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황금률 (3)
결코 도적에게 허용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딴짓할 수 있는 겨를이다.
도적에게 한 각을 준다면 달아날 길을 구할 것이요, 한 시진을 준다면 남을 해코지할 방편을 마련할 것이며, 한나절을 준다면 아예 남의 집을 제것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을 터.
그런 의미에서, ‘동 림’에게 사십 일이나 되는 시간을 허용한 고아 부왕령 당국과 종교재판소는 처음부터 크나큰 실수를 한 것과 다름없었다.
“잡아라! 타고스 박사를 잡아! 이곳 고아는 우리의 도시다! 한 줌 이방인을 놓칠 수는 없단 말이다!”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저쪽 골목! 골목 입구를 막아라! 그 패거리들이 하늘을 날아다니지는 않을 것 아니냐!”
바레투와 파우상 두 사람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종교재판소 감옥 벽이 무너지면서 도망친 이들이 적지 않다 보니, 개중에서 동 림의 패거리만 붙잡는 것도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저기 있습니다!”
“어디?”
“위! 지붕 위를 보십시오!”
저쪽 멀리, 지붕 사이로 뛰어다니는 일군의 사람들이 보였다. 개중에는 익숙한 거인의 인영도 있었다.
“맙소사...”
한 달 넘는 기간 동안, 종교재판소 앞 광장과 그 주변 골목에는, 알게 모르게 나무 궤짝들이 쌓이고 있었다.
부두만 나가면 널린 것이 궤짝이요, 개중 상태 좋지 않은 것은 다들 누가 땔감으로나 쓰라며 버리곤 했으므로, 고아 사람들은 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헌데 딱 보아도 쓰레기에 가까운 그런 궤짝들이, 달아나는 자들에게는 지붕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되고, 지붕 사이를 건너뛰는 발판이 되었다.
“하하! 멀쩡히 나오셨군그래!”
좁은 골목 하나를 껑충 뛰어넘어, 이탁오 있는 지붕 쪽으로 넘어온 꺽정이가 말했다. 뒤따라온 핀투 선장은 다리에 힘 풀려 난간 옆에 걸터앉았다. 한 달 넘게 감옥에 있던 것보다, 잠시나마 꺽정이 등에 업혀 하늘 날아다닌 것이 그의 다리 힘 앗아간 주범이었다.
“헉, 헉! 수산 선생이 쓴다는 도술의 정체가 이것이었습니까?”
잠시 숨 고르며 이지가 대꾸했다. 말로만 ‘이쪽으로 도망치면 된다’ 들었을 때와, 실제로 지붕 위 뛰어다닐 때는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뭐, 얼추 그렇소.”
“임 당수, 상 투메 호는...”
핀투 선장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감옥에서 임자가 준비해달라 한 것은 모두 준비하라 시켜두었으니 걱정 마쇼. 배 앞에 지키고 있는 놈들이야, 내가 처리하면 그만이고.”
승객 대부분이 내린 상 투메 호였지만, 레가스피를 감시하고 또 만에 하나 배에 엉뚱한 짓 하려는 놈 나올 것에 대비하여 선원들은 돌아가며 저들의 배를 지키곤 하였다.
그리고 사흘 전에 배에 오른 녀석들에게 출항 준비해둘 것을 지시했으니, 해적질로 잔뼈 굵은 녀석들은 지금쯤 알아서 열심히들 지을 매듭은 짓고 풀 매듭은 풀고 있을 터.
“자, 다들 숨 몇 번 쉰 듯하니, 이제 얼른 도망이나 치십시다.”
뒤늦게 멀찍이서 함성이 들려왔다. 꺽정이는 핀투의 팔을 잡아끌며 뒤따라오는 흑의군 녀석들 향해 외쳤다.
“야! 이놈들아! 바짝 따라와라! 중간에 뒤떨어지는 놈은 놓고 간다!”
“찹쌀떡마냥 착 붙어서 따라갈 테니 염려 마십쇼!”
그렇게 껑충껑충 뛰어다니다 보니 어느새 사람 소리 가운데 파도 소리도 점점이 들려왔다.
