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더는 나아가지 못하리니 (1)
동방으로부터의 놀라운 소식이 차근차근 이베리아 반도에 닿은 것은 주님의 해 1552년부터였다.
처음에는 한 허풍선이의 과장 섞인 보고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말라카를 출항한 배들이 북동쪽으로 항해하여, 막대한 재보를 싣고 돌아오기 시작하자 사정이 바뀌었다.
“정녕 핀투 그자의 말이 옳았단 말인가?”
자폰 북쪽에 있다는 코레 또는 디오시온 왕국은 실로 부유한 것이 틀림없었다. 시나(중국)와는 달리, 그곳에서는 에우로파 사람들이 오가는 것을 전혀 막지 않는다고도 하였다.
그들의 땅에서 선교를 하고 있으니 사람과 서적을 보내달라 하는 예수회 선교사 하비에르의 서한이 고아에 당도하고, ‘체물-포(제물포)’를 오가는 배들이 늘어나면서 점차 디오시온에 대한 소문은 부풀어 올랐다.
예컨대 이런 식이었다.
“체물의 시장에 나도는 도자기는 시나의 것과는 비할 수 없는 상등품이고, 차의 향긋함 역시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물론 조선에서도 차와 사기그릇은 나오지만, 소위 상등품이란 니탕카이 요한과 요양 상인들이 열심히 잠상(潛商, 밀무역) 질을 하여 들여오는 명의 물건이었다.
얼뜨기 코쟁이 오랑캐들이 광주나 천주 상인들에게 호구 잡혀가며 사들이는 도자기는, 값이 멀쩡하면 품질이 멀쩡하지 못하고, 그나마 봐줄 만한 물건이라면 값이 멀쩡하지 못하였다. 그에 비하면 사업당이라는 큰손이 개입하고 있는 제물포에서의 거래는, 조선인들의 표현을 빌리면, 훨씬 신사적이었다 (양반이었다).
“디오시온은 어찌나 부유한지, 우리 배를 받아들이기 위해 새로 항구 하나를 지었다고 합니다. 불과 삼 년 사이에 도시 하나가 생겼습니다!”
‘항구도시’라고 하면 다들 부가 흘러넘치는 리스본이나 안트베르펜 같은 도시를 생각하기 마련이었다.
부둣가에 이러한 장밋빛 풍문이 떠돌았으므로, 총독과 고관들이 써서 부치는 점잖은 서한과 보고서에도 그것이 옮았다.
그렇게 말라카에서 고아로, 고아에서 희망봉을 돌아 리스본으로 향하는 보고서 중 몇몇은 항구에 들어서기 직전 수신자가 바뀌었고, 또 개중 몇몇은 주앙 3세의 썩 충성스럽지 못한 신하들의 손을 거쳐 에스파냐 왕 카를로스 1세 - 다른 칭호로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 - 의 조금 더 충성스러운 신하들에게 넘어가곤 했다.
작센 선제후 모리츠가 새로 일으킨 신교 동맹군에게 떠밀려, 독일 땅을 도망치듯 떠난 황제 카를 5세는, 그런 소식이 들려오자마자 자신의 통찰에 스스로 감탄함으로써 무너진 자존심을 조금은 세울 수 있었다.
마가야네스(마젤란)와 엘카노의 항해가 성공하자마자 이 신항로를 통해 향료 제도에 접근할 수 있음을 깨닫고 후속 함대를 출항시킨 바 있던 황제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동방에서 포르투갈이 거둔 성공이 아직 확실치 않은 소문으로만 전해질 무렵, 그것이 사실일 경우에 대비하여, 루시타니아(포르투갈)인들의 영향권 바깥에 동방의 방대한 부에 접근할 수 있는 거점을 속히 마련토록 지시하였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와 명성을 노리는 선장들이 누에바 에스파냐(멕시코)의 아카풀코(Acapulco) 항을 떠났다.
세부(Cebu)의 라자(Raja, 왕)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강력한 무력을 지닌 이방인들을 자신의 도성에 받아들였다.
그리고 라자는 자신의 적들을 무찌르기 위해 이방인들의 총과 칼을 빌리는 대가로, 그가 아는 북쪽의 사정에 대해 모두 털어놓았다.
