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있음이냐 없음이냐 (1)
음모를 꾸미고 실행하는 데 있어서는 실패만큼이나 성공을 두려워해야 하는 법이었다.
거사를 이룬 뒤에는, 그 거사를 위해 끌어들인 모든 이들이 아군에서 잠재적 적군으로, 언제 자신이 보고 들은 바를 적에게 전할지 모르는 위험 요소로 변모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면에서 가는 곳마다 파란을 몰고 다니는 동방인들은 이상적인 공모자라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 땅에 어떠한 연고도 없을뿐더러, 일을 벌인 뒤 고향으로 돌아가면 그만이기 때문이었다.
“··· 그러고서는, 우리에게 이 밀서 한 통을 쥐어주며 런던에 있는 마리인가 메리인가 하는 이에게 전해달라 하였소. 함께 가시려오?”
엊그제 새 국왕 프랑수아의 주재로 열린 대 콩세유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꺽정이는, 이를 기념하여 흑의군 패거리와 셀림, 그리고 끝내 술의 유혹을 이길 수 없던 그의 수행원 몇몇-대개는 개종한 에우로파 사람들이었다-까지 끌어들여 술병을 기울이고 있었다. 선왕 앙리의 죽음에 꺽정이 잘못도 없지는 않았으므로, 떠들썩하게 잔치를 벌이는 대신 조용히 빈 병만 쌓고 있었다.
샤리아의 가장 관대한 해석을 따른다 하더라도 술은 취할 때까지는 마시면 안 되는 법이었는데, 그렇다면 어지간하면 쉽게 취하지 않을 만큼 주량을 늘려버리면 될 일이었다. 이 참신한 해석에 담긴 지혜는 셀림을 크게 감응시켰다.
“크브르스(키프로스) 포도주가 제일인 줄 알았는데, 이곳의 포도주는 또 다른 경지라 할 수 있군그래··· 아니, 잠깐. 지금 무어라 하였소?”
“여기서 좁은 바다 건너면 바로 나온다는 그 나라 있잖소. 그곳 수도에 가서 임금 만나겠다고 하였소.”
“분명 그 앞에, 멀쩡한 정신으로는 하기 어려운 말을 덧붙였던 듯한데. 임 당수, 취했소?”
“보다시피 멀쩡하외다.”
셰자데의 저택을 제 집처럼 맘대로 드나들며 도둑질하던 작자이므로, 합리적 추론에 따르면 여왕의 후사를 바깥에서 몰래 들여온다는 무지막지한 계책도 능히 실행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성의 이야기요, 어디까지나 한 사람의 왕자인 셀림으로서는 생각만 해도 영 께름칙한 것이 사실이었다.
“어차피 카트린 마님도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 하는 식으로 이야기합디다. 여차하면 그런 음흉한 수를 누군가 제의했다는 소문만 퍼뜨려도 제법 긴요한 수가 된다나 뭐라나.”
어떤 식으로든 에스파냐와 잉글랜드 두 나라 사이를 이간질할 수만 있다면 프랑스 측에서는 이득이었다.
“그러니 런던에 가서 그 밀서를 전하고, 메리 마나님이 좋다 하면 도와주고, 싫다 하면 그냥 적당히 소일하다 떠나는 것이오. 어떻소?”
이왕 서쪽으로 온 김에 어지간한 나라는 다 둘러보고 가려던 셀림이었지만, 바다 건너 인길테레(잉글랜드)까지 갈 생각은 딱히 해보지도 않았다. 백해(지중해)를 두고 이해관계 맞물린 나라도 아니요, 딱히 이렇다할 특산물이 나지도, 부유하지도 않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썩 내키지는 않는데···”
“그리고 다른 이유도 있는데, 한 번 들어보시오. 이쪽 장인들 솜씨가 제법 좋지 않소?”
“그건··· 자존심은 조금 상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라 하겠소.”
