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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은 살아있다-126화 (126/259)

38. 더는 나아가지 못하리니 (3)

태풍이 한 번 훑고 지나간 것처럼 텅 빈 채 엉망진창이 된 마당에, 꺽정이와 일행들이 알아서 모여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급히 입궐하였던 쇼 칸도 돌아왔다.

“후... 부왕께서 정말로 돌아가셨소. 아버지께서...”

칸은 아버지의 감긴 눈이 떠오르자 끝내 다시금 눈시울을 적시고야 말았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애도와 비탄은 사치에 가까웠다. 꺽정이도, 칸도 알았다.

“왕자님, 마음 아픈 것은 내 알겠소. 허나 왕자님도 이제 무슨 일 벌어질 지는 짐작하고 계시지 않소?”

“알고말고... 둘째 형님께서도 이왕 이렇게 된 것, 차라리 내 아랫사람들과 임 당수의 흑의군까지 모두 모아서 궁궐을 지키자 하더이다. 당장 오늘 밤 그 코 큰 오랑캐들이 움직일 지도 모르는 노릇이니.”

“그건 걱정 마쇼. 그 우두머리는 나름 쓸만한 골을 어깨 위에 이고 다니던데, 그렇다면 결코 밤에 쳐들어가진 않을 것이오.”

이젠 고인이 된 선왕을 만나러 - 이제 와서 할 말은 아니지만, 선왕의 명이 짧아진 데 꺽정이도 한몫하긴 했을 테다 - 갔을 때, 그 궁궐의 생김새를 눈에 담아두었던 꺽정이었다.

과연 작정하고 쳐들어오는 군대를 얼마나 잘 막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제법 성채 모양새 갖추었던지라, 여기저기 숨을 구석도, 몰래 드나들 만한 길목도 있었다.

그러니 설령 길잡이가 있다 한들 밤에 쳐들어가는 것은 하책이었다.

“저들은 이미 며칠간 이곳 저자에서 그들 군사의 맹용(猛勇)을 뽐냈지요. 그러니 볕 밝을 때 갑주 차려입고 정면으로 밀고 들어갈 것입니다.”

이지가 말하니, 꺽정이도 끄덕였다.

“여기 이 선생 말씀이 맞소. 내가 레가스피라도 그리할 테요.”

이미 슈리와 나하의 모든 사람들이 에스파냐 군대의 위엄을 알았다. 이미 위압을 당한 것과 다름없었으므로, 슈리성을 지키는 몇 안 되는 병졸들은 벌써 기가 잔뜩 죽어 있을 터였다.

그러니 에스파냐인들은 내일 해가 중천에 뜰 무렵, 그들의 무용을 과시하며, 정면으로 들어가 궁궐을 함락시킬 것이다. 그것이 류큐 사람들 마음 속에 남아 있을 일말의 저항심까지 꺾는 길이었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둘째 형님께 찾아가 함께 궁궐을 지키는 것이 어떻겠소?”

“왕자님 나라엔 화포가 없고, 우린 몇 자루나마 들고 있지. 그러니 도움이 되긴 할 게요. 그렇지만 여기 군졸들은 죄다 약병(弱兵) 아니오? 열 놈이 모여도 코쟁이 갑사(甲士) 하나를 못 당해낼 듯하던데. 우리가 입궐한다 한들, 반나절 버틸 것을 한나절 버티는 게 전부일 테요.”

여기 있는 이들 중 싸움에 가장 이골이 난 꺽정이가 그리 단언하니, 좌중이 착 가라앉았다.

“그러면 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게요?”

끝내 참다 못한 칸이 언성을 높였다.

그로서는 짜증만 내는 것도 많이 참은 것과 다름없었다.

