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128화 (128/259)

39. 책의 백성들 (1)

아마도 지구의 이쪽 반절에서는 가장 파란만장한 이력을 지닌 카락이라 할 수 있을 상 투메 호는, 류큐를 떠나 남서쪽으로 항해하고 있었다.

푸른 하늘 아래 쪽빛 바다가 아득히 펼쳐져 있는데, 하늘에 점점이 떠 있는 흰 구름처럼 바다에도 점점이 옥빛 감돌았다. 간혹 그 사이에서 뽀얀 모래톱이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기도 했다.

그런 풍경이 제법 아름답다 할 법도 했지만, 하루이틀 보는 광경도 아닌 데다가 꺽정이가 본디 그런 멋을 아는 사람도 아닌지라, 다른 데 이목을 기울이고 있었다.

“... 그리하여 프란치아(프랑스)의 중기병들도, 수이자(스위스) 용병들도 모두 카를로스 폐하께서 이끄시는 압스부르고(합스부르크) 군대에 패퇴하게 되었다오. 그날 해가 떠오를 때 파비아(Pavia) 성 앞의 들판에는 일만오천 하고도 오백의 시체가 쓰러져 있었지만, 그중 압스부르고 측의 손실은 오백 뿐이었지.

우리의 정예한 사수들은 마침내 달아나는 프란치아 국왕(프랑수아 1세)까지 붙잡았소. 이로써 카를로스 폐하께서는 이탈리아의 영유권을 확실히 주장하실 수 있게 되었지. 그 뒤에 다소 불미스러운 일(사코 디 로마)이 있었다곤 하지만, 그것은 카를로스 폐하의 본의가 아니었으니 혹여 그런 말을 듣더라도 오해는 말게.”

레가스피가 신나게 말을 늘어놓았다. 늙은 사람일수록 젊은이에게 저의 이야기 들려주고 싶어 안달이 나기 마련인데, 환갑 바라보는 나이의 레가스피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째 잘 싸운다 싶더라니, 그렇게 열심히들 치고박고 했구려.”

갑판 위에 레가스피와 함께 앉은 꺽정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핀투 따라다니면서 대충 조선말 배운 선원 하나가 팔자에 없는 통변 노릇을 하고 있었다.

“비록 지난번 싸움에서는 내가 방심하여 자네에게 그런 치욕을 겪기는 했지만, 우리 카를로스 폐하의 군대가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하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네.”

꺽정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황제라는 작자가 고작 일이만 군대를 이끌고 다녔다는 것을 듣고 코웃음을 쳤는데 - 꺽정이네 임금도 마음 내키면 오만 군대는 모을 수 있지 않던가 - 이제 보니 그 하나하나가 흑의군 한 명과 맞먹는 정예 중의 정예였다.

“과연. 정말 그만큼 정예한 군병을 거느리고 있다면, 한줌도 되지 않는 군사로 그 아즈테카인가 잉카인가 하는 나라들을 와르르 무러뜨렸다는 것도 가한 일이었겠소.”

“물론 신의 가호와 은총이 있었지만, 자네 말 또한 맞네.”

꺽정이가 때맞추어 맞장구를 치니, 레가스피도 약간 우쭐해졌다. 이렇게 그들 나라의 강성함을 알게 된다면, 카를로스 폐하 앞에 닿았을 때 조금은 공손한 모습을 보이지 않겠는가.

나하 앞바다 싸움이 꺽정이네의 승리로 끝난 날, 꺽정이의 요구에 따라 해질녘에 벌어진 ‘2차전’은 놀랍게도 꺽정이의 패배로 끝났다.

갑옷 차려입고 달려들던 에스파냐 군사 하나하나는 금방 꺽정이 손발에 맞아 내던져지고 자빠뜨려졌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혼비백산하며 틈이 생기기 마련이었던 다른 군대와 달리, 에스파냐 놈들은 흔들리지 않고 대열을 지켰다.

나무로 만든 창이 내질러지고, 쓰러진 이들은 도로 일어나 꺽정이의 사방을 둘러쌌다.

전생에 구월산에서, 남치근의 토포군에게 에워싸여 화살 여러 발 맞고 쓰러진 이래 처음 겪는 패배였다.

그러나 애초에 꺽정이가 한 판 더 붙어보자고 레가스피에게 요구하였던 것도, 자신이 얼마나 날뛸 수 있을지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꺽정이는 비록 기는 조금 죽었을지언정 나름 귀중한 것을 얻어낸 셈이었다.