“배 앞을 지키는 놈들은 내게 맡기시오, 흐흐.”
나하 해변에서 에스파냐 군사들과 한바탕 싸움박질한 것이 이럴 때에 대비한 것이었다. 눈대중으로 살펴본바, 지금 배 앞을 지키는 자들은 꺽정이 홀로 족히 상대할 만하였다.
그리하여 상 투메 호에 곧 동양인들이 들이닥칠 것이니 그들이 배에 오르지 못하도록 막으라는 전갈 들고 온 전령은 허탕만 치게 되었다.
병사들은 죄다 땅을 껴안은 채 쓰러져 있었고, 개중 유별나게 재수 없는 몇몇은 바다로 떨어져, 겨우 해변으로 헤엄쳐 와서는 바닷물을 게워내고 있었던 것이다.
“허억, 헉! 상 투메 호는, 그놈의 카락은 어디 있느냐?”
한참 늦게 달려온 바레투가, 망연자실해 있는 전령을 발견하고서는 닦달하였다.
지금 저 멀리 나아가고 있는 배가 상 투메가 아니라는 답이 나오기를 간절히 바랐건만, 현실은 매정하였다.
뒤늦게 달려온 파우상이 바레투를 찾았다.
“종교재판소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감옥의 벽 일부가 무너지고 몇몇 죄수와 간수가 가볍게 다쳤을 뿐입니다.”
핀투와 함께 탈출하려던 이교도 몇몇이 체포에 불응하다가 죽임을 당했지만, 그들이 달아났다는 사실은 곧 죄의 증거와 같았으므로 누구도 이를 문제삼지 않았다.
“그보다, 이제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바레투가 파우상을 다소간 원망스레 바라보며 물었다. 애초에 말라카의 산타 루치아 주교가 낸 꾀를 이쪽 고아의 종교재판소가 실행에 옮기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고아 당국까지 휘말려 망신당할 일은 없었을 것이었다.
“저들이 어디로 도망쳤을 것이라 보십니까?”
“동쪽으로 갔겠지요. 말라카 쪽으로 말입니다.”
에우로파에서 시나 쪽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도 근해를 지나야 했다. 그리고 이곳 바다는 모두 고아 부왕령의 것과 다름없었다.
저들도 이를 모르지 않을 것이므로, 말라카에 소식이 닿기 전 그곳을 지나, 시나 쪽으로 돌아간다는 심산일 테다.
“이토록 무도한 일을 저지른 자들입니다, 다른 쪽으로 도망쳤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다시 한 번 인내하며 바레투가 답했다.
“우리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상 투메 호에 실렸을 물과 식량은 희망봉을 돌아 리스본까지 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반드시 상 세바스티앙이나 그 이전의 모가디슈, 몸바사 등지에 들려서 식량을 보충하는 수밖에 없겠지요.”
자그마치 종교재판소가, 그것도 전례 없는 방법으로 이교도들에게 공격을 당했다. 책임의 소재와는 별개로, 부왕령 쪽에서는 어떻게든 최선을 다했다고 변명할 만한 구석을 만들어두어야 했다.
“우선은 그쪽에도 연락을 취해두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러나 상 투메 호는 닻을 올리고 돛을 펴기 무섭게 서남쪽으로 향하여, 항로를 거의 바꾸지 않은 채 앞으로만 나아가고 있었다. 상 세바스티앙이든 어디든, 상 투메 호라는 배가 나타나면 나포하라는 부왕령의 지시 또는 협조 요청이 소득 거두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보다, 이번 일의 뒷수습은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뒷수습이라... 해야지요. 해야 할 테지만...”
종교재판소의 모든 이들은 파우상과 비슷한 심정이었다.
해야 할 뒷수습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간 미뤄놓은 소소한 일들뿐 아니라, 이 난리의 발단이 된 조호르 술탄의 공직 임명 문제에 대해서도 확답을 내리는 문제도 남아 있었다.
동 림이 동방선교와 시나 황제를 운운하며 협박한 것이 거짓이기만을 바라면서, 이교도에게 어떤 공직도 불허하는 원칙을 관철할 것이냐, 아니면 가뜩이나 중상을 입은 종교재판소의 권위를 스스로 깎으면서 예외를 인정하느냐.
