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띠 한 줄, 길 한 가닥 (1)
지금은 홍해로 불리는 바다의 이름은 세월을 거치며 여러 차례 바뀌었다.
그러나 ‘하(Hah)의 바다’에서 ‘에뤼트라(Erythra)의 바다’로, 다시 거기서 ‘헤라클레스의 바다’를 거쳐 ‘붉은 바다(紅海)’가 되는 동안에도, 그 바다 위를 스쳐가며 날아다니는 소문의 빠르기만은 변하지 않았다.
경이로운 이방인들이 아덴에 닿자마자, 소문은 모카(Mocha)로 퍼지고, 거기서 다시 제다(Jeddah)와 아이답(Aydhab)으로 퍼졌으며, 성채의 도시(Al-Qahirah, 카이로)와 이스칸다르의 도시(Al-Iskandariyah, 알렉산드리아)에도 전해졌다.
그럴수록 동방에서 온 ‘림 파샤’와 ‘지아웃딘 알 시니(al Sini, 중국인)’에 대한 이야기에는 살이 붙고 날개가 달렸다.
아덴의 아미르를 만나고자 항구에 배를 댄 꺽정이 일행은, 며칠 지나기도 전에 그 아미르의 한참 윗사람이라는 모카의 베일레르베이(Beylerbey, 총독)가 그들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닻을 다시 올려야 했다.
그리고 모카에 닿자마자 소문이 벌써 허무맹랑한 지경으로 불어났음을 알게 되었다.
“아주 염병들을 하고 있구만그래. 뭐? 일천 척의 함대를 이끌고 고아를 함락시킨 다음 거기 있는 절이란 절은 다 불살랐다고?”
모카 항구에 닿아 베일레르베이를 만나러 가는 길에, 그러한 소문 한 타래를 전해 들은 꺽정이가 황당함에 혀를 내둘렀다.
항구에서 출발하여 베일레르베이의 거소까지 향하는 행렬 내내, 구경꾼들은 이방인들을 구경하고 이방인들은 구경꾼들을 구경하는 기묘한 모습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사람들이 저와 이탁오를 보고 무어라 떠들어대기에, 이 어찌 된 일이냐고 옆의 관원에게 물었더니, 한다는 말이 기가 막혔던 것이다.
“중원에서는 다들 그 옛날 정 태감이 보선(寶船) 몰고 돌아다닌 이야기를 잊었지만, 이쪽 사람들은 오히려 잘들 기억하는 모양입니다. 그러니 중국 있는 쪽에서 왔다 하면 다들 비슷하려니 착각하는 것이겠지요.”
자신이 조상까지 팔아가며 알라딘 운운한 것이 그러한 허풍 퍼지는 데 영향 줬으리라는 생각은 안 하고 엉뚱한 얘기나 하는 이탁오였다.
“아무리 그래도 조금 이상하지 않소? 딱 보아도 우리는 그냥 배 한 척에 거렁뱅이 몇몇인데. 눈만 성히 달려 있으면 거짓말인 것을 뻔히 알 것 아니오.”
관군 속여먹는 짓을 한때 장기로 삼았던 꺽정이 생각에는, 영 무언가 수상하였다.
알라딘인지 알맹이인지, 이쪽에서 유명한 사람 이름을 댄 것까지는 괜찮았다. 어디를 가든 이방인은 의심을 사기 마련이니, 약간의 거짓말로써 첫인상을 좋게 꾸미는 것은 족히 가한 일이었다.
허나 모래알 한 줌만큼 거짓말을 했는데 그것이 태산으로 변하여 눈앞에 나타난다면, 이는 분명 어딘가에서 농간을 부렸다고 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쇤네가 한 말씀 올리자면, 임 당수 말씀이 맞는 듯합니다. 이쪽 사람들이 우리네 동방 사정에 밝은 것도 아니고, 평소에 교류를 하던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누군가 작정하고서 말을 퍼뜨린 것 아닐까요?”
