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127화 (127/259)

38. 더는 나아가지 못하리니 (4)

싸움은 끝났다. 그 누구도 레가스피의 결정에 토를 달지 않았다.

아니, 사실 토 다는 사람이 하나 있기는 했다.

“이제 이 나라가 이 사람의 것인데, 무엇이 더 두렵겠소? 지금이라도...”

“나는 카를로스 폐하를 모시는 신하이자, 내 부하들의 삶을 짊어진 지휘관이기도 하오. 이익을 취할 수 없다면, 적어도 손실만은 최소화하는 것이 내 의무요.

부관, 이자의 입에 재갈을 물려라. 산 채로 데려가야 항복 협상에서 그나마 내놓을 패가 생기는 셈이니.”

이제는 정말로 토 다는 사람이 없었다. 앞서 레가스피의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 돌격을 감행하였던 가장 탐욕스러운 자들조차, 한때 갈레온이었던 나무조각에서 아직도 나는 연기를 보고서는 비로소 전공이고 부귀영화고 노릴 계제 아님을 깨달았다.

“전원, 나하 항까지 대열을 갖추어 철수한다.”

슈리 성 정전에서 끝까지 저항하다가 붙잡힌 쇼 겐과 몇몇 군교들만 어리둥절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하, 꼴 좋다!”

핀투의 상 투메 호는 화포를 몇 문 싣고는 있지만, 해전보다는 교역에 적합하였다. 더구나 만에 하나 싸움에 휘말려 손상이라도 입게 되면, 동래의 영 시원찮은 - 핀투를 따라온 조선공들이 애는 쓰고 있었지만, 큰 배를 다루기에는 아직 많이 부족했다 - 조선소까지 돌아가야 했다.

그러므로 오늘 싸움에서는 나하 앞바다 반대편에 멀찌감치 떨어져 구경만 하고 있었다.

“남의 바다를 탐내니 이렇게 되는 거다!”

“양심은 내다 판 머저리들!”

그리고 지금 그 선원들은 싸움이 끝나자마자 도로 포구로 달려와서는, 붙잡힌 채 줄줄이 뭍에 내리는 에스파냐 선원들을 놀려대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에스파냐 인들이 하려던 짓은 사실 포르투갈 사람들도 향료 제도나 실론 섬 등지에서 곧잘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는 않았다.

불타는 슈리 성 쪽을 흘깃흘깃 보면서 집안에 숨어 있던 류큐 사람들도, 그 소리 듣고 나와서는 욕지거리에 동참하였다.

그렇게 오늘 싸움에 별반 공 없는 이들이 모두 달려나와서는 더러는 욕하고 더러는 재밌게 구경하고 있었는데, 싸움에 공 있는 이들은 정작 다른 데 모여 있었다.

포구 옆, 별 볼 일 없는 모래톱에 꺽정이가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싸우는 사이 해도 슬쩍 기울어, 뙤약볕이 반나절 전만큼 매섭지는 않았다.

“고생들 했소.”

이런 모래톱에서 나라의 대사를 논할 수 있겠느냐며 누군가 항변할 법도 했지만, 이 자리에서 가장 힘 센 사람이 체통을 아니 지키니 차마 싫은 소리를 꺼내지 못했다.

“그... 임 당수. 갑옷이라도 벗고 오는 것이 어떻겠소?”

일신의 힘은 어떨지 몰라도, 오늘 세운 공은 결코 작지 않은 쇼 칸이 헛기침을 했다.

“갑옷? 아.”

여기서 다치면 곤란한지라, 꺽정이도 오늘 싸움에서는 나름 피갑(皮甲)이나마 갑옷을 차려입고 있었다.

“에이, 귀찮게시리. 되었소. 이 정도 피 묻은 것 가지고 뭐. 묻은 것 중 내 피는 없을 테니 걱정 마시오.”

사람 피 보는 일과는 거리가 멀었던 슈리의 지체 있는 이들 앞에서 피칠갑을 하고 있으니 문제였다. 그러나 꺽정이가 그렇게 단언하니, 누구도 다른 말을 덧붙이지 못했다.

“자, 이제 에스파냐 잡것들이 곧 이리로 올 테요. 그 전에 논공행상을 소략하게나마 하고 싶은데, 왕자님은 어찌 보시오?”

꺽정이가 불쑥 물었다. 그러나 이는 쇼 칸이 홀로 답할 수 없는 물음이었다.

