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책의 백성들 (3)
말라카 요새의 문이 맥없이 뚫리니, 그 다음부터는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우르르 밀려들어온 폭도들 중 누군가가 노로냐의 얼굴을 멀리서 알아보고 외쳤다.
“저기다! 총독이 저기 있다!”
군중의 머릿수는 말라카 주민 전체에 비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아직 잃을 게 있는 사람들은 ‘동 림’의 말이 그럴듯하다 여기다가도, 그들이 성채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하자 중도에 한 번쯤 멈춰서서 다시 생각하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사흘 전만 해도 생면부지였던 동 림을 따라 성채까지 밀고 들어온 이들은 딱히 잃을 것 없다는 점에서, 하나로 똘똘 뭉친 것과 다름없었다. 더구나 그만한 머릿수로도 노로냐 총독이 올라가 있는 성탑 쪽을 에워싸기엔 충분했다.
“총독!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시오!”
“성탑 위에 올라갈 때는 마음대로였겠지만, 내려오는 건 맘대로 못할 게요!”
기독교인이든 무슬림이든, 포르투갈 국왕의 임명을 받았으며 고아의 부왕(副王, Vice-rei) 바로 아랫사람인 말라카의 총독을 향해 이렇게 막말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 군중의 머릿수를 믿으며, 또 지난 사흘간 멋대로 언동을 했음에도 아무런 처제재도 받지 않았던 동양인 ‘동 림’의 위세를 믿으며, 다들 방자하게 외쳤다.
“하하! 싫으면 거기서 굶어 죽으시오!”
“요새 풍채가 제법 후덕해지셨던데, 경건한 마음으로 금식이나 하시면 되겠구려!”
실제로는 성탑에서 그 옆의 벽으로 가는 통로가 있으므로, 빠져나가려면 언제든 빠져나갈 수는 있을 터였다.
그러나 이 초유의 사태에 기껏 성채의 마당에 모인 장교와 병사들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르는 지경이었으니, 모든 일의 책임을 고스란히 져야 할 총독은 어떻겠는가. 저 성탑에서야 빠져나갈 수 있어도, 목전에 닥친 지금의 사태에서는 빠져나갈 수 없을 터였다.
꺽정이 패거리와 함께 가장 먼저 산티아고의 문을 뚫고 들어온 이들은 제멋대로 난동을 벌이고, 성채의 군사들은 진압하기는커녕 그저 쩔쩔매고 있는 것을 보자, 산티아고의 문을 지나지 못하고 안쪽을 슬금슬금 바라보던 이들도 그제야 ‘이때로다’ 하면서 뒤이어 들어왔다.
사정 모르는 성채 안쪽 사람들 보기에는, 폭도의 수가 계속 늘어나는 것으로만 보였기에 더욱 답답하고 황망스러운 일이었다.
“자, 그러면 내가 가서 담판을 짓고 오겠소! 여러분은 여기서 계속 악들 쓰고 계시오!”
이만하면 되었다 싶자, 꺽정이가 핀투 어깨를 잡아끌며 군중에게 외쳤다.
그러고서는 군중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만 보고 있던 병사들에게 수고 많다고 한 마디 해주고서는 곧장 성탑 문 안에 들었다.
“중원 천자 이름 파는 것이 이리 효험 좋을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북경 갈 때 인삼이라도 좀 진상할 것 그랬소.”
마주치는 군사들마다, 그들을 가로막기는커녕 그저 눈길 피할 뿐이었다.
총독이야 여차하면 여기서 배 타고 고아로 달아나면 그만이겠지만, 이곳 성채의 군사 대부분은 트란케이라 구역에 저들의 가족이 있었다. 만에 하나 오늘의 이 소란이 피 흘리는 쪽으로 끝난다면, 그들의 가족이 무사하리라는 보장도 없었던 것이다.
“그 영약이라는 인삼은 우선 저부터 먹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가는 데마다 사고를 치실 줄 알았더라면, 뱃값을 더 올려받을 걸 그랬습니다.”
핀투가 푸념 섞어 투덜댔다.