옆에서 이 낯선 저자의 풍광 구경하며 걸어가던 도키치로도 한 마디 했다.
“그러게. 이보쇼, 핀투 선장. 혹시 뭐 짚이는 것 있소? 이쪽에서 한동안 노비 노릇도 했다고 하지 않았소.”
“예? 아, 예. 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꺽정이의 강권으로 인하여 이 행렬에 함께하게 된 핀투가 엉뚱한 데 정신을 두고 있다가 뒤늦게 말을 얼버무렸다.
“뭐 재밌는 것이라도 있소?”
“아니, 저기 구경꾼들 사이에 구면(舊面)이 있는 듯해서 말입니다.”
“아, 같이 행랑살이한 사이인 게로구려. 그럼 불러와서 자랑질을 해야지, 뭘 하고 있는 게요? 네녀석은 여전히 노비인데 나는 이렇게 잘 나간다. 이렇게 말이오.”
핀투가 손을 휘휘 저었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꺽정이가 이탁오에게 한 마디 하고, 이탁오는 다시 포르투갈 말로 옆의 관원에게 무어라 하니, 곧 행렬이 멈추고 양옆의 병사들이 구경꾼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자, 저놈들 중 누가 구면이오?”
오지랖 넓은 그의 고용주를 탓하고, 또 그런 성격 뻔히 알면서도 무심결에 사실대로 털어놓은 저의 입을 탓하는 핀투에게 꺽정이가 물었다.
결국 핀투가 손가락질을 하니, 조금 덜 까무잡잡한 것을 빼면 나머지 구경꾼과 별반 다를 것 없어 보이는 사내 하나가 이끌려 나왔다.
“마르친스? 지에구 마르친스(Diego Martins) 맞소?”
꺽정이에게 옆구리 찔린 핀투가 사내에게 물었다.
“그, 맞습니다. 한때는 그게 제 이름이었지요.”
“‘한때는’이라니?”
“실은...”
사내의 기구한 사연인즉 이러하였다.
포르투갈과 오스만이 인도까지의 뱃길을 두고 투닥거린 것도 몇십 년은 족히 되었다.
꺽정이가 거쳐온 아덴도, 포르투갈과 오스만 양쪽 사이에서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다가, 겨우 예닐곱 해 전에야 다시 술탄의 땅으로 돌아왔다고 했던가.
그러다 보니 핀투처럼 포로가 되어 노예로 팔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핀투와 함께 붙잡혔던 상인 출신의 이 지에구라는 사내는 거기서 또 한 번 명운이 꼬였다.
“... 그러다가 주스티아니(Gian Francesco Giustiani) 어르신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분 덕에 노예 신세는 벗어났지만, 배운 게 장삿일 뿐이라 결국 그분 아래에서 계속 일하게 되었지요.”
술탄의 힘이 지중해 동쪽 절반을 거의 뒤엎게 되고, 베네치아를 도와야 할 기독교 국가들은 오히려 소위 ‘신항로’를 개척하여 베네치아의 장삿길을 끊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몇몇 베네치아 상인들은 오스만 편을 들어 그들의 경쟁자 포르투갈을 향료 무역에서 몰아낸다는 발상을 하게 되었다.
개중에서도 열의와 탐욕 넘치는 몇몇은 숫제 개종까지 하곤 했는데, 주스티아니도 그중 하나였다.
“저런...”
‘더러운 배교자’라고 한 소리 하려다가, 따지고 보면 저도 참 미묘한 입지에 있음을 새삼스레 깨달은 핀투가 말을 아꼈다.
“그런데 어쩌다가 여기까지 흘러들어온 게요?”
“그야, 장사가 안 되어서 그렇지요. 에기토(이집트)를 지나는 무역이 거의 끊어지다시피 한지라 어쩔 수 없이...”