“타마우둔(玉殿, 쇼 씨 왕조의 왕릉)에 계시는 모든 선왕들께 부끄럽지 않을 공을 세운 우리 류큐의 국인(國人)들께 묻겠소. 어찌들 보시오?”

짐짓 겸손한 시늉을 하며, 꺽정이 따라 엉거주춤 모래톱에 무릎 꿇고 앉은 웨카타와 상인들 향하여 칸이 물었다.

따지고 보면 오늘 싸움에서, 감수한 위태로움에 비해 그나마 편하게 공 세운 것은 오밤중에 꺽정이에게 붙들려 나온 슈리의 사람들이었다. 그저 그들의 배만 내놓고서 멀찍이 구경만 하였던 것이다.

허나 그렇다 하여 그들의 공이 적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나하 앞바다에 장사진을 펼쳐 에스파냐 뱃사람들을 당황케 하지 않았더라면, 또 그들이 순순히 빠른 배들을 내놓지 않았더라면, 오늘 싸움의 향방이 어찌 되었겠는가.

어떻게 운 좋게 꺽정이가 포화를 뚫고 저들의 큰 배 위에 올랐다 해도, 나머지 두 척까지 나포하기는 난망했을 테다.

그리고 저들도, 비록 식견의 길고 짧음은 있을지언정 대체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귀하신 분의 뜻에 따르겠나이다.”

“뜻대로 하시옵소서.”

역시 짐짓 공손한 시늉을 하며 저들이 답하였다. 그 누구도, 아직 궁성의 불길이 다 잡히지 않았다거나, 국상(國喪)이 고작 어제의 일이니 시기가 온당치 않다거나 하며 트집을 잡지는 않았다.

“백성이 원하니 임 당수가 말씀하신 대로 이 자리에서 공을 논하겠소.”

“좋소. 먼저 에스파냐 놈들과의 협상은 오늘 싸움에서 선봉에 선 이 사람과 여기 계신 왕자님께서 알아서 하도록 하겠소. 그대들 나라에 해로운 짓은 안 할 테니 안심들 하시오.

불만 있는 사람은 지금 말하시오. 이왕이면 손도 들고, 어디 사는 누구인지도 함께 알려주시면 고맙겠소.”

사람의 말대꾸는 나오지 아니하고, 저쪽 부두에 모여든 구경꾼들 왁자지껄한 소리, 그리고 점점이 파도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그러나 여러분들도 공 세운 만큼 챙겨가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소? 이보시오! 서 별감!”

꺽정이가 외치자, 포구에서 도키치로 데리고 붙잡힌 에스파냐 선원들 명부를 만들고 있던 서림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또 뵙습니다. 사업당 서 별감이올시다.”

본디 꺽정이 패거리의 계획은 이러하였다.

먼저 사업당 아래로 들어오지 않는다면 류큐의 장래는 암울함을 널리 알린다.

그 다음으로, 대신 사업당 아래 들어온다면 상하귀천 막론하고 제법 돈벌이를 할 수 있음을 알린다.

말하자면 우선 구석으로 몰아넣은 뒤 빠져나갈 구멍 마련해준다는 것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전자를 막 하려던 와중에 임금이 이승에서 피안(彼岸)으로 건너가버리고야 말았다.

그래도 어쨌든 잘 풀렸고, 어어 하다가 완전히 에스파냐와 척지게 된 저 류큐 사람들이 어디 도망할 수도 없게 되었으니, 이제라도 원래 하고자 했던 말을 마저 할 심산이었다.

“... 새로 즉위하실 임금께옵서 허여해주신다면, 장차 우리 사업당이 이곳 류큐의 훌륭하고 귀하신 분들과 더불어 어찌 많은 이익을 얻을지 보다 상세히 논하고자 합니다.”

꺽정이는 굳이 따진다면 도척(盜跖)과 같은 작자요, 쇼 칸도 비록 형을 향해 칼날을 세우지는 않았으나 왕위를 욕심내어 농간 부렸으니 춘추필법(春秋筆法)으로 따지면 그 이름마저 못 남길 자였다.

이 자리에 성현은커녕 아성(亞聖)도 없으니, 도의 제쳐두고 이익 논한다 한들 그 누가 무어라 할까.

“... 그리 하시오.”

“이번 싸움으로 유구국에 당분간 서양이든 어디든 손을 뻗치지 못하게 되었은즉, 이제 바야흐로 이 나라의 생업을 통째로 바꿀 때가 되었습니다.