“아니, 나를 하루이틀 본 것도 아니고, 그걸 아직도 몰랐소? 하기야, 안목이 그 정도니까 그렇게 빚더미에 올랐겠지.”
“에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들을 내버려두고 이렇게 혼자 움직이셔도 괜찮겠습니까? 그사이에 저쪽에 정신 차리는 장교가 하나라도 있어서, 창칼로 군중을 흩어버리려 한다면 말 그대로 적진에 고립되는 셈인데요.”
“탁오와 도키치로 녀석이 함께 있으니 걱정할 것 없소. 그리고 내 겪어본바 저만큼 흥을 띄웠으면 스스로 지쳐 나가떨어지기 전까지는 모임 파할 리 없더이다.”
이미 의민당 시절, 부민고소 금법 폐하고자 상경할 때 실컷 겪어본 바 있었다. 애초에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이러한 계책도 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열 사람이 모이면, 개중에는 지닌바 욕심에 비해 귀 얇은 자가 하나쯤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 자들은 욕심만 슬슬 긁어주면, 바깥에서 시끄럽게 외치는 말이 곧 저의 생각인 줄로 알고 무작정 따르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따르는 무리가 늘어나면, 사리 어두운 자들이 뭔가 좋은 일이겠거려니 하면서 부화뇌동 하기 마련.
그러니 처음에 누구를 중심으로, 또 무엇을 내세울지만 잘 고르면 그 뒤의 일은 눈덩이 굴리는 것처럼 스스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만약 어제나 그제, 내가 연단 위에서 소란 피우는 것을 막 시작했을 무렵에 총독 나리나 그 아래의 아전이 하나쯤 나와서 나를 막으려 했더라면, 이렇게 수월하게 일이 풀리지는 못했을 게요. 그러나 그런 움직임은 없었고, 그저 모자란 향임 몇몇이 왔다가 욕만 보고 갔지.
그러니 다들 우리네에게 뭔가 그럴듯한 위세가 있다고 믿게 된 것이고, 그리 되면 정말로 위세가 생기는 것이오. 누구 하나 작정하고 주먹이나 날붙이 따위를 꺼내서는 그 위세를 깨뜨린다면 모를까, 그전까지는 쉽사리 흩어지진 않을 테요.”
어쨌든 이런 쪽, 그러니까 무식하고 욕심 많은 작자들 모아다가 억지 부리는 일에 있어서는 조선은 물론이요 어쩌면 작금 천하 전체에서 꺽정이만큼 뛰어난 인재가 없을 것이었다. 그렇게 사정 밝은 사람이 단언하니, 핀투 또한 쓸데없는 걱정 대신 쓸모있는 걱정에 집중하기로 하였다.
“다 계획이 있어서 이렇게 하시는 건 저도 알겠습니다. 그래도 신성모독은 그만 좀 하십시오. 옮기는 사람만 고역이란 말입니다.”
이번에는 제법 진심으로 투덜대는 핀투였다.
포르투갈 뱃사람이라면, 왕관에는 말로만 충성할지언정 신을 믿는 마음은 가지기 마련이었다. 물론 그 믿음조차 대개는 이익 앞에서 이리 비틀리고 저리 뒤틀리곤 했지만, 그래도 그 누구도 자신의 신앙을 대놓고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저의 이익을 위하여, 자칫 조국 포르투갈의 앞날에 큰 재액을 몰고 올 단초 될지도 모르는 항해에 나선 핀투였지만, 이렇게 대놓고 신앙과 교회의 일에 나서는 것은 영 내키지 않았다. 꺽정이 말마따나 모르고 나선 일은 아니었지만, 막상 눈앞에 닥치니 또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던 것이다.
“아니, 내가 뭔 모독을 했다고? 나만큼 그 천주도(天主道)에 도움 준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하시오. 반면 임자는 히라도에서...”
“알겠습니다. 알겠다고요.”
잊을 만하면 핀투의 약점인 옛 행적을 꼬집으니, 무어라 더 할 수도 없고 그저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사이 계단이 끝나고 복도가 나왔다. 복도 끝의 작은 방, 바깥의 소란이 고스란히 들려오는 곳에 노로냐 총독이 앉아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오?”