그런데 말이 거기에 이르자, 갑자기 이곳 관헌이 옆에서 불쑥 들어와 헛기침을 했다.
“흠흠, 림 파샤. 베일레르베이께서 기다리십니다.”
“에이, 거 재미 없기는. 알겠소.”
그러나 실제로는 아주 재미있었다.
필시 이곳의 우두머리가 누구든 저 ‘장사 안 된다’ 하는 말에 찔리는 구석이 있는 것일 터.
그리고 찔리는 구석이 있다면 마땅히 찔러주고서 거기서 흘러나오는 이득을 챙기는 것이 도적의 상도(常道)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방인들의 행렬을 감시하는 그 누구도 ‘림 파샤’가 먹잇감 찾은 범의 눈빛 하고 있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소위 ‘잘 보호받는 나라(Memalik-i mahruse)’ 자처하는 이 나라는 여러 개의 성(省), 그러니까 이들의 말로는 에얄레트(Eyalet)로 나뉘었고, 각 성마다 베일레르베이가 하나씩 있었다. 그러니 대국 벼슬로 치면 총독이나 순무(巡撫)쯤 될 것이다.
그러므로 대국 내각수보 서계는 서 어르신이라 부르고 그 오른팔 장거정은 장 형이라 칭하는 꺽정이에게 이곳 예멘 에얄레트의 베일레르베이인 외즈데미르 파샤(Özdemir Pasha)는 아랫사람으로 보일 법도 했다.
허나 외즈데미르의 나이가 지긋하기도 하고, 애초에 아랫사람 대접이 윗사람 대접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이 꺽정이의 예법(禮法)이었으므로, 꺽정이는 그저 다른 어지간한 사람 대하듯 외즈데미르를 대했다.
“하하! 반갑소! 반가워!
이 사람도 림 파샤의 위업에 대해 전해들었소이다. 어찌 통쾌한 얘기가 아니겠소! 저들 기독교도들이 지금껏 우리 무슬림들에게 끼쳐왔던 수많은 악덕을 조금이나마 돌려받게 되었으니! 물론 그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을 법한 자들이었다면, 진작에 저들의 죄를 깨닫고 뉘우쳤겠지만 말이오.”
그러나 외즈데미르 파샤는 꺽정이가 저를 어찌 대하건, 전혀 거리낌 없이 호탕하게 웃을 뿐이었다.
서둘러 그들을 불러들인 것에 사과라도 하려는 듯, 제법 호사스러운 잔칫상이 그들 앞에 차려져 있었다.
“조호르의 술탄 이야기를 한 번 더 들려주실 수 있으시겠소? 아랫사람들이 문정한 것만으로는 확실치 않은 바가 있어서 말이오.”
“뭐, 별 건 아니오. 그래도 물으시니 내 들려드리리다...”
그렇게 한참 잔치가 이어졌다.
본디 술에 취하는 것은 계율에 의거하면 옳지 못한 일이지만, 외즈데미르 파샤는 이교도 귀빈을 맞이한다는 명목으로 열심히 술잔을 기울였다. 두 성지의 보호자이신 술탄을 모시기 위함이니 이만하면 자비롭고도 관대하신 신께서는 보아주시리라 여긴 것이다.
(그런 것치고는 어째 꺽정이와 대작하면서도 얼굴 불콰해지지 않는 것이, 한두 번 마셔본 것 같지는 않았다.)
“... 대충 그렇게 해서 에스파냐 놈들을 때려잡고 나라를 구해주게 되었소.”
“허, 정말 대단하시오. 여기 지아웃딘의 조상 되시는 알라딘 공의 이야기만큼이나 경이롭다 하겠소.”
이야기 마친 꺽정이가 아락(Arak) 술로 목을 축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슬림들은 잔치의 흥겨움에 - 설령 술을 사발로 마셨다 한들, 어디까지나 ‘흥겨움에’ 취한 것이었다 - 취해 저들끼리, 또 포르투갈 말을 아는 이들 거쳐 꺽정이 패거리들과 떠들고 있었다.
