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151화 (151/259)

45. 있음이냐 없음이냐 (2)

잉글랜드 여왕 메리는 오늘도 힘겹게 눈을 떴다. 아직 마흔도 지나지 않았지만, 벌써 예순은 넘긴 듯한 느낌이었다.

맑은 템즈 강 - 런던보다 이곳 윈저가 상류에 있기 때문이었다 - 의 풍광도, 가을을 맞이하여 색을 바꾸는 정원의 높고 낮은 나무들도 여왕에게 평안을 주지는 못하였다.

시종을 부르려다, 문득 사람을 만나기 싫어져 손수 창문을 열었다. 강을 따라 부는 제법 쌀쌀한 바람이 침실에 들어와, 마치 겨울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궁에서 쫓겨나던 어머니. 그 어머니를 쫓아내고 자신을 학대하였으나, 끝내 자신도 같은 이유로 목숨을 잃게 된 앤 불린.

그 비극을 눈앞에서 보았던 메리는 어떻게서든 아이를, 그리고 후계자를 얻어야 함을 마음으로도, 또 머리로도 알았다. 그러나 온 마음과 온 몸을 모두 쏟았기 때문일까. 아무리 애를 써도 사랑의 헛수고는 한여름 밤의 꿈으로 끝날 뿐. 사람들은 그가 더는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말했고, 그의 남편 펠리페마저 그것을 믿는 듯했다.

가혹한 세상이여, 어찌하여 유약하다는 여인을 임금으로 세우고, 이어서 그가 여인으로도, 임금으로도 홀로 설 수 없도록 만든다는 말인가.

동방에서 찾아온 사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국왕의 딸이자 지금의 국왕이며, 나라를 위해 결단을 내려야 하는 사람임을 가능한 한 무례한 방법으로 깨우쳐주었다.

“폐하, 기침하셨습니까.”

인기척을 들은 시종이, 문 밖을 지키고 있다가 한참 지나서야 목소리를 내었다.

“아직은 일어나고 싶지 않구나.”

힘겨운 답이 문을 통해 돌아간다.

그러나 이미 눈은 뜨였고, 몸은 침대를 떠났다. 곧 저 문이 열리고, 궁 밖의 세상이 함께 밀려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시종들이나 신하들 - 그들의 충성은, 오로지 그들의 새 주군 엘리자베스에게 자신이 왕위를 곧 물려주리라 믿기에 아직 겉으로나마 메리에게 남아 있었다 - 이 세상의 소식을 품고 그에게 나아올 때마다, 메리의 머릿속에는 동방의 사절들이 제게 전한 제안이 떠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폐하, 런던의 세인트 제임스 궁으로부터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동방 사절들의 동향에 대하여 긴히 아뢸 바가 있사온데···”

“런던이 불타고 있다더냐? 그만큼 급한 일이 아니라면, 한두 시간은 더 미루어도 될 것이다.”

말하면서도 스스로 비웃는 메리였다. 오직 결정하는 것을 더 뒤로 미루는 일에만 이토록 단호하니, 우스꽝스럽지 않은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어린아이를 데려다, 펠리페와 자신의 아이로 속이라고 프랑스의 카트린은 권했다. 지난해 거짓 회임 소동이 실제로는 거짓이 아니었고, 무사히 아이를 낳았으나 워낙 병약하여 함부로 이를 공개하지 못하였다고 주장하라는 것이었다.

‘북쪽에는 정직한 사내와 여인만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프랑스와 그 남쪽에서는 군주의 뒤를 잇는 이가 실제로는 그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오.

만일 모든 군주들이 그 계보대로 정직하게 피를 이었다면, 지금쯤 에우로파의 군주 중 열에 예닐곱은 그대의 수양아들 샤를(카를로스)처럼 병든 마음이나 몸을 지니고 있을 것이오.’

짝사랑하던 남편을 죽인 사내로부터 오히려 크나큰 도움을 받은 이후로, 가뜩이나 좋지는 않던 성격이 더욱 비뚤어진 카트린은 메디치 집안 사람답게 문장 한 줄마다 냉소를 담았다. 어려서부터 가족 사이의 일로 많은 고통을 받은 메리를 그런 냉소로써 더욱 괴롭게 하는 것이 그의 목적 중 하나였다면 - 카트린은 어쨌든 프랑스 왕실의 사람이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 이는 잘 달성되었다 할 만하였다.