그러나 이미 다들 마음이 한껏 흔들려 있었으므로, 그러한 일들을 처결할 여력이 도저히 나지 않았다.
고아의 수많은 성직자들은, 끝내 광장에서 그들에게 도전한 학자 한 사람을 꺾지 못하였다.
그들의 믿는 바가 참임을, 절대적인 진리임을 설득시키려 하였다. 이성과 윤리로써 신앙을 도출해내려 하였다. 지금까지 그러한 일은 성공에 성공만을 거듭해 왔으므로, 이번에도 성공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실패했다.
물론 굳이 둘러댄다면, 이교도 박사 타고스가, 자신이 이기지 못할 것을 깨닫고 비겁하게 도망쳤다고 말할 수도 있을 테다.
하지만 이단심문관들, 그리고 그들을 도와 논쟁에 참여한 성직자들 모두 그것이 참이 아님을 마음속으로 알았다. 그리고 그들의 논쟁을 구경하였던 고아의 모든 속세 사람들도, 겉으로는 그 말에 고개 끄덕일지언정 교회의 귀가 없는 곳에서는 다른 말을 할 터였다.
만약 그들이, 부왕령의 군사도, 종교재판소도 없는 곳에서, 양쪽 모두에게 낯선 도시에서 만나 끝까지 토론을 벌였다면, 결국 타고스가 내세우는 회의(懷疑)의 장벽을 그 누구도 넘지 못했을 것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만에 하나, 타고스의 말에 일리가 있다면. 그들이 지금껏 진리라 여겨 왔던 것이 사실은 그저 총과 칼, 갑주가 뒤에 있었기에 그 어떤 반론도 직면하지 않았을 뿐이었다면.
오로지 실증할 수 있는 증거만이 올바르고도 절대적인 지식의 근간이며, 그렇지 않은 것은 증거가 될 수 없다고 한다면.
그들의 모든 행동과 판단의 궁극적인 근거요, 가장 믿음직한 잣대요, 가장 단단한 성벽이었던 신앙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무엇이 종교재판소에게 인간사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권위를 줄 수 있겠는가? 아니, 애초에 무엇에 기대어 옳고 그름을 논할 수 있겠는가?
분노 뒤에는 혼란이, 그리고 그 뒤에는 마침내 공포와 허무함이 고개를 내밀었다.
“말라카 문제는... 우선 유보하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지금은 그처럼 논쟁적인 사안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보다는, 놀란 사람들을 다독이고 헛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는데 주력해야 할 것입니다.”
말라카 쪽에 술탄을 내쫓으라 요구했다가, 이방인 하나 설득하지 못하는 종교재판소 말을 왜 따라야 하느냐는 말이 시민들 사이에서 돌기라도 하면 그때는 더욱 곤란해질 터였다. 반면 종기를 터뜨리지 않고 내버려두는 것은, 최선은 아닐지언정 차악 정도는 되었다.
“그렇습니까.”
“재판소 쪽의 입장이 완전히 정리되는 대로, 부왕 각하께 서면으로 건의토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희망봉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배편으로 이번 사안의 전말을 로마에 보고하고, 방침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말라카 문제에 대한 재판소 측의 입장은 그때 다시 정하도록 하지요.”
마지막 희망. 로마에서라면 이 지독하고도 무시무시한 의심을 떨쳐낼 수 있는 현답 내려주리라는 믿음에 의지하며 파우상이 말했다.
태양이 서쪽으로, 상 투메 호가 사라져간 그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아니, 지구가 서에서 동으로 돌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더는 확신할 수 없었다.
저들이 남겨놓고 온 고뇌가 얼마나 지독한지, 알지도 못하고 알 바도 아니었던 꺽정이와 이탁오, 그리고 도키치로는 그저 한가롭게 주변 구경이나 하고 있었다.
“또 뭍이 보입니다. 저기 멀리 아른거리는 것 말입니다”
고아를 떠난 상 투메 호는 아덴 앞바다를 향해, 서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어느새 물결은 잔잔해지고, 간혹 멀찌감치 하얀 모래 번뜩이는 육지가 보이기도 했다.