나름대로 그럴듯한 계책이라고 낸 것이, 남만이나 사츠마 대신 조선국 사업당에게 이 나라 류큐를 팔라고 국인(國人)들 설득하는 것이었다. 적당한 설득과 겁박을 통해 셋으로 쪼개진 슈리의 공론을 모으고, 그 무렵 꺽정이에게 모욕을 당한 레가스피나 그 아래 사람 누군가가 행패를 부리면 그것을 빌미삼아 에스파냐 놈들을 몰아낼 심산이었다.

우선 급한 불부터 끄자는 심정으로 칸도 그 계책을 지금껏 따랐는데, 쓰디쓴 결실조차 미처 맺지 못하고 변고를 맞게 되었다.

고작해야 계산 빠른 몇몇 귀한 이들, 그리고 상인 집안 사람들 몇몇이나 따를까. 지금 이대로라면 칸이 모을 수 있는 사람도, 병력도 얼마 되지 않을 터.

허나 칸의 애가 얼마나 타든, 꺽정이가 신경쓸 바는 아니었다.

“어떻게 하긴.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해야지. 도둑질도 욕심 과하면 오래 못하는 법이오.

오늘밤이 가기 전에, 모을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모으고, 놈들이 움직일 때를 노려서 우리도 움직이는 것이오. 더 좋은 생각 있으면 지금 말하시오. 아마 없겠지만.”

칸이라고 뾰족한 수가 따로 있지는 않았다. 결국 사무치는 답답함과 애통함을 뒤로 하고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궁궐에 포수 몇몇을 보내어, 놈들 발목 잡는 정도는 도와드리겠소. 성의 안팎 잘 아는 사람을 하나 내어주시오. 그리고 이곳 도성에서 제법 잘 나간다 싶은 집안은 오늘 밤 사이에 다 돌아야 하니, 말 잘하는 놈들도 여럿 모아주시고.”

“... 알겠소. 내 따르리다.”

칸이 고개를 떨구며 답했다.

그 모습 보던 서림이, 꺽정이에게 뭔가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는데, 꺽정이는 아직 때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허나 사직과 자기 자신의 앞날을 걱정하며 침통함에 빠진 왕자는 미처 이를 보지 못하였다.

카츠렌오우지 소 요소, 그의 한때 사랑하던 아우가 곧 군사를 이끌고 이곳 궁성으로 향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쇼 겐은 원망스럽게 하늘을 바라보았다.

다섯째 녀석이 데려온 임꺽정의 말에 따르면, 남만인들은 그 번뜩이는 갑주로써 류큐 사람들을 위압하기 위해 해가 화창할 때 쳐들어올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지금, 태양은 어느 때보다도 더욱 밝게 빛나는 듯하였다.

“우슈(전하).”

선왕이 와병하자마자 겐을 지지하였던 중신 이케구스쿠 쇼시가 곁에서 그를 불렀다.

“아직은 그리 부르지 마시오. 오늘 싸움에서 이긴다면 그때 당당히 왕위에 오를 것이외다. 만약 지게 된다면... 중산(中山)의 영광스러운 계보를 패장의 이름으로 더럽혀서는 안 되겠지.”

임꺽정의 전언에 따르면, 저들의 수효는 삼백을 넘었고, 그 정예함은 이곳 류큐의 군사 열 명이 겨우 하나를 당해낼 수 있을 정도라 하였다.

만약 그 말이 맞다면, 이곳 궁성에 의지해 저들 남만인들을 막아낸다는 겐의 계획은 처음부터 가망이 없는 셈이었다. 류큐의 모든 군사를 합쳐도 삼천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장정들까지 모두 긁어모은다면 모를까.

“이케구스쿠 그대는 지금이라도 몸을 피하도록 하시오. 시마구치오우지(쇼 칸)는 사람됨이 경망스럽지만, 또 그만큼 총명한 녀석이오. 만일 내가 오늘 이곳에서 스러진다면, 시마구치오우지를 모시고 조선이든 명국이든, 어디로든 도망쳐 후일을 기약토록 하시오.”

부디 그 말이 틀렸기를 속으로 신명들에게 빌며, 겐이 담담하게 말했다.

“... 명을 받들겠나이다.”

