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책의 백성들 (2)
포르투갈 왕국의 동방 거점이 인도 땅의 고아라면, 그 고아의 왼팔은 오르무스(호르무즈)요 오른팔은 이곳 말라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명성보단 좀 초라한 것 같소. 어째 여기 살던 사람들이 기꺼이 핀투 그 양반을 따라 머나먼 조선까지 온다 싶더라니.”
꺽정이의 솔직한 평에 그를 맞이하던 말라카 관헌들의 표정이 굳었다.
“아니, 그 암본인지 말루쿤지 하는 곳에서 향료 퍼오고, 또 대국이랑 우리 조선 물산 가져다 팔고 하면 떼돈을 번다고 하지 않았소?”
“본토 사람들이 돈을 버는 것이지, 이곳 사람들 쌈지 주머니까지 들어오는 건 아닐 테지요.”
옆에서 거드는 이탁오가 - 그 또한 몇 년 전 말라카를 들린 적 있었으므로 몇몇 관헌들과는 구면이었다 - 사실을 마치 몽둥이처럼 휘두르니, 말라카 시청과 요새에서 나온 관헌들 표정은 더더욱 굳어졌다.
조선 속담에도, 아는 게 병이라 한다던가.
현지 사정 모르고 포르투갈 왕관의 위엄만을 아는 본토 애송이 - 저 요새 안에는 수두룩했다 -라면, 이 동 림 앞에서 가슴 두드리며 큰소리를 칠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조선과의 교역에 연이 있어 그곳에서 오셨다는 귀인 맞이하러 나온 관헌들은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만년 적자인 말라카 재정에 그나마 숨통을 틔워주어, 흑자로 바꾸진 못해도 적자를 줄여준 것은 동방과의 교역이요, 눈앞의 동(Dom) 림은 바로 그 교역의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이었다.
“흠흠, 지금 보고 계신 곳은 주로 밀항자들이나 이교도들이 머무는 쪽입니다. 말라카에 거주하는 떳떳한 시민들의 터전은 저기 오른쪽, 성벽 가까운 곳이지요.”
포르투갈령 말라카는 크게 넷으로 나뉘어 있었다. 가장 안쪽에는 지난 사십여 년간 축조하고 개수하여 철옹성이 된 말라카 요새(Fortaleza da Malaca)가 있었다.
그리고 그 바로 앞, 요새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곳에는 트란케이라(Tranqueira) 구역이 펼쳐져 있었다. 관헌들이 말한 대로, 그쪽에는 나름 그럴듯하고 말끔한 저자가 펼쳐져 있었다.
반면 꺽정이의 왼편에 펼쳐진 허름한 쪽은 일레르(Yler).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를 제외하면 말끔한 건물은 딱히 보이지 않았다. 당국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쪽으로 밀려난 이들, 그리고 공인받지 못한 이주민들(Moradores)들이 원주민들과 섞여 사는 구역이었다.
마지막으로 말라카의 주인이 바뀌기 전부터 도시 바깥에 살며 농사짓던 이들은, 주인이 바뀐 뒤에도 그대로 저들 살던 곳에 머물며 역시 그대로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런 구역을 사바(Sabba)라 통칭하였다.
“그러면 저기 번듯한 읍내에 사는 사람만 말라카 부민(府民)으로 치고, 나머지는 그냥 떨거지 대접하는 것이오?”
“자애로우신 국왕 전하께서 그러실 리 있겠습니까. 비록 불량한 모리배들이나 아직 개종하지 않은 이교도 원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고 하지만, 어쨌든 다 같은 백성이요 왕관의 보호를 받는 이들이지요.
우리 정부와 당국은 그들을 위해서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일레르와 사바에 널리 세워져 있는 교회와 그곳에 설치된 교구(敎區)들이 증거입니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확실히 도시는 기울고 있는 듯하구려.”
“아, 임 당수, 거 말씀 좀!”
옆에서 통역을 맡던 핀투 선장이 마침내 역정을 내었다.
“내가 틀린 말 했나? 아하다못해 조선 조정도 구휼한다고 하면 쌀 퍼주는 시늉이라도 하는데, 여기는 백성 돌본다면서 한다는 게 고작 절 지어주는 일이잖소.”
“자꾸 그러시면 통역하는 대신 제 마음대로 말을 지어내버리겠습니다. 저도 살아야 할 것 아닙니까.”
그렇게 시덥잖은 소리나 주고받으며 어느새 요새 안으로 들었다. 사람됨이야 영 이상하지만, 어쨌든 시나 황제가 임명한 대리인이 찾아왔으니 총독이 직접 접대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다. 그 거대한 나라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수십 년간 노력해온 포르투갈이었기에 더욱 그러하였다.