어제 말씀드린 것처럼, 유구국의 살길은 오로지 사탕수수에 있습니다. 그 외에 소소하게 유황 장사도 할 수는 있겠지만, 그건 본업으로 삼기에 부족하지요.

대국과 조선, 일본과 북변을 아우르는 우리 사업당은 이미 분표를 내어 밑천을 널리 모은 바 있습니다. 생각건대 유구국도 그 법도를 따름직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사탕의 사업에 참여하실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각자 내는 밑천의 많고 적음에 따라 그 수익을 나누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어제 칸의 우둔에서 서림의 현란한 말솜씨로 인하여 절반쯤 넘어온 이들이었다. 이익의 이야기가 나오니 다들 솔깃해졌다.

“그, 그러면 그 수익은 사업당에서 나누어받는 것이오?”

“이미 우리 조선국의 한량없이 밝으신 주상께옵서는 내탕을 모두 내어 경제사를 세우고, 이로써 나라와 백성의 곳간을 공히 채우실 기반을 마련하셨습니다.

왕자님께서 허용해주신다면, 유구국에도 비슷한 회(會)나 사(社)를 꾸려, 그곳에 관여한 이들끼리 사탕수수 농사의 여러 일과 수익 나누는 일을 도맡게끔 하겠습니다.”

장차 류큐는 사탕수수 농사를 나라의 대업으로 삼게 될 것이라 하였다. 교역을 독차지할 욕심과 능히 그리할 수 있는 재력을 지닌 사업당의 우두머리가 그리 말했으니, 지금껏 교역으로 버티던 류큐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 대업에 참여하는 유력한 아지와 웨카타. 상인들이 모두 하나의 모임을 이루어, 거기서 농사와 장사의 일들을 다루게 된다면, 그 모임은 오래 지나지 않아 류큐 조정보다도 더 중하게 될 것이다.

모래톱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이들 중 상당수는. 일백여 년 전 쇼 씨가 류큐의 여러 섬을 일통하기 전까지만 해도 각지에 구스쿠(성) 쌓고 웅거하던 집안의 후예였다. 누가 일러주지 않았음에도 위와 같은 생각이 사람들 머릿속에 곧 떠올랐다.

쇼 칸도 그것을 곧 꿰뚫어보았다. 그리고 이제 와서 그가 무어라 한들 지금 저 조선인이 밝힌 뜻을 뒤집을 수 없음도 깨달았다.

“... 그리 하시오.”

착잡한 마음으로 왕자가 말했다.

여러 사람들이 환호하며, 높으신 분의 크신 용단에 사의를 표하였다.

입에 발린 말로 오늘 싸움에서 왕자께서 보이신 용맹함을 찬양하고, 또 남만인들의 흉계에 맞서 우군을 데려온 그 현명함을 칭송하였다.

모두가 한입으로 그리 말하였지만, 모두가 한뜻으로 아첨하는 것임을 쇼 칸은 모르지 않았다.

언제고 이렇게 되기를, 류큐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찬사 받으며 그 위에 설 수 있기를 바랐던 쇼 칸이었다. 소원은 성취되었으나, 어찌하여 이토록 씁쓸하단 말인가.

그런 감상 따위 알 바 아니었던 꺽정이가 칸 옆에 우뚝 섰다.

“자, 그러면 그리 알고 흩어지시오들. 저기 패장(敗將)과 그 졸개들이 오고 있으니.”

과연 저 멀리 슈리 쪽에서, 여전히 번뜩이지만 어째 빛바랜 듯한 - 아마 해가 중천 지나 기울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 강철 갑주 입은 무리들이 힘없이 축 늘어진 깃발 내세우며 다가오고 있었다.

“슬슬 배 한 척 더 불태워야 할까 고민하던 차였소.”

꺽정이가 빈정대며 레가스피를 맞이했다.

“... 명예로운 후퇴를 보장해주시오. 이 섬에서 물러날 테니, 남은 갈레온 두척과 그 선원들은 돌려주시오.”

“후퇴는 개뿔. 저 배 두 척은 우리 거요. 우리 맘대로 할 생각이외다.”

분명 코우지오니스가 내놓은 황제의 보증에 따르면, 그 나라에서 나름 명성 떨친 무장이요 기사라 하였다. 허나 아무리 보아도, 눈앞의 사람은 기사라기보다는 그저 무뢰한, 산야의 도적과 같았다.