혈색이 창백해진 노로냐가, 나름대로 기를 끌어모아 따져 물었다.
“이것이 동양에서 그토록 중시하는 예의요? 환대를 폭동으로 갚는 것이?”
“그러면 마음대로 말 바꾸는 것은 포르투갈의 예의요? 내가 분명히 말하지 않았소? 알라우딘 어르신 모셔오자고 다른 이들 설득하러 다니겠다고. 그때는 나를 막기는커녕 오히려 감사하다 하지 않았던가?”
한쪽은 부들부들 떨고 한쪽은 뻔뻔하기 이를 데 없으니, 누가 보면 잘못은 노로냐가 하였다 여길 법하였다.
(꺽정이를 저의 도시에 맞이한 다음 가만히 내버려둔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기는 했다.)
“그리고 폭동이라니. 어디까지나 성의와 충심 가득한 백성들이 건의하러 온 것 아니겠소? 바깥에서 외치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시오. 그대 나라 임금님 욕하거나 하는 목소리는 한 가닥도 들리지 않소이다.”
대신 알라우딘 샤의 이름 외치는 소리는 꾸준히 들려왔다. 사바와 일레르에서 모여든 자들이 섞여있다 보니, 기독교인들도 멋모르고 옆사람 따라 이교도 술탄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는 판이었다.
여전히 이교도에 술탄이라 하면 께름칙하긴 했지만,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 이름 외친다면 나름대로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더구나 앞서 동 림이 말하기를, 그들의 주군으로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 일하는 일꾼으로서 - 잘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 그들의 삶 돕기 위해 올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물론 그런 사정 모르는 노로냐로서는, 그저 눈앞의 동양 거인이 무슨 사술(邪術)을 부려 무지몽매한 자들을 현혹한 것은 아닌가 의심될 뿐이었다.
“개종하지 않은 이교도에게 공직을, 그것도 이곳 말라카처럼 중요한 곳의 공직을 줄 수는 없소. 멀쩡히 총독직이 있거늘 그 위에 시장 자리를 만든다는 것도 불가한 일이오.”
그러나 눈앞의 꺽정이와 성탑 아래의 폭도들이 부리는 억지 앞에서는, ‘불가하다’하는 말도 힘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당당히 아니 된다 단언하는 것을 보니, 저기 바깥에 모인 잡것들을 달랠 방책이 따로 있는 모양이오? 뭐,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알라우딘 어르신한테 가서 말라카 부사 노릇은 글렀으니 대신 천주교인들을 백성으로 받으라 하면 그만이오.”
노로냐가 무어라 항변하려 입을 열었다. 그러나 말문은 끝내 열리지 못한 채, 꺽정이에게 바로 반박당하고야 말았다.
“누가 그 어르신 아래에 제 발로 걸어들어가겠느냐고? 걱정 마쇼. 가을철 등불에 부나방 모여들듯 은자의 불빛에는 뜨내기들 모여들기 마련이니까.
우리네가 일 하나 벌린다 하면 제발 저들 은 가져가 달라며 줄 설 사람이 우리 조선에만 한가득인 데다가, 중국 강남의 돈깨나 만진다 하는 신사들도 비슷하다오.
그렇게 넘쳐나는 은을 계속 불리려면, 어딘가에 더 밑천을 대고 장사의 살집을 불려나가는 수밖에 없지. 말라카가 우리네 밑천, 요새는 자본이라고 하던가, 좌우지간 그것을 받기 싫다면야, 다른 데 알아보면 그만이오. 조호르 강어귀에도 포구로 삼기 괜찮아 보이는 곳이 여럿 있던데.”
조호르에서 이곳 말라카로 오는 길에, 조호르 강어귀에서 거의 폐허만 남은 작은 어촌 하나를 본 바 있었다. 조호르 라마에서 납치하다시피 데려온 술탄의 신하 하나가 말하기를, ‘사자의 성(Singapura, 싱가포르)’이 있던 곳이라 했다.
알부케르크가 일대를 정복하던 무렵부터 포르투갈 당국도 그 섬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꺽정이의 허장성세에 가뜩이나 창백해졌던 노로냐 총독은 더욱 기가 죽었다.