개중 제법 고관인 듯한 젊은이 하나만은 연신 떠들면서도 눈빛 형형하게 주변을 관찰하고 있었는데, 이 또한 꺽정이가 보기엔 재밌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 혼자 너무 떠든 것 같은데, 어르신도 좀 얘기를 해 보시오. 그 나이 드시도록 벼슬살이를 하셨으니 재밌는 얘기 하나쯤 있지 않겠소?”
술잔 내려놓으며 꺽정이가 운을 띄웠다.
“그것도 그렇군. 그러면 림 파샤께서는 무엇을 듣고 싶으시오?”
“듣고픈 것은 많지. 예컨대, 어째서 우리네를 만나고자 했는가, 그리고 기왕 만나뵙기로 하였는데도 사람 시켜서 여기저기 헛소문 퍼뜨린 것은 무슨 심산에서인가.”
아덴과 모카에서 그토록 빨리 소문이 퍼진 데 누군가 손을 썼다면, 열에 예닐곱쯤은 그곳의 사또가 관여되어 있을 터. 그렇게 어림짐작한 꺽정이가 대놓고 물으니, 주변에서 웃고 떠들던 외즈데미르의 아랫사람들이 갑자기 얼어붙었다.
“아, 그렇지! 역시 여간내기가 아니시군. 잘 알아보셨소! 소문을 퍼뜨린 것은, 보다 정확히는 소문 퍼뜨리라 지시한 것이 바로 이 사람이외다.
이렇게 직접 물으시는데, 답을 회피하는 것도 손님 맞이하는 예의는 아닐 터. 좋소. 내 말씀드리리다. 여봐라! 지도를 가져오너라!”
술 한 잔 입에 안 대고 밖에서 기다리던 파샤의 부하 몇몇이, 큼직한 지도 한 장을 가져와 벽에 걸었다.
살짝 비틀대며 몸 일으킨 외즈데미르 파샤가,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지도를 만드신 분은 피리 레이스(Piri Reis). 술탄의 종복 중 바닷바람 맞는 놈들은 모두 존경해 마지않는 큰 어르신이라오. 그런데 그분이 어찌 되었는지 아시오?”
“무반(武班)이 아랫것들 추앙을 받는다면야, 둘 중 하나 아니겠소? 공신 소리 들으며 평생 호의호식하거나, 아니면 역적 소리 듣다가 죽거나.”
“허, 사람 사는 곳은 과연 다 비슷한가 보구려. 그렇소. 후자요. 나이 구십이 다 되셨건만, 숭고한 문(Sublime Porte, 오스만 정부의 별칭)에서는 그분을 참형에 처하라 지시하였지. 코스탄티니예(콘스탄티노플)에서 바다에 대해 가진 생각이 대체로 그와 같소이다.
바다가 얼마나 중한지, 바다 사이에서 얼마나 많은 부를 얻을 수 있는지, 저 높은 곳의 훌륭한 재상들께서는 알지 못하시오. 특히나 지금은 더욱 그렇지.”
지도 가운데에서 살짝 아래쪽에 있는 땅을 가리키며 외즈데미르가 말을 이었다. 지중해와 홍해 사이 아주 얇은 한 줄기 땅으로 이어진 지역, 아마 저곳이 포르투갈 말로 에기토, 이곳 말로 미스르라 부르는 땅일 테다.
“미스르는 예로부터 교역으로, 그러니까 지중해와 인도양을 잇는 곳으로서 흥성해 왔소. 그리고 맘루크들의 치하에서 미스르는 번영했소이다. 비록 우리끼리는 서로 다투고 죽여 왔지만, 다들 그것 하나는 알았기에 교역만은 건드리지 않았소.
그러나 지금 술탄께서는 이를 알지 못하고 계신 듯하오.”