(에우로파의 소위 기사라는 자들도 기실 그 뿌리는 꺽정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그런 도적 기사들은 이미 씨가 마른 지 오래였으므로 레가스피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레가스피는 이미 진 싸움에서 더 허세를 부리지는 않았다. 부하들을 살리고,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누에바에스파냐에 전할 수 있다면 이 자리에서 그의 무릎쯤은 언제든 꿇을 수 있었다.

“좋소, 그러면 조건을 말씀하시오. 승자에게는 마땅한 전리품이 돌아가야 하는 법이오. 우리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마지막 한 방울 피까지 흘려가며 싸우겠지만, 그 외 모든 조건은 달게 받아들이겠소이다.”

“하하! 그래야지. 일단 그대들은 멀쩡히 잘 지내던 이 나라에 쳐들어와 먼저 패악질을 부렸소. 그에 대한 값은 치러야 할 게요.”

레가스피가 얼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한때 손을 (잘못) 잡았던 그 어리석은 왕자처럼, 코우지오니스도 저의 옆에 다른 왕자 하나를 두고 있었다. 차이점이라면 저쪽은 자신이 이 자리에서 들러리임을 알고 은근한 분노를 속으로 삼키고 있다는 것 정도일까.

허나 그 말은, 협상의 여지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와 부하들이 불태운 것은 레퀴오스의 궁성이지 코우지오니스의 저택은 아니었다. 복수에 눈이 먼 사람보다는야, 운 좋게 호구 잡은 도적의 요구에 응하는 쪽이 조금은 더 나을 것이다.

“자, 첫째로, 그대들 앞잡이 노릇한 그 모자란 작자는 여기 왕자님에게 넘기시오.”

“그리하겠소.”

일말의 고민도 없이 레가스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순한 태도를 보자, 팔짱 끼고 코 큰 오랑캐를 노려보던 칸의 눈매도 아주 약간은 부드러워졌다.

“둘째, 그대는 퍽 큰 잘못을 했소. 이 바다에 들어올 때, 먼저 내게 찾아와 부디 드나들게 해달라 간청해도 모자랄 판에, 무작정 와서는 행패나 부렸으니 얼마나 괘씸한 짓이오? 그러니 그대는 나와 함께 에우로파로 가야 할 게요.”

인질이자 포로로 삼겠다는 뜻. 그러나 어떻게든 살아서 고향 땅을 밟을 수만 있다면 오늘 벌어진 일의 전말을 조국에 보고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이 갖은 고초를 겪어야 하겠지만, 그 정도는 패장으로서 감수해야 할 터.

“그 또한 받아들이겠소.”

“셋째, 그대의 병사들과 뱃사람들은 모두 우리 당의 포로요. 하는 짓거리를 보니 싸움질을 퍽 좋아하는 모양인데, 마침 우리 당이 싸움꾼 빌려주는 일도 종종 한다오.”

이제는 수가 조금 줄었겠지만, 명색이 삼백에 달하는 정예한 군사다. 류큐에 가둬두기엔 영 불안하고, 그렇다고 맨입으로 풀어주기엔 아쉬웠으며, 몸값을 받자니 그 또한 애매했다.

그러나 꺽정이 곁에는 돈벌이 하나에는 꾀가 넘쳐날 지경인 서림이 있었다.

“그대들이 오늘 벌인 패악질로 여기 류큐에서 장사하는 이들이 적잖이 겁을 먹었을 게요. 그러니 그들과 교역하는 우리 당도 손해를 본 셈이지. 몸값이라 생각하고 싸움터에서 갚도록 하시오.”

“노예병으로 쓰겠다는 것이오?”

투르크 술탄의 악명 높은 예니사로스(예니체리)를 떠올린 레가스피가 날카롭게 물었다. 어쩌면 한 번쯤은 명예를 지키기 위해 피를 더 흘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우려하던 차.

“서양에는 노비를 면천도 아니 시키고 군사로 쓰는 법도가 있나 보구려. 걱정 마시오. 우리 당은 그대들과는 달리 인의와 도덕을 지킨다오. 그대 졸개들이 잘 싸워서 우리 당의 이익이 늘어나면, 새경이라 치고 제법 후하게 나눠주도록 하겠소.”

“우리는 믿음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아끼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이교도 군주를 위해 싸울 수는 없소.”

“이교도? 아, 그건 걱정 마쇼. 임자들이랑 같은 도 믿는 녀석이 하나 있는데, 그놈 아래 있다 보면 싸움박질은 원없이 할 수 있을 게요.”