마카우 조차 협상이 완전히 파탄나고, 시나 상인들이 다시 바다로 쏟아져나온 지금, 어떻게든 그들의 발길을 말라카로 다시 끌어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멀리서 오신 귀인, 동 림을 환영하는 바요. 이곳 말라카의 총독을 맡고 있는 안토니우 드 노로냐요.”
“조선국 임꺽정이외다. 어디서 뭐 하는 놈인지는 얼추 들어 아셨으리라 믿소.”
마침내 총독의 검소한 사무실 - 그 검소함이 과연 미덕에 의한 것인지, 필요에 따른 것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 에 들어 인사를 나누었다.
별 쓸데없는 이야기가 또 한참 오간 뒤, 이만하면 되었다 싶었던 꺽정이가 본론을 꺼냈다.
“사람 하나 추천하러 왔소. 저기 옆 동네에서 임금 노릇하는 사람인데, 내가 보기에 그이가 이곳에서 우두머리까지 맡게 되면 서로 좋을 듯하오.”
그 소식 들은 노로냐는 벌떡 일어나려다 겨우 저의 넓적다리를 눌러 앉혔다.
“조호르의 술탄을 말씀하시는 것이오? 그자가 이곳 말라카로 찾아와 복속을 청하게 된다면 실로 큰 성과가 될 것이오.”
위대한 정복자 알부케르크는, 이곳 말라카의 술탄이 그의 옛 도성에 남아, 새로운 주군과 신앙을 받들며 그의 백성들을 다스리기를 원했다. 그것이 교역과 행정 양쪽에 모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의 후임자들도 그러한 제안의 타당성을 알아보았다. 말라카 당국은 지금도 술탄의 정부 일부를 남겨, 사바와 그 너머에 거주하는 원주민들을 스스로 다스리도록 하고 있었다. 물론 요직에 앉는 자는 오로지 개종한 이들로 제한되었지만.
허나 가장 중요한 술탄이, 말라카에 찾아오기는 찾아오되 함대와 화포를 대동하고 찾아오곤 하였으므로 여간 문제가 아니었다. 술탄이 한 번 그렇게 ‘방문’할 때마다, 도시의 부(富)는 움츠러들고, 가뜩이나 부족한 재정은 더욱 새어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 실로 큰 성과가 될 것이오. 역시 말이 통하는구려.”
“동 림 그대는 비록 불신자지만, 신앙의 형제들을 핍박하기는커녕 오히려 선교를 돕고 있다고 들었소. 과연 그 명성이 헛되지 않은 듯하오.
이미 레퀴오스에서 에스파냐인들의 음모를 막아주셨다 들었는데, 거기에 더불어 이렇게 우리를 도와주시니, 실로 그대는 우리의 벗이 아닐 수 없소.”
여전히 꺽정이가 말하는 ‘우두머리’의 뜻을 착각하는 노로냐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요새 말라카에서 퍼지는 표현을 인용하면, ‘배추 스튜(김칫국)를 마시는’ 셈이었다.)
동방선교의 성공 소식은 말라카에서 고아를 거쳐, 이제 막 리스본까지 닿았다. 그나마 덜 부풀려진 소식을 들은 말라카 당국이 판단하기에도, 눈앞의 동양인은 신앙에 우호적인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면 동의하신 것으로 알고, 여기 머무는 동안 다른 이들에게도 말을 퍼뜨리도록 하겠소. 그 알라우딘인가 알라딘인가 하는 어르신을 동네 수령으로 모셔오자고 말이오.”
당연히 동 림이 그 고집쟁이 이교도를 개종케 한 뒤 아비스(Aviz, 포르투갈의 왕조) 십자가에 무릎 꿇도록 하리라 넘겨짚은 - 그 외의 다른 가능성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 노로냐는, 돌이킬 수 없는 말을 하고야 말았다.
“술탄이 올바른 길로 돌아온다면, 그 누구도 그를 다시 이곳 말라카에 들이는 데 반대하지 않을 것이오. 이 사람도 그리 알고, 시 의회와 교회의 여러 사람들에게 소식 전하도록 하겠소. 설득까지 대신 해주시겠다 하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오.”
“감사까지 할 것은 없소, 허허.”
곧 밝혀진바, 정말로 감사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시나 황제의 대리인이자 동방선교의 후원자인 동 림이, 조호르의 술탄과 말라카 당국 사이를 중재하여 수십 년간 끌어온 다툼을 끝내려 한다는 소문이 말라카에 돌았다.