술탄에 대한 충심은 변함 없는 외즈데미르였다. 여러 해 동안 인도 앞바다에서 기독교인들과 싸우며, 부르투갈의 힘을 생생히 보았던 외즈데미르에게 있어, 이슬람 세계(Dar al-Islam)가 하나로 뭉치지 않는다면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몰락하는 길밖에 없다는 결론은 자명하였다.
“... 하여, 어쩔 수 없이 숭고한 문을 거치지 않고 현장에서의 임기응변으로 대처하고자 하오.”
“임기응변이라?”
“교역, 그것도 미스르 너머 우루바(유럽)와의 교역을 위하여 이곳까지 오셨으리라 믿소. 카와(커피)만을 위해 오시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오.”
외즈데미르의 제안은 이러하였다.
“이곳에서 지중해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보다 작은 배로 갈아탄 뒤 미스르(이집트) 해안에 배를 대고, 거기서 다시 나일 강을 따라 북쪽으로 향해야 한다오. 그렇게 이스칸다리야에 닿은 뒤에야 서쪽으로 가는 배를 탈 수 있소.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수월하게 처리하기 위해서는, 결국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터. 미스르는 비록 코스탄티니예에 복속되었을지언정 아직 맘루크들의 것이오. 맘루크들은 새로운 주군을 모시고 있을 뿐, 자유인에서 노예로 떨어진 것은 아니라오.”
“하, 그러니까 결국 말이 거창할 뿐, 임자들과 손잡고 잠상(潛商, 밀무역) 노릇하자는 것 아니오?”
꺽정이가 웃었다.
“... 틀린 말은 아니오. 그러나 생각해보시오. 우리가 아니라면 그 누구의 손을 잡으시겠소? 이미 림 파샤 그대와 일행들에 대한 소문이 번지르르하게 퍼졌으니, 미스르 땅의 그 누구도 림 파샤 그대를 몰라보지 않을 터.
그러니 림 파샤 그대가 홀로 배를 구하고자 한들, 그 누구도 함부로 그대들을 위해 배를 내지 않을 것이오.”
이곳에 배 타고 닿으면, 사람들이 곧장 쌍수 들고 반겨주리라 여기지는 않았던 꺽정이었다. 이탁오의 거짓부렁 덕에 만나자마자 총통을 맞지는 않았지만, 이제 보니 그렇게 내세운 거짓부렁이 그대로 꺽정이네의 발목 붙잡는 올가미가 된 셈이었다.
허나 이곳 홍해를 거쳐서 교역을 하려면, 누군가와는 담판을 지어야 할 것이었다.
“생각할 겨를을 드리겠소.”
“내가 할 소리로군그래. 어르신이야말로 반가운 손님 등 뒤에서 음흉한 짓 하는 그 버릇을 고쳐야 하겠소. 여하간 가(可)든 부(否)든 곧 연락을 드리리다.”
그렇게 갑자기 데면데면해진 모임은 어물쩡 파하고, 이방인들은 외즈데미르 파샤가 준비해둔 객관(客館)으로 삼삼오오 향했다.
그리고 그림자에 숨어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도 하나 있었다.
허나 안타깝게도, 그의 자비롭고도 관대하신 주께서는 인간을 빚을 때 머리의 앞부분, 얼굴 있는 쪽에만 시각의 은총을 허하신지라, 뒷통수 쪽으로 다가오는 큼직한 덩치는 미처 알아보지 못하였다.
“이야, 솔선수범하는 모습이 보기 좋소. 벼슬깨나 하시는 듯한데, 이렇게 우리네들을 손수 감시하실 줄이야.”
“하하, 외즈데미르 파샤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역시 여간내기가 아니시오.”
앞서 외즈데미르와 대면할 때, 안 그런척 시늉하며 두 사람을 주시하던 그 젊은이었다. 움찔 놀라면서도 애써 태연하게 답하는 것이 제법이었다.