셀림은 비록 아버지만큼 총명하지도, 아우만큼 대담하지도 못했지만, 셰자데로서의 자질은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그는 카를의 군영에 머물면서, 또 이탈리아를 거쳐 이곳 파리까지 오면서, 하늘 아래 그 무엇도 막지 못할 것 같던 아버지 쉴레이만의 군대가 어찌하여 비야나(빈)에서는 고배를 마실 수밖에 없었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만약 기독교 세계가 이슬람과 마찬가지로 하나로 뭉치게 되거나, 아니면 이대로 싸우면서도 스스로 쇠하지 않고 나름대로 계속 발전하게 된다면, 셀림의 나라는 더 이상 ‘잘 보호받는’ 나라로 남을 수 없을 터였다.
“그러니 몇 놈 후려서 데려가는 게 어떻겠소?”
“후린다고?”
“그러니까, 음. 정중히 설득하여 모셔가는 게 어떻겠소?”
원래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기 마련이었다. 포르투갈 따돌리고 장사할 수 있는 길을 얻기 위해 운하 파는 계획을 제의하고, 거기에 이탈리아까지 끌어들이고, 이탈리아에 간섭 못하도록 에스파냐와 프랑스까지 대충 묶어두는 데 성공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꺽정이는 뭔가 더 얻어가고픈 마음이 들었다.
도키치로가 구해온 마카롱을 먹다 보니, 문득 이 땅의 장인들이 제법 훌륭하다는 것이 떠올랐다. 지금까지는 그저, 핀투가 말라카에서 사람들 꼬셔온 것처럼 더 데려오면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직접 에우로파에 찾아와보니 말라카에 있는 떨거지들보다는 이곳 본토 사람들 솜씨가 훨씬 좋을 듯했다.
허나 대충 수소문해 보아도, 이탈리아나 프랑스에서 장인들 대접하기를 양반만큼은 아니어도 향리 정도로는 대접해주니 꼬시기가 난망할 듯했다. 미켈란젤로 그 노인네만 하더라도 따지고 보면 고작해야 대목장이나 환쟁이인데도 교종(교황)과 맞먹지 않았던가.
그나마 프랑스는 이탈리아보다는 조금 살림이 궁핍하다 하였는데, 정작 장인들이 많이 사는 이곳 파리는 그렇지 않았다. 살림살이가 팍팍하든, 아니면 네놈 죽이겠다며 달려드는 놈들이 있든 해야 생판 모르는 이역만리까지 선뜻 따라올 텐데, 꺽정이가 며칠 수소문해보니 재주 좋은 장인들은 저의 받는 대접에 대체로 만족하고 있었다.
“··· 거 참. 그대가 말하는 것을 보면,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 같은데도 묘하게 그럴듯하다 싶을 때가 있으니 참 기이한 일이오.”
“나도 가끔 그것을 깨닫고 놀라곤 한다오.”
실제로는 뭐 하나 좋은 생각 떠오를 때마다 주변의 좀 더 총명한 사람들을 괴롭힌 덕이었지만.
“셰자데시여, 만약 정녕 북쪽으로 향하고자 하신다면, 이 또한 나쁘지 않다 하겠습니다. 이미 이곳 파리스(파리)까지 왔으니, 조금 더 북쪽으로 가서 배를 타고 안달루스(이베리아)로 바로 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도중에 다른 나라에 들려 술탄의 위엄을 보일 수 있다면 이 또한 좋은 일이지요.”
셀림의 수행원들도 꺽정이 말에 일리가 있다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술대접을 받은 것도 아주 약간이나마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에스파냐와의 종전협상으로 바쁜 파리를 뒤로 하고, 시나와 오스만 투르크의 사절단은 잉글랜드령 칼레로 향하게 되었다.
런던의 모습은 파리나 로마에 비하면 다소 초라한 감이 적지 않았지만, 그러한 초라함은 사절들에게 베풀어지는 성대한 환영에 가려져 잘 드러나지 않았다. 템즈 강변을 가득 메운 인파부터, 여왕 본인이 직접 나와 그들을 맞이하는 것까지, 호의를 만약 숫자처럼 더하고 뺄 수 있다면, 꺽정이 일행이 지금껏 받았던 대접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큰 호의가 베풀어지고 있다 해도 무방하리라.
