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더는 나아가지 못하리니 (2)
그 출신이 루시타니아(포르투갈)든 안달루시아든, 나바라든 카스티야든, 이베리아의 뱃사람이라면 모두 아는 이야기가 있었다.
머나먼 옛날, 헤라클레스가 게리온(Geryon)의 소를 훔치려 서쪽으로 항해했을 때, 그 위대한 이교도 영웅은 내친김에 더 서쪽으로 가보기를 원하였다고 한다.
곧 바다가 끝나는 곳에 닿은 헤라클레스는 자신이 세상의 끝에 당도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그는, 바다의 끝을 지키는 관문 양쪽에 거대한 기둥 두 개를 세우고는 한쪽에 이렇게 적었다.
‘저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노라 (Non plus ultra).’
그 기둥 아래에 사람이 살게 되고, 바위의 이름이 그곳을 밟은 저주받을 무어인의 이름을 따서 ‘타리크의 바위(Jabal Tariq)’로 바뀌고, 마침내 그 이름이 다시 히브랄타르(Gibraltar, 지브롤터)가 된 뒤에도, 이야기는 그대로 남았다.
세계의 군주가 되기를 소망한 황제, 당시에는 갓 국왕의 자리에 올랐던 카를로스(카를 5세)의 귀에도 그 이야기가 들어갔다.
“한 단어만 빼면 되겠군. ‘저 너머로 (Plus ultra)!’”
저 너머로 더 나아가자는 그 외침. 진실한 믿음의 이름으로, 그들의 주군 카를로스의 이름으로, 그리고 실제로는 부와 권력의 이름으로 수많은 콩키스타도르들이 그 말을 따라 외쳤다.
그리하여 그들은 신대륙의 추악한 이교도들을 쓸어 없애고 그 땅에 누에바 에스파냐(現 멕시코)를 세웠으며, 신앙의 빛은 세상에 퍼뜨리고 황금의 빛은 그들 품에 거둬들이고자 바다를 누볐다.
이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대신 강철의 빛을 선보였다. 번뜻이는 칼날과 화약의 불꽃 앞에 수십만 이교도가 무너져내렸으니, 그들의 대적(大敵) 투르크인들 정도를 제한다면 그 누가 그들을 막을 수 있겠는가.
“이번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레퀴오스(류큐) 임금의 궁궐에서 돌아온 레가스피가 부하들을 모은 뒤 무겁게 운을 떼었다.
“국왕의 앞에서 그 코조니우스라는 자에게 모욕을 당했다. 나 한 사람의 명예뿐 아니라 우리의 주군 카를로스 폐하의 이름까지 더렵혀졌다. 우리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쳐부숴야 할 것이다.”
“옳소!”
“당장 놈들의 배를 칩시다!”
찬동하는 목소리가 줄을 이었다.
레가스피와 달리, 이들은 대부분 나라보다는 황금에 충성하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금은보화와 명성을 내려줄 누에바 에스파냐의 행정관들은 압스부르고(합스부르크) 궁정에 충성하였으므로, 레가스피의 부하들은 어쨌든 한 다리 건너 충성을 다하는 셈이었다.
“내일 해가 뜨면 모든 병사들에게 갑주를 입혀라. 다른 지시가 있을 때까지, 매일 시가지에서 행진을 할 것이다.”
“그것으로 족하겠습니까? 차라리 조금 더 확실한 방법을 택하시는 것이 어떨지...”
포르투갈 배를 치자는 말 꺼내었던 부사관(sargento)이 물었다.
아카풀코에서 떠난 함대는 총 일곱 척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배 한 척은 각각 백 명 가량의 군사를 태우고 있었다. 이 중 네 척과 거기 탄 군사들은, 세부의 라자가 복속을 거부하는 토호를 토벌하는 데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에 세부에 남아 있었다.
현지의 유력한 세력을 도와 그와 반목하는 다른 세력을 정복하고, 그 대가로 거점과 통상·선교의 자유를 보장받는 것이 어느 정도 문명화된 지역에서 이들이 활동하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레퀴오스 섬에 거점을 마련하고 태평양을 서에서 동으로 횡단하는 항로를 탐색하고자 세부를 미리 떠난 선단의 군사들은, 자신들이 전공을 세울 수 없게 된 것을 아쉽게 여기고 있던 것이다.