“저녁 내내 그 어르신이랑 떠들다 보니 이제 더 말할 이야기도 안 남았소. 그러니까 뜸 들이지 말고 할 말 있으면 털어놓으시오. 내가 직접 털기 전에.”
“나는 무스타파의 아들 리드완(Ridwan)이오. 우리 아버지 무스타파 파샤께서는 내년에 이곳 예멘 에얄레트의 베일레르베이로 오실 예정이신데, 조금 힘을 쓰셔서 나를 이곳의 재무관(Defterdar)으로 꽂아주셨다오.”
“귀한 도련님이시군그래.”
기실 따지고 보면 꺽정이 저와 별로 차이도 안 나는 연배일 테지만, 워낙 꺽정이 인상이 험상궂다 보니 꺽정이가 리드완을 ‘도련님’이라 부르는 것이 딱히 이상하지 않았다.
“외즈데미르 파샤의 제안이 영 께름칙하다 여기시는 눈치시더이다.”
“뭐, 그렇지. 대개 잠상 노릇이라는 것은 이문도 남지만 위태롭기도 하지 않소.”
“그래서 이렇게 새로 제안을 하고자 하오. 자리는 영 좋지 않지만...”
“누가 듣는다면 뭐 어떻소. 도령이야 곤경에 처할지 몰라도, 나는 더 좋소. 경쟁하는 이가 생겼음을 깨닫는다면 외즈데미르 어르신도 좀 더 값을 후하게 불러주겠지.”
꺽정이가 뻔뻔하게 대답했다.
“하하, 이것 참. 동방의 이교도들도 서방 이교도만큼이나 염치가 없는 듯하구려.”
“내가 유별나게 더 그러긴 하오. 싫으면 다른 동방 사람 알아보시오.”
리드완이 고개 한 번 도리질하곤 저의 제안을 꺼냈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카프클루(Kapikulu, 근위기병)로 시작하여, 마침내 숭고한 문의 문턱을 오가시는 자리까지 오르셨소. 그리고 나와 아버지 모두, 거기서 멈출 생각은 없소. 이곳 예멘 에얄레트는 이를 위한 문턱이 될 것이고.
술탄 폐하의 으뜸가는 신하인 뤼스템 파샤께서, 전임자들과 달리 이교도와의 교역을 좋지 않게 보는 것이 문제의 근원이오. 외부와의 교역으로 인해 국부(國富)가 새어나간다 여기기 때문이지.
그렇다면 새어나가는 부를 조금 줄이면 될 것 아니오? 나와 우리 아버지의 손을 잡는다면, 이곳 모카와 아덴에 확실히 그대들 동양인의 자리를 마련해주겠소.”
“그 대신 뭔가를 받아낼 심산이겠구려.”
“속된 말로, 우리에게 떨어지는 것도 있어야 하지 않겠소? 솔직히 말해, 맘루크들의 손을 잡는 것에 비해 이득은 덜할 것이외다. 대신 떳떳하게, 그리고 안전하게 교역을 할 수 있겠지. 여러 해에 걸쳐서 말이오.”
쉽게 말해, 아덴과 모카에 상관(商館)은 마련해주되 그 이상, 예컨대 직접 에우로파 사람들과 교역하는 것은 엄금하겠다는 뜻이었다.
“잊지 마시오. 저들 맘루크들은 이미 술탄과 싸워 패배하고 복속된 자들이외다. 그 이후로도 여러 번 반기를 들었으나, 그때마다 진압당했지. 어느 쪽의 손을 잡아야 할지는 뻔하지 않소?”
꺽정이 반응이 영 시원찮다 여겼는지, 리드완이 한 번 더 강조하였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변은 그러든 말든 똑같이 심드렁했다.