특히나, 꺽정이가 프랑스에서 행한 일 - 따지고 보면 전직 황제 카를과 술탄 쉴레이만이 부탁한 대로 이루어진 셈이었다 - 이 이곳 런던에도 알려졌을 것임을 감안하면, 이러한 환대 이면에는 다분히 어떤 의도가 있다고 밖에는 볼 수 없었다.
세인트 제임스 궁에 당도하자마자, 메리 여왕은 그 의도를 바로 드러냈다.
“장엄한 술탄의 아들 셀림 공과, 멀리 동쪽 키타이(중국) 땅에서 찾아온 림 경(Sir Rhim)을 진심으로 환영하오.
우리 잉글랜드는 비록 프랑스나 스페인에 비하면 부족한 바가 있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재보를 지닌 나라요. 우리 장인들의 솜씨는 결코 유럽 본토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소이다.”
어쩌면 한때 자색이 빼어났을지도 모르겠지만, 냉혹한 세파로 인하여 그 미모가 쇠한 지 오래였던 여왕이 그들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심지어 나름대로 코우지오니스의 이력에 대해 조사하였는지, 이름이 아닌 성을 따서 ‘림 경’으로 불러주기까지 하였다.
이웃나라 흉보기를 즐기는 에우로파 사람의 기질을 어찌할 수 없던 프랑스의 카트린은, 저도 교양 없는 장사치 집안 출신이라 손가락질 받는 처지임에도 잉글랜드의 메리가 군주로서의 교육을 잘 받지 못한 부족한 국왕이라 은근히 험담을 하곤 했다.
허나 꺽정이 듣기에는, 따로 빙빙 돌리지 않고 할 말 그대로 하는 이 화법이 더 마음에 들었다. 단 하나, 하필 저를 ‘서림(Sir Rhim)’이라 부르는 것이 조금 불만이었지만.
“클리스마 운하의 계획은 들어 알고 있소. 이미 우리는 여러 해에 걸쳐 림 경 그대의 나라로 향하는 항로를 찾고자 노력해 왔소이다. 신의 은총으로 오늘의 만남이 있게 되었으니, 이 계획을 위하여 물심 양면으로 지원토록 하겠소.”
허나 아무리 꾸밈 없는 말투라지만, 이렇게까지 꺽정이 일행이 듣기를 원하는 말을 해주는 것은 필시 뜻하는 바가 있기 때문일 테다. 그것이 여왕 한 사람의 욕심인지, 아니면 나라 전체의 궁핍함 때문인지는 아직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느 쪽이든 간에 저쪽에서 먼저 대놓고 밝히지 않는 한 꺽정이가 알 바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여왕의 말에 굳이 예의 차려 답하는 대신 - 이는 셀림이 대신 처리해주었다 - 곧장 본론을 내놓았다.
“그, 혹시 주변을 조금 물려주실 수 있으시겠소? 제법 중대한 이야깃거리가 있어서 말이오.”
“그리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필시 중요한 내용이겠구려.”
그런데 정작 여왕은 주변을 물리지는 않았다. 이제 보니, 여왕의 곁에는 그저 시종 드는 남녀와 멀찍이 서 있는 병사 몇몇이 있을 뿐, 딱히 근시(近侍)하는 신하도 없었다. 처음에는 그저, 나라 살림이 좋지 못하니 군주로서 검소한 풍습의 모범을 보이는 듯하였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잠시 주변 두리번거리던 꺽정이는,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파리에서 받아온 밀서를 꺼냈다.
그리고 당수가 그 밀서를 정말 밀서답게 저의 품에 꼭 간직하고 있던 것을 떠올린 도키치로가, 재빨리 파리에서 구해온 향수를 꺼내 몇 방울 훅훅 뿌렸다.