결국 노로냐 총독은, 국왕의 신하로서의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정부의 관료로서 아주 간단하게 떠올릴 수 있는 대책을 택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좋소. 동 림 그대와 저 폭도들의 요구를 수용하리다. 이교도 술탄이 우리의 왕관에 충성을 서약한다면, 그가 이곳 말라카에 돌아와 공직을 맡는 것을 허용토록 하겠소.”
“생각 잘 하셨소.”
“단, 조건이 있소. 그대가 말한 것이 과연 이치에 맞는지, 그가 개종하지 않고 우리 기독교인들을 위한 공직을 맡는 것이 과연 가한 일인지는 더 따져보아야 할 터인즉...”
“아, 남에게 떠넘기겠다는 뜻이구려. 그 정도야 뭐.”
떠넘기는 사람 민망하게도 그 본의를 금방 파악하는 꺽정이었다.
“거 보시오. 사람 생리는 어디 가든 다 똑같지 않소. 나리나 우리네 조선국 관헌이나 별로 다를 것도 없군그래. 아예 믿는 바가 뿌리부터 다른 우리도 그럴진대, 별로 다를 것도 없는 천주교랑 청진교는 더더욱 사이좋게 지내야 하지 않겠소?”
끝끝내 핀투가 저의 입 꼬매고 싶게 만드는 꺽정이였다.
“자, 그러면 이제 지금 하신 말씀을 한 번 더 해보시오.”
“요구를 수용하겠다 하였소이다...”
“아니, 여기서 말고. 저기 밖에 나가서.”
꺽정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총독의 어깨를 붙잡았다.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알아본 주변의 군사들이 급히 칼을 뽑았으나, 이미 늦어 있었다.
“이, 이보시오! 지금 무엇을...”
“기력이 많이 쇠하신 것 같던데, 내가 도와드리겠소.”
“아, 아니, 되었소! 되었어! 내 발로 걷겠소!”
“들었지? 다들 그 칼 집어넣어라. 네놈들 사또께서 놀라시겠다.”
한참 눈치를 보던 군사들은 끝내 칼집에 도로 칼을 집어넣었다. 그러든 말든 꺽정이는 성탑 아래쪽이 아주 잘 보이는 쪽으로 노로냐를 끌고 나갔다.
“와아! 동 림! 동 림이시다!”
사흘 전, 꺽정이네 연단 앞에 가장 먼저 모였던 시정잡배들이, 저 분과 가장 먼저 연 맺은 것은 자신들임을 자랑하듯 외쳤다.
“들으시오들! 여기 총독 나리께서 우리네 요구를 받아들이시겠노라 공언하셨소! 자, 그거 해 보시오, 그거.”
“흠흠, 본관은... 이교도 술탄 알라우딘이 우리 말라카로 돌아와 공직 맡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 바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노로냐가 말했는데 - 저의 어깨에서 떨어지지 않는 묵직한 팔이, 저를 성벽 바깥으로 밀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던 것이다 - 하필 군중들도 누가 시킨 것처럼 갑자기 입을 다물었으므로 그 목소리가 그대로 아래에 닿았다.
그리고 몇 초쯤 지난 뒤, 곧 환호가 울려퍼졌다.
“아하하하! 우리가 이겼다!”
“실제로 저렇게 말했으니, 아무리 뻔뻔한 우리네 총독이시라지만 거스를 리 있겠는가?”
반대하지 않는 것과 찬성하는 것 사이에는 제법 거리가 있었지만, 보통 사람들 머릿속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또한 시장이 아니라 그저 ‘공직’이라고만 에둘러 표현하였을 뿐이지만, 이 또한 대개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리하여 판단의 몫은 산타 루치아 주교에게 넘어갔다. 그에게는 며칠 사이에 한탄스러운 일이 두 가지나 생긴 셈이었다.
그중 하나는, 동 림의 배가 부두에 닿자마자 그에게 전해진 하비에르 신부의 서간이었다. 애초에 지난 사흘 동안 바깥이 온통 시끄러웠음에도 주교가 이를 알지 못한 것도 그 서간 때문이었다.