그러나 그 날카로운 문장 이상으로, 그 안에 담긴 내용이 더욱 그럴듯하다는 것이 더욱 메리의 마음을 후벼 팠다.

어차피 튜더 가문의 왕통은 메리 본인 또는 그 다음 엘리자베스의 대에 끊어질 수밖에 없었다.

미워하려 해도 도저히 미워할 수 없을 만큼 동생을 잘 아는 메리였다. 메리가 아는 엘리자베스는, 자신과 달리 원한다면 언제든 주변에서 사내를 취할 만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결코 한 사내만을 믿고 그 몸을 맡기려 하지는 않을 터였다. 겉으로는 활달한 성품을 드러내지만, 속으로는 메리 자신만큼이나 아픔을 안고 있는 동생이었으므로.

그렇다면 합스부르크나 스코틀랜드에 이 나라 왕실을 넘기느니, 차라리 이 땅의 고아를 아무나 왕자로 세우고, 부디 그가 자리에 합당한 품성과 자질을 갖추기를 기원하는 쪽이 더 나은 선택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는 왕위를 물려받을 기대에 가득 찬 엘리자베스, 그리고 메리를 아끼지는 않아도 적어도 남편으로서의 의무는 다하려 노력한 펠리페의 등에 단검을 찔러넣는 것과 같았다.

스페인 측에서는 즉시, 이 ‘왕자’에게는 잉글랜드 한 나라를 제외한 그 어떤 계승권도 없음을 주장할 것이요 - 저지대의 계승은, 사실상 잉글랜드가 합스부르크령이 될 것을 두려워하는 잉글랜드 국내 여론을 달래기 위한 허울일 뿐이었다 - 최악의 경우 파혼과 전쟁까지 감수해야 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폐하의 관심을 급히 요하는 사안이라 합니다. 부디 시녀들이 의관을 갖추는 것을 돕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이익과 이익이 머릿속에서 대치하고, 감정과 감정이 마음속에서 갈등한다.

국왕으로서의 메리는 어떻게든 결단을 내려야 했다. 메리 튜더라는 한 사람은, 그 결단을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현실에서 도피할 수는 없는 법. 왕관의 무게는 남이 벗길 때는 너무나 쉽게 흘러내릴 만큼 가볍지만, 스스로 벗으려 할 때는 한없이 무겁게 어깨를 짓누르기 마련이었으므로.

“알겠다. 시녀들을 들여보내라.”

그리고 몇 분 뒤, 여왕으로 돌아온 메리는 어찌하여 이러한 급보를 더 빨리 전하지 않았느냐며 신하들을 책망하였다.

공식적으로는 해트필드 하우스(Hatfield House)에서 근신하고 있어야 할 엘리자베스가 검소한 옷차림으로 그곳을 빠져나가 런던으로 향한 뒤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런던을 봉쇄해라! 나라의 미래가 걸린 일이다!”

그리고 몇 초만에 다음 조치를 내렸다. 지금 런던에 있는 자들 중, 무지막지한 짓을 벌일 만한 작자는 뻔하였던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디를 가든 사고를 치고 다니는 것으로 벌써 전 유럽에 악명이 자자한 동방 사절들을 세인트 제임스 궁에 남겨놓은 것부터가 화근이었다.

“세인트 제임스 궁에 병력을 보내라! 그리고 림 경과 그의 동행들이 발견되는 즉시 체포하라!”

메리 여왕의 지시에 따라 런던이 발칵 뒤집히기 전날.

“자비로우신 알라와 그분의 예언자께 맹세코, 내 살면서 그대처럼 주변에 파란을 몰고 다니는 이는 본 적이 없소. 아니, 어떻게 그새를 못 참고 이런 짓을 벌인다는 말이오?”

런던의 몇 안 되는 구경거리를 모두 보고 돌아온 셰자데 셀림이 꺽정이를 원망하며 말했다. 그러나 그 원망은 지금껏 꺽정이가 당해왔던 것에 비하면 솜털과도 같았으므로, 강철 같은 낯짝에 닿자마자 고대로 튕겨나갔다.