(어느 쪽에도 걸지 않고 내기판만 깔았던 도키치로야말로 이 싸움에서 가장 큰 소득을 거둔 이였는데, 이는 서림도, 꺽정이도 알지 못했다.)

그 이후로 꺽정이는 이렇게 레가스피를 앉혀두고 그쪽 동네에서 싸움이라는 것을 어찌 하는가 꼬치꼬치 묻고 있었다.

그러면서 종종 추임새로 칭찬하기도 하고, 레가스피의 은근한 자기 또는 자국 자랑에 어울려주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레가스피가 늘어놓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군대의 허실(虛實)을 따져보며 어떻게 하면 그놈들의 칼이나 총에 맞지 않으면서 그들을 골려먹을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면 포르투갈 군인들에 비하면 어떻소?”

“그들의 항해술은 무시할 수 없지만, 군대로만 따지면 한 수 아래라 보아야겠지.”

“그러면 어르신 아래에 에스파냐 대신 포르투갈 사람들이 있었다 칩시다. 그렇다면 류큐 궁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겠소?”

“그건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 자, 이제 내 얘기 한 토막 했으니 자네 얘기도 한 토막 들려주게.”

동양의 사정을 최대한 수집하여 나중에 정부에 보고할 생각이었던 레가스피가 이번에는 꺽정이에게 청하였다.

“알겠소. 내가 어디까지 했더라?”

“조조가 붉은 절벽(적벽)에 팔십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한 대목까지 이야기했었네.”

꺽정이 머릿속에 알고 있는 전쟁이라 해 보아야, 직접 겪은 싸움을 제하면 화담 선생 문하에서 배웠던 동국(東國)의 옛이야기와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것이 전부였다.

스스로 몇 번 군대를 이끌기도 했던 - 물론 제대로 된 실전은 아니었지만 - 레가스피였으므로, 꺽정이가 직접 사방 누비면서 싸움박질한 이야기는 얼추 믿어주었다.

후자의 경우, 처음에는 도통 믿어주질 않았다.

‘어떻게 그것이 말이 되는가? 백만 대군이라니?’

카롤루스 마르텔보다 약간 앞선 시기에 시나 황제가 백만 대군을 일으켜 코우지오니스의 조상들 살던 나라에 쳐들어갔다는 대목에서, 듣다 못한 레가스피가 언성 높인 적도 있었다.

그렇게 막 우격다짐 하려던 차, 운 좋게 이지가 지나가다 한 마디 덧붙였던 것이다.

‘임 당수 말에 잘못이 있습니다. 백만이 아니라 백십삼만에, 뒤따라오는 짐꾼은 이백만이었다고 사서에 적혀 있지요. 뭐, 그 정도는 수나라 쪽에서도 무리였던지라 얼마 지나지 않아 나라가 망하긴 했습니다.’

이미 핀투의 해도를 슬쩍 훔쳐보며, 시나 땅이 에우로파 전체를 합친 것보다 더 클지도 모른다는 것은 알고 있던 레가스피였다.

그렇다면 정말로 그만한 군사를 황제의 말 한 번에 동원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시나 땅의 황제가 그처럼 강력한 힘을 쥐고 있다면, 동양에 대한 에스파냐의 전략 역시 그에 상응하여 새로 수립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레가스피 입장에서도 상대방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 한 토막 한 토막이, 동양인들과 그들의 나라가 지닌 강점과 약점을 유추해낼 수 있는 귀중한 정보였다.

그렇게 겉보기로는 화기애애하면서도 속으로는 각자 상대편의 사정을 헤아리고자 애쓰는 기묘한 대화가 한참 이어졌다.

레가스피만큼이나 꺽정이도 제법 고민이 많았다. 말라카까지는 그들 손에 넣어야 장차 서림이 그리는 원대한 구상이 이루어질 수 있을 터인데, 바로 그곳을 포르투갈 놈들이 지키고 있으니 문제였다.

그들이 에스파냐 군사보다 조금 약한 정도라니, 힘으로 빼앗기는 난망하고 결국 늘 하던 대로 꼼수와 속임수를 동원해야 할 터였다.

다행히 이 배에 탄 사람들 중에는, 꺽정이 저를 비롯하여 사람 뒤통수 때리는 일을 거리낌 없이 할 만한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어제부터 조금씩 보이던 작은 모래섬들이 이제는 제법 자주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렇게 생긴 섬도 있구려. 용케도 바다에 잠기지 않고 있네.”