겐은 하늘에서 땅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들이 서 있는 칸카이몬(歡會門) 옆 망루에서 그리 머지 않은 슈레이몬을 향해, 번뜩이는 강철 갑주의 무리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저것이 에스파냐 임금의 가몬(家紋, 가문의 문양)이라 했던가. 참으로 패악스러운 자로다. 온 세상을 누빌 힘을 지니고 있으면서, 그 힘을 어찌 이런 곳에 쓴다는 말인가?”

그들이 앞세워 들고 오는 그 깃발을 원망스레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바라본다 한들 깃발은 멈추지 않고, 그저 한 발짝 한 발짝 나아올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예의 지키는 문(슈레이몬守禮門)을 예의 없는 자가 밟았다.

“반역자이자 패륜아인 쿠메나카구스쿠 오우지(쇼 겐)는 들어라!”

이방인들의 대열 가장 앞에 서서, 자신이 꼭두각시인 줄은 모르고 그저 거들먹댈 뿐인 셋째 왕자 쇼 요소였다.

“건강하시던 부왕께서 갑자기 쓰러지셨다! 쿠메나카구스쿠 오우지 한 사람만이 그 곁을 지키고 있을 때 그리 되셨으니, 어찌 된 변괴인지 눈과 귀 있는 자라면 모두 알 것이다!

끝내 백약이 무효하여 훙서하시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우리 수례지방(守禮之邦)에 이처럼 참흉스러운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단 말인가? 그러므로 나 카츠렌오우지는 오늘로써 공육의 정을 끊고, 오로지 대의멸친(大義滅親)의 마음으로 패역한 자를 벌하고자 한다!

너희 군사들은 들어라! 나 카츠렌오우지의 뜻이 옳으므로, 우리와 연고가 없는 외인(外人) 의사(義士)들 또한 나를 따르게 되었다! 이들의 정예함과 용맹함은 너희도 잘 알고 있을 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너희 스스로 구명(救命)할 방도를 찾아라!”

겐이 무어라 대꾸하려던 차.

“산티아고(Santiago)!”

“산티아고!”

이교도 왕자들 사이의 다툼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이 땅에서 세울 공적과 그 뒤에 따를 부와 명예에만 마음이 있던 에스파냐 군사들이 달려나갔다.

“이놈들, 우리도 뒤쳐질 수는 없지 않으냐! 쳐라!”

요소가 그러모은 장정들 또한 사다리와 통나무를 짊어지고 뒤따랐다.

그들을 바라보던 겐은,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대신 꼿꼿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손에 든 활에 살을 재고, 시위를 당겼다.

그러나 화살은 과녁이었던 에스파냐인의 흉갑에 흠집 하나만을 내고 그쳤다.

“이 성은 난공불락! 슌바준키((舜馬順煕) 대왕 이래 그 어떤 외침도 불허하였다! 우리 대에 이르러 그 위엄을 더럽혀서야 되겠느냐!”

“쏘아라! 그 누구도 칸카이몬을 살아서 지나지는 못할 것이다!”

슈리 성을 지키는 군사들은, 비록 약할지언정 이곳 류큐에서는 그나마 군사라는 이름값을 하는 이들.

두려움을 이겨내고, 그들의 과묵한 새 주군을 따라 축대 위에서 몸을 일으켜 시위를 당겼다.

허나 류큐의 가장 강한 활조차 톨레도 강철 흉갑을 뚫지는 못했다.

“맙소사...”

“두려워하지 마라! 계속 쏘아라!”

“팔을 노려라!”

“돌을 던져라! 돌로 머리를 맞춰!”

고작해야 반항하는 다른 섬의 토호들을 진압하는 것이 류큐 군사들이 알고 있는 싸움의 전부였다. 강철로 온몸을 두른 이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설령 머릿속으로 알더라도 몸으로 따를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때.

“발포!”

방패를 들고 달려오는 이들에게 모든 눈이 쏠린 사이, 벼락이 성가퀴 위를 할퀴었다.