“실은 이웃나라 프랑스에 머물 적에, 그 나라 대비 되시는 카트린 마님으로부터 이 글월 한 통을 받았다오. 한 번 읽어보시고 가부를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소.”
뻔히 밀서인 티가 나는데도 그것을 덜컥 건네는 꺽정이나, 그것을 덜컥 받는 메리 여왕이나, 둘 다 기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시종의 쟁반을 거쳐, 곧 처음 파리에서 받았을 때 모습 그대로 간직한 밀서가 전해졌다.
그리고 가뜩이나 혈색 좋지 않던 여왕은, 밀서의 겉봉을 뜯고 그것을 바짝 눈가에 붙여 읽더니, 정신이 아찔해지는지 눈살을 몇 번이나 찌푸리며 편지를 들었다 놓았다 하였다.
집안에 손이 귀하면 양자 들이는 것 정도는 당연히 할 수도 있지 않는가 여기던 꺽정이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반응이었다.
저러다 까무러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이미 벌인 일로도 악명은 충분히 쌓았을 텐데 이러다가 하지도 않은 일까지 덤터기 쓰면 어떻게 하나 슬슬 고민하던 차, 겨우 서한의 끝까지 다 읽어내려간 메리 여왕이 간신히 말했다.
“이··· 흥미로운 제안에 대해서는 조석간에 마음을 정하여 답을 주겠소. 오늘은 이만 물러남이 어떻겠소이까.”
그리고 그 말대로 꺽정이와 셀림 일행은 알아서 물러났는데, 궁에서부터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왕이 런던에서 조금 떨어진 윈저 궁으로 옮겨간 뒤, 그곳에서 두통을 호소하며 병상에 눕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여왕이 제안을 받아들이든, 거절하든 어느 쪽이건 간에 결론만 내면, 살림살이 궁핍한 장인들 꼬시는 일까지만 하고 떠날 심산이었던 꺽정이 일행은 그렇게 런던에 발목이 잡히게 되었다.
허나 심심할 틈은 없었으니, 여왕의 권세는 영 약해 보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절단 일행이 런던에 닿았을 때 그토록 사람들이 열렬히 환영하던 데는 나름의 까닭이 있기 때문이었다.
저들 임금이야 쓰러지든 말든, 매일같이 이런저런 상인들이 찾아와 예물 바치고 찾아뵙기를 청하곤 했다.
“오오, 코우지오니스 경!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저는 이곳 런던의 무스코비(Muscovy, 모스크바) 회사 사장과 모험가 상인 협회(Company of Merchant Adventurers) 종신회장을 맡고 있는 탐험가 캐벗(Sebastian Cabot)라 합니다. 혹 시간이 되신다면, 귀국의 지리에 대해 여쭤보아도 될지요?”
늙은 뱃사람 하나가 베네치아 장신구를 한 궤짝 바치며 - 그들이 이탈리아를 이미 거쳐왔다는 소문만은 못 들은 모양이었다 - 그들 말로는 ‘스칸디나비아’라는 곳 북쪽의 얼음 바다를 거쳐 대국으로 갈 수 있는지를 물었는데, 꺽정이 대신 이탁오가 답하기를, 그런 길이 있었다면 옛날 몽골 사람들이 말 대신 배를 타고 다니지 않았겠느냐 하였다.
그 뒤로도 셀림을 찾아뵙고는 저들도 어떻게 오스만 투르크와 교역을 할 수 없을지를 묻지를 않나, 지나가던 도키치로를 붙잡고 정말로 동인도 제도와 서인도 제도 사이에 직항하는 항로가 없느냐 묻지를 않나,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었다.
“그럴 바에야 그냥 수에즈인가 클리스마인가 그 운하 공사에나 참여하시오. 그러면 되겠군.”
그러나 정작 꺽정이가 이렇게 들이대면, 대개는 우물쭈물하며 말을 돌리곤 하였다. 의욕과 장사 수완, 그리고 여차하면 바다에 목숨 바칠 각오는 다들 가지고 있었지만, 딱 하나, 장사 밑천만은 다들 부족하였던 것이다.