이것이 이미 ‘카롤의 섬들(Las Islas Carolina)’이라는 이름이 붙어버린 류큐의 여러 섬을 거쳐, 나하 앞바다에까지 부르고뉴의 성 안드레아 십자기가 휘날리게 된 사연이었다.
“... 그러니까 저놈들은 선장네 나라랑 사이 안 좋다, 그런 말이지 않소?”
“듣자하니 오나라와 월나라 같은 사이로구려.”
황급히 상 투메 호로 돌아온 꺽정이와 이지가, 그들 나타나자마자 손짓발짓 다 해가며 통사정한 핀투 선장에게 대꾸했다.
“저들이 대체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저들이 무엇을 노리든 임 당수와 민주당 사업에도, 또 저의 나라 포르투갈에도 결코 좋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사람도 그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겠소.”
꺽정이와 함께 상 투메 호에 오른 쇼 칸이 끼어들었다.
“남만인들이 천하를 돌면서 이곳저곳에 거점을 마련하고 다닌다 하지 않았소? 그렇다면 그들에게 우리 류큐만큼 좋은 곳도 없을 것이오.”
핀투도 왕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도, 일본도 향료라 할 만한 것이 딱히 나지는 않았다. 그 인삼이라는 약초는 제법 팔릴 듯하였지만 그뿐. 수익으로 치면 결코 정향이나 육두구에 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안정적으로, 그리고 합리적인 가격에 동방의 물산을 자유롭게 사들일 수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가치가 있었다. 그 무역에 한 발 걸치기 위한, 그리고 반대로 포르투갈이 걸친 발을 쳐내기 위한 거점으로서 이곳 류큐는 제법 입지가 좋았다.
“저 배에 병사들도 타고 있으리라 보시오?”
“아마 그럴 것입니다. 저희 포르투갈에서도, 처음 정복, 아차차, 개척을 할 때는 그렇게 하곤 하지요.”
“그리고 그 병사들은 정예하기 이를 데 없다고 했고.”
“인정하기는 싫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카스티야와 아라곤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생긴 소위 ‘에스파냐’는, 아마도 중국 정도를 제하면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을 터였다. 산티아고 기사단에서 서리로 지내던 시절 보고 들은 바 있던 핀투의 생각에는 그러하였다.
신대륙에서는 고작 수백 군사로 ‘인도인’ 이교도 수십만을 물리쳤더랬다. 그리고 그 땅에서 들어오는 막대한 금과 은은 다시 더욱 용맹하고 강인한 군대와 함대를 만들어내는 밑천이 되고 있었다.
“마침 잘 되었군그래. 우리가 이때 딱 들리지 않았더라면, 저놈들이 그대로 왕자님네 나라를 꿀꺽 삼켜버렸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오?”
별 생각 없이 던진 꺽정이 말에, 쇼 칸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이방인들 앞에서 이 이야기를 꺼내도 좋을지 잠시 고민한 끝에, 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어찌할 수 없음을 새삼스레 깨닫고 다시 입을 열었다. 열자마자 한숨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후... 임 당수 말씀이 맞소. 아니, 그 이상이오. 이대로라면 우리 류큐인의 손으로 나라를 바치게 될 지도 모르게 되었소이다.”
중산왕(류큐 국왕) 쇼 세이는 자식 복이 많아, 슬하에 아들만 열에 딸도 둘이나 있었다.
그러나 임금의 후사가 없는 것만큼이나 후사 될 만한 이가 많은 것도 화란의 근원이 되는 법이었으므로, 이를 과연 ‘자식 복’이라 할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특히나 쇼 세이가 늙고 병든 지금, 그 자리를 노리는 자는 일찍 죽었거나 아직 어린 왕자들을 제하더라도 셋이나 되었다.
“그중 가장 유력하신 분이 바로 이전에 조선에서도 그런 분 있노라 말한 바 있는 둘째 형님(쇼 겐)이시오.
스스로 말하기는 조금 부끄럽지만, 그 다음으로 제법 평 좋고 세력도 있는 사람이 시마구치 오우지(北谷王子), 즉 이 사람 본인이라오.”