일확천금을 꿈꾸며 먼 동쪽까지 온 포르투갈 사람들에게는 실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하하, 앞서는 동 림께서 품으신 뜻을 미처 알지 못하였습니다. 정말로 우리 도시의 앞날을 걱정하여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었군요.”
방금 전까지 꺽정이가 말라카 저자가 초라하다 흉보았을 때 불편한 기색 못 감추던 관헌들이, 한결 밝은 얼굴로 말했다.
“그 늙은 이교도가 마침내 개종하고 이 도시로 돌아온다면,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동 림께서 중재를 하셨다는 것까지 알려진다면, 말라카는 동방의 진주로서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언젠가는 이곳 동인도 제도에서 마훈드(무함마드)의 추종자들을 모두 몰아낼 수도 있겠지요.”
언제 싸움이 벌어질지 모르는 곳에서는 교역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포르투갈의 군대와 함대는 조호르나 아체, 자바의 이교도 군주들을 언제든 물리칠 수 있겠지만, 그것은 포르투갈과 인도 부왕령의 승리일지언정 말라카 시민들의 승리는 아니었다.
만약 시나의 중재로 말라카와 조호르 사이에 평화가 안착된다면, 바다로 나오는 시나인들, 그리고 지금껏 조호르를 드나들던 상인들까지 다시금 말라카를 찾게 되리라.
꺽정이는 관헌들이 그런 장밋빛 미래를 그리고 있음을 얼추 짐작하였으나 딱히 고쳐주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여기 요새가 제법 훌륭하게 지어졌구려. 좀 구경을 해도 되겠소?”
“요새 말씀이십니까?”
“당연하지. 우리네 상인들이 장차 이곳으로 올지, 아니면 그냥 조호르 쪽에 자리 깔고 앉아 판을 펼지를 결정해야 하는데. 언제 도적에게 털릴지 모르는 허술한 곳이라면 어찌 안심하고 상인들을 보낼 수 있겠소?”
잠시 고민하던 이들은 저들끼리 시선 주고받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괜한 의심으로 눈앞의 동 림을 노엽게 한다면, 자칫 기껏 굴러들어온 기회를 걷어차는 격이 될지도 몰랐다.
그리하여 느닷없는 성채 구경에 말라카 관원들이 끌려들게 되었다. 과연 동쪽에서 무슨 기사단 단장 겸 근위대장까지 올랐다는 사람답게 워낙 힘이 좋아서, 그 발걸음 따라가느라 애를 먹어야만 했다.
동 림의 일거수일투족에 다들 관심을 쏟았기에, 동 림 곁을 지키는 난쟁이 부관이 성문을 지날 때마다 잠시 어디로 사라진다는 것은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게 성채를 한 바퀴 돌고, 다시 단단한 땅을 밟을 무렵, 관헌 하나가 선뜻 나섰다.
“어떻습니까. 실로 훌륭한 요새 아닙니까? 지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현지 군주들의 공격을 당했지만, 이 요새는 항상 굳건히 버텨 왔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고 시나의 모든 상인들에게 이곳 말라카가 있음을 전해 주시지요.”
“곧 그리 될 것이오.”
이 또한 의미심장한 말이었으나, 듣기에 따라서는 오해하기 딱 좋았다.
“그러면 이제 의회 사람들에게 모셔다 드리면 되겠습니까? 총독 각하의 부름을 받았을 테니, 지금쯤이면 다들 모였을 것입니다.”
꺽정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라카 요새는 비록 험준하고 공고할지언정 그렇게까지 크지는 않아서, 의회 사람들이 저들의 회의장으로 쓰는 시청 건물도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았다.
“내가 바로 임꺽정이오. 반갑소이다.”
하비에르로부터 받은 서신을 고아로 전달해주기도 하고, 또 종종 그와 서신을 직접 주고받기도 한 사이였던 조르주 드 산타 루치아(Jorge de Santa Luzia) 주교가 반갑게 맞이하고, 그 뒤를 이어 다른 의원들도 동양의 이방인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였다.
교역을 업으로 삼지 않는 의원일지라도, 총독을 통해 전해들은 동 림의 거창한 칭호를 듣고 그의 지위를 얼추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러분이 이 동네에서 향임(鄕任)들 맡고 계신다 들었소.”
“그렇습니다.”
“우리 사는 곳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향임이라는 것은 대개 백성들 사이에서 인망이 있고 또 백성들 사는 데 도움을 주는 이들이 맡는 것이겠지. 그렇지 않소?”
“동 림 말씀대로입니다.”
“그렇다면 조호르의 술탄 알라우딘 어르신을 이 도시 시장으로 모셔오는 데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겠지.”