섬이라면 당연히 가운데에 큼직한 산이 있기 마련인데, 눈앞의 ‘섬’들은 그저 평평할 뿐이었다.

“어쩌면 섬이라는 것은 대개 저렇게 시작하여 점점 높아지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하늘과 땅과 바다가 처음 창조된 이래 변함이 없었다 여기는 에우로파 사람들이라면 생각조차 하기 어려울 말을 옆에 선 이지가 용케 하였다.

옆에서 쫑알대는 소리를 무시하며, 해도 펼쳐놓고 나침반과 항해일지를 열심히 대조하던 핀투 선장이 곧 결론을 내렸다.

“프라셀(Pracel, 파라셀) 제도입니다. 우리가 예상보다 빠르게 항해하고 있는 듯하군요.”

이 무렵에 흔한 태풍조차도 닥치지 않고, 돛의 뒤를 받치는 것은 순풍뿐이었다. 이 배를 몰고 홍해로 들어갈 날이 다가온다는 뜻이므로, 핀투 선장에게는 썩 반갑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태풍이 오길 바라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 일대의 바다는 원래 이렇게 양순하오?”

포로로서 상 투메 호에 올랐지만, 동시에 이 배에 탄 기독교인 중 유일한 이달고(Hidalgo, 작위가 없는 귀족의 통칭)로서 가장 지위 높은 사람이기도 한 레가스피가 물었다.

레가스피는 이왕 포로로 잡힌 김에, 최대한 많은 정보를 눈과 귀에 담아갈 심산이었다. 이쪽 동인도 제도 항로에 대해서는 정보 하나하나가 매우 중요하였다.

“그럴 리가요.”

“하, 그렇다면 이교도에게 거룩한 가호라도 깃든 모양이오.”

“거룩한 가호는 개뿔. 그냥 운이 좋은 것이지.”

꺽정이도 한 소리 했다.

“이대로라면 말라카까지도 금방 닿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예상보다 일주일 정도는 더 이르게 도착할 것입니다.”

“잘 되었군. 그럼 말라카 가기 전에 한 군데 더 들립시다. 탁오(卓吾) 선생이 말하기를 이 근방에 말라카에서 쫓겨난 임금의 아들이 새로 도읍 정한 곳이 있다 하던데, 아시오? 국호가 조로인가 조호르(Johor)인가 했었는데.”

지난번 나하 앞바다 싸움에서, 저의 계산으로 에스파냐 갈레온의 포격을 피했다는 사실에 우쭐해진 이지는 새로 자호(自號)하기를 ‘잘나신(卓) 나(吾)’라 하였다.

그 비범함은 꺽정이 마음에도 들었다. 반면 ‘그건 좀...’이라며 말릴 만한 사람들은 주변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동양인들이 저의 별명을 새로 짓든 말든 별 신경 쓰지 않는 핀투는, 임 당수가 밝힌 새로운 경유지에 토를 달았다.

“그... 어디쯤인지는 알고 있습니다만, 꼭 그곳으로 가야 하겠습니까?”

말라카가 포르투갈의 콩키스타도르 알부케르크에게 정복당하자, 말라카의 마지막 술탄 무함마드 샤의 차남이었던 알라우딘 리아얏 샤는 조호르 땅으로 도망쳤다.

알라우딘은 그 지역에 있던 요새들을 점거하고 포르투갈인들과 치열한 싸움을 벌였지만, 아버지의 나라를 되찾기는커녕 계속 밀려날 뿐이었다. 그리하여 새로 나라를 세우고 술탄으로 즉위하자마자 두 차례나 수도를 옮겨야만 했다.

“... 언제든 우리를 공격할 수 있기 때문에, 말라카 쪽에서도 항상 조호르의 동향은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조호르 강어귀로 조금만 들어가면 지금 샤가 머물고 있는 조호르 라마(Johor Lama)가 나오긴 할 텐데... 지금 이 배를 몰고 들어간다면 환영은커녕 대포알만 날아오겠지요.”

“그러게 평소에 인심을 잘 쓰지 그랬소.”

꺽정이가 할 말은 아니었다.