“솜씨 좋은 장인들 데려가고자 하는데 그것이나 좀 도와주시오. 값은 넉넉히 쳐 드릴테니.”
카를 5세에게서 뜯어낸 레가스피의 몸값을 내세우며 이렇게 말해도, 귀찮은 작자들을 쫓아내는 것 외에는 별 효험이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나 지났을까. 윈저 궁에서는 여전히 별 소식이 없었고, 시덥잖은 상인들이나 찾아올 뿐이었다. (다들 시덥잖아 보이는 것은, 코스탄티니예와 이탈리아를 먼저 거쳐오면서 꺽정이 일행의 눈이 너무 높아진 탓이기도 했다.)
그사이 심심해진 셀림은, 얼른 이 지루한 도시를 떠나자고 몇 번 꺽정이에게 이야기 던진 뒤, 저의 수행원들과 함께 런던의 몇 안 되는 볼거리나 보러 갔다. 간혹 재주 쓸만한 장인이나 그럴듯한 물건 만들어내는 공방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섭외할 생각이기도 했다. 꺽정이와 달리 오스만 황실의 이름을 거리낌없이 내세울 수 있었고, 또 사람들이 그 이름을 알아듣기 때문이었다.
이왕 이리 된 것, 저들도 기약 없는 궁궐로부터의 전갈 기다리느니 차라리 런던 시내 지리나 익힌 다음 장인들을 직접 납치하는 쪽이 더 낫지 않을까 - 이왕이면 몸값을 아끼고 싶었던 것이다 - 꺽정이와 흑의군 패거리가 진지하게 고민하던 차, 여왕이 윈저 궁으로 이어하여 그곳에 틀어박히는 바람에 졸지에 이 사절단의 시종 노릇을 하게 된 세인트 제임스 궁의 시종이 들어왔다.
그런데 뵙기를 청한다는 사람 이름을 물으니, 나오는 답이 조금 이상하였다.
“동인도 회사(East India Company) 사장···. 엘리자베스 튜더(Elizabeth Tudor)?”
“그, 그렇습니다.”
꺽정이 일행을 상대할 때도 그리 떨지 않았던 시종이 지금은 사시나무 떨듯 하고 있었으니, 필시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것일 테다. 허나 꺽정이는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고 저의 일행을 한데 모았다.
이 나라 국성(國姓)이 튜더이니, 저 사장이라는 자는 아마 종친 중 제법 위세 있는 대군쯤 되지 않겠는가. 여인이 임금도 하는데 수양대군 노릇 못할 것도 없었다.
‘천일의 앤(앤 불린)’이 사형당한 이래 ‘엘리자베스 아가씨(Lady Elizabeth)’로만 불리던 이가 당당히 튜더 가문의 사람을 자처한 것은 결코 가벼운 정치적 행보가 아니었고, 시종 또한 이로 말미암아 없던 수전증을 앓게 되었지만, 꺽정이야 알 바 아니었다.
곧 금발에 매부리코 두드러진 훤칠한 여장부가 보무당당히 문을 열어젖히며 들어왔다.
“그대가 임꺽정이로군요.”
“오, 마침내 서림 신세에서 벗어났··· 아니, 잠깐. 그 이름은 어찌 아셨소?”
한발 늦게, 눈앞의 처자가 저의 이름을 조선말 발음 그대로 불렀음을 깨달은 꺽정이가 놀라서 물었다.
“미리 탐문한 다음, 꾸준히 연습했지요. 무슨 발음이 그리 어려운지, 참.”
“허.”
고작 세 음절 이름만으로, 자신이 결코 상대의 사정을 넘겨짚고서 달려드는 얼뜨기 아님을 보였으니, 여간내기는 분명 아니었다.
“당연하지만, 동인도회사라는 것은 그저 핑계일 뿐입니다. 엊그제 만들어진 회사니까요. 하지만 공식적으로 오늘의 접견은, 엄연히 일개 상인과 외국 사절단 사이의 모임에 지나지 않음을 염두에 두어주시면 고맙겠네요.”