“그분께서 개종만 하신다면야...”
눈치 없게 그것을 물어본 의원이 하나 있어, 주변의 곁눈질을 당했다. 신앙의 보호자이자 포르투갈의 벗인 동 림이, 설마 그런 것을 모르시겠는가.
“개종은 안 할 것이오.”
당당한 선언에, 억울하게 곁눈질당한 의원조차 주변에 무어라 하는 것을 깜빡하였다.
“대신 어르신 말씀하시기를, 포르투갈 임금께 따로 책봉은 받겠다 하더군. 그만하면 좋은 조건 아니오?”
당혹스러운 눈빛이 바쁘게 오갔다.
“흠흠, 동 림. 우선 말라카에는 아직 시장이 없습니다. 총독 각하께서 도시의 행정을 총괄하시고, 저희는 시민들의 뜻을 모아 가깝게는 총독께, 멀리는 국왕 폐하께 말씀 올릴 뿐이지요.”
“그럼 그 뜻을 모아서 시장 자리를 만들면 될 일 아니오? 내가 듣자하니 다들 그 알라우딘 어르신 모셔오면 말라카에도 꽤 도움 되리라는 것을 아는 듯하던데. 그렇게 여러 사람에게 도움 될 만한 사람이 높은 데 올라가야지.”
“아무리 그래도, 개종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그분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교도를 우리 시의 의회에 동참케 하는 것도 곤란할 지경인데...”
가장 먼저 동 림을 환대하였던 산타 루치아 주교는 가장 당황해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보시오. 개종을 하고 말고가 뭣이 중요하오? 먹고 사는 게 중요하지. 그 사람이 여기 와서, 갑자기 여러분더러 천주교 믿지 말라고 할 리가 있겠소? 그리고 애시당초 천주교나 청진교나 별로 다를 것도 없지 않소?”
적어도 꺽정이가 이해하기로는 그랬다. 고작해야 보살 한 분 더 믿냐 안 믿냐, 그리고 어떤 경전을 읽을 것이냐, 그 차이뿐이었다.
마지막 문장을 번역한 핀투가, 주교에게 이 말은 저의 뜻이 아님을 드러내고자 최대한 간곡한 눈빛을 보내며 말 마치자마자 애써 성호를 그었다.
“동 림, 허나 신앙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 말씀하신 바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사람 살아가는 데 가장 중한 건 밥이오. 내가 사람이 굶어서 죽는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절간에 못 가서 죽는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도 없소. 나 사는 동네에서는 절간은커녕 성황당 한 번 밟지 않고도 잘만 영달하는 이들이 수두룩한데, 뭐.
뭐, 어차피 임자들이 금방 동의할 것이라곤 생각 안 했소. 자, 이 자리에서 분명히 하겠소. 나 임꺽정이는 천자의 명 받들고 저기 조호르 술탄 어르신한테도 허락을 받은 사람으로서, 알라우딘 리아얏 샤가 이 의회의 상석에 앉아서 시장 노릇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요.
동의를 하든 말든, 임자들 맘대로 하시오. 내 며칠 뒤에 다시 물으러 오겠소.”
이것이 조호르의 술탄이 느닷없이 말라카 시의 있지도 않은 시장 자리에 저의 의사와 무관하게 입후보하게 된 사연이었다.
그 무렵, 꺽정이 일행에서 슬쩍 빠진 이탁오는 사바 한가운데에서 말라카의 벤다하라(Bendahara, 재상)를 만나고 있었다. 옆에는 술탄 알라우딘의 허락을 받았다고 절반쯤 허풍을 떨며 조호르에서 사실상 납치해온 통역을 두고 있었다.
“솔직히 살기 팍팍하시지 않습니까?”
첫마디부터 제법 강렬하였지만, 통역을 거치면서 그것이 영 밋밋해졌는지 상대는 한숨만 푹 내쉴 뿐이었다.
“언제는 아니 그랬겠소? 그러나 우리에게 삶을 스스로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이렇게 살고 있지 않겠지. 벤다하라라는 관직이 그럴듯해 보일지 모르지만, 이미 그 권위는 사라진 지 오래요. 사바와 그 너머의 무슬림들도, 그저 조용히 살던 대로 살고자 할 뿐이오.”
말라카의 벤다하라는 사바 구역과 그 외곽에 사는 이들을 관리하는 직책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모시는 술탄 없는 벤다하라의 목소리에 힘이 있다면 얼마나 있으랴. 늙은 벤다하라의 목에 걸린 십자가가 축 쳐진 채 대롱거렸다.