서간의 내용은 대략 이러하였다.
‘... 에우로파에서 루터와 그 추종자들을 몰아내기 위한 세속의 노력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들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 프란치스코는 한 가지 깨달음을 우연히 얻게 되었습니다.
이단과 이교도에게 필요한 것은, 십자군의 칼과 정화의 불길이 아닙니다. 그들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은 오로지 우리 안에서 나와야 할 것이며, 그 힘의 이름은 관용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에는 강요가 있을 수 없으며, 오로지 스스로 말미암은 믿음만이 참된 믿음의 이름에 값하기 때문입니다.
돈 림은 이러한 저의 생각을 담은 글을 로마에 전해달라는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바라건대 주교님께서도 아직 빛을 알지 못하는 이에게 베풀 수 있는 최대의 호의로써 그를 맞이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비에르는 동쪽으로 향하는 길에 이곳 말라카에 제법 오래 체류하였기에, 산타 루치아 역시 그와 여러모로 깊은 교류를 나눈 바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신실함과 선교에 대한 열정에도 감탄한 바 있었다.
그런 이가 이렇게, 스스로 가시밭길을 향해 걸어들어가고 있었다.
이제 막 싹트는 동방선교다. 동쪽으로부터의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산타 루치아도 자신의 일인 것처럼 기뻐해 왔다.
그런데 그 동방선교를 이끄는 이가, 이처럼 거대한 논쟁을 스스로 일으키게 된다면 어찌 될 것인가. 하비에르 한 사람, 그리고 믿음 전체를 위하여 어찌해야 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던 산타 루치아였다.
‘추신: 다만 우리 모두의 평화를 위하여 충고드립니다. 돈 림에게 선교를 시도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돈 림의 아버지가 그에게 ‘우환(걱정)’이라는 이름을 붙인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더 큰 골칫거리가 그의 앞에 던져져, 주교의 성정을 시험에 들게 하고 있었다. 어찌하여 하비에르가 동 림에 대해 그토록 호의적으로 글을 쓰면서도 정작 그에게 선교는 하지 말라 하였는지 알 만하였다.
이틀 전, 동 림이 앞장서서 이끈 폭도들이 말라카 성채 안쪽까지 밀고 들어가, 이교도 술탄이 말라카로 돌아오는 것에 대해 확답을 쥐어짜냈다고 들었다. 그리고 총독은 염치없게도 판단의 부담을 교회로 넘겼다.
그리고 그 뒤로 모두가 주교인 산타 루치아 자신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교도 술탄이 말라카의 공직 맡을 수 없노라 답한다면, 총독까지 굴복시켰다며 의기양양해하고 있는 폭도들의 화살이 그대로 주교 본인에게 날아오게 될 터였다.
총독에게는 언제든 몸을 숨길 수 있는 요새가 있었으나 - 물론 근래의 사건을 감안하면 그 신뢰성에 다소간 의심이 갈 수밖에 없었지만 - 산타루치아 주교 아래에는 요새 안쪽부터 멀리 사바 구역까지 고루 세워진 교회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여론을 거스르는 일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어찌해야 하는가. 한참을 고민하던 주교의 발길이, 저도 모르게 주교좌 본당인 수태고지 성당(Igreja de Nossa Senhora da Anunciada)에 닿았다.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낯익은 얼굴과 마주쳤다.
“이제 막 지나가는 불목하니라도 붙잡아서 주지스님 불러오라 하려고 했는데, 그러기도 전에 용케도 찾아오셨소. 역시 신통하신 고승은 다르시구려.”
동 ‘우환’ 림이 웃으며 그를 맞이하였다. 그 옆에는 평범한 옷을 입은 현지인 노인이 산타 루치아 주교 본인만큼이나 떨떠름한 표정을 한 채 서 있었다.
“여기 이분이 요새 소문 뜨르르하신 조호르의 술탄 되신다오. 소란 피하고자 이런 복식을 입으시라 청했소. ”
이교도 술탄과 대체 무어라 불러야 할지 아리송하지만 일단 신도는 아닌 동양인 거한이, 교회로 찾아와 주교를 만났다.