돌아오자마자 생면부지의 귀족 여인이 그를 맞이하지를 않나, 그 여인이 알고 보니 곧 국왕의 자리에 오를 것이라 모두가 이야기하는 엘리자베스라지를 않나, 여기서 무엇하고 있느냐 물었더니 감금당하고 있다 하지를 않나.

“여왕 나리께서 소식을 들으시면 아마 이곳 도성을 다 뒤엎으려 하시겠지. 뭐, 그래도 어떻게든 빠져나갈 방법을 마련하고 있으니 걱정 마시오.”

“그랬습니까?”

‘방법을 마련하고 있다’라는 말에, 금시초문이었던 이탁오와 도키치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떠오른 것이 없다면 얼른 궁리를 하시오들. 애초에 이러려고 데려온 것 아니겠소.”

“모르고서 따라온 건 아니지만, 들을 때마다 임 당수는 참 놀랍다 싶소이다.”

일 벌리는 것은 저의 몫이요, 대책 마련은 남의 몫이라. 하루이틀 보는 뻔뻔함은 아니건만 여전히 탄성이 나오는 논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말이 감금이지, 앞서 앉아 있던 푹신한 의자에 앉아 돌아가는 상황을 구경하고 있던 엘리자베스는,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돌아가는 모양새가 얼추 알 만하여 웃음을 터뜨렸다.

‘동방의 우환’ 임꺽정과 그 일당,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더 일찍 동방의 우환 소리를 들었던 투르크인들의 왕자 셀림 사이에서 오가는 이야기가, 바깥에서 ‘동방 사절단’이라고 했을 때 상상하는 것과는 너무나 달랐던 것이다.

”정말 이대로 달아날 심산이라면, 들키지 않고 부두까지 가서, 여기저기 흩어진 뱃사람들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배는 튀르크 배도, 임 당수의 배도 아니요, 그저 칼레에서 빌린 것이니, 조용히 사람을 모으고 출항하는 것만 해도 여간 큰일이 아닐 테지요.”

골치아파 하는 동양인들 모양새를 슬쩍 놀리며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돌아가는 형세로 볼 때, 저를 정말로 겁박하거나 해코지하기보다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속임수에 써먹을 공산이 더 커보였던 것이다.

“글쎄. 그건 대감께서 밑바닥 잡배들 마음을 잘 몰라서 그런 것 아니겠소? 어느 나라를 가든, 돈 한푼에 목숨 거는 무뢰배들은 있기 마련이오. 그런 작자들 모아서, 우리가 타고온 배 말고 아무 거나 잡아타고 건너편 에스파냐 땅까지만 가면 될 일이오. 몸값 좀 두둑하게 받아서 나누어 가지자 하면 금방 따라오지 않겠소?”

엘리자베스 말을 들은 꺽정이가 넉살 좋게 섬뜩한 대꾸를 하니, 이미 한 번 꺽정이 말을 농담으로 치부하였다 큰 코 - 아버지의 매부리코를 물려받아 정말로 컸다 - 다친 엘리자베스는 다시 자신의 판단을 재고해보게 되었다.

“당수, 제발 긁어 부스럼 좀 만들지 마십시오. 듣자하니 우리가 무사히 이 나라를 떠나려면, 여기 엘리자베스 대군 본인의 마음을 돌리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대군(大君)이란 곧 프린스(Prince)요, 이는 공주(Princess)와 통하는 말이라, 그 호칭의 내력을 들은 엘리자베스는 은근히 저를 높여준다 생각하여 이 와중에도 기분이 슬쩍 좋아졌다.

“민심은 이미 저 한 사람에게 쏠려 있으니까요. 정말로 이 나라를 떠나 영영 돌아오지 않을 심산이 아니고서야 그런 무엄한 음모에 함께하려 하진 않을 것입니다.”

엘리자베스가 근거 있는 자신감을 내보였다.

소위 신앙의 자유에 대한 소식은 로마에서 바로 런던으로 전해져, 지금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까지도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이 공의회를 통하게 되면 어떻게 바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교묘한 말장난이 어떤 힘을 지닐 수 있는지, 이미 헨리 8세의 치세를 겪으며 많은 잉글랜드 사람들은 체감한 바 있었다.