“술탄을 다시 모셔온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이미 우리도 알고 있소. 만일 그분께서 개종하신다면, 말라카 사람들이 먹을 곡식을 기르는 무슬림 농부들은 그분을 따르면서도 따르지 않을 것이오. 개종하지 않으신다면, 크리스텐(기독교도)들이 그분을 받아들일 리 없고.”
“술탄을 모셔오는 게 아니라, 여러분을 대신하여 여러분 삶을 편하게 만들어줄 사람을 하나 정하여 세우는 것일 뿐입니다. 우연히 그 적임자가 술탄일 뿐이지요.”
“하! 우리에게 무슨 힘이 있어 그런 일에 나설 수 있겠소?”
“왜 나설 수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곧 트란케이라에 사는 포르투갈 사람들도 술탄을 모셔오자고 아우성치게 될 테니, 두고 보시지요.”
“정말 그렇게 된다면, 그때는 사바와 그 너머 말라카 사람들을 대표하는 이로써 마땅히 술탄의 귀환을 포르투갈 사람들과 함께 기원하겠소. 허나 그렇게 될 리가 없지 않소?”
그러나 이탁오는 씩 웃을 뿐이었다.
“이쯤이면 되겠군.”
꺽정이는 앞서 말라카 관헌들과 함께 요새로 향하던 길에 눈여겨보았던, 저자 초입의 공터 앞에 섰다. 세 구역에서 모두 편히 오갈 만한 위치였다.
과연 눈앞에는 딱 보아도 포르투갈 사람인 자, 딱 보아도 포르투갈 사람은 아닌 자, 그리고 애매하게 양쪽이 섞인 듯한 자들이 오가며 이쪽 이방인들을 흘깃흘깃 쳐다보고 있었다.
“이건 도저히 못할 짓입니다. 이러다가 이단으로 낙인찍히기라도 하면...”
“같은 도를 따르는 시늉이라도 해야 이단 소리 듣는 법이지. 나는 애초에 그 천주의 도를 아니 믿으니 괜찮소.”
“저는 믿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니, 무엄한 이교도를 저의 배에 태우고 다니는 놈이라면 이단일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리 따지면, 해적 두목이랑 결탁해서 못된 짓 하고 다닌 건 천주의 뜻 받드는 일이오? 하비에르 어르신이 히라도에 붙잡혀 계실 때 우리 선장은 뭘 하셨더라?”
결국 본전도 건지지 못한 핀투가 ‘에라 모르겠다’ 하며 입을 닫았다.
“나중에 문제라도 생기면 꼭 책임져 주시는 겁니다. 중국 천자의 이름을 내세우든, 아니면 그렇게 잘하시는 도둑질과 협잡질을 해서든.”
“그거야 인지상정이지. 자, 이제 구경꾼 슬슬 모여드는 듯하니 얼른 통변이나 하쇼.”
밤이와 다른 흑의군들이 여기저기서 나무 궤짝을 모아와, 제법 그럴듯한 연단을 만들었다. 그 위에 꺽정이가 올랐다.
“말라카 사람들, 들으시오들! 나는 조선국 민주당 임꺽정이라 하오! 여러분 모두에게 도움 되는 이야기 해주고자 여기 섰소!”
핀투가 울며 겨자먹기로, 꺽정이 따라서 포르투갈 말로 외쳤다. 다들 그 말은 알았으므로, 살갗의 빛깔과 코의 높이와 무관하게 이쪽으로 눈과 귀를 돌렸다.
“나는 여기 말라카에 부가 흘러넘친다는 소문을 들었소. 그런데 이제 보니 완전히 거지떼 소굴이 다 되었습디다그려? 이것이 어찌 된 영문이오?”
아무리 옛날에 비하면 영락하였다지만, 트란케이라는 물론이요 일레르 구역도 ‘거지떼 소굴’ 소리 듣기에는 많이 억울하였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란 대개 저에게 무엇이 있느냐를 헤아리기보다는 무엇이 없느냐를 먼저 떠올리기 마련. 느닷없이 ‘거지떼 소굴’ 소리를 듣고서 항변하는 이들보다는 은근히 공감하는 이들이 더 많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내가 보기에 그 답은 뻔하오. 장사로 먹고사는 도시인데 장사가 잘 안 되니까 먹고살기는 어려워지는 것이지. 그렇다면 이것이 누구 잘못이오?”
앞을 얼쩡거리던 한량 몇몇이 우스갯소리로 답했다. 시의 재정이 가벼워지는 만큼 어째 허리둘레 늘어나는 듯한 시의원 아무개 탓이라 하였다.