“이미 마련해둔 계획이 있다. 무력을 선보이는 것은 그것을 위한 대비일 뿐. 결코 오늘 당한 모욕을 갚지 않고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니 안심들 해라.”
“알겠습니다, 돈 미겔(Don Miguel, 레가스피).”
그렇게 짧은 회의는 파하였다.
선실에서 나온 레가스피는 항구 한 편에 정박해 있는 포르투갈 카락을 노려보았다.
지구 반대편인 이곳에서도 밤낮의 순환은 동일하였으므로, 어느새 해는 저물고 바다와 하늘이 공히 어둠에 잠겼다. 하늘에는 별이, 땅에는 점점이 켜진 횃불이 빛나고 있었지만, 바다 위에서 빛을 발하는 것은 오직 그가 타고 있는 이 갈레온과 저 포르투갈 카락뿐이었다.
‘무엇을 노리고 있는 것이냐...’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오랜 세월 동안 왕관을 위해 봉사하면서 레가스피는 사람을 보는 안목을 얻었노라 자부하고 있었다.
그 코우지오니스라는 동양인이 저 배의 주인과 다름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가 내세운 온갖 거창한 직함도, 레퀴오스 인들의 반응을 보았을 때 어느 정도는 사실인 듯하였다. 그러니 그토록 당당하게 국왕의 앞에서 자신을 모욕할 수 있었을 테다.
‘그저 오만하고 무지한 동양인이기에 그처럼 방자한 언행을 보인 것인가? 만일 다른 깊은 뜻이 있었다면...?’
국왕의 앞에서 공개적으로 에스파냐를 모욕함으로써, 코우지오니스는 레가스피로부터 행동의 자유를 빼앗은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한 모욕을 당했는데 가만히 있는다면, 레퀴오스 인들 또한 에스파냐가 과연 그들이 말하는 만큼 강대한지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레가스피는 어떤 식으로든 무력에 호소해야 했다. 만약 코우지오니스가 처음부터 그것을 노렸다면?
‘아니, 그럴 리 없다. 그만한 식견이 있는 자라면 설령 나를 도발하려 했더라도 훨씬 세련된 방식을 택했겠지.’
그리고 설령 무슨 계책이 있다 한들, 저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저 부귀영화를 탐낼 뿐인 아랫사람들과 달리 레가스피는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고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를 분간할 만큼의 식견을 지니고 있었다. 현지 세력의 협조 없이 이곳에 거점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지금 그가 거느린 병력만으로도, 이 섬의 빈약한 군사력을 압도하고 섬을 일시적으로나마 점령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였다.
‘시나(중국) 동쪽에 거점을 마련하라는 것은 바로 황제이자 국왕이신 카를로스 폐하로부터 바로 내려온 지시다. 해내야만 한다.’
레가스피는 스스로 각오를 다졌다. 강철과 화약만으로도 족한 일일진대, 나름대로 쓸만한 협력자까지 구하지 않았던가. 실패란 있을 수 없었다.
“돈 미겔,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바닷바람 맞으며 얼마나 오래 서 있었을까. 뒤에서 들려오는 부하의 말에 상념에서 벗어났다.
“일전의 그이더냐?”
“그렇습니다. 통역을 데려오겠습니다.”
레가스피는 몸단장을 다시 하고, 선실로 향했다.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는 나라라고 하지만 명색이 왕족, 그것도 셋째 왕자쯤 되는 이라면 나름대로 정중하게 맞이해야 했다.
그 사람됨이 한눈에 훤히 들여다보일 만큼 어리석고 탐욕이 가득하다 한들, 이곳 레퀴오스를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잠시 고개 정도야 숙여줄 수 있었다.
다음날, 이곳 ‘우치나(오키나와 본섬)’ 남쪽의 다른 섬들 중 그들이 거점으로 쓸 만한 곳을 탐색하던 배들도 레가스피에게 합류하여, 나하 앞바다에 정박한 갈레온은 세 척으로 늘어났다.
그에 따라 슈리 저자에서 빛나는 갑옷 선보이는 이들도 그 머릿수가 크게 늘었다.
처음에는 호기심에 구경하던 슈리와 나하의 주민들도, 그들이 결코 구경거리 제공하려 그러한 시위를 벌이는 것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개중에는 유독 원숭이를 닮은 일본 젊은이 하나도 섞여서 ‘구경’을 하고 있었으나 에스파냐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려나 싶을 무렵, 시마구치오우지 쇼 칸의 우둔(저택)에 은밀히 찾아온 자가 있었다.