그리고 공의회에 제대로 된 힘을 가할 수 있는 두 나라, 프랑스와 스페인이 결코 약소국 잉글랜드의 편의를 보아줄 리 없었다.

이 땅의 세 교파 모두, 그러므로 이 불확실한 미래에 맞설 수 있는 왕을 원했고, 이미 인망을 잃은 메리 대신 엘리자베스에게 모든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러면 결국 꼬드기는 수밖에 없겠군.”

“저를 유혹하겠다는 건가요?”

엘리자베스가 다음 국왕으로 유력해지면서, 동시에 그 혼처에 대한 관심도 다시 높아졌다. 그러나 여기서 ‘꼬드긴다’라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기에 엘리자베스는 다시 흠칫 놀랐다. 지금껏 임꺽정도, 그 동료들도 어째서인지 자신이 여인의 몸으로 이곳에 홀로 온 것을 딱히 기이하게 여기지 않았기에 깜빡하고 있었지만, 엘리자베스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엄연히 시커먼 사내들 아니던가.

그런데, 엘리자베스가 저 혼자 영 불쾌하고도 무서운 상상으로 빠지려는 차, 오히려 임꺽정이 더욱 대경(大驚) 하였다.

“큰일날 소리 하지 마시오. 함부로 그런 얘기 꺼냈다가 만에 하나 조선까지 흘러들어가게 되면 나는 안사람이랑 장모님께 죽소. 마포나루에 내리자마자 미간에 바람구멍 뚫릴라.”

“아니, 림 경, 결혼을 다 하셨어요?”

“그게 무슨 물음 같지도 않은 소리요? 여기 상투 튼 것 안 보이오?”

“제가 동양의 풍속을 얼마나 알겠어요. 아니, 그보다, 프랑스 국왕도 죽이고 다니는 림 경을 죽일 수있는 아내라면··· 중국 황녀하고라도 결혼한 것인가요?”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천자 어르신께 따님이 있는지도 모르겠거니와, 설령 있다 하더라도 아비 생김새를 생각하면 그리 잘나진 않았을 게요. 우리 안사람이 훨씬 낫지.”

안사람 무서워하면서도 은근히 자랑하고, 또 그러면서 저의 주군 - 이라 주장하는 - 중국 황제를 숨 쉬듯 모욕하는 꺽정이 반응에, 또 한 번 엘리자베스는 웃었다.

“그럼 무엇으로 제 마음을 돌리겠다는 것인가요? 장담컨대, 어지간히 거창한 것을 제시하지 않는 한, 제가 ‘뜻대로 하세요’ 하며 당수님 말 따르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 조금 생각할 겨를을 주시오. 대감 마님 홀릴 만한 뭔가를 만들어 올 테니.”

“무엇을 하시든, 서두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진짜 주인 대신 객들이 주인 노릇하고 있는 세인트 제임스 궁 사람들은, 입은 근질거리고 눈은 정처없이 좌우로 흔들지언정, 엘리자베스 입에서 윈저 궁에 사람 보내라는 말 떨어지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엘리자베스가 외국 사절들을 찾아온 뒤 떠나지 않고 (또는 못하고) 있음을 발설치는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해트필드 하우스 쪽은 이야기가 다르지요. 분명 제가 저녁에는 돌아올 것이라고 약조하고 떠났으니까요. 이래 봬도 공식적으로는 일거수일투족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몸이랍니다.”

세인트 제임스 궁에 어김없이 밤이 찾아왔다. 주인 없는 궁에서 유일하게 손님과 공주/차기 국왕/인질로 붐비는 한쪽 구석에는 여전히 불이 훤하게 켜져 있었지만.

“서방 여인들은 모두 내 아내와 같은 줄 알았소. 이제 보니 저 엘리자베스와 같은 성정의 사람 대신 내 아내가 나의 곁으로 오게 된 것은 실로 신의 축복이 아닐 수 없더군.”

꺽정이의 겁박 솜씨를 감안했을 때, 엘리자베스가 금방 뜻을 꺾고 저의 언니이자 국왕에게 이 이방인들이 하자는 대로 해 달라 청하는 글이라도 쓸 줄 알았던 셀림이 툴툴댔다.

“팔불출 노릇은 관두고 얼른 여기 서명이나 해주시오. 술친구 청 한 번 들어준다 생각하시고.”