“그러면 나머지 하나가 문제겠구려. 동앗줄 잡고픈 심산일 테니.”
“그렇소. 셋째 형님이신 카츠렌오우지(勝連王子, 쇼 요소尙楊叢)께서는... 솔직히 그 뜻은 높으시지만 사람됨이 그것을 도저히 따르지 못하신다오.
그 외에도 다른 형제자매들도 나름대로 욕심은 품고 있지만, 스스로 무언가 하기보다는 이 사람이나 두 분 형님께 영합하고자 하고 있소.”
꺽정이가 생각해보아도, 만약 제가 저 에스파냐인지 뭔지 하는 나라 놈들의 우두머리라면 그렇게 모자란 놈을 우두머리로 내세우고 꼭두각시 놀음을 할 듯하였다.
제 힘만으로는 왕위를 못 노리는 놈을 임금으로 세워주고, 그 값을 톡톡히 받는다. 그리하여 주변의 섬 하나쯤 툭 떼어서 저들 땅으로 받아낸다.
그러고 난 다음에도, 이방인에게 빌붙어 겨우 왕위를 얻었다는 오명이 평생 임금의 뒤를 따라다니게 될 것이다. 왕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계속 에스파냐 사람들에게 기댈 수밖에 없을 것이요, 도움을 구할 때마다 막대한 값을 치러야 할 터.
“둘째 형님이나 셋째 형님께서 저 에스파냐 사람들을 이용해 이 사람의 계책을 망가뜨릴 수 있는 방도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오. 지금 생각하려니 골치가 아플 정도로군.”
“뭘 그리 어렵게 생각을 하시오? 그냥 여기서 저놈들 때려잡으면 모든 골칫거리가 사라지겠구만.”
“아이고, 임 당수, 안 됩니다!”
칸이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핀투가 꺽정이를 말렸다.
“에우로파까지 가려고 하시는 것 아녔습니까? 에스파냐의 왕 카를로스(카를 5세)는 지금 에우로파는 물론이요 어쩌면 지구 위에서 가장 강대한 군주일지도 모릅니다! 여기서부터 척을 지면 안 됩니다!”
“에우로파 하나도 다 점령 못 한 사람이 뭔 가장 강대한 군주요? 게다가 하비에르 어르신께 듣기로는 저의 봉신들도 제대로 못 다루는 바람에 싸움에서 대판 깨지고는 한 구석으로 쫓겨났다던데.”
천자마저 농락한 바 있는 꺽정이는 코웃음만 쳤다.
“보아하니, 우리가 이곳까지 온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저것들을 제압하는 수밖에 없을 듯하오.”
“하지만 그 또한 여의치 않소. 보기에 따라서는 이 사람도 이방인들의 힘을 빌어온 것 아니겠소?”
쇼 칸이 꺽정이 말에 딴지를 걸었다. 칸 또한 그런 말 나올 것을 알기에, 처음 꺽정이 만났을 때 그저 슈리 성에 얼굴만 한 번 비추어달라고 청하였던 것이었다.
허나 남만인들이 이렇게 나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상 그 또한 어렵게 되었다.
“둘째 형께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실 게요. 이 사람이든, 셋째 형님이든, 류큐를 바깥 사람들에게 팔아넘기려 하는 것은 똑같다며 노쇠하신 부왕의 귀에 속삭이시겠지.”
“그때가 되면 어쩔 수 없이 판을 엎어버려야지.”
“임 당수의 힘을 빌려 슈리를 싸움터로 만들어버린다면, 처음부터 외세와 결탁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소?”
“거 참, 어렵게들 사는구만그래.”
끝내 꺽정이가 머리를 긁적였다.
“어렵게 사는 건 당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북경까지 가서 칙명 받아와놓고 왜 그걸 쓸 생각은 안 합니까?”
“아, 맞다. 이러려고 그 난리를 쳤었지.”
칙명을 대하는 태도가 불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아, 나라가 어찌 되려 하는가.”
늙은 쇼 세이 왕이 한탄하였다. 이미 고질이 된 기침에 이어, 이제는 눈도 침침하였지만, 바깥 세상에서의 다툼이 슈리와 나하, 나아가 나라 전체에 미칠 것을 생각하면 걱정에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소자가 반드시 바로잡겠습니다.”