“이게 은밀한 것이오?”
쇼 세이 임금의 둘째아들, 쇼 겐은 나름 몰래 들어온다고 평복까지 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하인들까지 대동하여 오는 바람에 곧장 우둔에 머물고 있던 이방인들에게 들키고야 말았다.
눈썰미 있는 꺽정이나 도키치로에게 걸렸다면 그나마 체면이 살았겠지만, 변소 가던 서림에게 걸렸으니 민망하기 이를 데 없었다.
“류큐는 조선이나 일본과는 달라서 말입니다. 평소 병장기를 들 일도, 누구 눈을 피해 은밀히 움직일 일도 그리 많지는 않지요.”
형을 대신하여 아우 칸이 나름대로 변명을 하였다.
“여하간 그렇게 귀하신 분이 찾아오셨으니 필시 하고자 하는 말씀이 있으시겠지. 들어나 봅시다그려.”
꺽정이는 서림을 시켜 나머지 굵직한 이들까지 불러모았다. 가뜩이나 꺽정이 덩치로 인해 가득 찬 듯한 방이 어째 더 좁아진 듯하게 되었다.
“그리 크지도 않은 나라가 이제 셋으로 쪼개지게 되었소.”
들어올 만한 이들 다 들어온 것을 본 쇼 겐이 입을 열었다.
“내가 바랐던 것은 단 하나, 류큐가 지금껏 얻은 부와 힘을 이용하여 시마즈 씨와 담판을 짓는 것뿐이었소. 그리하여 그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홀로 서기를 바랐소이다.”
형에게 쌓인 것 없지 않았던 칸이 바로 반박하였다.
“이 아우의 생각도 같았습니다. 다만 식견이 형님보다 조금 더 깊었을 뿐이지요. 형님이야 시마즈 놈들과 담판을 짓는다 생각하실지 몰라도, 아지(按司, 왕족)와 웨카타(親方, 호족)들은 시마즈를 등에 업고자 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허나 너만 아니었더라면 내가 어떻게든 그들의 오해를 바로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네가 여기 임 당수를 모시고 온 이래로 모든 것이 틀어졌지만.”
“사람들 심산과 계책 뒤트는 것이 내 장기(長技)이긴 하지. 좀 더 설명해보시오. 뭣이 그리 틀어졌단 말씀이시오?”
이미 슈리성 정전에서 막말을 하던 것을 두 귀로 직접 들었던지라, 쇼 겐은 꺽정이 화법에 그리 큰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허나 한숨 한 번 거하게 나오는 것은 끝내 면할 수 없었다.
“우리 류큐 사람들은 저 바다가 열려 있는 한, 비록 섬은 작고 사람은 적을지언정 결코 나라가 망하지 않으리라 여겨 왔소. 그러나 이제 바다의 주인 되기를 원하는 이들이 앞다투어 나타나고 있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도 당연지사 아니겠소?
그러니 시마즈 씨와 담판을 짓는 것을 넘어 아예 그 아래로 들어가자는 이들이 나오는 것이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그리고 임 당수의 민주당까지, 도저히 우리 류큐 홀로 감당할 수 없는 태풍이 다가오고 있는 듯하니, 다들 얼른 돛을 내리고 아무 항구에나 배 대기를 원하는 게요.”
“설령 다시는 바다로 나가지 못하게 된다 하더라도 말입니까?”
“바닷속 귀신이 되는 것보다는 낫지 않더냐.”
겐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서 이렇게 찾아온 까닭이 무엇이오?”
“온 섬의 사람들이 임 당수의 행보에 주목하고 있소. 저들 남만인들은 철갑과 화포를 가져왔는데, 과연 조선의 임 당수는 무엇을 가져왔을 것인가. 적잖은 이들이 이 사람과 카츠렌오우지(3왕자 소 요소) 사이에서 아직 뜻을 명백히 밝히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오.
이 사람이 바라는 것은 단 하나요. 조용히 이곳 우치나(오키나와)를 떠나주시오.”
“칙명을 받들지 말고 그냥 떠나라고? 천자의 은혜 입는다는 사람들이 그러면 안 되지.”