“주군, 피하십시... 억!”

서서 활시위 당기던 겐을 온몸으로 덮친 군관 하나가, 뒷목 파고든 총알에 바로 절명하였다.

“거, 겁먹지 마라! 계속 쏘아라! 쏘란 말이다!”

겨우 목숨 건진 이들이 다시 외쳤으나, 이미 그들부터 시위를 당기는 손에 힘이 빠져 있었다.

“하하! 이놈들! 지금이라도 투항하거라! 목숨이 소중하지 않더냐?”

“저하! 이럴 때가 아닙니다! 지금 당장 저 문을 돌파해야 합니다.”

양쪽에서 가급적 피를 덜 흘리는 쪽이 향후 통치에 유리함을 아는 레가스피가, 에스파냐의 화승총이 마치 저의 것인 양 여기며 그 위력에 도취되어 있는 소 요소를 독촉하였다.

“그 말이 맞소, 흐흐. 여봐라! 칸카이몬을 때려부숴라! 놈들이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으니 지금이 기회다!”

이미 처음에 산티아고 외치며 달려나간 이들 따라, 통나무 짊어진 장정 여럿이 칸카이몬 앞까지 육박해 있었다. 화살에 맞아 몇 명 쓰러지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피케로(창병)! 문이 부숴지는 대로 돌입한다!”

“예, 알겠습니다! 다들 준비해라! 문이 부숴지는 대로...”

탕- 소리와 함께, 레가스피의 명령을 전달하려던 부관이 쓰러졌다.

“하하! 조총은 너희만 있는 줄 아느냐!”

조총은 저들에게만 있는 줄 알았던 에스파냐 군사들과 역시 그런 줄로만 알았던 류큐 군사들이 함께 놀랐다.

“어느 쪽이냐!”

“서쪽입니다! 저쪽 망루 위에서...”

또 한 차례 불꽃이 일고, 빽빽하게 모여 있던 창병들 가운데 또 하나가 피 흘리며 쓰러졌다.

“아르카부케로(화승총병)! 준비되는 대로 서쪽 망루를 노려라!”

레가스피가 이를 뿌드득 갈았다.

그러나 어찌 보면 잘 된 셈이었다. 이곳 레퀴오스 군사들은 분명 아르카부스(화승총)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하였다. 따라서 방금 전 날아온 그 총격은, 보나마나 코우지오니스가 거느린 병사들의 솜씨일 터.

몇 차례 더 총격이 오갔으나, 나름 응사하는 것이 무색하게도, 끊어질 만하면 저쪽 망루에서 불꽃이 번뜩이고 이쪽에는 피가 튀었다.

그사이 조금 기가 살아난 축대 위의 군사들에게서도 다시 화살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레가스피는 넋을 놓고 있는 요소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저하, 나머지 장정들에게 즉시 돌격하라 지시하십시오!

저 문만 뚫고 궁성을 함락시키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저항할 법한 이들은 모두 저 안에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 알겠소! 쳐라! 겁먹지 말고 쳐라!”

“아르카부케로! 성가퀴 위를 노려라! 부관! 가장 노련한 사수 다섯만 데리고 서쪽 망루 아래에 매복해라!”

그 다섯 명의 아르카부케로 중 몸 성히 돌아온 것은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사이 마침내 저쪽 성문을 돌파하였으니, 네 명의 목숨값은 제대로 받아낸 셈이었다. 망루 위의 포수들도 그것을 알고 도망쳤는지, 더는 탄환이 날아오지 않았다.

“칸카이몬이 뚫렸다! 난신적자 도당을 몰아내자! 돌격!”

“코셀레테(검병) 앞으로!”

“산티아고!”

죽기를 각오한 쇼 겐이, 달아나지 않은 마지막 군사를 모아 정전 앞마당에서 최후의 싸움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

“우리 조선에, ‘임금은 배요 백성은 물이다’ 하는 노래가 있소. 내가 아는 누님이 지으신 노래지.”