“같은 믿음? 그 무슨 말씀이시오?”

“니탕카이 요한이라고, 젊은 녀석인데 제법 쓸 만한 놈이 있소. 그 나라에서 우두머리(El Presidente) 노릇하는 녀석이지. 거기서 삼 년만 고생하면 풀어주도록 하겠소.”

이 말이 어떻게 진실일 수 있겠는가. 영 의심하는 눈초리를 본 서림이 잽싸게 끼어들었다.

“하비에르 대사(大師), 아니, 신부께서 거기 계십니다. 그분이 계시니 나리의 아랫사람들도 그 도(道) 따라서 이레에 한 번은 공양(미사)을 올릴 수 있을 겝니다.”

통역에 통역을 거치다 보니 영 어설프게 옮겨졌지만, 레가스피도 그 ‘하비에르’라는 이름은 들었다. 거리낌없이 말하는 모양새를 보니, 결코 꾸며낸 말은 아닌 듯했다.

“만에 하나 그 말이 참이어서, 정말로 기독교 군주가 북쪽에 있다면 우리 에스파냐 사람들 또한 그 아래에서 복무하는 데 큰 불만은 제기하지 않을 것이오. 허나 한 번 간 다음 어떻게 돌아올 수 있겠소?”

“우리가 여기까지 저 배 타고 온 것 보면 모르시겠소? 한 해에 서너 번은 포르투갈 배가 오가는데, 그거 타고 가면 되지.”

꺽정이가 등 뒤 멀찍이 보이는 상 투메 호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는 에스파냐 사람들이오. 저들과는 나라가 다르오.”

“내가 알 바요? 정 그러면 싸움에서 지지를 말았어야지. 나랑 같이 에우로파까지 갈 테니, 그대 임금께 청원해서 배 한 척 더 보내달라 하면 되겠구려.”

끝내 레가스피는 그 조건마저 받아들이고야 말았다.

동방의 부유함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노예로 팔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멀쩡히 삯 받으며 용병으로 구르게 될 것이라 하면, 레가스피 아래의 군사들 중 제법 많은 이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항전하는 대신 이렇게 된 것 한 번 끝까지 가보자며 저 동양인들을 따라가고자 할 터였다.

저들이 그것을 알고서 이런 조건을 거론하였을까? 저들의 간교함, 그리고 저들 옆에 붙어 있는 저 포르투갈 놈들의 존재를 고려했을 때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아, 그리고 마지막 조건이 하나 더 있소.”

레가스피도 결국 짜증을 내고야 말았다.

“이젠 또 무엇을 요구하실 심산이시오?”

“걱정 마시오. 이건 그대 졸개들도 기꺼이 따를 만한 것이니.”

이어지는 말을 듣자하니, 정말 그랬다.

“저 배에 타고 있던 뱃사람들은 영 싸움꾼 소질은 없더이다. 내가 또 언제 에우로파 사람들과 우격다짐할지도 모르는데, 그래서 내가 그대들을 얼마나 감당할 수 있을지 알고 싶소. 그러니 준비가 되는 대로 여기 모래톱에서, 서로 겨루어 보십시다.”

다 이긴 줄로만 알았는데 갑자기 웬 피레네 산적처럼 생긴 놈에게 저들의 배가 불타버리고, 전공도 명예도 산산이 조각나고야 말았다. 그러던 차 그 산적 놈이 무예를 겨루어보자 하였으므로, 에스파냐 사람들은 기꺼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칼과 창의 날에 두꺼운 헝겊을 두르고, 그들 나름대로 머리 맞대며 신나게 전술을 논하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저 이교도 우두머리에게 몰매라도 놓아 앙갚음하기를 다들 바랐던 것이다.

반면 소문 듣고 더 몰려온 류큐 사람들은, 부지불식 간에 조선에서 온 임 당수를 응원하게 되었다.

(그사이 도키치로는 슬그머니 빠져서 내기돈을 모으고 있었다.)

그리하여 몸 푸는 꺽정이 옆에는 다시 쇼 칸과 서림만 남았다.

“셋째 형님, 아니지, 역괴(逆魁) 요소에게는 그에 합당한 벌이 내려질 것이오. 그에 가담한 모리배들도 마땅한 죗값을 주어야겠지.”

“동조한 무리가 제법 되는 모양이오?”