“아무래도 이교도 임금 본인을 직접 마주보고 이야기하는 쪽이 더 좋을 것 같아서, 여기 어르신께서 소식 듣고 찾아오실 때까지 좀 기다렸소.
자, 그러면 이제 얘기 해 보십시다. 여기 어르신께서 이 동네 사또 노릇하는 것이 문제가 되겠소, 되지 않겠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동 림.”
“내 몇 번 말한 것처럼, 여기 임금님이 포르투갈 임금께 칭신(稱臣)하며, 백성들 위해 수령 노릇만 하는 것이오. 믿음이고 뭣이고 이것과는 하등 관련이 없소이다.”
“주교님, 정말 죄송합니다. 지금 옮기는 말에 대해서는 꼭 제가 나중에 고해를 하며 뉘우치도록 하겠습니다.”
핀투 선장이 한 마디 앞에 붙이고서는, 꺽정이 말을 옮겼다.
“다른 나라들도 다 그렇게 합디다. 우리 조선국만 해도, 선비들이 절간에 다니든 말든 너무 심하지만 않으면 벼슬길 나갈 때 하등 문제 삼는 사람이 없소.
또 대국 천자께서는 신선 되겠다며 도사들을 가까이 하시는데, 그렇다고 해서 조정의 벼슬하는 사람들이 죄다 도사 노릇을 하냐 하면 그것도 아니오. 천하 사람들의 상정(常情)이 이러하여 남이 뭘 믿든 그저 남의 사정으로만 치고 넘어가는데, 유별나게도 어르신네 에우로파 사람들이랑, 여기 이 청진교 믿는 사람들만 이 난리라오.
좀 크게 보시오. 크게. 넓고 넓은 하늘 아래에 어르신네들 두 갈래 믿음은 형제와 같은데, 형제끼리 사이좋게 지내야지, 오히려 밥그릇 싸움에만 열중하며 잡아먹으려고만 하니 이 무슨 일이오? 그러니까 잘 나가던 이 포구도 나날이 쇠락하여 이 꼴이 난 것 아니오?”
졸지에 사이좋게 소인배가 되어버린 주님의 종과 복종하는 사람(무슬림)이었다.
“내 생각에는 이렇소. 두 믿음 중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오로지 공정하게 모두를 위하여 일하겠노라. 이렇게 임금님께서 읍내 한가운데서 서약을 하시는 게요. 그리하면 임금님을 위해 나섰던 모든 사람들이 다들 안심하고 또 믿고 따르지 않겠소?”
산타 루치아 주교가 어떻게 하면 저 완고한 작자의 머릿속에 그 제안의 불가함을 밀어넣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도시의 시장으로 이교도를 세우는 것은 우리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적어도 고아 부왕령의 다른 훌륭한 성직자들의 논의를 거쳐야만, 비로소 옳은 방식으로 술탄을 이 도시에 모실 수 있을 듯합니다.
다만 폭도, 아니, 말라카의 사람들이 주장한 것처럼, 분명 말라카 일대에 비기독교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으며, 그들의 뜻이 시의회에 전해지도록 할 필요도 분명히 있습니다. 우선은 술탄께서 충성을 맹세하신 다음, 시의히의 한 의원으로서 말라카에 머무시는 것이 어떠할지요.
그 뒤에 고아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온다면, 술탄께서 다시 한 번 시의회의 의결을 통해 시장으로 선출되실 것입니다.”
주교 나름대로 생각한 중재안이었다. 맨 마지막 단락은, 주교의 급조한 계획대로라면 실제로 이루어질 일은 없을 터. 아마 시의회의 의석 하나를 보장받고, 술탄은 자신의 대리인을 보내는 정도로 타협하게 될 것이다.
“어찌 보시오?”
술탄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하는 바요.”
“그렇다 하시는군. 그러면 나는 합의된 것으로 알고 있겠소. 총독 어르신께선 내 낯을 다시 보았다간 경기 일으킬지도 모르니, 주지스님께서 잘 말씀해주시오.”
그렇게 짤막한 회담이 끝났다.