“그렇지. 아주 분명하군그래. 잘 알겠소이다. 내 조금 더 생각하고 알려드릴 테니, 오늘은 썩 꺼지쇼. 아덴에서도 그놈의 아침 기도소리 때문에 잠을 설치곤 했단 말이오.”
한쪽은 위태롭지만 이득 남는 길, 다른 한쪽은 덜 위태롭지만 이득도 덜한 길을 제시하였으며, 양쪽 모두 꺽정이와 그 패거리가 저들에게 숙이고 들어올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니 꺽정이가 어느 쪽 손을 잡아야 할지는 명백하였다.
“그대들 아니겠소.”
정확히는 손을 잡는 게 아니라, 남의 손을 붙잡고서 놓아주지 않는 것이었찌만.
푹신한 디반(Divan, 소파와 같은 가구의 일종)에 엉덩이 대며 꺽정이가 발을 쭉 뻗었다. 마치 저의 집인 양 그리하니, 지켜보는 집주인은 할 말을 잊었다.
또는, 시치미 떼는 집주인을 설득하기 위하여 슬쩍 박살내준 책상과 서랍장 때문에 할 말을 잊은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총독 어르신 도와서 소문 퍼뜨린 것도 그대들일 테고, 또 우리 야심 가득한 재무관 도령이 그대들이라고 놓치고 지나가진 않았을 테니, 양쪽 모두와 연 닿은 것은 그대들 뿐이겠지. 그렇지 않소?”
교회를 버리고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지만, 실제로 믿는 바는 오직 두카트(Ducat) 뿐이었기에 결코 배교는 하지 않았다 자부하던 베네치아 상인 주스티아니가 무어라 답하고자 입을 벌렸다가 도로 닫았다.
그 말대로, 맘루크들을 등에 업은 외즈데미르와 코스탄티니예에 연줄 탄탄한 리드완과 그 아비 양쪽으로부터 모두 두둑하게 두카트를 챙긴 바 있었던 것이다.
“이왕 감시를 붙이실 것이었다면, 조금 더 사람을 쓰셨어야죠. 끄나풀 한 사람을 계속 돌려 쓰다 보면 꼬리가 밟힐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헤헤.”
그 틈에 은근슬쩍 옆에서 저의 공 자랑하는 도키치로였다.
한편, 이방인들에게 붙잡혀 이들을 이곳까지 인도하는 길잡이가 되어버린 지에구 마르친스는, 차마 저의 상전 뵐 면목 없어 구석에서 고개 숙이고 있었다.
“... 무엇을 원하십니까.”
“총독과 재무관 두 사람에게 동시에 연락을 취해주시오. 두 사람이 한 제안이 모두 족히 마음에 들지 않으니, 값을 더 불러 보아라. 더 높게 값을 부르는 쪽의 편을 들어줄 것이요, 그러지 않는다면 이대로 돌아가겠다. 이렇게 말이오.
그리고 그대도 값을 제시해 보시오. 나름대로 꿍꿍이가 있으니 이곳까지 온 것 아니오? 장사를 논해 보십시다그려.”
“하, 이 바다의 주인은 따로 있거늘 저희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두 바다가 하나로 합쳐지지 않고서야.”
주스티아니가 슬쩍 비아냥거렸다.
“그거 좋네. 더 말해보시오.”
“예?”
“내가 어제 보니까, 지중해라는 바다랑 이곳 바다랑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더군. 옛날에 수나라 천자는 항주에서 북경까지 운하를 파고도 나라에 힘이 남아돌아서, 백만 대군 일으켜 이웃나라까지 쳐들어갔다오.
그러니 여기 오스만 술탄 나리도 그만큼 좁은 땅에 운하 팔 만한 깜냥은 되지 않겠소?”
홍해와 지중해 사이에 운하를 파는 것은, 에기토가 코스탄티니예의 술탄에게 정복당하기 직전, 인도까지 진출한 포르투갈인들에게 맞불을 놓기 위해 베네치아와 맘루크들 사이에서 논의되었던 계획이기는 했다.