“요소는 그 성품이 간악할지언정, 가까운 이들에게는 제법 잘 대해주었소. 그래서 다들 그가 호방하다 여길 뿐, 그 속의 흉악함을 알아채지는 못했던 듯하오.”

아니면 왕위 앞에서 눈이 뒤집혔을지도 모른다. 허나 곧 죽을 자의 마음을 더 헤아린들 무슨 쓸모가 더 있겠는가.

“그가 선왕의 옥체에 온기가 가시지도 않았건만 감히 남만인들을 데리고 범궐까지 할 줄 누가 알았겠소. 허나 벗을 제대로 사귀지 못한 것도 죄라면 죄. 계한(季漢, 촉한)의 무후(제갈량)께서 마속을 벤 것처럼 해야겠지.”

‘아, 『삼국지연의』 아시는구려!’ 하고 좋아라 할 만큼 눈치 없는 꺽정이는 아니었다.

“얼마나 연루가 되었소?”

“방계 아지(왕족)들은 임 당수도 알겠지만 대부분 이 사람이나 둘째 형님의 편을 들었소. 다만 같은 일가붙이들 중 혈육의 정에 눈이 흐려져 요소의 본의를 알아채지 못한 아우와 누이들이 많았소이다.”

요소는 그의 아우와 손아랫누이들에게는 멋진 형님이요 오라비였다. 요소의 말을 믿고 저의 집안에 딸린 가복들을 궁성 싸움판에 보낸 이들이 적지 않았다.

“대개는 그 죄가 가벼우니 죽이지는 못하겠지만...”

‘누이’ 말 들은 꺽정이 머릿속에 뭔가 스쳤다.

“혹시 개중 아직 혼사 치르지 않은 누이동생도 있소? 귀양 보낸다 치면 괜찮은 혼처가 있긴 한데. 내 아내에게 아직도 장가 안 간 철부지 오라비가 있는데, 우리 장모님이 정해주신 배필이 영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오.”

조선은 겨울마다 눈이 내리고 고드름 맺히는 한랭지옥이 된다 하였다. 그런 나라에, 그것도 가풍이 얌전하지 못한 - 임 당수의 처가라면 대충 어떠할지, 쇼 칸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 집안의 며느리로 들어가게 된다면, 대역죄 연루된 이에게 얼추 걸맞은 형벌이 되리라.

“내 둘째 형님과 함께 고민해보겠소.”

“돈 코우지오니스! 우리는 준비되었소!”

때마침 레가스피가 멀찍이서 외쳤다. 꺽정이 또한 몸 근질거리던 차라, 칸을 내버려두고 그쪽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 칸이 데리고 다니는 역관 하나를 제하면 - 서림과 쇼 칸 둘이 남게 되었다.

“내 서 별감 그대에게 묻고자 하는 바가 있었소.”

“언제든 하문하십시오.”

서림이 정중하게, 그러나 딱히 존중하는 마음 없이 답했다.

“대체 그대들은 우리 류큐를 어찌하려 하시오?”

“이미 누차 말씀드린 것과 같습니다. 류큐에서 이익 얻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그 이익을 가장 많이 내는 길이 사탕수수 농사에 있을 뿐이지요.

말하자면, 이 나라 전체를 우리 사업당처럼 바꾸는 것이 우리의 뜻입니다.”

“나는 어제 아버지를 잃었고, 오늘은 형님 한 사람을 잃을 뻔하였소. 내일은 다른 형을 죽여야 하겠지. 그대에게 온정이 있다면, 진실을 말해주시오. 정녕 그것이 그대들의 뜻이오?”

다른 류큐 사람들은, 그저 교역의 이익이 나날이 줄어가던 차 구명할 길이 나타났다 여기고, 또 잘하면 엄청난 부를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설레하고 있었다.

그러나 칸은 조금 더 멀리 보았다.

“교역은 세상에 여러 나라와 물산이 있는 한 언제든 마음대로 할 수 있소. 반대로 사탕(설탕)은 바깥에 내어 팔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지. 이 사람이 걱정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시겠소?”

“사업당이 마치 유구를 속국처럼 삼아, 마음대로 쥐어짜고 흔들 것을 염려하십니까?”

여기까지 간파하는 이가 있을 때에 대비하여, 서림이 생각해둔 말이 있었다.

“서 별감이 이른 대로요.”