꺽정이가 여전히 안색 좋지 않은 쇼 칸에게 말했다. 배 타는 것을 예사로 여기는 류큐 사람이니, 뱃멀미는 아닐 것이요, 두려움 또는 걱정으로 안색이 창백해진 것일 테다.

이곳에서도 슈리 성에서 일고 있는 불꽃이 보였으니, 아마 후자일 테다.

“임금 따위는 없어도 백성은 그대로요. 그리고 우리네에게도 그 정도면 족하고. 누가 위에 앉았도 무방하고, 위에 아무도 없어도 상관 없소. 우리는 그냥 돈벌이만 하면 그만이라오.”

“당수. 놈들이 우리를 본 모양입니다. 배 위에서 사람들이 바쁘게 오락가락 하는데요.”

꺽정이 옆을 지키는 도키치로가 말했다.

“여하간, 내 말은, 바다 위에서라면 반대로 배 가진 이가 곧 임금이라 할 수 있지 않으냐, 그런 뜻이오. 내 그대를 임금으로 만들어 드리리다.”

에스파냐인들이 해 뜨기를 기다리는 동안, 꺽정이와 흑의군, 그리고 쇼 칸의 수하들은 바쁘게 슈리 곳곳의 우둔들(저택)을 오갔다.

‘내일이면 슈리 성의 주인이 바뀔 수도 있소. 그리 되면 댁들이라고 무사하실 줄 아시오?’

‘이미 오늘 낮에 보지 않았소? 우리도 완전히 선량한 건 아니지만, 저 남만인들은 망종 중의 망종이오. 그리고 그 망종들은 오늘 낮에, 댁들이 우리네가 연 모임에 와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아있는 것을 다 보았지.’

‘뭐? 감히 댁들을 해칠 수는 없을 것이라고? 하하하! 이보쇼. 댁들 임금도 우습게 아는 작자들이, 퍽이나 댁들을 잘 대해주겠소.’

밤은 짧고 사람은 많았다. 그러므로 꺽정이는 슈리에 집 있는 모든 이들을 다 찾아가는 대신, 저의 이름, 또는 저의 집안 이름으로 배를 가지고 있는 자들만 찾아가 타이르고 얼렀다.

‘방법은 하나뿐이오. 우리를 위해 공을 세우시오. 그리하면 이 땅에서 얻는 수익 중 그대들이 응당히 얻어야 할 몫을 보장하겠소.’

‘날이 밝는 대로 배를 띄우시오. 나하의 모든 배를 몰아 에스파냐인들을 칠 것이오.’

‘바다 위의 성채 같은 저 남만 배들을 어떻게 할 것이냐고? 걱정 마시오. 다 수가 있으니.’

그럭저럭 쓸 만한 복선은 네 척뿐이요, 나머지는 그 복선보다도 한참 작았다. 먼바다를 빠르게 오가는 데만 주력하다 보니, 전선 시늉이라도 낼 법한 크고 견고한 배는 한 척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오히려 득이 될 터였다.

“대체 우리 류큐를 어찌하려 하시오? 한 번은 이 나라를 그대들 당의 것으로 삼겠다 하고, 지금은 다시 이 나라를 웨카타들에게 나누어주겠다 하니, 도대체 감을 잡을 수 없소.”

“나라는 우리들 당의 것도, 임금의 것도, 또 나머지 백성들의 것도 될 수 있는 법이오. 원래는 차근차근 시일을 들여 사람들 설득하려 했는데, 안타깝게도 계책이 열매를 맺지 못했지. 서 별감이 나중에 다시 설명해 줄 게요.”

“당수! 놈들이 총통을 준비하는 듯합니다!”

나하 포구는 히라도와 마찬가지로, 카락이나 갈레온 같은 큰 배가 드나들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므로 레가스피의 세 척 갈레온은 모두 포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정박하고 있었다.