“어쨌든 그쪽으로 가야 하오. 그 아비 때만 해도 명나라 조정에 조공하기도 했고, 그 아래에 대국 사람들도 종종 드나들었다 했으니, 임자들이라면 몰라도 나와 우리 당 사람들은 제법 환대를 받을 것이외다.”

“이 일대의 무슬림들은 제법 화포에 능합니다. 배에 구멍이 숭숭 뚫린 뒤에 환대를 받느니, 그냥 박대받으며 조용히 지나가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아직도 이 상 투메 호를 마련하느라 고아에서 빌린 돈을 다 갚지 못한 - 조선에서 벌어들인 돈 덕분에 이제야 겨우 원금을 절반쯤 갚았다 - 핀투였다. 꺽정이가 해괴망측한 짓 벌이는 것에 지금은 조금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배의 안위에 대한 일이라면 쉽사리 양보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이 배의 우두머리가 우리 기독교인들이 아니라 임 당수라는 사실을 어떻게 설득시킬 생각이십니까?”

“다 내게 생각이 있소.”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선은 반대하고 보겠습니다.”

“걱정 마시오. 임자들 목숨이나 이 배의 안녕에 해코지될 일은 안 할 테니. 우선 깃발부터 바꾸고 시작합시다.”

꺽정이가, 이탁오 선생이 멋들어지게 그린 - 어디까지나 이탁오 본인의 평이었다 - 깃발을 던져주며 말했다.

옛날 의민당 시절 쓰던 깃발을 재탕한 것이었다. 사실 재탕이라 해 보아야 무슨 대단한 문양도 아니요, 익숙한 검은 동그라미 안에 ‘의(義)’ 자 대신 ‘민(民)’ 자가 들어가 있을 뿐이었지만.

“이게 무엇입니까?”

“깃발이지 무엇이겠소. 지난번에 보니까, 이 배에 단 깃발 가지고 배 주인을 다들 짐작하던데, 그리 따지면 이 배 주인은 포르투갈 임금이 아니라 돈 내고 배 빌린 우리 당이잖소.

그리고 그 당 주인은 눈앞에 있는 이 몸이고. 그러니까 내 맘대로 바꿔도 누가 뭐라 할 수 있겠소?”

저의 물주 말을 거스를 수 없는 핀투는, 연신 투덜거리면서도 그 깃발을 챙겼다.

“저것으로 족하겠소? 포르투갈 인들이 이 일대에서 그처럼 현지인의 원한을 샀다면, 깃발 바꾸는 정도만으로는 의심을 풀기 어려울 듯한데.”

레가스피가 물었다.

“고양이가 쥐 걱정하는 소리를 다 하시는구려.”

“돈 림 그대와 함께 에스파냐까지 가야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지 않소이까.”

“내 말하지 않았소. 다 생각이 있다고.”

꺽정이는 목숨에 해코지될 일은 안 하겠다고 하였을 뿐, 아예 해코지를 안 하겠노라 공언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레가스피도, 핀투도 이 점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자가 무얼 했다 하였느냐?”

조호르의 술탄 알라웃딘 리아얏 샤가 재차 물었다. 순간 가는귀를 먹었는가 의심할 수밖에 없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강어귀에 처음 보는 깃발을 내건 포르투갈 배가 나타나, 즉시 우리 쪽에서도 전선을 띄워 이곳에 접근하는 연고를 묻고자 했습니다...”

“거기까지는 들었다. 치나(중국) 황제의 증표를 들고 온 거인이 그 배의 주인이라고 주장하였다고 하였지.”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거인이 말하기를, 이 배의 주인이 기독교인도, 포르투갈 사람도 아님을 보여주겠다 하였습니다.

그러고서는 실제로 두 에로파(유럽) 사람을 데리고 왔는데, 한 사람은 배의 선장이요, 다른 한 사람은 포르투갈의 이웃나라 스파뇰(에스파냐)의 귀족이라 하였습니다.

그렇게 설명한 뒤, 검문하는 관리의 눈앞에서 두 사람의 따귀를 때렸는데,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두 사람 모두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하였습니다. 개중 하나는 비틀거리다가 배 아래로 떨어질 뻔한 것을 겨우 붙잡았다고 하였습니다.”

포르투갈 놈이 따귀 맞았다는 것은 실로 유쾌한 일이 아닐 수 없었으나, 술탄은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치나와 크리스텐(기독교인)들이 동시에 얽혔다면, 이는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그 거인을 궁궐로 데려오도록 하라. 직접 그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상황을 쉽게 판단할 수 없을 터.”