“그냥 구름 아니냐?”
“뭍 맞는 것 같소이다.”
세 사람이 맞냐 그르냐 두고 슬슬 내기까지 벌이려던 차, 고아에서의 충격에서 조금은 벗어나 있던 핀투 선장이 끼어들어 산통을 깼다.
“육지가 맞을 것입니다. 아덴의 아미르(Amir, 태수)가 관할하는 곳이지요.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면 무슬림들이 ‘통곡의 문(바브 엘 만데브Bab-el-Mandeb)’이라 부르는 작은 해협이 나옵니다. 무슬림뿐 아니라 우리 포르투갈 사람들에게도 통곡할 일이 많았던 곳이지요.”
“통곡할 일이라니, 무슨 소리요?”
“여기서 남쪽 해안을 따라 내륙으로 들어가면, 기독교인들의 나라(에티오피아)가 나옵니다. 부왕령 쪽에서는 그들과 연합하여 무슬림들을 견제하려고 노력해 왔지만... 별 성과는 없었지요. 저도 나설 곳과 빠질 곳을 분간 못하던 초짜 시절에 그런 모험에 잘못 휘말려서, 한동안 고초를 겪었고요.”
포로로 잡혔던 그때, 만약 엉뚱한 쪽에 노예로 팔려갔다면, 오늘의 핀투도 없었을 터였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은 갑자기 불어온 바닷바람 때문만은 아닐 테다.
“그러니 조심하여야 합니다. 이곳 무슬림들은 포르투갈과 여러 차례 다툰 바 있으니까요.”
“조호르 앞바다에서도 그런 소리 하지 않았소?”
“그래도 그쪽 술탄은 말라카에 있는 함대의 위력을 알고 있었지 않습니까. 이쪽의 무슬림들은 그저 저들 우두머리의 강성함만을 믿고 마구 날뛰는 작자들입니다.”
“대체 그대 나라 사람들은 행실이 얼마나 고약하길래, 어디를 가든 그대 나라와 척진 족속들이 널려있는 게요?”
꺽정이가 심드렁하게 물었다. 그러나 핀투라고 어찌 그것을 알겠는가. 그저 세상에 불신자들이 많기 때문이라 여기고 넘어갈 뿐.
그렇다면 이단심문까지 당한 자신은 어느 쪽에 속한다는 말인가? 잠시 핀투답지 않은 진지한 고민을 하려던 차. 돛대 위에서 선원 하나가 소리를 질렀다.
“좌현! 좌현에 다우(Dhow) 출현! 한 척!”
혹시나 하는 마음에, 미리 걸어둔 그 ‘민(民)’ 자 깃발을 다시금 올려다본 핀투가 지시를 내렸다.
“닻을 내려라! 저쪽에서 먼저 우리에게 화살이든 화포든 쏘기 전까지는 우리도 쏘지 않는다! 저쪽에서 접현하게 되면 사다리를 내려주어라!”
“예! 선장!”
저쪽에서도 이쪽이 가만히 검문에 응할 것을 알았는지, 별로 놀라지 않고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꺽정이가 문득 물었다.
“그나저나 ‘타고스’ 선생, 일전에 가오에서 말한 대로 남 대접한 대로 돌려받기 마련이라면, 조만간 우리도 저기 회회인(回回人)들에게 된통 당하는 것 아니오?”
“에이, 우리는 떳떳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떳떳하다고?”
뻔뻔함 하나로 따지면 꺽정이보다 한 수 위인 이탁오였다.
“고아의 종교재판소 사람들은 부처님 진신사리도 불태웠다 합디다. 그렇게 남의 믿음을 모독했으니 저들 절간도 와장창 터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건가?”
“그렇다고 칩시다.”
여유만만한 두 사람과 달리, 여전히 옛날 생각을 떨쳐내지 못하여 불안해하던 핀투 선장이, 조급함을 못 이기고 물었다.
“그, 이제 와서 묻기는 너무 늦었다 싶습니다만... 저들을 어떻게 설득하실 생각이십니까?”