그리고 류큐 배들은 그 갈레온 세 척 향해 맹렬히, 그러나 비스듬히 나아오고 있었다. 일렬로 길게 늘어선 그 모습이, 마치 나하 앞바다를 그대로 가로막는 듯하였다.

“다들 기억은 하고 있겠지?”

“저들 목숨이 걸렸으니 알아서 잘 피하겠지요.”

옆에 있던 이지가 말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놈들이 방포합니다!”

개중 한 척의 옆구리에서 불꽃과 연기가 일더니, 촌음이 지난 뒤 폭음이 들려왔다.

이어서 다른 두 척도 나름대로 포를 쏘았다.

“자, 알아서 천지신명께 빌어라!”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포를 쏜 보람도 없이, 포환 대부분은 길게 늘어선 배들에 닿지 못하고 그 앞에서 물보라를 일으켰다.

개중 운 없던 배 두어 척이 부서졌지만, 흑의군 사람들은 어차피 지금 꺽정이가 탄 쇼 칸의 배에만 타고 있었으므로 별로 중한 일은 아니었다.

류큐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다들 자맥질은 할 줄 알 테니, 정말로 재수 옴 붙지 않고서야 알아서 헤엄쳐서 포구까지 돌아가지 않겠는가.

“하하! 내가 옳았다! 내가 옳았어!”

옆에서는 이지가 무서운 줄도 모르고 좋아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핀투에게 저쪽 갈레온에 실려 있을 만한 대포의 사거리를 대충 들은 뒤 - 재수도 없고 염치도 없는 압스부르고의 개들을 골탕 먹이는 일이었으므로, 핀투는 흔쾌히 도와주었다 - 자신이 아는 산술과 이이에게 뜯어낸 『기하원본』에 나오는 산법(算法)을 바탕으로 계산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계산을 한 이지보다 그 계산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핀투 선장의 공이 더 큰 셈이었다. 그 말을 듣고 갈레온을 어떻게 제압할지 그럴듯한 발상을 한 꺽정이의 공도 작지는 않을 터.

“거 보시오, 임 당수! 여기까진 안 닿지 않소?”

그러나 저 잘난 맛에 흠뻑 취한 이지는 거기까지 생각이 닿진 않았다.

“그래, 참 잘했소. 자, 칭찬 해주었으니 이제 입 닫으쇼.”

“이거 섭섭해서 원.”

“나는 못 배운 놈이라 배운 사람 대접하는 법은 모르오. 임자 팔자려니 하시오.”

꺽정이가 방금 전 날아온 포환에 살짝 넋 나간 쇼 칸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보쇼, 왕자님, 알아서 옮겨주시오. 자, 앞으로!”

지금은 투덜거릴 때도, 두려워할 때도 아니었다. 금방 정신 차린 칸이 목청 가다듬고 외쳤다.

“놈들이 총통을 다시 재기 전에 에워싼다! 앞으로! 앞으로!”

작고 날랜 배들이 쏜살같이 노 저어가며 수면 위를 내달렸다.

갈레온들은 급히 반대편으로 선회하려 했으나, 나하 앞바다의 바람을 평생토록 몸으로 배운 류큐 뱃사람들보다 빠르지는 못했다. 돛과 노의 힘을 빈 배들은, 갈레온들이 겨우 반대편 옆구리를 드러낼 무렵에는, 이미 화포로 쏠 수 없을 만큼 바짝 붙었다.

“알아서들 따라와라!”

꺽정이가 가장 먼저 달려나갔다. 양손에는 갈고리 든 채, 하늘을 붕 날아 갈레온 선체 옆에 붙었다.

어차피 꺽정이 배도 아니었으므로, 굳이 힘을 아낄 필요도 없었다.

사정없이 퍽퍽 갈고리 내지르니, 그럴 때마다 선체엔 구멍이 푹 파였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꺽정이가 갑판 위에 닿았다.

“어이, 너희들! 죽기 싫으면 다들 여기 갑판 위로 모여서 무릎 꿇고 있어라.”