“술탄의 명을 받들겠나이다.”

그도 한때는 젊었다. 곧 피난민들과 주변 다른 섬의 유력자들, 그리고 어쩌면 치나 임금의 도움까지 받아 포르투갈 악한들을 몰아내고 믈라카(Melaka, 말라카)를 수복할 수 있을 줄만 알았다.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원한을 갚는 것도, 고토를 회복하는 것도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넓은 세상에 그를 대가 없이 도와주려는 이는 없었고, 도와줄 만한 힘 지닌 자들은 감당할 수 없는 대가만을 요구했던 것이다.

겨우 그럴듯한 동맹을 꾸려 믈라카에 쳐들어가도, 끝내 포르투갈인들이 믈라카에 쌓은 요새를 뚫지 못하고 격퇴당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여러 해가 흘렀다. 그사이 풍요롭던 바닷길은 인적이 끊기고, 믈라카는 그 일대와 더불어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한때 믈라카에는 서쪽과 동쪽의 모든 부가 모여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포르투갈 사람들이 향료를 팔아 얻는 금은 에로파에 머물 뿐, 믈라카로 돌아오지 않았다.

믈라카에 찾아오던 무슬림 상인들은, 크리스텐들을 피해 믈라카 대신 아체(Aceh) 땅에서 교역을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남은 것은 역시 믈라카에 들어가지 못하는 치나 상인 몇몇뿐이었다. 이 정도로도 작은 나라 하나는 꾸릴 수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포기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뜻을 이루는 것도 요원한 상황. 세월이 흐를수록 술탄도 지쳐갔다.

그렇게 상념에 빠져, 옛일을 되돌아보기를 한나절. 밖에서 우당탕 소리가 났다.

“이 무슨 소란이냐.”

“치나의 거인이 찾아왔는데, 예를 갖추기를 거절하여...”

“아니, 이게 내 딴에는 예 갖추는 것이라니까 그러네. 거 참, 나라 꼴도 엉망인데 허례허식 차려서 뭣들 할 생각인지...”

낯선 말과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투덜대는 어조는 만국 공통인지라 술탄도 능히 그 불손한 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

“되었다. 내 직접 보겠노라.”

술탄이 주름진 손으로 장막을 걷었다.

“허, 불손함을 감당할 만한 장사로다.”

“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칭찬으로 듣겠소.”

거한이 손짓을 하니, 포르투갈 사람 하나가 한 발짝 걸어나왔다. 얼굴 한편에 멍이 든 것을 보니, 앞서 신원 증명을 갈음하여 얻어맞았다는 그 포르투갈 사람일 테다.

“조선의 민주당에 고용되어 있는 상 투메 호의 선장, 페르낭 멘데스 핀투가 귀하신 분께 인사를 올립니다. 허락하여 주신다면 통역을 맡도록 하겠습니다.”

“그리 하게나.”

억양 강한 포르투갈 말로 술탄이 답했다. 이 일대의 군주들에게 포르투갈 말은 반드시 배워야만 하는 언어가 되어 있었다. 포르투갈 인들에게도, 또 다른 나라 군주에게도 매수되지 않을 만큼 충직한 통역을 구하는 것보다 스스로 배우는 쪽이 더 쉬웠던 것이다.

“먼저 그대의 동반자가 정확히 누구인지 묻고자 하네.”

“조선국 민주당 당수 임꺽정이오. 중국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이고.”

믈라카를 거쳐 가는 무슬림이나 치나 상인들 중, 치나 너머까지 다녀오는 이들이 간혹 있었다. 치나 북동쪽에 있는 나라 중 그런 이름의 나라가 하나쯤 있다는 것도 같았다.

“그래, 그 나라에서 어쩌다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가?”

“임금님께서 일찍이 나라를 잃으셨다 들었소. 이래 봬도 천자께 칙명 받아서, 계절존망인가 뭔가 하는 큰 뜻을 받들게 되었거든. 그래서 임금님께서 말라카에 돌아가실 수 있도록 도와드리고자 하오.”

“우리랑 말 통하는 사람이 말라카의 주인으로 앉았으면 좋겠다 싶어서, 이렇게 임금님을 찾아오게 되었소. ”

“하! 나도 그리 되었으면 좋겠구나. 그러나 이미 주변의 모든 술탄과 라자, 상인과 해적들을 동원하여 몇 차례나 그곳을 쳤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대에게는 무슨 계책이 있는가?”