그러나 꺽정이가 그 칙명 어찌 대하는지를 이미 훤히 보았던 쇼 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만약 당수께서 이곳을 떠나신다면, 아직 뜻을 정하지 않은 아지와 웨카타들도 선택해야만 할 것이오. 이 사람이냐, 아니면 저 속마음 알 수 없는 남만인들을 등에 업은 카츠렌오우지냐.”
“그러면 여기, 임자네 아우님은 어찌 되고?”
“이 사람이 보위에 오른다면, 장차 대국과 조선을 본받아 조정의 제도를 보다 짜임새 있게 고칠 생각이오. 아우를 재상으로, 조선의 관직으로 말하면 영의정으로 삼으리다. 장담컨대 사업당과 교역하는 일에는 물방울 하나만큼의 변동도 없을 것이오.”
“싫소.”
꺽정이가 좌중을 한 번 휘 둘러보더니 딱 잘라 말했다.
“저놈들이 얼마나 센지는 몰라도, 임자네 나라 군사가 약한 건 알겠소.”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하나의 나라이거늘, 삼백 명 군사를 못 막겠소?”
“삼백 명 아닌데?”
도키치로가 눈치껏 잽싸게 끼어들어 저의 정탐한 바를 늘어놓았다.
“도합 삼백이십하고도 둘이요, 개중 철갑을 제대로 차려입고 검과 방패를 든 이가 아흔넷, 흉갑만 차려입고 미늘창과 장창 든 이가 일백오십 하고 둘, 누비갑옷만 입고 조총 든 포수가 예순여덟, 그리고 군관인 듯한 자가 레가스피 이하 여덟입니다.”
“그렇다 하오. 내가 얼추 보니 우리 흑의군과 맞붙어도 제법 팽팽할 듯한 자들이오. 게다가 놈들 갑주나 병기는 우리 것보다 더 좋은 듯하고.
우리는 뱃사람 다 합쳐봐야 일백을 못 넘소. 하지만 이만큼만 데리고도 족히 임자네 궁궐은 점령할 수 있을 듯하오. 내가 그런 일은 좀 자주 해 보아서 일가견이 있소이다. 그런데 임자네 부실한 금군으로 저 에스파냐 놈들을 막을 수 있겠소?
그러니 임자는 우리더러 떠나라 할 게 아니라, 류큐도 중산왕 자리도 모두 줄 테니 살려만 달라고 간청하면서 여기 남아서 저놈들 막는데 힘 보태달라 해야 할 판이오.”
쇼 겐의 표정이 완전히 굳었다. 일자로 꽉 닫힌 입에 결연한 각오가 서렸다.
“좋소. 임 당수 그대의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중산세토(中山世土, 중산이 대대로 다스리는 땅) 류큐 사직이 부왕의 대에 끊어지게 할 수는 없소. 나 혼자서라도 슈리성을 지키겠소. 싸움이 벌어진 뒤의 일은 임 당수 그대가 감당해야 할 것이외다.”
임꺽정이 그 레가스피라는 자를 면전에서 모욕하는 것을 두 눈으로 본 쇼 겐이었다. 만약 레가스피가 아우 소 요소를 내세워 병란을 일으킨다면, 임꺽정 역시 무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류큐의 정당한 주인인 부왕과 그 뒤를 이을 겐 자신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을 터.
“더 있어본들 얻을 바는 없을 것임을 알겠소. 이만 일어나겠소이다.”
겐이 저의 말대로 몸을 일으키며, 아우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우야, 이것 하나는 기억하거라. 셋째 녀석이 만일 그 뜻 이루어 보위에 오른다면, 저 에스파냐 남만인들은 그 값을 두둑하게 받아내려 할 것이다. 아예 섬 몇 개를 내놓으라 할 수도, 류큐의 백성들을 노비로 삼아 내다팔려 할 수도 있겠지.
허나 여기 임 당수가 너를 돕는 것 역시 따지고 보면 마찬가지 아니겠느냐? 그가 정녕 그 계절존망 운운하는 명분을 위해 이곳 바다 한가운데까지 왔으리라 믿느냐?
세간 사람들은 내가 시마즈의 힘을 빌리려 한다 하더군. 어쩌면, 정말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되면 그리해야 할지도 모른다. 허나 여기 임 당수나 저 남만인들에 비하면 시마즈의 힘은 그 값이 훨씬 헐할 것이다.”