곁을 지키는 둘째 왕자 겐이 결연하게 장담하였다.
다섯째 왕자 칸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 그러나 그가 조선으로 향했음을 겐은 이미 나하 항에 풀어둔 첩자를 통해 들어 알고 있었다 - 셋째 왕자 요소는 저의 우둔(御殿, 저택)에서 그와 어울리는 망나니 패거리와 허송세월을 하고 있든, 아니면 이 시국을 어떻게 제게 유리하게 써먹을지 궁리하며 눈을 뒤룩뒤룩 굴리고 있든 할 터였다.
그러므로 병든 부왕의 곁을 지키는 것은 겐 혼자였다. 부왕의 병세가 위중함을 굳이 주변에 열심히 알리지 않도록 명을 내려놓은 것 역시 겐이었으므로, 다른 왕자들의 불효만을 탓할 수는 없을 테다.
그리고 둘째아들이 수작 부린 것을 뻔히 알면서도 쇼 세이는 그저 가만히 있었다. 이제는 모든 것이 피곤하였다.
“하, 네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벙어리라는 소문이 돌 만큼, 스스로 과묵하다는 평판을 쌓아올린 겐이었다. 그러나 소문은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 제멋대로 떠드는 대신, 과묵함을 핑계삼아 남의 말을 들으며 깊게 숙고할 뿐이었다.
부왕은 그것을 간파한 지 오래였으므로, 아버지 곁에서는 평소처럼 저의 할 말을 다 하는 겐이었다.
“우리가 비록 작은 나라라 하나, 엄연히 나라는 나라입니다. 배 한 척에 아무리 병사를 많이 싣고 왔다 한들, 그들에게 위압을 당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 힘을 한 번은 보여야만, 조선이든, 남만이든 비로소 진지하게 상대할 수 있겠지요.”
물론 류큐 혼자서는 시마즈 씨도 제대로 상대할 수 없음을 쇼 겐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껏 쌓아 올린 부와 하늘이 내린 류큐의 위치를 잘 이용한다면, 용호(龍虎)의 대열과 함께하며 힘을 겨루지는 못할지언정 고슴도치는 될 수 있으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얕보이지 않아야 했다. 실(實)만으로는 힘이 달리니, 허(虛)까지 빌려야 하지 않겠는가.
“우슈(御主, 류큐 국왕의 호칭), 두 대선(大船)에서 내린 무리들이 우슈를 알현코자 하고 있습니다.”
겐의 사람이자 조정의 재상인 이케구스쿠 쇼시(池城 昌氏)가 조용히 들어와 고하였다.
“그래, 이 늙은 아비가 어찌하기를 원하느냐?”
“감히 청하건대, 정전(正殿)으로 나아가시어 그들을 맞이하여 주십시오.”
“하, 보이지 않는 눈과 들리지 않는 귀를 들고 나아가, 이방인들에게 능멸을 당하라는 말이냐?”
“저들이 부왕을 능멸코자 바다를 건너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특히 서로 노리는 바가 있을 때는 더더욱 그렇지요. 저들은 서로 경계하고 싸울 뿐, 결코 부왕께 어떤 폐를 끼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임금을 대신하여 여러 나라의 사신들 앞에서 당당하게 위엄을 드러내는 것은, 그 곁에 홀로 남은 둘째 왕자 겐일 터.
바다 밖 멀리서 힘있는 무리들이 류큐를 찾아온다는 것, 그리고 그런 자들 앞에서 한 치도 밀리지 않으며 교섭하였다는 것. 모두 류큐의 평판 - 그리고 겐 본인의 평판 - 에 엄청난 득이 될 것이다.
그러나 겐과 늙은 쇼 세이 왕 두 사람에게는 불운하게도, 이방인들은 이미 큰 폐를 끼치고 있었다.
“무릎을 꿇으라니? 그것은 불가한 일이오!”
에스파냐 배의 선장,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Miguel López de Legazpi)가 일동을 대표하여 항의하였다.
“이것이 예에 맞는 일이오! 우리 류큐는 수례지방(守禮之邦)이오. 그대들이 우리나라에 찾아온 이상, 이만큼의 예는 지켜야 할 것이외다!”
