 올라갔다.

어느 쪽을 보아야 할지 쇼 칸에게 물을 필요는 없었다. 그사이 저쪽 배의 흰 돛이 이미 제법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뒤따라오는 상 투메 호에서 소란스러운 외침 들려오는 것을 듣자하니,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비상! 비상!”

“깃발! 깃발 확인해라!”

“흰 바탕에 이빨 달린 붉은 성 안드레아 십자가! 압스부르고(합스부르크) 해군기입니다!”

“카스티야! 카스티야 놈들이다!”

꺽정이가 바라마지않던, 에우로파 사람들과의 만남이 이렇게 일찍 성사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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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유럽에서 전문적인 외교관들이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외교 업무의 ‘아웃소싱’은 전세계적으로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국력이 상대적으로 약하고 외부의 위협에 취약한 경우가 아니라면, 굳이 전문적인 외교 업무를 수행할 필요가 없기도 했지요. 명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를 여실히 드러내는 사례가 임진왜란 당시 ‘외교관’으로서 명과 일본 사이를 오가던 심유경(沈惟敬)이라 하겠습니다. 절강성 소흥 출신으로 북경에서 무뢰한으로 지내던 심유경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본을 다녀온 동향 사람들에게 일본의 사정을 수소문한 뒤, 그것이 자신의 지식인 양 뽐내면서 병부상서 석성에게 접근하였습니다. 마침내 유격장군직을 제수받고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지요. 그 이후로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별 의미 없는 협상 놀음으로 밥만 축내다가, 마침내 히데요시의 친서를 위조하려던 것이 들통나면서 그간의 행적이 모두 문제시되어 처형당하게 됩니다.

그에 비하면 어쨌든 라틴어 ‘실력’을 드러냈으며 나름 신상이 보증되어 있는 이지에게 작중에서와 같이 후대하는 것은 명 조정 입장에서는 아주 상식적인 행보가 되겠습니다.

천자의 이름으로 발행되는 명령은 ‘제制', ‘조詔’, ‘고誥’, ‘칙勅’, ‘책冊’, ‘유諭’, ‘비批’, ‘지旨’ 등 그 종류가 매우 다양했습니다. 이 중에서도 제후국에 자주 내려지는 것은 조서와 칙서로, 조서는 천자의 정사 전반에 대한 방침 등을 밝히는 글로서 칙서보다 급이 높았습니다. 칙은 다시 불특정 다수의 백성에게 내리는 칙유(勅諭), 중요한 관원이나 제후국 왕 등의 인사에 관련되는 칙서(勅書), 그리고 비교적 급이 낮은 관원들의 인사에 관련되는 칙명(勅命)으로 나뉘었습니다.

조선에서도 처음에는 이러한 구분을 엄격히 따져, 조서를 들고 오는 조사와 칙서를 들고 오는 칙사를 구분하였지만, 명이 멸망한 이후에는 청에 대한 경멸의 뜻으로 모든 사신을 칙사로 통칭하게 됩니다.

원 역사에서도 이지는 『서유기』를 감명 깊게 읽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사후, 약간의 수정과 비평을 곁들인 『이탁오 선생 비평 서유기』가 제자에 의해 출판된 바 있는데, 이지 본인과 양명 좌파의 사상이 상당히 많이 반영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한편, 원 역사에서 에스파냐의 서태평양 진출은 시기상 조금 뒤, 1560년대에 이르러서야 본격화되었습니다. 이들이 갑자기 류큐 앞바다에 나타나게 된 사연은 무엇일까요? 다음 편에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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