“공공연하게는 그냥 만나는 것이라. 알겠소. 하면 사사롭게는 무슨 뜻으로 찾아오셨소?”
“누명을 좀 써 주셨으면 합니다.”
“그런 장사는 안 하오.”
“우리 잉글랜드에 발을 내딛으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사정을 잘 모르시는 듯한데, 잠시 귀를 기울여주시면 제 말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금방 이해하실 것입니다.”
그러고서는 다짜고짜 저의 나라 사정을 털어놓는 엘리자베스였다. 명색이 대군쯤 되는 사람이 말하는데 그냥 한 귀로 흘리기도 무엇하여 꺽정이도 들었는데, 눈앞의 규수는 제법 말주변도, 재치도 있어 들을수록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허나 이야기 내용 자체는 썩 재미가 없고, 오히려 매우 심각한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언니를 언니라 부르지 못하는 신세였지만, 이 무렵에는 다들 말만 하지 않을 뿐 그가 다음 임금 될 것을 알고 있었다.
한때 만인의 동정과 사랑을 받았으나, 지금은 그 사랑 대신 그를 믿었던 이들로부터 경멸을, 처음부터 그리 믿지 않았던 이들로부터 증오를 받고 있는 메리 여왕은, 지난해의 가짜 회임 소동 이후로 완전히 그 위엄을 잃게 되었다.
그와 더불어 메리를 충실히, 다만 저의 생각하는 방식으로만 따랐던 심복들도 하나씩 세상을 떠났고, 여왕은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져 갔다.
“그러니 언니께는 미안한 얘기지만, 언니의 후사를 사람들이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그날이 언제 올지는 몰라도, 그리 머지 않았다고들 여기게 되었으니까요.”
엘리자베스는, 어렸을 적 저를 보살펴주던, 또 즉위했을 때 런던에 자신을 곁에 두고 입성하였던 나이 많은 언니를 생각할 때면 그날이 오지 않기를 신께 기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왕위를 생각하면, 얼른 그날이 와 언니는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고 자신은 바라던 자리에 오를 수 있기를 바라게 되기도 했다.
어차피 지금 잉글랜드의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더구나 순위로 따지면, 엘리자베스 바로 다음 순위는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였고, 그 메리는 지금 기즈 가문의 사람인 외숙부의 섭정을 받고 있었다.
그러니 성공회와 구교, 청교도를 막론하고 모든 잉글랜드 사람들은 엘리자베스가 왕이 될 것이라 믿었고, 또 그러기를 간절히 기원하였다. 그러지 않는다면 아직 성년도 되지 않은 스코틀랜드 여왕 겸 프랑스 왕비가 프랑스인 섭정과 함께 잉글랜드를 다스린다는 최악의 결과가 나올 것이므로.
“그렇지만 만에 하나, 언니께서 아들을 얻게 된다면 이야기가 매우 달라지지요. 설령, 이미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어디선가 몰래 구해오기라도 한다면···!”
“한다면?”
자신이 카트린이 메리에게 보낸 밀서의 내용을 그대로 읊었다는 것을 알 리 없는 엘리자베스는 해맑은 말투로 섬뜩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렇게 해서 언니께서 후계자를 얻게 되신다면, 어쩌면 나라에 이익이 될 수도 있겠지요. 저지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근거가 되고, 또 저지대 쪽에서도 스페인의 금고 신세가 되느니 차라리 다른 군주를 모시려고 할 테니까요.
그렇지만 우리 잉글랜드 교회와 소위 청교도들은, 스페인 피를 이은 후계자가 저들의 안전을 보장해주리라 믿지 않을 거에요. 이미 지금까지 언니 손에 탄압당한 것도, 또 언니의 이름 빌린 이들의 손에 탄압당한 것도 있었으니까요. 더구나 그렇게 어디선가 구해온 아이가 왕의 핏줄 이은 이들보다 뛰어날 리도 없고요.