술탄이 물으니 꺽정이가 답하였다.

“꼭 거기 쳐들어갈 것도 없지 않겠소? 그냥 정정당당히 찾아가서 거기 눌러앉으면 될 일이지.”

“멀리선 온 그대는 알지 못하겠지만, 기실 지금도 내가 원한다면 믈라카 땅을 다시 밟을 수는 있을 것이다. 이미 그 저주받을 알부케르크가, 부왕을 쫓아낸 뒤 그런 제의를 해온 바 있었지.”

“거 괜찮은 생각이구만. 그런데 왜 지금은 여기 이 촌구석에 계시오?”

옛일을 회상하는 술탄의 주름진 주먹에 절로 힘줄이 돋았다.

“그대는 모를 것이다. 그대가 곁에 두고 있는 저 크리스텐들이 얼마나 겉과 속이 다르고 파렴치한지.”

“글쎄올시다. 표리부동은 몰라도 파렴치한 것으로 치면 나도 어디 가서 꿇리지는 않소.”

“간악한 알부케르크는 귀향을 대가로 지나친 요구를 내세웠다. 내가 배교(背敎)하여 크리스텐이 되고, 그들의 왕에게 충성을 서약하여 봉신이 된다면 믈라카를 돌려주겠노라 하였다. 그것을 어찌 ‘돌려준다’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다른 왕에게 고개를 숙이고 봉신이 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다. 나라의 지닌바 힘이 약하다면, 스스로 살아남고 백성을 지키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것이 합당한 일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들의 힘에 굴복하여 마침내 신앙을 버리게 된다면, 내 영혼은,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 가문이 지켜온 신실함과 명예는 모두 구렁텅이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러니 다시 묻겠다. 그대에게 어떤 계책이 있기에 내가 믈라카로 돌아갈 수 있게 도와주겠노라 장담하는가?”

“하문하시니 말씀 올리겠소. 나와 내 벗들이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얻은 계책이 있소. 좀 죄송한 얘기지만, 임금님께서는 말라카에서 쫓겨나셨으니, 이제 이곳에서만 임금이고 그쪽에선 아니시지 않소?”

“내 늙어서 예전처럼 쉽게 화를 내지는 않게 되었는데, 그대 덕분에 젊어지는 듯하구나.”

“사람이 말을 하면 끝까지 들어보시오. 삼 년 전부터인가, 말라카가 포르투갈 임금으로부터 번듯한 도호부로 인정을 받아서, 이제 향회(시의회, camara)를 둘 수 있게 되었다 하오.

그러니 임금님께서 말라카로 가셔서, 여기서는 임금 노릇하고, 거기서는 좌수 노릇해도 되는 것이지. 내 알기로 에우로파에서는 다 그렇게 한답디다. 여기서는 임금, 저기서는 제후. 뭐 그런 식으로 말이오.”

꺽정이와 이지 둘이서 머리 맞대고서, 지금껏 들은 서양 사정과 말라카 현지 사정 등을 면밀히 검토하여 내놓은 발상이었다. 반대로 말해, 같은 배 타는 사이인 핀투조차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잠깐, 지금 무어라 했는가?”

듣는 술탄도 당황하고, 옮기는 핀투도 마찬가지로 당황하였다.

“임 당수, 제가 ‘좌수’를 제대로 옮겼는지 모르겠습니다. 시장(市長. prefeito)이라 하였는데요... 그러니까 도시의 우두머리 말입니다.”

“조금 뜻이 다르긴 한데, 그쪽도 나쁘지 않소.”

“그렇지만 말라카 시의회는 시의회일 뿐입니다. 시장은 없고, 그저 총독(captains-major)이 있을 뿐입니다.”

“그럼 자리 하나 새로 만들면 되겠네. 내가 알기로 임금님네 청진교(이슬람)고 천주교고, 다 같은 하늘을 모신다 들었는데, 그러면 어느 쪽을 믿든 다 같은 백성이겠지. 민심은 천심이란 말 못 들어보셨소? 백성들이 한마음 한목소리로 외친 다음 배 째라며 드러누우면 그만이지.”

주저하고 주저하던 끝에 핀투가 주섬주섬 지금 나온 말을 옮겼다. 술탄이 할 말을 찾지 못하는 사이 꺽정이가 또 한 마디를 덧붙였다.