“쉽게 풀렸소. 저렇게 순순히 승낙할 줄은 몰랐는데.”
“반드시 저의가 있을 것일세. 나로서는, 내 아버지의 도성에 이렇게 들어와, 이제는 알아볼 수 없게 바뀐 거리를 자유롭게 거니는 것만으로도 감개무량한 일이지만.”
“저기서 스님께 말씀드린 것, 어르신께도 마찬가지요. 어르신이 무얼 믿든 상관은 안 하지만, 그것 때문에 다른 백성들 괴롭히면 피차 곤란해질 테요.”
“하, 자네는 세상을 너무 쉽게 보는 듯하군. 주교가 단서를 붙이지 않았는가. 고아의 다른 크리스텐 이맘들의 동의를 받아야 할 것이라고. 보나마나 자네가 떠난 다음, 갖은 핑계를 다 대며 합의를 무르려 할 것일세.
그렇게 별 영향력 없는 자리 하나만 보장받고, 나도 그런 자리에 어울릴 수 없으니 내 대리인 하나를 보내든, 아니면 이곳의 벤다하라를 무슬림 가운데서 새로 뽑아 그를 대리인으로 내세우든 할 것이야.”
술탄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 뒤에는, 누가 먼저 배신하느냐의 싸움이겠지. 나의 대리인이 첩자로서 그 임무를 완수하여 성문을 열든, 아니면 그것을 핑계삼아 저들이 먼저 조호르를 치든.”
어느새 두 사람은 저자로 나섰다. 술탄 곁을 지키는 경호원 몇몇과, 꺽정이 곁을 지키는 흑의군 몇몇이 뒤에 따라붙었다.
“틀린 말은 아니오. 나야, 직접 고아까지 가서 임금님을 사또로 삼아도 된다고 허락을 받아올 심산이긴 한데, 세상 일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니 아직 확답은 못 하지.
여하간 이 도시를 차지할 생각이시라면, 알아서 잘 해보시오. 허나 내 생각에는 굳이 피를 흘릴 필요도 없을 듯하오.”
“무어라?”
“이건 내가 직접 한 생각은 아니고, 나보다 똑똑한 사람들이 내게 해준 말이라오.
들어보시오. 임금님이 이곳에서 한 자리 하시게 되면, 한동안 임금님네 조호르랑 이곳 말라카 둘이 서로 싸울 일은 없겠지. 그리고 이제 막 바다로 나온 대국 장사치들도, 내가 여기서 한바탕 소란 일으킨 소식 들으면 다들 이쪽으로 올 테요. 내 아랫사람들이 거느린 사람들도 몇 년 안에 이곳까지 오게 될 것이고. 이래 봬도 내가 동쪽에선 이름깨나 날리는 사람이라오.
나는 여기서, 알라우딘 어르신께서 말라카로 돌아오시면 곧 도시가 흥하게 된다고 열심히 떠들었소. 그러면 자연히 민심이 임금님께 오게 되겠지.
아시겠소? 임금님께서 어지간히 헛짓거리만 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될 테요. 민심을 얻어 추대를 받으시오. 그리하면 우리 당은 임금님네 도시를 더욱 흥하게 만들어드리겠소. 물론 그 대신 우리네 편의는 조금 봐주셔야 하겠지만.”
알라우딘 샤의 상상을 뛰어넘는 이야기였다. 그런 말이 연이어 들려오니, 나름 노회하다 자부하던 술탄의 발은 절로 멈췄다.
“‘편의’라.”
“결국 청진교도와 천주교도를 묶는 것은 재물 하나 아니겠소. 그 재물 들어오는 것을 우리가 도와주겠다 이 말이오. 그리고 도와주는 만큼 임금님께서도 우리를 도와주셔야 할 것이고.”
“싫다고 하면 어찌 되는가?”
“임금 노릇하는 사람이 이 일대에 어디 어르신 한 분뿐이오?”
임꺽정은 호탕히 웃으며 술탄에게 하직을 고했다. 그러나 늙은 술탄의 눈은 그 거대한 등에서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늙은 술탄은 조상 대대로 도읍으로 삼아왔던 말라카에 돌아오게 되었다.