저도 앞서 엘리자베스 앞에서 명희 자랑한 주제에, 남이 안사람 자랑하는 것은 여지없이 타박하는 꺽정이였다.

“정말로 이것으로 저이의 마음을 돌릴 수 있겠소?”

셀림이 깃펜을 들며 물었다.

“못 돌리면 뭐, 미친 체하고 보쌈이라도 해야지. 탓하려면 친구 잘못 사귄 본인을 탓하시오.”

“내가 원해서 사귀었나.”

“싫다고도 안 했잖소.”

꺽정이 패거리와 함께 다니다 보니, 어느새 근묵자흑 이치에 따라 꺽정이며 이탁오며 하는 작자들에게 조금은 물든 셀림이었다. 그러나 물만 조금 든 사람은 먹 그 자체인 자를 이길 수 없는 법. 결국 종이 하단 빈자리에 저의 투으라(tugra, 서명)를 써넣었다.

잉크가 마르자마자, 꺽정이는 엘리자베스 있는 쪽으로 향했다.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이탁오와 열심히 떠들고 있었다.

“··· 해서, 리처드 3세는 끝내 한판 싸움으로 목숨을 잃고, 저의 조부 되시는 헨리께서 헨리 7세로 왕위에 오르셨답니다. 할아버지를 모셨던 늙은 신하들에 따르면, 리처드는 도망치다가 낙마하고서는,

‘말, 말을 다오! 말을 주면 내 왕국을 내주리라 (My kingdom for a horse)!’

외쳤다더군요.“

“허, 여간 재밌는 이야기가 아니로군요. 근래 곤극(崑劇)이라고, 이야기에 곡조를 붙여서 그럴듯하게 꾸며서 극으로 만드는 것이 강소성에서 유행한다는데, 그 이야기는 제법 재밌는 곤극이 될 법합니다.”

“우리 런던에도 뛰어난 극작가와 배우들이 많은데, 아직 이 이야기를 극으로 꾸밀 만큼 재능 있고 대담한 이는 없더라고요. 만약 그런 사람이 나온다면 언제든 이런 비사(秘史)까지 슬쩍 전해주어서 극으로 꾸며보라 할 텐데.”

워릭셔의 작은 마을에 사는 셰익스피어 씨가 윌리엄이라는 아들을 얻기까지는 제법 여러 해가 남아 있었으므로, 엘리자베스의 말이 실현되려면 아직 많은 세월이 남은 셈이었다.

“그나저나, 그 리처드조차 왕국에는 말 한 마리 값은 매긴 셈인데, 대체 종이 몇 장 내밀며 제게 왕국을 포기하라 하는 우리 임꺽정 당수님은 무슨 생각이실까요.”

어느새 꺽정이를 슬쩍 바라보며 입꼬리 올리는 엘리자베스였다.

“어찌 알고 계셨소?”

“험난하게 살아오다 보니 느는 건 눈치뿐이라서요.”

“자, 이것들 보시오.”

옆의 책상 위에 꺽정이가 들고 온 종이 여러 장을 내려놓았다.

“계약서인가요?”

“그 비슷한 것이오. 보다시피 여기 이름이 비어 있는데, 이곳에 대군 마님 존함만 슬쩍 써넣으면 되오.”

이름 빈 종잇장이니, 공명첩(空名帖)이라 할 수 있었다.

셀림의 수행원들이 번역하여 옮겨놓은 각 종잇장 옆의 라틴어를 금방 읽은 엘리자베스가 놀라 되물었다.

“아니, 진심으로 이런 제안을 하시는 것인가요?”

“암만 나라가 작고 가난하다 해도 나라는 나라잖소? 그런 나라 임금 자리 내려놓게끔 하려면 그럴듯한 이득을 내세워야지. 보기보다는 나도 양심은 있는 사람이라오.

그리고, 솔직히 이 나라 올 때까지는 별로 필요한 줄도 몰랐는데, 이제 생각해보면 누군가는 이 에우로파 쪽에 남아서 우리 편 해주어야 하지 않겠소. 그러면서 짭짤하게 가운데서 챙길 것은 챙겨먹고, 개중 조금은 떼어서 우리에게도 바쳐 주고.

대군 마님만큼 욕심 많고 그 욕심 감당할 깜냥도 뒷받침 되는 사람이 드물지 않겠소?”