겐은 그리 쏘아붙이고는 정문으로 - 이미 정체가 들통났으니 굳이 숨길 것도 없었다 - 나갔다.
멀어져가는 형의 등을 바라보는 칸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너무 걱정은 마시오. 나름 여기 이 선생이랑 서 별감이 계획을 다 짜 두었다니까?”
꺽정이가 스리슬쩍 다가와 칸의 어깨에 묵직한 손바닥을 턱 올렸다.
“약속한 대로 나라만 내놓으시오. 그리하면 왕위는 드리겠소.”
“아니, 당수. 그리 말씀하시면 우리가 완전히 나쁜 놈 같지 않습니까?”
서림이 억울해하였다. 그러나 이번 일이 마무리된 뒤, 서림이 쇼 칸에게 부른 값을 다 받아낸다면 류큐는 더 이상 ‘중산세토’라 불릴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날 밤 칸은 도저히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쇼 칸의 눈에 핏발이 서든 말든, 태양은 오늘도 어김없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아침 태양 아래서는, 번뜩이는 강철 갑주 차려입은 에스파냐 사람들이 행군을 하고 있었다. 그 머릿수와 정예함을 보고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신한 셋째 왕자 쇼 요소는 더 이상 저의 정체도 숨기지 않은 채, 레가스피 옆에 서서 마치 저들이 자신의 군사인 양 뿌듯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부왕께서는 병이 깊으시오. 이 사람이 들은 바에 따르면, 며칠 내로 곧 저들이 실력을 드러낼 일이 생길 듯하오.”
“궁을 지키는 병력은 얼마 되지 않는다 들었습니다. 제압을 하려면 능히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왕이면 피를 보지 않고 해결하는 쪽이 좋을 것입니다.”
섬의 인구를 얼추 추산한 레가스피가 말했다. 이런 섬이라면, 어지간히 근친혼을 하지 않고서야 다들 누군가의 일가붙이일 수밖에 없을 터. 불필요하게 피를 흘려 원한을 살 이유는 없었다. (부하들이 듣는다면 저들의 전공 운운하며 불만 품을 소리였다.)
“천만의 말씀! 저 군사들의 힘을 보아야만, 저 어리석은 백성들도 비로소 이 카츠렌오우지(쇼 요소)가 얼마나 훌륭한 벗을 두었는지를 알게 될 것이오!”
소 요소가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때였다. 멀리서 소란이 일어난 것은. 느닷없는 함성이 거리 맞은편에서 들려오고, 이윽고 군중이 우르르 한쪽으로 몰려가는 것이 보였다.
“전원, 경계하라!”
“정지!”
척-척 울리던 발소리가 단번에 멎고, 방패 든 이들이 앞과 양옆으로 나아가고 창수와 포수들은 안쪽으로 빠졌다.
“대체 무슨 일인가?”
레가스피가 물었으나, 소 요소도, 아래의 부관들도 알지 못했다. 결국 군사 몇몇과 왕자를 데리고 직접 소란 일어난 쪽으로 향했다.
거리 한쪽을 장막과 수레로 막고, 그 위에 누군가 올라가서는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니, 저쪽은 다섯째 녀석의 집인데...?”
“다섯째라 하시면?”
레가스피가 요소에게 물었다.
“그대를 면전에서 모욕한 그 이방인을 후원하는 녀석이오.”
그렇다면 저들을 막을 군사를 모으는 것인가? 그렇다고 보기에는 그들을 지나쳐 달려가는 이들의 표정이 너무나 밝았다.
“자! 받아가십쇼! 들어오시기만 하면 대국 비단을 드립니다!”
우스꽝스럽게 생겼으나 덕분에 눈길을 확실히 끄는 일본인 소년이 수레 위에서 덩실덩실 춤추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슈리에서 어지간히 사는 이들 중 야마토벤(일본어)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므로, 다들 알아듣는 눈치였다.
“미리 초대받으신 웨카타와 아지 분들께서는 이쪽으로 오십쇼!”
이들이 흩뿌리는 비단과 온갖 보배란, 바로 천조 대명에서 받아온 사여품이었다. 일국의 왕자가 직접 찾아왔으니 천조의 체통상 헐하게 대접할 수는 없던 것이다.