“어떻게 잘 해봐야지. 어차피 희망봉인가 하는 곳 돌아가는 것보다 더 빨리 에우로파에 닿으려면 이 길밖에 없지 않소?”
이탁오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꺽정이 패거리가 암만 우악스럽다지만, 그렇다고 뒷일 생각하지 않고 마구 내지르지는 않았다.
그들이 고아에서 저지른 일이 에우로파에 전해지면, 설령 꺽정이가 천자가 아니라 같은 에우로파 군주의 문장 찍힌 신원증명을 내보인다 한들 어지간해서는 환대를 받지 못할 터였다.
그렇다면 고아의 소식이 로마나 리스본에 닿기 전에 먼저 그쪽에 닿아서, 최대한 꺽정이 패거리에게 유리하게 비틀고 뒤튼 소식을 전해주고, 적당히 아첨 몇 번 한 다음 용서를 받아버리면 그만일 테다.
이것만 해도 멀쩡한 사람이 들으면 환장할 만한 발상이었지만, 꺽정이와 이탁오 머릿속에서는 제법 그럴듯한 계책이었다.
“여기 이 ‘타고스 박사’를 믿으시오. 이 사람은 다 계획이 있다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 거친 무슬림들이 고작 동양 사람 몇 명 타고 있다고 갑자기 우리를 도와줄 리 없지 않습니까?”
“저들 회회 놈들이 천주교도들과 원수를 졌다고 하지 않았소? 자고로 사람은 저의 벗 도와주는 것은 망설여도 저의 원수 골탕 먹이는 일에는 만사 제쳐두고 나서기 마련이라오.”
그때 배 옆구리에서 어설픈 포르투갈 말이 들려왔다. 용케 알아들은 선원이 핀투에게 말했다.
“선장, 놈들이 사다리 내려달랍니다!”
짤막하게 기도 올린 핀투가, 이 악물고 외쳤다.
“내려주어라!”
곧 기이한 천조각으로 머리 두르고 치렁치렁한 옷 차려입은 사내 여럿이 갑판 위에 올랐다. 저들이 바로 포르투갈 사람들이라면 죄다 이를 가는 악독한 아랍인들일 테다.
“저들이 회회인들 맞소? 어째 포르투갈 사람들이랑 똑같이 생긴 것 같은데.”
“오, 당수 말씀대로입니다. 좀 까무잡잡한 것 빼면 코 크고 눈 푹 들어간 것이 쏙 닮았는걸요.”
“거 봐. 역시 천주교든 청진교든 다 같은 부류라니까.”
불안과 긴장으로 타들어가는 핀투와 선원들 속 모르는 세 사람이 저들끼리 희희덕대었다.
“부르투갈(포르투갈) 배가 기묘한 깃발을 단 채 홀로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소. 처음에는 해적선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것도 아닌 듯하군.
그러니 정체를 밝히시오. 그대들은 적이오, 아니면 벗이오? 그대들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떤 연고로 이들 부르투갈 뱃사람들과 이 배를 거느리게 되었소? 아덴의 아미르를 대신하여 묻겠소.”
개중 우두머리인 듯한 젊은이 하나가 한 발 나아와 물었다.
그러자 이탁오도 똑같이 한 발 나아가, 상 투메 호의 선원들 중 그 누구도 상상치 못한 정체를 밝혔다.
“흠흠. 앗살라무 알라이쿰. 신(al-Siyn, 중국) 땅에서 온 지아웃딘(Ziauddin)이라 합니다.”
대충 저의 초명 재지(載贄)와 비슷한 무슬림 이름을 대는 이탁오였다.
“아마 저의 조상분께서 이곳 다녀가신 이야기는 그쪽에서도 들어보셨으리라 믿습니다.”
갑자기, 그러나 너무나 당당하게 조상을 이야기하니, 핀투와 꺽정이도 놀라고 상대편 관헌도 놀랐다.
“조상분께서 다녀가신 이야기라니, 무슨 말씀이시오?”
“제가 듣기로, 알라딘(Aladdin) 어르신께서 호롱불과 반지의 요정(Djinn)을 부렸다는 이야기가 이곳에 아직도 남아있다고 하던데요.”