“그래, 여기 번듯한 젊은이가 제대로 말해줬군그래. 임자네들 밝은 임금께서 잘못하셨을 리가 있겠소? 다 아랫것들이 모자라서 그렇지.”
“옳소! 하하!”
주정뱅이 몇몇도 좋다고 떠들었다.
“저 시의회와 총독 잘못이지, 누구 잘못이겠소?”
“맞다, 맞... 엥? 잠깐, 누구 잘못이라고?”
뭔가 심상치 않음을 뒤늦게 깨닫는 한량과 주정뱅이들이었다.
“자, 포르투갈 사람들, 들어보시오! 그대들이 이 머나먼 동쪽까지 와서 고생하는 까닭이 무엇이오? 돈 많이 벌어서 신세 고쳐보려고 왔겠지!”
처음에 시의회 운운하던 이들이 불똥 튈까 두려워하며 슬그머니 물러나려 하였으나, 이미 그들 등 뒤에는 다른 이들이 여럿 붙어 있었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런데 돈들 잘 벌고 계시오?”
여기에 대해서는 모두가 양심에 거리낌 없이 답할 수 있었다.
“아니오!”
“거지꼴! 거지꼴이오!”
“여러분들의 뜻을 받든다는 시의원들이 정말로 뜻을 받들고는 있소?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든 여러분 돈벌이를 시켜줄 방도를 찾아야겠지! 그런데 그걸 안 하고 있잖소? 그렇다면 어찌해야겠소?”
웅성거리는 소리는 커졌으나, 아직 그 사이에서 뾰족한 외침은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괜찮았다. 돌이켜보면 의민당 시절부터 이미 꺽정이가 자주 하던 짓이 - 도둑질을 제외하면 - 이렇게 여러 사람 모아다가 여론 호도하는 것 아니던가.
“여러분 뜻 받들 만한 사람을 새로 뽑아야지, 그 외에 다른 수가 있겠소?
여기 살던 조호르의 알라우딘 어르신은, 맨몸으로 그쪽까지 쫓겨난 다음에 나름대로 괜찮은 도시를 만들었소. 그런 사람이 여기 와서 행정을 맡는다면 말라카 앞날이 밝지 않겠소?”
알라우딘이라 하면 술탄 아니던가? 술탄은 이교도다. 이교도는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런 소리가 웅성거림 위에 덧붙을 무렵.
“도시 주인을 바꾸자는 게 아니오! 여러분을 대신해서, 말하자면 여러분의 종복이 되어서 여러분 삶을 더 낫게 해줄 사람을 데려오자, 그런 뜻이지! 지금 시의원들이 죄다 시원찮으니, 그런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소?”
“하지만 이교도를 시장으로 모실 수는 없소이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신실한...”
“아, 거 참. 그래서 이대로 살다가 굶어 죽으시려오? 여기 돈 벌러 오셨소, 아니면 도(道) 닦으러 오셨소?
어차피 알라우딘 그 사람이 여기 와서 눌러앉는다 해도, 임자네 임금님 신하로서 눌러앉는 것이라니까? 이교도고 뭣이고, 여러분들은 그냥 믿던 것 그대로 믿으면 된다 이 말이오.”
아닌 게 아니라, 같은 교인들이 시의원으로 있다 해서 그들에게 딱히 베풀어준 건 없었다.
그렇게 시끄러운 작자 하나가 저자 한쪽을 차지하고서 고래고래 떠드는데, 해가 기울고 그림자가 길어질수록 모여드는 사람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노로냐 총독과 말라카 당국도 바보는 아니어서, 나름대로 동 림을 회유해보려고도 하고, 그가 내세우는 논리에 반박해보려고도 했다.
허나 애초에 논리는 겉치레요 그저 우기는 데 뜻이 있는 이를 어떻게 논리로써 반박할 수 있을까. 시의원 몇이 용감히 나아갔다가,
‘보시오들! 시의원들 하는 소리가 이렇소! 여러분들이야 빈궁하게 살든 말든 별반 관심이 없나 보오!’
이렇게 조리돌림만 당하고 돌아온 것이었다.
그렇다고 군사를 보내자니, 이미 그 주변을 에워싼 군중이 너무 많기도 했거니와, 설령 동 림의 몸에 해코지라도 하게 되면 큰일이었으므로 이 또한 여의치 않았다.
대체 이 어찌 된 일이냐고 조호르 쪽에 급히 사람을 보내 해명하라 요구하기도 했는데, 아무리 가깝다 하더라도 오가는 데 하루이틀은 걸리거니와, 저쪽에서 돌아오는 답이 정직하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렇게 총독과 시의원들이 서로 미루고 미루는 사이, 오늘도 시끄럽게 구는 거인의 모습 바라보는 - 바라보지 않기가 더 어려웠다 - 이들 머릿속에 슬슬 의심이 자리잡게 되었다.