“원래 말다툼이 벌어지면 목소리 크고 뻔뻔한 놈이 이기기 마련이오. 그리고 나는 제법 목청도 좋고 어거지도 아주 잘 부리는 놈이라오.”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이었다. 만약 그의 백성 중 누군가가 나아와 저런 소리를 했더라면, 그 괘씸함에 죄를 물어야 할지, 아니면 정신 나간 것이 틀림없다면서 신께서 자비 내려주시기를 기도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터.

그러나 진짜 미치광이라면 저렇게 콧대 높은 에로파 인들까지 데리고 머나먼 곳에서 올 수는 없었을 것이었다.

결국 늙고 지친 술탄은 ‘될 턱은 없지만, 그리 자신이 있다면 한 번 알아서 해 보라’ 하는 애매한 답변만 던지고 축객령을 내렸다. 그리고 이는 노쇠한 술탄의 건강에 있어서는 아주 잘못된 선택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체 무슨 생각으로 시의회 선거에 입후보를 하였느냐며 노로냐(Antonio de Noronha) 말라카 총독으로부터 항의가 들어오고야 말았다.

시나 황제의 대리인이라 주장하는 뻔뻔한 동양인 하나가, 시청에 찾아와서는 시나 황제의 봉신인 조호르 술탄을 대신하여 시의회의 상석 내놓을 것을 요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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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남중국해 분쟁으로 국제적인 갈등의 장이 되고 있는 파라셀 제도/(中) 시사군도/ (越)호앙사 군도는, 본디 베트남과 남중국 등지에 거주하던 어민과 상인들이 자주 오가던 곳이었습니다. 16세기 초에 남중국해까지 진출한 포르투갈인들 역시 이곳을 ‘발견’한 뒤 프라셀 제도(Ilhas do Pracel)라 이름을 붙였는데, ‘프라셀’은 당시 항해용어로 야트막한 퇴(堆, bank)를 이르는 말이었습니다. 이것이 굳어지면서 ‘파라셀 제도’라는 이름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글 앞부분에서 레가스피가 언급하는 전투는, 1525년의 파비아 전투입니다. 이탈리아의 패권을 두고 합스부르크와 프랑스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전환점이 된 전투이자, 화약무기가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꾸었음을 여실히 보여준 전투이기도 했지요. 비록 오늘날에는 보다 신중하고 수정주의적인 관점이 제시되며 파비아 전투의 역사적 의의에 대한 재평가도 이루어지고 있지만, 중세 유럽을 상징하는 기사가 근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화승총 앞에 무너졌다는 그 상징성은 결코 낮게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전 화에 몇 번 지나가듯 언급된 조호르 술탄국과 그 초대 술탄 알라우딘 리아얏 샤가 등장했습니다. 알라우딘 샤는 작중에 언급된 것처럼, 말레이 반도의 말단 - 지금의 싱가포르 근처 - 까지 도망친 뒤 현지 세력을 규합하여 조호르 술탄국을 세웠지요. 그 후로 외교력을 총동원해 여러 차례에 걸쳐 말레이 제후들의 연합군을 구성한 뒤 말라카를 몇 차례에 걸쳐 공격한 바 있습니다. 1550년에는 말라카를 함락시키기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지요.

그러나 이렇게 말라카를 두고 싸움이 벌어지는 사이, 한 발짝 떨어진 수마트라 섬 북단에서는 아체(Aceh) 술탄국이 힘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아체는 오스만 투르크와 긴밀한 교역망을 형성하며, 말라카 주변에 형성되었던 교역망을 자국 중심으로 재편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수마트라와 말레이 반도 양쪽에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게 됩니다. 알라우딘 리아얏 샤도 1564년 아체 술탄국의 급습에 수도가 함락당할 때 포로가 되어, 끝내 숙원인 말라카 수복을 이루지 못하고 아체에서 처형당하게 되지요.

이후 조호르 술탄국은 잠시 아체 술탄국의 제후국 신

세로 전락하기까지 하는 등 수난을 당하다가, 17세기 초중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손을 잡고 다시 부흥하게 됩니다.

원 역사에서 1552년 설립이 허가된 말라카 시의회는, 말라카에 거주하는 귀족들과 영주권을 공식으로 취득한 시민들만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곳에 이교도, 그것도 다른 나라 군주가 비집고 들어가게끔 만들려는 어거지 시도가 어떻게 귀결되지는 조금 더 지켜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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