물론 투르크인들이 나서서 포르투갈인들을 열심히 때려잡게 된 이후부터는 - 그와 동시에 베네치아도 때려잡으니 문제였지만 - 그대로 뒤엎어진 계획이었다.
그러므로 주스티아니도 냉소 담아서 그냥 툭 던졌을 뿐이었는데,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한쪽은 잠상의 짝패 되겠노라 하고, 다른 한쪽은 상관 마련해주겠노라 하고, 그대는 운하를 파자고 하고. 아주 좋군. 볼만 하겠소.”
볼만 하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외부인의 시각이요, 어떻게 이방인을 이용해보려다가 졸지에 머리아픈 일만 늘어난 세 사람에게는 결코 볼만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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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얄레트의 총독 베일레르베이라는 관직명에서 여진어 ‘버일러’를 연상하였다면, 이는 근거 있는 직관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베일러베이는 어원을 따지면 ‘베이(Bey/Beg)들의 베이’인데, 여진어 버일러도 고대 돌궐어에서 유입된 외래어라는 추측이 있기 때문이지요.
지금의 예멘이 위치한 아라비아 반도 남단은 고대부터 인도양 무역과 지중해 무역의 연계가 이루어지는 곳으로서, ‘행복한 아라비아 (Eudaemon Arabia / Arabia Felix)’로 불려 왔습니다. 이미 기원전부터 이 지역의 인구는 농업으로 부양하기 어려운 정도였고, 따라서 매우 이른 시기부터 인도양으로부터 들어오는 귀중품을 지중해 세계에 팔고, 그 이익으로 나일 강 유역과 에티오티아의 식량을 사들이는 무역이 흥성하게 되었습니다.
중세를 거치면서, 예멘 해안과 이집트 해안을 오가는 물산은 계속 다양해졌습니다. 동아프리카에서 꾸준히 유입되던 흑인 노예, 에티오피아에서 모카(Mocha, 카페 모카의 어원이기도 합니다)를 거쳐 나머지 세계로 퍼진 커피, 그리고 베네치아 상인들을 통해 들어오는 유럽의 귀금속 등이 모두 이곳을 오갔지요.
그리고 예멘과 더불어 이집트 역시, 인도양 무역과 지중해 무역의 중계지로서 톡톡히 이득을 보았습니다. 중세부터 이집트를 지배하던 맘루크(본디 노예병들을 지칭하는 표현이었으나, 이후 유럽 중세의 기사를 업그레이드한 것에 가깝게 변화했습니다.)들은 지중해의 패자 베네치아와 손을 잡고 그러한 이득을 나누었지요.
그러나 16세기 초 이집트가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정복당하고, 비슷한 시기 포르투갈이 인도양 무역에 진출하면서 이러한 관계는 무너져내리게 됩니다. 본디 맘루크와 연계하여 포르투갈을 견제해보려 했던 베네치아의 노력 - 작중 언급된 운하 계획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왔습니다 - 은 허사가 되었지요.
이후 몇몇 베네치아인들은 이집트가 정복당하자 재빨리 줄을 갈아탄 뒤, 오스만 투르크가 포르투갈의 인도양 무역을 효과적으로 방해할 수 있도록 각종 자문을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에 ‘가장 고귀한(La Serenissima)’ 베네치아 공화국의 의중이 얼마나 반영되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실존인물인 주스티아니를 비롯해 이러한 개종자들이 적극적인 反포르투갈 활동을 펼친 개종자들이 적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 역시 실존인물인 지에구 마르친스의 개종 및 변절 역시 이들의 솜씨였습니다 - 베네치아와의 은밀한 연줄이 없지 않았을 듯합니다. 실제로 베네치아와 오스만 투르크는 발칸과 지중해에서의 패권을 두고 경쟁하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긴밀한 경제적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