그리 되면, 뭐, 그 후계자를 지지하는 이들과 저를 지지하는 이들 사이에서 나라가 반으로 쪼개지다시피 하겠죠.”
가만 듣던 이탁오가 치고 들어왔다.
“아, 그래서 저희에게 대신 누명을 써달라 하시는 것이로군요.”
“그렇습니다, 박사님. 미리 그렇게 소문을 내어버리면, 설령 언니께 우리 잉글랜드의 안녕을 신경쓰지 않는 누군가 못된 충동질을 한다 하더라도, 언니께서 성급한 결정을 내리시진 못할 테니까요.”
외국인 사절들을 부려 가짜 후계자를 몰래 구해오게 한다는 터무니없는 소문. 그러나 한 번 그런 소문이 돈다면, 그리고 당사자인 외국인 사절들이 그 소문을 제대로 해명하지 않고 떠나버린다면, 여왕은 더 이상 그 비슷한 수를 쓸 엄두도 못 내게 될 것이다.
“그 대신 임 당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 힘 닿는 한 모두 들어드리도록 하겠어요. 물론 보시다시피, 우리 잉글랜드의 나라 사정이 지금 썩 좋지는 않아요. 믿을 것이라곤 외국과의 교역 뿐이니, 옛날처럼 양모만 팔 생각이 아닌 이상에야 그 어떤 상인도 교역의 밑천이라 할 수 있는 솜씨 좋은 장인을 내놓으려 하진 않겠지요. 하지만 제 이름을 내세운다면 제법 많은 장인들을 모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해서, 누명을 쓴 다음 도망치듯 모아들인 장인들과 함께 나라를 떠나시는 것이지요. 저는 제가 원하는 것을 얻고, 임 당수께서도 원하는 것을 얻고. 만족스러운 거래 아니겠어요?”
끝까지 또박또박 할 말 다 한 엘리자베스가 말을 마치니, 마치 그가 궁의 주인인 것처럼 시종들이 나아와 그에게 물인지 무엇인지 모를 음료를 바쳤다.
(그것을 본 꺽정이는, 이 땅에 차를 팔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하도 서림이라 불리다 보니 잠시서림처럼 생각하게 된 듯하였다.)
이탁오, 도키치로 두 사람과 잠시 수군거리던 꺽정이가 이내 말문을 열었다.
“좋은 이야기 고맙소. 다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는데···”
“무엇인가요?”
“그 누명이라는 것 말이오. 실은 우리가 같은 내용의 제안을 이미 임금님께 그대로 전하였다오. 그 이야기 들으신 다음에 지금 그 윈저 저택인지 궁궐인지에 틀어박혀서 마음고생을 하고 계시지만.
헌데 우리 대군대감 말씀을 듣자하니, 대감께서만 없어지면 되는 문제인 듯하오. 그리 되면 남의 나라 여왕 겸 왕비가 이 나라 차지하는 것보다야 실제 뿌리가 무엇이든 이 나라 본토박이가 임금 하는 것이 낫다고들 여길 테니.”
“하하, 임꺽정 공, 농담도 참.”
엘리자베스가 깔깔 웃으며 무릎을 쳤다.
그런데 웃고 나서 보니, 꺽정이가 지긋이 엘리자베스 저를 쳐다보고만 있는 것 아닌가.