그 ‘공명첩’ 상단에는 엘리자베스가 이곳 런던으로 오는 길에 급조한 회사 이름인 동인도 회사가 떡하니 적혀 있고, 사장의 이름만 비어 있었다.

그리고 한 장 한 장 내용을 살피니, 실로 그 규모에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는, 어디 보자··· 수에즈 운하 건설의 현장감독?”

“운하의 비용은 이탈리아에서 대고, 사람은 에기토인가 이집트인가 그곳의 맘루크 나리들이 댈 것인데, 사람 심리가 심리다 보니 누구 하나쯤은 가운데서 농간을 부리지 않겠소. 머나먼 나라에서 이해 아니 얽힌 이들 데려오면 능히 감독할 수 있겠지.”

“하기야, 맘루크들은 몰라도, 분명 베니스(베네치아) 사람들은 가운데서 못된 짓을 할 법도 하지요. 베니스의 상인에 대해 믿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을 믿을 수 없다는 점 하나뿐이라고 하니까요···

그리고 이건 투르크와의 교역권이로군요.”

“내게는 그런 권한이 없소. 그건 그저 ‘숭고한 문’ 앞으로 보내는, 교역을 허가하는 것을 검토해달라는 추천장일 뿐이오.”

입 삐죽 나온 셀림이 옆에서 첨언했다.

“하지만 장엄한 술탄 쉴레이만 폐하의 아드님께서 써주시는 추천장이지요.”

그 외에도, 잉글랜드인들 중 오직 동인도 회사의 ‘ (빈 칸) ‘ 사장과 그 대리인에게만 교역을 허하게끔 해 달라는, 천자에게 올릴 상소문 등.

각종 양식에 맞춰 꾸민 공명첩이 엘리자베스 눈앞에 놓여 있었다.

그저 엘리자베스 자신을 현혹시키기 위한 말장난, 아니, 서류 장난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엘리자베스 자신이 쓰기에 따라서는, 어쩌면 나라 하나보다도 더 가치 있는 무언가를 일으킬 수 있는 기반이 될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금 이상한 종잇장도 하나 있었다.

“이건 무엇인가요? 민주당?”

“아, 내가 사실 천자의 대리인 이전에도 소소하게 하는 장삿일이 있었다오. 우리 당 아래에 사업당이라고, 그대들 말로는 그, 콤파니인가 컴퍼니인가로 옮길 수 있겠는데, 동인도 회사를 그 지부로 삼는다는 뜻이오. 이래 봬도 우리 당과 그 아래의 자유민주당이 대국 동쪽 바다의 교역은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거든.

그러니까 이 공명첩은, 그대들 말로 하면 사장이 직접 보증하는 진품인 셈이오. 자, 어찌하시겠소?”

엘리자베스의 총명한 머릿속에서, 이 모든 것에 다 서명을 한다고 가정했을 때의 앞날이 금방 그려졌다.

지금껏 엘리자베스는, 이 나라가 처한 어려움을 고려했을 때 오직 자신만이 나라를 제대로 이끌 수 있다 생각해 왔다. 언니 메리보다 못하기도 어려운 일이요, 또 엘리자베스 자신이 아니라면 대안이라고 해보아야 스코틀랜드의 메리 스튜어트 뿐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누군가 이 나라를 제대로 이끌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런던과 다른 도시들로 밀려드는 빈민들, 농지의 소출이 늘어나는 것 이상으로 늘어난 인구로 인해, 약간의 흉작만 찾아와도 금방 널뛰기하는 물가와 고통받는 서민들.

투자자를 찾지 못해 솜씨를 발휘하지 못하는 장인들. 이미 수익이 나는 판로는 모두 선점당해, 어쩔 수 없이 북극해의 험난한 얼음 바다까지 나아가야 하는 상인들.

이들 모두를 돕는데, 굳이 왕이 필요할까?

반대로 이들 모두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쩌면 국왕보다도 더 훌륭하고, 또 더 영향력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엘리자베스는 눈앞의 임꺽정을 응시하였다. (그 시선에 어린 속내 모르는 꺽정이는, 정말로 이러다가 자신이 만리타향에서 다른 처자와 눈 맞았다고 소문 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하며, 흑의군들을 제대로 단속할 마음을 품었다.)