장사꾼 기질 강한 류큐 사람으로서 쇼 칸도 딱히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진 않았다. 다만 값을 안 받고 뿌리는 것을 영 안타깝게 여길 뿐이었다.
“미사토웨카타(美里親方) 어르신 납십니다!”
“어허! 장유유서도 모르는가! 이 사람은 한참 전에 왔네!”
“이보시오! 하네지웨카타(羽地親方)! 그대는 시마즈의 편 아니오? 이곳에 왜 온 게요?”
“시마즈 씨를 벗으로 여긴다 하여 임 당수와 원수지라는 법이 있소?”
그리 넓지 않은 슈리와 나하였다. 아침부터 거하게 보화를 뿌리며 사람을 초청하였으니, 과연 일대의 이름난 토호와 왕실의 방계들은 죄다 몰려왔다.
스스로 예의 지키는 나라를 자임하는 류큐지만, 이익 앞에서 예절을 잠시 접어둘 줄도 알았다.
눈앞에서 보화를 흩뿌리고 있는데, 잠시 체통은 버려두어도 되지 않겠는가. 오직 교역으로 부를 일구는 나라답게, 상하 막론하고 다들 생각하는 것이 비슷했다.
심지어 자신은 이미 모실 분을 정했다 여기는 이들도, 그분을 위하여 적정(敵情) 살핀다는 핑계를 겉으로 내세우며 찾아왔다. 다들 모이는 판에 저 홀로 빠진다면 그 또한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 모양새를 넋 놓고 바라보는 레가스피와 쇼 요소였는데, 갑자기 그들 앞에 원숭이 면상이 나타났다.
“거기 두 분 어르신도 한 번 들어와 보시지요! 어차피 정탐하러 사람 보내실 바에야, 직접 들으시는 쪽이 낫지 않겠습니까? 경호하는 이들도 함께 들어와도 됩니다! 비단은 못 드리지만요.”
넉살 좋게 다가온 도키치로가 꼬드기니, 그자가 어떻게 두 사람 정체를 알고 있었는지 의문 품을 무렵에는 이미 두 사람 모두 적진이라 할 수 있는 쇼 칸의 저택 마당에 들어와 있었다.
한쪽에는 미리 초대받은 귀한 사람들이 죽 앉아 있고, 마당 바닥에는 비단 받으러 온 자들이 줄 지어 앉았다. 슈리 성 인근에 사는 이들이다 보니, 비록 초대받지 못한 자라 하더라도 나름대로 지체가 있는 이들 뿐이었다.
“다들 이리 찾아와주시니 그저 감사드릴 뿐이외다. 이 사람은 조선국 민주당 아래 있는 사업당에서 별감으로 일하는 서림이올시다.”
서림이 마당에 급히 마련한 단상에 올라 말했다. 미리 구해둔 통변들 - 또는 서림이 무슨 말을 할지 미리 전달받은 쇼 칸의 수하들 - 이 그 말을 재깍재깍 옮겨서 외쳤다.
“본인이 이리 찾아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 나라 유구국의 앞날을 위해서요.”
아무리 작고 약한 나라라지만, 이곳에 모인 이들에게는 어쨌든 세상에서 하나뿐인 그들의 나라였다. 이방인의 입에서 종사를 논하는 말이 나오니, 모두들 숨을 삼켰다.
“유구국과의 통상에서 거두는 수익이 나날이 줄어들고 있소. 우리 조선국은 유구 외에도 통하는 곳이 많으니, 유구 외에 다른 곳에서 소득 거두어 벌충하면 될 일이나, 유구국은 이대로라면 심히 곤궁해질 수밖에 없소이다.
장차 우리 사업당이 내선을 더 만들고, 나아가 남만대선(南蠻大船, 카락, 갈레온 등)까지 건조하게 되면 류큐를 거쳐 교역할 이유가 없어질 것이오. 자, 보시오들...”
본디 사람 농락하여 이득 취하는 것을 저의 업으로 삼던 서림이었다. 그런 사람이 종이 위에 그린 그림과 그 옆에 나열한 숫자로 사람을 속이는 방도까지 터득하였으니, 범에게 날개 단 듯하였다.
더구나 장사에 밝은 이들이 이미 반쯤은 알고 있는 내용이기도 하였다. 비록 사츠마 시마즈 씨의 농간이 줄어들어 조금 숨통이 트였다고는 하지만, 바다 위에서 벌어지는 장사판에서 류큐가 설 자리는 나날이 좁아지고 있었다.