“그렇게 될 수도 있지요. 유구국에서 나오는 수익이 신통치 않다면야, 우리 사업당도 어쩔 수 없이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법도 없습니다. 우리 당은 저 왜인들이나 에스파냐 남만인들과는 다릅니다. 오직 이익, 더 많은 이익만을 바랄 뿐이지요.”

서림의 말에는 거침이 없었다. 이런 조언 아닌 조언을 조금 해준다 하여 손해 볼 것은 없고, 이득 될 바는 많았던 것이다.

“유구국에서 우리 사업당과의 연을 계속 이어나가기만 하신다면, 다른 쪽으로 뻗어나가는 것은 전혀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오히려 수익만 보장된다면야, 우리 쪽에서 열심히 도와드려야 할 일이지요.”

뜻밖의 대답이었다. 칸이 의아함을 끝내 감추지 못했다.

“다른 쪽으로 뻗어나간다 함은...?”

“제가 일찍이 사람을 부려 『천하전도』를 만들었는데, 거기 보니 이곳 유구 남쪽에 아주 큰 섬(대만)이 하나 있더군요.”

“... 그렇소. 우리 류큐의 가장 서쪽에 있는 변방 유나구니(요나구니與那國)에서 조금만 더 서쪽으로 가면 나오는 섬이라 들었소만.”

“그 섬은 제가 알기로는 거의 텅 비어있다고 합니다. 고작해야 서쪽 바닷가에 복건에서 건너온 화인(華人, 중국인)들이 마을을 조금 이루었을 뿐이고, 그 외에는 야인(野人)뿐이라더군요.

유구에서 자라는 사탕수수가 더 남쪽에서는 못 자라겠습니까? 기왕 사탕수수 농사를 지을 바에야, 크게 지어야지요.”

“사탕수수 농사는 그리 쉽지 않소. 내 잘은 알지 못하나, 일손만 해도 매우 많이 들어간다 하였소.”

“사람이야 구할 수 있지요. 일본국에 넘쳐나는 게 사람 아닙니까? 칼 들고 논밭 지킬 사람도, 그 논밭에 보습 댈 사람도 모두 돈으로 구할 수 있습니다.”

만기친람을 하는 것은 진작에 포기한 서림이었다. 넓고 넓은 세상에 많고 많은 기회. 그것을 일일이 사업당이 챙기는 것보다야, 남에게 슬쩍 일러주고 그로 하여금 관여케 하는 쪽이 더 편할 것이다. 사업당이 어떻게든 그 사이에서 편하게 이득만 취할 수 있다면.

“그것이 어찌 가하겠소?”

“우리 당이 이대로 나아가 말라카 이동에서의 교역을 독점하게 된다면, 수 년, 늦어도 십수 년 내로 일본국에 들어가는 화포와 화약은 모두 우리 당의 손을 거치게 될 것입니다. 그 땅의 태수(다이묘)들에게 물건 값을 사람으로 치르라 하면 될 일이지요.”

서림이 말을 늘어놓을수록, 칸의 등골에는 소름이 돋았다. 너무도나 쉽게, 너무나도 무서운 말이 나오고 있었다. 작고도 작은 류큐를 한참 벗어나는 이야기.

“노비로 삼기가 곤란하다면, 머슴으로 삼고 새경을 주면 될 일입니다. 그것만 해도 일본국에서 도망쳐나오길 바라는 평민들이 줄을 설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마름 노릇할 사람도 돈으로 능히 구할 수 있습니다. 굳이 유구나 일본에서 찾을 것도 없습니다. 듣기로 천축 너머에서 잡혀와 팔리는 오귀자(烏鬼子)들이 그토록 용맹하고 충직하다는데, 그런 이들을 데려와 왜인을 감시하게 해도 되겠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돈으로 안 되는 것은 더 많은 돈으로 능히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재물을 모아 더 필요한 곳에 보내고, 그로써 이득 취하는 것이 저희 사업당의 하고자 하는 바이지요.”

“돈으로 안 되는 것은 더 많은 돈으로...”

그리고 소름이 지나간 뒤에는, 깨달음이 찾아왔다.

탐욕. 더 많은 부, 더 나은 삶을 탐내는 류큐의 유력한 이들은, 더 이상 중산왕을 그들의 임금으로 모시지 않을 것이다. 오로지 은을 모실 뿐.