“농담 맞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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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영국 역시 종교개혁으로 인한 진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다만 신교 대 구교의 대립이 벌어진 다른 국가들과 달리, 헨리 8세의 이혼 문제를 계기로 불거진 카톨릭 교회 대 성공회의 대립이 선행했고, 그 뒤에 청교도까지 가세하면서 훨씬 복잡한 양상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흔히 ‘피의 메리(블러디 메리)’로도 알려진 메리 1세는 이러한 종교개혁과 당시 유럽의 복잡한 국제정세에 휘말려 불행한 삶을 보내야 했고, 남편인 펠리페 2세에게도, 또 그 별명이 보여주듯 국민들에게도 사랑받지 못하였습니다. 헨리 8세에 의해 어머니인 아라곤의 캐서린이 엄청난 고초를 당했고, 메리 역시 앤 불린의 지시로 이복동생 엘리자베스의 시녀 노릇을 하는 굴욕을 당하는 등, 어려서부터 많은 불행을 겪은 메리는, 즉위 초에는 그를 동정하는 여론 덕에 상당한 인기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당시 에스파냐 왕세자이자 오촌 조카였던 펠리페와의 국혼 추진으로 이러한 인기는 꺾이기 시작합니다. 구교 측의 최강국인 에스파냐의 혼인동맹은 잉글랜드의 안보에는 도움이 될 수 있었지만, 자칫 잉글랜드가 그대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로 편입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우려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에스파냐는 자국에 비해 약소국인 잉글랜드에 대해 큰 배려를 해주지 않았고, 1557년 기즈 공작의 급습으로 잉글랜드 최후의 유럽 본토 영토인 칼레를 상실한 뒤에도 이를 되찾기는커녕 프랑스의 영유권을 인정해주는 행보를 보였습니다. 철저한 중상주의로 일관한 에스파냐의 경제정책은, 잉글랜드가 신대륙의 금은으로 이득을 얻기는커녕 사략함대조차 마음대로 운용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더욱 많은 불만을 낳았지요. 더구나 메리 여왕은 독실한 카톨릭 교도로서 성공회와 여타 개신교 교인들에 대한 탄압을 가했고, 이는 가뜩이나 떨어지고 있던 지지를 더욱 떨어뜨리게 되었습니다.
두 차례에 걸쳐 벌어진 상상임신 소동은 메리 여왕의 권위를 더욱 떨어뜨렸습니다. 당시 메리는 월경이 멈추고 배가 불러오는 등, 회임의 징후를 여럿 보였고, 산달이 가까워지자 건강한 왕자를 출산하였다는 소문이 런던에 돌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잉글랜드 국민들뿐 아니라 펠리페 측에서 확인을 위하여 파견한 대사들 역시 이를 증언하였는데, 결국 임신의 징후만 있었을 뿐 실제로 임신을 하지는 못했다는 것이 뒤늦게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이 두 차례에 걸친 상상임신은, 메리를 아끼고 보살폈던 그의 어머니 아라곤의 캐서린이 후계를 생산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헨리 8세의 총애를 잃고 끝내 학대에 가까운 고초를 치르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던 개인적 경험, 펠리페에 대한 사랑의 감정, 그리고 후사를 생산하지 못할 경우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나 성공회에 우호적인 이복동생 엘리자베스가 대를 이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 등 복합적인 원인이 중첩되어 스트레스로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추정됩니다.
이미 당시에 나이가 마흔에 근접한 메리 여왕이었기에, 이러한 상상임신은 그가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졌고, 큰 상심으로 인해 건강까지 무너진 메리는 결국 엘리자베스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사망하게 됩니다.
한편,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는 것을 본 잉글랜드는 헨리 8세 시기부터이러한 시류에 동참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메리와 그 뒤의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해서도 계승되었고, 잘 알려진 동인도회사의 설립 이전에도 독점무역 면허를 얻은 모스크바 회사(Muscovy Company, 1555)와 레반트 회사(Levant Company, 1592) 등의 설립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활발한 기업가정신은, 영국인들의 우수한 자질보다는 그렇게라도 해야 경제적으로 이익을 취할 수 있는 팍팍한 당대의 상황에 말미암은 것이었지요. 이러한 노력은 그래도 제법 성과를 거두어, 엘리자베스 여왕 시기에 오스만 투르크와의 교역이 시작되어 제법 쏠쏠한 이익을 내게 되고, 이어서 17세기 초중반에는 네덜란드와 함께 포르투갈이 차지하고 있던 동방무역 지분을 나누어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네덜란드까지 꺾은 뒤로는, 마침내 우리가 아는 대영제국으로의 행보가 본격화되게 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