상인을 천대하던 조선국 사람들은 갑자기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장사를 시작했고, 왜구들도 임꺽정에게 한 대 거하게 얻어맞은 뒤에는 돈벌이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해금령까지 풀렸으니, 류큐의 앞날이 암울하다는 것은 이미 모두가 얼추 짐작은 하는 바였다.
“그러나 걱정 마시오! 우리 사업당에서 귀국에 제의하고자 하는 바가 있으니, 우리 모두 이익을 얻는 길이오!
그것은 바로, 이 나라의 모든 남는 땅, 남는 사람을 사탕수수나 후추와 같이 오로지 유구에서만 나는 물산을 산출하는 데 쓰는 것이외다.
그리하여 큰 이익을 거두고, 거둔 이익으로 곡식과 여타 필요한 물산을 사들이는 것이오. 우리 사업당이 그것을 돕겠소.”
“우리가 무엇을 믿고 그런 일을 한다는 말이오?”
“한 번 유구의 사탕(설탕)을 맛본 자는 늘 그것을 다시 맛보고자 하니, 사탕은 실로 천하의 귀물이라 할 수 있소이다. 그리고 우리 사업당은 언제든지 그것을 사들일 수 있는 은을 가지고 있지. 다들 일본국 이와미 은광 이야기는 알고 계시지 않소?”
모르는 이들도 주변을 한두 번 둘러보고는 짐짓 고개를 끄덕였다.
“이르시는 바가 일견 타당하지만, 사탕수수 농사는 그리 쉽지 않소이다. 당장 들어가는 일손부터 벼농사에 비할 수 없소. 그에 필요한 밑천은 어디서 구한다는 말이오?”
“이미 우리 사업당은 분표라는 것을 고안하여 밑천, 이 사람 쓰는 말로는 자본을 널리 들이고 있소. 사업당은 이미 여러 해에 걸쳐 많은 이들에게 믿음을 얻었으니, 우리가 보증한다면 유구에 자본 대려는 이들이 실로 넘쳐나 문전성시 이룰 것이외다.
그렇게 얻는 이득은 실로 엄청날 것이오. 모두에게 이익되는 방도이니, 금일과 같이 이렇게 자리를 마련하여 알리는 것 아니겠소이까?”
그러나 개중 예리한 이들은, 서림이 열심히 늘어놓는 말과 선보이는 그림 속에 담긴 속뜻을 나름대로 간파하였다.
지금 서림이 말하는 것은, 류큐로 들어가는 모든 ‘자본’도, 류큐에서 나오는 모든 보화도 모두 사업당의 손을 거치도록 만들겠다는 뜻이었다.
허나 그것을 목소리 높여 묻자, 안쓰럽다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우리 사업당도 마땅히 이득은 취해야 하지 않소이까? 우리 사업당이 조금 떼어간다 한들, 그러고 남은 것만으로도 유구의 모든 사람들에 나누어줄 수 있을 것이외다.
그리고 들어보시오. 지금 이곳 슈리에 우리 외에도 저 남만, 에스파냐 사람들이 와 있소. 그들은 오로지 향료를 취하여 그들 사는 에우로파 땅으로 가져가는 데만 뜻이 있소이다.
우리 사업당의 손을 잡으면, 사탕수수 농사를 지어, 유구의 코앞인 조선이나 대국에서 그대들에게 필요한 온갖 재보와 부로 바꿀 수 있지만, 저 에스파냐 무뢰한들의 손을 잡으면, 풍토에도 맞지 않고 배도 채울 수 없는 향료나 잔뜩 농사지으며 밥 한 끼 제대로 먹지 못하게 될 것이오!”
“이보시오! 어찌 우리를 그리 모욕한다는 말이오?”
듣다 못한 레가스피가 벌떡 일어났다. 무슨 짓을 꾸미는가 살피러 왔건만, 궁궐에서 당했던 것에 이어 또 이렇게 욕을 당하게 되었다. 어찌 분개하지 않겠는가?
“틀린 말은 아니지 않소? 내가 말한 바가 거짓이라면 이 자리에서 그대가 모시는 주군과 천주의 이름을 걸고 공언해보시오! 그대들이 이곳까지 온 것은 오로지 황금과 향료를 탐해서 아닌가?”
“그것은 맞소이다. 허나...”