말라카에 머물 무렵, 사바 구역을 돌면서 무슬림 노인들의 이야기를 듣던 그의 귀에, 한 가지 재밌는 옛이야기가 걸려들었다.
중국의 어느 도시에 살던 소년이 마그레브에서 온 마법사를 만나 놀라운 모험을 하고 마침내 공주와 결혼하였다는 이야기였다. 어디서 들었느냐며 이탁오가 물으니, 그 이야기 풀어놓은 노인 답하기를 저의 삼촌이 하지(Hajj, 메카 순례) 다녀오던 길에 들었다고 하였다.
그러니 필시 이곳에서도 유명한 얘기일 테다. 아마도 이탁오 본인이 좋아하는 『서유기』처럼 그저 머나먼 땅의 이름을 아무렇게나 빌려온 것이겠지만, 사실 여부보다는 이곳 회회인들이 그렇게 믿는다는 게 더 중요하였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조상 정도는 조금 팔아도 괜찮지 않겠는가.
“잠깐. 신 사람 알라딘이 정말 그대의 조상이란 말이오? 아니, 애초에 그 이야기가 참이었다는 말인가?”
과연 저쪽에서도 아는 이야기인 듯했다. 이탁오는 미소 숨기며 태연하게 거짓과 참을 섞었다.
“물론 요정 이야기는 후대에 덧붙여진 것이지만, 저의 조상께서 신 땅에서 오신 상인이셨고,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호르무즈에서 배필을 맞이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저의 조상 알라딘께서 큰 부를 얻은 다음 고향으로 돌아가 이스마일을 낳았고, 이스마일은 이사를 낳았으며, 이사는 무함마드를 낳았으니, 곧 이 지아웃딘의 조부 되십니다.”
하다못해 이지함쯤 되는 사람이라도 곁에 있었다면, 눈 하나 깜짝 않고 조상을 팔아먹는 이 파렴치함에 치를 떨었겠지만, 꺽정이와 도키치로는 오히려 속이는 솜씨가 청산유수라며 탄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이후로 신 땅에서는 이슬람의 명맥이 끊어진 지 오래입니다. 다만 조상의 행적에 대한 이야기만은 그대로 남아 이어지고 있지요.”
“그것이 사실이라면 참으로 반가운 일이오. 허나 그것을 입증할 증거가 없다면, 함부로 믿을 수 없으니 양해해 주시오.”
처음 말 걸었을 때에 비하면 한결 곰살맞아진 말투로 답변이 돌아왔다. 허나 아직 의심하는 눈초리는 거두어지지 않고 있었다.
“아, 그리고 우리가 고아에 있는 교회 하나를 날려버리고 오는 길이라는 것을 얘기했던가요?”
“아니, 지금 무어라 하셨소?”
“정말이오. 내가 직접 화약 나른 다음 불을 붙였지.”
꺽정이도 거들었다.
“허어...”
만약 저 말이 사실이라면, 이보다 확실한 신원 증명이 있을 수 있겠는가? 젊은이가 그 말을 아랍어로 옮겨 주변에 전하니, 다들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지금쯤이면 소식이 아주 널리 퍼졌을 테니, 고아나 그 주변에 사람을 보낸다면 금방 이를 검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무슬림들에게는 기쁘고 기독교인들에게는 가슴 아플 법한 일을 꾸미고자 찾아왔습니다.”
“그만한 일이라면, 아미르의 환대를 조심스레 베풀어도 무리는 아닐 것이오. 아덴에 오신 것을 환영하외다.”