‘정말 저 사람 말대로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일리가 있는 소리를 하니 총독 각하도 별 수를 못 쓰는 것 아닐까?’
이튿날부터는 이탁오가 데려온, 말라카 술탄국 시절 기억하는 무슬림 늙은이 몇몇이 소란에 가담하였다.
“알라우딘 샤! 알라우딘 샤!”
“술탄께서 계실 때가 좋았다!”
그러다 보니, 사바 쪽에서 저들이 거둔 곡식과 과일, 양조한 술 따위를 팔러 온 이들도 하나둘씩 멈춰서서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저기 변두리 사는 청진교도 여러분도 들으시오! 여러분도 나름대로 여기 말라카 동헌에 세곡 바치고 있는데, 그렇다면 여러분도 향회에 그만한 목소리는 낼 수 있어야 하지 않겠소?”
무슨 소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세금 내는 만큼 돌아오는 것 있어야 한다는 것만은 능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사흘째 되는 날.
여전히 술탄을 데려와 시장으로 세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못마땅하게 여기는 자들도 많이 있었다.
“알라우딘! 알라우딘!”
“알라우딘을 의회로!”
허나 반대로 이 기회에 뭔가 바뀔지도 - 그리고 그들에게 뭔가 떨어질지도 - 모른다 생각하며 무작정 해 뜨자마자 나아온 이들도 적지 않았다.
지금껏 서로 이웃해 살면서도 별 접점은 없던 무슬림 원주민들과 개종한 원주민들, 그리고 포르투갈 사람들이, 부(富)의 약속 앞에 하나로 뭉쳤다. 적어도 지금까지 그들이 보고 들은 바에 따르면, 알라우딘을 데려온다 하여 손해볼 바는 없고, 이득볼 바는 많았다.
설령 총독과 그의 군대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저 동방 사람을 잡아가지, 그들에게까지 해코지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성벽 뒤에는 겁쟁이가 없다 하지 않던가. 다들 그렇게 용기백배하여, 혼자서는 결코 하지 못할 무엄한 소리들을 떠들어대었다.
“이만하면 되었소. 슬슬 가 봅시다그려.”
그들을 바라보며 꺽정이가 말했다. 조호르에서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고 따라온 이들이 지금은 제법 고양되어, 그들의 주군 알라우딘 샤께서 얼마나 지혜로우시며 아무것도 없던 작은 어촌을 그럴듯한 도시로 만들어내셨는가를 떠들고 있었다. 백성이 주군을 멋대로 정한다는 말은 대체 무슨 소리인지 끝내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뭐랬소. 이 믿음이고 저 믿음이고 기실 별 차이 없다니까. 다 같은 사람이 믿는 것인데 어쩔 수 있겠소?”
“무슬림들이 말하는 것처럼, 다 같은 ‘책의 백성들(Ahl ab-Kitab)’ 아니겠습니까.”
사바 구역을 돌아다니다가 그 청진교도들을 제법 여럿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 있었던 이탁오가 거들었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당수.”
“그래. 한 군데만 열리면 되니까 무리하지는 말고.”
“헤헤, 맡겨주십쇼.”
도키치로가 밤이와 함께, 흑의군들을 데리고 먼저 움직였다. 그들이 군중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본 꺽정이가 단상 위에 올라 외쳤다.
“자, 여러분! 우리가 사흘 동안 이렇게 떠들었는데, 여러분의 총독도, 말라카 이끈다는 시의원 나리들도 별 응답이 없었소! 그럼 어찌 해야하겠소? 우리가 찾아가서 답을 들어야지.”
“와! 그 말 옳다!”
“동 림! 동 림!”
“알라우딘! 알라우딘!”
첫날에 헛소리하던 불량배와 한량들이 지금은 좋다고 바람잡이 노릇들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밑바닥 삶에서 요 며칠은 가장 재밌고 흥미진진한 날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면 갑시다! 요새를 향해!”
“가자, 요새로!”
어어- 하는 사이에 군중이 우르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냥 구경하던 이들도 인파에 휩쓸리고, 그냥 장 보러 나온 이들도 뭔 일 일어났나 궁금하여 따라가다가 어느새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요새로 향하게 되었다.
“큰일이다! 성문! 성문을 닫아라!”
뜻밖의 소요사태에 겁을 먹은 요새의 지휘관들이 급히 명령을 내렸다.
“얼른 닫아라! 저 폭도들을 들여보내선 안 된다!”