트란케이라 구역 한가운데에 서서 쿠란과 성경 앞에 맹세하기를, 오로지 말라카 사람들을 위하여 사심 없이 봉직하겠노라 하였으니, 그 맹세의 의미 모르는 늙은 말라카 노인들은 그저 눈시울 적시고, 술탄의 ‘공신’ 자처하는 무뢰배들은 환호하고, 약삭빠른 상인들은 벌써부터 손익을 계산하였다.
그가 이렇게 정식으로 자신의 귀환을 떳떳하게 밝힐 수 있게끔 ‘도와준’ - 그것이 정녕 도움인지, 술탄은 끝내 확신하지 못했다 - 이방인들은, 그로부터 며칠 전 항해에 필요한 물자를 모두 보충하고 미련없이 떠났다.
그 이방인들의 우두머리 임꺽정은, 그들보다 앞서 빠른 배 한 척이 산타 루치아 주교의 서한을 싣고 말라카에서 고아로 떠났음을 알지 못하였다.
그리고 하비에르의 동방선교가 성공하는 바람에, 차일피일 미뤄지던 고아 이단심문소(Goa Inquisition)의 설치가 몇 년은 앞당겨졌다는 것도 알지 못하였다.
당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이단심문을 예상하지는 못하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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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부터 17세기 초까지 이어졌던 포르투갈령 말라카와 고토회복을 노리는 조호르 술탄국, 그리고 신흥세력이었던 아체 술탄국 사이의 쟁패는, 결국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의 등장으로 허무한 결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미 조호르와 아체의 공격을 여러 차례 성공적으로 막아낸 바 있던 포르투갈령 말라카였지만, 현지 세력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자본력을 바탕으로 꾸준한 공격을 이어가는 VOC를 이겨낼 수는 없었고, 결국 1641년 말라카는 VOC와 조호르·아체 연합군에게 함락당합니다. 이미 1606년부터 VOC와 조호르는 동맹관계에 있었고, VOC는 조호르에 대한 불가침을 조건으로 말라카 시내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받게 됩니다. 그러나 VOC는 이미 자바 섬의 바타비아(現 자카르타)를 향료무역의 거점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말라카의 중요성은 훨씬 떨어질 수밖에 없었지요.
한편, 말라카가 국제 교역항으로 흥성하기 전까지 중요한 무역항으로 기능했던 테마섹(Temasek)은 14세기 무렵에는 ‘싱가푸라’로도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4세기 말 시암 왕국의 공격을 받아 황폐화된 이래 - 이때 도망친 싱가푸라 국왕이 대신 세운 곳이 바로 말라카입니다 - 한동안 재흥하지 못하고 폐허 가운데의 작은 어촌만 남아있게 되었지요.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영국이 싱가포르의 가치에 주목하면서 싱가포르와 그 배후지인 조호르의 역사는 크게 바뀌게 됩니다.
아체 술탄국이 VOC의 견제를 받아 주춤하는 사이, 말라카를 포기한 조호르 술탄국은 VOC와의 동맹을 바탕으로 다시금 역내 패권을 장악하기 시작해, 17세기 후반에는 과거 말라카 술탄국만큼의 부와 영향력을 지닌 채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나날이 강해져 가는 유럽 세력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고, 1819년 싱가포르를 점령한 영국에 의해 사실상 보호국으로 전락 - 1885년에 정식으로 보호국이 됩니다 - 하게 됩니다. 이후 1824년 네덜란드와 영국 사이의 조약으로 말레이 반도와 해협 반대편 수마트라 섬 등지에 걸쳐져 있던 조호르의 영향권은 양분되지요.
그러나 조호르 본토에 남아 있던 왕실은 명맥을 이어갔고, 훗날 말라야 연방이 출범할 때 그 구성국중 하나로 조호르 술탄국도 참여하게 됩니다. 현재도 거의 명예직에 가깝지만 조호르 왕실은 이어지고 있으며, 1984년부터 1989년 사이에는 술탄 이스칸다르가 (역시 명예직이자 선출직인) 말레이시아 국왕으로 재임한 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