첫 만남부터 남을 속이고 시작하였으니, 이는 잘못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처음 만나는 상대를 위하여 그에게 기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꼭 잘못이라고만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오히려 인(仁)과 예(禮)에 맞는 일이요, 남을 성심껏 위해주는 마음의 발로라 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적어도, 염치 없는 도적놈들 생각에는 그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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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를 비롯한 反종교개혁 운동가들은, 교회의 영향력이 세속권력에 비해 열세에 처하였을뿐 아니라 그런 세속권력마저 상당 부분 프로테스탄트 진영으로 넘어간 현실을 엄준히 인식하고, 그 대안으로써 유럽 외부에 대한 선교활동과 더불어 유럽 내에서의 교육에 힘썼습니다. 예수회의 설립자 로욜라가 1551년에 세운 로마대학(Collegio Romano)은 그 효시에 해당한다 할 수 있지요. 그리고 이러한 노력이 마침내 카톨릭 교회 전체 차원에서 수용되면서, 포교성성(布敎聖省, Sacra Congregatio de Propaganda Fide. ‘프로파간다’의 어원이기도 합니다.)의 설립 (1622) 등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특히 로마대학의 설립은, 점차 복잡해지고 세속화되는 세계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전문적 지식을 지닌 성직자와 선교사들을 양성하는 데 공헌했습니다. 예컨대 당대 최고 수준의 천문학자였던 크리스토퍼 클라비우스는 로마대를 졸업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수학과 학장으로 임명되어, 로마대 내의 수학 및 과학 교육을 대폭 정비했습니다. 클라비우스와 그의 제자(대학원생?)들은 그레고리력을 정비했고, 또 그가 쌓은 지적 토대 위에서 아담 샬이라는 다재다능한 인재가 나와 시헌력(時憲曆)을 만들게 됩니다. 여담으로, 그렇게 만들어진 시헌력은 조선으로 들어온 뒤, 지금도 음력 절기 계산에 부분적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회의 노력을 통해 팔방미인 선교사들이 비로소 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은, 뒤집어 말해 그 이전까지는 마테오 리치나 아담 샬과 같이 다재다능한 성직자들이 드물었음을 뜻합니다. 설령 그러한 성직자가 있더라도, 체계적인 교육보다는 개인적 탐구심과 노력 끝에 그러한 경지에 이른 경우가 대부분이었을 것입니다. 고아의 이단심문관들이, 이탁오의 철면피스러운 논변을 끝내 파훼하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겠지요.
『천일야화』를 통해, 그리고 할리우드를 통해 지금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알라딘과 요술램프 이야기는, 흥미롭게도 중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내용을 보면 실제로는 술탄과 비지에르(재상)가 등장하는 등, 사실상 중국이라는 이름만 빌려온 정도지요. 알라딘의 이야기는, 18세기 초 『천일야화』를 처음으로 유럽 언어로 번역한 앙트완 갈랑이 시리아 출신 이야기꾼 한나 디야브(Hanna Diyab)가 구술한 것을 본인의번역본에 편입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비슷한 시기에 시리아의 다른 지역, 심지어 바그다드에도 알라딘 민담을 채록한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적어도 해당 시기에는 중동 전역에 이 이야기가 퍼져 있던 듯합니다.
이전에 종종 언급되었던 것처럼, 16세기에 걸쳐 오스만 투르크와 포르투갈은 인도양의 해상패권을 두고 경쟁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포르투갈은 중동 내륙까지 진출하기에는 너무나 국력이 부족하고, 반대로 오스만 투르크는 포르투갈을 몰아낼 만한 힘을 복속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인도양 방면에 투사할 수 없음이 명백해졌습니다.
그 결과 양측은 서로 견제하기 위해 현지 세력을 끌어들이고자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포르투갈은 처음에는 같은 기독교 국가인 에티오피아와의 연대를 꾀했고 - 심지어 알부케르크는 지금의 지부티에서 에티오피아까지 가는 거대한 운하를 만들어 나일 강을 말려버린다는 SF적인 계획까지 잠시나마 추진한 바 있었습니다 - 그것이 실패한 뒤에는 페르시아 등 다른 현지 협력자를 찾았습니다. 오스만 투르크 역시 마찬가지로, 아체 술탄국 등 남·동남아시아의 이슬람 국가들을 끌어들이고자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지요.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양측 다 뜻을 완전히 이루지 못했고, 17세기에 접어들면서 오스만 투르크와 포르투갈 모두 힘만 빠진 채 신흥 세력에게 인도양 패권을 넘겨주는 결과를 맞게 됩니다. 유럽 쪽에서는 네덜란드와 영국, 프랑스가, 중동 쪽에서는 오만 제국 등 해양 상업제국이 각각 그 빈자리를 채우게 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