그렇다면, 그 은을 가장 앞장서서 구하고 나누어주는 사람이 능히 우슈(임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들은 나아갈 것이다. 탐욕에 눈먼 자들끼리 뭉쳐서, 서로 부축하고 의지하며, 두 손으로 사방을 더듬으면서,

얼마나 나아가게 될지, 어디로 향하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어차피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오리무중 난세라면 가만 앉아있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칸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 불꽃이 어찌 튀는지 알지 못하는 서림은, 암만 작은 나라라 해도 왕자는 왕자이니만큼 무언가 비범한 생각을 하는 모양이리라 단정하고 넘어갔다.

“아, 시작하려는 듯합니다, 저하. 구경을 하시겠습니까?”

때마침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마침내 꺽정이와 에스파냐 사람들이 한 판 붙으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미 골똘히 생각에 빠진 칸은, 서림의 권유를 내쳤다.

“아니, 되었소.”

저무는 태양은 나하 앞바다를 붉게 물들이고, 모래톱 위에서 날뛰는 사람들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개중 큼직한 그림자가 날뛰며, 대여섯 인영을 고꾸라뜨려 사라지게 만든 뒤, 마침내 중과부적으로 저도 쓰러졌다.

그사이 박살난 갈레온의 돛대에서 떨어져나온 부르고뉴의 십자가 깃발은, 나하 앞바다의 잔잔한 물결에 떠밀려 흠뻑 젖고 모퉁이는 그을린 채로 모래톱까지 밀려왔다.

그러나 그들을 등지고 저의 거처로 돌아가는 왕자는, 등 뒤의 소란에 더는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리하여 왕위를 탐내다가 조선국 임꺽정에게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날뛸 명분을 쥐어주게 된 욕심 많은 왕자는, 그 욕심의 불꽃을 짓이겨 꺼뜨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활활 타오르는 새로운 횃불을 두었다.

그의 우둔(저택)에는 둘째 형 겐이 찾아와 있었다.

그는 패장이 어찌 임금이 되겠느냐며, 아우를 찾아와 겸허하게 왕위를 양보하였다. 그러나 이미 왕위보다 더한 것을 노리고 있는 아우는, 다시 형을 위하여 그 자리를 사양하였다.

조선의 사업당에 사탕을 파는 이들을 모아 ‘진량사(津梁社)’를 세우고, 서쪽의 우후우지쿠니(大沙糖國, 대만 북쪽)까지 탐험한 쇼 칸은, 몇 년 뒤에는 동쪽 바다의 외딴 섬 우후아가리(다이토 제도)에서 기이한 모래가 굳어서 돌을 이루고 있는 것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그 모래는 능히 땅을 비옥하게 하고, 또 그 성분은 염초와 비슷하여 능히 화약을 만들 수 있었다, 다만 그 쓰임새는 알지언정 비슷한 광석이 대양 반대편에서는 구아노(Guano)라 불린다는 것은 알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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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에서는 1555년 쇼 세이 왕이 노환으로 사망한 뒤, 약 1년에 걸친 다툼 끝에 1556년 쇼 겐이 류큐 국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작중 등장한 쇼 요소, 쇼 칸 등은 이름은 전하지만 그 행적과 성정 등은 모두 작중의 창작이 되겠습니다.

류큐 제도에서도 한참 떨어진 야에야마 제도에서도 다시 가장 서쪽에 있는 요나구니 섬은, 일본의 최서단이자 대만 코앞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1871년 야에야마에서 오키나와로 향하던 류큐인들이 조난당해 대만 원주민들에게 살해당한 사건이 메이지 정부의 대만 출병으로 이어지기도 했지요. 또한 청일전쟁으로 인해 대만이 일본령으로 넘어간 뒤에 야에야마에 거주하던 류큐인들이 대만 북쪽으로 이주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작중 언급된 ‘우후우지쿠니’라는 지명은 작중의 창작입니다. 원 역사에서 대만에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개척한 것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였고, 위치도 대만 북부가 아닌 남서부였습니다.

꺽정이가 니탕카이를 ‘우두머리’라고 부른 것이 ‘엘 프레지덴테’로 옮겨진 것은, 이미 14세기 말부터 특정한 기관이나 지역의 지배인 내지는 관리자라는 뜻으로 비슷한 표현들이 서유럽에서 쓰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당시 유럽의 몇 안 되는 공화정에서는 ‘president’ 대신 다른 표현들(영국의 호국경Lord Protector, 네덜란드 공화국의 국가원수Stadthouder 등)이 쓰였기 때문에, 원 역사에서 ‘프레지던트’는 한참 뒤인 1787년 선출된 국가원수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처음 쓰이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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