이미 그들이 슈레이몬(守禮門, 슈리성 정문)을 제멋대로 지나와, 이곳 정전 앞마당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도 예법을 한참 어긴 것이었다. 그러므로 류큐 조정의 관리들로서도 더 이상 양보할 수는 없었다.
반면 오로지 하느님 앞에서만 무릎을 꿇는. 지체와 긍지가 모두 높은 귀족 출신의 선장 레가스피 역시, 그들의 국왕이 나타나면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절을 하라는 청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게 실랑이가 한참 이어지던 차.
“고생들 많소.”
그들의 뒤에서 또 다른 일군(一群)의 이방인들이 나타났다. 그들이 앞서 본 포르투갈 배에서 내린 자들이겠거려니 하고 고개 돌린 레가스피의 눈이 크게 뜨였다.
깃발은 분명 포르투갈의 것이었으나, 내린 이들은 동양인들이요, 그 우두머리(인 듯한 자) 역시 동양인이었던 것이다.
“흠흠, 대인들을 뵙습니다. 임 당수의 위엄은 이곳 유구까지도 널리 전해져 있습니다. 비록 저희가 조선을 상국으로 모셔왔다지만 그래도 나라 사이의 예를 지켜주시리라 믿습니다.”
부디 이자들은 말을 들어주기를 내심 바라면서, 유창한 관화(官話)로 류큐 관리가 말을 걸었다. 임 당수는 예의고 무엇이고 차리지 않는 천둥벌거숭이라는 풍문이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역시 예의지국인 조선의 사람이거늘 무례하면 얼마나 무례하겠는가.
“저 치들은 예를 안 지키겠다 하는 모양이오?”
“서양 나라에는 엎드려 절하는 예법이 없다더군요. 아마 그래서 저리 실랑이 벌이던 모양이지요.”
옆에서 이지가 슬쩍 끼어들었다.
“나는 우리 임금님 대하듯 그대 나라 임금님도 모시도록 할 테니 너무 걱정은 마시오.”
꺽정이가 공언하니, 그제야 관리도 안심하고 다시 저 남만인들 설득하러 몸을 돌렸다.
그렇게 류큐 사람들은 설득에 애를 먹고, 에스파냐 사람들은 쭈뼛쭈뼛 저들 옆의 동양인 일행 기색을 살피며, 꺽정이는 그저 경치가 좋다는 둥, 경복궁보다 아담은 하지만 꽤 멋들어졌다는 둥 이지와 잡담만 나누고 있을 무렵.
마침내 중산왕 쇼 세이가 정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멀리서 척 보아도 거동 불편한 것이 눈에 띄었다.
누가 말리기도 전에, 레가스피가 먼저 가볍게 인사 올린 뒤 입을 열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선출되신 신성로마제국의 영원히 존엄하신 황제이시자, 카스티야와 아라곤, 레온, 나바라의 국왕으로서 저의 주군이신 카를로스 폐하를 대신하여,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가 레퀴오스(류큐)의 국왕께 인사를 올립니다.”
그가 세부에서 데려온 일본인 통역이 곧장 그 말을 받아서 그대로 외쳤다. 류큐 관리들이 그 무례에 항의하려 일어서자, 번뜩이는 갑옷 뽐내며 레가스피를 따라온 군인들 역시 칼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든 말든 레가스피는 말을 이어갔다. 저들이 반발할 것도, 그리고 국왕이 최대한 정중하게 저의 청을 거절할 것도 알고 있었다. 그들이 나하 항에 당도하여 이곳까지 오기 전 만남을 청하였던 그 왕자의 말에 따르면 그러하였다.
“저의 주군께서는 오로지 여러 민족이 주님의 영광 아래에서 평화와 번영을 누리기만을 바라십니다. 이를 위하여 이 섬에, 또는 인근의 다른 섬에 우리 배와 사람들이 드나들고 요새를 건축할 수 있도록 허용해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더불어 우리 사람들이 이 나라 안을 자유롭게 오가며, 참된 믿음을 널리 퍼뜨릴 수 있도록 허용해주시기를 함께 청합니다.”