단 한 마디면 족하다는 것을 레가스피는 알지 못하였다. 레가스피는 유능하지만 우직한 행정관이요 선장이었으므로, 눈앞의 평양 아전, 사람 속이고 등쳐먹으며 이득 취하는 것을 예나 지금이나 업으로 삼는 이에게 그저 당하고야 말았다.
“자! 진상이 드러났소! 보시오! 이 사람 말대로 아니요? 저들이 오간 땅 중 저들에게 짓밟히지 않은 곳이 없소!”
“저 말 맞소!”
“양심 없는 카스티야 놈들! 썩 꺼져라!”
핀투의 선원들 중 데려온 바람잡이 녀석들이 어설픈 류큐 말로 동조하였다.
“이로써 명백해졌소! 저들 에스파냐의 손을 잡는다면, 류큐는 망할 것이오!”
어지러운 때였다. 작고 약한 류큐를 둘러싼 사방의 바다에서 모두 태풍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들이 마음 한 구석에 묻어놓았던 두려움은 이미 한껏 자극당해 수면 위로 올라온지 오래였다.
그런 판에 저런 선동을 들으니, 어찌 솔깃하지 않을까.
레가스피와 쇼 요소 두 사람이, 이 곤경을 어찌 빠져나갈지, 끝내 칼과 창을 들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던 무렵.
“멈추시오! 모두 멈추시오!”
갑자기 바깥에서 또 한 차례 소란이 일더니, 문을 부수듯 열며 슈리 성에서 나온 관리 하나가 들어왔다.
“이보시오, 이 무슨 짓이오이까? 여기 모인 이들의 면면이 보이지 않소?”
마치 자신이 이 자리에 모인 아지와 웨카타들을 대변하기라도 하는 듯 서림이 당당하게 따져물었다.
“국상(國喪)이오! 즉시 모임을 파하시오!”
중산왕 쇼 세이가 끝내 숨을 거둔 것이다.
날벼락과 같은 소식에, 그 누구도 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다들 그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저의 집으로 돌아갈 뿐. (물론 그러면서도 그들이 받은 비단이나 야명주 등 각종 보화는 결코 놓치지 않았다.)
레가스피와 쇼 요소 역시 곤경에서 절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무언가 엄청난 모략에 빠진 것은 아닌가 두려워하던 쇼 요소는, 밖에서 기다리던 에스파냐 군인들 사이에 돌아오자마자 미소를 지었다.
“마침내, 때가 되었소이다. 저들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든, 이미 늦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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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스의 기둥’ 전승의 기원은, 모든 민족의 신화가 사실은 같은 신과 인물들을 소재로 한다고 믿었던 헤로도토스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페니키아의 신 멜카르트(Melqart) - 주신 바알의 아들이자 티레 市의 수호신 - 가 그리스의 헤라클레스와 동일한 신격이라고 생각했고, 그 결과 카르타고의 식민도시 가데스(카디스)에 있던 멜카르트 신전은 그리스와 로마의 기록 속에서 헤라클레스 신전으로 탈바꿈하게 되었지요.
그 신전에 ‘이 너머에는 아무 것도 없노라’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는 증거는 전혀 없지만 - 당장 고대 그리스인들부터 그 너머로 탐험을 나간 적이 있었지요 - 르네상스 시기 유럽에서는 유명한 전승이었던 듯합니다. 작중에 서술된 것처럼, 카를 5세가 막 에스파냐 왕위에 오를 무렵 이를 비튼 슬로건 ‘Plus ultra’를 자신의 문장(紋章)에 넣으면서, 당대 에스파냐인들 사이에서도 크게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에스파냐의 국장에 쓰여 있는 말이기도 하지요.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는 코르테스가 정복한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며, 틀락스칼라 주와 멕시코 시티(시우다드 데 메히코)의 행정관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경력을 쌓았습니다. 원 역사에서는 그로부터 한참 뒤인 1564년에야 필리핀 원정을 나가게 되었는데, 이때 이미 나이가 예순셋이었습니다. (그래서 ‘늙은이(El Viejo)’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지요.) 능숙한 행정가였던 그는 필리핀 현지 세력과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정복자로서 무력을 휘두르며 끝내 마닐라와 세부에 거점을 만드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1572년 마닐라에서 일흔하나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필리핀 경영의 일선에 있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