핀투에게 들은 어설픈 카스티야 말로 꺽정이가 한 마디 하더니, 무릎 안 꿇는 이들을 상냥하게 눕혀주기 시작했다.

선원들도 다들 한 힘 하지만, 저 거한 앞에서는 그저 어린애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갑판 위가 피로 물드는 사이, 줄 달린 갈고리 던져 겨우 배 위에 오른 흑의군들이 저들의 두령에게 합세하였다.

사세 재미 적게 돌아가는 것을 뒤늦게야 알아차린 다른 두 척 갈레온은 급히 선수를 돌리려 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달아나야 한다! 달아난 뒤에 다시 돌아온다!”

“돈 미겔(레가스피)은 어떻게 합니까?”

“젠장, 일단 우리가 살아야 뭐라도 할 것 아니냐? 얼른 돛을 펴라! 뚫고 나간다!”

그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그들 턱밑까지 다가온 배들이 화공이라도 한다면 큰일이었다. 저 작은 배에 땔감이 그리 많이 실려 있지는 않을 테니, 지금이라도 배를 움직인다면 어떻게 무사히 빠져나갈 수도 있을 것이었다.

이미 재수 없는 한 척의 갑판 위에서 무시무시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으므로, 선장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그쪽을 한 번 보고서 금방 마음을 돌렸다.

“남만선이 움직입니다!”

“다들 계획한 대로만 하면 된다!”

쇼 칸이 뱃전에서 외쳤다. 거대한 남만선 선체에 눈앞이 막혀, 다른 두 척 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이미 짜둔 계책이 있었으므로 딱히 당황하지는 않았다.

“다 연결했습니다!”

“좋다! 배가 가라앉을 것 같으면 알아서 도망쳐라!”

“여차하면 알아서 도망치랍신다!”

“닻을 내려라!”

“새끼줄 남았으면 더 묶어라! 한 가닥만으론 못 미덥다!”

꺽정이 손에 도륙이 나고 있는 한 척을 제외한 다른 두 척 쪽에서는, 파선(破船)을 각오하고배 턱밑까지 다가온 류큐 배들이 서로 새끼줄 던져 이물과 고물을 묶고 있었다. 곧 남은 두 척 갈레온을 배의 고리가 둘러쌌다.

그제야 정신 차린 갈레온 쪽에서도, 열심히 대포알 따위를 들고 갑판 위까지 올라와서는 류큐 배를 향해 던졌다.

“뭐라도 던져라! 횃불이든, 돌멩이든, 건빵이든! 저 배들을 가라앉히든 새끼줄을 끊든 해야 한다! 얼른!”

두 척 갈레온의 선장들이 연달아 외쳤다. 그 절박함이 하늘에 닿았는지, 마침내 한 척이 자유를 얻어냈다.

“줄이 끊어졌다!”

“마침내!”

“야, 이놈들아. 너희는 뱃사람이 되어서 남의 배를 그렇게 함부로 다뤄도 되느냐?”

낯선 말이 들려와 환호성을 툭 끊었다.

이미 그들의 동료들을 수없이 베어 넘긴, 어쩌면 악마의 종자일지도 모르는 자가 그들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야, 다 모여서 무릎 꿇어라. 싫으면 여기서 죽든가.”

“이놈! 부왕께 부끄럽지도 않느냐!”

“흐흐, 이제 보니 말을 잘만 하시는구려. 백성들 중에는 형님이 벙어리인 줄 아는 것들도 있지 뭐요?”

피투성이가 된 채 무릎 꿇려진 쇼 겐이, 저의 아우를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순순히 문을 열지 그러셨소. 이 나라에 변변한 군사가 없는 것 뻔히 아시면서.”

“조롱은 그만 하시지요, 저하. 우선은 그 코우지오니스와 이방인들의 소재를 찾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 말대로였다. 슈리 궁을 확보한 뒤, 동료들을 잃어 눈 뒤집힌 에스파냐 군사들은 모든 구석을 샅샅이 뒤졌지만 끝내 아르카부스 든 자들은 찾지 못했다.