눈앞의 사내가 이미 그것을 하고 있지 않던가? 황제의 대리인이라는 그 직함을 제대로 된 경로로 얻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내세워 이곳저곳 난장판을 만들고 다니면서도, 결코 어떤 사익이나 재물, 사치를 노리지는 않았다.

딱히 청렴하거나 욕심이 없어서는 아닐 것이다. 그의 성에 차지 않는 너무나 작은 것들이기에 무시할 뿐.

그러므로 아무리 보아도 고작해야 시정잡배에 불과한 듯한 임꺽정은, 거리낌 없이 투르크의 술탄과 그 아들을 상대하고,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헤집고 다녔으며, 지금도 그런 소란을 몰고 다니는 주제에 저의 앞에 당당히 서서 왕좌 대신 더 재밌는 다른 일 해보자고 저를 꼬드기고 있었다.

‘나라고 못할 것도 없지 않은가?’

꺽정이에게는 짧았지만, 엘리자베스에게는 길고도 길었던 고민 끝에, 끝내 결론이 내려졌다.

“좋아요. 이만하면 납치당할 만한 값이 되겠네요. 거기, 펜 좀 주시겠어요?”

그리하여 신생 동인도회사는, 간판만 내건 지 사흘이 채 지나지 않아 일본 자유민주당에 이어 두 번째로 조선국 민주당의 사업당 계열사가 되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런던으로 병력을 보낼 것을 지시한 메리 여왕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은 언니의 행복을 위해, 또 자신의 행복을 찾기 위해 잉글랜드를 떠나고자 한다는 엘리자베스 명의의 편지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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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변방이었던 영국이 16세기를 기점으로 빠르게 성장하며, 산업혁명을 이루어내고 대영제국을 건설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많은 설명이 존재합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러한 발전이 거대한 장구지계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여러 역사적 우연과 잘 짜여진 고식지계의 복합적 작용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입니다.

농업생산성 증가와 인구 증가, 그리고 양모 수출의 증가는 도시 빈민의 수를 늘렸고, 헨리 8세 치세 하에서 높아진 무역의존도는 경제 전반의 불안정성을 높였습니다. (하필 메리 여왕이 즉위한 직후 악기후의 연속으로 인해 가뜩이나 높던 물가가 더 높아지고, 양모 수출을 통한 소득은 폭락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여러 역사적 우연과 엘리자베스 1세 및 그 정부의 현명한 - 그러나 상술한 것처럼, 결코 백년대계는 아니었던 - 정책으로 인해 이러한 위기는 곧 기회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도시 빈민의 증가는 곧 공장제 수공업에 필요한 값싼 인력을 제공했고 (런던의 실질임금은 16세기 전체에 걸쳐 30~40% 감소합니다.), 영국 상인들은 보다 안정적이고 수익성 좋은 시장을 구하기 위해 모스크바와 시리아, 인도, 그리고 일본까지 나아갔습니다.

작중 초반에 갑자기 언급되는 메리의 (법적) 아들 돈 카를로스는, 펠리페 2세의 첫 아내인 포르투갈 공주 (겸 사촌동생) 마리아 마누엘라 소생의 아들이었습니다. 합스부르크 왕조는 근친혼으로 악명이 높았는데, 특히 카를 5세를 배출한 에스파냐 압스부르고계는 더욱 그 성향이 심했고, 근친혼에 따른 유전적 장애도 훨씬 심하게 발현되었습니다. 충동조절장애를 비롯해 다양한 정신질환 증상을 보인 돈 카를로스는 그 중 하나였지요. 아버지 펠리페가 지극정성으로 양육했음에도 불구하고 카를로스는 갈수록 비뚤어져 갔고, 그의 기행 역시 단순한 폭력에서 갑자기 신교로 개종했다고 선언하고 저지대의 국왕 자리를 노리는 등 유럽 전체 차원의 민폐로 악화됩니다. 결국 펠리페는 아들을 감금하기에 이르렀고, 1568년 유폐된 탑 안에서 카를로스는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되지요. 그 뒤 에스파냐의 왕위는 펠리페가 (오촌 조카딸인) 오스트리아의 안나와의 사이에서 얻은 펠리페 3세에게 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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