그러나 관세청 쪽 문과 상 도밍고 문, 산투 안토니우 문은 모두 닫혔건만, 산티아구 문은 요지부동이었다.
“어찌 된 것이냐? 대체 무슨 일이냐는 말이다!”
노로냐 총독이 급히 달려와 방방 뛰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활짝 열린 문이 스스로 닫히지는 않았다.
급히 문 닫으려던 병사들을 어디선가 나타난 괴한들이 가로막았고, 몸싸움하는 사이에 폭도들이 문 안쪽까지 들어오고야 말았다는 보고는, 그것을 보고할 병사들이 이미 사람의 파도에 파묻혀버렸으므로 총독에게까지 전해지지 못했다.
그 대신 요새 안쪽까지 밀고 들어온 이들의 외침소리만 울려퍼졌다.
어째서 세금은 옛날처럼 내는데 저 시의회에 무슬림은 하나 없는가, 생각해보니 그것이 참으로 억울하고 불공정하다 여기는 사바 구역의 주민들은 이렇게 외쳤다.
“대표 없이 조세 없다!”
일확천금의 꿈을 따라왔건만 천금은커녕 금화 구경도 제대로 못하는 현실에 대해 마침내 탓할 구석을 얻은 포르투갈 사람들은 이렇게 외쳤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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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에 등장한 말라카 요새는 말라카 시내를 둘러싼 거대한 성채로, 거듭되는 현지 세력의 반격에 맞서 말라카 해협의 항로와 정착지의 주민들 - 정확히는 포르투갈 시민들만 - 을 지키기 위해 축조되었습니다. 증축을 거듭하며 더욱 거대해진 성채에는, ‘유명한 성(A Famosa)’이라는 별명도 붙었지요. 이후 말라카의 지배자가 바뀌면서 성채의 소유주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로 바뀌었습니다. 1806년 네덜란드 본토가 나폴레옹에게 점령당하면서 말라카의 소유권을 넘겨받게 된 영국은, 이 성채를 계륵이라고 판단하고 다른 열강 - 특히 나폴레옹의 프랑스 - 이 차지하지 못하도록 파괴해버립니다. (나중에 영국이 말라카 대신 싱가포르를 일대의 해상거점으로 사용하게 된 것을 감안하면 나름대로 합리적인 판단이라 할 수 있겠지만, 영국의 악명(?)을 생각하면 조금 다르게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15세기를 거치며 인도양과 남중국해, 인도네시아 제도 사이에서 중계무역으로 엄청난 부를 거머쥐게 된 말라카 술탄국은 그만큼 치밀한 행정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아퐁수 드 알부케르크는, 자신이 처음 말라카에 도착해 술탄에게 복속을 요구할 때, 술탄이 이미 자신이 데려온 군사의 수를 정확히 알고 있어 크게 놀랐다고 기록하고 있지요. 포르투갈령이 된 뒤에도 이러한 토착 행정조직의 상당수는 그대로 유지되어 말라카 교외의 원주민 및 불법 이민자들을 관리하였습니다. 작중 언급된 벤다하라는 그러한 행정조직의 수장으로서, 비록 기독교로 개종해야 한다는 전제 하에서기는 했지만 작지 않은 권한을 유지하였습니다.
중세를 거치며 유럽의 도시 대부분에서는 정책결정 기관으로서 시의회(조금 더 오래된 역어로는 시참사회라고도 합니다)가 설립되게 되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고대 로마부터 내려오는 자치기구가 계승되기도 했고, 또 어떤 경우에는 슬라브나 바이킹 시절의 자치 문화가 계승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16세기에는 동유럽부터 누에바에스파냐까지 얼추 비슷한 형태의 시의회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민주적으로 선출되지는 않았고, 큰 세력을 지닌 자유도시나 도시국가들을 제외하면 온전한 자치권을 지니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았지만, 어쨌든 이러한 시의회의 존재는 이후에 근대적 시민 민주주의로 이어지는 한 가지 토대가 되었습니다.
말라카의 경우, 1552년 시의회 설립이 허가된 이후 주로 도시에 거주하는 귀족들과 상회 대표들, 그리고 허가받은 정착자(카사도스Casados)들을 대표하는 몇몇 유명인사들로 의회가 구성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반면 거주를 허가받았지만 정식 시민은 아니었던 모라도레스(Moradores)들, 그리고 말라카의 원주민들 - 사실 이들 원주민들도 상당수는 15세기에 다른 지역에서 유입된 이들의 후손으로, 말라카의 진짜 원주민은 아니었습니다 - 의 정치 참여는 제한되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