“그놈이 달아났다 한들 무슨 소용이겠소? 이제 궁이 함락되었고, 우리 형님까지 붙잡혔으니 모든 것이 끝난 것과 진배 없소이다.”

쇼 요소가 제 말에 겨워 웃었다.

그러나 요소의 비아냥거리는 말에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정확히는, 대답이 나온다 한들 요소의 귀에 들어올 수가 없었다.

“앗! 저, 저거!”

“신이시여...”

“돈 미겔! 당장 돌아가야 합니다! 당장!”

슈리 성은 우치나 섬의 요지에 위치하여, 나하 앞바다를 훤히 볼 수 있었다.

싸움이 끝나고 숨 고를 여유가 생긴 뒤에야, 비로소 코우지오니스와 그 일당이 무슨 짓을 벌였는지를 보게 된 것이다.

“돈 미겔! 큰일입니다!”

뒤늦게 달려온 사람이 하나 있으니, 바로 배를 지키도록 남겨두었던 몇 안 되는 병사들을 이끌던 부관이었다.

갑옷은 어디 두었는지 모두 벗겨졌고, 얼굴에는 이미 퍼렇게 피멍이 들어 있었다.

“코우지오니스 단장으로부터의 전언입니다! 즉시 병력을 물리고 항복하지 않는다면...”

절묘한 우연으로, 때맞추어 갈레온 한 척에서 불길이 올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 바르바라의 방(화약고)에 불이 옮겨붙었는지, 괴성에 가까운 폭음과 함께 거대한 장작으로 화하고야 말았다.

“... 남은 두 척도 저리 만들겠다 하였습니다.”

넋 놓고 다른 이들과 함께 그 모습 바라보던 부관이 뒤늦게 저의 말을 마쳤다.

--- *** ---

류큐 왕국의 수도 슈리는 지금은 오키나와현 나하 시의 일부로 편입되어 있습니다. (동래와 부산포 사이의 역사적 관계를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슈리의 중심을 지키던 슈리 성은, 류큐가 통일되기 전 중산(中山) 왕조 - 류큐 국왕의 대외 공식 칭호인 ‘중산왕’도 여기서 유래했습니다 - 의 거성으로, 중국이나 조선의 궁궐과 달리 방어적 기능을 염두에 두고 축조되었습니다.

방어의 거점이라는 점으로 인해, 폐번치현으로 류큐 왕국이 끝내 사라진 뒤에도 슈리 성은 수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1945년 오키나와 전투 당시 슈리 성은 일본 육군 32군의 사령부이자 주요 방어거점으로 쓰였고, 치열한 전투 끝에 슈리 방어선을 돌파한 미군은 성을 공격하기 전 사흘 동안 뉴멕시코급 전함 미시시피를 동원해 예비포격을 실시하였습니다. 그 결과 슈리 성은 소중한 문화재와 더불어 거의 완파되고야 말았지요.

카락과 갈레온 같은 16세기 대형 범선들은, 소형 선박으로 빠르게 접근하여 공격하는 전술에 취약했습니다. 물론 이전에 꺽정이의 히라도 활극 편에서 언급한 것처럼, 화약무기 자체에 익숙하지 않은 상대에게는 그런 대형선으로 몇 번 포격을 하는 것만으로도 현지 세력을 물리칠 수 있었지만,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지녔던 그런 이점은 오래 지나지 않아 사라지고야 말았지요.

이미 수준 높은 화약 무기를 지니고 있던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일대의 현지 세력에 의해 포르투갈은 여러 차례 곤란한 상황에 처한 바 있었고, 에스파냐 역시 네덜란드 독립 전쟁에서 소형 선박을 이용해 근접전을 벌이거나 충각 전술을 사용하는 네덜란드의 ‘바다 거지들(Watergeuzen)’ 함대에 쓴맛을 본 바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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