그때, 레가스피 앞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제 말대로 정직하게, 저의 임금 대하듯 류큐 임금도 대하는 꺽정이였다.
“임금님, 저 말 듣지 마시오.”
“그대는 누구요?”
레가스피가 삿대질을 겨우 참으며 물었다.
“나는 이런 사람이외다... 아, 예의를 지켜야지. 임금님께 먼저 보여드려야겠군.”
그 품에서 종이 한 장이 나왔다. 황급히 달려나온 관리 여럿이 그것을 잠시 보더니, 한탄인지 탄성인지 모를 소리를 크게 내었다.
그사이 꺽정이는 쇼 세이에게 등 돌리고, 레 아무개를 향해 물었다.
“나 임꺽정이가 임자에게 묻겠소. 누구 맘대로 이 바다에 발을 뻗치겠다는 것이오?
류큐는 우리 민주당의 소중한 거래 상대이고, 나는 이곳 왕자님의 초청을 받아, 중국 천자의 명을 대리하여 이곳에 왔소. 임자네 나라는 무슨 연고가 있어서 뻔뻔하게 허락도 받지 않고 그런 청을 넣는 것이오?”
조선말을 알기는커녕, 지금 처음으로 그 언어를 듣는 레가스피였으나, 그 어조만 들어도 시비를 거는 것임은 족히 알 수 있었다.
“주님의 은총과 세속의 여러 조약에 의하여 우리는 이 바다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얻었소. 오로지 카를로스 폐하의 뜻을 대리하는 이 사람과 류큐 국왕 두 사람 사이의 일일 뿐이니, 그대가 관여할 바는 아니외다.”
“내가 관여할 바가 맞는 듯한데? 이보쇼! 그거 칙명 다 보셨으면 좀 돌려주시오들!”
칙명을 이렇게 다루는 사람도, 정전에서 이렇게 난삽한 언행을 보이는 사람도 삼산(三山, 오키나와 일대의 통칭)이 일통된 이래 처음 있었다.
당황함에 그저 굳어 있던 관리들 중 하나가, 넋 나간 표정으로 - 칙명에 갖추어야 할 예의는 모조리 잊은 채 - 칙명 적힌 종잇장을 돌려주었다.
“자, 보시오. 임자들이 내게 찾아오지도 않고 이곳 류큐에 발 들이민 것이 잘못인지 아닌지 한 번 헤아려보시란 말이오.”
옆에 상냥하게도 라틴어로까지 적힌 그 종이를 들이밀며 꺽정이가 말했다.
“아, 혹시나 궁금해 하실까봐 미리 말씀드리는 것인데, 거기 찍힌 것은 중국 천자의 도장이 맞소. 정 의심되면 저기 그대로 굳어 있는 사람들 중 하나 붙잡고 물어보시오.”
그것을 받아본 레가스피는, 그의 주군이 내세운 표어이자, 지금껏 수많은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사내들이 그 말 멋있다며 동조하였던 말, ‘보다 더 멀리(Plus Ultra)’를 이 바다 위에서 이루기는 어려울 것임을 직감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대가 설령 중국 황제의 뜻을 받든다 하더라도,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가로막을 수는 없을 것이오. 이미 조약에 의해...”
레가스피가 이를 뿌드득 가는 소리가 꺽정이 귀에까지 들려왔다.
“그 조약 얘기는 나도 진작에 들었소. 고작 우긴다는 것이 세상 반쪽의 주인 노릇이라니, 이왕 하려면 우리네 천자님처럼 세상 전체를 저의 것이라고 우겨야지, 그게 무슨 좀생이 짓거리요?”
“말을 가려서 하시오! 나의 주군이시자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신...”
그리고 꺽정이는 좋다고 거기에 기름을 부었다.
“정 아니꼬우면 힘으로 한 번 붙어 보십시다그려. 그쪽도 배 한 척, 이쪽도 배 한 척인데. 이보시오, 임금님! 임금님네 도성 앞바다를 조금 빌려도 괜찮겠소이까?”
기름을 붓다 못해 저쪽이 먼저 터져버리게 하는 것이 꺽정이의 뜻이었다.
“그만! 그만 하시오! 다들 오늘은 물러가시오!”
마침내 과묵하다는 평판 때려치운 쇼 겐이 참다 못해 외쳤다.
수례지방 자처하는 류큐였건만, 불과 한 각만에 정전 앞이 시장통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뭐, 원하신다면야.”
그렇게 정전 앞에서의 알현은 유야무야 끝나버리고, 늙은 왕은 축객령을 내렸다.
“이 모욕은 반드시 갚고야 말 것이오, 돈 림.”
“모욕만 갚아서 되겠소? 제멋대로 이 바다에 발 들이민 그 값도 함께 갚아주쇼.”
꺽정이는 저의 뜻대로 저 에스파냐 사람들이 놀아나는 것을 보며 헤벌쭉 웃었는데, 그 웃음이 워낙 험상궂다 보니 그 누구도 그것을 웃음이라 여기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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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데시야스 조약은 당시 기술로는 정확히 측정하기 어려웠던 경도를 기준으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세력권을 나누었고 - 심지어 그마저도 제대로 된 경도가 아닌, 특정 섬에서부터의 거리를 기준으로 나누는 식이었습니다 - 양측은 이를 이용해 꼼수를 부렸습니다.
카를 5세 - 또는 에스파냐 국왕 카를로스 1세 - 는 작중에도 언급된 것처럼 마젤란의 항해가 끝나자마자 태평양 항로를 통한 향료무역에 관심을 가지고 후속 함대를 보냈습니다. 필리핀과 말루쿠 제도로 원정대가 계속 파견되었고, 이미 포르투갈이 ‘침을 발라놓은’ 티도르 왕국에 개입하려 했다가 무력충돌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후 1529년 사라고사(Zaragoza) 조약으로 말루쿠로부터 정동으로 297.5 레구아 떨어진 기준선이 결정되어, 태평양에서 양국의 세력권이 대서양에서와 마찬가지로 양분됩니다. 그러나 카를 5세는 이것을 태평양이 아닌, ‘향료 제도(말루쿠)’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필리핀 원정에 더욱 박차를 가했지요. 탐험가 루이 로페스 데 비야로보스가 1543년 필리핀 제도 동쪽의 레이터와 사마르 섬을 ‘발견’한 뒤, 당시 카를 5세가 아우 페르디난트 대신 자신의 후계자로 열심히 밀고 있던 아스투리아스 대공 펠리페 (펠리페 2세)의 이름을 따서 섬의 이름을 ‘펠리페 열도(Las Islas Felipinas)’라고 붙인 것은 그러한 탐험의 결과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원 역사에서 필리핀 원정은 쉽사리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노련한 선장 겸 행정가였던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가 토착세력들의 도움을 받아 1565년 세부에 거점을 마련하고, 이어서 선장 겸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사인 안드레스 데 우르다네타가 태평양을 서에서 동으로 횡단하는 항로를 발견하면서 마침내 에스파냐는 필리핀 열도에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되지요. 그리고 한때 필리핀 제도 중 사마르와 레이테 일대만을 지칭했던 ‘펠리페 제도’는 어느새 제도 전체를 지칭하는 지명으로 굳어지게 됩니다.
이미 필리핀의 존재를 알고 있던 포르투갈이었지만, 말루쿠와 달리 필리핀 제도에서는 딱히 귀중한 향료가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당장은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581년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 국왕으로도 즉위하여 양국이 동군연합(사실상 포르투갈이 에스파냐에 종속되는 형태였습니다)을 이루게 되면서, 토르데시야스 조약과 사라고사 조약 모두 무력화되게 되지요.
필리핀은 유럽 세력이 나타나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아시아 교역 네트워크의 한 축을 이루었으며, 중국과 인도, 이슬람 등 다양한 문화가 교차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루손 섬의 마닐라 일대는 중국과 일본, 동남아시아를 잇는 교역항으로서 일찍부터 발달하였고, 유럽인들이 당도하기 전부터 화교와 일본인 등이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기도 했습니다. 동시대 포르투갈인들이 ‘레퀴오스(Lequios)’인들이 말라카까지 와서 통상을 한다고 기록할 만큼 당시 류큐인들도 국제무역에 활발히 참여하였으므로, 세부의 라자가 류큐에 대해 알고 있던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